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한복은 쭉 뻗은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룬 우리 나라의 전통 의상이다. 여성은 짧은 저고리와 넉넉한 치마로 우아한 멋을 풍겼으며, 남성은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조끼와 마고자로 멋을 냈다. 백의민족답게 기본색은 흰색이었으며 계절에 따라, 신분에 따라 입는 예법이나 소재, 색상이 모두 달랐다. 결혼과 같은 특별한 예식에는 평민들도 귀족이 입는 화려한 빛깔의 옷과 장신구로 한껏 멋을 냈다. 최근 국내에는 한복의 장점에 실용성을 가미한 개량 한복이 자리잡아가고 있다.한복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한복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고구려 시대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 속 벽화에서였다.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시대의 의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한국의 왕과 몽골족 공주와의 혼사로 중국 용안시대의 옷이 한국에 들어왔고, 그것이 한복의 시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오랜 동안 한복은 시대에 따라 저고리 길이, 소매통 넓이, 치마폭이 약간씩 달라질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즉 한복은 둥글고, 조용하고, 한국의 얼을 담고 있다. 실크나 면, 모시로 주로 만들어졌으며, 고름의 색상이나 소매통 색상이 여자의 신분을 나타낸다. 또한 나이와 사회적 지위, 계절에 따라 색상에 변화를 줄뿐 옷의 모양은 안동의 시골 아낙이나 대통령부인이나 모두 똑같다. 18m의 원단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입기 쉬운 점이 한복의 장점이다. 명절과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 주로 입혀진다.한복의 특색형태와 구성상의 특징한복은 평면적인 옷감을 직선적으로 재단하고 이를 꿰메어 평면적인 옷을 만들며 이것을 다시 입체적인 인체에 맞도록 남은 부분을 주름을 잡거나 접어서 끈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이다. 바지의 경우에는 마루폭 이외에 활동에 필요한 여유분을 주기 위하여 사폭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어 전후 좌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구성방법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 나라의 자연적인 조건과 민족적인 미적감각을 잘 살려준 것이라 맵시를 아름답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배색이란 목적과 효과에 맞도록 두가지 이상의 색을 짜 맞추는 것으로 배색과 보색의 조화는 질서와 통일을 의미한다. 특히 한복은 색상, 명도, 채도로 우아한 느낌, 지성적인 느낌, 개성적인 느낌 등을 표현할 수 있다. 실례를 보면, 남색치마에는 옥색, 미색, 흰색, 다홍 저고리가 제 격이며 흑자주치마에는 분홍, 미색, 옥색, 노란색, 회색저고리가 안정감을 준다. 다홍치마는 은은한 연두색이나 흰색 또는 남색 저고리가 어울리고 북청색 치마에는 옥색, 연두색, 분홍 저고리가 친근감을 준다. 보라색 치마에는 같은 연보라색 저고리가, 물비취색 치마에는 흰색, 짙은 수박색 치마에는 흰색, 미색, 연두색 저고리가 좋다. 가지색 치마는 연보라색, 옥색, 노랑색 저고리가, 흰색 치마에는 연분홍 또는 옥색이나 미색 저고리가 좋다.한복의 구조한복은 원래 의고 분리의 알타이계 복식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복식제도이다. 한복은 의고(衣袴) 분리라는 복식 특색을 가지고 있다.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져 있어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로 구성된다. 저고리는 길, 소매, 깃, 동정, 고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자의 경우 끝동이 달리기도 한다. 저고리는 소재, 재봉법, 모양에 따라 여 러종류가 있는데 홑·겹·솜·누비 저고리는 소재의 두께와 재봉법에 따라 나눈 종류이고, 저고리 각 부분에 다른 색의 감을 쓴 데에 따라 민저고리, 반회장저고리, 삼회장저고리로 나누었다. 여자 바지는 치마와 단속곳 속에 입는 속바지로 되어 모양이 남자 바지와 다르며, 조선후기에는 관고의 밑을 따로 떨어지게 만들어 여러 계층에서 모두 입었는데 그 종류로는 바지, 너른바지, 고쟁이, 단 속곳 등이 있다. 그리고 치마는 유동적인 곡선미가 뛰어난 옷으로 허리부분에서 잘게 주름을 잡아 볼륨감을 살려 항상 풍성하게 한 특색이 있어 한복 특유의 매력을 보여준다.저고리저고리는 성인남자, 성인여자,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4가지로 구분이 된다. 저고리의 주된 명칭은 다 만드는 방법은 성인용 저고리와 같고 빛깔은 옥색, 분홍색, 연두색 등이 많이 쓰인다. 명칭과 형태도 성인용 저고리와 같다.여자아이용 색동 저고리이 옷은 첫 돌부터 6~7세 어린이들에게 알맞은 옷으로 한국적인 미를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옷이다. 원래 색동 저고리는 돌날 남녀 구분 없이 입혔으나 단 돌띠만은 구별하여 남아는 남색, 여아는 자주색을 달았다. 돌이 지나면 남아는 그대로 길게, 여아는 짧게 하여 입혔고 저고리의 길은 연두색으로 하였다조끼조끼는 우리 나라 고유의 의상은 아니다. 이 옷은 원래 영국의 "VEST", 프랑스의"GILET"이라는 의복을 흉내낸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착용된 것은 일본의 영향인 듯 하다.하지만 외국에서 온 의상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디자인된 것도 우리의 자랑이다.조끼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것인데 주머니가 달려 있어 일용품을 넣기에 편리하고 미관상으로도 손색이 없는 옷으로 오늘날 남자복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마고자마고자는 성인남자, 성인여자, 남자 어린이용으로 구분된다. 마고자의 주된 형태와 명칭은 다음과 같다.성인 남자용 마고자마고자 원래 마고자는 만주인의 의복이었으나 대원군이 만주 보정부에서 유거 생활에서 풀려 나와 귀국할 때 입고 돌아오면서 널리 착용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기 이후에 특수계층의 집안에서 방한을 겸한 사치복으로 등장했었다.마고자는 일명 덧저고리라고도 불리며 용도에 따라 재봉법이 다르고 방한용으로 남녀가 같이 널리 착용 되고 있으며 남자에 있어서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덧입는 옷이므로 옷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 입기도 한다.성인 여자용 마고자실내에서 방한용으로 입는 덧저고리였는데 요즘은 외출용으로 쌀쌀한 늦봄과 이른 가을에 입으므로 치마 저고리의 감과 색이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형태는 저고리와 같으나 깃과 섶 옷고름이 없다.남자 어린이 마고자남아용 마고자는 거의 입혀지지 않았다. 방한용의 경우 동색이 많이 쓰이며 바지색을 돋보이게 한다. 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 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할동 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요즘의 치마는 주로 세폭의 주름을 잡아 어깨 허리를 달아 입는데 만드는 방법이나 에 따라 홑치마, 겹치마, 누비치마가 있다. 그리고 모양에 따라 뒤를 여미고 입는 풀치마와 뒤가 막힌 통치마가 있다. 그밖에 예복용인 스란치마와 대란치마, 일할때 입는 앞치마가 있으며, 겉치마 밑에 받쳐입는 속치마와 무기치마가 있다.겹치마겉감만으로 바느질한 홑치마에 대하여 안을 넣어 겹으로 바느질 한것이다.풀치마양쪽으로 선단이 있어 둘러 입게 된 치마이다. 치마폭이 통으로 된 통치마에 상대되는 것으로 한복치마의 기본이다. 띠허리나 어깨로 치마허리를 만들고, 치마폭과 치마허리를 맞추어 주름을 잡으면서 치마허리와 치마폭을 붙여 박는다.통치마양쪽 선단이 없이 통으로 지은 치마이다. 띠허리를 달아 뒤로 여며 입는 풀치마와는 달리 통으로 박아 주름을 잡은 치마폭에 조끼허리 또는 어깨 허리를 단다. 조끼허리의 앞은 여미게 되어 있으며 풀치마에 비해 간편하고 활동적이다. 길이에 따라 긴 통치마와 짧은 통치마로 구분된다.스란치마치마에 금박무늬의 스란을 댄 치마. 옛날에 궁중이나 일반 부녀자들이 입었던 예복용 치마로 폭이 넓고 길어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는다. 왕비는 용무늬 세자빈은 봉황무늬, 공주나 옹주는 꽃과 글과 무늬, 일반 부녀자들도 꽃과 글자무늬를 놓았다. 스란을 두 층 댄 것을 대란치마라 한다.앞치마부엌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앞에 두르는 작은 치마. 행주치마, 또는 에이프런이라고도 한다. 가정에서는 흰색이나 밝은 색의 무명천이 많이 쓰이고 그밖에 음식점, 생선가게, 정육점 등에서는 가죽 제품이나 고무 제품 등이 쓰인다.속치마여성용 속옷의 한 가지. 겉치마 밑에 받쳐서 입는 치마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끼허리에 겉치마와 비슷한 치마폭을 이은것과 겉치마폭이 푸하게 퍼지도록 하는 무지기 간소화와 여성의 외출이 잦아지면서 내외류 쓰개류였던 장옷, 쓰개치마 등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남자들과 같이 봄, 가을에는 겹 두루마기, 여름에는 홑두루마기 겨울에는 솜 두루마기를 입었었지만 경제적 부담과 손질의 번거로움 때문에 많이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섬유의 발달로 손질이 간편해져서 웃옷이나 방한복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치마 저고리 위에 입으므로 한결 옷차림이 돋보이는 웃옷이다.성인 여자용 두루마기홑단 두루마기이것은 등바대, 겉바대를 대고 섶에 다른 단을 댄다. 도련, 소매부리의 단을 꺽는데 소매부리는 2~3cm, 도련은 5~6cm 안으로 단을 접어놓고 공그른다.박이 두루마기홑단 두루마기와 비슷한데 박이 두루마기는 다시 뜻지 않도록 아주 꿰매는 옷이라서 바느질은 박음질과 감침질로 한다. 보통의 박이 두루마기는 베나 모시로 짓는다.남자 아이 두루마기남아용 두루마기는 연두색 색동 소매를 달거나 연두색, 분홍색 등의 단색으로 만든다. 또 길과 소매는 연두색, 섶은 노란색, 무는 자주색, 고름과 깃은 남색으로 하는 것을 까치 두루마기라고 한다.한복차림의 바른 예의기본적인 것은 청결과 몸가짐이다. 특히 신부들이 처음 입는 한복이기 때문에 쩔쩔매기 일쑤다. 그러나 한복입는 것에 자신감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 실수를 줄이는 일이다. 길을 걷거나 계단을 오를 때에는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땅에 끌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다 입고 나면 치마의 겉자락은 왼쪽으로 오도록 하며 치마의 안자락과 뒷자락 겹치는 부분은 층이 나지 않도록 가지런히 여민다.우선 한복을 입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고름 매는 법을 제대로 알도록 하자. 고름은 긴 고름과 짧은 고름이 있는데 긴고름을 위로 올려 고를 만든 다음 맨다. 고의 길이는 4∼5cm가 적당하며, 긴 고름과 짧은 고름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것이 제대로 맨 모습이다. 그리고 신발 속에는 버선을 신는데 버선은 수눅(시접)이 바깥쪽을 향하게 한다. 앉을 때는 치맛자락이 구겨지지 않게 유의하며 무릎을 굽혀 앉 된다.
고려청자에 대하여...*고려청자는 9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여러 가지의 기법으로 제작*12세기 전반이 절정기*그 아름다운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며 불교적인 天下世界를 연상*고려시대 초기에는 무문청자가 주류*11세기 경부터는 기벽에 다양한 문양을 새기면서 음각, 양각, 상감, 투각 등의 청자로 발전1.도자기란도자기란 한 종류 이상의 점토(흙) 또는 암석의 분말을 알맞게 혼합, 물에 반죽하여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건조시킨 다음 높은 온도로 구워서 냉각시켜 굳어지게 한 기물을 말한다.1)도자기의 분류* 토기(土器)토기는 다공질로서 투과성이 있다. 날카로운 금속으로 기면을 긁으면 긁힌다. 즉, 원료를 높은 온도로 소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토기 소성 온도 700도 ~ 1,000도) 입자와 입자에 공간이 많아 흡수성도 23%이하이고 대부분이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 소지의 색상은 적갈색, 또는 회색이다. 원시시대의 기물, 화분, 기와, 테라코타 등이 토기에 속한다.*도기(陶器)도기에는 장석질 또는 점토질의 경질도기와 석회질 또는 백윤도기질의 연질도기가 있다. 흡수성은 경질도기가 15%이하이고, 연질도기는 20%이하이며 소지의 색상은 백색이고 경도가 높고 흡수성이 적으나, 자기보다는 못하다. 그러나, 제작이 쉽고 소성온도(1,100 ~ 1,200도)가 자기보다는 낮은 유약으로 사용한다는 이점이 있다. 도기 제품에는 위생도기, 내장용 타일, 일부 식탁 용기, 커피 SET 등이 있다.*석기(石器)석기는 흡수율이 0.5 ~1%이며 토기와는 반대로 불 투과성이다. 날카로운 금속으로 긁어도 긁히지 않고 강도와 내산성이 크며, 소성온도는 1,200도 ~ 1,250도이다. 제품에 따라 유약을 바르기도 하고 바르지 않고 완성하기도 한다. 석기제품으로는 전기시설용품, 실혐용기, 외장 타일 등이 있다.*자기(磁器)자기는 경질자기, 연질자기, 특수자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경질자기는 소성온도가 1,350도이며 일반자기가 이에 속하고, 강도와 내산성이 높다. 연질자기는 소성온도가 1,250도 를 태워서 소지에 넣어 만든 골회자기가 이에 속한다. 골회자기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 졌다고 해서 본차이나라고 한다. 자기는 기물을 두들기면 금속성 소리가 나며 자기제품으로는 고급 식기류, 공예품, 외장 타일 모자이크 타일 등이 있다.2)도자기 종류우리 나라 도자기의 종류를 크게 5종류로 분류해 놓았습니다.*청자 (귀족적인 화려함)고려인들의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불교적 염원을 담아낸 청자는 은은하면서 맑은 그 신비한 비색과 세련된 모습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로 일컬어진다. 자연스러운 선과 세련된 형태, 요란하지 않으면서 운치 있는 문양, 은은하고 투명한 비취색 등이 고려 청자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런 기법도 넣지 않은 순수한 청자로 자연스러움과 멋스러움을 풍기는 순청자와 도자기 겉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파고 그 속에 같은 모양의 다른 재료를 박아서 만든 상감청자로 구분된다.*백자 (검소와 질박)검소, 질박, 결백함을 가치관으로 중요하게 여겨 온 우리 백의민족의 상징이기도 한 조선백자는 중국의 화려한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청초하고 간결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당시 중국, 일본과 뚜렷이 대비되는 독특한 품격을 나타내는 조선백자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갖는 문양인 용, 모란, 당초, 소나무, 매화, 학 등을 여유 있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마치 자연과 마주한 듯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분청사기 (거칠지만 원숙함)한국도자기의 독특한 분야인 분청사기는 청자에 분을 바른 것을 말한다. 하얗게 분장한 면 위에 철화(鐵畵), 선각(線刻), 박지(剝地)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며 그 표현방식은 익살스러움이 있고 정돈되지 않은 듯 수더분하여, 그 형태와 문양은 자유롭고, 구애받을 것 없는 분방함,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미(美)의 원형을 간직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옹기 (무소유의 아름다움)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옹기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지지닌 순수한 우리의 도자기이며, 우리 식생활문화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빈부와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사용해 온 우리민족의 그릇이다. 또한, 옹기는 가마안에 공기를 들어가게 해서 구원낸 숨쉬는 그릇이며, 습도도 조절하고 청정작용도 하는 인류가 만든 그릇 중 '자연에 가장 가까운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업의 발달로 프라스틱과 스테인레스 그릇이 등장하면서 점차 우리생활에서 밀려났다. 옹기는 현재는 다른 어떤 그릇보다 과학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장점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다.*다기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차(茶)는 우리나라에 7세기 전반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그 성행 시기는 828년(흥덕왕 3년)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이후부터라 한다. 차를 끓여 마시기 위한 차 그릇 즉 다기는 실용품일 뿐만 아니라, 차실의 분위기를 고아하게 해주는 공예품 이기도 하다. 다기의 종류로는 물을 끓이는 탕관, 끓인 물과 잎차를 넣어 차를 우려내는 다관, 탕관에서 끊인 물을 옮겨 식히는 숙우, 찻잔, 찻잔받침, 다반, 찻숟가락, 차통, 찻상, 찻수건, 물항아리, 개수통 등이 있다.여기서 우리는 고려청자...에대해 알아볼것이다...2. 청자의 기원중국에서 옥(玉)은 군자(君子)를 상징하며 부귀(富貴)와 사후내세를 보장해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녀 영생을 의미하며 악귀를 쫓는다고 믿어 부장품으로 많이 사용하였다.당시 지배계급의 옥에 대한 소유 욕구와 부모 묘에 옥을 부장 하려는 사람은 많았으나 ,옥은 생산이 적어 매우 비싸 귀한 옥을 흙으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 중 전국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9C경 중국의 호족(濠族)들에게 널리 퍼진 불교의 선종(禪宗)이, 좌선(坐禪)을 하는데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하여 차를 마시는 습관이 확산되면서, 청자를 찻잔으로 사용하며 실용화되기 시작하였다.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로써 마셨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찻잔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고, 그 이었다.우리나라에서는 9C경 통일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되면서 중국을 다녀온 선승(禪僧)들을 통하여 중국의 찻잔이 유입되기 시작되었고. 고려 초 청자를 국산화하려는 노력 중 10C후반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질이 좋은 흙을 찾아 전라도 강진, 고창에서 우수한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3.고려청자자연스러운 선과 세련된 형태, 요란하지 않으면서 운치 있는 문양, 은은하고 투명한 비취색 등이 고려청자의 특색이다. 청자가 투명한 비취색을 띠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말부터이며 이 시기부터 청자의 형태 또한 세련된 미적 감각을 보이고 있다. 고려청자는 12세기 전반기부터 맑은 비취색과 세련된 모습으로 그 미적, 기술적 수준이 최고 절정에 다다른다. 12세기 전체를 통틀어 순청자가 우수한 품질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으로 12세기 중엽에서는 상감기법과 문양에 있어서 가장 세련된 시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4세기 중엽부터는 청자의 생산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대신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4.고려청자의 발전*최초제작시기청자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 요지의 발굴 조사 결과 고려 정종(定宗, 재위 : 946∼949)의 안릉(安陵)에서 출토된 청자와 비슷한 청자가 출토되었고, '순화삼년(순화삼년: 992)'이 음각된 청자가 출토된 사실을 절대 편년 자료로 한다. 그리고 전라남도 강진군 용운리 청자 가마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청자들 중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것들이 적지 않은 점과 경기도 용인군 서리 백자 가마터의 가장 아래층에서 청자가 출토된 사실로 보아 9∼10세기 초에 청자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발전청자 제작 초기에는 통일신라 토기 형태의 영향과 중국 청자의 영향이 강해 형태가 과장되거나 그릇의 선이 엄정한 것들이 제작되었다.그러나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7∼1082) 연간에 중국과는 다른 고려인들의 미의식에 맞는 단아한 형태, 유려(流麗)한 기선, 비색, 그리고 고려 고유의 문양이 였으며, 제작 지역도 한반도 서남해안을 비롯해 내륙 곳곳으로 확산되었다.예종(睿宗, 재위: 1105∼1122)에서 명종(明宗, 재위:1171∼1197) 연간까지가 실로 질적(質的)으로나 양적(量的)으로 완성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다양한 시문 기법과 함께 상감기법의 발명으로 더욱 다채로워진 고려 시대 자기는 문양 뿐 아니라 그릇의 종류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어 숟가락이나 도장, 단추, 바둑판 등의 일상 용품을 비롯해 기와나 타일 같은 건축 자재까지도 청자로 만들었다.*변화12세기 말부터 1220년대에 걸친 30년 간은 유려했던 그릇의 선이 약간 둔화되었으며 문양은 단위가 작아지고 과밀화 경향이 나타나는 등 약간 산만한 분위기로 변한다. 그리고 몽고의 침입(1231) 이후에 각종 재질의 그릇들은 청자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청자의 생산은 이전에 비해 양산(量産)되었으나, 반대로 질(質)은 저하(低下)되었다.*쇠퇴충렬왕 시대에 일시적으로 원 세력의 지배 체제가 안정되면서 사회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고려의 도자기 공예도 활기를 되찾는 듯했었지만 얼마 안 되어 다시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상감 문양은 과거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조잡하고 거칠었으며 상감 문양의 일부를 도장으로 찍어서 처리하는 등 매우 절제 없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기법은 후에 조선 시대 분청사기의 중요한 시문 기법이 되었다. 고려 청자 곡선의 아름다움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흐트러져서 우아하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사회에 알맞은 무겁고 둔한, 즉 실용성과 기능만을 생각한 안이한 형태로 변했다.*소멸충정왕(忠定王, 재위: 1349∼1351) 이후 창궐(猖獗)하는 왜구에 의해 한반도 남부 지방이 황폐화되고 고려 말의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 지방의 장인들이 내륙으로 피난하면서 그 맥이 끊어졌으며, 이들 장인들이 생계를 위해 피난지의 흙으로 청자를 만들었으나 질이 나빠 그릇 표면을 백토로 분장하게 되면서 분청사기의 모태가 되었다.5.고려청자의 종류*순청자(純靑磁) 및 음각·양각·인각·磁)
1.역사적 배경(歷史的 背景)우리 나라의 요업이 어느 시대에 창조되었던가 하는 그 기원은 아직까지 기록이 확실하지 못하여 알길이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경덕왕조의 기록을 보면 종래의 瓦器典(와기전)을 陶燈局(도등국)으로 기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우리 나라의 요업은 그 이전의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産品은 원시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其後 新羅朝廷에서는 陶燈局을 擴允(확윤)하여 한 官署(관서)로 승격시켜 도요사업을 統督(통독)한 것은 基間 요업이 상당히 발전하였으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이때의 도기에는 布紋(포문) 등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이는 그릇을 굴때에 토기를 布物로 쌓거나 새끼로 묶어서 요에 넣었던 흔적이 남은 것이요. 紋儀(문의)로서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신라의 요업은 長足的으로 발전하여 여러 가지 紋儀를 조각하고 또 釉藥(유약)을 사용하여 당대 당나라의 산품 三彩油(삼채유)와 비교 할 수 있는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 당제품과 신라산품이 相隣(상린)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모든 증거로 보아 우리 나라의 자기는 新唐交易이 殷盛(은성)하던 8세기 말엽을 도자공예의 發祥期(발상기)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기의 예술적 발전은 역시 고려왕조에 으르러 일반적인 문화가 향상됨과 倂進(병진)하여 발달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신라시대의 토기로부터 점차 발달하여 釉藥을 사용하게 되고 色彩(색채)와 光澤(광택)을 발하는 제품을 산출한 것이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와 倂進하였고 고려문화의 황금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였기 때문이다.10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러히 중보적(重寶的)인 존귀성(尊貴性)을 인정받고 燦然(찬연)히 세계도예계에 등장한 고려자기는 당대 상류계급에 있어 최상의 愛玩品(애완품)으로 羨慕(선모)의 대상이 되었지만 실은 그 至寶(지보)의 磁器가 어느 왕조시대에 어느지방에서 출토하였던가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이로부터 이조 500년동안 이를 알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인사도 없어 忘置(망치)되어 있었던 것이 한일합병후 개성 만월대 구지부근에서 습득한 한 조각의 파편이 되어 학자의 卓上(탁상)에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2.고려청자와 백자(高麗靑磁와 白磁)우선 고려 도자기라고 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陶器(도기)와 磁器(자기)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선사시대부터 발전되어왔던 도기질(陶器質) 요업(窯業)과 9세기경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청자 제작기술은 바탕으로 한 磁器質(자기질) 窯業이 확대되면서 요업은 陶器質과 磁器質로 양분되었다.먼저 陶器質은 연질도기와 경질도기로 구분된다. 연질도기는 약 800℃에서 불완전 燔造(번조)하여 器皿(기명)에 탄소를 침투시킨 侵炭陶器(침탄도기)로서 회색이나 회혹색을 띠며, 탄소의 작용으로 흡수성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연질의 침탄도기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黑陶를 시작으로 널리 제작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는 시루를 포함한 조리용기·자배기 등의 허드레그릇, 흡수성이 없는 성질을 이용해 기와 등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경질도기는 약 1000℃에서 還元(환원) 燔造한 것으로 흡수성이 없으며 회청색이나 회흑색을 띠며 종래에는 회청색경질토기로 불렀다. 삼국시대에 완성된 경질도기는 항아리·병·발·접시 등 다양한 생활용기들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일반백성의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경질도기에 灰釉(회유)를 씌운 회유도기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고려시대에 회유도기의 기술이 발전되었다. 이러한 고화도 회유경질도기 제작기술로의 발전은 자기질 요업의 첫 단계인 청자제작의 기술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의 磁器質 요업은 청자·백자·흑자 등 다양하지만 고려의 도자공예를 대표하는 것은 청자이다. 청자는 제작기술, 장식의장과 조형성에 있어서 다른 종류의 도자기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도자기 조형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조선 전기까지 제작되었다.3.發生과 發展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중국 越州窯(월주요) 청자를 받아들이면서 청자의 가치와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지역의 안압지, 황룡사지, 미륵사지, 부여 부소산 등에서 월주요 청자와 邢州窯(형주요)·定窯(정요) 백자가 발견되고 있어서 청자·백자에 대한 인식의 폭이 확대되어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에 전래된 중국자기의 기종들은 삼국시대의 것이 호·병이었던 것과 달리 해무리굽(그릇의 굽을 깍아낸 모양이 마치 해무리 같은 굽. 중국에서는 玉璧底(옥벽저). 일본에서는 蛇目高臺라고 부름)을 한 ?(완)과 대접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해무리굽이 성행한 시기는 8∼9세기이며 10세기에 오면 일반적인 輪形(윤형)굽으로 바뀌며, 일본 회유도기에서도 10세기 이후 것에서는 해무리굽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 초기청자 窯址(요지)에서 출토되는 기종들 중 해무리굽 ?의 존재는 한국 청자의 발생시기를 9세기로 추정하는 근거 자료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기술적 여건은 중국의 선진 자기질기술의 도입 결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청자를 제작하는 기술 중 가마와 耐火匣(내화갑) 등의 기술은 기존의 통일신라시대 경질도기제작기술과 관련지을 수 없는 새로운 것으로서 중국 越州窯의 기술도입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청자 발생은 중국 도자문화의 적극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었지만 통일신라 사회가 이룩했던 청자 자체 생산의 욕구, 회유도기의 기술적 기반, 원료가 풍부한 자연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 고급기술을 받아들일 여건, 즉 기술·원료 등이 마련되지 않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8세기 늦은 17세기에 유럽은 18세기에 비로소 자기질 요업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자의 조형적 요소들이 모두 중국적인 것만은 아니다. 해무리굽 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종(전접시·발·광구병·매병·항아리 등)을 통일신라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금속그릇, 칠기, 경질도기나 회유도기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우리 청자가 중국도자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국적 조형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시대의 공예전통을 계승하면서 뒤떨어진 기술적 요소들을 국복하며 발전적인 방향을 지향했기 때문이다.발생기의 청자는 문양이 없는 素紋靑磁(소문청자)였으나 점차 장식의장 기법이 다양해졌다. 청자는 장식기법에 의해 분류되는데 몸체를 깍아낸 문양을 나타내는 陰刻靑磁(음각청자)·반양각청자(半陽刻靑磁)·陶范靑磁(도범청자)에서 찍어내는 型押陽刻靑磁(형압양각청자)·象形靑磁(상형청자)·투각청자(透刻靑磁), 酸化鐵(산화철)과 酸化銅(산화동) 안료로 문양을 그리거나 채색한 鐵畵靑磁(철화청자)·鐵彩靑磁(철재청자)와 동화·동채청자가 있다. 또 白土泥(백토니)와 ?土泥(자토니)로 문양을 그린 堆花紋靑磁(퇴화문청자)와 철채를 한 후 문양 부분을 긁어내고 백토니로 채워넣는 일종의 상감과 유사한 철채백퇴화문청자도 소량 제작되었다. 그러나 청자의 장식기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상감법으로서 음각기법과 퇴화문기법이 함께 사용된 응용기법이다. 청자의 장식기법은 음·양각의 刻法(각법)과 철화·퇴화의 畵法(화법)이 각각 발전하다가 12세기에 2가지 기법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상감기법으로 전환되어 조선 전기까지 계승되었다. 금속과 나전칠기에서 이미 보편화된 상감기법이 청자에 응용된 것은 고려가 이룩한 독창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청자 발생 이후 9세기 후반경에는 백자의 생산도 시작되었다. 당시 백자는 기술과 장식의장, 조형적인 요소까지 청자와 유사했고 제작도 청자와 같은 窯場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胎土(태토)만 백색이지 유약은 같은 회청색을 띠는 청자 유약을 사용했다. 흑자는 다갈색이나 흑색으로 나타나는 鐵釉(철유)를 씌운 것으로 청자의 발생과 함께 적은 양이 생산되었다. 발생기의 흑자는 회유도기의 기술과 조형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청자의 회유도기의 기술과 조형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청자의 기술이 고급화되면서 청자의 태토 위에 흑유를 씌우는 방법으로 발전되어 조선시대까지 제작되었다. 그외에 현존하는 수는 적지만 백토·청자토·자토를 적당히 배합해 태토의 색에 따라 무늬가 생기는 練理文磁器(연리문자기)와 통일신라의 綠釉(녹유)도기를 계승한 예도 남아 있다.
첨단기술공학부200370032방일호부산 국제 영화제는…한국 영화의 발상지인 부산을, 영상문화의 중앙 집중에서 벗어나 지방 자치시대에 걸맞은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발전시키고자 기획된 영화제이다. 1996년 제1회를 시작으로 2002년 제7회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는 5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구에 억눌려 있던 아시아 영화인의 연대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과의 영화교류 모색, 오리엔탈리즘 극복, 아시아 영화의 발굴과 세계화를 앞으로 풀어 나가야 할 숙제로 삼고 있다행사 프로그램아시아 영화의 창 올해 '아시아영화의 창'은 거장들의 신작이 적은 대신, 젊고 유망한 감독들의 독립영화의 약진이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올해 아시아영화는, 특히 이제 중견감독으로 발돋움하는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품어내는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로 인해 풍성한 한해로 기록될 것이다. 상영작으로는 홍콩영화 웡칭송의 푸보 , 덕 챈의 사랑은 죄가 아냐 , 윌리엄 쿽의 어둠의 신부 . 일본영화 사부의 하드 럭 히어로 와 야마시다 노부히로의 후나키를 기다리며 이란영화 오후5시 인도네시아영화 새인간 이야기 등이 있다.행사 프로그램새로운 물결 아시아영화의 미래를 책임질 재능과 열정을 지닌 젊은 영화인들의 새롭고 도전적인 작품들이 '새로운 물결'을 통해 선을 보인다. 올해는 특히 독립영화의 강세가 두드러진데, 이들 독립영화들의 다양한 스타일의 시도는 아시아영화의 미래를 전망하는 좋은 준거틀이 될 것이다. 상영작 중 하나로 한국에서 선택된 단 한편의 상영작은 홍기선의 선택 이다. 장기수라는 낡디 낡은 소재를 지극히 평이한 스타일로 그려낸 이 영화는 아마도 올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어쩌면 올해 부산에서 상영될 수백편의 영화 가운데 가장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행사프로그램한국영화 파노라마 2003년의 한국영화계는 신인들의 활동이 활발했고 독립영화계의 분투가 눈에 띄는 성과를 낳은 가운데, 장르적으로는 호러가 압도적인 양적 우세를 보였다. 또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장편에서 원숙한 작품세계를 선보여 평단과 관객 양자로부터 갈채를 얻은 30대 감독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4인용 식탁 의 이수연, 그 집앞 의 김진아, 박기형의 아카시아 , 이재용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 ,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 김지운의 장화, 홍련 . 친구 로 흥행 기록을 경신한 곽경택은 똥개 로 개성적 대중영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재확인시켰다.행사프로그램와이드 앵글 장편 극영화의 틀을 뛰어넘어 무한한 상상력과 새로운 시도를 꾀하는 작품들을 소개한 '와이드 앵글'의 올해 라인업은 예년에 비해 훨씬 풍부해지고 중량감이 실려있다. 아시아의 다큐멘터리는 왜곡된 역사/사회적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기록하는 작품들과 예술가, 혹은 요리사의 열정과 영광의 이면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작품들이 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온 재기발랄한 단편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다양하면서도 심각한 또는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뛰어난 다큐멘터리가 여전히 와이드 앵글 섹션을 사랑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행사프로그램캐나다영화 특별전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있어 캐나다 영화는 세계 지도에서 차지하는 캐나다의 크기만큼이나 아직은 미지의 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캐나다는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도 놀랍게 다원화된 곳이다. 캐나다 특별전을 통해 소개되는 12편의 작품은 이러한 다양성을 바탕으로 캐나다가 낳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아톰 에고얀과 같은 거장 감독들과 드니 아르깡, 프랑수아 지라르, 가이 매딘과 같은 베테랑 감독들, 또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칼 베세이, 자하리아스 크눅, 키이스 버만, 장 프랑수아 풀리오, 빕케 폰 카롤스펠트와 같은 젊은 감독들의 대표작 및 최신작들로 구성되어 있다.행사프로그램회고전 정창화 회고전 :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 올해 한국영화회고전의 주인공은 한국액션영화의 개척자 정창화 감독이다. 최인규 감독으로부터 영화를 배우고 1953년 최후의 유혹 으로 데뷔한 정창화 감독은 새로운 형식과 스타일을 도입하여 한국영화장르에 액션영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정착시켰다. 그는 당시 대중에게 낯설었던 액션영화를 보다 대중적인 장르인 멜로드라마, 사극, 청춘영화와 접목시켜 액션영화의 대중화에 기여했으며,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만주벌판을 공간으로 삼은 대륙물” 혹은 대륙액션”으로 알려진 일련의 영화들의 선구자이기도 하다.도플갱어 쿠로사와 키요시 쿠로사와 키요시의 영화세계는 일상에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잊어버리고 지내는 것의 공존을 자주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고 초월적 힘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그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잊어버리고 지내는 존재와 갑자기 맞닥뜨리는 순간, 혼란을 경험하면서도 자아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도플갱어 는 제목 그대로 자신의 분신과 만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장애인 또는 환자용 로봇의자를 개발중인 하야사키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분신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분신은 자신보다 훨씬 더 거칠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우 자유롭다. 그래서, 그 분신이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자신의 일을 망쳐놓거나 엉뚱한 일을 저질렀을 때 하야사키는 때때로 해방감을 느낀다. 그것은 사회나 도덕적 틀 안에서 억압되었던 자신의 욕구의 분출에 다름 아니다. 그 기묘한 공존을 통해서 하야사키는 자신이 미처 몰랐던 자아의 이면을 발견해 가기 시작한다.개 막 작아카시아 박기형 데뷔작 여고괴담 으로 한국영화계의 호러 전통을 되살린 박기형 감독의 세번째 작품. 아카시아 는 무서운 귀신이 습격하는 일반적 호러가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는 불길함이 옷 속을 배회하는 작은 벌레처럼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독특한 작품이다. 사악함을 감춘 듯한 귀기의 소년, 불온하고 건방진 이웃집 소녀, 모호한 눈빛으로 가족을 지켜보는 할아버지, 무엇보다 기괴한 형상의 아카시아 나무들을 교차시키며, 밤과 어둠 혹은 쇼킹한 사운드 효과나 가파른 편집에 의존하지 않고도 멋모를 불안을 빚어내는 연출력이 탁월하다.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는 여인 미숙은 결혼 10년째인데도 아이가 없는 게 유일한 결핍이다. 미숙은 고민 끝에 보육원에 가서 조숙한 눈빛의 뭉크 풍의 그림을 그리는 소년 진성을 입양한다. 그러나 진성은 아카시아 나무 주위만 맴돌거나 죽은 벌레를 갖고 놀면서 미숙 부부를 불안하게 만들고, 평화롭던 가정에는 불길한 어둠이 드리워진다.폐 막 작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포스터는 자연을 비구상적인 방식으로 묘사해온 채색화의 대가 유산 민경갑 화백의 작품이다. 7회 영화제 공식 포스터가 자연과 축제의 의미가 부각된 것이었던 반면, 연작의 의미를 담고 있는 올해의 포스터는 보다 동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 고유의 활기찬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한국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국경을 초월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8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역동적인 정체성으로 잘 승화시키고 있는 작품이다.영화제 관람 관객165,103명8회167,349명7회143,103명6회181,708명5회180,914명4회192,547명3회170,206명2회184,071명1회-끝-{nameOfApplication=Show}
유아교육학과 200328024 이 정 은KBE 외한은행새 천 년 드 림 뱅 크- INDEX -ONE일반현황은행 CI자회사FIVESIX주주구성은행장 소개경영진 소개조직도TWO연 혁THREEFOURSEVENEIGHT은행장 인사외환은행을 아껴주시는 고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2년 4월 30일 외환은행의 제19대 은행장으로 취임한 이강원입니다. 그간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저희 외환은행을 아끼고 지원하여 주신 고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IMF사태 이후 지난 수년간 우리 은행은 부실자산 감축, 인력 및 점포관리, 부동산 매각의 자구노력과 동시에 유상증자 등의 노력을 지속하여 왔습니다. 그 결과 Clean Bank화를 이루고 지난해 BIS 비율이 10.96%에 이르는 등 자본의 적정성 확보에도 성공하였으며,ROA 1인당 영업이익 등 각종 수익성 지표도 대폭 개선되는 등 경영 정상화의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한 것으로 평가 받아 마침내 지난 4월 9일 금융당국으로부터 경영개선권고 조치를 해제 받게 되었으며 이는 고객 여러분들의 성원과 지원에 크게 힘입어 일구어낸 결과로서 다시 한번 고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금융산업 지각변동 등 환경변화에 슬기롭고 신속하게 그리고 모든 상황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동시에 고객님들이 가장 먼저 거래하고 싶은 은행, 모든 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직장,투자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은행 KEB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새로운 Vision을 First Choice Bank 로 삼고자 합니다. 첫째, 고객님들께 가장 믿을 수 있고, 편리하며, 값이 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토록 하겠으며 둘째, 시장이 가장 신뢰하는 은행, 고객님들이 가장 안심하고 돈을 맡길 수 있는 은행이 되겠으며, 셋째 가장 효율성이 높고 가치가 높은 최고의 자기자본 이익률(ROE)을 달성하는 은행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3가지 면에서 최고의 은행이 될 수 있도록 외환은행을 날렵한 코끼리 로 만들고자 합니다.로써 고객이 원하는 은행,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은행, 고객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최고의 은행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단순히 좋은 은행, 'Good Bank KEB'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은행, 'Great Bank'로 발돋움하여 고객 여러분께 보답토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성원하여 주신 고객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저희 외환은행을 가장 먼저 선택(First Choice)하신 결정이 최선의 선택(Best Choice)이 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외환은행의 힘찬 도약을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연혁1967.01.30 국내 유일의 외국환 전문은행으로 탄생(자본금 100억원) 1972.11.28 국내 최초 온라인 보통예금 취급 개시 1977.03.30 자본금 1,000억원으로 증자 1978.04.10 국내 최초 신용카드(비자카드)업무 취급 개시 1978.05.22 자본금 3,000억원으로 증자 1978.07.16 원화표시 외국환금융채권 발행 개시 1981.01.30 본점 건물 신축 이전(현 행사) 1985.02.19 86아시안게임 및 88서울올림픽대회 공인은행 지정 1985.03.25 신탁업무 취급 개시 1985.07.25 자본금 4,050억원으로 증자 1989.12.30 한국외환은행법 폐지법률 공포로 특수은행에서 일반은행으로 전환 1990.07.09 종합 전산 시스템 가동 1990.09.13 체육복권 발매 개시 1991.12.05 자본금 6,050억원으로 증자 (일반공모 2,000억원) 1992.10.26 우수저축기관상 수상 1994.04.04 한국증권거래소에 우리은행 주권 상장1994.08.30 97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 공인은행 지정 1995.03.25 자본금 8,250억원으로 증자(일반공모2,200억원) 1995.07 2년 연속 국내 최우수은행으로 선정됨 1996.03.14 VISA 해외직불카드 정산은행 지정 1996.07.08 KEDO 자금관리 주거래은행으로 지정 1997.3,500억원) 및 경영참여 1999.01.01 한외종합금융㈜ 합병 (자본금 14,597억원으로 증가) 1999.04.22 자본금 24,817억원으로 증자 한국 최우수 금융기관으로 선정(파이낸스 아시아지) 한국인재경영대상 금융부문 최우수기업상 수상 2000.12.20 자본금 12,409억원으로 2:1 감자 2000.12.23 자본금 18,509억원으로 증자 2001.02. '2001 서울국제올림픽박람회' 공식후원은행으로 선정 2001.03. 국내 최대 외국환전문 웹사이트(www.fxkeb.com)개설 2001.05. 후순위 외환은행 채권4,000억원 발행 2001.07. 한국내 최우수 수출입은행으로 선정 2001.11. 후순위 외환은행 채권 2,000억원 발행 2002.04. 2년 연속 한국내 최우수 수출입은행으로 선정조직도담당업무 지원본부장 신탁사업본부장담당업무 기업고객사업본부장 글로벌고객사업본부장담당업무 감사부담당업무 여신위원회 위원장 전략여신부, 여신감리실담당업무 개인고객사업본부장담당업무 여신본부장 (여신기획부, 여신심사부,여신관리부,여신정리실) 현대종합반, 하이닉스전담반담당업무 전략본부장 정보사업본부장담당업무 외환사업본부장임 원 진 소 개경영발전위원회 위원 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 보상위원회 위원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 보상위원회 위원`감사위원회 위원장 이사회운영위원회 위원 보상위원회 위원보상위원회 위원장 이사회운영위원회 위원감사위원회 위원 보상위원회 위원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장 이사회운영위원회 위원 보상위원회 위원경영발전위원회 위원 이사회운영위원회 위원 보상위원회 위원경영발전위원회 위원 보상위원회 위원사 외 이 사일반현황http://www.keb.co.kr홈페이지,인터넷뱅킹전국 1544-3000, 서울 (02)3709-8000대표전화번호(100-793)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가 181번지주소202-81-14695사업자등록번호이강원대표자Korea Exchange Bank당행영문명㈜한국외환은행상호1967년 창립한 이래 무역관련 산업을 지원하며 외국환 전문은행으로국외현지채용직원국내파견직원210177해외근무 직 원5,057소계333별정직원5,435합계2,164행원2,545책임자일반직원9비 상 임6상 임임원임직원수구 분335150284계221120국외313-49264국내계사무소출장소지점구분100%370,174,93118,509자본금 합계24.28%89,877,1074,494일반주주32.55% (14.18%) (18.37%)120,483,437 (52,483,487) (68,000,000)6,024 (2,624) (3,400)코메르쯔은행 (보통주) (우선주)43.17%159,814,3877,991계32.50% (10.89%) (21.61%)120,314,387 (40,314,387) (80,000,000)6,016 (2,016) (4,000)수출입은행 (보통주) (우선주)10.67%39,500,0001,975한국은행지분율주식수출자금주주구성(단위 : 억원)LOGO외환은행의 심볼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각종 서식이나 팜플렛, 광고매체를 통해눈에 익은 외환은행 심볼. 혹자는 바람개비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풍차라고 말하기도 하는 외환은행 심볼의 유래와 상징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외환은행의 최초 심볼은 1967년 1월 30일부터 사용되었으며 현재 심볼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계를향하여 발전,확대한다는 의미로 4개의 화살표가 사방으로 향하고, 가운데의 원은 돈을 표시함과 동시에 원만한 안정감을 상징하였다.4개의 화살표가 원을 가로질러 만나면 영문 'X'자의 모양을 하게 되는데 이는 'EXCHANGE'의'X'자를 표시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외환은행은 보다 참신하고 현실감있는 심볼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대 미술대학응용미술학과 조영제 교수팀의 1년여 작업끝에 1979년 1월 12일 현재의 심볼을 확정하게 되었고 그해 6월 새로운 심볼로 도안한 각종 간판,표지창,유니폼 등에 대한 작품발표회를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작업을 맡았던 조영제 교수팀은 합리적 사고위에 진취적이고 능동적 행동력을 가진 상하좌우로 놓인 강인한 구조는 우리은행의 신뢰성을, 또동적요소인 회전감은 능동적인 추진력을 상징하며 전체적으로는 세계로 나아가는 외환은행의 역동적인 이미지를담도록 스크류가 연상되게 하였다고 합니다.행화외환은행의 행화 장미, 장미는 언제부터 외환은행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잡았으며 또 어떤 이유로외환은행의 행화로 쓰이게 된 것일까요?장미가 처음으로 외환은행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 2대 은행장인 홍승희 행장 재임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8년 6월 28일에서 7월 15일까지 외환은행을 널리 알리고자 저축추진부에서 적금 명칭을 현상 공모한 결과 당시 저축과에서 근무하던 송영면행원이 공모한 '장미적금'이 '햇살적금','무지개적금'등의 다른 이름을 제치고 당선작으로 결정되었고, 이때부터 장미는 외환은행을 알리는데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 장미는 1979년 10월 C.I.P (Corporate Identity Program)매뉴얼 발간시 외환은행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도안되어 새로운 빛을 보게 됩니다.외환은행은 이후 행화 장미에 내포된 '친절,아름다움,기쁨,행운'의 이미지를 고객과 함께 느끼기 위해 고객사은장미대축제를 개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한편, 외환행화인 장미는 그동안 외환은행 상품이름 (장미적금 , 장미장학적금 , 장미종합통장 등) 은 물론 각종 행사(장미사은대잔치 , 장미음악회 , 장미사진전시회 등) 나 행내 조직의 이름 (장미방송 , 환은장미회 등) , 서식 (장미전표 등) , 유니폼 , 명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고 지난해 외환은행의 사보 이름을 결정하는데도 후보로 등장해 '장미쉼터'라는 새로운 사보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자 회 사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3-7 유화증권빌딩 11층(02) 3770-4100100 (100.0)외환선물㈜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3-5 한화증권빌딩 24층(02) 3772-6700300 (46.0)외황COMMERZ 투자신탁운용㈜서울시 중구 다동 70 한외빌딩 10 층(02) 3708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