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한미관계의 모색목 차한미 관계 재검토의 필요성 냉전의 해체와 동북아 안보 구도의 변화 한국의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의 성숙 한미 동맹의 전략적 가치 한국 미국 바람직한 한미 관계의 발전 방향 새로운 동맹 규범의 공유와 수평적 관계로의 발전 한반도를 넘어선 지역안보 동반자로의 발전 유연한 연합지휘 체제로의 개편 한·미 동맹의 바람직한 재편방안 미군과 무기체계의 호환성 유지 한·미·일 지역 동맹화 반대 주한미군의 지위과거 한미 동맹은 對 공산권 봉쇄 및 대북 억지력을 위한 동맹이었 으나 구소련은 해체 후 한반도에서의 체제 경쟁은 한국(남한)이 승리함 90년대 북한 핵 위기 이후 한·미는 북한에 대한 시각 차를 드러내며 갈등을 드러내며 다소 소원해진 관계가 됨 美 2사단은 한국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후방배치로 주한미군 재배치를 강행 그 후 한국은 인계철선의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 스트라이커 부대의 동두천 훈련을 요청 지금 한·미 양국은 '새로운 적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동맹의 체질을 변화시킬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음한미관계 재검토의 필요성 -냉전 체제 해체와 동북아 안보구도의 변화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 한국인들은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수용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가 증진되고 시장경제의 성공적 운용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지금, 한국인들은 수평적인 한·미 관계를 지향함 건강한 한·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한·미 양국은 상호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것임한미관계 재검토의 필요성 -한국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성숙한미동맹의 전략적 가치 -한국한국은 4강에 둘러싸인 중간규모의 국가로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동북아 세력균형 및 국체를 보존함은 물론 대북 억지력 또한 유지하고 있음 한국의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주변국이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맹방이기 때문이라는 현실을 잘 알고 있고 미국을 한국통일 과정에서 주변국의 이해를 조정할 역외 세력으로 보고 있음 한국정부는 통일정권 수립 이후에도 동맹관계유지와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통해 미국의 동북아 안정자 역할을 희망함한미동맹의 전략적 가치 -미국한국과의 동맹관계를 통해 동북아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지역패권국가의 대두를 저지하고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방어함 또한 주한 미군은 아시아 대륙에 주둔한 미국의 일한 군사력으로 중국의 팽창을 억지하는 역할을 하며, 한국과 일본의 충돌도 방지함 미군의 동아시아 전방전개(주둔)의 가장 큰 의의는 중국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방지하는 것임바람직한 한미관계의 발전 방향 -새로운 동맹규범의 공유와 수평적 관계로의 발전한·미 동맹은 한국의 민주화와 높아진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군사 동맹을 넘어 비 군사 부분에서의 협력을 포함하는 균형적인 포괄적 안보 협력 체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함 또한 민주주의, 자유, 인권, 시장경제와 같은 통일 이후에도 양국이 공유할 수 있는 포괄적 가치를 수호하는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도 중요함한반도 방위에 국한된 배타적 쌍무 동맹관계를 동아시아 전역으로 활동범위를 확대하고 평화유지 활동 등 역내 안정과 평화유지·강화의 역할도 해야 함 한·미·일간의 긴밀한 안보협력을 추진하되 이것이 중국·러시아 등 주변국의 반발을 살 수 있는 배타적인 지역동맹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어야 함 한미 동맹은 아세안 지역 안보포럼(ARF)을 비롯한 다자안보 협의체와의 거리도 줄이고 역내 안보 대화를 통한 지역차원의 군비통제체제 구축 노력에도 적극 참가해야 할 것임바람직한 한미관계의 발전 방향 -한반도를 넘어선 지역안보 동반자로서의 발전바람직한 한미관계의 발전 방향 -유연한 연합지휘 체제로의 개편한·미 연합 전력이 수직 연합형 운영체제를 좀더 유연한 수평적 협 력 체제로 바꿔나가는 작업이 필요함 전시 작전 통제권의 환수를 추진하되, 한국의 상황에 맞는 연합군 사 협조체제를 병행하여 발전시켜야 함 새로운 한·미 연합 군사협력 체제는 일본형 병렬체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나토형'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음한미동맹의 바람직한 재편방안 -미군과 무기체계의 호환성 유지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에서 영국과 긴밀한 협력체제를 지 지하였는데 일본에 최신예 F-22전투기를 판매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 에서 볼 수 있음 우리가 미국과 무기체계가 지나치게 괴리되어 있다면 연합방위력 이 훼손될 뿐 아니라 양국의 동맹관계도 소원해질 것임 또한 미국이 對 테러전에 실리적으로 협력하여 동맹 의무 이행이 정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함한미동맹이 북한이나 중국을 겨냥한 지역동맹으로 변화된다면 통 일 과정에서 중국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임 중국·러시아와 대립한다면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될 것임 동맹을 냉전기 보다 유연하게 운용하여 대륙과 해양의 완충국 역 할을 수행해야 함한미동맹의 바람직한 재편방안 -한 미 일 지역 동맹화 반대주한미군은 한미동맹관계의 상징적 존재임 주한미군의 존재는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국제적 또는 남북 군사 분쟁으로 비화되는 상황을 방지하고, 통일의 전 과정을 통하여 우리 를 도울 수 있는 최대의 지원세력이 되는 것을 의미함 주한미군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미군 없는 정 치 동맹' 우리에게 현실적 대안이 아님한미동맹의 바람직한 재편방안 -주한미군 지위{nameOfApplication=Show}
제일모직회사명: 제일모직(주) [第一毛織(株), Cheil Industries Inc.]설립자: 이병철대표이사: 제진훈업종: 석유화학제품 및 모직물, 의류 제조설립일: 1954년 9월 15일상장일: 1975년 5월 6일소재지: 경북 구미시 공단동 290총자산: 6513억 원(2003)매출액: 2조 863억 원(2003)기업개요: 1954년 9월 제일모직공업(주)으로 설립되어, 1972년 7월 경북 경산공장을 분리하여 제일합섬(주)을 설립하였고, 1976년 현재의 회사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61년 한국 최초로 복지(服地)를 해외 수출하였고, 1965년 국제양모사무국(IWS)으로부터 한국 최초로 울마크 사용권을 획득하였다.1975년 기업공개를 통해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고, 품질경영대상을 수상하였다.1992년 9월 세계 최초로 113만 본 카펫개발에 성공하였으며, 1994년 6월 섬유업계 최초로 ISO(국제표준화기구) 9002 인증을 획득하였다. 1994년 사업구조 개편을 단행하면서 종업원지주제를 채택하였다. 1997년에는 한국품질아카데미 주최 최우수품질 100대 기업에 선정되었고, 1998년에는 한국생산성본부 주최 고객만족도 신사복 부문 1위를 차지하였다. 2001년 10월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전사부문 대상 및 경영활동사례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 전자재료 구미 IT단지를 준공하였고, '2002 대한민국 아이디어 경영대상'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였다.주요 사업은 석유화학 수지제품 및 인조대리석, 정보통신 소재의 생산 및 판매, 소모·방모·기타 소재를 이용한 복지제품을 생산 및 판매, 남·여성 정장 및 캐주얼 제품 생산 및 판매, 기타 중간제품인 WOOL TOP·가공원료 등의 판매 및 임수탁 용역의 판매 등이다. 주요 생산품은 수지(ABS), 인조대리석, 신사숙녀용 정장 및 캐주얼 의류, 복지·모사 등이다. 이 밖에 신수종 사업으로 정보통신 소재 사업에 진출했다.본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공단동 290번지에 있고, 공장은 경기도 의왕시, 경상북도 구미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으며, 서울사무소와 6개의 해외사무소가 있다. 2003년 12월 말 현재 총자산 6513억 원, 당기순이익 760억 원, 매출액 2조 863억 원이다.기업이념: 제일모직은 "事業報國", "人才第一", "合理追求" 의 경영이념으로 창업되었고, 1993년부터는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 사회에 공헌한다"로 경영이념을 구체화하고, 실천하고 있다. 이는 국제 사회인으로서, 미래를 개척하는 “열린 사고”의 人才와, 인류 행복을 실현하는 "참다운 技術"을 바탕으로, 人類 발전과 社會에 공헌하는 초일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의지이다.R&D: (섬유연구소와 삼성패션연구소에 한정하여)1979년설립된 섬유연구소는 고부가가치 기술축적과 방모공정일관화, 생산납기 단축을 실현하였으며 최고급복지인 VIP2000, 170 수복지인 란스미어220을 개발하는 등 모직제조분야에서 지속적인 기술개발을 하고 있다.삼성패션연구소는1993년 삼성그룹의 패션디자인 연구를 위해 설립된 이래 정보수집, 신상품기획, 소비자연구, 브랜드 전략 등의 연구와 함께 삼성 디자인넷을 통해 패션전문가를 육성하고 있다.이와 함께 글로벌디자인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디자인센터와 비엘라연구소를 운영, R&D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사업장: 직물·케미칼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02-2 삼성제일빌딩패션부문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3-1 수송타워빌딩패션 고객상담실 :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새롬빌딩 3층연혁: (최근 자료를 기준으로)[2004.2.27] 제진훈 대표이사 취임[2004.6.2] 의왕사업장 ISO14001 인증 획득[2004.7.9] 존경받는 30대 한국기업 선정[2004.7.13] 대한민국 생산성 대상 아이디어 경영부문 5년지속대상 수상[2004.9.15] 창립 50주년 기념식[2004.10.19] 제일모직듀폰 FCCL 합작법인 'SD FLEX(주)'설립[2005.3.9] 한국마케팅 대상 제조부문 대상 수상[2005.3.14] KT마크 신기술인증서케미칼연구소 관련 기술 인증[2005.3.24] 한국능률협회 2005년 제7차한국의 브랜드파워(K-BPI) 1위 달성(갤럭시,빈폴)[2005.6.30] 제일모직 홍보브로셔 ASTRID 어워드 금상 수상[2005.8.10] 제일모직-성균관대 첨단소재연구센터 설립[2005.9.9] 여수사업장 대한민국 생산성대상 명예의 전당 헌정[2005.9.27] 국가고객만족도조사(NCSI) 1위 (신사정장부문)[2005.10.4] 이란 TPC社 ABS 기술이전 계약 체결[2005.11.7] SFDF(삼성패션디자인펀드) 설립[2006.1.26] 독일현지법인 Samsung Chemical Europe GmbH 설립[2006.2.16] KAIST 공동‘고분자 정보전자소재 맞춤형 석·박사 과정’개설[2006.3.20] 폴리카보네이트(PC)사업 진출사회공헌활동: 1. 사회봉사활동대표공헌활동으로는 시작장애인 탁구대회봉사단활동2. 환경경영제일모직 구미 사업장은 2000년 환경부로부터 '환경친화기업'으로 선정되었고, 여수 사업장은 99년 자율환경관리 모범사업장 지정, 2002년 SEQMS 인증(환경안전 품질 통합인증)제일모직 빈폴은 전국의 국립 공원관리 공단과 함께 자연사랑 캠페인을 연중 실시. 2000년부터는 매년 가을, 빈폴과 고객이 함께 하는 자연 사랑 행사를 통해 국립공원 정화활동 및 자연사랑 홍보 활동 등도 펼쳐오고 있음3. 기업 메세나 활동2003년에 창업지인 옛 대구사업장부지에 연면적 5,200평,관람석1,508석 규모의 대구오페라하우스를 건립,대구시민에게 기증경영전략:매출액 성장률:주주현황:환경분석: 제일모직, 특히 의류사업과 관련하여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는 ‘빈폴’ 을 예로 들면 브랜드 마케팅에 있어 프리미엄 전략을 통하여 성공한 경우이다. 노 세일을 지향하는 가격정책은 물론 의류 자체의 까다로운 품질관리와 철저한 애프터 서비스, 광고 전략까지 소비자의 폭 넓은 욕구를 충족시키며 국산 브랜드 중 명품 캐주얼 브랜드로써 명실상부 자리하고 있다.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꾸준한 수요층이 예상되며, 아직 접해보지 못한 잠재 수요층까지도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하지만 어느 시장보다 의류시장에 있어 만큼 경쟁이 치열하단 것이 위협요인이다. 예전부터 폴로 라는 수입 브랜드와 함께 계속적인 경합을 벌이고 있음은 물론 LG패션에서 ‘해지스’라는 브랜드를 내 놓으면서 아직은 유리하지만 앞으로의 시장 점유에 있어서 위협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유행과 멋에 민감한 세대들이 국내 브랜드는 물론 해외 수입 브랜드에 전에 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요하게 됨으로써 이익 측면에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층이 대부분인데, 이 계층은 보다 저렴한 중 저가의 상품을 선택하므로 현재 특정 층에 수요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특수한 브랜드 마케팅을 고수함은 물론 해외 브랜드와 유행에 민감한 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국내 브랜드로서 현재까지 많은 수상 경력을 가진 채 우뚝 선 자리에서 자칫하면 주변 경쟁 환경에 밀려 정상의 자리를 내놓게 되는 것은 순식간의 상황이기 때문이다.또 원칙적인 논리지만 국내 수요 계층 확보에만 만족하지 않고 수출을 통하여 브랜드 가치를 더욱 높이는 것 또한 현재 상황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현실이다. 아직까지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직무분석: 직무= 정의 + 범위 + 역량본인이 지원 하고자 하는 직무는 경영지원실 패션부문의 마케팅 담당 분야이다. 마케팅이란 요약하여 설명하면 생산자가 상품 또는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유통시키는데 관련된 모든 체계적인 경영활동을 의미한다. 즉, 단순한 매매활동이 아닌 이러한 큰 기업에서는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기능내용은 제품관계 ·시장거래관계 ·판매관계 ·판매촉진관계 ·종합조정관계로 구분된다. 제품관계에는 신제품의 개발, 기존제품의 개량, 새로운 용도의 개발, 포장 ·디자인의 결정, 낡은 상품의 폐지 등이 있다. 시장거래관계에서는 시장조사 ·수요예측, 판매경로의 설정, 가격정책, 상품의 물리적 취급, 경쟁대책 등이 있다. 판매관계로서는 판매원의 인사관리, 판매활동의 실시, 판매사무의 처리 등이 있다. 판매촉진관계에서는 광고 ·선전, 각종 판매 촉진책의 실시가 있다. 종합조정관계로서 이상의 각종 활동 전체에 관련된 정책, 계획책정, 조직설정, 예산관리의 실시 등이 있다.이러한 활동을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일에 대한 이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은 기본이 되어야 하고, 기획능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 자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수요자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정책들을 잘 계획하고 실행하고 또 수정단계를 거쳐 성공적인 판매를 위해서는 부서의 사원하나하나까지도 이러한 역량을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회사의 이익과 관련하여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전공적 지식뿐 아니라 사회 각종 현상에 대한 분석력과 함께 시대상황의 흐름과 사람의 심리적 요인, 문화적 욕구까지도 모두 파악하는 능력이 요구되므로 어느 부서보다도 복합적인 동시에 전문적인 능력이 요구가 된다.
CJ Entertainment회사명: CJ Entertainment (CJ의 계열사 중 하나)대표이사: 박동호회사소개: CJ엔터테인먼트는 영화산업을 주도하는 한국 대표 엔터테인먼트 회사로서 영화의 제작, 투자, 배급 및 상영에 이르기까지 전 부문을 망라하는 수직계열 영화와 극장, 홈엔터테인먼트, 케이블, 인터넷 등 다양한 채널을 포괄하는 수평계열화를 달성, 국내 최고를 뛰어넘어 아시아 최고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업체로 자리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기업연혁: 1995 02월 제일제당, 'DreamWorks SKG' 공동설립08월 제일제당 멀티미디어 사업부 설립 및 엔터테인먼트 사업 진출1996 09월 멀티미디어 사업부를 'CJ Entertainment'로 개칭12월 'CGV' 설립 및 멀티플렉스극장 사업 시작1997 01월 영화 '인샬라' 배급 (한국영화 제작 1호)11월 영화 'Peacemaker' 배급 (드림웍스영화 배급 1호)1998 04월 멀티플렉스 극장 1호 'CGV 강변11' 개관1999 04월 한국영화 제작투자 본격화(명필름, 우노필름, 신씨네와 제휴)12월 '해피엔드' 배급(전국 116만)2000 04월 'CJ Entertainment 주식회사'로 분사05월 CGV와 CJ Village를 CJ Village로 합병, 멀티플렉스 극장사업 단일화06월 'Gladiator' 배급(전국 279만)09월 '공동경비구역 JSA' 배급(전국 583만, 역대 최고흥행기록 달성)2001 07월 애니메이션 '슈렉'배급(전국 238만, 2001년 외화부문 최고 흥행, 역대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09월 영화'무사'배급(전국 210만, 전국 최다스크린-202개 개봉 기록)2002 02월 KOSDAQ협회중개시장 등록 (등록주식수 12,367,960주)02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배급(전국 230만 관객동원)02월 드림웍스 '뷰티풀 마인드'배급(전국 120만 관객 동원,아카데미 작품상 등 3개 부문 석권)04월 '집으로' 배급(전국 420만 관객동원, 2002년 상반기드림웍스 '캐치 미 이프 유 캔' 배급(전국 180만 관객동원)02월 홈비디오 유통사업 진출 (㈜씨씨씨 코리아 출자, 출자금액 30억원, 출자 후 지분율 40.37%)02월 한국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배급(전국 490만 관객 동원)04월 한국영화 '살인의 추억' 배급(전국 520만 관객 동원)08월 케이블 미디어 사업진출(CJ미디어(주)출자, 출자 금액 79.6억원, 출자 후 지분율 34.69%)10월 한국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배급(전국 340만 관객동원)10월 한국영화 '위대한 유산' 제작,배급(자체 제작1호, 전국 215만 관객 동원)12월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배급(전국 600만 관객 동원)2004 01월 한국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배급(전국 300만 관객 동원)04월 영화 전문 포털 nkino.com 인수(CJ엔키노 출자, 금액 32억원, 출자 후 지분율 81.97%)04월 온라인 게임 사업 진출(CJ인터넷 출자, 금액 420억원, 출자 후 지분율 9.86%)06월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배급 (전국 300만 관객 돌파, 역대 애니메이션 최고흥행기록 경신)조직도:주가정보:KRX 100 2,622.55 48.15KOSDAQ 576.92 13.31KOSTAR 1,196.11 39.99주주구성Financial Highlights극장시장점유율(주변경쟁사와 비교하여 기간별)현재 경쟁사들에 비해서는 시장점유율이 배 이상으로 높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비율을 따져보았을 때는 국내 시장을 충분히 장악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물론 전과 다르게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불법다운을 통하여 보는 것이 가능해 진 문제도있지만 하루게 다르게 생겨나는 멀티 플렉스 극장에 의하여 점유율을 조금씩 빼앗기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현재 다른 극장과 큰 차이를 보이는 서비스는 없다고 생각 한다. 다만 다른 경쟁사에 비하여 규모가 크고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른 경쟁사의 주력 사업을 극장에 둘 경우 시장 판도는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고 수준의 컨텐츠 확보국내 굴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서 CJ엔터테인먼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싸이더스, 영화사 봄, 명필름과 같은 국내주요 제작사 및 드림웍스SKG와 같은 헐리우드 메이져 제작사와의 제휴관계를 통하여 최고품질의 영화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확보 할 수 있다는 점이다.투자: 신중한 리스크 관리와 수익성의 극대화CJ엔터테인먼트는 영화의 투자자이면서 동시에, 제작사와 투자사를 연결 짓는 역할을 겸하고 있다. 연간 10-15편의 한국영화에 투자하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는제작비를 제한하고 수익배분을 최적화하기 위한 합리적인 모델들을 마련하고 있다.배급: 배급라인의 확대 및 다변화전국 100개 극장, 200개 이상의 스크린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는 우수한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드림웍스를 포함한외국영화의 강력한 배급라인을 보유함으로써 국내외 흥행 영화를 동시에 배급할 수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상영: 영화관람의 새로운 문화CJ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CJ CJV는 국내 최대의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으로 2003년말 전국 17개 상영관에 총 136개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다. 다양하고 질 높은서비스와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CJ CJV는 영화 산업을 선도하고 혁신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상영: 세계로 향한 한국영화의 가장 든든한 관문최근 한국 영화는 세계유수 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 상업적 가능성도긍정적으로 평가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는 한국영화의 적극적인 수출을 통하여 배급망을 의욕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신규: 토탈 엔터테인먼트의 리더새로운 사업 및 시장진출을 통해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위해 CJ엔터테인먼트는 비디오,DVD, 공중파, 케이블 TV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으며, 이 밖에도 공연, 게임, 애니메이션, 연예 매니지먼트 등 다양한 신규 사업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다.직무분석앞서 제시한 기업 조직도 중 지원하고자 하는 분야는 사업기획 출 사업분야 사업성 검토 및 추진, 회사의 IR활동 및 주식 관련 업무, 국내 외 동종업계 동향 파악 및 분석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기업의 기획부서라고 할 수 있는데 기획부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다.기획 업무는 조직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일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그 방향성을 설정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기획부서라고 하면경영기획 부서를 말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경영 기획 부서의 업무를 사업별(BU)로 수행하는 사업 기획 단계가 있고, 기능별로 재무 기획, 영업기획, 마케팅기획, 인사 기획, 생산 기획 등 기능별 기획 기능으로 그 세부적인 내용을 위임 하게 된다. (‘직렬’ 방법과 관련하여 직무분석)즉, 거대 기업이라면 경영 기획 부서를 중심으로 기능 또는 사업부로 하위 기획 업무가 위임된다. (이런 모습이 어떤 형태를 띄는지는 한 기업이 택한 조직 설계-사업부 조직인지 기능별 조직인지, 또는 이들의 혼합된 형태의 조직인지-에 따라 그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기획 부서의 가장 큰 역할은 모든 관련 조직[또는 사업]에 방향성을 제시하고, 관련 조직[또는 사업]의 자원과 기능을 통합하고 조정하며, 실행의 가이드라인(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가장 큰 단위의 경영 기획 단위를 구체적으로 설명 해 보면, 경영 기획 단위에서는한정된 기업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환경적 변화 요소들을 검토한다. (거시적 경제 환경에서부터 산업 환경과 경쟁 환경, 법률적 환경을 포함 하는 사회적 환경의 변화, 고객 분석, 재무 분석, 사업 분석 등을 한다.)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변화의 방향성을 예측하고,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기업의 대응 방향과 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대응 방향과 방법에 적합 하도록 기업의 역량과 자원을 조정하고 배분하여 구체적인 실행 전략을 기획하게 된다.이 단계에서는 사업별로 어떻게 자원을 배분 하는 것이 적합한지, 어떤 사업은 정리하고 어떤 사업에 주력할 것인지 가 있는지 등등 기업 전체에 대한 전략을 입안한다.기업의 큰 전략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사업부 또는 기능별로 각각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관점과 절차를 만들어 가게 된다. (기업은기업 활동을 수행하려면 자본이 필요하므로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고 어떻게사용할 것인지 등 재무에 대해서는 재무 전략을, 판매 할 물품의 생산을 어떻게 할것인지는 생산 전략을, 마케팅 활동에 대해서는 마케팅 전략을, 구매를 효과적으로진행하기 위해서 구매 전략을 기능 부서별/또는 사업 단위 별로 기획하게 된다.이러한 과정에서는 해당 기능 또는 해당 사업의 전략을 수행하는데 영향을 미치는주요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하게 된다. 마케팅 전략에서는 경쟁 현황은 어떠하며,경쟁자는 어떠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고, 현재 고객 점유율과 시장 점유율은 어떤지, 고객의 욕구는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기회와 위협을 제공하는지 등)즉, 기획 부서는 주로 전략을 입안하고 이의 실행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선택하고운용하는 일을 꾸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획이라는 의미 자체에는 이미전략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전략이 전술에 대해 지도원리로서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하듯이, 기획이라는 활동 자체가 방향성을 제시하고 세부 실행에 대한 지도 원리로서 가이드 라인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영 기획이라면 경영 전략 기획을 말하고, 마케팅 기획이라면 마케팅 전략 기획을 말한다고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경영기획과 경영 전략 기획, 그리고 마케팅 기획과마케팅 전략 기획은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다. 다만, 최근 들어 전략적 개념이 중요해 지면서 기획 업무의 전략적 성격-조직의 목표를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달성할수 있도록 한다는-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략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마케팅 전략 기획, 신규사업 전략 기획, 재무 전략 기획, 생산 전략 기획, 인사 전략 기획 등 각종 기능 기획의 역할은 기업이 요구하는 기능 단위 또는 역할을 기업과다.
할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내 이름은 오덕근, 오 덕(자) 근(자) 요? 응 오(자) 덕(자) 근(자) 써, 출생지는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고장리, 원산이요?원산? 아니아니, 석 삼자 써서 원산이여 원산몇 남 몇 녀 태어나신 거에요? 나 장남, 그럼 밑에 동생 분들은 안계신거에요? 아니야 동생 다섯 남자 넷 여자 하나 있어.지금 사시는 곳은 어디신데요? 응 지금 나 사는데 서대문구 홍은동,언제 태어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음..보자..1928년 12월 30일 무진년에 고당리에서 태어났어. 음력으로는 11월 19일이고 그래. 동짓달 19일학교는 어떻게 다니셨는지 궁금해요. 나는 학교를 보통학교를 못 다녔어. 강습소를 댕겼어, 그럼 보통학교랑 강습소랑 어떻게 차이가 나죠? 그러니까 강습소하고 보통학교하고 차이는 보통학교는 공립보통학교거든 그러고 강습소는 사립이야 사립인데 개인이 학교를 세워서 공립보통학교를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 들어갈 나이가 지난 아이들을 모아가지고 이제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가르쳤어. 지금으로 말하면 사설 학원이지.그런데 보통학교는 정년이 있거든 나이 들어가는 적령기, 그 때 거기를 못 들어가고 거기를 빠진 사람들이 학원을 갔어, 학원은 2학년 4학년 6학년 까지 가르치기도 하고 교실을 몇 개 안지고 규모가 적었어, 그게 강습소야 그러니까 정식인가를 받지 못하고 학교처럼 지어서 가르친 거야.나는 학원을 여섯 일곱 군데를 다녔어 그것이 왜그런가하면 고향이 원삼리인데 내가 그러니까 10살 되던데, 지금은 이북이야, 흥남도 흥남에 아버지 되는 분이 취직을 했어, 거기 비료공장 말이야, 질소비료, 그래서 가족이 쫓아 간게지, 그래서 거기서 강습소를 들어갔어, 다니다가 근데 어머니께 병이 나셔서 고향에 왔다가 다시 고향에서 강습소 다니다가 다시 흥남에 와서 삼성강습소를 다니다가 어머니가 또 병이 나셔서 고향에 왔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어, 범일동이라고 아나?범일동 좌성대에서 살았어, 나는 범일동 살았을 때 양복 일하는데 있었지.그때가주고 오래있으면 10원도주고 15원도 주고 그랬어. 그 당시 5원이면 어느 정도 되는 돈 이죠? 그 당시 5원이면 그 날 차타고 나가서 남포동, 중앙동 점심 사먹고 영화 볼 만 한 돈이 었지..근데 그땐 지금만큼 영화관이 별로 없었어. 영도 다리 드는 것도 보러 갔지. 서기로 따지면 그게 1940년도야 그러다가 1942년에 다시 흥남으로 왔지.왜다시 흥남으로 돌아가신 거죠? 다시 흥남으로 간 건 어머니가 병이 나서 간 거지, 횟수로 3년 만에 간 거야 가서 학원에 또 다닌 거야 4학년에 들어가서, 그 때 나이가 몇 살인가..15살인가 16살 인가 했지, 그 때 학원에는 내 나이 때 보다 많이 댕겼어, 1944년도 학교를 못 대니게 됐어. 그 때 공장에 지금으로 말하면 영세기업 , 쪼그만 기업에 다녔어. 그 다음해에 1945년도 8,15 해방이 되었지. 그 때 해방되고 마을 분위기 좀 이야기 해 주세요? 일본 천황 그러니까 ‘소화’ 20년에 서기로 따지면 1945년 그때야 일본이 항복을 한거거든 그때 내가 18살인데, 해방되던데 해, 그 때 흥남에 있었다고 그때 흥남에 있었는데 그 때 B19가 와가지고 포탄을 떨어뜨렸는데, 다섯 발을 떨어뜨렸는데 하나도 안 터져서 일본인들이 실어가고 그랬어, 그 때 흥남공장에 싱가폴에서 잽힌 영국 포로군들이 일본군들이 가둬서 일하고 그랬어, 일하면서 포로 보면서 신기하고 그랬지.그럼 어떻게 결혼 하시게 된거에요? 아는 분 중매 통하신 거에요? 흥남공장에서 그러다가 내가 흥남에서 언제 나왔냐면 해방되고 그 이듬해 음력으로 2월 이튿날 떠났어. 그러니까 양력으로는 2월달이나 그럴꺼여, 고향이 용인이니까 나오게 된거여, 고향에서 농사 짔다가 1950년 2월 2일 결혼했어.어떻게 했냐면 30키로 떨어진 거기서 경기도 안성군 거기가 양성면 노곡리 출신인데 고모가 주선해준거여, 결혼했는데 그 해에 전쟁이 난거여, 군대를 갔는데 나는 그 때 군인 갈 나이가 지나서, 우리나라가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하고 1949 징병 제도가 있어서 일인가 5월 20일인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어, 50년도 국회의원 선거를 했어는데, 그 때 당선된 사람도 이승만 대통령 따라간 사람도 있고 서울 사수파도 있었서, 그래서 그 사람들은 여기 있다가 이북으로 붙잡혀 갔지.그럼 군대가신 이야기도 같이 들을 수 있을까요? 내가 군대 간 거는 결혼하고 나서 6월 25일 날 전쟁이 일어 난거여. 난 그 당시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으니까 바로 군대는 안갔어, 피난도 사람들 안갔어 바로, 그 당시 시골에 신문도 잘 없고 라디오도 없고 하니까 피난을 바로 안갔어. 그 당시 시골에 소문이 어떻게 났냐면 이제 군인간 사람들, 공무원들, 경찰들 이런 사람은 여기 있으면 인민군들이 다 잡아간다고 했어, 그러니까는 그 사람들만 경찰들부터 해서 면사무소 사람들 까지 피난 가버리니까 치안이 마비 되는거여, 도청사람들은 시험보고 온 거라 그 지역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지 근데 도청부터 피난 가버리고 하니까 면서기까지 나올 필요가 없고 그랬지,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농민들은 안가고 여기 있었어, 걔네들이 내려왔지.6 25사변이 딱 일어나니까 행정이 마비 되버려서 군인을 바로 뽑을 수 없는 거여, 그래서 난 전쟁이 났어도 농사를 짓고 있었지 근데 걔들이 온 거야, 이제 와서 명예위원장 무슨 학교의 위원장 여성 동맹 위원장 뭐 그런 것 들 하더라고 걔네들도 몇 달 안했거든 근데 9 28 수복을 한거야 그래서 몇 달 못 한거지, 그러니까 3개월 만에 서울 탈환 한거지 그래서 국군들이 밀고 올라간거지 평양 의주 압록강 까지 함경도 성진 까지 간 거여 ,근데 중국군들이 지금 중강진이라는 곳으로 넘어 온거야, 그 때 그러고 나서 1 4 후퇴가 있었어, 중공군들이 개입하니까. 그때가 되니까 고향에 있는데 제2국민병 가라고 하더라고, 근데 그 때는 제1국민병, 제2국민병이 있고 그랬어, 제1국민병은 인제 그 당시에 정년, 군인 갈 정년이 된 나이부터 그 밑에 나이가 된 나이들,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간거고 6 25사변 바로 나고, 의용군이지 전쟁 나가서 일..어기..어디야..경상북도 영천, 경주로 데려갔지.우리는 제2 국민병이라, 제2국민병은 징병 나이가 지난 나이들이야. 우리는 스물 세 살부터 스물일곱, 스물여덟까지 있던 나이들이지. 그 때 서울에서 순전히 걸어서 50리고, 100리고 걷다보면 부락에 배치하면 거기서 밥해주고 자고 그랬지, 결국 걸어서 경상북도 영일만까지 갔지, 서울에서 한 열흘 걸렸지, 가서 학교 하나 점령해서 거기서 잠자고 밥먹고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해오고 밤에는 보초서고, 왜 밤에는 보초를 서냐면 근데 도망들을 나가, 같이 온 사람들이, 그 때가 1951년도야, 왜 근데 사람들을 붙잡으신거죠? 왜 사람들을 붙잡았냐면 도망가는 사람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쁜게 사람 한 500명이 있으면 500이라 보고해야 하는데 1000이라 보고해서 위에서 쌀을 더 탄거야, 대대장 중대장들은 쌀을 받아서 자기 집에 반을 가져다 논거야, 소위 그리고 하사 같은 애들이 밤에 몰래 나르고 그랬던거야. 사람이 모자르니까 보고할려고 붙잡아두고 그런거야, 밤에 몰래 나왔다가 도망가고 그런거야결국 제2국민병 한 5개월 있었지, 북진을 하니까 전부 올라가라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왔지, 거기서 또 걸어서 온거지, 그럼 기분은 어떠셨어요? 당연히 기분은 좋았지, 그럼 그때 할머니 분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 전까지? 그 당시 안사람은 큰 집에 가 있었지, 연락도 못하고 편지도 못하고 왕래도 못했지..5개월 있다가 그 해에 농사짓다가 1952년에 영장 받아서 군인을 갔어, 그 때 행정이 복구되면서 6 25가 나고 나서 행정이 복구되면서 영장이 나오게 된거야.그 때 난 1년 반 정도 밖에 군대 안있었어, 그 때 강원도 12사단에 있었어 중화기 중대에, 그 당시 해방되고 난 바로 나왔지 휴전되고 1년 반 만에 근데 난 만기제대가 아니라 의병제대 했어, 의병은 내과야 몸이 아파서 나온거지, 부대에서 제대시킨거야. 그 당시는 몸이 좀 안좋아서. 지금은 괜찮으신거죠? 응..지금은 괜찮아자녀분은 어떻게 되세요? 자녀는 지금 3남 1같이 살지 총 6식구야그런데 원래 장남이 대체로 부모님 모시고 살지 않나요? 장남한테 원래들 있지만 장남이랑 있을 저기가 안되서 막내랑 있어. 장남 분은 언제 낳으신거죠? 군대 가기 전에 아이가 있었고 군인 가던 해에 낳았어, 지금 같이 사시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죠? 같이 사는 손자 손녀는 고2, 중 2 그래, 왜 같이 사냐면 며느리가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애들 날 때부터 봐주고 있어, 그래서 같이 살고 있는거야. 군대 다녀오시고 나서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이야기 해 주 실 수 있으세요? 나는 53년도에 시골에 아무것도 없어서 제대하고 11월에 나와서 바로 서울에 와서 공장생활 했어, 그 당시 서울은 단층집이지 고층집이 어딨어, 서울에는 전쟁으로 인해서 큰 공장만 망가졌지 나머지는 망가지지는 않았어, 그 당시 영등포에 살았는데 전부 단층집이고 영등포 가면 경상방직, 김성수가 하던, 고려방직이 있었는데 육이오때 폭격을 맞았어요, 그래서 안돌아갔고 고려방직은 나중에 돌아갔어 그리고 대한중기라고 철공장 좀 있었고 나는 쪼그만 개인공장 있었지, 일은 힘들었지, 우리가 만든 저기는, 전에는 회사가 조개탄을 때서 굴렀어, 조개탄도 만들었고, 그것도 만들면서 구공탄기계 그거 일본에서 들여와서 모형떠서 우리가 처음 만들었어, 일본은 구공탄 안때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주문하니까 만들어줘서 모형 떠서 우리가 만들게 된거여.그때부터 계속 영등포쪽에서 계속 살다가 나이 한 50되면서 그만뒀어, 내가 다니던 회사가 망하니까 딴 데 나이가 많다고 해서 들어갈 수 가 없었어, 그래서 일거리가 없었어, 6 ? 25사변이 나고 내가 서울에 왔는데 그 당시도 많이 일이 없었어전에는 일도 없었고 625사변 나고 꿀꿀이 죽 서울에 오니 시장에서 팔었어. 미군들이 쓰레기를 버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가서 내와, 내다가 거기에는 뼈다귀, 담배꽁초 들이 있었는데 그걸 휘져어서 골라내고 해가지고 불을 내서 데워, 그래서 한 그릇에 5원씩 팔고 그랬어, 나는 그거 먹어보진 않았는데 그게 딴거 보다 싸니까 없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