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에반게리온의 신화에반게리온이란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일본 메카닉 물과는 차등을 가진 스토리와 캐릭터로 세간의 화제를 낳았던 문제작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아이디어의 차용을 의심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단지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매력으로 인해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기도 하다.에반게리온의 시작 장면에서 유대교 신비주의 경전 카발라에서 설명하는 세피로트 나무가 등장한다. 이것은 유대교의 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속성을 10가지로 나누어 도식화 한것으로서 유대교 신비주의의 전통에 따르면 세상은 지상계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원리인 케테르 로 회귀한다는 내용을 의미한다. 케테르라 함은 왕관으로서 영광을 상징한다. 세피로트는 그 도식화된 모습으로 볼때 구조적 단계에 이용할만하지만 에반게리온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세피로트의 인용을 성공 시킬 만큼의 구성미를 가지지는 못한 것 같다. 세피로트를 등장시킨 이유는 정확히 짚을수 없는데 이는 여러 가지 계획 단계에서 시도하다가 흐지부지 해진 부분인것같다.본론: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시도와 오류유대교 신비주의 경전의 인용은 신선하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을 지닌 유럽 및 미주의 문화가 인용하는 것은 중세시대 카톨릭이 편집한 성경으로서, 엄밀하게는 유럽인들에 의해 재정립된 경전이었다.하지만 에반게리온에서는 성경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은 세피로트 나무의 인용이라던지 사도의 이름에 인용되는 갖가지 천사의 이름 등을 통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다분히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난 참신한 선택인데 근본적인 구도에 있어서도 기독교가 초점을 두는 신약, 예수의 십자가형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아담으로 상징되는 창세기와 이를 다시 절멸시키고 다시 시작하는 신의 집행 과정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의 테마를 빌리고 있다.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도 기존의 신의 계명을 표방한 단선적인 선악 양분의 구도를 벗어나고 있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보여 지는 원죄의 개념을 예수의 죽음으로 속죄하는 신약의 내용을 중점으로 인용하지 않은 이유 인듯하다. 이 부분을 상당히 의미 있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근본적으로 동기를 얻은 부분이 신약이 아님을 상기한다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는 해석인데다가 나름의 확실한 판단을 보이지 않는 것은 구조적으로나 주제의식에서 박약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특히 사도의 근원과 아담의 관계에 대해 은근한 암시만을 할뿐 명확한 해명을 하지 않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극중의 긴장감을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치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도는 아담을 탈취하기 위해 끝없는 파괴를 일삼는데 이것은 요한 계시록에서 신의 명령을 받고 지상을 심판하는 천사들의 인용이다. 이러한 사도는 아담에게서 분화한 개체로 암시되는데 심판의 임무를 맡은 사도와 아담의 이러한 관계는 근거 없는 것으로 혼란을 야기한다. 이러한 내용을 이론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담의 연구를 통해 인류를 보완한다는 계획이다. 극중 역시 정확한 언급이 없이 단지 인간이 신으로 이르는 길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의 능력을 통해 신과 같은 반열에 오르려 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인간의 욕망의 반작용이 사도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기존의 선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판단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지나치게 순진한 도덕관으로 사도와 아담의 관계를 상징할 수 있게 만든 것만으로도 오류의 요소는 충분하다.극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드러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더욱 시작의 취지와는 멀어지고 있는데 이는 아담으로 알고 있었던 존재가 사도에 의해 릴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지는 순간이다. 릴리스는 아담의 첫 번째 처로서 쾌락을 구하여 아담을 배신하고 루시퍼의 처가 된 여자이다. 이는 기존의 아담과 사도의 관계의 불안성을 수정하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요한계시록에 음녀가 등장하여 신의 심판을 받는 장면을 사도와의 아담의 부족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사용한 듯하다. 하지만 이 릴리스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것이 결정적인 실수 인데 난데없이 예수의 속죄이미지를 상징하는 십자가의 차용은 기존의 아담과 사도, 릴리스와 사도의 관계 상징을 어처구니 없이 허문다. 인류의 죄악을 속죄하기위해 세상에 태어난 예수의 모티브를 사도와의 대립구도에 놓인 아담이자 릴리스에 적용시킨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는 기존의 선악의 시선에서 벗어나 이끌어나가던 극의 흐름에 있어 난대 없이 인류의 본분을 넘어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지 말자는 나이브한 발상과 맞물려 돌아가는 면까지 있어 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추상표현주의를 중심으로 본 미국 미술Ⅰ. 서론 ; 추상표현주의에 이르는 미술사적 과정내 나라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 그저 내 나라의 작가일 뿐이지만,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 단지 뉴욕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적인 작가로 취급받는다. 뉴욕의 한 유학생이 내뱉었다는 조금은 과장 섞인 이 말은 현재 뉴욕이 가지는 예술적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현재 뉴욕은 모든 분야를 막론한 세계의 중심지이지만, 특히 미술에 관한 한 그 비중과 영향력은 참으로 막대하다 하겠다. 바야흐로 바빌로니아, 아테네, 피렌체, 파리를 거쳐 이제는 뉴욕이 그 명성을 이어받은 듯 하다.뉴욕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미국 미술의 발흥은 거의 전적으로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 에 의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50년대에 본격화된 이 추상표현주의로 인해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현대 미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좋든 싫든 추상표현주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수 없다. 또한, 새천년에 걸맞는 새로운 예술적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한 시대를 풍미한 변혁의 풍경을 살펴보는 것도 적잖은 의의를 가질 것이다.이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미술이 어떻게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자취를 탐색해 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르네상스 이후의 화가들은 고대의 대가들에 필적하는 기술적 능력과 표현력을 쌓는 데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좀더 사실적인 인간을 그리고자 하였고,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실제 인간의 눈으로 보는 듯한 그림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된 인간의 모습은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 완벽에 가까운 구도 등으로 극한의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 이른바 신 앞의 인간 을 자처하며 스스로를 평가절하 했던 중세의 가치관을 극복하려는 인문주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었다.그러나 그러한 르 결혼한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상속녀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그녀는 이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중요한 후원자가 된다)은 자신의 뉴욕 미술관(1942년 설립)에서 초현실주의 미술을 정기적으로 전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1944년에 뉴욕 근대미술관에서는 《미국의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를 통해 미국의 새로운 화가들이 특별히 관심을 둔 것은 달리의 환상적인 진실주의보다는 미로, 마송, 마타 등의 자동기술적인 과정이었다.미로는 개인적으로 뉴욕에 머무른 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은 여러 전시회를 통해 미국 미술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형태를 사용하면서 리얼리즘과 기하추상의 엄격한 잣대에서 벗어났음을 은연중에 나타내었다. 이러한 특징은 1941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전시된 연작에 나타나는데, 22개의 과슈 그림은 어두운 색으로 되어 있어 전쟁의 고통을 상기시키며, 상형문자적인 기호 언어가 사용되기도 하고, 선의 짜임새가 그림의 올-오버(all-over)적인 양식을 암시하기도 하였다.마송은 1920년대 초부터 종이 표면 위를 가로지르는 서예적이고 자동기술적인 선 드로잉을 제작하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형태는 매우 거칠고 격렬하지만, 드로잉포인트 동판화인 (1941)에서처럼 그 결과가 보다 추상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자발적인 효과와 밀집된 형태, 그리고 선회하는 선과 어두운 색채를 보여주는 (1942)과 (1943)처럼, 추상화된 이미지와 시적인 제목을 가진 마송의 1940년대 그림은 이후 잭슨 폴록에게 특별한 영향을 주게 된다.마송이 평면성을 강조하였다면, 칠레 출신의 초현실주의자 마타는 (1944)와 같은 그림에서 회전하는 구조를 그려내어 구조의 어떤 부분은 앞으로 밀려나오고 다른 부분은 뒤로 후퇴하는 것같은 그림을 그렸다, 부분적으로 볼 때 뒤샹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타의 공간이 보여주는 모호함과 채찍 끝 믿음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미술과 이념,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예술이 소련에서처럼 정치적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혁명적 이상을 추구하고 동시에 예술적 조형실험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으로 연결되었다.바로 그러한 때에 취업진흥청(이하 WPA) 산하 연방예술사업(이하 FAP)의 책임자였던 홀거 카일이 상설적 기구로 예술국'(Department of Fine Arts)을 설립하겠다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자 적지 않은 파문이 일었고, 이는 WPA 예술 프로그램에 고용된 사람들뿐 아니라 지식인 일반에게 커다란 반향을 가져왔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다시 주(州) 관할권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지원금 역시 대폭 축소되었다.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비난이 차츰 확대되었으며, FAP의 대표적 작품이었던 뉴욕시의 벽화가 철거되었고, 예술가들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선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하나의 정치집단을 이루던 예술계는 분열되어 개인화되고 만다.1936년 이래로 뉴욕의 반(反)스탈린주의 좌파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집단이 점차 맑시즘을거부하고 탈정치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많은 예술가들이 비혁명적인 노선을 택하게 된 데에는 30년대 중반 이후 공산당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보여준 무능함에 대한 실망이 깔려있었다. 이는 전쟁의 발발로 급격하게 고양된 민족주의적 정서와 함께 앞으로 추상표현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다.한편, 이 시기는 아직 파리의 화상(畵商)이 미국 미술시장을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던 때였고, 미국 시장에서 파리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질적인 독점에 가까웠던 시기였다. 전쟁은 이러한 상황을 급속도로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쟁 중에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그 동안 유럽 문명의 중심지 그는 지금도 뉴욕 미술계에서 전설적인 추앙을 받고 있다.그가 추상표현주의의 진보에 미친 결정적 영향은 그리는 행위에 의해 이미지가 탄생되는 무한한 장(場)으로써 캔버스를 규정한 점이다.{) 장 뤽 다발, 홍승혜 옮김,『추상미술의 역사』(미진사, 1994) 100쪽 참고.그는 1947년부터 캔버스를 바닥에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표면 위에 검정, 파랑, 흰색 등의 물감을 뚝뚝 떨어뜨림으로써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는 캔버스 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물감을 흘리거나, 아예 통째로 들이부으면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그가 구사한 뿌리기(dripping)는 자동기술의 또 다른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의존했던 우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작업 방식에서 보인 무의식적 액션의 도입은 융(Jung)의 심리학적 이론과 결부시켜 설명되기도 한다.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비록 미술가 개인의 심상을 반영한 것이긴 하지만, 그 붓질 하나 하나가 미술가들의 내면세계와 곧바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폴록의 작품은 화폭 위의 모든 형태들이 그의 내면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자발적인 내면의 충동이 바로 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폴록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의미심장하다 하겠다.마룻바닥에 펼쳐놓은 캔버스는 그 주위를, 또는 그 위를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그림이 바로 내 분신과 같은 그런 착각을 준다. (……) 그렇게 내 분신인 그림에 몰두하는 동안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앞뒤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고친다거나 지워버리는 작업은 할 수도 없거니와, 그림이란 그 자체 내에 알 수 없는 생명이 있기에, 그것과의 긴밀한 접촉을 잃는 순간 결과는 엉망이 되어버리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주고받음은 자연스럽고 만족스런 조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 강은영,『소호에서 만나는 현대미술의 거장들』(문학과 지성사, 2000) 232쪽에서 인용.그의 작품이 보여준 기능에서 벗어로 받아들였는데, 데 쿠닝의 친구였던 프란츠 클라인은 1년만에 사실주의 회화에서 추상표현주의 그림으로 전환하였다. 그가 검은 물감으로 종이 위에 그린 작은 드로잉들은 다소 동양적인 특성을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그는 폭이 6피트가 넘는 대형 캔버스 위에 페인트 붓으로 강력한 효과를 주는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다. 그것들은 대담한 느낌을 주었으며 표의문자와 같은 형상을 함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폴록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내적 분출로서의 행위가 읽혀지기도 하였다.{) 앞의 책, 259쪽 참고.2 색면 추상회화(Color Field Abstraion)색면 추상 화가들은 캔버스 위의 제스처의 흔적보다는, 색채의 가치에 관심을 두었고, 선의 표현적인 충격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색채가 눈에 보이는 효과를 탐구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이전의 유럽 화가들의 그림과는 달리 구성에 있어서 분리된 부분들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대신에 전체 표면은 통일적이고 매끈하며 전체로서의 색면 을 나타낸다. 강렬한 색채의 통일된 색면과 커다란 캔버스는 관람자가 작품으로 완전히 둘러싸임을 의미한다. 화면 밖으로 확장되는 듯한 캔버스의 표면 효과와 강렬한 색채는 회화 자체의 물리적 성질을 초월하는 듯 보인다. 극단적인 추상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색면 추상은 어떠한 감정과 의미를 전달해준다.마크 로드코는 1940년대 중반 그림의 특징인 생물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단계를 벗어나, 화면을 평평하고 떠다니는 듯한 색띠로 분할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색띠는 그의 완숙기 작품들을 미리 보여주는데, 이렇게 (1947)와 같은 다양한 형태 의 그림에서는, 초기 형태의 둥근 윤곽이 조금씩 타원형이 되며, 그것과 분리된 형태는 떠다니는 듯 하고, 색채를 불투명하게 처리한 부분은 그림의 내부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미묘한 빛을 암시한다.색면 계열의 추상표현주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로드코는 회화를 통해 인류의 고통을 초월하고자 하였고,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종교적 신성함과 성스러움, 신비감이 969.
서론: 파졸리니 영화와 현대미술에서의 시점의 공통점(관객과 감독, 관람자와 화가)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는 관객을 인식하고 있다. 감독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살로, 소돔의 120일(SALO' o le 120 giornate di Sodoma,이태리,프랑스 합작, 1975년작) 의 갖가지 잔혹하고 엽색적인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번쯤은 의심해볼만한 일이다. 어쩌면 이 감독은 관객이라는 요소에 대해서는 까맣도록 잊은 채 자신만의 어두운 지옥도를 펼쳐 내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종류의 의심이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작품 마태복음(Vangelo secondo Matteo. 프랑스,이태리 합작1964년작,) 을 보자면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관찰하는 시선의 중요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도입부 마리아의 수태사실을 고지 받은 요셉과 마리아의 대면장면에서 마리아의 시점에서 본 요셉과 역시 마리아를 보고 있는 요셉의 시점이 교차되는 장면부터 십자가를 진 예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시점을 응용하는 장면까지 그의 영화에서 시점의 문제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시점 또는 화자라고도 할 수 있는 요소를 부각시킨다는 것은 당연히 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눈을 의식하고 있으며 이 눈을 자신의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적극적인 방식의 접근을 꾀하고 있음이다.이러한 모습은 영화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의 색면파에 해당하는 다양한 현대미술작품의 양상에서도 공통되는 점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에 이르러 원근법이 완성되고 인상주의에서 빛의 응용으로 색채의 사용마저 한계를 넘어선 상황에서 화가들의 고민은 이전 시대의 화가와는 차원이 다른 것 이었다. 성경과 그리스 신화속 인물들을 통해 성서적 교훈을 주려 했던 르네상스 이전의 화가들은 그 철학에 있어서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으나 작품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충분한 지지를 받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급변한 시대상황은 성서적 교훈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였고 이런 현실은 예전 궁정이나 교회, 또는 부유한 귀족의 비호를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화가들에게 있어 크나큰 시련일 수밖에 없었다. 화가들은 기존에 가졌던 자신과 미술자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형상화하려 했고 이를 통해 태어난 다양한 사조의 그림을 보는 관람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적대적이었다. 이런 화가의 현실은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그림의 미적 내용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점을 유도하려는 성격을 갖게 만든다. 그들은 화가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역할을 시도한 것이다.파졸리니는 이 영화에서 파시스트(Fascist)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따를 것을 의도하고 있다. 위에 열거된 다양한 현대미술역시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황폐해진 정신세계를 반영하여 반이성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미를 추구 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도를 적극적인 전시회와 주장을 통해 관람자에게 설득시키려하는 모습을 보인다.본론: 파졸리니의 시점과 의도의 개연성(인상주의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 McNeil Whistler:1834-1903)의 일화를 통한 비교 관찰)19세기 말 미국인 인상주의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와 당시의 위대한 비평가인 존 러스킨과 벌인 법정 공방은 이런 미술가의 관점의 변화가 대중의 관점과 깊은 분열이 있음을 보여주는 효시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가 자본주의의 맹아인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한 반발로 일본풍의 야경화를 야상곡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고 200기니를 매긴 일을 발단으로 하는데 이에 당대 유명한 비평가이자 라파엘 전파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녔던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이 나는 어느 어릿광대가 관객들에게 물감 한 병을 내던진 대가로 이백 기니를 요구했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라는 평을 썼고 이에 휘슬러는 러스킨을 고소한 것이다. 사건의 마무리는 조속히 이루어지고 휘슬러는반대심문에서 이틀간의 작업에 대한 대가 로 그처럼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했는지에 관해 준엄하게 추궁당했다. 이에 대해 휘슬러는 아닙니다. 나는 일생 동안 쌓은 지식의 대가로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사건에서 원고와 피고, 양쪽이 모두 실제로는 공통점이 많았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양쪽 모두 주변의 추악함과 천박함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연장자인 러스킨이 성실성에 호소함으로써 관람자들로 하여금 미에 대해 더 깊이 자각하게 만들려고 희망한 반면, 휘슬러는 예술적 감각만이 인생에서 진지하게 논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노력했던 이른바 심미주의제임스 애벗 백닐 휘슬러1872-5년경,캔버스에 유채,67.9x50.8cm,런던 테이트 갤러리운동의 역할을 일임하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파졸리니의 시점과 의도는 무엇이며 그 방식은 어떠할까? 영화의 시작 지옥의 입구(ANTINFERNO) 장에서부터 보여주는 정교한 화면 구도와 영상미는 파졸리니의 영상에 대한 과밀하기까지 한 집착을 엿 볼수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르네상스풍 고성에서 농락할 희생자들(VITTIME)을 잡아들이는 장면부터 이러한 화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의아스러울 정도인데 일련의 변태, 엽색, 잔혹 행위가 일어나는 고성의 내부는 뜻밖에도 르네상스시대 성모자의 그림으로부터 큐비즘(Cubism:입체주의)적 그림, 심지어는 아르누보적인 장식들로 가득하다. 일설에는 말년의 파졸리니가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진 결과로 이 영화에서의 파격을 설명하려 하지만 이는 그의 불의의 죽음을 염두해 놓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해석으로 오류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러한 허무하면서도 뒤틀린 그림이나 장식들은 극중 가해자의 역할을 하는 지배자(SINOGRI)와 이야기꾼들(NARRATRICI)의 성격을 형상화하는 역할로서 결국 이들 파시스트가 부르주아적 향락과 퇴폐에 물들어 허무하면서도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파졸리니는 이러한 지배자들의 성격을 극중 희생자들의 성격과 대비시키려 하는데 기벽의 장(GIRONE DELLE MANIE)에서 첫 번째로 희생되는 소녀의 죽음에서부터 희생자들은 속죄양의 이미지를 부여받게 된다. 아름다운 고성을 배경으로 장중한 대칭구도 속에 나약하게 버려지고 짓밟히는 희생자들은 그 모습자체에서부터 희생양인데다가, 극단적으로 예수가 십자가형 중에 외친 성경구절(주님, 왜 저희를 버리시나이까?)을 대사로 인용하기까지 하면서 희생양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감독의 시도가 올바른 방향에서 출발한 것일까? 휘슬러와 러스킨의 대결에서 주지하였지만 둘은 방식의 차이는 현격했으나 그 목적에 있어서는 순수성을 지켜내고 있다. 둘의 의견은 양쪽모두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이후 미술의 모습에서 변증법적 발전이랄 수 있는 후기인상주의라는 형태로 그 결실을 맺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파졸리니의 정치성향은 미적 감각을 퇴색시킬 정도로 악랄한 것이며 동시대인을 질리게 할 정도의 극단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가 살로, 소돔의 120일 에서 보여주는 미적 지향은 정도의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지 않을까? 이는 정치성향을 지닌 영화의 기본 기조를 생각할 때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관람객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거나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이 영화에서 표현방식의 거부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 대중의 속성이 천박하고 우둔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지나친 표현방식은 정당성이 없는데, 이러한 경우 표현방식이 과격하면 과격할수록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처음 감독이 의도한 정치적 신념은 더욱더 적대되는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