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목차 ☆1. 유클리드의 생애2. 유클리드 이야기① 첫 번째 혁명② 유클리드의 선언③ 공준과 일반 개념(공리)에 대한 논란④ 유클리드의 원론의 논리적 결함⑤ 유클리드에 관계된 일화3.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① 1권 직선, 각, 삼각형② 2권 도형의 넓이③ 3권 원의 성질④ 4권 정다각형을 원에 내접, 외접시키는 방법⑤ 5권 비율, 비례식⑥ 6권 닮은꼴 도형⑦ 8권 수들의 비율⑧ 7권, 9권 약수, 배수, 서로 남남, 홀수, 짝수, 홑수, 완전수⑨ 10권 무리수⑩ 11권~13권 공간기하☆ 참고 문헌 및 사이트 ☆http://my.netian.com/~goldhoon/uclid.htmhttp://211.248.118.200/root2/Study/mathematician/유클리드.htm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유클리드의 창:기하학 이야기』, 까치, 2002유클리드, 『기하학 원론(평면기하)』, 교우사, 1998유클리드, 『기하학 원론(비율, 수)』, 교우사, 1998유클리드, 『기하학 원론(무리수)』, 교우사, 1998유클리드, 『기하학 원론(공간기하)』, 교우사, 19981.유클리드의 생애유클리드는 BC 330년경 시리아(Syria)의 지루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노크라데스, 할아버지는 시날크스라고 하는 다마스크 출신의 그리스인이었다.유클리드가 태어났던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와메네쿰스(Menaechums)의 시대였고 아테네가 문화 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노크라데스 부부는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유클리드를 아테네 에게 유학시켰으며, 플라톤 학파의 아카데미에서 학교 교육을 받게 하였다.머리가 좋은 유클리드는 그 교리와 이치를 정통하였으며 특히 수학에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한편 알렉산더 대왕은 BC 336년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후 BC 332년에는 그리스를 비롯한 소아시아와 이집트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세계에서 가장 장엄한 도시를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고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이집트의부터 유래했다는 증거가 더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당시에 널리 알려진 평행선 이론과 관련된 논점의 선취(petitio prinsipii: 전제가 될 논점을 포함한 원리를 증명 없이 가정하는 오류) 또는 추론의 순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아 같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하학의 전개에 대단히 필수적인 평행선 이론에 대한 기초로서 어떤 공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유클리드가 인식한 것은 그의 수학적 통찰력의 일면을 보여준다. 유클리드가 공식화한 이 공준은 그런 목적을 훌륭하게 만족시켰으며, 또한 그와 동시에 도형에서 두 직선을 연장할 때 만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을 제공했다. 이 사실은 그 뒤에 유클리드의 공준을 바꾸려고 제안된 대용물들보다 그의 공준이 갖는 더 좋은 장점이다.공리 4는 그 주제에 있어서 일반적이라기보다는 특수하고 이에 따라서 공리가 아니라 공준으로 나열되어야 한다는 근거에서 비판을 받았다.④ 유클리드의 원론의 논리적 결함유클리드의 원론은 공리적 방법의 매우 초기의 광범위한 적용이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논리적 결함을 발견한다해도 이 책에 대한 큰 불명예가 될 수 없다. 아마도 이런 결함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은 그 뒤의 추론에서는 사용되었지만 이 책의 제 1의 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묵시적인 가정들일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은 주제가 저자에게 너무 친숙할 때 모든 연역적 연구에 존재한다.또한 유클리드의 책은 그의 예비적인 정의의 일부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실질적 공리학의 그리스적 양식에 따라서, 유클리드는 논설에 등장하는 모든 용어를 정의하거나 적어도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했다. 실제로, 한 논설의 모든 명제를 증명하는 것과 같이 그 논설의 모든 용어를 명시적으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기본적인 용어는 공준을 만족시키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이라는 의미에서 암시적으로 정의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암시적 정의는 기본적인 용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정의이다.⑤ 유클리드에 히 잘 잘라서 전체 길이와 한 토막을 가지고 만든 직사각형이 다른 토막을 가지고 만든 정사각형과 넓이가 같도록 만들 수 있다.법칙12. 둔각 삼각형에서 둔각과 마주 보는 변을 가지고 만든 정사각형은 둔각을 끼고 있는 두 변들을 가지고 만든 정사각형들을 더한 것보다 더 넓다. 그 차이는, 둔각을 끼고 있는 한 변은 길게 늘이고 그것과 마주 보는 점에서 거기에 수직이 되도록 직선을 그었을 때, 그 변과 둔각의 바깥에서 수직선에 의해 잘린 부분을 가지고 만든 직사각형의 두 배이 다.법칙13. 예각삼각형에서 예각과 마주 보는 변을 가지고 만든 정사각형은 예각을 끼고 있는 두 변 들을 가지고 만든 정사각형들을 더한 것보다 더 작다. 그 차이는, 다른 한 꼭지점에서 예각을 끼고 있는 변으로 수직선을 그었을 때, 그 변과 수직선에 의해 예각 쪽으로 잘린 부분을 가지고 만든 직사각형의 두 배이다.법칙14. 어떤 다각형을 주었을 때, 그것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만드시오.③ 원법칙1. 어떤 원을 주었을 때, 그 중점을 찾을 수 있다.- 어떤 직선이 원을 지나는데 다른 어떤 직선이 그 직선을 수직으로 이등분하면, 원의 중 점은 수직으로 이등분하는 직선에 놓여 있음이 명백하다.법칙2. 원둘레에서 아무 점이라도 좋으니까 두 점을 잡은 다음 그들을 직선으로 이으면, 그 직 선은 원의 안쪽에 놓인다.법칙3. 원의 중점을 지나는 직선이 중점을 지나지 않는 어떤 직선을 이등분하면, 그 직선을 수 직으로 자른다. 역으로, 수직으로 자르면, 그 직선을 이등분한다.법칙4. 원에서 두 직선이 만나는데, 둘 다 우의 중점을 지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이 둘 다 상대 직선을 이등분할 수는 없다.법칙5. 두 원이 서로 자르고 지나가면, 이들은 중점이 같을 수가 없다.법칙6. 두 원이 한 점에서 접하면, 이들은 중점이 같은 수가 없다.법칙7. 원의 지름에서 중점이 아닌 어떤 점을 잡아라. 그 점에서 원둘레로 직선들을 그으면, 그 중 가장 긴 직선은 원의 중점을 지나는 것이고, 가장 짧은 것은 칙23. 세 개의 양들이 있고, 또 어떤 세 개의 양들이 있는데, 이들을 둘씩 둘씩 비율을 구할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비율들이 서로 엇갈려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비율들이 결 국 같다. 즉, 첫째와 맨 마지막의 비율이 서로 같다.법칙24. 여섯 개의 양들이 있는데, 첫째와 둘째의 비율은 셋째와 넷째의 비율과 같고, 다섯째와 둘째의 비율은 여섯째와 넷째의 비율과 같다고 하자. 그러면 첫째와 다섯째를 더한 것과 둘째의 비율은 셋째와 여섯째를 더한것과 넷째의 비율과 같다.법칙25. 네 개의 양들이 서로 비례할 때,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더하면 나머지 둘을 더한 것보다 더 크다.⑥ 닮은꼴법칙1. 삼각형들이나 평행사변형들이 높이가 같으면, 그들의 넓이는 밑변의 길이에 비례한다.법칙2. 삼각형의 한 변에 평행하도록 직선을 그으면, 그 직선은 삼각형의 변들을 같은 비율로 자른다. 역으로, 삼각형의 변들을 같은 비율로 자르면, 그 자른 점들을 잇는 직선은 삼각 형의 나머지 한 변에 평행하다.법칙3. 삼각형의 한 각을 이등분하는 직선이 밑변을 자르도록 해라. 그러면 밑변의 두 토막들의 길이 비율은 삼각형의 나머지 두 변들의 길이 비율과 같다. 역으로, 밑변을 두 토막으로 잘라서 그 길이 비율이 삼각형의 나머지 두 변들의 길이 비율과 같도록 하면, 삼각형의 꼭지점에서 밑변의 자르는 점을 잇는 직선은 삼각형의 각을 이등분한다.법칙4. 두 삼각형이 각들이 같다고 하자. 그러면 같은 각들을 끼고 있는 변들은 서로 비례한다. 그들은 바로 같은 크기의 각을 마주 보는 대응하는 변들이다.법칙5. 두 삼각형이 변들이 비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은 각들이 같다. 대응하는 변들을 마주 보는 각들이 크기가 같다.법칙6. 두 삼각형이 있는데, 한 각의 크기가 같고, 그 각을 끼고 있는 변들의 길이가 비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두 삼각형은 각들의 크기가 같다. 즉, 대응하는 변들을 마주 보는 각들 의 크기가 같다.법칙7. 두 삼각형이 잇는데, 한각의 크기가 같고, 다른 어떤각을례 구한 비율이 같도록 만들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이에 넣을 수 있는 수들이 몇 개이든, 단위수 (1)와 이 두 수 사이에 각각 그만큼의 수들을 넣어서 차례차례 구한 비율이 같도록 만들 수 있다.법칙10. 두 수와 단위수 사이에 각각 어떤 수들을 넣어서 차례차례 구한 비율이 같도록 만들 수 있으면, 그 수들이 몇 개이든, 두 수 사이에 그 개수 만큼 수들을 넣어서 차례차례 구한 비율이 같도록 할 수 있다.법칙11. 두 제곱수 사이에는 비례중항을 하나 넣을 수 있다. 제곱수와 제곱수의 비율은 그들의 변과 변의 비율의 두겹이다.법칙12. 두 세제곱수 사이에는 비례 중항을 둘 넣을 수 없다. 세제곱수와 세제곱수의 비율은 그 들의 변과 변의 비율의 세 겹이다.법칙13. 차례차례 구한 비율이 같은 수들이 몇 개라도 좋으니 있다고 하자. 이들 각각에다 자신 을 곱해서 어떤 수들을 만들면, 그 수들도 차례차례 구한 비율이 같다. 원래 수들에다 이것들을 각각 곱해서 또 어떤 수들을 만들면, 그것들도 차례차례 구한 비율이 같다.법칙14. 제곱수가 제곱수를 재면, 변은 변을 잰다. 역으로 변이 변을 재면, 제곱수는 제곱수를 잰 다.법칙15. 세제곱수가 세제곱수를 재면, 변은 변을 잰다. 역으로 변이 변을 재면, 세제곱수는 세제 곱수를 잰다.법칙16. 만약 제곱수가 제곱수를 재지 못하면, 변은 변을 재지 못한다. 역으로 변이 변을 재지 못하면 제곱수는 제곱수를 재지 못한다.법칙17. 만약 세제곱수가 세제곱수를 재지 못하면, 변은 변을 재지 못한다. 역으로 변이 변을 재 지 못하면, 세제곱수는 세제곱수를 재지 못한다.법칙18. 두 닮은꼴 평면수 사이에는 비례중항이 한 개 있다. 그리고 두 닮은꼴 평면수의 비율은 대응하는 변들의 비율의 두 겹이다.법칙19. 두 닮은꼴 입체수 사이에는 비례 중항이 두 개 있다. 그리고 두 닮은꼴 입체수의 비율은 대응하는 변들의 비율의 세 겹이다.법칙20. 두 수 사이에 비례 중항이 한 개 있으면, 두 수는 닮은꼴 평면수들이다.법칙21. 두 수.
※ 참고문헌 ※아태평화재단,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남북연합을 중심으로』, 아태평화출판사, 1995홍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국내외 시각에서 본 남북통일과 민족통합』, 홍사단출판부, 2000이영선, 『통일 준비』, 오름, 1998대한무역진흥공사,『북한투자 실무』, 서울, 1993조민, "통일 문화와 민족 공동체", 『통일연구논총』, 민족통일연구원, 1993http://uniweb.unitel.co.kr:8083/class/ethics/lesson/ch9/sec2/sec2.html☆ 목차 ☆Ⅰ. 개요Ⅱ. 국가 통일의 필요성Ⅲ. 남한의 통일정책1. 시대별 통일정책2. 현정부의 통일정책 (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Ⅳ. 국가통일을 위한 대비책1. 경제 교류·협력2. 사회문화 교류·협력Ⅰ. 개요국가 통일의 필요성을 통하여 우리가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과거와 현재의 통일정책에 대해서 알아본 후 통일을 위한 대비책에 대하여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Ⅱ. 국가 통일의 필요성우리는 왜 남북 통일을 해야 하는가?첫째, 우리는 통일신라 이후 1300여 년 동안 유지 되어온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전통을 이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우리 민족만큼 오랫동안 단일 민족 국가로서의 정치, 문화 전통을 유지해온 국가는 일찍이 없었다. 분단 50년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외부의 강요에 의해 중단된 부끄러운 역사이다. 면 면이 끈기 있게 이어져 온 단일 민족 공동체가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인해 일시적 으로 훼손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분단의 장벽을 허 무는 일은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민족 정기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기필코 이룩되어야 한다.둘째, 남북 분단의 고통과 불안을 더 이상 지속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은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다. 이로 인한 이산가족의 정신적 고 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 핵 문제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당시처럼 '전쟁에 대래운명 은 경제문제의 해결에 달려있다. 새정부는 일차적 역점을 경제문제에 두지 않으 면 안된다"⊙ 1960년 8월 24일, 정일형 외무부장관, [7개 외교정책성명]"북진통일같은 무모하고 무계획적인 슬로건을 버리고 국제연합의 결의를 존중하 여 국제연합감시하에 남북한을 통한 자유선거에 의한 통한정책을 수행한다"⊙ 1960년 8월 27일, 장면 총리, 국회 시정연설"9월에 유엔총회가 개최되겠으므로 정부는 유능한 대표진을 파견하여 한국통일 안과 한국의 유엔가입에 관하여 국제여론을 환기하겠으며, 통일안에 있어서는 구정권의 태도와는 달리 유엔 자유국가들의 노선과 일치하도록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을 통한 자유선거에 의하여 통일을 달성한다는 주장을 강조하는 바이다"⊙ 혁신계와 학생들의 통일논의민주당 정부가 발족한지 얼마 안되어 민주당의 신구파 분열과 혁신정당의 난립 으로 인해 국내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때 맨스필드(Mike Mansfield) 미국 상원의원, 크리슈나 메논 유엔 인도수석대사, 몇몇 해외교포 등 에 의해 한국의 중립화통일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발언에 영합하여 혁신계 정 당은 물론 이고 학생들이 남북교류 또는 협상을 제기하는가 하면 중립화통일론 을 공공연하게 제창하기에 이르렀다.이들 혁신세력들은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남한의 국력신장을 강조하면서도 민주 당정부의 '선건설 후통일론'은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라고 비 판하면서 통일우선론, 중립화통일론 등을 주장하였다.혁신계 통일방안들은 우선적으로 '민족자주성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는 유엔에 의한 한반도 통일추진에 근본적인 회의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혁신계 통일 방안들은 중립화 통일, 외군철수, 남북협상, 남북교류, 북한정권의 존재 인정 등 민주당 정권의 소극적이고 유엔 의존의 통일정책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내용이었다.이러한 내용을 주장한 당시의 혁신정당으로는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 한국사 회당, 혁신당, 사회당 등이 있으며 혁신적 통일기구로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 회 , 중립화조념과 체제를 초월하여 조국통일을 추진할 것과 상호비방을 억제하 고 부주의로 인한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 하였다. 또한 동 성명서의 합의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가 발족되기도 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평화통일구상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적십자사에 대해 1천만 이산가족찾기운동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를 북한적십자회가 수락함으로써 인도적 차원의 남북대화가 분단 26년만에 열리게 되었다.인도적 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됨과 아울러 11월 20일부터 남북양측의 실 무자간의 비밀접촉이 시작되어 다음해인 1972년 4월 19일 북측 실무자 김덕현이 서울을 비밀 방문하였고, 이에 따라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비밀 방문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의 서울 비밀방문의 결실로 남북 분단이후 최초의 남 북한간의 공식문서라 할 수 있는 '남북공동성명'이 7월 4일 10시 서울과 평양에 서 동시에 발표되었다.이 성명서에서는 조국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그 원칙으로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야 한다.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 로 실현하여야 한다.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 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또한 남북 쌍방은 중상비방을 하지 않으며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서 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남북사이의 다방 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나라의 통일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 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하였다.이로써 남북한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고 '7 4남북공동성명'의 합의에 따라 정치적 차원의 남북대화인 남북조절위원회가 진행됨으로써 남북한간에는 남 북적십자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두 개의 대화통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5) 제4공화국 :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과 3대 기본 한 당국 최고책임자 회담' 제의를 조속히 받아들여 이 자리에서 이상의 모든 문제들이 허심탄회하게 협의될 수 있도록 그 실현을 위한 예비회담 을 개최하자고 제의하였다.▶ 20개 시범실천사업⊙ 서울·평양간 도로 연결·개통⊙ 이산가족 우편교류 및 상봉 실현⊙ 설악산, 금강산 자유관광 공동지역 개방⊙ 해외동포 고국방문 및 판문점 통과⊙ 인천항과 진남포항 개방⊙ 남북 정규방송 상호 시청⊙ 1986년 아시안게임 및 1988년 올림픽 북한선수단 판문점 통과⊙ 남북 방문 외국인 판문점 통과 자유왕래⊙ 공동어로구역 설정⊙ 사회 각 분야 인사들의 상호 친선 방문⊙ 남북 기자들의 자유로운 취재 보장⊙ 민족사의 공동연구⊙ 체육친선교환경기 및 국제경기대회 단일팀 참가⊙ 일용생산물 교역 실시⊙ 자연자원의 공동개발 및 이용⊙ 동일제조업체간 기술자 교류 및 생산품 전시회⊙ 비무장지대내 공동경기장 시설 마련⊙ 비무장지대내 동식물 자연생태계 공동학술조사⊙ 비무장지대내 군사시설 완전 철거⊙ 군비통제 조치 협의 및 군사책임자간 직통전화 설치(7) 제6공화국 : 7 7선언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1988년 2월 25일 출범한 제6공화국은 처음으로 헌법에서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통일은 평화적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아 래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 7선언)을 발표하고 1989년 9월 11일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였다.▶ 7·7 선언이 선언은 남북한 관계를 대결 관계가 아닌 동반자 관계, 나아가서는 함께 번영 해야 할 민족공동체 관계로 규정하고, 자주 민주 평화 복지의 원칙 아래 남북간 의 대결구조를 화해의 구조로 전환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조치의 기본방향을 제시 한 정책선언이다. 7 7 선언에는 남북 상호 교류와 왕래를 위한 문호개방, 이산가 족 고통 해소, 남북 교역의 문호 개방, 민족경제의 균형발전 희망, 대결외교의 종 식과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북한과 우리 우방 및 우리와 사회주의 국가들간의 관 계 개선 촉구 등 라 전망된다.넷째, 경제 교류·협력은 북한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진입시킴으로써 연방제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용이하게 한다. 남북연합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남과 북의 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통합해가는 것이다.다섯째, 남북간 화해를 촉진시키고 통일의 기반을 공고히 한다. 일단 물꼬가 트이면 어느 누구도 막기 어렵다. 사실상 남한 정부가 북한 핵문제를 이류로 남북 경협을 통제하려 했으나,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기업인들의 왕성한 투자의욕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아태평화재단,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남북연합을 중심으로, P: 137)(2) 경제 교류 확대 방안▶ 직접 교역으로서의 전환간접 교역으로부터 직접 교역으로 전환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간접교역에서는 상품의 사전 품질 확인이 어렵고, 교역의 절차가 복잡하며, 반출입 완료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등 높은 물류 비용을 수반한다. 이에 반해 직접 교역으로의 전환은 이러한 단점을 완화시킴으로서 교역 당사자들의 생산비를 절감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특히 직교역 시에는 남북한 기업인드링 서로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므로, 교역 상품의 발굴이 쉬워지고 상호간의 신뢰감과 이해를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직교역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직항로가 개설되어야 하며, 남북한 국적의 선박이 자유로이 항해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직교역이 이루어진다면, 간접 교역으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지불해야 했던 비용의 1/3 정도를 절감할 수 있다고 기업들은 평가하고 있다. 남북한은 이미 합의한 대로 인천, 부산, 포항과 남포, 원산, 청진항을 개방하여 직항로를 개설해야 할 것이다.▶ 남북간 교역의 민족 내부 거래화남북간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관세 거래가 필수적이다. 단 남북한은 국가 연합의 형태로 협력한다 하더라도 2개의 별개 국가로 간주되기 때문에, 양국간의 직교역에 무관세 혜택을 주는 것은 WTO의 최혜국대우 원칙에 위배되어, 타국에게도 무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