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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우리 사회에서의 동거
    >> 동거 생활의 만족과 갈등을 통해 본 동거의 지속성우리 사회에서 동거가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 사회와는 다르게 아직까지는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상황이다. 동거 기간이 평균 1년을 넘지 못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는 우리 사회의 동거가 매우 불안정적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여성들이 동거 생활을 통해 어떠한 요소로 만족감과 갈등들을 느끼는지 살펴보고 자신들의 동거 경험을 어떻게 의미화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1. 동거 생활의 딜레마 : 만족감과 갈등들(1) 동거 생활의 만족감① 생활의 공유를 통해 이해가 깊어짐인터뷰 참여자들은 동거 생활의 가장 만족스런 부분을 함께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라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옆에 있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상호 존재의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동거 초기에는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갈등하지만 이러한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좀 더 깊게 알아가게 된다고 했다. 즉 같이 해야 할 부분과 간섭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적절하게 구분하면서 서로에게 동화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직접 부딪치며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로 동거 생활의 장점이다.② 헤어질 때 부담감의 최소화여성들은 동거 관계에서 헤어지는 일이 연애하다 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이혼만큼이나 어려고 상처가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같이 이혼이 어렵고 부담감이 큰 사회에서 동거하다 헤어지는 것은 분명 부담감이 훨씬 적은 일이다.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혼율이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자식들의 이혼을 “집안의 망신” “집안의 상처”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여성과 남성 모두 가부장적 결혼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결혼 생활을 유지해가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헤어질 경우에 이혼하는 것보다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동거의 장점이다.③ 원하는 가족 많잖아요. 어쨌든 이 가족은 내 선택에 의해서 가지게 된 가족이고 그런 만큼 많이 생각하고 맺게 된 가족관계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괜찮은 거 같아요. (민)④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관계동거하는 여성과 남성은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동거 커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함께 살았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즉 현재적인 자유로운 관계라는 기본자세로 동거 생활을 최대한 만끽하고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동거 커플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자유로운 관계를 인식하면서 평등하고 대등한 동거 문화가 정착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도 하겠다.우리는 뭐 우리가 나중에 헤어져서 누구랑 결혼을 하든 우리 둘이 하든, 각자 딴 사람이랑 하든 지금 이렇게 원 없이 사랑하면 나중에 후회 없이 사랑하자 지금. (낙타풀)(2) 동거 생활의 갈등들① 정체성의 갈등 : 나는 그의 누구인가?우리 사회에서 동거는 라이프 스타일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동거 커플 스스로가 느끼는 정체성은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동거 생활을 결혼과 유사하게 생각하며 남편-아네 라는 부부 정체성을 가지며 어떤 이들은 현재적인 자유로운 관계를 즐기면서 싱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동거하는 여성들은 커플 단위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자신이 그의 여자 친구인지, 아내인지, 가족인지 아닌지 설명하는 일이 매우 난감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결혼이라는 형식 없이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때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고스란히 느껴야 되는 부담감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② 법적 제도 장치의 부재인터뷰 한 여성 중 한 분은 상대 남성이 헤어짐의 원인을 제공하여 동거 관계가 끝난다 할지라도 여성들이 위자료를 받을 수 없는 점을 지적하였다. 물론 현행법상 사실혼 관계로 인정을 받아 법적 혜택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가부장적 결혼을 거부하며 동거를 선택했던 여성들의 의도에 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이나 사실혼과는 다르게 은 제도 결혼의 억압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가능하는 한 동거라는 형식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례들이다. 비혼 동거를 희망하는 여성들은 결혼을 삶의 다양한 선택지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제도 결혼의 모순성에 매우 민감한 그룹들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들은 결혼을 통한 남성 중심적 가족 관계 맺기와 며느리로서의 지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또한 동거라는 대안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통해 가부장적 결혼 제도와 사회 질서가 바뀌기를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다. 이들에게 동거는 단순히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지형을 바꿔내고자 하는 삶의 정치학인 셈이다.(2) 혼전 동거 : 가부장적 사회에서 동거의 한계 인식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동거에 허용적인 경우가 결혼하기 전 단계로 간주되는 혼전 동거 유형이다. 동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기왕에 누군가가 동거를 하고 있다면 왠만하면 결혼할 것을 권유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아이 양육을 희망할 때 동거 관계에서 낳은 혼외자녀가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다. 법적인 부분에서 동거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동거의 자리매김1. 제도 결혼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동거의 가능성과 한계결혼이 여성에게 극히 불리하며 여성을 모순적인 상황에 종속시키는 제도라는 것은 많은 여성들의 경험 속에서 검증된 바 있다. 그렇다면 불합리한 제도 결혼의 대안으로서 동거를 선택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 지형에서 대안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한 여성들의 답변은 전적으로 희망적이며 낙관적이지만은 않다.우리 나라에서 동거하기가 참 힘들어. 그리고 나도 그래. 동거를 할려면 책임을 져야한다고생각해. 같이 산다라는 거는 책임을 수반하지 않고는 성적인 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섹스 파트너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인터뷰에 응한 여성들은 대체로 동거 남성과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 기존의 성역할을 거부하고 동거 생활을 주체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상대 남성 또한 체화폭력이나 외도, 알콜 문제 등으로 헤어질 경우 동거 여성들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음.하지만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동거에 임할 때 그 모습은 여러모로 결혼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동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들은 결혼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남성쪽 집안 위주의 가족 관계 맺음과 파생하는 억압과 종속을 거부한다. 또 일상 생활에서 성역할의 탈분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동거가 자연스런 삶의 양식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 제도 결혼이 낳은 억압들을 불식시키고 불합리한 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동거 역시 가부장적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 가능성과 함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제도 결혼에 대한 동거의 가능성은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와 더불어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동거냐 결혼이냐의 형식을 떠나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율적으로 삶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이 결혼을 하든 동거를 하든 아니면 제 3의 대안적인 삶의 모델로 살기를 원하든 그것은 다양한 개인들의 선택을 반영하는 다양한 삶일 뿐이다.2. 외국의 동거 실태와 동거 관련법 제정을 위한 제언유럽에서 동거는 실험이 아닌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동거법에 준하는 공동생활약정(PACS))을 1999년 통과시킨 프랑스는 외국의 동거 문화를 살펴봄에 있어 중요한 사례가 되는 나라이다. 프랑스는 90% 이상의 젊은이들이 혼전 동거에 찬성하며 결혼 전에 1-2년의 동거 기간을 갖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지난 1990년부터 1999년 사이 미혼 커플이 60% 이상 증가했다(국립통계청 발표). 특히 26세 이하의 여성과 28세 이하의 남자 중에서 결혼보다 동거가 더 많았다. 또한 신생아의 약 40%가 혼외출산으로 태어나고 있다고 한다.프랑스는 PACS법 이전에도 동거 부부들을 위해 자유결합(UL)이라는 준결혼 상태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었으나하는 가치관과 생활 환경이 변화되면서 독일 여성들의 의식이 특히 많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미국의 경우 1960년에 결혼율이 87.5%로 최고조로 올랐다가 최근에는 50%이하로 급격하게 감소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결혼율이 이렇게 낮아진 이유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법적인 구속력을 지닌 결혼보다는 동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가 분석한 미 인구조사국의 2000년도 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미혼 동거 부부는 2000년 4월 기준으로 90년보다 72% 증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는 동거 커플에 대한 수혜와 각종 보호 조치를 마련하라는 압력을 정부가 받을 정도라고 한다.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인구 1천명당 평균 6.1명이 결혼하고 있으며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젊은층 중 약 42%의 남자와 44%의 여자들이 평생동안 한번도 결혼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결혼 대신에 동거를 택하는 경우이다. 또 지난 10년간 혼욎녀 출산율은 70%나 증가했다. 저명한 사회연구가 휴 메케이는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의 가장 흔한 가족구성 형태는 자녀가 없는 부부나 동거커플이 31%로 가장 많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24%로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또한 독신자들이 워낙 빠른 속도로 증가중이라 2006년 정도에는 이들이 가장 흔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족 형태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이와 같이 외국의 동거 실태 및 가족과 결혼을 둘러싼 변화들은 포스트모던 유연 가족 시대로의 이행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동거에 대한 인식변화와 우리나라에서 동거가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동거 관련법 제정’이 가져올 효과를 시사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도 당사자들이 합의한다면 공동명의로 주거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거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타의 재산상의 무제가 프랑스의 공동생활약정처럼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면 그 해결의 과정은 좀 더 수월할 것이다. 공동생활약정은 당사자 사이에 신분관계의 변동이 생기이다.
    사회과학| 2004.10.23| 7페이지| 1,000원| 조회(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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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평] 빌리 엘리어트 평가A좋아요
    기계치 탈출 대작전‘21세기 정보화시대’에, 내가 여성임을, 아니 여성성을 습득해 왔음을 가장 처절하게(!) 느낄 때가 바로 ‘기계’와 관련된 무언가를 할 때이다. 신나게 놀다가 우르르 게임방으로 몰려 갈 때, 이사 도와준다고 가서 컴퓨터 연결 할 때, 인터넷에 이상이 생겨서 전산원 아저씨랑 통화하면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할 때, 영상물찍는다고 캠코더를 손에 쥐었을 때…. 이럴 때면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상대방의 용어를 알아먹지 못하는 답답함과, 스스로에 대한 묘한 실망이 어우러져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곤 했다. 여학생은 『가정』을 배우고 남학생은 『기술』을 배우던 이전 학번의 잔재가 그래도 남아있어서인지, 기계만 나오면 무관심해지거나 주위 친구들에게 맡겨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에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면서.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주위의 떡대 크고 목소리 굵은 ‘전형적인 남학생’의 외형을 가진 친구들은, 뭔가 힘 쓰고 기계 다루는 일을 아무런 갈등(?)없이 해내고,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기계치’라는 놀림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자존심상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못할게 뭐 있냐. 다만 그것에 익숙하지 않게 키워졌을 뿐! 무엇보다도, 내가 ‘여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특히나 후배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2, 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의식적으로 전구 갈고, TV 케이블 연결하고, 엠프?마이크 들고 다니고, 전산원에 전화도 하고, 용기 내서 운전도 배우고 아등바등 노력하기 시작했다.그것은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학우였기에 더 열심히 술도 권하고, ‘잘마신다’는 소리 들으려고 기를 쓰고 버티기도 했다. 끈끈한 ‘남성적 우정’의 상징인 술자리(‘서로 미친 듯이 농구를 하거나, 일 대 일로 싸우다가 힘 빠지면 멋지게 등 두드려주며 화해하고 말없이 한 번 웃어주는’ 식의 상징은 실험해 볼 엄두를 못 내긴 했지만...--;;)를 매번 새벽까지 지키며 망가지고 울기도 하고 사람들 토닥여주기도 했다. 1학년 때부터 치마입고 화장하고 다니는 동기 여학우치원에서 남아의 놀이와 여아의 놀이는 구분된다. 남아의 문화는 로봇 장남감과 축구 등 힘의 논리로 지배되며 공주문화와 인형놀이, 소꿉놀이 등 인간 관계에 치중하는 놀이는 여아의 놀이 문화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성에 따라 이 둘이 구분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즉, 여자 아이와 어울리는 것은 남자들에게 지위의 하락을 의미하고 남자 아이들 사이에 여자들의 것은 시시한 것으로 통용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남자 아이들 사이에 계집애 같다는 말은 대단한 모욕이다. 이런 또래 집단 내에서 혹은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자는 여자 같아지지 않기 위해 소위 여성적인 것을 멀리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어려서부터 이러한 태도들, 생각, 가치관을 습득하게 되는 것은 ‘사회화’ 과정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결코 사회와 독립적인 무언가로 생각할 수 없는 ‘교육’이라는 것은 그 시대 지배적인 가치와 사상을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사회 성원을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길러내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장(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과서 내용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데 내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이 일반사회에서 ‘사회화’ 부분이었던 것 같다. 교과서에 따르면 사회화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기대하는 행동 양식과 규범, 가치 등을 습득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개인을 1)성숙한 사회 성원으로 성장시키고, 2) 사회적 소속감을 형성하고, 3) 자아 정체감을 형성한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기존 사회 질서에 아주 잘 적응하는 구성원을 양성하는 것일 테니 이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을 것은 같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여성이 여자다운 행동양식과 규범을 습득하고 남성이 남자다운 행동양식과 규범을 습득하여, 이 사회에서 성 역할 구분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바로 ‘사회화’라고 생각한다. 여자아이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인형을 쥐어주고 남자 아이에게는 로봇을 쥐어주는 것처럼 여자한 모습이다. 음악 소리만 들어도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흔드는 버릇이 있는 빌리는 어느 날 권투 도장 옆에서 하는 발레 수업에 매료된다. 피아노 연주와 발레 레슨 구령에 몸을 맡기고 샌드백과 더불어 춤을 추는 빌리. 그 후에 계속해서 빌리는 권투 도장 대신에 발레를 배우러 가고, 빌리의 아버지는 권투 도장에 간 빌 리가 글러브 대신 분홍색 발레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하기 일보직전이 된다.아버지와 형, 할머니가 함께 사는 빌리의 집은 가정 그 자체가 사랑과 꿈이 넘치는 낭만화된 공간이라는 베일을 살짝 벗겨내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와 형의 모습은 지극히 권위적이면서도 소위 ‘남성성’의 가치라는 것을 흠뻑 보여주고 있다. 육체적으로도 우람하면서 빌리를 대하는 태도 또한 고압적이며 명령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가부장적 질서 구도 내에서의 ‘아버지’ 라는 위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빌리가 발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 후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그가 보기에 남자의 육체는 광산에서 석탄을 캐거나 파업에 참여해서 경찰을 두들겨 팰 수는 있어도, 여자 아이들 틈에 끼어 춤을 추도록 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권투 글러브를 밀어두고 발레 수업에 몰두하는 빌리의 모습과 시위 장면을 교차 편집한 것에서 ‘남성적’ 이라는 것과 ‘여성적’이라는 것이 대비되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빌리의 아버지가 발레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남성이 할 수 있는 일, 남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뚜렷한 성 역할 구분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에 따라 자신의 자식, 빌리의 육체를 통제하고 있다. 가정 내의 폭력이라는 것은 단지 물리적, 물질적인 폭력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욕구를 말살시키는, 위계와 권위로써 철저히 개인의 주관성을 잠재워버리는 폭력까지 자행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이후에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결국 빌리는 멋진 발레리노로 거듭난다. 과정상의 많은 좌절과 시련이 있었지만 끝에서는 이를 극복하고 개인의 자아, 원하는 바를 성에 남녀가 서로 동기 유발된다는 것이다. 즉, 남자의 전형적인 특성은 진취적 ? 지배적 ? 논리적 ? 활동적 등으로 정의되고, 여자의 특성은 외모에 대한 관심 ? 얌전함 ? 부드러운 말투 ? 정숙함 등으로 정의되어 왔기 때문에 남자는 성취에 적극적이 되고 여자는 소극적이 된다는 것이다.)하지만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특성들이 상호 병렬적인 관계로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은 우월함으로 여성성은 열등함으로 서열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 헤어드레서의 경우를 살펴보자. 오랫동안 여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져 왔던 이 분야에 남성이 뛰어들면, 양질의 교육 기회나 외국에서 유학할 기회가 다른 여성 교육생들보다 더 많이 주어진다고 한다. 남성 헤어드레서가 보다 더 주목받게 되고 명성을 얻게 되는 것도 이러한 점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반면에 초등학교에 여교사가 증가하게 되면 초등 교사라는 직업군 자체가 여성의 영역이라고 간주되면서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현상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학 교수 사회를 들여다보다 가뭄에 콩 나듯이 여자 교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한 번 대학에서의 여/남 교수의 비율을 개탄한 적이 있는가?! 문제제기 속에서 또 다시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여성성과 남성성을 넘어서고정된 성 역할 관념에 대한 해결책으로 종종 여성/남성이 남성/여성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이 제시되곤 한다. 영화 속에서 빌리가 발레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 이러한 노력들은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는 것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 시대의 여성들도 남성들이 일하는 분야에 많이 진출했음을, 그래서 이제는 성 역할 관념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결론은 아니다. 이기 때문에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나서도 찝찝함을 느껴야 했다.앞에서만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이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어쨌든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호명되고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좀 더 잘 발현할 수밖에 없는 특징들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소위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목소리, ‘여성적’ 윤리학에 후한 점수를 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혔던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복원해 줄 뿐만 아니라, 여성이기에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우월하다고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전의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여성의 입장에서 전유’하면서 역이용 하는 것이다. 차별의 근거가 아닌, 해방의 기제로서 여성성을 맘껏 즐기면서 보살핌, 상호관계, 생태주의적 사고, 부드러움, 여성주의적 수평적 조직론, 여성주의적 말하기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로 에코페미니즘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영혼과 다른 목소리’로서의 여성성은, (혐오받거나 비가시화되었던) 대부분의 생물학적 여성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하며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울림과 지침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여성성을 인정하면서 에너지를 키우고 여성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새롭게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나의 환경으로 치자면 내가 속한 과의 당구-게임문화, 과시적 술자리 문화 등을 대화중심적-상호교감중심적 문화로 바꾸는 것이 오히려 그 영역 자체에 진입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목표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여성이다. 나는 지난 내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주체화 시키고 나의 여성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바꾸겠다. 나는 여성 동료들과 연대하며 페너지(Fenergy)를 키울 것이다’ 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A type과 B type의 아름다운 공존그런데 사실, 이렇게 여성성을 속 시원히 긍정하고 나서도 의문은 여전히 남게 된다. 여성의 경험을 소중히 하는 월경 페스티벌을 하고, 여성이 맘껏 공감할 수 있는 페미니즘 문화제를 하고, 여성적인
    인문/어학| 2004.10.23| 6페이지| 1,000원| 조회(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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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철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여자라는 은유, 표상에 대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여자’라는 은유, 표상에 대해0. 들어가며근대정치철학에서 여성과 남성에 대한 관념, 두 성(性)의 특징과 속성에 관한 논의는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특히 정치이론의 고전들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연구가 폭넓게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고전철학에서 여성을 인식하던 틀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게 되었다. ‘쥬느비에스 프레스’ 같은 경우는 ‘성적 차이의 철학적 역사’라는 글을 통해 칸트의 말년부터 프로이트의 초기 논문들이 출판되기 시작한 때까지 활동한 철학자들을 다루며, 여성과 성적 차이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살피고 있다.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서구 철학사 전반을 여성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며, 여성적인 것의 시공간이 가능한 조건을 탐색하고자 한다.)서구의 남성 정치철학자들의 논의는 현재까지 많은 이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여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 또한 여성다움, 여성의 속성, 여성의 일 등을 다루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정한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철학자들의 글에서 그 동안 간과되어 왔던 부분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여성’이라는 은유, 표상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여성’이라는 은유, 표상을 중심으로 다시 살펴보고 싶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포르투나(fortuna)는 비르투(virtu)와 함께 중심적인 개념인데, 이 둘을 대칭적인 개념으로 보기 보다는, ‘여성’이라는 은유를 중심으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해보려 하였다. 특히 “운명은 여자”) 라고 하는 대목을 중심적으로 살피면서, 운명, 군주, 사자와 여우, 여성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보았다.이를 통해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남성적 일반성, 남성적 속성이 해체되고 여성적 속성, 여성적 의미의 긍정적 재전유가 가능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명시적으로 여성에 대한 관념을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덕과 악덕에 대한 대비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칭찬을 하는 덕은, ‘잘 베풀고, 자비롭고, 충직하고, 단호하고 기백이 있고, 붙임성이 있고, 절제 있고, 강직하고, 융통성이 있고, 진지하고, 경건한’ 것이다. 비난을 하는 덕은 이와 반대로 ‘탐욕적이고, 잔인하고, 신의가 없고, 여성적이고 유약하고, 오만하고, 호색적이고, 교활하고, 융통성이 없고, 경솔하고, 신앙심이 없는’ 것이다.(108)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상황에 따라 후자의 악덕에 별다른 불안을 느끼지 않고 즐겨도 좋다고 한다. 왜냐며 모든 것을 신중하게 고려할 때, 얼핏 유덕한 것으로 보이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반면 일견 악덕으로 보이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키고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09)따라서, 군주의 덕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칭하는 ‘덕/ 악덕’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군주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악덕으로 분류되는 것 중에 여성적인 것이 곧 유약한 것으로 대등하게 놓여있어서, 정확히 여성적인 것을 무엇을 뜻하는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적’이라 지칭되는 것이 상황에 따라 긍정적인 군주의 속성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또한 잔인함과 신의 없음, 교활함과 같은 속성은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모범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의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적절한 방법과 자신의 대단한 능력을 이용하여 일개 시민에서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이 때 ‘적절한 방법’이란 곧 속임수, 배신을 뜻한다.(46) 제 18장에서,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때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며, 지켜서도 안 된다고 충고하고 있다.(123) 한편, 제17장에서는 체사레 보르자의 예를 들며 자신의 신민들을 결속시키고 충성스럽게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115)이와 같이 군주의 역능, 비르투(vir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이다.한편, 위에서 얘기한 변덕스러움, 교활함, 신의 없음 등은 ‘여우’의 속성과 통한다. 마키아벨리는 제18장에서 군주가 여우와 사자의 기질을 모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함정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23)힘에 의거한 짐승은 다시 강제(사자)와 기만(여우)로 구분되고 있다. 여기서 알튀세르의 해석을 빌리자면, 인간을 통치하는 방식이 ‘법, 강제, 기만’이라는 세 가지로 존재한다고 보았을 때 기만은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법’이, 인간의 제도, 승인된 규칙, 의견들이라고 하고, ‘강제’는 군대라고 하면, '기만'은 이와 같은 객관적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기만은 강제와 법이라는 상이한 ‘두 가지 통치형태를 통치하는’ 방법이다. 군대를 이용할 경우 기만은 전략이고, 법을 이용할 경우, 정치적 간계이다. 따라서 기만은 강제와 법을 넘어서 강제와 법의 존재를 전화시키는 공간을 개방한다.)이와 같은 알튀세르의 해석은 ‘군주론’ 전반에 걸쳐 여우의 속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데에 근거를 제공한다. 즉, 사자와 여우의 기질을 함께 모방해야 한다고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여우의 기질을 가장 잘 모방한 자들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주며 ‘여우의 속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생 군주는 운명의 풍향과 변모하는 상황이 그를 제약함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비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125)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지만(늑대를 물리칠 만한 ‘물리적 힘’이 없지만) 이는 중요한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여우의 간계와 지략에 의해 늑대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설령 늑대를 마주쳤다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점이 여우의 속성인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조건'을 사고하고 상황에 맞게 자신의 행동을 바꾸는는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가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여지는 듯 하지만, 그 속성을 살펴보면, 서로의 속성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운명이 “여자”로 표상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냄으로써 남성으로 표상되는 ‘군주’를 넘어, 남성적 일반성을 해체하는 전복적 의미까지 읽어낼 수 있다.‘운명 = 여자’ 라면, 우선 운명의 성격을 끌어내 볼 필요가 있다.‘군주론’에서 운명에 대해 얘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호의와 운명은 지극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45) ‘예외적이고 악의적인 운명의 일격’(47) '운명의 풍향과 변모하는 상황‘(125) '운명의 여신은 특히 신생 군주의 권력을 증대시키기를 원할 때 그로 하여금 적과 싸우도록 만든다’(148) 와 같이 서술되어 있다.이처럼, 포르투나(fortuna)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세상 일을 주도적으로 지휘해 나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신적인 존재로 비쳐지고 있다. 또한 자신의 뜻대로 때로는 자신의 기분에 맞추어 세상의 유능한 인물들에게 기회를 주거나, 반대로 빼앗기도 한다. ‘군주론’에서도 포르투나는 비인간적인 힘, 불확실성, 운, 호의, 상황, 조건들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이러한 포르투나의 가변적이고 불확정적인 속성은 군주의 처신 또한 정세에 따라 판단한고 ‘변화’해야 한다는 점과 통한다. 사자와 여우와 같이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얘기하면서 군주에게 강조되었던 것 또한 여우의 기만, 변덕스러움, 변화이다. 이러한 기질을 잘 모방하고 있는 예로 마키아벨리는 신생군주인 ‘세베루스’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격렬한 사자로서 니그리누스를 격파하여 죽이고 제국의 동부지역을 평정하며, 매우 교활한 여우로서 알비누스를 속이고 결국에는 알비누스의 지위와 생명을 박탈한다.(138) 세베루스는 사자와 여우와 기질을 동시에 가진 예로 보여지고 있지만, 결국 그가 니그리누스는 공격하기로 하고 알비누스를 속이기로 결심한 것도 그 당시의 정세적 조건을 읽으며 자신의 처신을 결정한 것이다. 즉, 단의 행동을 변화시킨 것이다. 여기서 ‘여우’의 속성이 강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는 알튀세르가 '기만‘이 강제와 법을 넘어 강제와 법의 존재를 전화시키는 공간을 개방한다고 한 것과 통한다.또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예를 통해서도 이와 같은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가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 요구되는 상황에 처했더라면 몰락했을 테지만, 당시의 조건 상 그의 신속한 진격과 과감성이 성공을 이끌어냈던 것이다.(174) 마키아벨리가 이러한 예를 통해 결국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시대와 상황이 변함에 따라 자신의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항상 성공한다고 한다.결국, 운명이 여자와 같다면, 운명의 속성을 지닌 군주는 ‘남성’으로만 표상될 수 있는가?‘군주론’에서 ‘군주’는 ‘그’라고 지칭되고 있다. 그리고 군주가 미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민들의 재산과 부녀자에게 손을 대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서술되어 있다.(118) 인민의 부녀자를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군주가 ‘남성’으로 표상되고 있기에 가능하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서술할 때 ‘군주’를 ‘여성’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군주론의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일반적인 남성으로 표상되는 ‘군주’가 단지 ‘일반적인 남성’으로만 이해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단지 ‘남성성’에 대치되는 ‘여성성’으로서가 아니라,(이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하기도 어렵다) 남성적 일반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해체되고, 여성적 속성으로 보여지는 것들, 즉 변덕스러움, 변화, 간계 등이 적극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3. “운명=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175)위와 같이 군주가 여성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들어가 보면 한 가지 애매한 부분이 생긴다.나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좋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75)
    인문/어학| 2004.10.23| 5페이지| 1,000원| 조회(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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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평가A좋아요
    0. 나,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내가 여성임을,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여성’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대학에 들어와서 이맘때쯤인 걸로 기억한다. 수업을 듣고 레포트 쓰고 가끔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놀고 집에 가는 그런 대학생활을 꿈꾸지는 않았기에, 나는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20여 년간 살아온 삶을 조금씩 깨부수는 담론들, 생각들, 사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언니들이 있었다. 비교적 별 생각 없이, 친한 선배들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과/반의 여성주의 소모임에 함께하게 되었고 그 ‘함께함’은 뜻하지 않게 내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하나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제사 때 “원래 남자가 먼저 절 하는 거야.” 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아빠, 똑같이 밖에서 일하고 들어와서 또다시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게 되는 엄마. 술 마시고 음담 패설하는 동창들 등등. 그 사람들이 갑자기 그런 말과 행동을 할리는 없고 예전부터 그래왔을 텐데 나는 이제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중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 학교에서의 불쾌함과 분노는 더했다. 수업시간에 여성비하적인 발언을 하는 선생님들, 과방이 자기들만의 공간인양 성차별적인 언어를 남발하는 남학우들, 불편한 공간, 불쾌한 상황, 너무나 답답한 순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쾌하다고,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바꾸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여자친구들이 있었고, 나는 그녀들과 혹은 그남들과 고민을 나누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다.3년 동안 계속해서 여성주의 소모임을 하고, 학생회 내에서의 성정치국 활동을 하면서도 얼마간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은 왠지 부담스러웠고, 사납고 독한 여자아이로 보일 것 같았으며 괜히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이름만으로 나를 잘못 재단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고 있었고 이제는 그 이름이 부담스럽지 않다. 물론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서 들지만,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1. ‘행복한’ 페미니즘?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고 나서, 이 책이 “노곤한 삭신을 담근 마침맞은 온도의 목욕물처럼 기분 좋고 눈물겨운 뜨거움”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는 일에 지쳐 페미니즘 운동이고 뭐고 시들해져 버린 이 땅의 모든 페미니스트들에게 이 기분 좋고 눈물겨운 뜨거움을 선물”(p.5)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Feminism is for Everybody」라는 원제를 놔두고, 굳이 ‘행복한 페미니즘’을 택하게 된 이유는, 그런 것에 있지 않을까 짐작을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본문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내 눈을 사로잡는 서문. 그곳에서 페미니즘의 진정한 정의를 만났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p.9) 벨 훅스는 이 명제가 페미니즘 운동이 반남성주의가 아님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기에 사랑한다고 했다.이 책의 19가지 주제 중, 어느 한 가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많은 주제를 짧은 분량에 다루어서 아주 깊이 있고 구체적인 부분까지 논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개괄적인 가운데에서도 꼭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고, 되도록 쉽고 간결하게 쓰려고 하는 저자의 친절함이 돋보였다. 그 중에서도 라이프스타일로서 자리 잡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는 1장 페미니스트 정치학은 나 스스로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했다. 라이프스타일로서의 페미니즘과 같은 개념이 생김으로써 사람들이 자신과 문화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거나 변화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여성 운동 진영을 생각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성차별주의, 내가 현재 변화를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 중인가, 감히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했다.2. 차이 속, ‘여성’을 보다.페미니즘 세미나를 하면서 참 많은 분야에 여성문제가 걸쳐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가부장제라는 것은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지독한 제도이므로 모든 분야에 여성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고민하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에 한동안 혼란스러워했다. 자매애, 계급, 몸, 노동, 인종, 성매매, 장애여성, 성폭력, 가족과 결혼 등등 한 해 동안 여러 문제에 얕은 고민들을 가져오면서 이제는 하나하나에 좀더 깊은 고민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이 혼란스러웠던 부분, 바로 여성들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Feminism is for everybody』이 책에서도, 각장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를 관통하여 계속 짚어내고 있는 부분이 바로 ‘차이’(그리고 ‘연대’) 인 것 같다. 흑인 여성운동 활동가로서 벨 훅스는 특히 계급과 여성 문제에 있어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고, 유색 인종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기위해 오랜 시간 운동을 해왔다. 그녀는 백인 특권층 여성들이 백인 우월주의를 벗어던지고 반인종주의 노선을 견지해야만 한다고 여러 장에 걸쳐서 말하고 있다. 여성으로서의 지위는 자각하지만 백인 특권층으로서의 지위는 버리려 하지 않는, 젠더를 부각시키고 인종은 무시하려 했던 일부 백인 여성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이 책 전반에 드러나 있다. 특권적이든 그 반대이든,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자각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한 다른 여성들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기란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3. 그녀, 그녀를 바라보다.대학에 들어와 새롭게 접한 단어들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낮게 읊조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 ‘자매애’. 대학 오기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 않던 단어였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가면서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가부장제 사회는 여성들을 서로 경쟁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연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다. 심지어 그 흔한 드라마에서조차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두 여자(꼭 한 사람은 천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악마다)가 주요 설정이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두 남자의 설정은 결국 두 남자의 우정으로 끝을 내기 마련이지만 앞서 말한 설정에서는 결국 악마로 나오는 여자가 벌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막을 내리기 일쑤다.여성과 동일시하는 여성은, 이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이거나 레즈비언이거나 간에 살아가면서 남성의 인정을 받는 것에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지점이다.앞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단어가 ‘자매애’라고 말한 바 있다. 정말로,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얻은 가장 큰 재산은 내 옆에서 함께 고민을 나누고, 때로는 기대기도 하고 힘이 되어주기도 하는 사랑하는 나의 자매들이다. 그녀들과 함께라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때로 우리는 엉뚱하지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활기차고 유쾌한 페미니스트 세상을. 누구는 페미니스트만이 진료할 수 있는 여성전용 병원을 세우고, 누구는 여성주의 방송국을 만들고, 누구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어 썩은 정치와 가부장제를 뒤집어엎고... 생각만 해도 유쾌하고 힘이 솟는다. 그런데 이런 즐거운 상상은 상상만으로 끝내기엔 너무나 아쉽다. 나는 너무 엉뚱한 것만 아니라면 ‘여성들이 연대할 때’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정치적으로 연대하여 행동할 때 페미니즘의 미래는 밝다.하지만 여성들이 연대한다고 할 때, 모든 여성은 똑같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1세계 여성과 제3세계 여성이 다르고, 계급에 따라서 인종에 따라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들은 정말로 다양하다. 나는 페미니스트 저자들의 글을 읽을 때 흑인 여성의 할례에 대해서, 이슬람 여성이 겪고 있는 억압에 대해서 그녀들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것은 나 또한 매우 혼란스러운 부분이다. 그것은 명백한 여성억압이라고, 따라서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투쟁해야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너무 서구중심적인 오만한 태도이다. 그렇다고 문화적 상대성을 내세우며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분명한 것은 ‘여성’이라는 범주로 여성의 다양한 경험을 무시하고 뭉뚱그려 넣을 수는 없지만 ‘여성’이라는 범주로 묶일 수 있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매애에 바탕을 둔 여성들의 연대를 매우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의 저자 벨 훅스도 전지구적 페미니즘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구 페미니즘이 제국주의적 백인 우월주의적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결탁하여 활동해왔다는 비판, 그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흑인여성, 유색인종 여성과 급진적 백인자매들의 항의와 저항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주장한다.4. 페미니즘의 대중화벨 훅스는 페미니즘은 결코 반(反) 남성주의가 아닌,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고, 억압이 철폐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구현할 수 있는 모두의 것이라는 말하며 이에 대한 다양한 전략들도 제시하고 있다. 학문적 영역에 국한되어 일부 엘리트 여성들에게만 받아들여지는 소수의 페미니즘으로서가 아니라, 쉽게 다가가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그녀가 이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하다) 대중적인 운동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페미니즘 정신을 온 세상에 알리는 티셔츠와 범퍼 스티커, 엽서와 갖가지 양식의 인쇄물 등을 개발해서 페미니즘이 성차별주의적 억압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라는, 간결하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공유하도록 하자는 것과 이와 더불어, 성차별주의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바뀔 수 있는지 소년들과 남자들을 의식화시키는 과정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단지 여성들만 페미니즘 의식화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여성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더라도 결코 남성 중심적 질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독후감/창작| 2004.10.23| 6페이지| 1,000원| 조회(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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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비평] 미술관이란 무엇인가 - 일민 미술관 관람을 바탕으로
    0. 들어가며현재 광화문에 있는 ‘일민 미술관’에서는 한국의 페미니스트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윤석남씨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로,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은 무엇이며, 존재하는가,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화가는 누구인가? 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90년대 한국 미술계에 큰 이목을 끌었던 윤석남씨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윤석남씨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은 참으로 나에게 반가웠다. 직접 그녀의 작품을 마주하고, 그녀가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개인전을 열리는 곳을 알아보니, ‘일민 미술관’이라고 한다. 일민 미술관... 일민 미술관?!귀에 익숙한 이름인 ‘일민미술관’. 그곳은 바로 작년 ‘안티 아라키전’을 기획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의 그 장소이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철저히 반여성적인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전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획하였다고 하여 주목을 받았던 일민 미술관에서, 한편으론 한국의 페미니스트 미술가로 알려진 윤석남씨의 개인전이 언론의 호평을 받으며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너무나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반페미니즘적 전시와 페미니즘적 전시가 상존하고 있는 미술관은 과연 어떠한 경계지점에 위치하는가? ‘미술관’이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것들이 선택되고 배제되고 있는가?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은 어떠한 함의를 내포하는가? 무수히 많은 질문들이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이와 관련하여 이미 한물 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쓴웃음을 짓게 하는 논쟁이 생각난다. 그것은 볼티모어 동물원의 한 침팬지가 그린 그림이 예술로 간주되는 기막힌 과정에 관한 것이다. 두 마리의 침팬지가 마구 그린 유화 몇 점을 함부르크의 한 전시회에 슬쩍 걸어놓았더니 수많은 교양 있는 관람객들과 저명한 예술 전문가들이 이 침팬지들의 그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물론 이들은 작가가 침팬지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이는 ‘베스티의 그림이 예술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준거는 전적으로 그것이 놓이주목을 끌었다고 본다. 하지만 아라키의 사진전은 해외에서 큰 논란 또한 불러일으켰는데,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철저히 반여성적 입장을 보여주는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온통 줄로 꽁꽁 묶인 여성의 나신이나, 교복을 반쯤 벗은 채 줄에 매달린 여성, 성기를 드러낸 채 알몸으로 등장한 여성의 모습 등 사진 속의 여성들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철저히 남성들의 시선 아래 규정된, ‘물체’로서의 여성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나 또한 아라키 사진전을 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진이나 그림 등을 통해 얼마나 극심할 수 있는지 느끼고 있는 터였다. 이전에 전시된 아라키의 사진전 중에는 라는 시리즈도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는 한국 여성들이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윤락가로 짐작되는 방 안이나 침대 위에 나신의 여성이 성기를 노출시킨 채 드러누워 있거나 성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인데 아라키가 이를 두고 ‘여성들은 자극시킬수록 아름답다’고 하니 그의 남성중심적이고 반여성적인 발언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하지만, ‘일민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는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만여 명이 넘는 관람객이 전시회를 보러 오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등의 일간지는 3~4회에 걸쳐 이 전시와 관련된 기사를 내보냈다. 특히 언론에서는 아라키의 전시와 관계된 일련의 비판지점도 보여주지 않은 채 ‘극찬’만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예로 “그의 작품들은 전시가 될 때마다 외설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에로틱하기보다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누워서 목욕하거나 로프에 칭칭 감겨 렌즈를 보는 여자들의 근육, 얼굴, 눈동자는 편하다. 어떤 것은 몽환적이거나 신비감마저 든다.”(동아일보 2002년 11월 13일) “전시장에는 다양한 사진들이 말 그대로 비빔밥처럼 섞여 카오스적인 에너지를 풀고 있다”(조선일보 2002년 11월11일) 와 같은 기사가 있다.만약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를 일민 미술관이 아닌 거리나 웹싸이장은 “건강한 문제제기이나, 현재로선 별 의미가 없다”라는 말로 일축하고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대부분이 기성 미술계의 권력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 관심조차 없을뿐더러,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기에 동참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미술관’을 둘러싼 기성 문화예술계는 정치판과 마찬가지로 이미 탄탄한 그물망으로 짜여진 채 자신의 안일과 유명세를 위해서는 그러한 권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현실이었다.‘안티 아라키전’은 이런 현실에 반(反)하여 미술관이라는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장소가 아닌,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고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까페 형식의 ‘시월’이라는 공간에 전시를 하고 작품의 형식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으로 마련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미술관에 전시가 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예술작품이라서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미술관에 걸리는 작품이 걸작이 되고, 예술로 칭송되고 있다. 아라키전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서 미술관을 본다면, 사회가 인정하는 - 기성질서에 부합하는 작품만이 미술관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소통의 장은 부재한 채 거대자본의 권력의 입맛에 맞으면 그것이 곧 예술이 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또한 이 사회가 철저히 남성중심적인 시선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기성 질서화 된 미술관은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부재한 채, 현재의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일종의 ‘계몽 양식으로서의 미술관’과 같은 기능도 하는 것이다. 안티 아라키전’을 오히려 혹평하는 보수 언론들을 보며,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을 보며, ‘미술관’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간양식’을 넘어 사회적 가치의 생산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렇다면, ‘아라키전’과 같은 반여성적 사진전이 열렸던 장소에 페미니스트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윤석남씨 개인전’이 현재 열리고 있다는, 아이러니컬한작품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기회도 드물다. 하지만, 여성성/남성성 이라는 이분법적 구분 아래,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거나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경우, ‘여성적 자아’를 표현한 작품으로 가치를 부여받고 또 다른 한편으로, 80년대 민중 예술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억척같은 어머니상’ ‘우리 시대의 어머니’등과 같은 전통적 여인상, 어머니상과 같은 것이 전통적 가치를 등에 업고 사람들에게 소개된다.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윤석남씨의 개인전이 일민 미술관에서 열리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윤석남씨 개인의 생각이 어떻든, 그리고 그것이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든, 언론이나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양태를 보면, ‘어머니’라는 이미지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미화되고 있는 ‘숭고와 희생과 인내의 전통적 어머니상’을 그녀의 작품을 통해 읽어내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도로서의 미술관에 들어올 수 있는 작품은, ‘제도’ 자체가 포괄하고 있는 범위 내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도 밖의 ‘페미니즘 미술’이 존재하기 어려운 이유임과 동시에 여성에게 용인되는 사회적 가치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을 미술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술관 전시를 통해 이를 관람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여성적 가치, 우리의 어머니상을 ‘여성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다.2. 미술관을 통해 본 취향의 사회학지금까지 아라키전과 안티아라키전, 윤석남 개인전을 예로 들어, 미술관을 통한 선택과 배제가 어떠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부분에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거대자본의 소유로서의 미술관, 즉 미술관 건립이 지니는 정치적 함의를 살펴보고, 사회적 생활양식으로서 ‘미술관 관람’이 개인의 취향의 문제만이 아닌 계층적, 계급적 의미를 지님으로써 이에 기능하고 미술관을 분석해보고자 한다.현대적 의미의 컬렉션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중세의(대부분의 미술품들이 단지 직접적인 분석은 자료도 부족할뿐더러 쉽게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에 캐롤던컨의 글을 통해 나름의 비판적? 지점을 살펴보려 한다. 캐롤던컨은 ‘공공미술관에서의 계몽 양식’이라는 글에서, 미술관은 비록 세속적인 기관이긴 하지만, 그 출발부터 제의(祭儀)적 장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여 왔으며 현대에 와서는 정치적으로 권력을 미화하고 합법화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미술품 수집은 소장가의 교양의 척도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적격자임을 결정해주는 잣대가 되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벌어진 이들의 미술품 수집 행위는 폐쇄된 집단 내에서 배타적으로 이루어졌던 일종의 의식이었다고 한다. 또한 저자는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일어난 미술관과 개인 기증자 기념과 건립 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중적 가치 기중을 가진 그들이 미술관 설립을 통해 정치적 기반과 사회적 위신을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일민 미술관의 소개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일민 선생의 사회적 지위와 위신은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민 선생을 기리는 행위를 ‘미술관’ 설립을 통해 하려했던 것은 개인의 ‘제의(祭衣)적 장소’로서 미술관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의 중심이었던 광화문, 그리고 현재 정치?,언론의 중심지이지 문화의 거리임을 내세우고 있는 광화문 거리에서 미술관을 통한 소통을 장을 꾀한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적 공간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일민 선생의 사회적 위신을 현재까지 세워주고 있는 기념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일반 대중들은 그 곳에서 개인이 생전에 수집한 도자기와 서화 등을 보면, 그들의 다다를 수 없는 고매한 품격과 부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동아일보, 신동아, 여성동아의 삽화 등 동아일보 위탁소장품이 1천 2백여점이 된다는 사실은 거대 언론사의 역사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그들이 현 사회의 문화적 진흥에 일조하고 있다는 - 따라서, 거대자본과 문화예술계의 진흥이.
    예체능| 2004.10.23| 8페이지| 1,000원| 조회(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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