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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스페셜)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 감상문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김산이란 인물은 미국 출신의 여기자였던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노래”로 오늘날 되살아난 인물이다. 오늘 영상을 보며, 오랜만에 가슴에서 무언가 뭉클거리며 용솟음쳤다. 역사교육을 4년이라는 시간동안 수학하였지만, 김산은 나에게 그리 익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국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다 이름 한 번 정도 보고 “아. 이 사람이 독립운동가였구나”정도 나에게 각인되었던 인물 일뿐이었다. 오늘 영상을 통해 본 그의 삶에 관한 족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보다도 더 기구하고 장렬하였을 뿐더러 그의 비통한 죽음은 안타까움을 더하였다. 차라리 그의 죽음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라는 묘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님 웨일즈는 김산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당당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인사를 하였다” “수수하고 침착하며 자제력은 있었지만 예민하고 신경질 적이었다.” 북경 시절 김기창의 집에서 찍었다는 사진 속에 들어있는 김산을 볼 때, 나 역시 그의 얼굴 한 가득 피어있는 만연한 미소에서 그의 넉넉한 여유와 위풍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님 웨일즈가 김산을 만난 것은 김산이 죽기 1년 전이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김산의 예민하고 신경질 적이었다는 성격은 그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고초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았을까한다. 김산이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그는 장지락이란 본명이 있었지만 님 웨일즈가 김산으로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김산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에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뒤 상하이로 향한다. 상하이에서 당시 김산은 안창호와 이광수에 영향을 받기도 하며, 무정부주의자인 의열단 운동에 매료된다. 하지만 곧 테러를 통한 행동은 결국 이상에 불과하다 評하고 아나키스트를 벗어나게 된다. 무정부주의자의 한계를 느낀 김산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간다. 그리고 베이징에 위치한 협화의학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의학과 영어를 익히며, 공산주의에 발을 디디게 된다. 이 시기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중국혁명에 가담한다. 조직적 국제주의 노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공산당에 적극 가담한다. 1927년에 있었던 광저우에서 봉기 때 김산은 군사참모로 참가하기도 한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행,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중국 국민당에게 붙잡힌 후 일본의 식민지인이라는 이유로 조선에 있는 일본감옥으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결국 석방된다. 그러나 김산은 또다시 체포되는데, 결국 석방되지만, 당으로부터 제명된다. 그 이유가 참 가관이다. 너무 감옥에서 빨리 풀려난 것이 수상쩍다는 것이다. 그를 제명시키고 중상모략 하는 주요 인물 중에는 한위라는 같은 동포도 있었다. 그는 동포로부터 모략을 당하고,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다. 이 충격에 그는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딛고 일어나서 김산은 다시 대중운동을 전개한다. 김산은 까오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도중, 당은 무장봉기를 일으킬 것을 명령하게 된다. 김산은 어쩔 수 없이 그 명령을 수행하고 그의 예상대로 무장봉기는 학생들의 희생만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간다. 이 일로 김산은 관료주의에 물든 중국 공산당에 싫증을 느낀다. 이러한 김산의 성품은 그가 주장한 바대로 사회주의를 연구했지, 사회주의를 신봉하거나 맹신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혹여나 그가 사회주의를 신봉하였더라도 위에 사건을 보건데 그는 실용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앞뒤재지 않고 저돌적인 유형의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사리분별을 하여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을 잘 응시할 수 있던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시기에 조선혁명의 지도자들은 비밀리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그러고 나서 김산, 김성숙, 박건웅 등이 주축이 되어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한다. 1937년 8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조선민족의 독자성을 확인받기 위해 김산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대표로 옌안으로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학을 가르치게 된다. 이때까지도 김산은 당적조차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옌안에서 김산은 오늘날 그의 혁명적인 삶을 전하게 해준 님 웨일즈를 만나고 님 웨일즈는 ‘아리랑의 노래’라는 책을 김산과 공동집필하기에 이른다. 역사는 필연과 우연의 조화라는 말이 있다. 김산이 이때 님 웨일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님 웨일즈가 자신의 영어를 통역해줄 통역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김산이란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을 확률이 농후하다. 김산은 ‘아리랑’(아리랑의 노래)에 자신과 연락했던 사람들의 인명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은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보안상의 이유로 님 웨일즈에게 이 책을 2년 후에 발간해 줄 것을 부탁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자신의 신변상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으며 동지들의 생명을 철저히 보호하려 하였다. 역설적인 것은 억울하게 당적 회복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당원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 품기는 勇者의 모습과 浩然之氣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그 이후에는 그가 만주로 향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도중 김산의 죽음이 일본의 일간지를 통해 전해지게 된다. 1938년 캉성의 지시로 일본의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결코 사상적으로 위험인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권력에 도전적인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보내었다. 1966-76년 동안 중국에서 문화혁명을 이끌며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했던 마오쩌둥의 모습은 1930년대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나마 중국에서는 1984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김산의 명예를 공식적으로 회복시켜줬다. 그러나 그 사유는 참으로 졸렬하기 이를 때 없다. ‘역사 속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0.12.15| 2페이지| 1,000원| 조회(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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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구실크로드) 페르시아의 고대 도시 페세르폴리스 감상문 평가A+최고예요
    페르시아의 고대 도시 페세르폴리스이란의 동남부에 있는 어느 사막에 들어갔다. 이 길은 실크로드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다. 옛 고대사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 길은 끝없이 계속된다” 시스탄지방은 한 나라 사신들조차도 찾아오길 꺼려하던 곳이자, 기원전 10년 전부터 유리교역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고, 자그마한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우리는 시스탄에서 사막 한 가운데서 거대한 호숫가에 도착했다. (헬만드호수) 우리는 이곳 지방 사람들의 갈대 보트를 타고 이동하였다. 수심은 약 1미터 정도였는데, 생각보다는 안전했다. 이 갈대보트는 생명이 짧다. 사람이 타고 다니면 6개월이고 짐을 실으면 2개월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갈대는 실로 이곳 지역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이다.한 시간 남짓 타고 가니 직경 2Km, 높이 10m의 섬인 쿠-이-콰자섬(신이 사는 신성한 섬이라는 페르시아어)에 도착했다. 왕궁지역과 주거지역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궁궐은 약 2천 년 전 파르티아 시대에 지었던 것이다. 사파족은 한때 이곳을 점령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우리는 1929년 독일의 헤르쯔펠트 교수가 찍은 벽화사진을 보게 되었다. 월계관 장식은 그리스 양식을 나타내지만 이제는 이러한 벽화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벽화가 모두 지워져버렸다. 이 섬에 발루치라는 부족이 있다. 이 섬에서는 어디를 가나 역사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사산조페르시아부터 내려오는 역사유적을 볼 수 도 있었다.호숫가를 다시 가보았는데, 한 어린 소녀가 흙벽돌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이 소녀가 만드는 방법은 2천 년 전 이곳 궁궐을 지을 때의 방법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한다. 또한 우리는 우연히 갈대보트를 만드는 흔적도 보았다.우리는 쿠이좌자의 작별을 고하고 고대도시 페르세폴리스로 향했다. 하지만 이곳을 가기 전에는 루트사막을 지나쳐야 한다. 아직 9월 하순이라서 습도는 제로였지만, 낮 온도는 섭시 45도를 웃돌았다. 지각온도 최고 70도까지 사는 이곳에서도 우로마스틱스라는 도마뱀이 살고 있으니 생명의 위대함으로 다시금 느낀다.특이하게 이곳에는 등대탑이 있었는데, 바다는 없지만 끝이 없는 사막은 바다와 버금가서 지은 이름일 것이다.장안에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4천명이 거주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 왕조와 페르시아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페르시아 음악은 중국인들에게 흥미를 주었고,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궁중음악에 영향을 끼쳤다.이곳은 쿠이콰자 섬에서 서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진 밤 유적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은 성곽유적이다. 밤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길이만 3킬로미터이고 내부는 3겹으로 되어있었다. 밤은 6~ 4세기인 아카메니드 왕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전성기는 7~11세기로 주요 교역로들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실크 제품과 면제품 의류로 유명 했다고 한다.우리는 사막에서 한 차례의 바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사막에는 오후가 되면 한 차례 회오리바람이 분다. 그것은 지각에 온도가 절정에 오르면 지각의 온도가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다보니, 고속도로에는 석류를 파는 노점이 늘어서 있다. 페르시아는 석류의 원산지이기도하다. 이러한 석류가 비단길을 따라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까지 전파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석류는 우리나라의 석류보다 2-3배는 크고 즙도 많다. 이곳 사람들은 갈증을 이기기위해서는 석류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우리는 남부도시 야즈드에서 쿠아나트(지하수로)를 보았다. 이 쿠아나트는 길이가 5-6미터이다. 그 밑에는 수로가 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흘러나온 물은 각기 여섯 마을로 흘러든다. 이곳 사람들은 이 물로 농사를 한다. 쿠아나트를 따라서 야즈드 근처의 모발레케 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은 조그마한 오아시스 촌이다. 이들은 모두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해서 일명 배화교라고 불렀는데, 마을 구석구석에 성화를 모시는 제단이 있다. 우리는 이 마을의 한 농부의 집에 들렀다. 마침 오늘은 어머니의 제삿날이라서 가족과 친지가 그의 집에 모여 있다. 명복과 안녕을 빌기 위해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를 낭독하기 위해 사제 한명을 초빙했다. 제삿날 가족친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게 이들의 풍습인데. 우리나라 정서와는 사뭇 달랐따. 오늘날 이란의 국교는 이슬람교다. 그래서 그런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은 완전히 격리된 채 사는 것 같다.
    독후감/창작| 2010.12.15| 2페이지| 1,000원| 조회(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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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구실크로드) 터키의 비단 도시 감상문
    터키의 비단 도시터키 중앙에 우뚝 솟은 아나톨리아 고원을 지나간다. 이곳에는 카파도치아라고 하는 지방이 보인다. 이곳은 기암절벽으로도 세계에서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기암지대에에는 벌집 같은 굴들이 있는데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속세를 떠난 그리스도교의 수도사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니 왠지 이름 모를 친근감이 든다.4-14세기에 걸쳐 이곳 카파치아지대에는 2천여 개의 동굴사원이 세워졌고, 수도사들이 엄격한 규율아래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곳 동굴사원(애플사원)에는 여려 벽화와 각가지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벽화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기초로 하였는데 비잔틴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힘이 넘치는 획은 이곳 카파도치아인들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찍이 인적이 끊어진 카파도치아 바위산 속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기독교 세계가 번영하고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카파도치아를 떠나 예정된 코스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우리의 눈앞에는 서쪽으로 펼쳐진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비단생산지로 유명한 악차랄 마을로 당도하였다. 터키 서쪽의 여러 비단생산지 중에 이곳 악차랄 만큼 누에고치의 품질이 좋은 것은 없다고 한다. 한 무리의 여인들이 마을 공동 소유의 큰 화로 주위에 모였다. 이곳에서는 10여 농가가 화로를 하나놓고 공동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대에 불을 지펴 화로가 적당히 익혀지면 타는 나무를 걷어 내고 그 안에 빵을 굽는다.이들은 이 화로에다 빵뿐 아니라 기타 갖가지 별미도 같이 굽는다. 아마 이들이 이렇게 마을 단위로 음식을 하는 관습은 비단생산 계절 동안 일손이 너무 바빠서 노동력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동안 양잠을 하는 일손도 누에고치를 거두기에 바쁘다. 여기 이 알리슐래 씨는 3대째 이곳에서 누에를 치면서 생활한다. 그는 내일 열리는 양잠시장에 고치를 모두 내다 판다고 하였다.기원전 1세기 베르길리우스는 “비단은 숲속의 나무 잎으로 짠다”라고 비단 직조 방법을 말하였다. 중국에서 조차 비단 직조기술은 극비에 붙여졌기에 이러한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비단방법이 어떻게 서단에 전해졌을까? 현장법사가 전했다는 전설과 지금부터 1800년 전 호탄왕국의 왕이 중국에서 왕비를 들여올 때 왕비가 전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렇게 전래된 비단직조기술이 전 유럽으로 파생되었을까? 이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AD 6세기 중엽 두 명의 승려가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왔다. 이 두 승려가 나무 지팡이 속에 누에를 숨겨 들여왔다고 한다. 당시 이들 승려들은 유스티아누스황제를 알현할 때 이 누에고치를 황제에게 바쳤다는 서양판 문익점의 이야기이다.부르사 시는 숲으로 둘러 싸여 있어 녹색의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부르사 시는 아시아 대륙 가장 끝단에 있는 도시이다. 여기서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불과 200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 A.D 14세기 이 도시는 오스만터키제국의 도시로 번영했다. 시조 술탄 오스만칸 황제의 능이 여기에 아직 남아 있다. 부르사 시는 역시 비단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기후가 온화해서 오스만 터키제국 시대부터 휴양지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부르사 시 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불과 40일도 채 유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각광을 받았었다.부르사 시의 심장부인 곳에 ‘코자한’(터키어로 누에고치를 파는 장소)이란 석조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15세기에 건축하였으며 대상들의 숙영지. 즉 여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코자한은 그러한 곳이 아닌 당시 상인들이 거주하던 2층에는 비단 도매업자들의 사무실이 들어섰다. 우리가 운좋겠도 누에고치 경매를 참관할 수 있었다. 코자한의 누에고치 시장은 6월 한 달 동안 계속된다. 이곳에 누에고치 경매 과정은 단순하다. 35명의 도매업자와 일대일로 흥정을 하여 가격을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10시 벨이 울리자 오늘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흥정과정이 매우 격하였지만 흥미롭게 보았다. 가격을 매기고 무게를 달면 그것으로 경매가 끝나버린다.
    독후감/창작| 2010.12.15| 2페이지| 1,000원| 조회(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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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구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서 감상문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서이제 누란왕국에서 170km 정도를 달려왔다. 여기엔 고대 불교도시 미란의 유적이 있었다.오럴 스타인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융합된 훌륭한 미술품을 발견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유심히 지켜본 것은 석가모니불이다. 나레이션의 설명처럼 예수상 같은 외형을 하고 있지만, 분명 석가모니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서양과 동양의 조화, 즉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되어 미를 창출한 사례라고 한다. 미란은 티벳족을 마지막으로 사막의 모래 속에 잠기었다. 구슬프게 들려오는 카라부룬(검은폭풍)이란 노래의 애절함이 역사적인 사실과 함께 느껴진다.만년설로 뒤덮여 있으며 서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의 수원은 당연히 곤륜산에서 있는 눈 녹은 물이다. 쩨로쩬이란 오아시스는 천산남로를 이어주는 오아시스촌 중에서 꽤 큰 편에 속한다. 이곳에는 위구르인들이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신강성 위그루자치구를 형성하고 타클라마칸 사막 근처에 분포하여 거주한다.우리는 니야 유적을 취재하기 위해 쩨루쩬에서 360킬로미터 떨어진 민풍시로 출발했다. 대마찰에서 니야 유적까지 두 가지 루트로 여행하기로 하였다. 하나는 낙타로, 다른 루트는 트럭으로 가기로 했다. 낙타 한 마리가 운반해야 할 무게가 무려 150킬로그램이었고. 낙타를 각기 다른 마을에서 차출해와 낙타끼리의 호흡도 맞지 않았다. 낙타로 가는 여정은 매우 고되어보였다. 온도가 무려 40도까지 웃도는 날씨였다. 거기다가 우리는 길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민풍을 출발한지 어렵사리 4일 만에 니야 유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불탑을 중심으로 동서로 10km 남북으로 20km로 뻗어있는 니야 유적지였다. 이곳도 유적지가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남아있는 도굴흔적이 보였다. 탑 근처에 몇 군데의 주거유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N2 유적은 관청이었던 것 같다. 이곳은 각종 직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서양 양식의 도안이 있는 의자, 매우 작은 불상유적, 고대 인도어로 기록된 비문은 누란 왕국의 문물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누란왕국은 잘 정비된 행정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탑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이곳에 누란 왕이 임명한 지방장관의 대저택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 집터는 고목들로 변해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당시 지방장관들은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세금을 거두고 토지관리,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출입통제, 양자문제, 결혼문제 중재도 해결해야 했단다. 스타인 박사의 말을 빌리면 당시 니야인들의 주택들은 규모가 크고 호화스럽게 지었다고 한다.이곳에서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졌던 순장 풍습을 살펴볼 수 있다. 부부미라가 발견되었는데 분명히 해부학상으로는 서양인이지만 이들의 생활상은 한문화에 가까웠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 중에서는 꿩이 새겨진 베개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등나무로 만들어진 빗과 화장도구 등이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한 점이라면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되었지만 조금 더 서양문화의 색채가 농후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니야는 4세기 무렵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시나 타클라마칸사막이 영역을 점점 넓히면서 니야에 흐르던 강물이 메말랐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실크로드를 답사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난 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에 의해 흥망을 거듭한 민족을 우리는 이번 답사에서도 왕왕 보고 있다. 우리 앞에 비사주석이 등장했다. 기온이 40도, 지온이 50도를 웃도는 날씨가 계속 되었다. 낙타들이 물을 달라고 농성을 피워 하릴없이 그들에게 남은 물을 거의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변경하여 야간에 니야를 벗어나게 되었다. “야간에 졸면 사막에 영원히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들으면서 말이다.
    독후감/창작| 2010.12.15| 1페이지| 1,000원| 조회(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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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구실크로드) 천일야화의 고장 바그다드 감상문 평가A+최고예요
    천일야화의 고장 바그다드황색의 대지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이다. 농업이 주업인 쿠르드족의 봄맞이 축제가 시작됐다. 또 다시 새봄은 찾아왔고 말과 양은 새끼를 낳았다. 이 모든 것은 전능하신 알라신의 은총이라 이들은 생각한다. 거대한 오아시스 메타포타미아. 이 사람들은 갈대를 심어 땅을 단단하게 만든다. 이곳 소택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대로 만든 반원통형집은 5천 년 전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것으로 수메르인이 남긴 조각에서는 원통형집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갈대를 쪼개고 있는 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갈대로 매트를 짜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래서 가족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전심전력을 다해 갈대를 짜고 있다. 이곳 소택지에서는 부인 2-3명을 두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무리 종교에서 규정하고 있는 규례이지만, 여성들이 과연 행복해할지는 모르겠다.이제 우리는 동쪽으로 장안, 서쪽으로 가면 비잔티움으로 가는 바그다드로 향했다. 바그다드는 압바스왕조의 도읍지로 건설됐다. 또한 천일야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그다드도 13세기 몽골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젠 바그다드는 이라크의 수도로서 거대한 도시가 됐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고층 건물과 교통 혼잡을 볼 수 있다.라쉬드 거리 역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예나 다름없이 활발한 상거래가 벌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매가 눈을 끈다. 과거 귀족들은 매를 이용하여 사냥을 즐겨했다고 한다. 이 거리에서 사람들이 특이하게도 흙차를 마시며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메소포타미아, 이 말은 두 강 사이라는 뜻이다. 이 글 뜻대로 아버지 티그리스강과 어머니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이곳 사랍들이 물을 이용하기 위해 관개사업을 하고 있었다. 치수사업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 인류문명의 발생지 메소포타미아 평원. 이곳은 아직도 옛 문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상에 신전을 갖고 있는 지구라트.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만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평야지대로 높은 산을 볼 수 없기에,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높은 건물을 만든 것이다. 바그다르 북쪽 100킬로미터 떨어진 사마라 탑도 보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나오는 바벨탑을 연상시킨다. 높은 곳을 동경하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남겨놓은 인류 유산이다. 바벨탑이 저런 모습이었다니 그 당시 기술력에서 참으로 지극정성을 들였을 것이다.우리는 이제 모술린이라는 천의 생산으로 유명한 도시인 모술을 가보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대부분 카펫을 짜는 직공은 어린이들이었다. 그 옛날 마르코폴로가 색상이 다양한 모술린이라고 언급했던 천을 짜는 어린 소녀들의 손은 정말 민첩해보였다. 우리는 마르코 폴로가 여행했던 답사코스를 가보았다. 첫 번째로 본 것은 성 마티사원인데, 마치 산 표면에 메어놓은 것 같다. 이사원은 4세기에 건립한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옛 부터 이곳에는 두 권의 경전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가 본 것은 그 중에 양가죽으로 만든 경전이다. 중국에서 처음 발견된 제지술이 처음 전래된 것은 8세기였다. 성마티 사원 바로 밑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메르기마을인데 친근하게도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마을 여인들은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검은색 옷을 입지 않고 각가지 색의 옷을 입는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돼지고기도 먹는다. 또한 남자들은 회교세계에서 금지하고 있는 술도 마신다. 기독교 마을 메르기. 아직도 마르코폴로가 찾아왔을 시기와 다르지 않는 생활을 영위하는 곳이다.우리는 유적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인 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고대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다. 히데오쿠지 교수가 이 발굴팀의 리더다. 지금 이들이 발굴하고 있는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의 유적이란다. 발굴단장 쿠지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정말 문화유적의 보고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겠는가.발걸음을 옮겨 대상의 도시 하트라에 당도했다. 아마 이 도시를 빼고는 실크로드를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왕들은 누구든지 하트라에 온 사람들의 신변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였다. 하트라의 동상들은 하나같이 오른손을 들고 이러한 맹세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위치한 하트라는 대상들의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하트라 중심부에 있는 신전에는 낙타의 상이 조각되어있다. 이러한 낙타의 도시는 대상의 도시라는 이미지와 매치가 잘 된다. 이완신전이 하트라에 있는데 동방 이란에서 발생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원래 하트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영원한 안식처에 사는 사람들 혹은 문명의 발상지라는 뜻이다. 신전 옆에서 발굴했다는 비너스상은 지금보아도 현대인 여성과 비슷한 체형을 하고 있었다. 하트라에 2천 년전의 고분도 또한 볼 수 있었다.
    독후감/창작| 2010.12.15| 2페이지| 1,000원| 조회(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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