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이 아닌하나의 주먹으로서의 중국 공산당- 중국 공산당의 역사와 그 역사적 의미, 역할을 중심으로학 과 : 역사과연수명 : 1정 연수연수번호 : 번성 명 :- 목 차 -제1장 중국 공산당의 역사Ⅰ. 중국 공산당의 창당과 국공합작1.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 ·········································································12. 제1차 전국대표회의와 중국 공산당의 창당·················································13. 중국 국민당 개조와 제1차 국공합작·························································24. 중산함 사건과 국공합작의 균열·······························································35. 4·12 사건·························································································36. 소비에트 혁명 노선의 실패와 강서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선언························47. 국민당의 5차에 걸친 포위 공격······························································48. 대장정 ····························································································49. 서안사변 ·························································································510. 2차 국공합작 ··················································································511. 환태도와 그들의 혁명 운동이 가장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하고, 코민테른 중국 지부를 건설할 것을 생각하고 보이딘스키와 마링을 파견하여 중국 혁명 세력과 접촉하도록 하였다.먼저 1920년 봄에 파견된 보이딘스키는 이대교, 진독수를 만나 중국 공산당 조직을 위한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당시 진독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딘스키의 권유를 받은 진독수는 그해 8월에 공산당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게 되었다. 이 발기인대외에 참석한 사람은 7명의 지식인에 불과했지만 이것을 계기로 공산주의 조직이 중국 각지에 확대되었다.보이딘스키에 이어 1921년 3월 마링이 파견되었다. 코민테른에서도 크게 알려진 인물로서, 1921년 7월 마링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열려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제1회 전국대표대회는 러시아 공산당의 조직원칙을 모델로 해서 당운영 기구로서 위원회제 도입, 당내 규율 강화, 민중에 대한 선전조직 부분의 확립 등을 축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중앙집권 정당으로의 개조를 결정하였다.3. 중국 국민당 개조와 제1차 국공합작원세개 사후 손문은 약법체제의 회복을 내걸고 1917년 제1차 광동군정부, 1921년 제2차 광동군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오히려 1922년 6월 진형명의 반란으로 광동의 혁명근거지까지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던 손문은 러시아 혁명이후의 소련의 정치적 동향에 주목하였다. 그 당시의 착안점은 소련에서는 조직성과 계획성이 겸비한 당의 존재로 국가 개조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인식이었다.중국 공산당 창당과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레닌은 마링을 파견하여 손문을 접촉하도록 하였다. 당시 근거지를 상실한 손문은 광동에 혁명근거지를 부흥하기 위해서 그리고 장년의 꿈이었던 북벌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군사력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접근해 온 코민테른?소련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통감했다. 손문은 소련에 구체적으로 많은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소련도 그에 응했다. 그1930년 겨울, 국민당은 10만여 명의 병력으로 강서성 중앙해방구에 포위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자 이듬해 3월,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재차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패배하고 말았다. 제2차 공격은 장개석이 토비 총사령관이 되어 1931년에 7월에 시작했으나 이 역시 홍군이 승리하였다. 당시 홍군은 정규군 10만에 수십만 명의 민병을 거느린 대규모 규모로 성장한 상태였다. 이후 4차 공격도 무위로 끝나자 1933년 10월 장개석은 100만의 병력과 2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마침내 국민당 군대는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였고, 중국 공산당과 홍군은 어쩔 수 없이 중앙 해방구를 포기하고 서북방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즉,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한편 국민당의 5차에 걸친 포위 공격은 당시가 일본의 만주침략 등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진출이 가시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그래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보다 먼저 외침을 막아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장개석은 밖의 적보다 안의 적이 보다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공산당 공격을 우선시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만주 침략 이후 만주국을 건립하여 친일 정권을 세울 수 있었다. 반면 이러한 장개석의 태도는 훗날 서안 사변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8. 대장정·1934년 10월부터 1년에 걸친 대장장은 대장정은 장개석 군대와 지방 군벌군대의 집요한 추격과 공격을 받아가면서 중국 대륙의 11개 성을 통과하고 18개 산맥과 17개 큰 강을 건너 2만 5천리(1만 2천Km)를 답파한 끝에 선서성 북부지방에 도착했을 때, 강서성을 탈출할 당시 10만이었던 홍군의 주력부대는 겨우 7천만의 생존자만이 남아 있을 만큼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하여 또다시 새롭게 탄생할 수 있었다. 즉, 강서 소비에트에서 이룩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한 새로운 지도부와 새로운 정책 노선을 형성할 수 있었로 개명할 것과 국기를 오성홍기로 정할 것 등이 결정하였다. 또한 공산당의 실권자 모택동을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하여 건국의 준비를 마쳤다.마침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누각에서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로서 중국은 마르크스 주의를 기치로 내건 공산당이 끄는 국가가 성립된 것이다.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선포와 함께 사회주의 체제를 시작할 수 없었다. 사실 중화인민공화국이 인수한 중국의 경제는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파탄상태였다. 즉, 공업생산의 후진성, 주요 공업이 연안의 도시에 집중된 지역간 불균형, 극심한 인플레로 인한 정상적 경제활동의 정지 등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더구나 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은 대도시의 체계적인 행정 및 공업 운영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농촌 관련 활동에 익숙한 인물들이었다. 결국 중공은 조급한 사회주의로의 이행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와의 장기적인 공존에 의한 공업화 즉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기의 노선을 채택하였는데, 스스로를 ‘신민주주의적 변혁’이라 칭하였다.14. 한국전쟁과 사회주의 체제 강화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같은 공산 진영인 북한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의 참전이 이루어졌다. 전쟁 기간 동안 중국 공산당은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 전쟁의 참전은 중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먼저 국내정치에서 중국공산당의, 특히 당 주석 마오쩌둥의 지도권이 확고해졌다. 한국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저항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중국공산당은 전인민의 동원체제를 확립하면서 자신의 통치권의 기반을 쉽게 넓힐 수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마오쩌둥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전시 체제를 장악한 그는 이 전쟁이 끝나면서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한편 이 전쟁 기간에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중화민국 사이의 대결관계가 높아져 중국의 분단은 더욱 굳어졌다. 이것은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잔존세력을 억압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고, 해서는 안되며 평화적인 사회주의이행이란 말도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해 흐루시초프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주장하고 평화공존론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동시에 미국에는 온건하고 냉정한 정치지도자들이 많이 있어 동서협상의 가능성이 늘어만 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 사회주의 이행의 길은 반드시 폭력적일 필요는 없고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하다고 거듭 역설하였다. 1960년 11월 상순부터 12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81개국 공산당?노동당대표회의 때 중국은 유소기와 모택동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중국과 소련은 다시 한번 이념 문제로 인해 부딪혔지만 참가국 대표들이 중?소양국이 양보하기를 종용하여 일단락되는 듯 하였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면서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지위를 대신하게 되었다.19. 문화대혁명모택동식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실패와 베트남 전쟁의 본격화, 모택동 이후 자유주의적 조정 정책은 모택동의 인민 전쟁 태세를 역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모택동은 이러한 상황들이 소련의 수정주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굴복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문화대혁은 인민 전쟁 태세에 역행하고 사회주의에 대치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실권파에 대하여 모택동이 시작한 모택동식 사회주의 복귀이자, 모택동의 권력 투쟁이었다.모택동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젊은 홍위병들은 1966년 12월 중순, 유소기, 등소평의 죄상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비판운동을 중국 전역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이들은 모택동사상과 그의 혁명노선을 반대하고 반동적인 자본주의, 수정주의를 따르는 원흉이며 대중의 혁명노선을 폭력으로 탄압한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나선다.문화대혁명 기간 중 당과 국가의 지도자로서 모함 받은 이가 38명, 기타 중앙당의 정치, 군사의 지도적 간부, 민주당파의 책임자, 각계의 저명인사로서 모함 받은 이가 382명, 잔인한 박해와 압박을 받은 간부와 군중은 70여만 명, 박해를 받아 죽은 이가 3만 4천 명에 이른다. 결국 억울하게 조작되고 잘못하였다.
-『궁정론』 제 1편과 제3편을 중심으로이상적인 궁정 신하와궁정 숙녀를 이야기 하다학 과 : 역사과연수명 : 1정 연수연수번호 : 번성 명 :Ⅰ. 궁정론 - 제1편[완벽한 궁정 신하의 모습을 논하다]1. 1504년부터 1516년까지 12년 동안 우르비노의 통치자 두 명을 섬겼던 전형적인 궁정 신하이자 외교관이었던 발데사르 카스틸로오네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벽한 궁정 신하의 모습을 논함.2. 『궁정론』 제1편은 공작부인과 에밀리아 여사를 중심으로 여러 참석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궁정 신하가 갖추어야 할 지적·도덕적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로도비코 다 카노사 백작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됨.[훌륭한 가문 출신에 대해서 논함]1. 로도비코 백작은 훌륭한 궁정 신가가 되려면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가문을 자랑해야한다고 함.가. 귀족 가문은 선과 악을 분명하고 확연히 구분해주는 역할을 함.나. 귀족 가문 출신들은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이나 찬양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최대한 훌륭하게 행동고자 함.다. 좋은 태상과 함께 보살핌과 노력을 통해서 성품을 갈고닦을 필요가 있음.2. 가스파레 팔라비치노의 반박가. 고귀한 태생은 재능이나 힘, 기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나. 신분이 미천하면 완벽함의 정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음.3. 로도비코 백작의 재반박가. 좋은 출신자들은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냄. 즉, 귀족 출신은 고귀한 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즉각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음.나. 첫인상이 아주 중요하며, 훌륭한 궁정신하라는 지위와 명성을 얻으려면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주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함.4. 완벽한 충성심과 불굴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 궁정 신하에게 필요함가. 궁정 신하에게 가장 알맞은 직업은 군인임.나. 군인들은 자신의 명성을 지키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함다. 군사 기술에 능한 궁정 신하가 더욱 더 많은 칭찬을 받음.라. 완벽한 충성심과 불굴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 궁정 신하에게 필요함.마. 훌륭한 궁정 신하는 적 앞에서는 사납고 난폭하며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만, 그 외의 장소에서는 친절하고 겸손하며 과묵한 자세로 무신 일에나 열심히 참여해야 함.[자기 미화 정도에 대해서 논함]1. 다른 사람이 보고 있지 않더라고 비난을 들을 만한 일이라면 아예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함.2. 아무리 덕망이 있어도 겸손하게 자기를 미화하는 것은 완전히 용남이 되지 않음.3. 스스로를 칭송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질투나 짜증을 유발하지 않도록 경계를 넘지 않고 분별력 있게 행동해야 함.4. 칭찬을 즐기되 자기 미화를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음.[궁정 신하로서 마땅한 외양에 대해서 논함]1. 궁정 신하는 남자다우면서 품위 있는 모습을 가져야 하며, 반대로 여성스럽고 나약한 외모는 지양해야 함.2. 균형이 잘 잡히고 좋은 체격과 강인한 체력을 가져야 하며, 몸이 민첩하고 유연해야 함.3. 궁정 신하로서의 첫 번째 의무는 땅 위에서 혹은 말을 타고 사용하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워서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함.4. 손해배상과 논쟁을 중재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항상 용기를 보여주되 신중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함.5. 궁중 신하는 말과 승마에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파악하고 있으며 승마에서도 아주 뛰어나고 다재다능해야 함.6. 올바른 궁중 신하라면 때때로 차분하고 평안한 놀이에도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되 질시에 찬 시선을 피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함.7. 항상 통찰력과 분별력을 잃지 말아야 하며, 모든 행동과 말에 고상함이 들어있어야 함.[품격을 습득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함]1. 어렸을 때부터 최고의 교사에게 기본 원리를 배워야 함.2. 훌륭한 학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 활동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승을 따라 하거나 가능하면 그들의 기술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함.3. 그러다가 다른 사람을 관찰하면서 배운 것이 향상되었다는 판단이 들면 다른 스승을 찾아서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함.4. 품격이 습득 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어야 함.가. 베르나르도 빕비에나의 반박 - 자연스러운 과정을 보여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함나. 로도비코 백작의 변론 - 태연함, 자연스러움은 허세와 완전히 반대이며, 품위의 진정한 원천임. 즉, 모든 행동에서 그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종종 훨씬 가치 있는 평가를 이끌어내기도 함.[궁정 신하의 말하기와 글쓰기의 대해서 논함]1. 완벽한 궁정 신하는 글 잘 쓰는 법과 연설을 잘하는 법을 모두 알아야 함.2. 이상적인 궁중 신하는 글을 잘 쓰기 위해서 특히 지식을 갖추어야 함.3. 말하거나 쓰는 내용을 논리적인 순서대로 정리한 다음에 말로 잘 표현하는 능력이 필요함.4. 말은 상황에 적당하고 신중하게 선택돼야 하며 분명하고 언어 규칙에 잘 맞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대중과 소통되어야 함.5. 연설할 때에는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발음이 또렷한 격조 높은 목소리로 말야해 하며 적절한 예절과 몸짓이 동반되어야 함.6.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좋은 어법을 정립해야 함.[궁정 신하의 예술적 자질에 대해서 논함]1. 궁정 신하는 음악을 즐기고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악보를 이해하고 읽을 수 있어야 함.2. 음악은 귀에 아름다운 선율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버릇과 고결한 성품을 키워주는 힘이 있으며, 운동이 신체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것처럼 정신이 행복한 감정을 잘 받아들이게 함.3. 아물러 그림을 그리는 것과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야 함.4. 궁정 신하는 가치 있고 유익한 예술이며 지금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에 높이 평가되었던 그림에도 박식한 지식을 가져야 함.[그 외에 필요한 자질을 논함]1. 궁정 신하는 신의를 알고 청렴결백해야 함.2. 궁정 신하는 항상 선량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인 철학자가 되어야 함.3. 궁정 신하는 인문학에서 보통 수준을 넘는 학자이어야 함.4. 또한 시에 아주 정통해야 하며 변론가와 역사학자에 버금가야 함.5. 자국 언어로 운문과 산문을 모두 능숙하게 쓸 수 있어야 함.6. 마음속에 하나의 교훈은 필히 간직하고 있어야 함.7. 훌륭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야 함.8. 자신이 듣는 칭찬이 마땅하다고 할지라도 너무 공개하거나 동의하거나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면 안 됨.9. 궁정 신하는 서로 도움을 주는 두 능력, 즉, 문학과 군사기술을 모두 갖추어야 함.Ⅱ. 궁정론-제3권[이상적인 궁정 숙녀의 품격과 자질을 논하다]1. 마그니피코, 체사레, 가스파레 등을 중심으로 완벽한 여성상, 아주 위대한 통치자라도 인정할 만큼 완벽한 궁정 숙녀의 모습을 논함.2. 완벽한 궁정 신하를 논함에 있어 특유의 미덕으로 궁정을 장식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여성을 거론하지 않으면 완벽한 결론을 낼 수 없음.[궁정 숙녀의 일반적 자질에 대해서 논함]1. 여성은 부드럽고 섬세한 유연성을 지녀야 하며, 모든 동작에서 남성과 확연히 구분되는 여성다운 사랑스러움이 필요함.2. 궁정 숙녀는 궁정 신하와 마찬가지로 신중함과 아량과 확고부동함 등의 미덕이 필요함.3. 모든 여성들에게 필요한 자질인 선함과 분별력은 물론이고 기혼자인 경우 자녀와 어머니로서의 미덕을 갖추어야 함.4. 궁정 숙녀에게는 상냥한 붙임성이 필요함. 단, 여기에는 순수함과 신중함, 인자함이 더해진 고상된 태도도 필요함.5. 다른 사람의 부도덕함을 흉보거나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것을 자제해야 함.6. 궁정 숙녀들은 상대방의 지위에 맞게 다양한 주제로 대화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넓혀야 함.7. 여성에게 적합한 오락거리가 있어도 품격과 점잖은 매력을 유지해야 함.8. 항상 적절하게 몸치장을 잘해야 하며 너무 호화스럽거나 천박하게 보이는 옷은 피해야 함.[궁정 숙녀의 지식과 대화법 등을 논함]1. 궁정 숙녀도 올바른 궁정 신하에 필요한 지식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함.2. 문학과 미술에 지식이 있어야 하고 춤을 추고 놀이를 하는 법을 알아야 하며 이 때 에는 겸손함과 좋은 인상을 주도록 노력해야 함.[여성의 우월함 혹은 남성과의 동등함을 논함]1. 남성과 여성은 모두 인간으로 본질적은 측면은 같음.2. 남성에 비해 여성의 절제력이 뛰어남.3. 남성에 비해 겁이 많고 용기가 부족하다는 점은 여성의 보고 듣는 것을 보다 빨리 판단하는 예민함과 민첩한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4. 역사적으로도 남성 못지않은 수많은 업적을 남긴 여성들이 많음.5. 많은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정숙하게 살아감. 여성들을 제어하는 굴레는 오직 여성들 자신들의 절제뿐 임.6. 남성에 비해 매우 허약하고 여린 여성들 중에서 가혹한 공격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거나, 정절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여성들이 많음.7. 가스파레가 제기한 ‘실수한 여성’보다, 끊임없는 유혹에는 단호한 자세를 보이는 여성들의 더 많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함.
덩샤오핑 평전? 과 목 : 중화인민공화국사? 학 번 : 9806519? 성 명 : 곽 광 민? 제출일자 : 2004. 12. 07.담 당 교 수 : 신 태 갑 교수님동 아 대 학 교“살았을 때 비판 받지 않은 사람은 죽은 뒤에 반드시 비판을 받기 마련이다.”이 말은 마우쩌둥이 노년에 덩샤오핑에게 한 말이지만, 일생에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큰 업적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한말이 아니었다. 즉, 그는 자신이 행한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자신에 의해 인민공화국이 설립된 것과 문화대혁명이라는 두 가지 업적 만큼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칭송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중국인의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로 남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중화민국 설립이후의 그의 모습은 인민 해방의 지도자가 아니라 독재자로, 순수 공산주의의 수호자가 아닌 문화대혁명이라는 폭력적 수단으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그에 반해 덩샤오핑은 마우쩌둥처럼 강력한 1인자로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아니 오히려 실각과 복귀를 거듭해야 했던 여러 고급 간부 중의 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별명인 ‘오뚜기’처럼 덩샤오핑은 그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고 결국 중국 최고 지도자로 남은 인물이다. 더구나 그는 마오쩌둥처럼 죽어서 비판 받는 인물이 아니라, 죽어서도 칭송 받은 영원한 중국의 아무지로 남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그렇다면 덩샤오핑의 어떤 점으로 인해 사랑받은 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을까? 15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키에 보통 60킬로그램이 체 안되었고, 언제나 담배를 물고 살았던 덩샤오핑은 어떻게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그것의 대답은 벤자민의 저서 『덩샤오핑 평전』에서 찾을 수 있다. 벤자민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 관한 연국와 저술을 활발히 하는 사람으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그녀는 ‘덩샤오핑을 대단히 존경’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덩샤오핑 평전』은 이전의 덩샤오핑에 관한 저서와는 다르다.벤자민은 그동안 덩샤오핑과 관련한 저서들이 대부분 덩샤오핑이라는 한 영웅에 주목하여 그의 업적을 중심으로 하였던 데 비하여, 벤자민은 덩샤오핑이라는 한 사람에 주목하고 있다. 벤자민은 덩샤오핑의 인간적인 면과 한계점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그의 전생애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벤자민은 덩샤오핑의 인화적인 성격과 끈기 있는 인내심을 그의 가장 큰 미덕으로 보고 있다. 사실 여러 번의 죽을 고비와 정치적 타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 치고 그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덩샤오핑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자질이나 지도력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끈기 때문이었다.이런 그의 전략은 특히 문화대혁명 기에 그 빛을 보이게 되는 데, 모든 정치적 예우를 박탈당하고 유소기, 팽덕회 등 최고 간부가 숙청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장문의 긴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계속 보내어 환심을 사는 것이나, 복귀하고서도 마오쩌둥의 후계자들을 서서히 눌러가는 과정 등은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이 왜 마지막에 웃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 잘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물론 덩샤오핑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덩사오핑의 생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벤자민도 저서에서 밝히고 있는 그래야지만 가장 정확하고 포관적인 귀납적 사실을 통해 창의적인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1904년 에 태어난 덩샤오핑은, 1919년 5.4운동의 물결이 중국을 강타하자 이듬해 16세인 등은 당시청년들 사이에 끼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프랑스로 떠 난 중국의 유학생은 줄잡아 1천5백 여명. 등은 유학기간동안 민주제도와 선거, 의회, 사회주의 유물사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됐고 1921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결성되자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의 유럽지부에 가입한다.1931년 장정에 참가한 등은 마우쩌둥과 국제 파의 전략비판의 와 중에서 모의 측근이란 음모에 연루돼 당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는다. 이것이 1933년에 발생한 그의 첫 번째 실각이다. 덩샤오핑은 당시 상황을『당 지도자인 왕명이 내가 마우쩌둥 측근에 섰다고 나를 걷어찼다』고 술회한 바 있다.1949년 중국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45세의 나이 에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고 1952년에는 북경으로 전근돼 정치일생이 시작된다. 곧바로 정치협상회의 부주석과 국무원 재정부장, 국가계획위원회위원이란 직책을 맡은 그는 1954년 비로소 국무원 부총리에 오른다.1955년 3월 개최된 당대표대회에서는 정부보고자로써 정부를 이끌었으며 이듬해에는 대약진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부 수립 후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던 그는 마우쩌둥조차『덩샤오핑과 대등한 위치에서 토론하기란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힘들다』고 할 만큼 역량을 발휘한다. 덩샤오핑의 주도로 경제건설에 열을 올리던 시기에 이념과 사상으로 중국을 건국한 혁명가들은 문화대혁명이란 대역전극을 펼친다. 강청 등 4인방은 마오쩌둥을 배경 아래 실용주의자들에 대한 소탕을 벌였고 당시 주석인 유소기와 등은 숙청된다. 이때 유주석은 당직을 박탈당했으며 등은 장남이 다치는 등 큰 홍역을 치르고 유배 길에 오른다. 덩샤오핑의 두 번째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덩샤오핑은 1973년 8월 당대표대회에서 화려하게 복귀한 얼마 후 정치국 원으로 발탁되었고 2년 후에는 당 부주석과 인민군 총 참모장으로 임표 이후 가장 핵심인물 이 된다. 그는 복권되자마자 문화혁명으로 유배된 당 간부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공업생산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창하던 그는 주은래가 1976년 4년 간 앓아온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해 4월 또다시 실각한다. 이른바 세 번째 야인행이다. 덩샤오핑은 그를 비판하는 세력에 대해 ‘나는 늙었다. 귀가 어두워서 너희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며 버텼으나 주 추모제 시위를 배후 조정했다는 죄목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해 9월 마우쩌둥이 긴 병상생활을 마감하자마자 화국봉은 4인방을 모두 체포해 1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을 마감한다. 덩샤오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국봉에게 서한을 띄워 복권을 요청,1977년 4월 다시 정계에 등장한다.82년에는 新憲法인 특구법을 마련 경제개방의 물꼬를 튼데 이어 9 월에는 급진 개혁파인 호요방을 당 총서기에 임명, 중국의 면모를 일신시키기에 이른다. 이 때부터 덩샤오핑은 80세 은퇴론을 강조하며 직접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려왔으며 다만 중국의 장래를 바로잡아준다는 명목으로 당 중앙 고문위를 설치하여 여기에 몸담아왔다. 덩샤오핑은 당시에 당 중앙위 부주석과 정치협상회의, 당중앙군사위주석직을 갖고 있었으나 이것도 83년 국가 군사위를 만든 후 주석자리만을 남기고 모두 후계자들에게 넘겨주었다. 급기야 지난 89년에는 군사위주임 직책도 강택민에게 인계, 평당원으로 중국을 움직이는 대 원로로서 남는다.덩샤오핑은 92년 불편한 쇠약한 몸을 이끌고 상해와 심천에 나타나 개혁 개방만이 중국을 살리는 길이라고 역설 엄청난 외국기업을 중국으로 불러들이는 계기를 만 들었다.몸이 불편해지면서 덩샤오핑의 모습은 94년 구정인 춘절 때 상해에 나타난 이후 자취를 감췄고 그 해 10월1일 국경절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사진만 공개됐었다. 이에 따라 95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수십 차례의 사망설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현대 중국의 새로운 역사를 연 그는, 정치적으로는 세 번 채이고 세 번 올라섰다고 한 그의 말처럼 험난한 역정을 거친 풍운아로 만 92년의 생을 마감했다.
역사를 위한 변명9806519곽 광민아날학파 마르끄 블로끄 글1. 아날학파아날이란 1929년 뤼시앙 페브르와 마르끄 블로끄에 의해서 창간된 역사학 잡지 에서 나온 말이다. 아날 학파란 바로 이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역사가들이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학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군의 학자들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지적인 교류를 행하는 만남의 장소를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권위주의적인 스스로의 가르침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는 폐쇄적인 집단을 의미하는가? 정의하기에 따라서 아날은 하나의 학파일 수도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프랑스의 아날 학파는 처음부터 랑케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그대로 추종하고 모방하는 프랑스 대학의 전통과 소르본느 학파의 타파를 표방하고 나섰다.특히 문헌해독을 통해 주로 사건과 개인 중심의 편협한 정치사나 ‘사건사(histoire evenementielle)'의 연구로 일관하는 파리대학 문학부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역사‘라는 가치를 높이 들고 도전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20세기 역사연구에 이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역사가의 집단도 드물게끔 되었다.1960년대 중엽에 들어서면 아날학파에도 새로운 연구경향이 나타난다. 종래의 브로델의 비인격적 구조들 -지리적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들- 의 지배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심성’을 통한 연구로의 확대현상이 나타났다. 그 선두주자가 다름 아닌 보벨이었다. 그는 1973년에 출간한 를 통해 ‘심성사’연구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태도의 장기 지속적인 변화를 계량화된 접근으로 추적하여 계열사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하였다. 그는 죽음에 대한 태도 같은 무의식적인 집단심성의 변화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성과 경제 현실,사회 구조,인구 학적 토대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구두로 한 유언장과 비밀의 유언장들을 토대로 프로방스의 종교적 경향을 네시기로 구분하고,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제시 하였다.제1시기는 1680-1 바로크적 경건으로의 회귀시기, 1760년 이후의 제4시기는 도처에서 유언장이 세속화되고 미사의 요구가 감소되며 장례식이 검소화 되는 등 장기 지속적인 집단 심성에 대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변화는 1790년에 갈수록 더욱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벨이 연구의 결론으로 내놓은 것은 유언장의 세속화와 종교적 초연함은 프랑스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에 선행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 이었다.1970년대 세계 역사학계의 관심은 프랑스의 아날 학파에 집중되었다. 이 학파를 해부하는 작업이 프랑스 안팎에서 계속되었으며, 70년대 말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도 이 대열에 참여하였다. 아날 학파는 전통적인 독일 사학을 대체하는 으로 인식되었으며, 사회사, 전체사, 심성사 등 새로운 언어들이 이 학파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문화적 고립주의는 그 신비스러움을 더해주었다.아날학파가 내세우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역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이를 시간 계열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학문’이 곧 역사학이라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학의 연구대상은 고립된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 즉 조직된 집단이나 사회내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날학파가 관심을 쏟는 것은 바로 인간이 조직한 집단이나 사회이다. 인간이 조직한 집단이나 사회를 바로 ’시간계열 속에서‘ 파악하려는 데에 현재적인 것을 취급하는 사회과학과는 다른 역사학의 특징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회적 인간을 시간 계열 속에서 파악하기는 하되 동시에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소위 종합적인 ’전체사‘의 지향이다.2. 마르끄 블로끄역사가로 태어난 반, 블로끄는 출생 환경 및 부친의 지적 영향은 더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블로끄는 1886년 리용에서 태어났다. 한 지식인의 운명을 그의 인종적 측면만 가지고 추적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전개되었던 반유태주의 운동이 이 유태계 역사가에자원한 것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블로끄는 역사란 변화의 과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먼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문제에 몰두하였으며, 과학의 기능, 즉 예견이라는 문제로서 그의 을 끝맺을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역사란 과거를 연구하는 죽은 학문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실증주의적인 학문임을 천명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블로끄가 전편을 통해 증명하려했던 문제는 역사도 과학이라는 점이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블로끄가 취한 방법은 철학적이거나 논증적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 역사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소박하게, 즉 실제 역사가의 작업장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새로운 역사를 변호하려 하였다.역사는 우선 과학적이 되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로끄가 역사가 과학인가 아니면 예술인가 하는 이분법적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는 과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었다. 왜냐하면 역사가는 기하학적 정신을 가지고 과거를 조립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바로 인간이었다. 따라서, 유기체 내부의 복잡한 관계를 전체성속에서 파악하기위해서는 섬세한 정신이 또한 필요하였던 것이다.그 밖에도 블로끄는 설명과 이해, 이해와 비판,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성 등 역사 인식론상의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스스로도 이러한 문제는 철학자들이 체계적으로 규명할 과제라고 있듯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페브르에 비해 블로끄는 전통적 역사학과 뒤르켐의 사회학주의에 대해서 덜 적대적이었다. 또 변명과 전투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성격의 차이, 취향의 차이 또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새로운 역사를 풍부하게 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 역사를 위한 변명.먼저 블로끄는 역사에 대해 시간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한 학문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블록은 역사가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에 다다르지 않는다면, 기껏해야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 올 것인가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인문학의 부분으로써 역사학이라는 것은 인간들과 관련하여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그런데 역사가가 인간들을 생각할 때, 과연 현재에 존재하는 순간순간의 인간 그 자체만을 연구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전체 또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 일어났던 특별한 사건을 가지고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즉, 역사를 파악하려 할 때 지금 뿐만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현상을 만든 요인들을 찾아야만 그 현상 연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가 있기까지의 여러 사건들을 시기를 가려서 그 사건들의 영향들을 밝혀 준다면 그것은 역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이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변화하는 시간 속을 거쳐서 지금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역사학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건이나 용어의 기원을 숭배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누군가 태어났을 때의 모습만을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 현재만을 연구해서 현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 모습만을 보는 것이다.그러면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까? 우리가 접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자료들은 모두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 대해서 직접적인 연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간접적인 연구를 할 때 자료들은 그대로 있다고 하더라도 즉, 과거의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과거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진보시킬 수 있다.과거의 사실들을 조사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즉, 증거를 가지고 살인범을 찾아내는 것처럼, 어떤 증거를 가지고서 과거를 알아낼 수 있다. 이런 증거에는 의도가 드러나는 것과로 쫓아간다면 그것은 큰 부분을 놓치는 것이 된다. 반대로 의도를 내포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 어떤 다른 목적이 없이 쓰여진 글들이라면 당연히 의도를 포함한 것 보다 신뢰도가 높다. 단지 그것의 기록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증거물들은 무한에 가까울 만큼 다양하다. 이렇게 매우 다양한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역사의 연구에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수업 시간에 상당히 많이 들었던 학문 간의 상호작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떤 하나의 현상이나 증거물을 분석할 때 그것에는 여러 분야의 학문이 개입을 해야 분석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역사를 연구 할 때 여러 증거와 또 그것에 따른 여러 학문들이 동원된다는 것을 말했는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의도가 포함된 증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비판이라는 단어가 많이 힘을 얻게 된 계기를 말하고 싶다.이런 비판적인 방법들이 점점 발달하게 되어서 증거들의 위조나 허위에 대해서 구분을 하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증거에 대한 비판적인 방법들 몇 가지를 소개하면, 시대의 유사성을 이용한 비판, 역사적인 흐름에서의 비판, 확률적인 비판, 수치가 정확하거나, 혹은 진짜라고 생각되어지는 증거에 대한 비판 등이 있다. 즉, 지금까지는 역사를 연구하려면 증거가 필요하며 그것을 비판적으로 봐야했지만, 이제 증거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증거를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랑케는 역사가는 사실만을 서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역사가가 왜 증거를 통해서 과거를 분석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싶어서이다. 역사가가 사실만을 서술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역사가는 어쨌든 당 시대의 산물이므로 그 감정과 사고는 그 시대를 벗어 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서술 역시 사가의 관점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즉, 사가는 공정성을 가지고 역사를 기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판사는 재판에서 공정하게 사.
Ⅰ. 시대 구분론1. 시대 구분의 의의인류의 역사는 대단히 하고 긴 시간의 변화 과정이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역사의 발전 과정이나 시대적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에 의해 시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시대 구분은 일정한 기준에 의해 역사 과정을 체제계·법직적으로 파악하려는 방법이다.시대구분을 하는 방식은 시대 구분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적 과정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보편적인 판단 기준을 찾으려 한다. 자유, 평등, 생활 등 인간의 존재 조건과 관련하여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 권리가 어떻게 형성 발전 되었는 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이러 이유로 시대 구분은 인류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방식이다.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보는 시대 구분 방식은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기본 원칙을 밝힐 뿐만 아니라 각 시대, 각 지력의 특수성을 보다 분명하게 밝힐 수 있게 도와준다.2, 시대 구분론의 전개 과정우리나라에서 기대 구분 논의는 1930년 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백남운이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비판하여 한국사의 고대 노예제 사회, 아시아적 봉건 사회의 역사 발전 단계를 설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합법칙성 이론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한국사 발전 단계의 설정에 대한 논란이 있다가 중단되었다.그 이후 1950년대 북한학계에서 사회주의 사회건설의 역사적 당위성을 역사 발전 과정을 통해 확인하려는 시대 구분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매우 결렬하였고, 시대구분 논의도 고·중세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의 기점, 사회주의 건설주체, 혁명의 과제와 결부되어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그래서 1960년대까지는 사회 구성의 성격, 계급 투쟁을 중심으로, 1960년 후반에는 주체 사관에 따라 인민 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이라는 측면을 중심을 전개되었다.남한 한 논의는 1984년에 강만기 저서 ,서평 좌담회에서 근현대사의 시대 구분 문제를 거론하였던 정도였다.1980년대 후반에서부터 1990년 초반에 북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북한의 시대부분 논의가 정리되었고, 이를 남한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시대구분 논의 결과를 남한의 시대구분에 대한 논의에 반영하게 되었다.1990년대에 이르러 시대 구분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93년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사 시대구분의 제문제를 주제로 학술 회의를 개최하여 각 시대의 시점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였다. 그동안 시대 구분 논쟁에서 배제되었던 현대사의 기점 문제가 제기되고, 분야사인 경제사에서 시대구분, 중국사의 시대구분이 논의 되었는 사실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각 시대의 사회 구조와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흘하게 취급되었다.1993년부터는 한국 역사 연구회에서 시대 구분을 위한 토론회를 각 시대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1980년대의 한국사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국 근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 신라 통일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의 주제로 논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1993년의 한국 고대사 연구회의 고대와 중세 한국사의 시대구분 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까지 개최되어 중세의 기점을 통일 신라설과 나말 여초설로 집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논의에서는 정치, 사회, 사상, 경제,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시대 구분의 전환점을 확인하려고 한 점이 특징적이다.한편 이러한 시대구분 논의의 흐름과는 달리 기왕의 논점를 비판하는 시각도 제기되었다. 1994년 한림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사의 시대 구분론 의 학술 회의는 세계사적 시대 구분이니 고대 중세 근대의 개념, 마르크스 유물 사관을 배척하고 그 대신 한국사의 특수한 시대구분, 분류사적인 시대 구분을 시도하였지만 보편성을 추구하는 시대 구분의 기본적인 목적을 상실한 측면을 보여 주었다.Ⅱ. 북학에서의 중세사 기점의 논의해방 이후 일제시기에 활동했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월북하여 주류를 형성한 북의 형태가 아닌 아시아적 형 태의 봉건 사회를 형성하였다.봉건론자들이 제기한 견해의 특징은 삼국시대의 봉건제가 노예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원시공동체 사회로부터 이행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원시공동체 사회 이후에 가부장적 노예제 내지는 가내노예제가 발달하였지만, 그것들이 바로 노예적 사회 구성에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원시공동체 말기에 철기 보급에 따른 급격한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농촌공동체 내부에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 요소가 우세해졌고, 그에 따라 봉건지주와 종노계급의 생산 관계를 기축으로 한 봉건제 사회가 삼국성립기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예제 사회 단계를 거치지 않은 봉건제 사회라고 하여 초기 봉건 사회로 불렀다.둘째, 삼국시대의 공동체를 기초로 한 노예제 단계를 지나 통일신라 시기에 중세 봉건제가 성립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었다. 임건상, 백남운, 한길언 등 흔히 노예론자들이라 불리는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비교적 치밀한 논리를 갖추었다고 평가받는 임건상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삼국시대는 공동체가 강고하게 잔존하는 동방적 노예 사회였다. 5∼4세기에 이르러 예농 및 외거노비 등 농노제적 관계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는데, 5∼7세기에 걸치는 농업 생산 력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서 더욱 확대·강화되었다. 이러한 사회변종의 와중에서 김춘추 를 중심으로 한 신흥 귀족들이 654년 정권을 장악하고, 봉건적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우 리나라 역사상 첫 봉건 지주 정권으로 출연하였다. 이후 조선 봉건제도는 더욱 확립되어 나갔다.통일 신라시기에 봉건제 사회가 성립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모든 민족은 자기 역사발전에서 반드시 노예소유자적 사회 구성체를 거친다는 일반론에 근거하면서, 봉건론자들의 노예제결여론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공동체적 제약하의 총체적 노예제 또는 공납노예제 사회인 삼국시대를 거친 후 통일신라에 이르러 계기적으로 봉건제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논리체계를 세웠던 것이다.특히 임건상은 노예제 사회 말기인 5~7세기 농정에서 중심적으로 토론된 문제는 봉건제의 기점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시기의 사회성격 문제로 모아졌다.노예론자와 봉건론자의 견해 차이는 삼국시기가 노예제 사회냐 아닌면 봉건제 사회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세 봉건의 기점은 자연히 삼국시기의 사회성격이 어떻게 규정되느냐에 따라 그 시기가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삼국사회의 사회성격에 관한 토론은 주로 계급관계의 해명에 집중되었다. 사회경제 구성을 고찰할 때 모든 토론자들이 견지했던 관점은 인류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한 맑스-레닌주의 역사관이었다. 때문에 삼국시기의 사회성격을 올바르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기 계급투쟁의 주체인 직접 생산자들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노예론자들은 삼국시기의 사료에 보이는 노비를 모두 노예로 간주하였고, 하호·부곡민 등을 노예 또는 노예적 처지에 있는 자로 보는 한편, 양인 신분의 소농민을 노예적 착취를 받는 자 아니면 노예의 원천으로 이해하였다. 삼국시기 사료의 서양의 고전 고대적 노동노예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예론자들은 노예에 대한 확대해석을 시도하여 그 시기의 노예를 자기의 정리를 가지고 있는 특수한 노예였다 라고 성격 지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부 토론자들은 노예와 농노의 구분은 단지 착취와 예속의 정도 차이에 불과하다 고 하였다.한편 봉건론자들은 삼국시기의 노비를 포함한 예속민·하호·부곡민 등을 대부분 농노 또는 착취를 당하고 있는 농노와 유사한 계급 혹은 계층으로 보았고, 또 양인 신분의 소농민층을 기본적으로 봉건적 예속민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김석형은 삼국·고려·조선기기의 노비와 양인의 존재형태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후 삼국시기의 노비와 양인은 자기의 소경리를 가지면서도 마음대로 죽일 수 없었던 농조적 존재였으면, 질적으가 고려·조선시기의 노비·양인과 다름이 없었다 는 결론을 도출한 다음에 삼국시기는 직접 생산자가 농노 또는 봉건적 예속민인 봉건제 사회임에 틀림없다 고 주장하였다.노체계에 입각한 시기 구분법을 1960년 개전판 에서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이후 주체사관에 의하여 북한 학계의 봉건제 사회론은 새롭게 재구성되었는 데, 이에 입각하여 서술된 봉던제 형성과정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기원전 3~1세기 철기의 광범한 보급과 함께 임민들의 창조적 노동에 의해 생산력이 더 욱 발던하였다. 그리고 노예적 예속을 반대하는 노예들의 투쟁이 치열해짐과 동시에 조 예적 국가내 후국들간의 분쟁과 중앙권력으로부터 분립이 강화됫면서 고대 노예소유자 국가들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일부 선진 지역에서는 봉건적 관계가 발생·발전하여 갔 다. 새로운 착취방식에 의해 이전의 노예나 하호, 몰락한 평민들은 점차 봉건 농노로 되 고 노예소유자들은 봉건 영자가 되기도 하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노예제 사회 태네 에서 성립된 봉건국가인 삼국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봉건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즉, 철기 보급과 인민들의 창조적 노동에 따른 생산혁의 증가, 그에 수반한 노예와 일반 평민들의 계급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고조선·부여·진국 등 선행 노예소유자 사회 내부에서 봉건 관계가 발생·발전하였다.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신라는 2세기 초엽에 각각 봉건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때 형성괸 봉건 사회 체제는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기에 걸쳐 계속 발전해 나가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 붕괴된다는 것이 현대까지 정리된 북한 학계의 논리체계이다.Ⅲ. 남한이 고·중세 기대구분북한 학계는 1950년말에서 1960년 초반에 걸쳐 활발한 토론을 전개하여 삼국성립=봉건제 사회의 형성으로 결론을 이끌어 냈다. 그 반면에 남한 학계에서는 뚜렷한 문제의식이나 고·중세를 시기구분하는 분명한 기준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다만 시간의 원근에 따라 고려의 성립을 중세사의 시작이라고 하거나 또는 왕조을 중심으로 하는 시기구분하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또 일부 사회경제사가들은 공동체적 제관계의 존재 유무를 가지고 고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