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오네긴’을 읽고24년을 살면서 몇백번은 이름을 들어본 나라가 있는가하면 평생 살면서 한번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촘촘히 있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문화는 지리학적 요건때문인지 많은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되어있게 되어 있지만 지리학적으로 참 가까운 위치에 있는 나라이면서도 그 문화나 정서를 쉽게 접할 수 없을 수도 있다.나에게 러시아는 그런 나라인데, 바로 한반도 끝자락의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이 나라가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사상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어서인지 일반적으로 러시아 문학, 영화, 미술등을 자주 접할 수 없는게 사실이다. 그나마 잘 알고 있는 러시아 문화에는 음악이 있는데, 이는 호두까기 인형이나 백조의 호수 등의 발레음악으로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때문일것이다.이런 내가 처음으로 러시아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영화가 ‘예브게니 오네긴’이었다. 알렉산드로 푸시킨의 문학작품을 영화로 한 것으로 이 작품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발레 뮤지컬등 으로도 재탄생했다고 한다.이 작품은 연작시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책은 러시아 원문을 실어놓고 그 다음은 해석본을 달아놓았다. 전문 전에 ‘거만한 사교계에 흥밋거리를 주려는 생각은 없었네 그대의 우정어린 관심을 소중하게 여겨서 그대에게 그대보다 더 값나가는 저당물을 내놓고 싶었다네’로 시작하고 이어 계속 시가 이어지며 하나의 내용을 형성한다.‘한편으로는 분노가, 한편으로는 연민이, 또 만인의 행복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명예를 향한 달콤한 고통이 다 일찍이 그의 피를 설레게 했다.’내용과 관계없이 읽다보니 머릿 속에 박힌 내용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여러 가지 감정이 깃들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한 평도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마음 속에서 분노와, 연민과, 사랑과 고통이 한 데 섞여 다시 피를 설레게 한다고 하는데, 이는 복합적인 감정을 잘 표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가차 없는 고독 속에서그녀의 열정은 더욱 더 강하게 불탄다그녀의 심장은 멀리 있는 오네긴에 대해서더욱 더 큰 소리로 말한다.그녀는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그를 증오해야 한다.이는 오네긴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애증이 되어가고 있음을 잘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녀는 그녀가 처음 느낀 사랑이라는 감정이 일방통행이라는 사실에 견딜 수 없어하며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절규에 대한 메아리 뿐이었고, 그녀의 뜨거움에 찬 물을 붓는 오네긴의 차가운 표정과 말투 뿐이었다. 사랑과 증오가 적절히 섞인 애증이라는 감정은 앞으로 이 연작시의 이야기가 이끌어가는 주된 감정 중에 하나가 된다.답장이 없다. 그는 다시 편지를 보낸다.두 번 째, 세 번 째 편지에도 그녀는답장이 없다. 파티 석상에서만은 어쩌나그가 객실로 들어서면 ... 곧 그녀는,,,그녀는 오네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담는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편지를 기다릴 때 마다 느껴지는 실망감 뿐이다. 그런 그녀는 매일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권태로움을 느끼는 그는 그녀의 마음을 거들 떠 볼 여유조차 없다. 이런 비극은 앞으로 오네긴에게 얼마나 많은 후회를 안겨줄 지 예상할 수 있게 한다.그 누가 그녀의 말없는 고통을
-식민지 시대의 저항시인 ‘한용운’-1. 식민지 시대와 ‘저항문학’1860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급격하게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조선에 대한 외교방향을 바꾸었다.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각종 불평등 조약을 요구하고 결국 1910년 8월 22일 합병조약의 체결을 강행함으로써 조선은 식민지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조선 땅에서의 일본의 횡포는 ‘저항문학’의 원인이 되었고 많은 문학인들은 이 특수한 배경에 저항적 요소를 내포한 문학작품을 저술하게 되었다.나라를 잃은 슬픔과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제국주의 체제에 반하는 사회주의의 시각에서 부르주아인 일제에 저항하는 것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일제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는 것까지 다양한 형태로 저항문학이 나타났다.본격적인 의미의 저항문학은 조선 땅을 점령한 일제에 대항하는 목적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근대 국가의식의 각성과 함께 형성된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이렇게 특수한 목적을 띄고 생겨난 저항문학이 식민지 체제 당시 발표되어오면서 일제의 탄압에 의해 널리 알려지지도 못했고 상당수 작품이 일본이 압수하여 소멸시켰기 때문에 현대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또한, 한국의 저항문학은 식민지 정책에 의해 어느 나라 저항문학보다도 처절하며 작가들의 고난도 컸다.2. 저항시인, 한용운만해 한용운은 식민지 체제 당시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벌여온 독립투사로서,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의 종교인으로서, 또한 시집《님의 침묵》(1926년 회동서관 간행. 4 ·6판 양장, 168면)을 창작함으로써 시인까지 여러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우리가 좀 더 심도 깊이 다루어야 할 부분은 그 중에서도 ‘시인’으로서의 한용운인데, 특히나 그의 문학이 암울한 시대상황에 저항하고, 민족 모두가 겪고 있는 통증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불린다. 그를 설명하는 독립투사, 승려 이 모든 한용운의 생애 일부분이 그의 문학 안에 내재되어 있어 그는 전인적(全人的) 한용운의 시집《님의 침묵》이 지니는 전통성과 현대성은 이 땅의 전통 문학사와 현대 문학사를 이어 주는 매개 고리로서 작용하는 것과 함께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이라는 문학의 근본 모순을 탁월하게 꿰뚫어 냄으로써 작게는 문학사의 이원론 극복의 가능성을, 그리고 크게는 식민 사관 극복의 실마리를 실천적으로 열어 준 것으로 판단된다.이 시집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관능적 호소력과 초월적 의미와 형이상학적 사유가 중첩되어있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성을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①《님의 침묵》의 주제어,「님」그의 시집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님의 침묵’부터 ‘사랑의 끝판’까지 총 88편의 시에서 「님」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님의 침묵’, ‘이별은 미의 창조’, ‘?’ ‘최초의 님’ 등 「님」은 한용운 시 전체의 골간을 이룬다. 즉, 한용운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님’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보통 그의 생애에 있어서 승려로서의「님」, 독립투사로서의 「님」, 시인으로서의 「님」을 나누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승려로서 추구하는 불도 혹은 부처 혹은 독립투사로 그토록 바라는 조국의 광복, 시인으로서 정을 품고 있는 연인이 「님」에 해당된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 예전의고 있는 의미의 복합성을 인정하고 있다.이러한 견해는 시집을 첫머리에 등장하는 ‘군말’을 통해 알 수 있다.「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의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한용운은 쓸데 없는 말이라고 하지만, 이 서문은 이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과 그 속의「님」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는 군말에서 ‘기룬 것’이라는 표현으로 그는 ‘님’이라는 존재를 어느 한 쪽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범위를 넓혀서 그리운 것은 눈에 보이는 존재이든, 추상적인 존재이든 모두 ‘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님」을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시집 첫머리에서 밝힌 것이다. 정적으로 한 자리에 놓여 있는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것보다도 다의성을 염두에 두고 복합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한용운의 생애와 문학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② ‘님의 침묵’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날카로운 첫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한용운을 대표하는 시로도 유명하지만, 당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유명한 시이기도 하다.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이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의 높이로 인해 한국 현대시의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여 님과의 이별을 확인한다. 그 후 객관적인 사실로서만 존재하던 평면적 사고가 6행에 이르면서부터 입체적인 사고로 변하게 되어 님의 부재로 받은 충격과 슬픔을 승화하여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시킨다. 마지막 연에서는 현상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본질적 존재로서는 남아 있는 침묵의 깊은 경지 속의 '님'을 향해 끝없이 정진하는 모습을 그리며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자아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님’의 세계 밖에서나마 승화된 갈망이 사랑의 노래가 되어 ‘휩싸고 돈다’고 표현해 지속성을 나타내고 있다.이 시가 만들어진 일제 식민지 시대는 처해진 현실상황이 어둡고 암울했다. 이런 상황에서 ‘님’은 침묵할 수 밖에 없으리라 단정 지을 수도 있고, 다른 각도로 보아 종교인이었던 한용운을 생각해보면 인간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부처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즉, 자신은 그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님’(부처)은 끊임없이 도를 닦고 정진해야함을 침묵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가 뒤섞여진 그의 시에서 시인이자 승려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그의 짙었던 서정성을 엿볼 수 있다.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민적 없는 자는 니다.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③ ‘당신을 보았습니다’이 시는 한용운의 시들 중에서 시대적 현실과의 연관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두드러지게 시에 나타나는 작품이다. 즉 이 시에서는 ‘민적’과 ‘인권’등의 단어를 드러냄으로서 나라 잃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드러내며, 또한 이러한 이유로 천대받고 능멸당한 여인의 극한적인 절망과 비분 속에서 역설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시적상황을 보여주고 있다.이와 같은 타락 사회에서 치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적 자아는 윤리와 도덕, 법률은 말만 그럴듯한 것이지, 결국은 권력(칼)과 돈(황금)에 의해 지배되는 허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과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지게 됨으로써 불안감이 고조된다. 마침내 현실의 역사를 부정하고 피안(彼岸)의 세계(불교적 초월의 세계)로 도피하는 삶과, 인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 그리고 현실에 절망하고 그저 자포자기하는 삶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갈등을 겪고 있던 중, '당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극적 전환이 일어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적 자아는 아무리 타락한 현실 세계라 할지라도, 참된 삶을 이루기 위한 정당한 모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을 깨우친다.‘당신’을 발견하는 이러한 시적 상황은 표제시인 ‘님의 침묵’에서 이미 드러난 「님」의 부재를 역으로 존재로 자각하여 파악하는 만해 고유의 변증법적 상상력을 드러내고 있다. 님의 부재를 존재로 파악함은 절망감에 대한 극복을 보여줌으로써 조국의 광복이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일수록 광복을 위한 주관적인 의지를 강화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는 한용운이 조국과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그의 정 있다.
끝나지 않은 동아시아 역사논쟁-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1.머리말2.임나일본부설이란?1) 임나일본부설의 내용2)일제식민지시대의 임나일본부설 대두3.일본의 ‘임나일본부설’4.한국의 ‘임나일본부설’5.임나일본부설에 대응하는 한국사학자들1)학설 소개2)우리나라 학설의 한계6.임나일본부설의 現 상황1)매스컴에 보도된 자료2)일본의 교과서7.맺음말1.머리말사이버 외교사절단인 ‘반크’는 고대 한국(가야지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스페인, 독일, 영국, 미국 등의 주요 웹사이트에서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밝혔다. 반크에 따르면 스페인의 한 대학 사이트와 칠레의 유명한 만화 포털사이트 등은 ‘391년에 일본 군대가 한국을 침략해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어권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4-6세기경 고대 일본이 한국 남쪽에 군사적 식민지를 설치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싣고 있다고 전해왔다. - 2004년 동아일보 기사 중 -고대 동아시아사의 연구 중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롯하여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일 것이다. 이는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초미(焦眉)의 관심사이다. 그 이유는 고대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가야사의 재정립을 위해서, 그리고 한일관계사의 해명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 생각된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앞의 기사에서 본 것처럼 일본의 의해 왜곡된 역사를 다른 나라에서는 사실된 역사로 받아들여지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제해결에 있어 이토록 많은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2. 임나일본부설이란?1) 임나일본부설의 내용일제시대 이래 한, 일 양국 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논쟁을 펼친 학가 되었다.특히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 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을 다하였다.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견해는 일본 지식인들의 의식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서구열강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자 이는 더욱 확대 생산되었다. 군국주의자들은 근대화 추진과정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한국을 침략해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른바 정한론이었고, 그것의 역사적인 주된 근거가 바로 임나일본부였던 것이다.결국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한반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3.일본의 ‘임나일본부설’1)일본서기(日本書紀)일본서기는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밖에 계도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덴무[天武]왕의 명으로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중심이 되어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 일본의 역사서는 임나일본부설에 가장 힘을 실어주는 근거자료가 되는데,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49년(369)조에 따르면 신공황후가 한반도에 황전별, 녹야별 등 왜군을 보내 369년에 백제 장수들과 함께 신라를 치고 비자벌(지금의 경상남도 창녕)·남가가(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안라(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가라(지금의 경상북도 고령) 등 가야지역의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지금의 전라남도 강진)에 이르고 남만(南蠻) 침미다례(甚彌多禮 : ≪진서≫ 장화전에 나오는 新彌國)를 정벌하고 비리(比利)· 벽중(陽中) 등 4읍(邑)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그 후 한반도 남부지역인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그 세력은 백제, 신라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562년에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직접 지배하였다고 보고 있다.다시 말해 왜왕에게 작호(爵號)를 내려 주어 한반도에서 지녔던 과거의 위상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남송을 계승한 남제(南齊 : 479~502년)도 이 왜왕의 작호를 인정해 왜는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 대부분의 주도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4)칠지도(七支刀)칠지도는 고대 한?일 관계사를 구명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로 알려져있다. 한?일 양 학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현재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되어있는 철제 칼로 곧은 칼의 몸 좌우로 가지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있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으므로 칠지도(七支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973년에 앞뒷면에 새겨진 명문이 소개되면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의 실물로 추정되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즉, 일본서기에 372년에 백제의 사신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 한 자루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가 그 실물이며, 바쳤다는 것은 당시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칠지도의 명문은 표면과 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모든 字를 다 알아볼 수 있지는 않지만 새겨져있는 한자 중 임나일본부설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부분은 ‘供’이라는 字이다. 즉, 명문 가운데 ‘공후왕(供候王)’의 ‘供’은 초기에 바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로써, 일본은 ‘백제헌상설’을 주장하여 칠지도를 백제로부터의 헌상품으로 간주하였다.즉, 칠지도를 명문을 바탕으로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지배를 인정한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를 합리화 하였다.4. 한국의 ‘임나일본부설’① 일본서기(日本書記)‘임나일본부설’의 기초적인 틀을 제공한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일본의 왕가(천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일본학계 내에서도 그 신빙성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신공왕후가 임나를 정벌했다는 369년은 일본서기에는 24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무려 120년의 오차가 있다. 하지만 비문의 앞부분의 주어는 왜이지만 뒷부분의 주어는 고구려로 볼 수도 있다. 즉, ‘왜가 신묘년(辛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이다.실제 이 비문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일본의 칭송을 위한 것은 아니며, 광개토 대왕비이기에 당연히 곳곳에 주어를 생략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한 역사적 사실도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보여 진다. 또한 일본 육국 참모부에 의해 상당한 비문 변조가 행해졌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도 있기에 비문 자체의 내용조차 그 신빙성이 의문시 되고 있다.③ 왜왕의 책봉기사이것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송(南宋:420 - 479)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宋書)에서 보여주는 근거이다.송서의 왜전을 살펴보면 남송에 조공을 바친 왜의 5왕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무왕(武王)이 스스로 왜, 백제, 신라, 임나 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남송의 황제는 그에게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관작을 수여했다. 이 관작은 사실을 반영한 것이고, 그러므로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는 것이 앞서 주장한 일본 측 주장이다.그러나 관작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임나‘와 ‘가라‘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모두 가야를 가리키는 것인데 왜 중복되어 나타나는지, 또한 이미 예전에 멸망한 진한과 마한이 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또한 남제(南濟:479 - 502)에서는 백제의 중신들에게 조선태수, 대방태수의 관직과 아울러, 당시 북위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북중국의 지명이 붙은 광양태수, 청하태수 등의 관직을 수여하고 있는 것처럼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왜왕의 요청에 의해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지역의 왕을 칭하는 것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무왕이 받은 관작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허구적인 명예직이었음을 시사한다.④ 칠지도(을 재건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임나국의 서부에는 백제계 분국이, 동북쪽에는 신라계 분국이, 동쪽에는 고구려계의 분국이 각각 위치했으며 더 동쪽에 야마토 정권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주장했다.그러므로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 기사는 이 임나국을 중심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의 분국과 야먀토 조정이 일본열도 내에서 벌인 사건이지, 결코 한반도 남부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그의 주장은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의 본국과 연계를 가진 분국들이 일본열도를 지배하였다는 정반대 논리를 폄으로써 한국의 일본열도 진출론을 확립하였다. 이른바 ‘분국설(分國說)’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임나일본부 문제뿐만 아니라 고대 한일관계사와 관련된 일본학계의 기본적 발상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연구였다.한편 남한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렇다 할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국사학자인 천관우가 ≪문학과 지성≫에 기고한 일련의 논문을 통해 본격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였다.그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관련 사건의 주체는 야마토 조정이 아니라 백제였다고 주장하였다.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에 의해 ≪일본서기≫ 편찬의 기본 자료가 정리되면서, 원래 백제가 주체로 나온 기사들이 왜가 주체로 된 기사로 바뀌었다고 보았다.4세기 말경에 왜가 ‘가라칠국(加羅七國)’을 점령하였다는 기사는 백제의 가야제국 정복이며, 6세기 중반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는 다름 아닌 ‘임나백제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지역의 통치를 위해 설치한 파견군 사령부와 같은 성격이므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이것이 그가 주장한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設)이다.또한 김태식은 ‘임나일본부’를, 왜와 가야의 교역과 외교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안라에 설치되 기관이며 왜인과 가야계 왜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부합되도록 ‘임나일본부’를 ‘안라왜신관’으로 바꾸어 인한다.
한국현대문학의 이해 REPORT채만식의 「치숙」작품론◎ 들어가는 말매일 우리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에는 약 70여년 전 한 단편소설이 연재되고 있었다. 소설이 연재되고 있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등 따시고 배부를 때가 아니었고 주권을 상실하고도 몇 십년이 지난 시기였다. 사실, 이 소설은 아직도 1인칭 관찰자 시점인지, 아니면 주인공 시점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다. 도탄에 빠진 시대상황에 순응하기를 넘어 만족하는 ‘나’와 ‘나’가 너무도 어리석게 여겨지는 삼촌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소설의 이름은 ‘치숙’이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어리석은 삼촌’ 정도로 풀이가 된다.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왜 삼촌이 어리석은지 자꾸만 이유를 가르쳐준다. ‘나’의 입장에서 삼촌은 사회주의에 흠뻑 담겨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른다. 쓸데 없는 이념에 사로잡혀서 옥살이를 하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나’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막걸리따위와 비교할만한 가치 없는 것이다. 그 따위 사회주의 때문에 입에 풀칠하는 아저씨가 어리석다 못해 딱하기까지 한 모양이다. 소설은 ‘나’의 숙부를 보는 관점에서 계속 이어진다.이 소설의 작품론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채만식의 많은 소설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작품이었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글이 쉽게 써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소설 중 내가 가장 크게 생각하게 되는 특징은 아이러니가 차곡차곡 겹쳐지면서 글은 미묘한 재미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러니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제목은 어리석은 삼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그 아저씨를 어리석다고 하며 현실에 타협하며 만족하는 삶을 사는 ‘나’의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이중성이자 아이러니이며, 이는 그다지 어렵게 생각될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어쨌든, 몇 번이나 읽어본 몇 안 되는 채만식의 작품이기에, 그동안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느낌과 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글로 옮겨보고자 한다.◎ ‘나’와 ‘아저씨’요즈음 시대와 결부시켜보면, ‘나’는 굉장히 성공할 타입이다. 나름대로 자신의 장래에 대한 생각도 확실하고 딱 그만큼의 노력을 한다. 계획도 확실하다. 갈림길 앞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길이 어디인지를 잘 판가름 할 수 있다.“내 이상과 계획은 이렇거든요.우리집 다이쇼가 나를 자별히 귀여워하고 신용을 하니깐 인제 한 십 년만 더 있으면 한밑천 들여서 따루 장사를 시켜 줄 눈치거든요.그러거들랑 그것을 언덕삼아 가지고 나는 삼십 년 동안 예순 살 환갑까지만 장사를 해서 꼭 십만 원을 모을 작정이지요. 십만 원이면 죄선 부자로 쳐도 천석군이니 머, 떵떵거리고 살 게 아니라구요.그리고 우리 다이쇼도 한 말이 있고 하니까 나는 내지인 규수한테로 장가를 들래요. 다이쇼가 다아 알아서 얌전한 자리를 골라 중매까지 서 준다고 그랬어요. 내지 여자가 참 좋지요. “‘나’가 21세기에 살고 있었다면, 그 모습은 아마도 현대의 드라마 속에서 성공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21세기가 아닌 일제강점기 속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드라마 속 악역과는 조금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속물근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나’는 항상 계산이 빠르다. 여기까지는 여느 드라마 악역과 다를 바가 없다. 차이점이라면 ‘나’는 완전히 자아를 상실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시대적인 배경도 이유가 된다.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일본인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어버리려고 했다. 그 바보들 중 한 명이 ‘나’인 것이다.그 바보는 소설을 읽는 내내 어느 한 사람을 바보라고 한다. 바보에게 바보취급 당하는 ‘치숙’은 사회주의에 물들어 가정을 내팽개친 무능력한 가장이다. 세상의 변화를 바라고 그에 따른 행동도 보이지만 결국 현실에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던 당대 지식인을 표현하였다.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서 살다 나와 이제는 병이 들어 가족에게 폐가 되는 사람이다. 이런 모습을 ‘나’는 줄곧 비판한다. 그에게 비춰지는 아저씨는 나름대로의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나가는 자신과는 다르게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심지어는 손윗 어른이지만 가르쳐들려고도 한다."아저씨! 경제라 껏은 돈 모아서 부자되라는 거 아니요? 그런데 사회주의라 껏은 모아둔 부자 사람의 돈을 뺏아 쓰는 거 아니요?""이 애가 시방!"소설 속에서 ‘나’와 아저씨는 계속적인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그 대화는 항상 평행선을 달린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시 현실과 타협하려는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가치관과 지식인의 세태를 비판하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민족의 뿌리를 잘라버리려는 어두운 현실에도 만족할 수 있는 속물근성을 비판하면서도, 그에 대응하는 사회주의 지식인의 아둔한 생각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결국 채만식은 ‘나’와 ‘아저씨’ 둘 다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현실이다.치숙에서 반영되는 현실상황 중에 또 소재가 되었던 것은 ‘사회주의’였다. 둘의 대화에서 ‘나’의 입장에서 본 사회주의는 편향적이고 극단적이었는데, 아저씨는 이러한 이념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회주의에 대한 관점은 당시의 일반인들의 시각을 대변했다고 이야기 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을 채만식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교묘하게 비판하고 있다.
북한 대남 외교 전략의 어제와 오늘과목명: 현대북한사제출일: 2007. 06.15目 次▷들어가면서1. 어제의 북한 대남 외교전략과 남한의 간첩 사건1) ‘간첩’이란?2) 우리나라의 ‘간첩’사건3. 오늘의 북한의 대남 외교 전략4. 남한의 대북 외교의 변화▷ 나가면서▷들어가면서북한에 대한 주제로 써야하는 레포트...사실 한 번도 이런 무거운 주제로 레포트를 써본 적도 없고 지금 역시 ‘북한’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떠안고 글을 진행하기에는 내가 아는 지식도 별로 없다.그렇기에 글을 어렵게 끌고 갈 능력도 되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그동안 북한에 대해 궁금했었던 사항들에 대해서 깊이 알아보고 정리해보기로 했다.몇 십 년 전만 해도 북한은 너무나도 은밀한 곳이었다. 이 쪽 얘기 잘못 꺼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지금은 그래도 세상이 많이 변해서, 금강산 관광도 갈 수 있고, 평양 등 제한적으로나마 나라일 하는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개방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통일의 가능성도 열어주었고,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등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공기 속에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그렇다면, 내가 제일 궁금해 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간첩,많이 들어왔던 단어이다. 사실, 북한을 겨냥한 단어는 아니지만, 우리 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정서상 간첩이라는 말을 들으면 북한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세상이 변한 만큼 북한이 남한을 대하는 외교 전략등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확실한 것 같다.아직까지도 안심하지 못하고 있는 ‘간첩’이라는 단어, 우리나라에서의 그 단어의 역사와 남한에 대한 북한의 달라진 대남 외교 전략에 대해 살펴보고 내 자신 스스로 궁금증을 풀어보는 식으로 전개해보려고 한다.1. 어제의 북한 대남 외교전략과 남한의 간첩 사건1948년 이후 몇 십 년간 북한은 ‘민주기지론’에 입각하여 무력통일을 추구하였다.당시북한지도층은 대한민국정부를 타도하고 적화통일을 달성하 자를 통틀어 말한다고 한다.그렇다면, 목적 역시 다양하게 설명될 텐데 나누어서 조사해본 결과 국가간의 외교기밀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스파이와 군사기밀사항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스파이 외에, 사기업간에 발명이나 기업계획 등, 사업상의 기밀을 탐지하여 경쟁관계에 있는 상대기업에 누출하는 산업스파이 등이 있다.사실 이런 여러 목적을 갖춘 간첩 혹은 스파이를 주제로 다룬 영화들도 상당히 많은데 그런 영화들을 접하다보면 간첩에 대한 역사적 궁금증이 생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이제부터는 다른 목적은 다 배제한 채 북한과 남한의 역사를 연결하는 간첩을 주제로 알아보겠다.2) 우리나라의 ‘간첩’사건한국의 간첩사건은 6·25전쟁 이후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해 온 북한과의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이제까지의 간첩사건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는 6·25전쟁 직후에 고정간첩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기존의 남조선노동당 당원과 사회주의 신봉자들이 남한 내에 안정적으로 거주하며 간첩활동을 한 경우이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보이지만, 남조선 노동당의 임무를 수행하는 간첩을 말한다.두 번 째는 북한 내 강경파의 득세에 따라 대남(對南)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북한 내 지도부가 무장 게릴라세력을 대량 남파한 시기이다. 1960년대 말에 정점에 달한 무장 간첩사건은 1969년 31명의 무장 게릴라가 청와대습격을 목표로 남하한 1·21사건, 동년 11월 약 90명의 무장 게릴라가 경제혼란과 산업시설파괴를 목표로 남하한 울진·삼척 간첩사건 등이 있다. 세 번 째는 정보 수집을 목표로 한 비무장 요원의 남파이다.이 외에도 자생적으로 생겨난 남한 내 사회주의 조직이 북한과 연계하여 청년학생과 지식인을 포섭함으로써 민중봉기를 획책하려는 사건들이 있다. 1964년의 인민혁명당사건, 1968년의 통혁당사건, 1979년의 남민전사건, 1992년의 남한노동당사건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사건들에 대해서는 관계당국은 간첩사건으로 규정하는 반면에 당사자들은 조.이때부터 게릴라들은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 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 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군경합동 수색진은 일당 중의 김신조를 발견, 생포하는 한 편, 이들에 대한 소탕에서 그날밤 게릴라 5명을 사살한 데 이어,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 합동수색전을 전개,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 전은 종료되었다.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였다. 또한,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해군 정보수집한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 4척 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는 사건이 돌발하였다.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유엔군 측 수석대표는 푸에블로 호사건과 함께 북한 게릴라 부대의 서울침투와 그들의 민간인 살상 등 만행을 규탄하였다. 북한측은 한국이 휴전당사자가 아니므로 1·21사태는 본회담의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등 무 리한 답변으로 그들의 만행을 호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이 사태가 좌경극렬분자의 행동이었음을 시인하였다.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 두르게 되었다.②울진, 삼척 간첩 사건경상북도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서 대규모 무장공비침투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사건이라고 칭하는데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울진,삼척 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등산복, 신사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펼치게 하였다.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1월 3일 새벽 지역주민들을 모아놓고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총칼로 위협하였는데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종료됐다. 우리 측도 전사 82명, 전상 67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계속된 무장공비 침입과 천인공노할 만행에 분노, 대북 경각심과 반공의식을 새롭게 가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도 이를 대간첩작전 체계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긴요한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③인민혁명당 사건줄여서 ‘인혁당 사건’이라고도 한다.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으로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사건 직후 한국인권옹호협회가 무료변호를 맡고 피고인에게 가해진 고문내용을 폭로하여, 1965년 1월 20일 선거공판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도예종, 양춘우는 각각 징역 3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하여 검찰은 불복, 항소심을 제기하였고, 그 해 5월 29일 열린 항소심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6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고, 1975년 4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이 구속되었다. 이 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등 8명은 사형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20시간 만인 4월 9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해외에도 알려져, 국제법학자협회가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기도 하였다.현재 과거사 진실 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74명을 포섭, 학원가를 중심으로 시중에 침투해 반정부투쟁을 표방하면서 사회변란을 기도하고 궁극적으로는 북괴의 통일노선을 지향했다”라고 하면서 덧붙여 “74명의 계보를 파악하고 20명을 검거했다.”발표했다.박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이 사건은 소위 ‘공안사건’으로 치부되어 수차례에 걸친 정치범과 양심수의 석방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왔고, 인권단체에서도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만큼 남민전 사건은 민감한 주제와,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힘겨운’ 사건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남민전 조직화의 주요계기가 된 유신의 폭압적 정치는 긴급조치 9호 및 사회안전법의 제정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나마 존재하고 있던 합법운동의 공간은 완벽하게 배제되었고 변혁적 운동이 비합법 지하운동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창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남민전의 경우 초기의 조직결성에 대한 준비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조직준비 과정에서 김병권이 남민전의 강령 및 규약 초안을 소지하고 있다가 반공법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조직결성은 이재문과 신향식을 중심으로 진행하게 되며 곧이어 중앙위원으로 안재구가 참여하게 된다. 그 후 이해경이 후보중앙위원으로 보강된다.남민전의 조직노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위조직의 결성시도 과정에서 1960년대부터 제기된 조직노선 논쟁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70년대 지하 저항운동세력 사이에서는 사회성격이나 변혁의 성격, 모순구조의 인식 등으로 말미암아 전위적 지도조직 건설론과 전위조직 시기상조론으로 이견이 분출된다. 전위조직 건설론은 4월 혁명의 좌절원인을 전위적인 지도조직의 부재에서 찾고 정치적 지도조직의 건설을 시급한 과제로 제기하면서 전위당건설론과 통일전선조직 건설론으로 대별되어 논리가 발전되어 전자의 흐름속에 제1차, 제2차 인혁당사건으로 드러나고, 인혁당사건과는 성격을 달리하지만 독자당 건설의 움직임은 통혁당 사건으로도 나타났다. 또 후자의 흐름은 구심을 가진 세력으로 형성되지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