중국의 식(食)문화지리교육과 03513014 유지윤중국은 4대문명의 발생지이며 세계 3대 요리(프랑스, 중국, 터키)의 하나로 유명하다. 광대한 토지와 더불어 다양한 식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음식 문화가 발달하였다. 백성이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섬긴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사람들은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 되어지는 의·식·주 중에서 식을 가장 우선적으로 꼽을 만큼 음식에 대한 관심이 크다.이번 레포트에서는 중국의 음식문화 속에 나타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특색을 알아보고 이 음식문화의 발전이 중국의 어떠한 면에서 파생되었는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의 에티켓과 금기사항 등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중국 식문화의 특징가장 먼저 중국의 식문화의 특징은 중국 음식은 요리중심이며, 주식과 부식의 구분이 없고, 수천 년의 역사와 광대한 면적을 가지고 있어 각 지역의 독특한 재료와 기후풍토로 인해 지방마다 독특한 식문화가 발달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황실과 민간의 합작요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음식은 황실에서는 황제나 권력자를 위해 불로불사의 선채갱장의 식재를 연구하고 민간에서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까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 발달하여 이 두 음식이 합쳐진 합작요리이다.둘째, 중국 음식은 요리중심이며 주식과 부식의 구분이 없다.셋째, 오미팔진이라 하며 오미(신맛, 쓴맛, 단맛, 짠맛, 매운맛)맛으로 인간의 오장(간, 심장, 췌장, 폐, 신장)을 보양한다 하여 소중히 여겼다.넷째, 조리기구가 간단하고 사용하기 쉽다.다섯째, 음식 대부분이 숙식을 기본으로 하여 음식의 재료를 미리 손질해 놓고 짧은 시간에 조리하는 요리이다.여섯째, 대부분 기름을 사용하여 고온에서 짧은 시간에 음식을 만들어 음식의 고유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영양소의 손실도 최소화 할 수 있다.일곱째, 수천 년의 역사와 방대한 지역을 가지고 있어 각 지역의 독특한 재료와식위주의 식생활 습관이다. 중국인의 조리법의 특징은 반드시 뜨거운 불이나 뜨거운 물을 사용하여 익혀 먹는 이른바 숙식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익혀 먹는 숙식과 날로 먹는 생식을 기준으로 중국민족과 주변 민족들을 구별하였다. 이러한 음식 습관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곡식이든, 채식이든, 아니면 육식이든 생식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물도 끓여먹는 습관을 지니고 있으며 중국에서 일찍부터 차 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열 번째, 식의합일(食醫合一). 즉, 중국인들은 약으로 보신하는 것보다 음식으로 보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현대에 와서는 요리사와 의사는 완전히 구별되는 직업이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의(醫)와 식(食)은 같은 원류에서 시작되었으며 약물의 발견과 사용은 바로 식품에서 출발했다. 오늘날에도 중국은 식이요법이 발달해 있다.? 풍성 다채의 음식과 요리법대체로 色·香·味의 조화를 철저히 이루고 있는 중국요리의 비법은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첫째, 중국요리에 사용되는 재료는 광범위하면서도 재료 선택이 엄격하다. 상용되는 재료는 약 3천여종이고, 총 재료수는 1만종 이상이다. 재료선택 면에서도 주재료와 부재료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둘째, 칼질이 정교하고 모양이 다양하며, 크기, 굵기, 두께가 고르다. 어떤 재료는 칼질을 거쳐 살아있는 것과 같은 새, 짐승, 화초 등 아름다운 조각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요리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셋째, 중국음식은 불의 강약과 시간조절에 따라 그 요리의 色·香·味가 크게 좌우된다.넷째, 중국요리의 특징은 날것으로 먹지 않는데 있으며, 반드시 숙식(熟食)을 기본으로 한다.다섯째, 양념의 배합을 중요시한다. 중국요리의 조미료는 100여종에 달하여 세계적으로도 첫 손가락에 꼽히고 다양한 조미료는 중국요리에 있어서 맛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관건이기도 하다.? 중국 요리의 일반적인 특징] 외에 식칼·뒤지개·국자 등이 조리기구의 전부라 할 만큼 그 기구가 간단하다.④ 조리법이 다양하다. 조리기구가 간단한 반면에 조리법이 다양하다. 조리법에 관한 용어는 둥[凍]· 조우[粥]· 탕[湯]· 차오[炒]· 자[炸]· 젠[煎]· 쉰[燻]· 정[蒸] 등 여러 가지 조리법이 있어 어떤 재료를 쓰든 원하는 요리로 조리해 낼 수 있다.⑤ 기름을 합리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중국 요리의 대부분이 기름에 튀기거나 조리거나 볶거나 지진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기름이 많이 이용된다. 적은 재료로 많은 칼로리원을 얻을 수 있어 합리적이다.⑥ 조미료와 향신료의 종류가 풍부하다. 중국요리의 맛이 풍부한 것은 많은 종류의 조미료와 향신료를 적절히 이용하기 때문이다.⑦ 외양이 풍요롭고 화려하다. 중국요리에는 몇 인분이라는 말이 없다. 1사람 앞에 얼마씩 따로 담는 것이 아니라 1그릇에 1가지 요리를 전부 담아낸다. 따라서 먹을 사람이 많아지면 1가지 요리의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요리의 가지 수를 늘리는 것이 원칙이다.? 중국의 4대 요리이러한 특징들을 바탕으로 중국인의 호탕함을 더불어 지역마다 독특한 음식이 생겼는데 이를 크게 중국의 4대 요리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4대 요리에는 북경, 남경, 광동, 사천 요리로 나뉜다.? 북경 요리(베이징 요리)- 북경 오리-? 북경 요리는 중국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요리로 북경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산동성, 서쪽으로 타이위안(太原)까지의 요리를 포함한다. 북경은 오랫동안 중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궁중 요리를 비롯하여 고급 요리가 발달하여 가장 사치스러운 요리 문화를 이룩하였다. 몽고족과 만주족이 가지고 들어온 산동요리와 양저우요리가 북경의 궁중 요리와 잘 조화되면서 발달된 요리이다.지리적으로 한랭한 북방에 위치하여 높은 열량이 요구되기 때문에 육류를 이용한 튀김과 볶음요리가 대표적이다. 강한 화력을 써서 짧은 시간에 기름에 튀겨내는 산동식 조리법의 영향으로 음식이 대체로 바삭바삭한 느낌이 있다. 음식은 신선하고 부드럽고 담백하며, 기름지지만 느끼하지 않다. 특히 광저우는 16세기에 스페인, 포르투갈의 선교사,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였기 때문에 지역의 음식을 국제적인 음식으로 발달시켰고, 사람들은 일찍부터 광동 요리가 천하제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뱀, 쥐, 개, 원숭이 등을 이용한 요리가 유명하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자연의 맛을 잘 살려 내는 담백한 맛이 특징인데, 서구 요리의 영향을 받아 쇠고기, 서양 채소, 토마토 케첩, 우스터 소스 등 서양 요리의 재료와 조미료를 받아들인 요리도 있다. 재료를 지나치게 익히지 않고 비교적 간을 싱겁게 하고 기름도 적게 쓰며, 음식의 색채와 장식에 중점을 두고 산뜻한 생것의 맛에 가까운 맛을 지닌다. 달착지근한 맛이 있으며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가 많다.광동 요리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구운 돼지고기인 차사오와 어린 통돼지구이인 피옌피루주, 광동식 탕수육인 구라오러우, 상어지느러미찜이 있다.? 상해 요리- 게살 스프-? 상해 요리는 중부 중국을 대표하는 요리로 양자강 하류 일대의 상해, 난징, 쑤저우, 양저우 등지의 요리를 총칭한다. 따뜻한 기후의 영향으로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부하여 다양한 요리를 발달시켰으며, 이 지역의 특산물인 장유(간장)를 써서 만드는 요리는 매우 독특하다. 간장이나 설탕으로 달콤하게 맛을 내는 찜이나 조림요리가 발달하였고, 기름기 많고 맛이 진하고 양이 푸짐한 것이 특징이다. 모양보다 깊은 맛에 중점을 두므로 화려한 장식은 거의 하지 않는다. 돼지고기에 진간장을 써서 만드는 요리, 한 마리의 생선을 가지고 머리에서 꼬리까지 조리와 양념을 달리해서 맛을 내는 생선 요리가 일품이다. 바닷게로 만드는 푸룽칭셰, 두부로 만드는 스진사궈더우푸와 꽃 모양의 빵인 화쥐안, 만두의 일종인 탕바오(湯包) 등이 유명하다.- 마파두부 -? 사천 요리? 사천 요리는 양쯔 강 상류의 산악 지대를 대표하는 요리로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지방 요리까지를 포함한다.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중국음식은 사천요리라고 하는데, 마늘, 파, 매영롱하고 아름다운 절강요리, 해산물 요리에 독특한 복건 요리, 지방 특색이 농후한 안휘요리,그리고 그 밖의 지방 요리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중국인의 주식과 주요 명절 전통음식중국인의 주식은 쌀과 밀가루이다. 남방 사람들은 미판(쌀밥), 니앤까오(중국식 설떡) 등과 같이 쌀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는 반면, 북방 사람들은 만토우(소 없는 찐빵), 라오빙(중국식 밀전병), 빠오즈(소가 든 찐빵), 화쥐앤(둘둘 말아서 찐 빵), 미앤티아오(국수), 쟈오즈(밀가루를 반죽하여 엷게 민 다음, 잘게 저민 고기나 야채 따위를 넣어 싼 것) 등과 같은 밀가루 음식을 즐겨 먹는다.부식으로는 돼지고기, 생선, 닭, 오리, 쇠고기, 양고기와 채소, 콩으로 만든 식품을 위주로 하며, 주식과 부식의 조화와 영양의 균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아침을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밖에서 사먹는 것이 보통이다. 아침식사로는 요우티아오(油條), 지앤빙(煎餠)같은 밀가루 음식과 죽, 또우지앙(豆醬) 등을 주로 먹는다.중국에서는 점심식사 시간이 2-3시간이나 되므로 직장과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집에서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저녁식사는 대체로 가족들이 함께 가정에서 식사를 한다. 또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대도시에서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식생활 문화에도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그 중의 하나는 대도시에 외식 산업이 성업 중인 것이다.한편 중국은 설이나 명절이 되면 전통적인 고유음식을 먹는데 중국의 주요 명절 고유음식은 다음과 같다.? 춘절(春節) - (음)1월1일; 지아오즈(물만두)? 정월대보름 - (음)1월15일; 위엔샤오(새알심모양의 찰떡)? 단오 - (음)5월5일; 쫑즈(찹쌀을 댓잎 또는 갈잎에 세모나게 싸서 찐 찹쌀떡)? 중추절 - (음)8월15일; 위에빙(달처럼 생긴 떡과자)? 섣달 초여드레 - (음)12월8일; 라빠조우(여러가지 종류의 쌀.콩.과일 등을 넣어 만든 죽) 또한 절기에 따라 입춘에는 봄 떡을 먹는다.
목 차제 5장 교육과정의 구성과 개발제 1 절 교육과 교육과정 --------------------------- 21. 교육과정의 의미 ---------------------------------------- 22. 교육과정의 위이와 이론 구성 ------------------------------ 33. 학교 교육에서 교육과정의 수준과 위상 ----------------------- 4♤보충- 교육과정의 개관 ---------------------------------------- 5제 2 절 교육과정 유형 ----------------------------- 61. 교과 중심의 교육과정 ------------------------------------ 6♤보충- 특징 및 장?단점, 유형별 조직방법 및 특징, 결론, 1차 교육과정 ------ 72. 경험 중심의 교육과정 ------------------------------------ 9♤보충- 견해, 특징 및 장?단점, 유형별 조직방법 및 특징, 결론, 2차 교육과정 --103. 학문 중심의 교육과정 ------------------------------------ 13◐ 용어 알기~!! ----------------------------------------------- 14♤보충- 브루너의 지식의 구조, 나선형 교육과정, 특징, 장?단점, 3차 교육과정 -- 154. 인간 중심의 교육과정 ------------------------------------ 18♤보충- 기본적 견해, 특징, 단점, 잠재적 교육과정, 4차 교육과정 ----------- 20제 3 절 교육과정 개발 ----------------------------- 231. 교육과정 개발 모형 -------------------------------------- 232. 교육과정 개발의 전략과 과정 ------------------------------- 233. 교육과정 개발 요소 --------------------------------융합으로 광역화되어 가고 종합화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지역화의 경향지역의 특성에 따라 지역 실정에 맞도록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있음인간중심교육과정의 경향인간을 자아실현의 존재로 보고, 교육과정을 자아실현의 과정으로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고자 하는 경향을 띰잠재적 교육과정의 경향잠재적 교육과정이 인간의 정신적ㆍ사회적ㆍ윤리적ㆍ인간적인 면에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잠재적 교육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함제2절. 교육과정유형교육과정이 지향하고 있는 교육 목적과 내용의 성격에 따라 교과 중심 교육과정, 경험 중심교육과정, 학문 중심 교육과정, 인간 중심 교육과정으로 분류해보자.1. 교과 중심 교육과정 (敎科中心 敎育科程)(1) 교육 목적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본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문화전통의 전수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2) 교육 내용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습자들이 습득해야 할 교육의 내용은 선현들의 위대한 정신이다. 교과 중심 교육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 형식도야설을 신봉하여 형식 교과를 중시한다. 형식 교과는 인간 이성에 있어서 실질적 내용이 아니라 실질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그릇(형식) 즉 인간 이성 활동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육 내용은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인간 이성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문법, 수사학, 변증법과 같은 과목을 핵심적인 교과로 인정하고 있다.(3) 조직 원리교과의 내용을 조직할 때 그 교과의 독특한 논리적 체계에 따라 학습자가 그 교과의 논리적 체계를 이해 할 수 있도록 지식을 조직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역사 교과는 시간적 순차성에 따라, 지리 교과는 가까운 데서 먼데로, 수학 교과는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조직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의 원리를 해설적 조직 원리라고 한다.(4) 조직 형태교과 중심 교육과정은 각 교과의 체계를 중시하므로 분과형을 취하거나, 분과형을 기본성격으로 하고 있다. 분과형 교육는 것이 다”라고 교육과정을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는 가장 보통적인 경험중심 교육과정 또 는 생활 중심 교육과정의 정의이다.(3) 내용ㄱ. 자주성의 강조⇒ 금번 개정에 있어서는 구체적이고 자주적인 교육목표를 수립하고 우리의 문제를 중 심으로 학습내용을 선정하여 우리 국가, 민족의 무궁한 민주적 발전과 국민 생활의 향상을 기하고자 하였다.ㄴ. 생산성의 강조⇒ 학생으로 하여금 만들고 먹고, 입고, 살고 하는 적당한 방법을 습득시켜 우리의 생 활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태도와 기능의 길로 나가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 다.ㄷ. 유용성의 강조⇒ 그러므로 교육과정의 개정에 있어서는 국가사회의 절실한 요구, 학생생활에 필요불 가결한 과제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생활경험을 통하여 교육함으로써 쓸모 있는 사회 인이 되게 하고 또한 자활할 수 있는 실천인의 육성을 강조하였다.(6) 조직☞ 합리성을 강조하여 더욱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직 원칙에 입각하여 학생의 성장 발 달 과정에 적응될 수 있는 통일성이 있고 계통성, 발전성을 보장해 주는 역동적인 교육과정을 마련하여 교육 효율의 배가를 꾀하도록 하였다.(7) 운영☞ 지역성을 강조하여 교육과정에서는 일반적 기준만을 제시하고 그 구체적 적용을 지역 사회의 설정에 맞도록 창의적으로 재구성하여 충분한 융통성과 신축성을 부여하도록 하였다.(8) 평가☞ 경험중심 교육과정은 적어도 개념적인 수준에서 학교교육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교육 실제면에서는 여전히 교과중심 교육과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유는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교과중심 교육과정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 시 준비라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었다.(9) 목표상의 특징ㄱ. 민주적 신념이 확고하고 반공정신이 투철하며 민주적인 생활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 는 인간 양성하는 데 가장 적합한 학습 경험을 포함시킨다.ㄴ. 독립 자존의 민족적 기풍과 아울러 국제 협조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학 습 경험을 포함시킨다.ㄷ. 일상 생활에서 당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는 각 교과에 내재해 있는 기본원리 , 핵심개념 을 학습자로 하여금 그 학문분야의 학자가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찾아내도록 한다. 탐구과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교수 메체의 활용을 강조하고 있으며 분석적 사고와 직관적 사고를 강조한다.④ 학습동기의 유발방법으로는 외적 보상보다는 내적 보상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탐구과정에서 맛보는 지적 희열감이 내적 동기가 되어 외적 보상보다는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장 점① 체계화된 지식을 교육내용으로 정선하여 교육과정을 구성하기 때문에 능률적이고,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다.② 기본 개념을 학습하게 되므로 일반적 전이가 가능하다.③ 학문의 탐구방법을 체득할 수 있다.④ 내적 동기유발의 방법을 교수에 사용하므로 학문 자체에 대하여 희열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⑤ 내용상 중복을 회피할 수 있다.◈ 단 점① 지적인 측면에 편중하여 도덕교육을 소홀히 할 가능성이 있다.② 학교교육이 현실의 생활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③ 지식의 구조는 학생이 배우기에 너무 어렵고 가변적이다.④ 단절된 교과목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많으며, 교과간 통합성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⑤ 학습자의 공통적인 흥미 ? 필요? 문제를 무시한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의 실례, 조직방법 및 그 특징유형조직방법실례특징개념 중심분과형(ConceptCenteredType)나선형적조직법(SpiralCurriculum)PSSC(물리과학 연구위원회)SMSG(학교 수학연구회)BSCS(생물과학 교육과정연구회)*학구적 지식, 기능, 가치를 중심으로 한다.*발전성, 계열성은 있다.*관련성, 다양성은 매우 부족하다.과정중심분과형(ProcessCenteredType)동질집단평성법2중 진급안4과정안*다양성은 보강, 관련성, 포괄성을다소 지닌다.*평가의 도구나 방법이 과제이다.방법중심분과형(MethodCenteredType)프로그래밍법(Programing)Open School,무학년제,CAI안,프로그램안*다양성, 현실성, 발전성, 관련성이있다.◈과 (이론, 지식)학습시간장기적ㆍ반복적ㆍ항구성단기적ㆍ일시적교사의 기능교사의 인격적 감화 받음교사로부터 지적ㆍ기능적 영향학습내용바람직한 내용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포함바람직한 내용만을 포함기타이들의 상호보완적 관계가 있을 때 학생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침◈ 제 4차 교육과정(1) 시기 : 1981년 12월 31일에 문교부 고시 제442호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 교의 교육과정이 다시 개정된 때부터 1987년까지의 시기(2) 개정의 목적ㄱ. 현행 교육 과정의 문제점 보완 - 기초교육, 일반교육강화, 전인교육, 인간 교육 강화ㄴ. 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교육 개혁의 추진 - 교육내용의 양과 수준 적정화ㄷ. 국민정신 교육의 강화(3) 특징ㄱ. 전인교육을 강조하면서 학문중심 교육과정의 정도를 낮추어 구성ㄴ. 초등학교 1.2학년의 교과서 통합 시도예) 바른 생활,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4) 교육과정 구성의 기본방향 구체화ㄱ. 건강한 심신의 육성⇒건강한 신체, 풍부한 정서, 고상한 취미, 강인한 의지, 심미적인 태도ㄴ. 지력과 기술의 배양⇒ 기본학습 능력, 과학적 탐구능력, 기초지식과 기술, 문제해결력, 진로개척의 능력ㄷ. 도덕적인 인격의 형성⇒ 주체적인 자아의식, 정직성과 성실성, 자율성과 책임감, 공정 성과 질서의식, 인간존중태도ㄹ. 민족공동체 의식의 고양 ⇒ 사회적 연대의식, 민주 복지 정의 사회건설의 사명감, 투철 한 국가의식, 민족문화창달의욕, 인류공영의식(5) 편제상 특징☞ 교육과정의 공포가 문교부령에서 문교부고시로 바뀜 - 개정시 법제처의 심의의 번거 로움 때문에 특별활동은 학급활동, 학생회 활동, 클럽활동, 학교행사의 4개영역→학급 활동을 학생회활동에 통합하여 3개영역제 3절 교육과정 개발1.교육과정 개발 모형교육과정 개발이란 바람직한 교육목표의 성취를 위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도중에 동원되는 여러 관련요인들을 체계 있게 조정하며 매개가 되는 교육환경을 구조화하는 일이다.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의 체계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이루어짐
< 선거에서의 지역주의와 지역개발에서의 지역주의 >>- 충북을 중심으로 -Ⅰ. 지역주의란1. 지역주의의 의미? 지역 : 인접지역과 그 자연적, 문화적 특성을 달리하는 동질적 공간으로서 국토의 일부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주민 상호간의 높은 일체감과 통합성을 갖는다.? 지역주의 : 지역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지역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그 연대·협력을 촉진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한 지역에 소속된 구성원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지역감정 : 지연에 기초하여 다른 지역이나 그 주민에 대해 가지는 부정적인 편견, 즉 공간적, 사회적으로 격리된 지역간 주민이 가지게 되는 사회적 거리감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지역간 격차로 말미암아 하나의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편견이다. → 지역갈등을 초래 ex) 영?호남간의 갈등2. 우리나라 지역주의의 성격- 오랜 역사 속에 단일 민족임을 자랑해왔으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일차적으로 영남, 호남, 강원, 충청 등 행정구역 또는 그 출신지역에 따른 차이와 차별, 경쟁과 대립, 갈등과 균열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사회?심리적 측면의 지역감정, 지역간 경제적 불균등 구조와 격차, 그리고 정치적 동원 및 대립구조 등의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지역기질 → 지역감정 → 지역격차 → 지역차별 →지역갈등 → 지역할거 → 지역패권- 지역주의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흐름? 지역기질론 : 지역 사람들의 품성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정복의 팔도평을 통해 특정지역민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폄하성 재단으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이중환의 택지리에도 연고지역에 대한 애착을, 비연고지역에 대한 사시성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구시대적 지역기질론이 현대에 와서 부정적인 지역주의로 굳어지게 된 배경을 해방 직후 해외동포의 귀환과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급격한 인구이동에 따른 도시화과정에서 찾고 있다. 그 결과 특정 지역주민들의 기질적 특성에 관한 언급이 늘어나고, 이것이 갖가지 형태의 기피, 거부감, 불신풍조와 연결되면서 인간평가의 집단 범주화가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지역감정론 : 도시화로 대변되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과정에서 생성된 지역감정은 지연에 기초하여 형성된 여타 지역에 대한 부정적이고 편견적인 속성의 심리상태 또는 지역적 연고에 따라 구분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과 적대감과 차별행동이다. 지역간 고정관념과 편견이 비교적 뚜렷이 존재한다.? 지역격차론 :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정책에 따라 고성장 지역과 저성장 지역간의 발전 격차가 구조화되면서 저성장 지역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주장하게 되었다. 지역간 경제격차는 입지적 여건이나 주민들의 특성, 역사적 발전상황 등을 내세워 해명이 다소 가능하다.(정부의 산업화 정책과 일제하의 경제구조에서 연유한 한국경제체제의 성장 동력이 경부축에 집중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여타 지역은 소외되었으며, 영남지역은 대지주제가 강했던 호남에 비해 소규모 자영농이 강했던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성공했다고 본다.)? 지역차별론 : 정권은 장악한 위정자들이 전통적인 연고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인사 등 각종 권력의 배분을 출신지역 중심으로 편중시킨 데 기인한다. 직급상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격차가 심하고, 시기별로는 과거보다는 현재로 올수록 더 심하다. 1980년대에 들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지역주의는 정치적 성격을 뚜렷이 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로의 질적 변화를 겪게 된다. 또한 선거를 통해 지역적 대결구조가 고착화되며, 우리사회에서 정치권력의 유지 및 재생산에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지역패권론 : 한 국가 안에서 특정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향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한편으로 국정을 자기지역 중심으로 운영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지역출신의 도전을 억누르기 위해서 지역 갈등 내지 지역적 분할통치를 도모하는 정치적 이념을 말한다. 예를 들면, 경상도 패권주의는 대구?경북 패권주의와 부산?경남 패권주의가 있다. 지역 패권주의는 일반적으로 지역감정에서 호소하는 선거 전략에서 표현되지만, 일상적인 사회과정과 노동시장, 각종 제도의 운용에서도 폭넓게 작동한다.Ⅱ. 선거에서의 지역주의 : 충북을 중심으로1. 정치적 지역주의의 의미- 문화?역사적으로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 중앙정부에 대해 자치실현을 위해 정치적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 또는 운동을 말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지역주의는 선거과정에서 특정 정당에 대한 편중지지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때, 각 후보들의 연고지에서 그 후보에 대해 극명한 편중지지를 보내면서 제기되었다. 지역주의는 따라서 우리의 정치경험에서 대구, 경북출신의 집권세력이 주도하는 집권당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이 각자의 출신지역의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선거경쟁 결과의 성격에 대한 평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집권당의 지도자(대통령)가 그 동안 대구ㆍ경북출신이고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집권당에 대한 지지가 강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지역주의는 집권당의 대구ㆍ경북(TK), 김영삼의 부산ㆍ경남(PK), 김대중의 전남ㆍ전북(호남), 김종필의 충남ㆍ충북(충청) 유권자들의 투표행태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여기에서는 지역주의를 “시ㆍ도 단위의 유권자들이 한 선거에서 여ㆍ야당을 불문한 지역연고정당에 대한 편중적 지지행태”로 정의한다.지역주의를 선거와 관련시키는 것은 선거에서 각 정당의 득표율이 전국적으로 어는 정도는 고른 분포를 보이는 것이 정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편중적 지지는 연고지역에서 그 정당의 일반적 지지도 이상의 득표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2. 우리나라 선거 지역주의의 경향- 지역주의의 사회적 분포지역주의적인 성향이 과연 사회적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지역주의성향에 대한 서술적수준의 이해와 더불어 그 원인을 규명하는 기초작업이 된다. 여기에서는 연령, 교육, 성, 거주지 등의 변수와 지역주의성향 변수와의 관계를 주목한다. 사용하는 통계기법은 변량분석(ANOVA)이다.1) 연령개인 내부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지역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우연히 취득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성장해 나가면서 직접적으로 겪는 개인적인 경험과 아울러 전세대로부터 후세대로 이전되는 사회화과정에 의해 서서히 체득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지역주의적인 사고방식은 비교적 사회적 경험이 적고 아직도 사회화과정에서 피동적인 입장에 있는 젊은 세대에 비해, 사회경험이 풍부하고 사회화과정에서 능동적인 입장에 있는 노년층에 더욱 광범하게 그리고 더욱 공고하게 퍼져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표1은 각 연령집단별 지역주의성향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지역주의성향의 평균값을 비교해 보면 20대와 30대에서 낮게 나타나고 있으며 40대에서는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며 50대 이상의 집단에서는 가장 높은 지역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변량분석의 결과 각 집단간의 차이는 통계적으로 의미있음을 보여준다(F=5.97, p
≪ 조선시대의 궁궐 ≫1. 경복궁-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이다. 임진왜란(1592) 당시 왜군에 의해 완전 소실된 뒤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였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재건을 시작해 고종 5년(1868)에 가장 큰 규모로 복원, 다시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마침내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한다. 그 뒤 일제에 의해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 조직적으로 훼손되어 현재는 원래 규모의 약 15%만 남게 되었다.1) 광화문 - '국왕의 큰 덕이 온 나라와 백성을 비춘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지었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접어들어 광화문은 또다시 크게 훼손되고 만다. 일제는 광화문 뒤편 흥례문 일대를 없애고, 1926년 조선총독부청사를 완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청사 앞을 가로막고 있던 광화문을 없애려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극심한 반대여론에 부딪혀 마지못해 이듬해 경복궁의 동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놓고 만다.* 해태상- 원래 해태는 현재의 위치에 세워져 있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약 80∼90미터 가량 남쪽으로 위치한 육조거리 사헌부 입구에 세워졌다고 한다. 1923년 일제에 의해 한때 철거된 뒤, 해방후 현재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해태는 상상의 동물이다. 라는 중국의 옛 문헌에 따르면 해태는 '해치'라고도 하며, 해태의 강직한 성질과 속성상 해태는 조선시대 감찰 기구였던 사헌부관원들의 흉배와 관모에 장식되어 엄정한 기강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관원들은 육조거태전도 함께 철거되어,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을 재건하는데 쓰이게 된다. 그 뒤 교태전은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굴뚝만 남고 버려져 있다가 1995년 다시 복원된다. 한편 교태전도 용마루가 없는 지붕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는 경우에 용마루가 없는 지붕을 얹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정확한 이유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그 까닭을 알기 어렵다. 다만 속설에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침소에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실증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6) 경회루? 태조 때 경복궁 서북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으나, 태종 12년(1412) 4월 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누각을 짓고,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 그 뒤 성종 6년(1475) 퇴락한 경회루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된다. 또한 연산 12년(1506)에는 경회루 서쪽에 만세산을 쌓고 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기생)에게 가무를 추게 했으며, 황룡주를 타고 만세산을 왕래하며 사치를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경회루의 이러한 모습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 소실되어 폐허로 남게 된다. 그 후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에 재건되었지만 일제시기에 경회루 주변 담장이 모두 헐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경회루는 단일 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그 건축적 특성면에서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7) 자경전⑴ 자경전의 꽃담? 자경전 담장 가운데도 서쪽 바깥벽은 꽃담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새겨진 무늬는 크게 전서체의 글자, 삼화토 줄무늬로 그려진 윤곽, 흙으로 구워 박은 그림무늬의 세 종류이다. 이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림무늬다. 매 ? 란 ? 국 ? 죽을 비롯하여 석류, 복숭화 등이 새겨진 여덟 폭에는 벌, 나비, 새가 날아들어 같이 어울려 놀고 있다.⑵ 자경전의 굴뚝? 자경전은 고종 때 대왕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곳도 교태전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위에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인정문? 창덕궁 인정문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는 출입문이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주좌가 둥근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상부에는 안초공이 있다. 정면 기단에는 건물 기단과 같은 너비의 계단을 두고, 계단 중앙에 어칸 너비로 소맷돌을 놓아 세 부분으로 구획하였다. 사방에 평주를 돌리고, 가운데 기둥 열 중앙에 두 개의 고주를 세웠다. 가운데 기둥열 세 칸에 각각 두 짝의 판문을 달았는데, 어칸의 문이 그 좌우의 문보다 높게 처리되었다.공포는 내3출목·외2출목으로 3제공이 중첩되었고, 도리받침 부재는 구름모양으로 깎았다. 내부는 2제공까지는 첨차 끝이 직각으로 절단되고, 그 위는 둥글둥글한 운궁(雲宮)이 되어 도리와 보를 받치고 있다. 고주 위로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종보를 둔 5량가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서까래와 가구를 노출시켰다. 문 위에는 홍살문이 있다.지붕에는 양성한 각 마루에는 취두와 용두를 설치했고, 추녀마루에는 5기의 잡상을 얹었으며, 용마루의 양성 부분에는 동으로 만든 3개의 이화무늬(李花紋)로 장식하였다. 인정문의 좌·우에는 10칸의 행랑이 각각 동·서로 뻗쳤다가 다시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인정전 앞뜰을 둘러싸고 있다.이 건물은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도 사용되었는데,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 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한 곳으로 중요시된다.※ 칠조룡?다. 틀의 규격이 작기 때문에 어린 왕자들이 쓰던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보관하고 있는 청동제 매화그릇은 현존하는 매화틀에 맞는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매화그릇은 큰 어른용으로 높이 12센티미터, 넓이 22.5센티미터, 길이 49.5센티미터의 선형으로 되어 있다.매화틀 겉에 입혀진 주단의 무늬나, 직조와 나무를 접합시킬 때 쓰인 핀의 모양으로 볼 때 개화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동제 매화그릇은 부식 상태가 꽤 심한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유적으로 남아 있는 왕궁의 매화틀에 앞서 다른 매화틀이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짐작케 한다.7) 낙선재?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집이다. 그 뒤로,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고종황제의 외동딸이자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 일본의 왕녀로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했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낙선재 옆으로 석복헌, 수강재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보통은 이들을 모두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원래는 창경궁 영역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낙선재의 대문은 연경당 대문과 같은 이름인 장락문이다.※ 장락문? 낙선재의 정문 장락문은 일각문으로 행랑채보다 지붕이 솟아올랐다. 이런 문을 '솟을대문'이라 부른다. 여염집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호칭한다.문 좌우로 행랑채가 있다. [궁궐지]의 남행각 12칸에 해당한다. 무사석 세 켜로 듬직하게 기초하고, 위로 사괴석 세 켜를 또 쌓았다. 그 위로부터는 벽돌인데 운두가 두꺼운 벽돌을 쌓아 올리다가 갑자기 그것의 반정도의 두께밖에 되지 않을 얇은 벽돌을 쌓아 마감하였다.운현궁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런 변화 있는 담벼락 축조법이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8) 만월문? 낙선재 뒤뜰에 있는 보름달 모양 문 - 만월문과 여섯모 누각이다. 위 사진은 만월문을 승화루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반대 방향에서 만월문을 보면, 동그정조 때 화재를 입은 후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1834)에 재건되었다. 통명전의 전각명칭은성종의 명을 받든 좌찬성 서거정에 의해 지어졌다. 통명전은 이처럼 소실과 재건이 거듭되었지만 통명전은 '내전의 법전'으로 인식될 만큼 중요한 의식과 생활의 공간이었다.4) 춘당지? 원래 왕이 친히 농사의 시범을 보이며 농정을 살피던 내농포가 있던 곳이다. 곧 조선왕조가 국가경제의 근간을 농업 생산력에 두었음을 의미.해방 이후 '창경원' 시절에는 이곳에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던 유원지처럼 왜곡되어 쓰이다가, 아직 복원이 안된 채 너른 연못으로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5. 경운궁(덕수궁)1)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이나 대한문은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 아닌 동문이었다. 이름 또한 대안문이었던 것을 1904년 대화재 이후 1906년 재건하면서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달게 되었다.2) 원구단(중국-황궁우)? 황궁우 ? 원구단- 중국과 동등한 위치를 나타내기위한 표현3) 서양식 건물- 석조전? 광무 4년(1900)에 착공되어 융희3년 (1909)에 준공된 석조 건물로 대한제국 때 외국 사신들의 접견장 이었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했는데,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고 정면 주랑은 이오니아식 주두로 처리하고 실내에는 로코코 풍 장식을 하였다.- 정관헌? 정관헌은 광무 4년(19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궁궐안의 서양식 건물로는 처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고종황제가 가배차(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는 등 여가를 즐기던 곳이다. 내려다보이는 함녕전과 덕홍전 뒤뜰의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기엔 가정 좋은 위치에 있다.≪ 사 고 ≫- 실록 및 주요 서적을 보관하던 고려·조선 시대의 서고(書庫). 조선 시대에는 왜란 이전에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의 4대 사고가 있었는데, 그 중 춘추관·충주· 성주 사고는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 남은 전주 사고본을 토대로 다시 춘추관·태백산·오대산·묘향산·강화 등의 5 있다.
『국가와 사회혁명』에 대한 서평1. 서 론▷ 오늘날 우리는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많은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통해서 이제는 단순히 개인이 아닌 개인과 집단, 또는 집단과 집단간의 관계에서 서로 상호의존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의 체제에서 발생하는 모순으로 인한 문제점, 즉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현상에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과거에서부터 발생하여온 이러한 과정을 바로‘혁명’이라 할 수 있겠다.이러한‘혁명’은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와 발전을 수반하게 되는데, 위로부터의 혁명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그럼 구체적으로‘혁명’이란 무엇이며,‘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과 과정을 통해 정치 ? 문화 ? 사회 전반에 걸쳐 어떠한 영향과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하여 이‘국가와 사회혁명’이라는 책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또한 이 책의 저자인‘테다 스코치폴’은 어떠한 관점에서‘혁명’을 바라보았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 분석방법에 대해 알아보겠고, 이 책에 서술된 논지에 대한 나의 생각도 간략하게 적어보고자 한다.2. 본 론▒ 저자의 논지 전개⇒ 테다 스코치폴은‘국가와 사회혁명’이라는 이 책에서 세계사적 차원의 세 혁명, 즉 프랑스, 러시아, 중국혁명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비교사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여기서 이 세 혁명을 세계사적 차원의 혁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이 일국적 차원의 혁명으로 제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인 파급력과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혁명은 제외로 하더라도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세계사의 시기 구분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정도로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이 혁명들의 위기와 갈등의 기원을 국가와 계급의 구조 분석 그리고 부르봉왕조, 제정러시아, 청제국의 국제적 상황분석을 통해서 추적하였다는 점과 사회경제적 변동의 추세 파악을 마르크스의 계급변동에 입각하여 전개해 나국혁명, 독일혁명,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상호 비교되고 있다.▒ 작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혁명⇒‘혁명’이란 단지 국가장치나 기구가 가지는 권력체계의 붕괴와 장악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국가 장치를 넘어선 경제와 사회문화의 작동 체계 전반을 전복하고 새롭게 재편해 나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는 군사적인 전복인 쿠데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국가조직, 계급구조, 지배이념을 변혁시켜 왔으며, 그 결과 힘과 자율권이 혁명 이전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게 만들었다.이 책의 저자인 ‘테다 스코치폴’ 은 혁명의 의미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즉, 혁명을 단순한 혁명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회혁명’ 이라 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하였다. 사회혁명은 한 사회의 국가 및 계급구조의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혁으로 계급에 기초를 둔 아래로부터의 폭동을 동반한다고 하였다. 즉 사회구조의 변동과 계급변동의 동시발생과 정치적 변혁과 사회적 변혁의 동시발생이 함께 결합되는 특징을 갖는다.그러면 이와 같은‘사회혁명’이 일반적인‘혁명’의 개념과 다른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사회혁명’은 비교적 역사적 사례가 적으며 설명하기 복잡한 대상의 정체를 밝힌다는 점이다. 이는 분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면 혁명에 관해 타당성 있는 완벽한 설명을 할 수 없으므로 혁명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혁명을 전체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공적인 사회 정치적 변혁 즉 국가 및 계급구조의 실제변동은 소위 사회혁명이라는 것이 구체화되는 과정의 일부로 해석된다는 점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혁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회혁명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으로 저자는 구체제 국가조직의 붕괴와 새로운 혁명적 국가조직의 수립에 영향을 미친 국제적 맥락과 국내외의 상황전개에 특별한 관심을 두면서‘구조적 시각' 에서 사회혁명을 분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역사에 토대를 기존 권력 체계를 붕괴시킨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원인을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농노해방 단행에 따른 노동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는 혹심한 경제공황으로 농민이 신분상으로는 농노 상태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나, 경제적으로는 중산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장노동자의 상태도 선진국에 비해 위생시설이 형편없었고, 낡은 기계로 인한 생산량 감소로 임금이 낮았으나 노동자들은 합법적 활동으로 개선할 길이 없었으므로 노동운동은 과격화하는 경향이 강하였다.그리고 국제적 상황에서 원인을 찾아보자면 1914년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대전으로 볼 수 있다. 계속되는 패배와 전쟁에의 장기적 개입 등은 프로레타리아들로 하여금 혁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주요 도시에서는 러시아의 프로레타리아들이스스로를 조직하고 레닌을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선동과 체제에서 소외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세력의 정부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러시아에서도 지금 현대 한국사회와 같이 1913년에 러시아 인구의 80%가 농민이었고, 공업, 광업, 운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10% 였으며 그 나머지는 짜르, 귀족, 대지주, 사제 들이었다. 러시아 혁명 또한 다수의 노동자들이 부패해 버린 소수의 지배층을 무너뜨려 사회의 변혁을 꾀한 혁명의 하나였다.그렇다면 이렇게 일어난 혁명이 정치 ? 경제 ? 문화 ? 사회 전반에 걸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인의 문맹률을 50%에서 20%로 줄였고 교육적 ? 문화적 기회를 수많은 대중에게 열어주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영향으로는 짜리 군대의 완전한 해체와 완전 무결하게 된 집단적이고 권위적인 체계가 나타났다. 경제적으로 러시아의 내란 이전과 비교할 때 산업화가 촉진되었고, 계획경제로 실업자를 막았다는 점 그리고 각종 구제사업을 만들었다는 점 등의 영향이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혁명’은 한 사회에 정치체계 변화와 자본주의, 자유주의 발충분했다.『국가와 사회혁명』에 대한 엣세이1. 서 론▷ 근대 역사학자 M. Rostovzeff는 문명의 발전을 소수 창조 계층의 기획에 의해서 이며, 멸망이나 퇴조는 국내적으로 소수 창조 계층의 창조적 욕망(공공선,공동복지)의 부재와 체제의 모순과 부패를 들었으며, 국외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들었다. 이렇게 국가의 퇴조?혼란기에 사회의 하층계급들에 의해 새로운 문명이나 체제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혁명이다.역사는 꾸준히 변화를 꾀해 왔으며, 현재도 수많은 변화와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 세기 속에 존재하는 구성원들의 사고전환이나 이념의 전환 역시도 요구되고 있다.내가 바라본‘국가와 사회혁명’이라는 책 속의‘사회혁명’들은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국가 정치 체제 안에서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 ? 하위층 계급들의 사고전환과 함께 ‘혁명’이 시작 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흔히 우리는‘혁명’과‘쿠데타’라는 개념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이며’, 이러한‘혁명’에는‘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우리 역사 안에도 있었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혁명과 타국가의 혁명과는 어떠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이런 ‘혁명’들이 과연,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해 보려한다.2. 본 론▷ 모든 사회학자들의 공통적인 테마의 요소가 되는 것은 '진보' 와 '발전' 이다. 그러나 사회 변화와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혁명일 것이다.'혁명'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1970 ~ 1980 년대에 일어났던 우리나라의 혁명들에 대하여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쿠데타' 라는 개념과 혼동을 하기도 하는데 나 역시 이 두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은 혁명들을 배워왔지만 이렇듯‘혁명’의 의미조차 잘 알지 못하고 동원하여 온갖 불법을 자행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관권이 선거에 개입을 시도하는데 대하여 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4월 18일 고려대생들에 의한 시위, 4월 19일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의 각 대학에서 시위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교수들이 시위대의 맨 선두에 섰으며,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고,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하였다. 4.19혁명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의의가 있지만, 제2공화국 정부로 군부정권이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한계점이 있다.?5 ? 16 군사쿠데타?는 1961년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여 군부 내 불만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로 인해 2년간의 군정을 거쳐 제3공화국이 들어서는 계기가 마련되었다.혁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5 ? 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계엄군의 진압 때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 지방 곳곳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학생 ? 시민 시위 사건을 말한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계엄군의 진압 때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 지방 곳곳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학생 ? 시민 시위 사건을 말한다. 시위는 그 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내려진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에 따라 투입도니 계엄군과그에 항의하던 전남 대학생들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시민들의 참여로 시위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시민ㆍ학생들은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을 주장했다. 시위 기간 동안 계엄군과의 충돌로 곳곳에서 희생이 잇따랐고, 27일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재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함으로써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신군부 세력은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도덕성과 정통성에서 비난을 받았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른 사망자는 192명이지만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당시의 광주 시민ㆍ학생 시위 사건은 광주 사태, 광주 항쟁 등으로 불리어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