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부 4학년 손 부 영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問.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 汝刀干, 彼刀干, 五刀干, 留水干, 留天干, 五天干, 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가락국기(駕洛國記)(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年間에 김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浴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沆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裏著. 抱持而歸我刀家. 眈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高.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 [首陵是崩後謚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新羅.즉위 2년 계묘(癸卯 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명의 성인)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잉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잉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아래 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一丈. 周三百步而葬之. 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喚九代孫仇衝之享是廟. 須以每歲孟春三之日七之日. 仲夏五之日. 仲秋初五之日. 十五之日. 豊潔之奠. 相繼不絶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잉신(잉臣)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喚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 率友公之子. 庶云?干之女. 文明皇后寔生我者. 玆故元君於幼?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 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趾. ?近廟 되었다. 이에 영규아간(英規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端午)를 맞아 고사(告祠)하는데 공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아야겠다."하고, 삼척(三尺) 교견(鮫絹)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더니,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괴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일까? 이는 필시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크게 노하신 것인가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두려워하여, 화상도 이미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베임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 오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 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잡신의 제사는 복(福)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먼저는 영규가 있고 이번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했다.그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몸에 갑傾
생물진화에 관한 자연도태설을 중심으로 한 다윈의 학설,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나가는데, 내적 및 외적인 원인에 의해 변이가 일어나면서 같은 종류에서 조금씩 다른 종자가 생겨난다. 그리고 생존에 조금이라고 유리한 변이를 보이는 개체가 자연계에 격렬한 생존경쟁에서 이겨 살아남는다. 이 변이는 그 대부분이 유전되며, 여러 세대를 거쳐 계속 도태됨으로써 작은 변이가 누적되어 새로운 성질, 보다 고도의 적응한 성질을 갖는 생물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종(種), 속(屬)등으로 분화한다. 이상이 다윈주의의 주요한 논점인데, 변이와 유전의 원인의 법칙, 연속적인 소변이와 질적인 변화의 관계, 생존경쟁의 역할 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비판, 검토가 가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사상적 영향은 지대하며, 다윈주의라는 하나의 사상적 조류로 통칭되고 있다. 그 학설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 다윈 자신은 대단히 신중한, 오히려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20세기에 들어와서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은 고도산업사회를 다원 사회(pluralistic society)라고 규정하였다. 시대적으로 자본주의의 발달로 사회적 이해 관계의 다원화와 복잡화는 다양한 이익 집단의 창출과 정치 권력의 분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또한 획일적인 이데올로기 보다는 다양한 가치관과 주장 등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중 교육의 보급과 참정권도 확대되었다. 전체주의적 사회 질서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생활 양식은 철저하게 통제된다. 그 특징들은 공식적 이데올로기, 일당 독재, 공포 체계, 대중 매체의 독점, 군사력의 독점, 중앙 집권적 경제 체계 등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개인과 집단들의 문화적 차이, 즉 사상과 생활 양식의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와 방식으로 합의를 이루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 질서를 추구한다. 다원주의자들에게 정부란 신화적 공익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익 집단 간에 타협된 정책 집행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사회의 체계도 획일적으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저작들에서 살펴볼 수 있는 스펜서 사상의 핵심적인 테마는 사회는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이른바 '발전가설(the development hypothesis)'과 사회·정치적 문제에 있어서의 자유방임주의 및 국가간섭 배제라는 사상이었다. [7]먼저 스펜서의 진화적 태도에 대해서 살펴보자. 스펜서는 1850년대 들어서면서 진화사상을 체계화시켜 나갔는데, [발전가설](The Development Hypothesis, 1852)이 스펜서를 진화철학자로 불리게 한 최초의 저술이다. 여기서 스펜서는 어떤 현존하는 種들이 이전의 환경과 다른 조건 하에 놓일 때 즉시 새로운 조건에 그것을 적합하게 하는 어떤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고 하면서 적응개념을 처음으로 개진하였다. [8] 스펜서는 적응개념으로 진화를 설명하고, 이러한 적응은 생존경쟁과 不適者의 제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스펜서는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환경조건에 대한 제도들의 비적응의 결과라고 인식하였다.한편, 스펜서가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사용한 저술은 [동물의 다산성에 관한 일반법칙으로부터 추론된 인구론](A Theory of Population, Deduced from the General Law of Animal Fertility, 1852)으로, 이 저술은 진화론적인 관점을 인구이론에 적용시킨 것으로 다윈과 월리스(A. R. Wallece)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9] 그러나 이 저술에서 자연도태의 원리와 비슷한 관념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을 인간 사회로까지 확대해서 적용하지는 않았다.이후 스펜서는 {사회학 연구}(The Study of Sociology, 1873)를 통해 자신의 진화적 태도를 인간 사회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초식동물들과 육식동물의 다양한 생존경쟁, 즉 환경에 대한 생존경쟁, 초식동물과 육식동물간의 생존경쟁, 각 동물 내부에서의 생존경쟁을 탐구하였다. 스펜서는 다양한 생존경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파하면서도, 그 중에서 種의 진화커질수록 내부적 평화와 산업적 분위기는 점점 '평형과정(equilibration)'을 통해 산업사회로 진화해 간다고 파악하였다. 스펜서는 '산업사회'를 '자발적 협동(voluntary cooperation)'과 개인적 자유를 기반으로 신분과 계서제 보다는 계약과 능력에 기초한 사회로 규정하였다. 또한 산업사회는 군사사회의 전제적 정치형태로부터 중앙집권화되지 않은 사회로 이동한 사회이며, 개인적 행동을 억압하는 정치권력을 제한하는 사회로 규정하였다. [18] 산업사회에서 자연도태는 이제 완전히 다른 개인적 특질들을 산출하여 개인들의 자유와 재산을 위한 사회적 안정성을 요구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스펜서가 완전한 이상사회로 상정한 이 산업사회는 자유방임주의사회임과 동시에 산업자본주의적인 부르주아 사회였던 것이다.스펜서가 이러한 사상을 개진한 이유는 그가 사회적 질서를 일종의 자연적 과정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펜서는 정부와 다른 제도들의 규제가 적자생존 원리의 사회적 작용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파악했던 것이다.요컨대 스펜서의 이러한 사상은 자연의 진화와 사회의 진보를 조응시키는 결론으로서, 생존경쟁이 적자생존을, 적자생존이 인간 사회의 진보를 초래한다는 그의 사상의 기본적인 전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이러한 스펜서의 관념은 곧바로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심상에 각인되었다. 그들에게 스펜서의 개인주의적 자유방임주의정책은 자신들의 산업적 생존경쟁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또한 스펜서가 적자생존에 의한 사회적 질서를 자연적 과정으로 인식한 것은 그들이 사회적 계층화를 정당화하는 데 더없이 좋은 도구로 작용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이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자에 대한 기여이고, 나아가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생존경쟁적 사회윤리의 정당화와 그를 통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질서의 옹호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분명히 사회다윈주의는 진보라는 이름아래 전개된 보수적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3. 우생학사회다윈주의자계속함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다고도 주장하였다. [25]이러한 갈톤의 관심은 당시 다른 많은 과학자들처럼 갈톤 자신도 진화의 열쇠로서 유전을 상정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저명한 집안의 혈통관계 연구를 통해 왜 어떤 개인이나 집단들이 생존경쟁에서 우세할 수밖에 없는 가를 증명하려하였고, 생존경쟁에서의 우세는 바로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생물학적 예증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임을 보이려하였다. [26]이후 갈톤은 1883년 {인간의 재능과 계발에 관한 연구}(Inquiries into Human Faculty and Its Development)를 출간하면서 처음으로 '우생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능력은 유전된다는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기본적인 유전론자로서의 입장을 좀 더 강하게 견지하기 시작하였다. [27] 갈톤은 이 책에서 강조한 유전결정론적 시각을 중심으로 생존경쟁에서 우월한 사람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고, 不適者를 적절하게 격리하는 방법을 설파함으로써 그가 상정한 우생학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상위에 위치한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28]이러한 갈톤의 우생학 사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소위 '역선택(negative selection)'의 사고였다. 진화가 환경과 개체간의 상호작용에 의한 변화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진화의 이면에는 반드시 퇴화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서 생존경쟁에 의한 진화는 퇴화하는 개체를 필연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톤은 이러한 역선택의 사고에 근거하여, 퇴화한 인종을 제거하고 우수한 인종을 육성해 인류의 인종개량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29]갈톤은 이러한 인종 개량의 측면에서 '긍정적 우생학(positive eugenic)'과 '부정적 우생학(negative eugenic)'을 제기하였다. 먼저 긍정적 우생학이란 우수한 능력을 가진 개인들이 더 많은 수의 자손을 가질 수 있도록 인종의 생물학적 표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사고에 기반하고 있었다. 반면, 부정적 우생학이란 평균적인 능력) 등과 같은 정치가들과 정치이론가들 사이에 상당한 반향을 가져왔다. [39]사회적 운동과 결합된 미국에서의 우생학은 이후 조직건설로 발전하여 인간 인종의 유전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 양육가 협회(the American Breeders Association)가 결성되었고, 이후 이 조직은 이른바 멘델주의 그룹(Mendelian group)과 결합하여 1906년 우생학 위원회(Eugenics Committee)를 구성하였다. 1910년에는 우생학 기록 보관소(the Eugenics Records Offices)가 설치되었다.이러한 조직들의 활동은 이민의 금지나 제한을 입법화하도록 하고, 우수한 혈통의 가치와 열등한 혈통의 사회적 위협을 보다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미국에서 전개된 우생학 혹은 우생학 운동이 엘리트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주었다.사회운동으로까지 확장되었던 우생학은 모든 사회문제를 유전학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의 고유한 특질에 상위와 하위라는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非人間的인 모습을 들어내었다. 그럼으로써 우생학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고, 그로 인해 현상유지를 갈구하는 사회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쉽게 옹호되고 수용되어질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본다면 우생학과 연관된 사회다윈주의는 非人道的인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고, 엘리트적 신념에 기반했던 보수적 이데올로기였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4.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인위적인 분류에 의한 의도적인 인종간의 위계 내지 서열이라는 사고는 우생학적 사고와 더불어 사회다윈주의자들이 다윈의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문구의 함의를 인종들간의 상호관련성 속에서 설명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사회다윈주의자들은 백인종에 비해 흑인종이 열등하다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제국주의적 팽창의 합리화와 자신들의 논리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과장되게 해석한 측면이 있다.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대에 사회다윈주의자들은 다윈의 생존경쟁이라는 용어를 이용해 백인종이 다른 열등한 인종들을 제거하.
Ⅰ. 들어가기. 필름느와르(film noir)의 등장1940년대 말기와 1950년대 초반을 지배한 필름느와르 라는 말은 프랑스 비평가들에 의해 처음 사용 된 용어로서, 내러티브와 영화적 스타일 그리고 제작된 시대등에 의해 구분된다.필름느와르를 그 자체로서 특정 장르로 구분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영화적 시기와 관련된 시각과 주제의 관습체계, 확연한 영화적 스타일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영화사적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일반적인 필름 느와르의 특징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잇는 두 가지의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각적으로는 대부분의 헐리우드 영화들 보다 어둡고 구성이 추상적인 특징을 가진다. 느와르 스타일의 관습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발전한 갖가지 기술, 내러티브,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공황기의 갱스터와 도시 범죄 영화들은 널리 대중화된 공포 영화와 함께 10년 뒤에 등장할 보다 어두운 영상의 느와르의 산파역할을 한 것이다.또한 1920년대 UFA 스튜디오에서 성장한 독일 표현주의에 의해 느와르는 영향을 받았으며 1930년대의 급속한 기술적 진보로 헐리우드의 느와르는 가능하였다. 더 빠른 전색 감광 필름 스탁과 카메라렌즈는 더 뛰어난 감광을 가능케 했고 이로써 감독들은 조명과 화면의 깊이를 훨씬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느와르에 반영된 문화적 태도는 사회를 모순되고 환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리감에 도취된 참전용사들이 귀향을 하였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공황과 전쟁의 후유증과 사회혼란 뿐이였다.. 뉴 헐리우드 시대 혹은 네오 느와르(Neo noir)의 등장고전적 하드보일드 탐정 장르의 정형과 이 장르의 기사들은 1940년대 이후론 스크린에서 사라져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뉴 헐리우드 시대가 그것을 깨우기까지 긴 동면에 들어간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느와르의 명맥을 유지해준 "차이나타운", "보디히트"와 같은 작품을 통해 느와르는 1990년대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코엔형제와 타란티노, 데이빗 핀쳐와 같은 참신한 영상감각을 가진 감독들에 의해서 다시 제작되어진다. 네오 느와르의 경향은 초창기 느와르 영화의 주제가 불안한 사회속에서 개인의 고독감을 둘러싼 갈등을 묘사하였다면 네오느와르 영화의 테마는 "배반"으로 설명될 수 있다.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코엔형제의 "밀러스크로싱",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초창기 느와르를 주도한 펨 느와르 (femme noir) 혹은 펨 페이틀(femme fatal)의 이미지가 많이 사라지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세기말적인 혼돈을 반영한 연쇄살인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들이 제작된다. "세븐", "본콜렉터" "칼리포니아"와 같은 작품이 그 예이다.마지막으로는 네오 느와르의 특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의 삽입을 들 수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전혀 의심치 못한 사람이나 상황에서 모든 것을 반전시키는 경향이 네오 느와르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다. "유즈얼 서스펙트", "세븐" 그리고 최고의 반전이라 꼽히는 "L.A 컨피덴셜"을 통해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그럼 본론은 어떻게?본론을 통해 느와르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스카페이스(Scarface)와 네오느와르의 잘짜여진 형식을 보여주는 세븐을 통해 느와르를 통해 그 시대가 가진 현상들과 도시의 이미지를 어떻게 반영시키고 풀어내는지 알아보겠다.Ⅱ. 속 알맹이. 다른 장르와의 차별성느와르 영화의 배경은 주로 현대도시이다. 회색 콘크리트벽과 그림자 높은 빌딩들로 막혀 있으며 거리는 언제나 비가 내리고 있으며 무관심한 현대인들의 모습만이 보인다. 사회에 적당히 적응하지 못하는 고독한 주인공이 등장을 하며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교재에 설명되어진 슈레이더가 필름 느와르를 특징짓는 7가지를 통해 타 장르와의 차별성을 확인하여 보자.1. 대부분의 장면을 밤에 찍는다.2. 독일 표현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선과 수직선이 수평선보다 더 선호된다.3. 배우와 세트에는 종종 같은 비중의 조명이 가해진다.4. 구도상의 긴장이 신체 활동보다 더 선호된다.5. 물에 대해 거의 프로이트적인 집착이 있다.(그리고 거울,창문, 그 외 반사하는 물체들에 대한 집착)6. 낭만적인 나레이션에 대한 애착이 있다.7. 복잡한 시간 배열이 미래의 잃어버린 시간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왜 느와르에 관심을 가질까?로버트 워쇼 - 실제 도시는 오직 범죄자를 생산하는 반면, 상상의 도시는 갱스터를 생산한다. 즉 갱스터는 우리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두려워하는 인물이다.실제로 범죄자들이 가지지 못한 영웅적 품성이 갱스터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토대가 된다.. 스카페이스와 세븐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나?본래는 하워드 혹스 감독의 1932년 원작 스카페이스를 세븐과 비교하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인 간절한 소망이였으나 어디를 가도 희귀하기만 한 비디오을 구할 수 없어서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 1983년 리메이크 작품을 자료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나의 가설을 보다 명확히 입증시켜 줄 수 있는 좋은 비교가 원작과 리메이크작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였다. 50년의 시간을 두고 세상도 변하고 헐리우드도 변하고 느와르도 변했을 것이다. 또한 변한 세상만큼 느와르라는 창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나? 라는 문제의 해답은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비교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세븐이라는 영화가 워낙에 세기말의 암울함을 반영한 수작이라 기꺼이 선택하여 비교하였다.먼저 스카페이스의 경우는 원작과는 달리 1980에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에 사는 친지들을 보라고 보내거나 혹은 추방시킨 사람들에서 모티브를 잡았다. 주인공 안토니오 몬타나는 사람들중 1/5 이 범죄자인 플로리다로 향하는 배에 탄 한 사람 이였으나 (원작에서는 당시 최고의 갱이였던 시실리 출신의 알 카포네를 모델로 하였다.)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다.갱스터 느와르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원작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의 느와르를 창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였을까라는 질문에 과감히 팔머 감독은 그 당시 가장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쿠바인들의 밀입국과 더불어 그들이 팔아치우는 마약들에 연계성을 찾으면서 원작의 토니 카몬테가 아닌 새로운 인물 토니 몬타나를 창조해낸 것이다. 하지만 팔머 감독 혹은 각색을 맡은 올리버 스톤은 원작의 나머지부분은 거의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영화를 이끌어 나갔으며 원작에 보여진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멀기만 환상과 주인공이 겪는 근친상간적 성적인 갈등과 함께 밑바닥 인생으로 시작해서 암흑가의 정상으로 우뚝 섰던 한 남자가 급격하게 몰락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을 그대로 잘 살리고 있다.. 세븐에 드리워진 세기말의 어두운 그림자단테의 신곡을 근거로 한 연쇄 살인을 추적하는 두 형사 윌리엄 소머셋과 데이비드 밀스 를 주인공으로 7가지의 죄악 'Gluttony(탐식)', 'Greed(탐욕)'에 이어지는 Sloth(나태), Envy(시기), Lust(정욕), Pride(교만), Wrath(분노)에 따라 살인되는 피해자들을 따라 범인을 추적하는 서스펜스 스릴러 형식의 느와르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고전적인 조건들에 맞추어 음습하고 항상 비가 내리며 어디선가 범죄가 일어날 것 같은 곳이며 정년퇴임을 일주일 앞둔 섬머셋은 한번도 가정을 가지지 못한 메트로놈을 지니고 잠이 드는 어딘가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신참 밀스는 항상 불안해하는 아내를 보며 자신 또한 회의감과 무기력에 힘들어한다.사이코적인 범인 존 도우는 유유히 자수를 하게 되고 자신의 시기와 밀스의 분노로 인해 7가지의 죄악을 모두 죽음으로 응징한 채 영화는 결말을 맺게된다.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제는 세기말이구나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틀안에서 물질적인 부족함이라고는 느끼지 못하며 단지 영혼과 정신의 부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존 도우의 연기와 대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되며 이러한 영화는 30,40년대와 같은 초창기 느와르 시대에서는 제작되기 힘든 영화가 될 것이다. 초창기의 느와르 영화들의 갱스터나 악당들은 반드시 윤리적인 보복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악과 선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영화의 메시지 자체가 親사회적 성격을 띄지 못할 경우는 검열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序 論EU의 정보보호 지침과 OECD의 프라이버시 보호와 개인정보의 국제적 유통에 관한 지침"EUROPEAN COMMUNITY DIRECTIVE ON DATA PROTECTION"은 1995년 10월 24일에 최초로, 2002년 7월12일에는 1995년의 것을 수정하여 발표되었다. 큰 골격은 개인정보의 국제 유통에 관한 것으로서, 이 지침서의 초안으로써 역할을 한 지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1980년에 만들어진 '프라이버시 보호와 개인정보의 국제적 유통에 관한 지침'이다. 물론, 이 원칙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개인정보보호지침(2000. 6. 1시행)'에도 기본적인 골격을 잡아주는 시금석의 역할을 하였다. 본 연구는 OECD와 EU DIRECTIVE ON DATA PROTECTION를 바탕으로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적 접근과 사용되는 개념들의 설명, 국제 프라이버시 침해사례에 관해 접근하고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례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本 論프라이버시는 『사생활의 내용을 공개 당하지 아니할 권리, 자신의 정보를 스스로 관리 통제할 권리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기본권』으로서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 즉 개인의 존엄성 유지와 정체성 형성 및 자율성 보호를 제공하고 인간 존립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 근거라 할 수 있겠다. 인격권으로 알려진 프라이버시는 인터넷 붐이 몰고 온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 데이터라는 개념으로 정의되며 개인적 가치 외에 사회적, 경제적 가치로 그 의미와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의 정보는 어떤 고가의 정보와도 견줄 수 없는 물질적 가치 이상의 무형적 가치를 지니며 개인의 가장 고귀한 자산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특히 1970년대 이후, 국가 간의 경제적 협력이 증가하면서 OECD는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정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자상거래가 국제적인 관심사로 부각됨에 따라 개인정보의 유출에 대한 우려가 전자상거래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OECD는 각 나라가 합의하는 통일된 개인정보보호지침의 명확화의 원칙개인정보를 수집 할 때는 목적이 명확해야 하고, 이를 이용할 경우에라도 애초의 목적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4) 이용제한의 원칙개인정보는 정보 주체의 동의가 있는 경우나 법률의 규정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명확히 명시된 목적 이외의 용도로 공개되거나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5) 안정성 확보의 원칙개인정보의 분실, 불법적인 접근, 파괴, 사용, 수정, 공개위험에 대비하여 합리적인 안전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6) 공개의 원칙개인정보에 관한 개발, 운용 및 정책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공개정책을 취하여야 한다. 개인정보의 존재, 성질 및 주요이용목적과 함께 정보관리자의 신원, 주소를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7) 개인참가의 원칙정보주체인 개인은 자신과 관련된 정보의 존재확인, 열람요구, 이의제기 및 정정·삭제·보완 청구권을 가진다.8) 책임의 원칙개인정보 관리자는 위에서 제시한 원칙들이 지켜지도록 필요한 제반조치를 위해야 한다.OECD의 '프라이버시 보호와 개인정보의 국제적 유통에 관한 지침 1980'는 엄격히 말하면 감청, 이메일감시, 온라인상의 정보유출 등과 같은 범위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정보보호 지침을 작성할 때 이를 참고하였다 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적용되는 원칙의 폭이 넓다라고 할 수 있다.이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권 개념이 적극적으로 바뀌는 경향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쌍방적 의사 소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정보수용자들은 정부에게만 정보 관리.가공을 맡길 필요가 없다. 수용자들 스스로가 통신상에서 다른 이들과 서로간의 정보를 나눔으로써 정보 자체를 보다 확장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정보를 공유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개인신상정보 유출 경로가 무한정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들이 다양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 활용하고 생산할 수 있게 된 반면, 자신들의 고유한 신상정보를 어떤 용도로, 언제 어떻게 공개되는지도 모른채, 그리고 어권의 대표성 없이도 구속력을 가진다. 저작권에 대한 일시적 또한 즉시 적인 구속력을 가진다. 저작권에 대한 위법은 어떤 사람이 저작권에 대한 작가의 출처에 대한 인증이 없거나 정밀한 사본의 작업 또는 저작권을 가지는 표현에 대한 파생적인 작업에서 발생한다.저작권법의 이례적인 대부분의 사례들은 "정당한 사용(fair use)"의 원칙에 포함된다. 하지만 연방법이 효력을 가지는 부분에 따라 명확한 개념은 빠르게 모호한 개념으로 전환된다. 법원은 사실문제들이 원칙의 범위에 문제에 포함되는 사례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실, 정당한 사용의 원칙에 대한 신임은 불확실성을 가지는 명제이다.권리들은 작업이 공공의 부분에 예속될 때 완전히 상실 될 수 있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발생된다. 창작의 일시에 따라, 법은 작업이 공공의 분야 예속된 것처럼 간주된다.그 이유는 미국은 베른조약(Berne convention, 저작권 보호를 위한 국제 조약)에 1989년까지 조인하지 않은 않았으며, 1989년 이전의 창작물들에 대해서는 다른 보호의 개념이 적용된다. 변함 없이, 작업이 공공의 분야에 예속될 때 저작권 보호는 만기된다. 이러한 점에서 어떤 사람이나 기계가, 출고나 제작에서 원본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위법의 범위가 아니었다. 1989년 이후로 미국 작가협회는 작가의 사후 50년 동안 작가의 저작권이 보호받을 권리를 부여하였다. 1989년 이전의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에 대해서는 법의 적용시기의 복잡함과 작가협회 사이의 해석의 차이로 인해 난해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웹(web)상에서의 저작권의 고지에 대한 세부적 설명에 요구되는 사항은 없다. 이것은 웹에서 중요한 개념으로써 모든 웹페이지의 저작권은 보호되기 때문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오직 2가지의 예외만이 있을 뿐인데 ; 하나는 고유의 작가가 명백히 드러나는 경우이거나 또 다른 하나의 경우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저작권이 누락된 경우에 해당한다. 웹은 이제 대략 6살 정도이지만, 빈틈없는 그것의 복사에 대한 허락을 내포하고 있다. 범위를 넘어선 복제는 작가의 권리의 침해가 될 수 있다.인터넷의 초기단계는 공개된 표준성과 협동성을 지니고 있는 시기였다. Netscape Navigator와 Microsoft Explorer와 같은 브라우저들은 웹페이지의 소스에 대한 사용자의 접근을 허락하는 것을 설정하였다. 이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hypertext markup language (HTML)을 배울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웹이 성장하게 되었다.다른 사람의 웹의 소스를 보는 것이 불법이 아니었을 때, 어떤 사람의 웹 페이지를 고스란히 복사하여 사용하는 것은 관행처럼 되어 아무렇지 않은 일 이였다.그러한 전 세계적으로 넓게 확산되어진 "정보는 자유로워야 한다" 라는 태도의 문화적 공동체는 점점 전복되어야 한다. 웹에 올려진 모든 정보들은 복제가 자유로우며 공동의 영역에 포함된다라는 오해는 완전히 명백한 불법이다. HTML, Javascript 또는 어떤 다른 언어의 소스에 대한 복제는 소유자에 대한 불법이며 위법이다.음성적으로 자행되는 소스코드의 복사원리나 그래픽의 추가적인 변형은 은연중에 행해지는 허가되지 않은 부분이다. 이러한 복사는 이윤추구를 해서는 안 되며 e-메일을 통한 디지털 복제 또한 위법이 될 수 있다. 재미있고 야한 농담을 당신의 형제에게 e-메일을 통해 발송하는 것은 제법 괜찮은 생각인 것 같지만 마치, 허가받지 않은 알몸사진을 공개하는 것이 작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저작권에 침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중에게 작업을 공개하는 것도 위법이며, 단지 인터넷 아이템의 단순한 재배치 또한 위법인 것이다. 어떤 누구도 그 작업을 보고싶어 하지 않는다.웹 컨텐츠의 제작자들은 저작권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그를 통해 그들은 법을 위반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웹 마스터들 또한 저작권 보호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웹사이트의 고유한 요소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터넷의 본성과 디지털 파일의 재생산의 용이함으로 인해 불법으로를 들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다운 사이트나 성적인 동영상 컨텐츠를 제공하는 사이트의 소유주들은 상품의 제공이전에 때때로 지불을 요청한다. 사실, 웹사이트의 비밀번호 유지의 부분은 대부분 공중에 노출되지는 않지만, 단단히 결심한 해커들은 인터넷을 통한 장비의 접속으로 항상 그것들을 획득 할 수 있다. 사업자들은 소중한 정보의 유출을 막는 것과 그들의 고객에게 사용하기 쉬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지속적인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업자들은 모든 고객의 정보를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과 특히 그들에게 이윤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유료의 고객의 정보 보호에 더 집중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웹 상에서의 회사의 이윤추구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 Playboy사가반복 되게 인지하는 것처럼 저가의 스캐너의 보급으로 인해 오프라인에서의 출판물에 대한 보호는 불가능 하게되었다. 이와 유사한 범법행위에 대한 법적인 조치의 시행에도, 그것이 이윤추구라는 경제적 동기가 없다 하더라도 최근에 지속되고 있으며, 더욱 더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또 다른 형태의 보호책이 발견되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워터마크(watermark)' 이미지로 저작권의 정보와 함께 생성시키는 것이며, 원래 소유주의 증거를 보다 깊이 남기는 것과 범법의 행위자체를 보다 쉽게 확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소프트웨어의 계발은 Java applets이라는 디지털 파일 기술에 포함되어 진행중인데, 이를 통해 다운로드와 e-메일의 파일 첨부를 통한 전송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기업들은 소비자의 이익을 위해 발생되는 인터넷에서의 범법행위를 찾기 위해 일어서기 시작했다.저작권법의 하나의 거대한 예외 조항은 복제가 불가능한 database 컨텐츠에 관한 것이다. database 설비 자체가 고유하게 충분히 방어가 가능함에도 그렇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세분화된 국가와 다양한 지역 시장에서의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구분하여 독립적인 변수들을 미리 예보 할 수 있.
광 고 론REPORT어느 광고인의 고백Confession of an Advertising Man과 목 명담 당 교 수학 과학 번 / 성 명제 출 일 자어느 광고인의 고백 Confession of an Advertising Man'어느 광고인의 고백'이라......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디지털과 발빠르고 자극적인 영상들과 문구 속에서 다소 고리타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책제목은 너무 고전적인 것이 아닌가할 정도이다.하지만 분명 '어느 광고인의 고백'은 고전적이리 만큼 고전으로 남을 책이다.이 땅에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상품을 팔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광고를 해야 한다면'어느 광고인의 고백'은 이미 너무나 유명해서 마치 광고를 업으로 삼거나 혹은 배우려는 학생들에게는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레포트의 표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1950년 작은 해더웨이 맨(Hathaway man) 셔츠광고와 광고에서 마음껏 발휘된 오길비의 "시속 60마일에서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음은 전자 시계 소리"라는 불후의 카피는 두고두고 생각해도 정말 멋지고 또 멋지다.이 책이 정말 1963년도에 나온 책이란 말인가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오길비의 '어느 광고인의 고백'은 참으로 예리하고 섬득하리 만큼 광고라는 미묘한 대상을 직설적이고 어렵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오길비는 나와 같이 광고를 업으로 삼지 않거나 혹은 어디 가서 광고좀 안다고 뻐지기 못할 사람들은 절대 이 책을 살 수 없게 목차들을 나열해 놓았다. 목차들을 일일이 나열하면 대충 이런데.....제1장 광고대행사를 경영하려면, 제2장 클라이언트를 유치하려면제3장 클라이언트를 놓치지 않으려면 , 제4장 좋은 클라이언트가 되려면제5장 캠페인을 성공시키려면, 제6장 강력한 카피를 쓰려면제7장 광고 및 포스터를 일러스트레이트 하려면,제8장 좋은 텔레비젼 커머셜을 만들려면, 제9장 식품, 관광, 약품의 좋은 캠페인을 벌이려면제10장 정상에 오르려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심오한 주제이기도한 제11장 광고는 없애야 할까요?를 마지막으로 멋진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솔직히 이 책을 학교 과제 아니면 누가 사보랴.... (나 같은 소시민이....)하지만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고 읽어도 별 재미도 없을 것 같은 이 책이 정말 지루하지 않고 나의 지성을 간지럽힌 가장 큰 이유는 오길비라는 사람의 바이오 그래피에 있을 것이다. 옥스퍼드의 낙제생이 되어 적지 않은 세월인 17년간을 요리사와 세일즈맨, 사회사업가, 조사회사의 공동 경영자 보험회사의 어시스턴트로 일한 것에서 우러져 나온 깊이 있는 현상의 고찰 때문이였으리라. 광고대행사의 경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자신의 경험인 주방의 수석 요리사의 예를 통해 쉽게 설명함으로 인해 한 장, 한 장 부담 없이 책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역시 한 방면의 장인이나 대가로 불려지는 사람들은 함부로 현학적이거나 거만한 문체들을 쓰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오길비는 분명 명예의 전당에 천거될 만한 인물이라 의심치 않는다.'어느 광고인의 고백'을 읽는 동안 일관되게 느껴지는 나의 감정들은 오길비라는 사람은 분명 동일한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하였다는 것이다. 조사회사의 어시스턴트 출신답게 정확한 사전조사에 의해 광고를 기획하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길비 이전의 어떤 AE나 카피라이터들도 카피를 쓰기 위해 지면 광고를 만들기위해 그 제품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조사를 먼저 실시한 사람은 없었다고 하니 오길비라는 사람이 현대 광고에 미친 영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또한 내가 추상적으로 가지고있던 좋은 광고에 대한 가시적이지 않던 생각들을 오길비는 이 책을 통해 확실히 알려 주었다. 오길비는 좋은 광고라는 것은 광고자체에 주의를 끌지 않으면서 제품을 파는 광고 라고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소비자로 하여금 광고를 보았을 때 "정말 훌륭한 광고로군"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이런 제품이 있었는 줄 몰랐는데, 이것을 한번 써봐야겠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광고라고 알려주고 있다.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재미있고 새로운 접근이라고 느낀 부분이 두 챕터가 있다.하나는 제 4장 좋은 클라이언트가 되려면 과 제 11장 광고는 없애야 할까요? 이다.어느 광고인의 고백이란 책을 지배 하고있는 오길비라는 광고계 최고거인의 두드러진 특징은 항상 어떤 현상이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머리와 가슴을 가지고있다는 것이였다. 기존에 서술되어진 좋은 광고의 정의와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광고대행사를 운영해야 하며 또한 클라이언트를 유치해서 그들을 잃지않기하기 위한 방법까지 제시한 오길비 개인의 살아있는 경험들에 대한 기술뿐만 아니라, 자신이 경영하는 대행사의 입장에서 "내가 만약 클라이언트라면"이란 가정을 하여어느 광고인의 고백 Confession of an Advertising Man클라이언트에게 겸손하면서도 건설적인 충고를 하고 있다. 만약 오길비라른 사람이 자신의 성공담만을 주저리 주저리 나열하여 당신의 투쟁적인 인생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어 감동을 한약 달여서 짜내는 것처럼 생각하였다면 이 책은 분명 좋은 책이 아닐 것이다. 클라이언트들에게 겸손하면서도 보다 명확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오길비의 글들에 참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또한 이 책의 제일 마지막장을 채우고 있는 제 11장 '광고는 없애야 할까요?'는 정말 역설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주제를 나름대로 오길비 특유의 재기 넘치는 문제해석으로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광고라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성격을 가진 대상을, 사회주의자들이나 일부 경제학자들의 주장처럼 광고가 소비자들을 우롱하거나 소비를 조장하여 시장에서 독점을 조장하고 있지 않다고 말을 하고 있다. 오길비는 이 장을 통해 광고가 단순히 상품을 파는 도구라기보다는 고객에게 어떠한 가치를 제공하여 대형생산과 소비를 가능하게 하며 소비자들로 하여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에서 여러 가지 순기능을 한다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굳이 루즈벨트나 윈스턴 처칠 혹은 아니스타스 미코얀까지 거론하며 설명하지 않아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