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경제대국이다. 하지만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미국경제의 침체로 그 여파는 세계 각국에 전파되었다. 작년3분기 말부터 불어 닥친 여파로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EU, 중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이 이에 몸살을 앓고 있다. 세계화로 인한 각국의 경제, 정치, 문화 등이 거미줄처럼 수없이 얽혀있어서 불과 백년 사이에 세계대공황과 2차례에 이은 오일쇼크 때보다 더욱더 심각한 수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서론으로 너무 경제적인 문제로만 접근한 것 같아, 이제 본론을 시작해 보려 한다.불과 60여년 전 까지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은 패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아주 낙후된 상태였다. 약 6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발전 했지만, 패전직후의 참담했던 시기에는 생각 할 수도 없는 놀라운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전 후 냉전시기에 있어서 일본의 대외적인 안보에 대해서는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으며, 일본의 안보에 대해서는 연합국내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시피 한 미국의 영향력이 아주 큰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일본은 연합국 최고사령부(GHQ)의 비군사화 정책에 의해 1946년 11월 3일 일체의 전쟁 권한을 부정하고 군대의 보유 금지를 규정한 ‘일본국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하지만 그 후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이후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에 대해 고심하였고, 1947년 냉전체제돌입의 본격화로 일본은 자국의 입장을 대일 안보문제에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패전 후 51년 까지 약 6년간은 일본의 주요 관심사는 1951년 미일안보체제의 형성까지 대립되는 정치과정이었다. 이는 곧 일본은 전후 자국안보와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거의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보호아래에서 성장하기를 기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 또한 전후 냉전체제하에서 소련이라는 공산주의체제에 대립하기 위해서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일본의 입지가 미국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헌법 제9조에 의해 일본은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는 ‘특수국가’가 되었고 따라서 일본 지배세력 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는 자국의 안보를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그 대안으로 일본은 영세중립, 타국에 의한 일본방위, 유엔에 의한 보호 등을 대안으로 내놓았으며, 일본의 입장은 초기에는 영세중립의 입장이었으나 이후 UN에 의한 일반적 안보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소 양극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일본 지배세력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UN보다는 미국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천황역시 맥아더와의 회담에서 미국의 군사력에 자국의 안보를 위임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일본 지배세력은 안보문제에 대해 별다른 의견차이 없이 일치된 의견을 나타내었는데 이는 전후 일본의 안보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고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국의 입장은 3가지로 나뉘었다. 바로 GHQ와 국무성, 국방성 사이의 의견 차이였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는 점령이 1년 이내에 종결되어야 하며 이후 안보는 UN에 달려있다는 입장을 내비췄으며 일본을 중립지대로 보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국무성은 일본을 중립지대로 간주하면 일본이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일본의 재군비, 본토 내 기지보유 등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제부흥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서 경제 원조를 실시하여 이로 인한 일본의 자립을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국방성은 동북아지역의 미군 주둔의 기지로서 일본의 지리적인 장점을 주장하였으며, 일본의 안보를 UN에 맡기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미국 내에서 일본안보에 대한 의견일치가 부진했던 이유로는 대일정책의 통일성을 강요할 정도로 국제체제의 구조적 압력이 높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후 요시다 내각에서는 소련군의 일본침공의 개연성을 낮게 보아 일본열도의 군사적 가치를 기조로 급속한 재군비를 회피하고 미국의 안보 우산 하에서 경제부흥에 전념하려고 하였으며, 재군비 문제를 회피하고 경제부흥에 전념하는 요시다 노선을 대미 종속노선으로 비판하면서 대미 자주노선과 헌법 개정 및 재군비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안보문제를 둘러싼 네 가지 다른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첫째로, 요시다 파의 미일안보체제 하에서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면서 경제부흥을 꾀하는 것과 둘째로, 하토야마, 기시, 이시바시 등의 헌법개정, 재군비, 정치 우선주의 주장, 셋째로, 요시다와 하토야마파의 중간적 성격인 아시다, 시게미쓰 등의 현행 헌법의 범위 내에서의 미군의 재군비 요구에 대응, 마지막으로, 사회당의 호헌?평화를 표방한 중립정책을 통한 일본 안보확보주장 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들로 인해 향후 일본안보문제는 유동적인 상황이었으며, 요시다와 하토야마파간의 대립이 주된 쟁점이었고, 이는 권력 장악투쟁과 동시에 헌법개정, 재군비 문제에 대한 대립이었다. 이에 요시다파는 하토야마파 세력억제를 위해 ‘불시해산’을 단행하였고 분열선거를 하는 등 양파의 갈등은 심해졌다. 총선거 후에는 헌법 개정과 재군비를 주장했던 하토야마파는 부진하였고 좌파 사회당의 약진이 나타났다. 즉 헌법 개정과 재군비론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요시다파를 중심으로 한 안보문제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경제부흥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1952년 미국이 MSA(상호안보법)를 일본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급속한 재군비를 주장하는 미국 측과 점진적인 재군비를 주장하는 일본 측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이에 요시다 내각은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자위군을 창설한다는 입장을 내비췄고 미국의 방위력 증강 요청을 억제하면서 경제 원조를 이끌어 내려는 목적을 나타냈다. MSA협정은 급속한 재군비 증강에 소극적이었던 요시다 내각의 입장을 바꾸게 하는 원인이었으며 국내외에 재군비 반대, 평화국가의 이미지를 비추고, 또 한편으로는 재군비를 대미 협상의 전략으로 이용하는 일본 측의 입장도 있었다. 하지만 요시다 내각 붕괴된 후 하토야마 정권이 성 목표는 일본 지배세력이 헌법 개정의 실현 불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또 기시가 주장한 자주외교는 대미협조를 전제로 한 가운데 자주군비를 목표로 하였던 것으로서 ‘전술적 친미론자’였다. 그 당시 여야당을 불문하고 정치세력은 미일안보조약의 문제점을 들고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에서 일치를 보였다. 이 시기 미국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하토야마 내각이후 일본의 중립화에 대해 신경이 쓰였던 미국은 일본의 중립화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안보조약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는 미일관계의 잠재적 위기의 원인을 차단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즉, 미국은 일본정부가 중립을 선언하게 되면 대소 봉쇄기지의 상실여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될 경우 군사대국화와 아시아 민족주의로의 발전여부 등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를 간파한 기시내각은 1957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방위 2법을 개정하여 자위대원 1만 명을 증원하는 동시에 국방회의를 개최하여 국방의 기본방침과 제1차 방위력 정비계획을 결정하였다.) 이에 미국으로 하여금 안보조약 개정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계획이었다. 안보조약 개정협상에는 불평등한 부분을 쌍무적인 것으로 개정, 일본 주둔 미군의 배치?사용은 사전 협의, 일본방위의무를 명문화, 국내의 간접침략에 미군 출동할 것을 허용한 조항삭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적인 요인으로 세 차례에 걸쳐 조인이 연기 되었고 결국 1960년 1월 6일 최종적으로 타결되었다. 이 신안보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던 것은 기시내각의 정치력에 의해 가능하였던 것이지만 기시내각이 추진한 안보조약개정은 정당 간 정치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자주국가로서의 일본 건설의 문제와 미국의 정책 결정자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무리한 군비확충 요구에 의한 강한 일본 등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기시 내각 붕괴 후 성립한 이케다 정권의 소득배증계획으로 인하여 미일동맹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약화되었다. 그 이유로는 이케다정상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전까지 적으로 간주했던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이전에는 분열적이었던 야당 등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다나카 내각으로의 정권교체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정상화와 평화외교를 강력히 추진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다나카 총리는 중국을 방문한 뒤 중국총리의 안보조약을 용인할 의사를 명확히 받아내었고, 중일 간 국교가 정상화 되었다. 그 이후 일본은 소원해진 미일관계 복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앞서 언급한 미중관계회복과 중일국교정상화로 인해 소원해진 미일관계에는 균열이 발생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미일동맹관계는 어떠한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여러 요인들이 중첩되면서 미일동맹관계는 교착국면에 빠졌던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로는 자민당 내 권력투쟁의 격화와 절대적 우위의 동요, 사회당의 장기저락과 정체성의 혼동, 공명당의 반 자민?반 안보 연합정권구상이다. 특히 사회당은 전후부터 계속하여 미일안보조약의 폐기를 주장해 온 사회당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70년대에 들어서 대규모 무력분쟁의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소련군은 오히려 증강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력 정비의 필요성을 깨닫고 1976년 ‘방위계획대강’을 책정하였다.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가 동요되어 세계경제 질서가 불안정한 시대로 진입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보호아래에 안주하기 보다는 동남아를 자원의 안정적 확보와 경제발전을 위한 교두보로 간주하여 이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해외진출을 보장할 수 있는 안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러한 국내외적 정치상황 하에서 책정된 것이 1978년 11월 27일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이었다.) 앞서 언급한 소련 극동군의 증강과 일본 정치세력의 역학관계 변화에서 비롯된 안보 불안이 중첩되면서 가이드라인을 책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일 간 국제수지.
주제: 한?미 쇠고기 협상목 차♣펴는 말♣한?미 쇠고기 협상의 전개과정♣한?미 쇠고기 협상의~문화, 역사, 추세①협상관찰자②협상 당사자③협상모체(실질적 이해당사자)④의제⑤세력관계⑥협상청중⑦협상진출⑧협상결과⑨차기협상⑩갈등과 공동이익⑪갈등해소, 공동이익 도모♣맺음 말♣펴는 말2008년 4월 18일, 한?미 쇠고기협상의 타결 이후 대한민국내의 야당의원뿐만이 아니라 노인, 기성세대, 직장인, 대학생, 청소년,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든 국민의 관심사가 한?미 쇠고기협상으로 기울어져 있다. 취임한지 갓 2달이 넘은 대통령의 탄핵운동, 쇠고기 협상의 당사였던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해임안, 촛불집회, 미국산 쇠고기 안 먹기 운동 등 이제 첫 걸음마 단계인 MB 정권의 첫 단추가 처음부터 어긋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이명박 대통령의 2008.4.19 한?미 정상회담의 하루 앞에 열린 이 협상은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끝났다. 하지만 이 협상이 타결된 후 방송3사 어느 곳에서도 한동안 쇠고기협상에 대한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 내 생각으론 아마 일주일 정도였을 것이다. ‘한국가의 생명권이 걸린 문제’, ‘중대한 사안’ 이러한 문제들이 정부의 압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것 들이 정규방송 9시 뉴스 메인에 떠야 하지만 한 동안.. 방송되지 않았다.그리고 약 10일 후인 2008년 4월29일 MBC의 PD수첩이란 시사프로그램에서 광우병에 대하여 방송을 하였다. 인터넷 상에서만 맴돌던 수많은 여론들이 그제 서야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게 맞겠지만 조금 늦었던 정규방송의 뉴스들..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정신이 죽지 않은 것 같다. 제일 큰 걱정이 국민들이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고 지나쳐 버릴 수 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평소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 관련하여 정보도 많이 접하였고 그 위험성을 알고 있는지라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쇠고기 협상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너무나도 궁금했른 한?미 쇠고기 협상의 각 내용들과 한국정부의 아이러니한 행동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겠다.♣한?미 쇠고기 협상의 전개과정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간순서대로 각각의 세부적인 내용을 알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은 아래의 표와 같다.날 짜관 련 내 용2003년 12월국내 수입이 전면 금지2006년 1월‘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살코기’ 라는 현행 수입 조건을 타결2006년 9월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국내에서 최종 승인2006년 10월미국산 쇠고기에서 뼛조각발견 수입물량 모두 반송 또는 폐기2007년 2월양측의 검역기술 협의2007년 4월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2007년 5월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절차 착수 공식 선언2007년 5월~수입 금지 품목이 수입물량에서 수차례 발견2007년 10월국내 수입이 중단2007년 10월쇠고기 수입조건 개정안 협상 결렬2008년 4월2차 검역전문가 회의재개2008년 4월 18일한?미 FTA 쇠고기 협상 공식 타결2008년 5월 중순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예정위의 내용에서와 같이 올해의 쇠고기 협상 전의 쇠고기 협상에서는 뼈 없는 살코기만을 수입하였고 뼛조각이 발견되자 수입물량 모두 반송 또는 폐기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노무현 정권 때에도 쇠고기 협상의 문제는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의 뼛조각이 나왔을 때 일본처럼 강력하게 수입중단을 외치지 못하고 검역중단만 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권 교체이후 협상은 속전속결로 이루어 졌으며 종래의 뼈 없는 살코기만을 수입하던 것이 30개월 령 이하 쇠고기는 뼈까지도 수입하게 된 것이다.[국제 협상 도표]♣한?미 쇠고기 협상의~ (위의 표 참조)문화, 역사, 추세일단 문화적인 차이는 여느 나라를 막론하고 분명히 존재한다. 비슷한 지역권 내의 문화인 한?중?일 3국간의 문화들이 이질감이 크듯이, 한국은 지리적으로도 동떨어진,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더욱더 동떨어진 미국과의 무역교류에 있어서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현재의 추세를 반영하여 더욱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협상 팀 안에 관찰자를 두는 것이 한 방법이다. 협상에는 직접 참여 하지는 않지만 협상가들이 편견이나 오류에 범했을 때 이를 지적해 주고 자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준비 시켜놓으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번 협상에서는 이러한 관찰자들이 없었다.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한 협상은 국민의 건강권이 달린 문제이므로 협상 전 미리 각 분야별 교수나 각 협회장들이 모여서 협상당사자들에게 협상의 구체적인 조언과 각 부문의 장?단점을 말하는 것이 통상 관례였다.그러나 이번 협상에서는 이 안건이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행적으로라도 행하는 회의한번 없이 재빨리 이루어져 버렸다.이리하여, 정권교체이후 한 번의 회의도 없었던 한?미 쇠고기 협상으로 인하여 이토록 큰 국가적인 문제가 되어버렸으며, 그 이유의 하나로서 협상관찰자인 관련 교수, 협회장들의 지원과 조언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미국으로서는 자국 내 쇠고기 소비의 대폭적인 하락으로 인해서 수많은 도축업체 CEO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 회사의 쇠고기를 수출이라도 하기위해 협상관찰자로서 참여를 많이 했을 것이다.②협상 당사자한국측 : 농림식품부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수석대표) 등 7명미국측 : Ellen Terpstra(미농무부 차관보, 수석대표) 등 8명)협상 당사자는 협상을 직접 주도해 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대개의 경우 2인 이상이며, 또 보통 2개의 사안 이상으로 협상을 하게 되지만 이번 협상은 한?미 쇠고기 협상으로서 1개의 사안에 대해서 미국은 쇠고기를 수출, 한국은 수입 하는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약간 불리한 협상이었다.한국 협상 당사자 우두머리는 농림수산식품부차관보인 민동석 차관보였고, 이 뒤에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인 정운천 장관과 더 깊게 파고들면 여당인 한나라당,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까지도 이어진다. 이들은 협상 모체라고 할 수 있겠다.위에 말한 민동석 차관보는 협상이 끝난 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산 쇠고기는 OIE(국제수역사무았을 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가차원의 협상에서 아무리 문서의 진위여부가 합당할 지라도 여타 부수적인 조언을 들은 적도 없이 그 내용만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④의제안건(Agenda)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 협상의 안건으로는 한국이 새로운 쇠고기 협상을 국제수역사무국(OIE)가 설정한 가이드라인에 맞출 것인지, 또 뼈있는 쇠고기(bone-in beef)도 포함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제수역사무국에서 미국을 광우병 위험 통제국가로 등급을 하락시키데 이어서 우리나라가 계속적인 미국의 한국 내 쇠고기 시장개방 요구에 전문적인 자료를 가지고 대처하지 못하였던 것도 있다. 즉, OIE의 기준을 뒤집을 만한 근거 있는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⑤세력관계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하여 국내에서 지지하는 쪽은 대통령과 여당인 한나라당, 협상대표단들, 쇠고기 수입업체, 그리고 극소수의 국민들뿐이다. 쇠고기 수출의 주도적 역할을 맡고 있는 미국역시 미국정부와 협상대표단들, 쇠고기 수출업체 등이다.반면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쪽은 축산업계 종사자들 여러 환경단체, 국민 대부분 등 엄청나게 많은 반대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 역시 환경운동가들이 쇠고기 수출에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각 국의 대표단간의 한?미 쇠고기 협정에서는 이익 극대화를 위한 밀고 당기기식의 세력균형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⑥협상청중협상청중이라 함은 국민과 여론이라 할 수 있겠다. 협상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청중의 파악 또한 중요하다. ‘설득 모델’에는 설득 상대의 7가지 요소, 즉 청중의 동기와 가치관, 청중의 정보와 언어, 청중의 인식, 청중의 태도와 정서, 협상자의 신뢰성, 메시지 내용과 매력, 상황적 배경과 보상, 매체 선택이 있다. 상대를 설득하려는 협상자는 팀의 관점은 물론 개인의 관점에서도 각 요소를 살펴봐야 한다. 또한 2가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첫째, 설득 상대는 보상을 제공하는 메시지에 반응한다. 이들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 견해를 입위생조건 관련 사항수입 쇠고기 월령1단계로 30개월령 미만 뼈 포함 쇠고기의 수입을 허용, 2단계로 미국이 강화된사료금지조치를 연방 관보에 공포시 30개월령 이상 뼈 포함 쇠고기도 수입허용☞ 기본적으로 미국과 같은 “광우병위험통제국”과의 교역조건은 SRM을 제외할경우 모든 월령에서 생산된 모든 부위의 교역이 가능함미국측은 그간 우리 정부의 요구와 OIE의 권고 등에 따라 현행 사료금지조치의강화를 추진키로 하였으며, 우선 연방관보에 공포함으로써 우리에게 이행을약속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합의한 것임수입허용 부위기본적으로 OIE 기준에 의한 특정위험물질(SRM) 및 SRM에 오염이 우려되는 기계적회수육 등을제외한 모든 부위* SRM : 30개월령 이상의 경우 7개(편도, 회장원위부, 머리뼈, 뇌, 눈, 척주, 척수) 30개월령 미만의경우 2개(편도, 회장원위부) 부위* 기계적회수육 : 머리뼈, 등뼈 등에 남아있는 고기를 물리적인 방법으로 분리한 것☞ OIE 기준에 따른 SRM이외에도 모든 월령에서의 기계적회수육(MRM,MSM)등을 수입허용 부위에서 제외토록 하였으며, 기타 분쇄육 및 가공품 등에대해서는 SRM이나 수입금지 부위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확인된 것에 한하여수입을 허용키로 하였음수출작업장 승인개정된 수입위생조건 발효시 동등성을 인정, 발효 후 90일 동안 적용을 유예하여, 한국이신규 수출작업장 승인 권한을 가짐☞ 동등성은 미국 작업장에서의 HACCP, 미생물?잔류물질 검사 등 전반적인위생관리시스템이 우리나라보다 동등 이상의 수준일 경우에 인정하는것으로 미국산 돼지고기?닭고기 작업장에 대해서는 동등성을 인정하고있음☞ 다만, 쇠고기 작업장에 대해서는 동등성을 인정하지만 그간 위반사례가있었음을 감안하여 새로운 위생조건 발표 후 3개월간 신규로 승인 요청한 수출작업장에 대해서는 현지점검 후 승인키로 하였음수출검역증명서상의 도축소 월령 표시여부개정된 수입위생조건 발효 후 180일간 T-bone 스테이크 수출품 등에 한해 해당쇠고기가 30개월령 이하임을 상자에 표기하며 문제
목 차Ⅰ.러시아의 기본적인 대미 외교정책Ⅱ.러시아의 대미 관계 전개 현황◇옐친 정부의 대미외교정책◇푸틴 정부의 대미외교정책◇부시 정부의 대러외교정책Ⅲ.향후 러시아의 대미정책 전망Ⅰ.러시아의 기본적인 대미 외교정책소련이 1990년 붕괴하였지만 사회주의를 제외한 나머지의 정신은 현재 러시아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세계의 일류 강대국인 미국에 대하여 러시아의 기본적인 대미 외교정책으로는 협력과 견제를 적절히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협력부분으로는 러시아의 경제 발전에 미국의 경제지원이 필수적 요소이므로 대미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9.11이후 국제 테러 위협과 미사일 위협대응, 핵 확산 금지 그리고 대량살상무기 대비를 위한 공동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협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협력 관계는 충돌과 대립을 삼가 하여 관계 악화를 방지 하여야 하며 이는 곧 미국의 경제 지원과 갈등을 최소화 하려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반면에 미국에 대한 견제로는 러시아의 중요 국익을 위해서라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갈등 국면이 빚어지더라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보호하려는 입장에 있다. 그리고 미국의 힘이 커지는 것을 반대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큰 예로 MD문제와 NATO문제를 들 수 있다. 러시아는 경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은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위와 같은 입장에서 이번 레포트는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 조망해 보고자 한다.Ⅱ.러시아의 대미 관계 전개 현황◇옐친 정부의 대미외교정책신생 러시아가 당면한 최대의 대외적 과제는 소연방 붕괴로 크게 변화된 국내외 환경 속에서 국익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최적의 외교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소연방 붕괴와 이에 따른 국내외 환경의 변화는 러시아 정치 엘리트는 물론 일반 국민들의 모국 러시아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이는 외교 정책의 수립 및 집행 과정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 간 이해관계의 충돌을 야기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으로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격 자유화 등을 포함한 급진 경제 개혁을 1992년 1월 2일부터 시행하였다. 이러한 옐친 정부의 경제개혁 중시 정책은 대외 관계에서 서방 세계의 경제 지원과 국제경제 체제로의 편입을 위한 ‘경제 외교’의 우선 정책을 가져왔고, 그 결과 ‘친서방주의 정책’, 특히 미국 우선주의 외교·안보 정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 주요 국가들이 G-7,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및 유럽 재건·발전 은행 등을 장악하고 있었고, 옐친 정부 또한 아무리 러시아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을지라도 선진 7개국과 협조를 하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사실 미국은 옐친 정부의 친서방주의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냉전 질서 붕괴후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긴밀하고 대등한 협력 관계는 러시아로 하여금 아직도 강대국이라는 심리적 만족감을 갖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옐친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발전시킨 미·러 관계를 그대로 계승시키기 위한 정책을 서둘러 추진하였다. 미국 또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소연방 붕괴후 양국간 최대 안보 현안으로 떠오른 핵무기 감축 노력 지속 및 옛 소련 지역내 핵무기 비확산과 핵물질 안전한 관리 등을 위해 옐친 정부의 체제 전환을 지원하는 등 러시아와 긴밀히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⑵ 갈등과 대립 관계의 시작 및 지속 (1994년~1999년)미·러 양국이 1993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한 후 여러 분야에서 협력 확대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국내 정세 및 외교·안보 정책은 양국 관계를 서서히 대립과 갈등 관계로 발전시켰다.러시아의 경우, 1993년 12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헌법이 채택되어 옐친의 외교정책 수행력이 크게 제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두마 선거에서 공산당 및 민족주의 정당의 압승은 옐친 정부가 지향하는 친서방주의적 외교 정책을 순조롭게 안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증대하였으며, 헌법개정 문제를 둘러싸고 의회와 정부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최고회의내 대다수의 의원들이 정치 노선을 초월하여 단합함에 따라 옐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대미?서방 관계에서 볼 때, 출범 초기 옐친 정부가 이들 국가들에 대해 가졌던 경제 지원에 대한 기대는 국내 경제가 악화됨에 비례하여 실망감도 증대되었다.미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실망과 반감은 러시아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하던 인도에 대한 로케트 판매와 이란에 대한 잠수함 판매가 클린턴 행정부의 강경한 반대에 봉착하면서 심화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이는 미국이 러시아의 국익과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무관심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러시아 언론 매체는 미국의 이러한 대러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이러한 러시아인의 반미 감정의 증대 및 옐친 정부의 독자주의 정책 심화는 1994년 들어 보스니아 내전 및 북한 핵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국제공조 체제에서의 소외는 물론, D-Day 50주년 전승 기념행사에서 러시아군의 초청이 제외됨으로써 점차 강화되었다. 그후 미국이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NATO 확대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이러한 미?러 관계의 악화는 1995년도에 들어 러시아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에 대한 원전 설비를 판매하겠다고 고집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비록 1995년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전승 50주년 기념식’에 클린턴 대통령이 참석하여 양국간 정상회담이 성사되기는 했으나, 이에 앞서 클린턴 행정부는 체첸 사태에 대한 유감 표명으로 양국 정상회담이 연기 또는 무산될 수 있다는 견해를 수 차례 표명하기도 하였다.비록 양국정상이 유럽안보 및 핵확산 문제 등에 대해서는 유사한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NATO의 확대 문제, 이란에 대한 원전 설비 판매, 체첸 사태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함을 드러냈다.옐친 정부는 두 번째 집권기간(1996-2000) 동안 다음과 같은 외교 정책을 우선부 협력 관계에 있던 러?NATO 관계는 미국 주도로 1999년 3월 NATO가 코소보를 공격하자 극도로 악화되었고, 그 결과 러시아와 NATO간 협력 관계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특히 미국 주도로 NATO 창설 50주년을 기념하여 유엔 안보리의 동의 없이도 인도적 이유에 기인한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신 전략 개념을 채택하면서 미?러 관계가 더욱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98년 봄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러시아의 외환·금융 사정이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 동년 8월에는 루블화 평가절하 및 한시적인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제 사정의 악화는 러시아 국민들의 반미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999년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NMD·TMD 문제가 주요 선거 이슈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는 NMD·TMD 조기 추진과 이를 위한 3차례의 실험을 실시하였다. 물론 클린턴 행정부가 2차례의 실험 실패 및 정권 교체기의 상황을 고려하여 차기 정권으로 미사일 방어에 관한 결정을 연기하였지만, 러시아의 미국의 NMD·TMD 추진과 이를 위한 ABM 조약의 수정 또는 페기에 대한 반대가 극심해지면서 미·러간 갈등이 심화되었다.한편 옐친의 병세 악화에 따른 원활한 국정 수행의 불능 상태의 지속과 국가두마의 소위 여소야대 현상의 지속도 양국 정상으로 하여금 빈번한 정상회담과 실무자급의 의견 조율을 통하여 주요 양자 현안 및 국제 현안에 대한 이견을 해소하지 못한 것도 미·러간 대립과 갈등을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옐친이 국가안보회의 서기와 연방보안국장을 맡고 있던 푸틴을 1999년 8월 및 12월에 총리 및 대통령 직무대행에 각각 임명함으로써 크렘린 지도부의 세대 교체와 러시아 외교 정책의 변화를 예고하였다.◇푸틴 정부의 대미외교정책러시아의 부시 행정부에 대한 인식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공존하고 있다.우선 낙관적 견해를년 이후 대이란 무기판매 중단 약속을 어기고 무기 판매를 계속하자, 미국 의회 공화당출신 의원들의 강력한 비난이 있었다. 또한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조기경보기의 판매를 둘러싸고 미·러간 신경전이 치열해져 왔다.2000년에 있었던 푸틴의 쿠바·이란·이라크·리비아·북한 등 미국이 우려 국가들로 지정한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도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푸틴 정부내 인사들의 부시 행정부에 대한 낙관론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부시 행정부가 국가 안전보장의 확보를 명분으로 MD 등을 강력히 추진해 나갈 경우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한 강성 외교를 펴고 있는 미·러 양 지도자간 대립과 갈등이 오히려 심화될 것으로 전망하였다.☞푸틴 정부의 대미 정책 방향첫째로 다극화된 국제질서 창출을 위한 미국의 패권주의 견제이다. 푸틴 정부는 집권후 프리마코프의 대외정책 기조를 계승하여 러시아의 국제 사회에서의 강대국 지위 회복과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약화시키면서 다극화된 국제질서 창출을 위한 외교·안보적 노력을 기울려 왔으며, 이러한 정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푸틴 정부는 상기한 외교·안보 문건들을 통하여 미국의 경제·군사적 초강대국 지위를 이용한 단극적 국제 질서의 구축을 위한 외교·안보 정책이 러시아의 국익에 심대한 위협 요인이라고 간주하면서 그 동안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국제적 노력을 기울려 왔다. 푸틴 정부가 명목상으로는 다극화된 국제 질서가 현 국제사회의 매우 다양한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는 국제 질서의 효율성과 신용성을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다극화된 국제 질서의 일원으로서 러시아의 대외적 발언권과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실제로 푸틴은 대미 견제 세력의 확대·강화를 위하여 중국·인도·일본 등과의 관계 강화는 물론 EU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하여 왔으며, 심지어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인 북한·이란·쿠바·이라크 등과의 관계를 정상화 또는 강화시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려 왔다.둘째로 MD 왔다.
『쉘 위 댄스』를 보고...나는 쉘 위 댄스라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아주 많이 접해보았다. TV방송이나 라디오, 여러 매체 등을 통하여 쉘 위 댄스라는 단어가 뇌리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영화인 줄도 몰랐으며 2004년도에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원래 한국의 극장에 상영하는 외국 영화는 대개가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여서, 그래서 그런지 이번 수업시간에 상영한 쉘 위 댄스라는 영화가 영상을 통해본 일본 문화수업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미국 영화인줄 알았을 것이다.역시나 그렇듯 위 일본 영화는 잔잔한 느낌이 들었다. 조용하면서도 배경음악 또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효과를 2시간이 넘는 내도록 느낄 수 있었다. 첫 시작은 영화의 주제인 댄스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용과 음악은 인간이 발명한 최초이자 가장 기초적인 쾌락이다.’라는 대목이다.다음 장면에서는 일본 사회의 첫 장면이 나왔다. 회식을 끝낸 뒤 2차를 재촉하는 여직원의 모습, 그러나 과장인 스기야마는 직원의 재촉을 뿌리치고 집으로 향하게 되는데, 전철 안에서 우연히 밖을 내다보다가 기시카와 댄스교습소안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한 여성을 목격하고 그 뒤로 퇴근할 때 마다 그곳을 지날 때 댄스교습소를 처다 보곤 하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마음에 이끌려 댄스교습소로 향하여 등록 까지 해버린다.처음 부분에서는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결혼과 직장, 그리고 집장만 등의 경제적인 문제가 보통의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질만능주의라고 까지 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너무 일에만 매달리는 일본과 우리 사회의 풍토, 자신의 취미생활 하나 가지지 못한, 시간과 돈이 없어 가지기 어려운 분위기가 안타깝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점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선진국보다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면에서 조금 부진하다는 것이 사실이다.다시 영화내용으로 돌아가면, 스기야마는 창밖을 내다보는 여성의 매력에 이끌려 댄스 교습소에 그룹레슨강좌에 등록한다. 하지만 그는 마이라는 여성에게 춤을 배우고 싶었지만 마이는 개인레슨을 담당 하였고, 그룹레슨은 다마코라는 약간 연세가 있으신 여성이 가르치게 되었다. 첫눈에 봐도 다마코란 여성은 아주 인자한 품성이 느껴지는 얼굴에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느낌을 지녔었다. 영화 후반부에 그런 모습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였다.스기야마는 처음에는 마이를 보기위해 오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춤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고, 그의 반복되고 무기력한 생활에서 춤은 그를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주었고, 결국에는 대회까지 나가게 되었다. 반면 수, 토요일마다 늦거나 외출이 잦은 그를 본 아내는 탐정 업체에 의뢰하여 남편의 뒷조사를 시작하였다. 이 영화에서 드러난 일본인 아내는 완전 순종적이지는 않지만 약간은 순종적이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인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일을 하고 아내는 임신을 하면서부터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는 것, 그리고 자기 남편의 의심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고 뒷조사를 하는 것 등의 내용으로 볼 때 물론 개인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영화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상 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영화는 96년도에 제작된 영화로서 지금보다 10년 전의 시대적 특성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겠다.영화 중간중간에 나오는 아오키와 타가하시는 잔잔한 분위기의 영화에 홍일점이라고 생각된다. 아오키의 표정연기, 가발을 쓰고 열정적으로 룸바를 추는 모습 그리고 타가하시의 말투와 행동들은 가끔씩 나를 웃음 짓게 하였다. 아오키는 회사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댄스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여 자신감을 상당히 잃어버린 모습으로 나오게 된다. 하지만 그 또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댄스대회에서 입상하며 자신을 버렸던 옛 파트너에 대한 복수도 하게 된다. 타가하시는 처음에 그룹레슨에 새로 온 남자들에게 텃세를 부리고 무시를 하지만 나중에는 각자 열심히 연습하고 그들의 마음을 느끼게 되어 감동하게 된다. 특히 그녀와 같이 춤을 연습한 스기야마에 대한 애정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중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탐정 또한 무거운 역할이 아닌 웃음을 주는 역할이었다. 뒷조사이기는 하지만 조사자에게 최대한 접근하여 자신의 얼굴을 모두 노출시키고 심지어 댄스교습소에 등록하여 코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댄스대회에 참석하고 그 댄스대회에 오게 된 그의 부인과 딸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스기야마는 댄스대회에서 자신이 춤을 추는 중 자신을 부르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실수로 타가하시의 옷을 밟아 찢게 되고 둘은 실격하게 된다. 오랜 시간 연습을 하였는데, 정말 안타까웠다.
동아시아 국제관계 개론동아시아 다자안보 1-1강1. 전체현황구분정부간비정부간동북아지역―동북아협력대화(NEACD)아태지역아세안 지역포럼(ARF)아태 안보협력이사회(CSCAP)2. 동북아 지역내 다자 안보 추진현황?정부간 다자 안보 추진 현황①정부간 다자 안보 협의체 존재하지 않음②1994년 한국이 동북아 다자 안보대화 추진구상 제안-안보 불안요인이 상존-역내 평화와 안정유지 모색-한반도 분단상태의 효율적 관리③실패-미국이 소극적지지-중국의 반대-한국 국가적 위상의 취약성-한국 주도에 의한 북한의 불참?비정부간 다자 안보 추진현황①세계분쟁 및 협력 연구소(IGCC)의 주도②1993년 동북아 6개국이 참여하는 동북아 협력대화 창설③준 정부간 회의(Track 1.5)의 성격④동북아 국가간에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증대, 신뢰구축, 협력증진동아시아 다자안보 1-2강3. 동북아 지역의 다자 안보에 대한 각국의 입장?미국①다자 안보의 입장-소극적 태도-쌍무관계를 주축으로 한 APEC이나 ARF의 다자 협력지지②현 전략-중국 부상과 일본의 탈 미군사노선 억제를 위한 다자적 장치의 필요성 인식-양자동맹 기초 하에 세력균형 유지와 보완-다자 안보에 의한 양자동맹 약화 우려-미국 내 군산 복합체들이 아시아 지역의 군축 반대③한반도 문제-4자 회담으로 충분-러?일 참여의 6자 회담 보완?일본①다자 안보의 입장: 미?일 동맹 중심의 안보전략 추진②현 전략-한반도 문제참여-대미 안보의 종속 심화-중국의 군사력 증대 견제③한반도 문제-한?미?일 3국간 정책공조-6자 대화와 협력 안보 도모?중국①다자 안보의 입장: 선별적, 제한적 태도②현 전략-경제부문(다자 협력에 적극적)-정치?안보 부문(제한적, 유보적)-중국을 견제하는 미?일 주도에 대한 불만③한반도 문제-남북한 당사자 해결과 남북대화지지-6자 회담 보다는 4자 회담에 만족?러시아①다자 안보의 입장: 다자 안보협력의 제도화 추구②현 전략-미국 독주 견제-중?일의 군사증강 통제③한반도 문제-당사자 해결지지-공정한 중재자 역할?북한①다자 안역에 확대 적용-신뢰구축 조치의 이생을 통해 역내 긴장완화에 기여⑦한계 및 문제점-ASEAN의 지도력 문제-ARF의 구조문제-ARF의 제도화 및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한 입장 차이-새로운 상황에의 대처 능력 결여-동북아 지역의 안보문제 한계-핵심 안보문제 논의의 한계?아태 안보협력 이사회(CSCAP)①비정부 차원(Track Ⅱ) 협력기구②21개국이 참가③부정기적 총회④5개의 작업반 회의동아시아 지역분쟁 1강1. 지역분쟁을 야기하는 요소?부의 불균형에 의한 지역간 격차심화?군비 증강에 따른 상호 오해의 가능성?국수주의에 입각한 정권의 등장과 호전주의적인정책표방 가능성?자원과 영토에 대한 권리주장과 마찰 가능성?전통적인 인종 및 문화갈등◎동아시아의 주요 분쟁지역1. 러일 영토 문제: 북방 4개 도서①지리적 위치-북방 4개 도서: 에토로푸, 쿠나시니, 시코탄, 하보마이-현재 러시아 연방 사할린 주에 소속-17세기 이래로 아이누족이 거주-역사적으로 훗카이도의 부속도서로 일본 영토?북방도서를 둘러싼 양국의 입장①1855년 러일 우호통상조약 = 시모다 조약-북방 4개 도서: 일본령-쿠릴열도: 러시아령-사할린: 양국민의 혼재지②1875년 5월 쿠릴 - 사할린 교환조약-사할린 전체: 러시아령-쿠릴열도: 일본령③러일 전쟁과 포츠머쓰 조약-일본, 러시아로부터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획득④얄타회담-소련, 대일전쟁 참전 조건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 양도-선전포고 직후 쿠릴열도와 시코탄, 하보마이 점령⑤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일본, 쿠릴열도 및 사할린에 대한 권리포기 규정 명시-일본, 소련의 쿠릴열도에 대한 영유권 인정 않음⑥1956년 10월 일소 국교회복-평화조약체결 조건으로 시코탄과 하보마이, 대일 인도 명문화⑦1960년 미일 신안보조약-소련, 1956년 실현조건으로 외국군의 철수 주장⑧일중 평화조약 체결-에토루푸, 쿠나시리와 시코탄에 1개사단 규모의 지상군 병력 주둔⑨1991년 소련붕괴-1993년 도쿄선언, 북방도서 영토문제 인정-법과 정의에 따른 북방도서 문제 해결 과정에서이루어진 영토 탈취 행위?당시 한국은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로 항의가가능한 상태?1905년 편입조치 이후 독도실제조사 및 어로 면허 발급?한국제법상 정당한 경영,이에 대해 한국 측의 항의없었음?분쟁경과①독도 강제 편입과정(1945년 이전)-일본,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결정-시네마현, 1905년 2월 22일 현고시 제 40호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한국, 위의 조치는 독도가 일본의 행정관할이 아님을 반증-한국, 독도는 무주지가 아님ⓐ역사자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숙종실록(안용복)ⓑ한일 의정서와 제 1차 한일협약으로 외교관 장악, 무효②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지령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의 독도문제-1946년 1월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 제677호 3항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일본, 대일평화조약 제2조에 한국의 영토로 독도 명시되지 않음③이승만 라인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문제-1952년 1월,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 선언 공표)-일본, 이승만 라인의 무효주장-1945년 일본,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④한일협정(1965)-독도에 대한 직접 언급 없음⑤1977년 후쿠다 망언-독도, 일본의 고유 영토⑥1998년 9월 한일 신어업 협정-독도를 중간수역으로 표기-중간수역의 명칭을 둘러싼 해석 차이동아시아 지역분쟁 2-1강3. 중일 영토분쟁: 센카쿠 열도?일본명: 센카쿠 열도 / 중국명: 댜오위다오?5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일본의 실질적 점유?전략적 가치①부존자원 매장 가능성②영토 영유권과 맞물린 해양 관할권③해양 전략적 가치?센카쿠 열도 관련 양국의 주장시기구분관할국주장비교중국측일본측역사적중국?중국의 고유영토(역사적 문헌입증)?1534년 중국이 처음발견?무주지청일전쟁 당시일본?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의해 “대만 및 부속도서”가일본에 강제 할양 됨?강제할양과는 무관?1895년 오키나와현에정식편입조치2차 대전 이후미국?중국의 고유영토를 일본이불법적으로 미국에 이양?대일강화조약에의거, 적법 이양오키나와반환협정⑤동남아 관련국들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⑥중국, 남사군도 전체를 장악할 해군력 확보하지 못함⑦해상 수송로 봉쇄, 미일 양국과의 대립 불가피동아시아 안보위협 1-1강: 중국과 북한1. 북한 위협론?과도한 북한의 군사력①핵무기 개발 여부-핵무기 생산능력 보유, 불투명성-고폭 장치의 정밀성을 증대시키는 문제-구체적인 핵실험의 어려움, 핵탄의 소형화 문제, 미국의 견제②미사일 개발문제-미국간 최대의 쟁점과제-1996년부터 미사일 회담이 진행-연 100기 이상의 Scud-B(사정거리 300km), Scud-C(사정거리 600km)생산-로동 1호(1,000km), 대포동 1호(2,000km), 대포동2호(3,500~6,000km) 발사실험③동북아 국가, 특히 일본 위협④생화학 무기-1960년대 초부터 생화학 무기 개발-8개의 생산공장 확보, 4개의 화학 무기 연구소-6개의 시설에 생화학 무기 분산저장, 보유량 2,500~5,000톤 보유-화학 무기 금지조약(CWC)에 미가입?군사 제일주의①병영 국가적 통치체제②1998년 9월 헌법개정을 통해 법적, 제도적 정비③국방 위원장이 국가 최고 통수권자④군사 제일주의 → 미일 방위체제 강화 → 중국의 군사력 강화 → 동북아 군비경쟁 촉발?북핵문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변화①중국의 입장 변화-중국의 경제건설과 대만 통일을 위해 북한 희생-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명백한 착오-경제건설에 매진하는 중국에 북한은 귀찮고 성가신 이웃에 불과-북핵 문제에 관한 중국 입장: 비핵화-동북아 평화구도를 깨뜨릴 북한 핵 출현 바람직하지 않음-북한이 핵 개발 강행할 경우: 강제적 혹은 군사적 제재②러시아의 입장 변화-러시아의 이중적 논리-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북한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논리→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 안보리 회부 반대-핵확산 방지를 위해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논리→ 감싸기 대신 적극적 설득과 압박 강화-변화의 원인: 러시아의 위기 의식→북핵문제: 동북아 지역 전체의 안정 파괴동아시아 안보위협 1-2강: 중위협론, 북한 위협론2. 전후 일본의 방위력 정비계획구분제1차 방위력 정비계획방위계획대강신 방위계획대강시행기간1958~19761977~19951996~현재국제환경냉전의 대립기냉전의 화해기국제정세의 불투명목표소요 방위력 확보기반적 방위력 확보기반적 방위력 확보내용소련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방위력 확보독립국으로서의 필요 최소한도의 방위력 확보미일동맹을 유지하면서 능동적인 안보역할동아시아 안보위협 2-2강: 일본3. 전후 일본의 방위관련 법 제도의 정비?평화헌법 제정(1946.11)①헌법 9조: 전쟁의 방기 및 군대의 불보유?헌법 9조에 대한 통일해석(1954)①개별적 공격이나 집단적 공격 및 자위권의 행사 불허②개별적 자위권의 행사 인정?유엔평화유지활동협력법(1992) 제정?주변사태 안전 확보법(1999)?테러대책 특별조치법(2001)?PKO 협력법 개정안☞ PKO 협력법활동범위건설, 수송, 난민지원파견요건?정전합의의 존재?일본 참가에 대한 당사국 동의?중립성의 유지?이상 조건 미 충족시 철수무기사용?자위대의 생명?신체 보호에 필요시에만 무기사용?단, 자위대 무기 및 무기가 있는 시설을 위해서는 무기 사용이 금지☞ 주변사태 안전 확보법무기 탄약의 수송보급수송 가능, 보급 불가무기사용자위관 본인과 여타 대원의 생명 및 신체를 지키는 경우에 한정국회관여미군 지원에는 사전 승인이 원칙, 긴급시에는 사후승인자위대의활동범위일본의 본토와 주변지역, 공해 및 그 상공에 한정☞ 테러대책 특별조치법무기 탄약의 수송보급무기탄약의 보급 및 육상수송을 제외한 수송 및 보급가능무기사용난민, 미군 부상자 등 자위대원의 ‘직무상 관리 하에 있는자’ 포함국회관여자위대 파병 20일 이내에 국회 사후 승인자위대의활동범위전투행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지역☞ PKO 협력법 개정안활동범위군사업무, 무장해제감시, 완충지대 주둔 및 순찰, 포로교환, 지뢰제거파견요건기존의 원칙을 파기, 대폭완화무기사용테러 및 무기를 보호할 목적으로까지 확대다른 나라 PKO 및 국제기관의 요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무기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