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사업의 장점과 단점나의 의견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새만금 사업의 문제점을 난 알 수가 있었다. 여러 가지로 오래전부터 문제시 되어왔었던 걸로 보여지는 새만금간척사업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나 홀로 한번 생각을 해보았다.아래 자료를 통해 보면은 새만금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농지는 28,300ha라고 한다. 아직 그 넓이가 얼마나 넓은지는 감이 오지 않지만, 1ha가 10000㎡라고 하니 그 넓이는 얼마나 큰지 대충은 알 수가 있다. 일단은 우선적으로 새만금 갯벌이 세계 5대 갯벌중의 하나라는 점에 난 집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바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데 일조한다고 배운 적 이 있던 갯벌,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새만금 갯벌이 단순히 농지와 식량확보로 밖에 이용된다는 점에서는 아직도 이해가 안간다.새만금을 없애는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 생각으로는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을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가장 값어치 없는 것으로 바꾸는 행동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무엇보다도 값비싼 금덩어리를 세상에서 가장 흔해빠진 돌맹이로 만들어 버리는 행동을 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요즘 뉴스에서 나오는 창고안에 쌓여가는 쌀을 들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서구화 되는 사람들의 입맛속에 우리 나라 농민들이 땀흘려 지어낸 쌀들이 팔리지 않고 그저 창고안에서 썩어들어간다는 것이다. 과거 새만금 간척사업을 할 때는 식량의 무기화 및 인구증가를 통한 식량의 부족현상을 예로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설명할 수 가 없는 것이다. 현재 있는 것도 해결못하는 데 새로운 것을 생산해 본들 처리할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쓸데 없이 돈만 들이고 실질적인 이득을 제대로 못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벌은 굉장히 소중하고 생명의 근원이 시작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벌 중에서도 특히 소중한 곳은 육지의 강이 흘러들어오는 하구에 위치한 뻘이라 한다. 이 강하구의 벌은 육지의 모든 영양염이 유입되는 곳이며, 이 영양염과 햇빛을 이용하여 바다의 최초의 생물은 광합성을 섭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바다를 살찌우는 곳이 바로 강하구의 벌이다. 강하구는 가장 중요한 바다의 자궁이요, 콩팥이요, 간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다로 가장 기초적인 생명이 탄생하기 전에 벌로부터 영양분을 얻기 때문에 이것을 자궁이라 볼 수 있고, 여러 가지 유해물질을 바다로 흘러가기 전에 걸러내기 때문에 이를 콩팥, 간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이렇게 중요한 벌을 단순한 판단미스로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를 되도록 이면 중단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다. 단순히 사람들의 근시안적인 이익만을 생각하지말고 동물들을 아끼고 멀리 바라볼 줄 아는 천리안적 사고방식을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이다.1) 새만금 사업의 경제성1장점새만금 사업은 식량안보를 위한 새로운 농지 확보 및 향후 서해안시대를 대비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필요한 사업이다. 새만금사업은 2012년 이후에 우리가 사용할 농지 28,300㏊와 담수호 11,800㏊의 수자원을 확보하여, 미래의 식량부족, 물부족 시대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농지감소와 식량자급도 하락, 기상이변, 국제 쌀 시장의 취약성, 그리고 통일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제반 여건을 감안 할 때 새로운 농지확보를 위한 간척 사업은 시급한 일이다. 새만금사업을 통하여 여의도 면적의 140배인 40,100㏊의 국토확장과 쌀 14만톤을 생산 할 수 있게 되며, 이 물량은 전북도민 200만명이 270일을 소비할 수 있는 막대한 양이다. 뿐만 아니라 방조제를 통해 교통거리 단축 등 육상교통 환경이 개선되고 인근 바다와 변산 국립공원이 어우러진 종합생태관광권이 형성되어 교통·관광 및 새로운 환경조성의 효과가 기대된다.2단점간척사업 찬성론 쪽에서 주장하는 식량안보와 국토확장의 명분은 지난 10여년 사이 퇴색한 것이 사실이다. 쌀은 소비가 급감하면서 오히려 남아도는 실정이고 농지 부족보다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농사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간척·매립사업인 새만금사업은 수산물 생산에 필수적인 생산기반인 바다와 갯벌을 없앰으로써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 본래의 식량안보를 왜곡하고 있다.무엇보다 최근 실패로 막을 내린 시화호 담수화 사업 등 무분별한 간척과 개발에 따른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남은 새만금 갯벌을 없애기 전에 지난 30년 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간척사업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먼저 해야 할 필요가 있다.2) 갯벌의 가치 평가1장점해양연구소는 1996년 12월에 [갯벌보전과 이용의 경제성평가]에서, 갯벌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수산물생산, 서식지기능, 정화기능 및 심미적 기능 등 갯벌의 공익적 기능까지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넣은 반면, 논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미곡생산 기능만을 계산함으로써 농지의 공익적 가치를 제외시킨 결과 갯벌이 논보다 3.3배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그러나 새만금환경영향공동조사 결과보고서(경제성분야)에서는 논의 홍수조절, 수자원함양, 토사유실방지, 수질정화, 대기정화, 휴식공간제공, 산소공급 및 대기냉각기능 등의 공익적 기능까지 합해서 계산한 결과 논이 오히려 갯벌보다 1.33배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단점국토의 3%(총 면적 약 2815제곱킬로미터)를 차지하던 갯벌은 지난 12년 사이에만 25%가 사라졌고, 세계 5대 갯벌인 새만금을 비롯해 간척 중인 곳까지 포함하면 절반 가까이가 줄게 된다. 학계 연구 결과 갯벌 생성에는 4500~2만년이 걸리지만 파괴하는 데는 20년이 채 안 걸린다고 한다. 갯벌이 사라지면 연안 해양생물의 90% 정도가 먹이사슬이 끊기고 서식지를 잃게 된다. 새만금을 비롯한 서해안 갯벌은 저어새 등 멸종위기 조류의 대규모 서식지이자 철새의 중간 기착지로 세계적인 보존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새만금 사업의 입안 당시에는 이런 갯벌의 가치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정부의 새만금 사업 재검토 과정에서도 간척을 전제로 한 담수호의 수질문제로 논의가 좁혀지는 바람에 갯벌보존의 당위성은 무시됐다.3) 수질문제1장점반대론자들은 새만금호의 수질문제를 시화호와 비교하면서 문제시하지만, 새만금호는 오염원의 분포, 유입하천의 수질, 호수의 물 순환 주기, 수질대책준비기간 등 제반 여건에서 시화호보다 크게 유리하여 수질관리가 가능하다. 또한 새만금호는 본격적인 용수사용까지는 아직 10년 이상의 기간이 남아 있고 수질보전대책을 마련하여 추진 중에 있어 새만금호가 제2의 시화호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한편 농업기반공사측은 새만금 담수호 수질개선을 위해 범 정부차원의 대책이 추진되고 금강호 희석수 도입, 인공습지 설치, 친환경적 농법 사업 등으로 얼마든지 환경보전과 개발의 조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화호 주변에는 반월. 안산공단 등 오염원이 밀집해 있지만 새만금 수질을 위협하는 축산폐수 등의 배출지는 전주, 김제, 익산 등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만경강과 동진강의 수질은 시화호보다 5배나 양호하며 담수호의 물 순환기간도 시화호(10개월)에 비해 4배나 빨라 썩을 염려가 없다.2단점지난해 12월 제출된 환경부의 새만금호 수질에 관한 1차 보고서의 결론은 농림부, 농업기반공사, 전라북도 등 새만금사업의 계속 추진을 요구하는 쪽이 내놓은 대책을 모두 동원해도 만경수역의 총인 농도는 목표수질인 4급수에 못 미치는 5급수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한편, 올해 3월에 발표한 2차 수질예측에서는 지난 보고서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전제한 대책들조차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한 것이 적지 않아, 실제 수질은 예측한 것보다 나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재원조달 방안도 문제다. 현재까지 확정된 4대강 대책에 필요한 하수처리시설 건설비 중 2005년까지 부족분은 2조5천억원에 이르는데, 4대강 식수원보다 농업용수인 새만금에 우선순위를 높여 투자가 이뤄질지는 의문이다.4) 향후 대책1장점공사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측은, 이미 방조제 공사가 60% 이상 진척된 상황에서 공사를 중단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사중단 시에는 이미 투입된 토석이 새로운 환경재앙을 초래하게 되며, 방조제를 원상태로 걷어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특히 이미 투자된 1조 1,385억여원, 연간 200억원에 이르는 유지관리비 등 막대한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이미 집행된 4,310억원의 보상비 회수문제가 있다.따라서 공사의 전면 중단보다는 공사 진행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환경단체가 제기한 새만금호의 수질오염 문제와 관련해 새만금 간척사업을 일부 축소해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즉 정부는 동진수역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을 전제로 만경수역 처리에 관해서는 방조제는 완공하되 시화호처럼 갑문을 통해 바닷물이 한시적으로 통하게 하는 '해수유통안', 만경수역 공사를 일시 유보하는 '유보 방안', 만경수역 관련 계획을 취소하는 '취소 방안' 등 3가지 시나리오를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이 분리개발 방안의 장점으로는 만경강 하구 생태계와 갯벌을 자연상태에 가깝게 보전할 수 있고 전주권의 추가규제가 불필요하게 되며 환경단체와 극한적 대립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그러나 새로 21km의 방조제를축조하는 데 4천억원의 비용이 들고 이미 지은 방조제를 활용할 것인지, 철거할 것인지가 숙제로 남는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1장 믿어서는 안 될 역사역사란 무엇인가역사란 한마디로 하자면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 이다. 오늘날 우리는 학교의 역사 교과서나 역사가들이 쓴 다양한 역사 서적을 통해 과거의 사건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역사책들은 옛날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들을 담고 있다. 게다가 그것을 쓴 사람은 대부분 전문 역사가이다. 그러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 라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야기 인 한 이야기하는 사람 의 세계관이나 이해 관계에 맞추어 적당히 꾸며 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간이 쓴 역사에 대한 의심과 회의는 이러한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묘청과 김부식고려시대 묘청이란 중은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중 하나이다. 우선 역사에 기록된 묘청은 역적이다. 그는 고려인종 13년에 서경에서 서경을 수도로 하고 나라이름을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묘청의 난 의 시작이다. 묘청은 도참설{) 도참설:음양 오행설과 풍수 지리설 등을 혼합하여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술법으로 중국 의 주나라가 망하고 춘추 전국 시대의 대혼란이 시작될 때 생겨나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 사 회가 혼란할 때 유행 하였다.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도참설로 왕의 고문이 되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개경의 지덕이 쇠함을 고하며 서경천도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북방의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칭제 북벌론을 펴기도 하였다.옛 역사가들은 묘청을 요사스런 중이나 간사한 역적으로 묘사하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비바람을 부린다고 하기도 하고, 대동강 바닥에 기름떡을 가라 앉혀놓고 기름이 수면에 번지자 용이 침을 흘린다고 하며 서경천도를 재촉하기도 하였다. 그의 허풍과 북벌론을 반대하는 유학자들이 서경천도를 반대하여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느닷없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고려정부에서는 김부식에게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고 김부식은 묘청의 난 을 제압함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역사가들은 묘청의 난을 단순한 반란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민족주의적 개혁운동이라 평하기도 한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 1대 사건 이란 논문을 통해 묘청의 난을 우리 역사 일 천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평한다. 단재는 묘청을 칭제 북벌론의 주창자임을 눈여겨 보았다. 당시 정지상, 백수한, 윤언이 등 조정의 칭제 북벌론자들은 묘청을 접근하게 하여 수도를 북벌에 유리한 서경으로 옮기려 하였다. 김부식 등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묘청을 비난하고 서경천도를 반대한 것도 이러한 사정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묘청의 헛된 망상으로 묘청뿐 아니라 조정의 북벌론자 모두를 파멸하게 만든 것이다. 김부식은 권력을 잡자마자 정지상과 백수한 등 북벌론 지도자들을 살해했고, 서경을 함락시킨 뒤에는 진압군의 실질적 대장이며 윤관장군의 아들인 윤언이 마저 귀양보낸다. 결국 묘청의 난으로 조정은 사대주의 유학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간다.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뒤 더욱 높은 벼슬에 오르고 고려 이전의 역사를 편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는 자신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 자칭할 정도로 문장을 뽐냈고 송나라 사신들과 한문으로 대화를 나눈 덕에 송에도 그의 가문이 알려지게 된다.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 는 제목과 서술체계 모두 사마천이 쓴 사기 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삼국사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엉성한 부분이 많다.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삼국사기 는 만주와 요동 지방에 걸쳐 있던 고구려의 영토를 반 넘게 한강 이남으로 옮겨 놓았다.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영토에 세웠던 발해의 역사는 아예 무시하였다. 백제의 위례성을 직산이라 하고 신라의 화랑을 혼동하였으며 당나라와 끝까지 혈전을 벌인 복신을 빠뜨리고 항복하여 당나라의 신하가 된 흑치상지를 특별히 기록해 놓았다. 여기서 김부식이 고대역사를 왜곡한 이유는 그의 사대주의 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로서 삼국사기 는 실제 있었던 역사 가 아니라 그러했으리라고 믿고 싶거나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랬던 역사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부식은 역사가 로서 비난받을 일을 한 것이라 하기 어렵다. 왕조 시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나 가치관에 따라 쓸 것은 쓰고 깎을 것은 깎아 가며 역사를 저술하였다. 우리가 삼국사기 에서 얻는 교훈은 인간이 쓴 역사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현대 역사가들에게도 유효하다. 현대 역사가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김부식의 서술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사료와 역사가역사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우선 인간 사회와 문명이 변화 발전해 가는 과정 그 자체 를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과거에 인간 사회에서 일어난 연속적인 사건 이다. 이것은 객관적 실재의 역사이다. 또 과거의 사건 또는 사회와 문명의 변화 과정에 대한 기록 이기도 하다. 이는 사회와 문명의 변화 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주관적 인식의 산물이다.객관적 실재의 역사와 주관적 인식의 표현의 역사는 서로 대립한다. 역사가들은 과거를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영원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사실 그대로의 역사 를 썼다고 자랑하면 그것은 자신의 무지와 오만을 드러내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역사는 시간이 지배하는 왕국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 현재 는 끊임없이 과거 로 편입되고 편입된 것은 망각으로 빠져든다. 역사에 똑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일은 없다. 비바람, 홍수, 지진등 자연작용이 존재했던 문명의 흔적을 지운다. 전쟁의 파괴행위는 망각을 더욱 부추긴다. 그래서 역사는 돌무덤이나 깨어진 그릇 등 단편적 사료로 수 천년 전의 문명을 추적해야한다. 역사가는 결코 과거 사회의 전모를 확인할 수 없다.역사가는 언제나 충분한 사료를 얻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료가 충분한 경우는 거의 없다. 가장 중요한 사료는 문자 기록이다. 하지만 대중이 문자를 읽고 쓰게 된 것은 근 200년도 안 되는 최근이다. 또 역사가들은 국가 기관이나 권력기관의 사료를 가장 중시한다. 하지만 권력층의 가장 중요한 사료 는 자기네의 관점에서 자기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결국 어떤 문서나 기록도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만 전하며 그가 희망하거나 상상했던 것을 사실인 양 보여준다. 따라서 역사가가 자기의 가치관을 배제한 채 사료에 입증할수 있는 사실만으로 역사를 쓴다면 그는 과거의 지배층이 후세 역사가가 써주기를 바랐던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모든 시대의 지배자들은 그시대의 역사 기록을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고 조작함으로 미래의 역사가를 지배하려고 하며 또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Ⅰ. 서론훈민정음은 그것을 만듦에 있어 백성에게 쉽고 편리한 문자생활을 가능케 한 공적이 있다. 또한 그 말이 과학적이며 음과 양으로 나뉜다는 살아있는 이치를 따르고 있다. 훈민정음의 해례 첫 부분만 살펴보아도 "천지의 원리는 하나의 음양 오행일 따름이며 모든 것은 음, 양을 버리고는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사람의 소리도 다 음양의 이치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사람이 살피지 못 했다." 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훈민정음이 이치에 따라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문자체계라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소리에는 다르거나 같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혹은 지방, 풍속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여 우리 국문에게, 우리의 지방에, 우리의 풍속에 맞는 글을 만들어 낸 것은 그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 연대와 창제자가 분명히 드러나는 글자이며 세종 25년에 창제되어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훈민정음. 지금부터 훈민정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음운적 사실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훈민정음의 삼분법① 중국의 이성체계와 훈민정음의 삼성체계훈민정음을 제작하기까지 음절에 관한 이론, 나아가 그 음운에 관한 이론은 처음에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이론이었다. 따라서 음절 삼분법의 이론도 중국의 음운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중국의 음운 이론 즉 성운학 이론은 운서를 편찬하기 위한 편운학 및 등운도를 만들기 위한 등운학으로 나누어진다. 편운학을 바탕으로 한 운서에서는 음절을 성모와 운모로 분석하여 성모에 해당하는 글자와 운모에 해당하는 글자 두 자로써 한자의 음가를 표시하였다. 예컨대 '東'의 음가를 '德紅切'과 같이 표시하였다. 이것을 반절법이라 불러왔다. 이와 같이 한 음절을 성과 운의 두 요소로 분석하는 방법을 음절 이분법이라 한다. 이분법을 바탕으로 하는 운서는 작시(作詩)의 압운(押韻)에 필요한 운을 찾는 데는 불편이 없었지만 한자음을 알려고 할 때, 즉 심음(審音)을 위해서는 여간 불等韻圖)인데, 이것은 반절로만 음절 짜임새를 분석한 것보다는 앞선 것이었다. 이 등운도에 따라 음절을 분석한 것을 기호화하면 'I-MVE/T'와 같이 표시할 수 있다. 'I'는 성모(聲母), 'M'은 개모(介母, 또는 韻頭), 'V'는 핵모(核母, 또는 韻腹), 'E'는 운미(韻尾), 'T'는 성조(聲調)를 나타낸다. 이 등운도에 한자음을 표시하는 방법은 반절법에 의한 것보다는 앞선 것이긴 하지만 끝내 음절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개모와 핵모를 합하여 중성을 설정하고, 운미의 일부는 중성으로 일부는 종성으로 분석함으로써,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음절을 삼분하여 초성과 종성의 동일성을 수립하는 이론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등운학 이론은 음절 삼분법에 거의 접근된 이론으로서 훈민정음을 제작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기문 교수(1963 : 24)에서는 우리의 음절삼분법 이론은, 중국의 음절 이분법 이론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았다.위에서 훈민정음 제작자들이 수립한 음절 삼분법 이론의 연원에 관해 살펴보았다. 중국의 성운학 이론은, 음절이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로 이분될 수 있으며 운모는 다시 운두(韻頭), 운복(韻腹), 운미(韻尾)로 분석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므로, 이 이론이 음절 삼분법 이론 형성에 가장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차자 표기법은, 음절 말음을 독립된 글자로 표기함으로써 한 음절에서 종성이 분리 가능함을 보여 주어 음절 삼분법 이론의 수립에 한 걸음 더 접근하게 되었다. 음절 삼분법 이론의 핵심은 초성과 종성의 동일성을 확립함으로써 종성을 표기하는 글자를 따로 만들지 않는 데 있다. 파스파 문자는 그 문자 제작에 관련된 이론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초성을 종성 표기에 사용함으로써 이 생각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음절 삼분법의 이론은 훈민정음 제작 당시에 확립되어 있던 중국 성운학에서의 음절 이분법 이론을 근간으로 하여 새로이 수립하 자음(字音)이 나타내는 음소(音素)를 조음(調音)할 때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고 하였다. 곧 설음(舌音:ㄴ), 순음(脣音:ㅁ), 후음(喉音:ㅇ)에서 불청불탁(不淸不濁)으로 기본문자를 삼은 것은 그 소리가 가장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치음(齒音)에서 ‘ㅅ’과 ‘ㅈ’은 비록 둘 다 전청(全淸)이지만 ‘ㅅ’이 ‘ㅈ’에 비하여 그 소리가 약하기 때문에 기본자로 삼았다. 다만 아음(牙音)에서 불청불탁(胱)을 기본문자로 삼지 않은 것은 그 소리가 후음(喉音)의 ‘ㅇ’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밖의 초성자(初聲字)들은 이들 기본자에 가획(加畵)하거나 또는 약간의 이체(異體)를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졌다. ㄱ → ㅋ(胱), ㄴ → ㄷ → ㅌ(ㄹ), ㅁ → ㅂ → ㅍ, ㅅ → ㅈ → ㅊ(壙), ㅇ → 咬 → ㅎ에서 ‘胱 ·ㄹ ·壙’ 3자는 이체를 형성한 경우이다. 그리하여 전탁(全濁) 계열의 각자병서(各自竝書) 6초성을 합해서 훈민정음의 23초성체계가 이루어졌다. 이 23초성체계는 동시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자모체계(子母體系)이기도 하다. 위의 23초성에서 후음(喉音) 전청(全淸) ‘咬’은 훈민정음 해례 용자례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이 초성이 《동국정운》의 한자음(漢字音) 표기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전탁계열의 초성 각자병서는 모두 전청을 병서하였고 다만 후음의 ‘肱’만이 차청(次淸)을 병서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제자해에서는 전청의 소리가 엉기면[凝則] 전탁이 되는데 유독 후음은 차청으로 전탁이 되게 한 것은 전청인 ‘咬’이 소리가 깊어서 엉기지 아니하므로 이보다 소리가 얕은 ‘ㅎ’으로써 전탁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들 각자병서는 주로 《동국정운》의 한자음 표기에 사용되었다. 이 훈민정음 초성체계에 대하여 훈민정음 해례 초성해 첫머리에 “정음초성은 곧 운서(韻書)의 자모이다(正音初聲卽韻書之字母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음의 초성체계가 중국 음운학(音韻學)의 자모체계와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무엇보다도 아음 ·설음 ·순음 ·치으로써 음을 이룬다(中聲者 居字韻之中 合初終而成音)”고 하였다. 중성의 세 기본자(基本字: · ㅡ ㅣ)는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의 모양을 본떴다고 한다. 그 밖의 중성자(中聲字)들은 이 기본자들의 합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ㅡ 與 ·同而口蹙 ·其形則 ·與一合而成… ㅡ 與 ·同而口張 其形則ㅣ與 ·合而成… ㅡ ㅣ ㅡ ㅣ 與 ㅡ·同而口蹙 其形則一與 ·合而成 ㅡ 與一同而口張 其形則 ·與ㅣ合而成…). 그리고 ‘ㅡ ㅣ ㅡ ㅣ ‘ㅣ’에서 일어난 ‘ ㅡ ㅣ ㅡ ㅣ ㅡ ’재출자(再出字)라 하였다( 始於天地 爲初出也 起於ㅣ而兼乎人爲再出也).〈종성〉훈민정음 본문에는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終聲復用初聲)”고 하였으나 해례 종성해에서는 종성을 사실상 8자 체계로 규정하였다(ㄱ胱ㄷㄴㅂㅁㅅㄹ八字可足用也). 그러므로 이 밖의 초성은 종성으로 쓸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 팔자가족용(八字可足用)의 규정을 설명하여 “如곶爲梨花 홅의갗爲狐皮 而ㅅ字可以通用 故只用ㅅ字”라 하였는데, 壙 ·ㅊ ·ㅈ ·ㅅ 등의 받침은 ‘ㅅ’으로 통용된다고 하였다. 종성 합용병서에 대하여 해례 합자해(合字解)에서 종성의 2자 ·3자 합용은 ‘뽀(土), 돌(釣), 때(酉時)’ 등에서 ‘ㄺ ·ㄳ ·힝’ 등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당시 국어 문헌에 보면 종성의 합용병서는, 사이시옷을 제외하면 ‘ㄳ ·모 ·ㄺ ·ㄻ ·ㄼ ·모’ 뿐이다.(2) 자음의 제자ㅁ네모진 모양ㅅ이의 뾰족한 모양ㅇ목구멍의 둥근 모양ㄱ설근(舌根)이 목구멍을 막는 모양ㄴ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① 자음의 제자에 있어 그 첫째 원리는 상형의 원리이다. 이는 발음기관을 모양을 본떠 서 만들었다는 것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해에 그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② 자음의 제자에 있어 그 두 번째 원리는 가획의 원리이다.ㄱ ---> ㅋㄴ ---> ㄷ ---> ㅌ (ㄷ ---> ㄹ)ㅁ ---> ㅂ ---> ㅍㅅ ---> ㅈ ---> ㅊㅇ ---> 여린 ㅎ ---> ㅎ(3) 모음의 제자상형의 원리 (천지인)가획의 원리ㆍ하늘의 둥근 모양ㆍ와 나머지글자를 결합하여 만든 것.오늘날은 받침에서만 쓰인다. (ㄺ,ㄻ,ㄼ,ㄾ,ㄵ,ㄶ,ㅄ)중세에는 초성에도 쓰였다. (ㅺ,ㅻ,ㅼ,ㅵ)- 방점 : 성조를 표시하는 사성점(4) 성조강세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는데, 강세란 성조와는 달리 단어의 어느 한 위치에서 높게 말하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성조는 국제음성자모(國際音聲字母)로는 고평조(高平調)[―], 저평조(低平調)[-], 고승조(高昇調)['], 저승조(低昇調)[,], 고강조(高降調)[`], 저강조(低降調)[`], 승강조(昇降調)[^], 강승조(降昇調)[~] 등의 기호로 표시된다.이러한 성조의 차이에 의해 의미를 변별(辨別)하는 언어를 성조언어(聲調言語)라 한다. 중국어는 이의 대표적인 예이며, 현대 베이징어는 보통 다음 4개의 성조(四聲)를 갖는 것으로 분석된다.1성[-ma]=母, 2성['ma]=麻, 3성[ ˘ma]=馬, 4성[`ma]=罵.15세기의 중세국어도 성조언어였다. 즉, 평성(平聲) ·거성(去聲) ·상성(上聲)의 3성이 있었으며, 평성은 점을 찍지 않았고, 거성과 상성은 글자의 왼편에 각각 1점과 2점을 찍어서 구별하였다. 이러한 성조의 대립은 16세기말에 사라졌으며, 현대에는 경상도방언과 함경도방언에서 볼 수 있다.① 평성활이 弓이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방점이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 음의 성격이 편안하고 온화하다 하여 봄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현재 글자에는 표시하지 않으나 소리에는 있다. 그밖에 한자음(漢字音)의 사성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상평음(上平音) ·하평음(下平音)을 두루 일컫는 말이며 그 소리는 모두 낮고 순평(順平)하다.② 상성돌이 石이 된다고 하여 글자의 우측에 이점이 찍힌 것으로 만물이 왕성해지며 온화하고 드높다고 하여 여름에 비유되었다. 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은 소리로써 높고 맹렬한 소리를 가리키는데, 거성(去聲)·입성(入聲)과 함께 측자(仄字)라 한다.③ 거성글자의 좌측에 하나의 방점이 찍힌 것으로 갈이 刀가 되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드높이고, 건장하며 만물의 성였다.
Ⅰ. 서론철학이란 무엇인가?이 질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봤지만 아직은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어느 선생님께서는 철학은 '앎과 삶'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식론적 정의로는 '앎'이요 윤리학적으로는 '삶'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에 아는 것에 대해 실천하고 행동하는 거라 말씀하셨다. 또 B.러셀은 철학이란 궁극적인 질문에 관해 대답해 볼려고 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거라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여기서 교과서적인 철학의 내용을 살펴보자.philosophy는 '지혜에 대한 사랑' 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philosophia에서 유래되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인 philosophein 이라는 단어는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 속에서 그리스의 현인 솔론을 언급할 때 처음 나왔다. 솔론은 지혜를 찾아서 여러 나라를 순방했는데 신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했다. BC 6세기 후반의 피타고라스 학파는 진리를 떠나 지혜를 간구하는 것이 애지라고 말했다. 애지의 의미가 확정된 것은 BC 5세기 후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행위가 애지라고 믿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것은 곧 선과 미였으며 이데아 혹은 에이도스로 표상되었다. 플라톤은 애지의 목표, 즉 철학의 목표가 생성·소멸·유전하는 다양한 존재로부터 이루어지는 감성적 세계를 뛰어넘어 불멸의 이데아를 통해 인간의 혼을 선하고 아름답게 하고 나아가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한 것도 진실우인 에이도스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철학은 아리스토텔리스에 의해서 개별과학으로도 발전되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 때에 와서 철학은 물리학,천문학,수사학,논리학,발물학,등등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많은 과목들이 이때 생겨나게 된 것이다. 후에는 시대별 계층별로 많은 사상과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즉 철학은여겨지고 있다. 저자가 죽은 뒤인 1551년 영역판이 간행되었으며(원래는 라틴어로 쓰여져 있다.) 제목 '유토피아'는 본시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무데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었으나 이 작품을 계기로 '이상향' 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최근에는 이 유토피아를 현실에 적용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어 흥미를 끌고 있다.인간의 육체는 기계와는 달리 스위치만 누르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는 휴식해야 한다. 휴식이 없는 분주한 기계적인 살은 결코 인간적이 삶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조금 더 벌기 위해 실속없이 바쁘게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게으름의 권리와 낮잠 잘 수 있는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이, 귀족이나 평민이나 구분없이 모든 사람들이 하루 4시간씩 노동한다면 특정의 유한 계급이 무의미해지고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재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상업적 작품만을 만들다 자신의 취향과 재능을 잃어버리는 예술가의 비극이 더 이상 없을 것이며 의사와 교사와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모두 자신의 직업을 창조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되며 이로서 인간의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기초하여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거 그것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키는 것을 목표료로한 현대 문명은 내재적인 위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 밖에는 없다. 문명전환운동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늘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어 실천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문명전환운동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여가의 시간에 따라 보이지 않게 시작 될 것이다. 이것은 뒤에 나올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조금 닮은 꼴을 보이고 있다.2) 마르크스의 공산주의① 마르크스독일의 공산주의자이자 혁명가이며 경제학자이다. 본래는 유대인이다. 1830 ~1835년 트리어김나지움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생산을 중심으로 서로 일정한 관계를 맺는데 한 시대의 생산관계는 그 시대의 생산력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여 생산력과 그에 따른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요인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제도, 법률, 사상, 종교, 문화등은 이 경제적 토대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라는 사적 유물론은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토대가 된다.그러나 오늘날의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은 문헌상의 죽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84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창시된 마르크스 주의를 20세기초 레닌이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하에 발전시킨 사상 및 이론의 체계와 실천운동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즉 공산당이 수립한 구소련, 동유럽, 중국대륙, 북한, 인도차이나반도 등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뜻으로 재해석 되고 있다.19세기 중엽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말을 엄밀한 구별 없이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공산주의'라고 하였다. 그는 1875년 '고타 강령 비판'에서 계급없는 공산주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산주의를 '보다 낮은 단계'와 '보다 높은 단계'의 2단계로 구별하였다. 제 1단계는 다직 초보적 단계로 여기서는 완전한 분배상의 평등은 실현될 수 없으며.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원칙을 세운다. 그리고 제 1단계는 완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서 계급적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가 필요다다고 한다. 레닌은 이 공산주의의 제 1단계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여 수립되는 '사회주의'정권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제정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의 제 2단계 '보다 높은 단계'는 생산력의 높은 발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인이 분업에 노예처럼 예속되는 상. 이들은 과거에 세력을 잃은 집단 또는 바라문교 세력권 밖에 있었다가 다시 편입된 부족집단 등이었다. 불가촉천민은 수공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시체를 치우는 일 같이 일반인이 하지 않는 천한 일이나 부정(不淨)한 일을 도맡아 하는 최하위계급이므로 가장 부정한 자로 취급받았으며 거주와 직업 선택에 철저한 차별을 받았다.이후, 바라문교의 계급차별을 부정하는 불교가 일어나고 또한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인도 북서부가 침입당하여 새로운 지배층이 등장하면서 카스트제도의 서열에 대해서도 잠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세력과 그리스인들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카스트는 인도에 뿌리내리게 된다. 기원전 300∼200년경에 집대성된 인도 최고(最古)의 법률서인 마누법전은 브라만(사제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도의 법질서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카스트제도를 합리화하는 흥미로운 신화가 전한다. 창조의 신 브라흐만이 사람을 창조할 때에 브라흐만의 입에서 브라만이 창조되었고, 그의 팔에서 크샤트리아가, 그의 대퇴부에서 바이샤가, 그의 발에서 수드라가 각각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각 카스트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이 신화는 카스트제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브라흐만이 네 카스트의 각각을 구별하여 창조하고 각 카스트에 고유한 사회적인 지위와 기능을 부여하여 사회질서의 유지를 꾀하였으므로 각 카스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며 다른 카스트간의 결혼은 신의 뜻에 따른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마누법전에서는 ‘타락해서 카스트를 오염시키는 자들이 태어나는 나라는 백성과 함께 금세 멸망한다’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다른 카스트간의 통혼을 금했다.마누법전에서뿐 아니라 바라문교를 중심으로 인도 여러 종파가 통합된 힌두교의 교리 속에서 카스트는 더욱 고착된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은 영원히 반복되는 삶과 죽음과 재생의 윤회 속에 살고 있으며 개인은 전생의 응보(應報)로서 자기의 카스트를 타고난다고 설명한다. 카스트의 질서는 영원한 것으로, 현세에서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의무를 엄격 하위카스트들끼리 연합하여 일종의 정치 세력이 되어 있다. 카스트가 정치 집단화 되면서 카스트제도는 일면 더욱 강화된 부분도 있다. 카스트의 정치집단화는 계급간 갈등을 심화시켜 나라야난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인도 동부 비하르 주에서는 정치세력화하려는 불가촉천민들과 이를 억압하려는 기득권층의 충돌로 유혈참사가 끊이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불가촉천민들이 잔혹행위를 당하거나 살해당했다. 참고로 비하르 주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면서도 보수적인 지방이다. 작년 4월에는 한 인권단체가 인도의 숨겨진 인종차별에 대해 지적하며 불가촉천민 1억 6천만의 인권을 위해 인도 정부와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불가촉천민들의 권리운동이 활발해질수록 기득권층은 이들에게 폭력, 강간, 살해로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힌두교가 여전히 인도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쉽게 철폐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법적으로는 모든 인도인들이 동등하더라도 기존 세대의 관념은, 브라만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브라만으로서의 권위의식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상층 카스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궁핍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기 힘든 불가촉천민은 어쩔 수 없이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도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카스트제도의 차별에 무신경하다가도 직업 선택과 결혼문제에 다다르면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다른 카스트와 음식을 같이 먹지 않고 결혼하지 않는 정도의 미미한 수준이며 개방화된 도시에서 사라져가는 구습이겠으나, '달리트'로서 압박과 설움을 받고 있는 불가촉천민들에게 평생의 멍에를 씌우는 카스트제도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엄연한 현실이다.사원에서 자라서 브라만 카스트로 분류된 보리수나무는 쓰러져도 브라만의 대우를 받고 전통의식에 따라 정중히 화장되는 반면, 조상 대대로 인분 수거를 도맡아온 불가촉천민들은 평생토록 묵묵히 인분을 머리에 이고 날라야 하는 카스트제도.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소보다, 사원의 나무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온 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