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문 ‘장미의 이름’-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장미의 이름’이라는 영화는 어느 노인의 독백과 어둡고 음울한 기운이 도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중세시대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 기독교 중심의 억압사회, 암흑시대, 페스트의 창궐 등 -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듯이 말이다. 지금은 노인이 되어버린 앗소가 젊은 시절, 자신의 스승이었던 수도사 윌리엄과 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며 겪었던 일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이야기 속의 수도원, 살인사건, 이단심판관, 마녀, 진리, 아리스토텔레스, 안경, 빈민, 웃음 등의 키워드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중세사회를 이해하는데 있다. ‘중세사회’라는 시기를 대략 300-500년에서 1500년 사이 약 1000년의 기간이라 보지만 14세기에 이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14~16세기)가 시작되므로 엄격하게 기간을 구분할 수 는 없다.) 르네상스가 그리스 로마를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중세는 사이에 끼인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가 지중해를 배경으로 했다면 중세는 유럽대륙으로 주 무대를 옮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기반이 기독교가 된다.이 영화의 배경은 1327년 이탈리아의 수도원으로 중세말기사회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당시 프랑스 황제(필립)가 강권으로 교황을 3대에 걸쳐 아비뇽에 유폐시켰다. 이를 반대한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를 교황이 파문시켜 교회와 국왕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베네딕트파와 프란체스코파는 교황과 황제를 각각 지지하면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교회는 점점 주된 목적을 망각하고 온갖 부과금과 세금 그리고 벌금을 거두며 재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세속적으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불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등을 돌렸고 일부는 신비주의와 이단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이에 교황청은 정통파 프란체스코회라 불리는 성 프란체스코의 추종자들을 탄압하고 크리스트와 그의 사도들이 아무런 재산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할 수도사들 역시 재물을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프란체스코파의 선언을 묵살하고 이단으로 몰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윌리엄은 프란체스코회의 일원으로 영화 속에서 크리스트의 재산소유에 관한 문제로 교황청과 다른 수도회 대표들과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이 자신들의 교리만을 주장하며 대립할 때 경제적 불황과 사회적 신분 갈등,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빈민들이 증가했다. 수도원이 빈민구제를 위한 활동을 하였지만 이는 빈민의 근절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설자의 영적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구빈사상이 존재했다. 영화 속에서 새벽이 되면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을 수도원 밖으로 내보내고 빈민들이 그것을 주워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교회가 마치 선을 베푸는 양 행동하지만 그것은 위선일 뿐이며 권위의식의 표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어려운 살림에도 교회에 헌납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장면에서 수도사들은 이러한 기부를 통해 내세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서민들이 현세에 안주하고 만족하도록 조종한다. 헌납을 하러 온 궁핍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을 줄 세우면서 하대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교회, 나아가 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수도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윌리엄의 합리주의와 과학적 사고, 진리탐구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베네틱트 수도원의 호르세나 이단심문관인 베르나르 기를 통해 비합리주의, 신앙에 대한 아집과 맹신, 기존 교권의 보수성등과 대립하게 된다. 14세기 중세는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전통적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이념이나 체계가 도입되는 시기로 이 영화는 윌리엄의 수도원 살인사건 해결과 호르세, 베르나르 기의 죽음을 통해 그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의 둘째 권 『희극』에 대한 윌리엄과 호르세의 해석대립은 영화를 이어가는 스토리의 핵심이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후로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이 생기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중세사회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게 되고 나중에 고대 세계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기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3세기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번역자들과 아랍 철학자들의 주석 첨부로 인해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려지고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리스교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반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생겨나기도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저서는 금서가 되었다. 호르세가 수도사들을 죽이면서 까지 알리려 하지 않았던 수많은 금서들이 베네틱트 수도원의 철탑에 숨겨져 있었다. 특히『희곡』에 대해 호르세는 인간의 웃음은 두려움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사람들이 두려움을 잊으면 더 이상 신앙을 찾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난후 파리의 주교는 219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관한 명제에 관해 이단을 선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행복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있다’ 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금의 고통을 감수하고 기독교를 통한 절제와 금욕의 삶을 통해 내세에는 구제 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웃음이란 바로 현세의 행복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호르세는 그토록 웃음을 경계했는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호르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앙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 도서관에 대한 접근을 철저히 통제한다. 이 영화가 ‘다빈치 코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빈치 코드’ 역시 예수와 마리아에 관한 비밀과 비밀 결사단, 성당기사와 같은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교회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호르세와 오버랩 되었다. 이것은 비단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수많은 전쟁과 테러가 종교적 신념의 이유로 자행되고 있다. 또한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고 그들은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서로를 배격한다. 기독교의 시작점으로 올라가면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사상을 비판하여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면서 믿음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그릇된 맹신이나 신념에 대한 아집은 이 기본적인 사실을 잊게 만들고 자신만의 세계에 가두어 버리는 것 같다. 윌리엄이 사건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이 과학적, 합리적이긴 하지만 그 역시 학문과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한 것 같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먹을 것을 구하러 수도원에 들어왔다가 마녀로 몰려서 화형에 처해지려는 여자를 앗소는 구하려 하지만 윌리엄은 ‘악법도 법’이라며 그 여자를 구하려 하기보다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자신의 진리탐구에 맹목적이다. 윌리엄이 앗소가 그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그녀를 잊지못하는 것을 알고나서 수도사로서의 질타보다는 한번이상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으며 금욕적으로 사는 것의 행복함을 친구로서 이야기 해주는 장면에서 당시 수도사들에게 보여 지던 엄격함이나 규율적인 면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중세시대에 이단심판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단이란 정의가 얼마나 자의적이며 그것의 명목하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단심판관은 거짓자백을 받아내서라도 자신들의 교리와 다른 것을 믿는 자는 모두 악마로 여기고 특히 여자에 대해서는 죄악의 근원이라 하여 마녀사냥을 통해 수많은 죄 없는 여자들을 화형 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나와 다름, 우리 것과 다른 것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수많은 약자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변화와 다양성에 대해 그것에 저항하여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두려움, 혼란 등이 14세기 중세의 과도기적 특징을 바탕으로 이 영화에 잘 녹아있는 것 같다. 이 영화가 중세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지금 우리가 있는 역사속에서도 생각해 봐야 할 거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제목인 ‘장미의 이름’이란 의미는 영화를 보고난 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과제를 쓰려고 준비하면서 내 나름의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장미의 이름』이란 원작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라틴어 6보격 시구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를 보고 그것의 의미를 지난날의 진리나 체계는 시간이 지나거나 변화가 찾아오면 그것은 실체는 없어지고 그것의 이름만 남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하나의 세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나 영원불멸의 진리는 허구라는 것이다. 항상 변화와 다양성에 대한 유동적 사고를 지향하지만 나 역시 나만의 세계에 갇혀 그것을 절대선이라 믿으며 살지 않았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