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의 중심 ?樟柯의‘三?好人’을 통해 본중국의 지금1. 중국의 지금이란?2. ‘지하영화’와 ‘독립영화’-‘지하영화地下電影’에 관한 어긋난 대화1) ???와의 대화2) ?樟柯와의 대화3. 6세대, 혹은 포스트6세대4. ?樟柯가 생각하는 중국의 현실감과 동시대성5. 三?好人의 이야기6. 변화의 와중에 있는 중국의 일상 - 三?好人7. 三?好人이 전하는 메시지1. 중국의 지금이란?오늘날 중국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다. 한국의 상류층 뺨치는 혹은 넘어서는 상하이의 신흥계급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최저생계 이하의 가난에 시달리는 농촌의 인민도 있다. 도로 위를 덮고 있는 외제차를 모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길가 옆에선 쭈그리고 엎드려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양극화된 모습이 자주 한 눈에 들어온다.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본주의 물결은 한 줌의 인민에게 저 멀리 계급의 꼭대기로 올라갈 기회를 주었지만, 한 줌을 제외한 인민들은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생존을 위한 고투를 벌인다. 어쨌든 이렇게 거대한 장강의 물결 속에서 인민은 상하좌우를 막론하고 역사의 격랑에 빠져 있다.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응시하는 地下電影의 기수 ?樟柯감독의 는 그렇게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담담히 고투하는 인생을 담았다.2. ‘지하영화’와 ‘독립영화’-‘지하영화地下電影’에 관한 어긋난 대화)1) ???와의 대화)- 제6세대 감독에 대한 평가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특별히 뛰어난 작품은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사실 영화는 젊은 사람들의 예술이다. … 지금까지 우리 다음 세대 젊은이들은 아직 강하고 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다른 사람을 정복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텐데 결국은 영화로 승부를 해야 한다. 다른 것은 말하지 않겠다. 정말 좋은 작품이 있다면 나는, 예술에 대해 진정한 良知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으므로 모두가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뛰하며 갖은 노력을 다한다. 王小?의 영화 )는 거듭된 수정과 지연을 거쳤다. 그래서 결국 국내에서 상영하지 않았는가? … 우리는 국내 시장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찍는 속도는 느려지게 되며 체제 안으로 들어와 중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중국 당국과 대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창작에 있어서 타협은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영화를 만들면서 첫 작품 만들 때만큼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보면 조금 희생을 하고 예술적으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내에서 상영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5세대 감독들과 다르다5세대든 6세대든 각 세대의 작품에는 확실히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5세대는 문화혁명을 겪어온 사람들이다. 당시에 사회 전체의 상황이 비교적 집중화되어 모두가 집단생활을 해왔고 이익도 모두의 것이며 경험도 비슷했다. 그렇게 고도로 집단화된 과정에서 단체를 이루기는 쉬웠다. 사람마다 기억이 서로 비슷하며 아픔도 비슷하고 직면한 상황과 문제들도 비슷하여 만들어진 영화가 비슷할 수도 있다. 6세대 감독들에게도 공통된 기억이 있다. 즉 ‘문혁’은 그들에게 약간의 기억이나 영향을 남겼으며 그들이 학교에 다니던 시기는 중국이 개혁 개방의 열기에 막 휩싸이기 시작할 때였다. 어떤 나라든 전환기에 처해 있을 때는 상황이 다 비슷할 것이다. … 나의 성장과정은 기본적으로 중국이 개혁 개방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사상이 다원화되기 시작하고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 제5세대나 6세대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같이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만드는 것이 다 제각각이다. 그래서 6세대 이후로는 세대로 나누기가 힘들다고 본다. 왜냐하면 서로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문제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 또한 다르기 때문에, 만든 영화도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 등을 감독한 장양과 , 등의 영화를 찍은 류하오 등이 이 범주에 속하는데, 그 자신들 역시 자기들이 6세대로 구분되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차별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주로 독립 제작을 선호하고, 그들 영화 대부분이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극장에 걸 기회는 좀처럼 잡히지 않고 또 정식상영이 되어도 흥행성적은 그리 좋지 않다. 자신들의 희망처럼 시장진입과 대중과의 교감은 아직 쉽지 않은 상황이다.사실 이러한 구분자체가 좀 모호하다. 6세대를 대표한다는 姜文과 ?樟柯 역시 최근 들어서는 상당 부분 상업성을 고려하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고, 또 보다 나은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며 당국과도 타협을 거쳐 정식상영을 시도하고 있다. 국내관객과의 호흡, 그것을 위한 재정적, 소재적 기반 확보를 위한 고민과 모색은 세대를 막론하고 현재 중국감독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다.4. ?樟柯가 생각하는 중국의 현실감과 동시대성어떤 사람은 현대화되어가는 모습에 초점을 두고, 또 어떤 사람은 옛날 모습에 멈춘 상황에 관심을 두고 나 같은 경우에는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을 두는데, 이렇게 다양한 모습들이 사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게 바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높은 빌딩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세워진 것이고, 또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니까 예날 집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양쪽 것이 서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도 좋지는 않다고 본다. 그것들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원적인 것을 보여주고,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 소용이 사는 집은 옛날 모습을 간직한 전통 가옥이지만, 그와 동시에 철사 안에는 현대화된 핸드폰이 있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의 시나리오를 완성했을 무렵, 마침 설날이 되어서 집에 돌아가 보니, 고향의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내 고향은 펀양이란 소도시인데 그 곳에 큰 길이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몇 백 년의 역사가 있는 이 길이 없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떠날 곳이 딱히 없고 떠날 마음도 없어, 다리 밑 움막 같은 벽돌집에 몸을 숨기는 노인도 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그들의 삶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담배를 나누고, 사탕을 나누고, 술을 나누고, 차를 나누면서 싼샤의 주민들은 각자의 삶을 공동체 안에서 영위해간다. ?樟柯는 알 듯 말 듯 희미한 자막을 스크린 구석에 넣어 영화를 네 개의 챕터로 나누고 있다.“을 찍을 때 노동자의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그냥 시멘트가 발라져 있는 벽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벽 앞에 빈 술병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 술병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건 내 생일을 기념해서 혼자 사다 마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예전에 그림을 그릴 때 대부분의 그림은 정물화였습니다. 그때 그림에 붙인 제목은 그림을 멈추는 그 어떤 순간이 되었습니다. 담배라는 말은 그냥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어떤 물질과 서로 만나서 멈출 때 어떤 기억, 어떤 흔적, 어떤 순간을 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의 영어제목인 는 중국어로 입니다(이 아닙니다). 담배, 술, 차, 사탕은 중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의존하는 기본적인 물질들입니다. 그 네 가지만 있으면 가정생활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네 가지 물질을 통해서 삶의 순간을 멈춰 세운 다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행복하십니까?”)영화의 인물들은 이 4가지 물건을 자주 손에 드는데, 는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인생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억척스럽게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영어 제목인 는 ‘정물’을 의미한다. 싼샤지역 주민들의 일상 속에 흩어진 정물들을 응시하는 는 그래서 인간의 삶의 조건들을 성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내와 남편을 찾으러 나선 외부인들의 시선은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창이 되고, 두 인물이 겪는 상실감은 싼샤지역을 뒤덮을 미래에 대한 예고편이 된다.배 위의 인물들은 정물처럼 표정이 없다. 정물 같은 인물, 굳은 표정의 인민들이 배 위에 앉아 있고 카메라는 그감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싼샤의 외지인 두 사람으로 결정했습니다. 두 주인공 중 한명인 ?三明은 나의 이종사촌 형입니다. 그는 고향에서 실제로 광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과 에서도 광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광산촌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광부는 대부분 혼자 살고 있고, 그래서 돈을 주고 사는 수가 많습니다. 또 한명의 주인공 沈?은 남편을 찾으러 이곳에 찾아옵니다. 결혼했지만 서로 다른 도시에서 헤어져 살고 있는 부부들은 언젠가 결정을 해야 할 일과 마주칩니다. 지금 이런 일이 중국에서 매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 중국은 더 빨리 변하고 있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산다는 문제. 그래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내면, 말하자면 자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에서부터는 사람에게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변화는 중국 사람들의 변화에서 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국의 변화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죽은 거야? 아니, 우리는 시작하는 거야. 그건 선택입니다. 이제 선택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선택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개인은 그런 의미입니다. 는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것입니다. 은 그것을 더 밀고 나아간 것입니다. 에서 선택을 한다면 에서는 선택을 하기 위해 (싼샤에) 오는 것입니다. 그건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 그 이전에는 이미 주어진 삶을 따라야 했지만 지금 중국은 자기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중국의 새로운 삶입니다.”)그 두 사람은 각자의 선택을 한다. 沈?은 남편에게 상하이로 떠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중국 자본주의의 첨단, 이제 그녀는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에 가서 더 마술 간다.
사회화를 담당하는 기관의 역할, 관계, 모형판티니는 지역사회에서의 사회화 담당기관들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교육체제의 발전추세를 네 가지 모형으로 파악하였다. 교육체제는 지금까지의 노력분담모형과 노력위임모형에서, 점차 조정적 모형과 조장적 모형으로 발전해 갈 것으로 전망하고, 가정?학교?지역 사회 교육기관들 간에 그 책무를 재편성하여 학교중심 교육체제에서 새로운 교육체제로 지향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노력분담모형’이란 농업사회에서 가정?종교기관?일터 등 청소년사회화와 교육에 대한 책임이 부모와 각기 책임 있는 성인들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학교는 기본 지식과 공통적 가치를 학습시키는 것으로 그 책무가 충분하였던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는 개인의 보다 전문적인 준비를 촉진시켜 타기관의 권한과 교육과업을 학교에 위양, 모든 교육적 필요의 종합화와 교육과정의 팽창, 학교교육의 대중화, 교육방법의 표준화, 교육성취의 표준화를 요청하여 학교교육의 전문화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의 주된 책임을 학교에 거의 일임하는 ‘노력위임모형’을 낳게 만들었다. 점차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지식기술의 폭증?정보유통 체제의 다원화?학교교육의 제도적 경직성과 그 역기능들은 더 이상 학교교육에만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학교 외 기관들에서의 교육의 전문화 및 다양한 사회교육의 유형과 그 독자성을 확립시켜 학교?타교육기관?지역사회 제기관들을 상호 밀접히 관련시켜 각기 필요한 교육기능을 재조정하여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정적 모형’과 같은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기술공학의 고도화에 힘입은 정보사회의 도래와 학교 외 기관들의 전문화는 종래의 학교중심?교사중심?집단중심의 학습에서 컴퓨터 보조수업, 컴퓨터 중심학습, 학교 외 교육기관에서의 자유학습, 가정학습 등 최적조건에서 개별학습의 형태를 지향케 하여 전문 교육자 및 부모들의 조언을 얻어 지역사회 제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조장적 모형’의 학습이 촉진된다. 이렇게 되면, 학습자 개인의 학습형태, 좋은 수업의 기준, 효율적 학교체제의 운영, 전체 교육체제의 운영은 전적으로 달라진다. 즉, 가정?학교?지역사회가 상호 유대 되어 재구조화되는 교육제체를 건설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제의 변화는 교육적인 노력의 약화나 단순한 책임분담의 변화가 아니라, 교육체제의 모든 관련된 하위 요소들이 기능화 또는 강화되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적 사회의 이상은 바로 이러한 교육체제를 건설해 나가자는 데 있다.조정?조장적 모형으로서의 교육체제의 변천은 새로운 교육적 과제들을 제기한다. 첫째, 학교교육의 한계 및 그 상대적 제약 때문에 학교교육에서는 기초학습과 학습방법의 학습이 그리고 각 교육기관 간에 교육프로그램의 실천에 있어 긴밀한 협조체제가 요청된다. 둘째, 학습자 개인의 필요, 인지양식, 학습과제의 성격, 소요시간, 적절한 학습 집단 편성 등에 기초하여 학교 운영구조의 신축성을 도모해 나가는 일이다. 교사중심의 고정적 시간 운영, 교실 안에 갇힌 수업, 대집단 학습 형태에서 개별학습, 소집단 학습, 학교 외 학습, 가정학습, 개인차에 의한 학습 등이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 셋째, 학교 외 교육프로그램의 의도적 활용이다. 교육에 대한 책임의 일부가 부모 혹은 지역사회로 되돌려질 때, 가정 또는 교외 학습기관에서의 특기활동, 대안적?선택적 학습을 허용하는 학교학습체제를 수립하고 관련되는 프로그램 또는 교육기관끼리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이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조정?조장해 주어야 하는 일이다. 넷째, 학부모 역할의 확대이다. 이와 같은 발전적 교육체제에서는 교육의 필요를 학교 외 학습장면에서 충족시키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므로 학교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부모들의 참여와 책임이 증대된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신들의 교육수준 향상에 비추어 교육기관의 지도를 받아 자신들의 교육력을 개발하고 그들의 학습을 돕는 일을 소중한 권리로 행사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체제 하에는 학교, 교사만의 또는 표준화된 소수의 프로그램만에 의해서 질적 교육을 충족시키기 어렵게 된다. 때문에 다양한 대안적 프로그램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부모들은 전문직 교육자의 조언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부모는 학교의 교육체제에 적극 참여하고 유대를 맺어 활동해 나가야 한다. 이 때, 교사 등의 전문 교육자의 역할이 달라지고, 가정과 사회교육의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교사들은 수업시간이 감소되는 반면 이들 프로그램을 어떻게 적절히 선택하여 최선의 경험을 하게 할 것인가의 기획?조정?평가 등의 임무가 중요해지고 이들 프로그램 선택의 조언자?조장자의 역할로 점차 변모된다. 그렇게 되면 학교는 교육의 주된 자문기관으로서 개개 학습자와 부모에 대한 교육의 의사 결정자요 지역사회의 가용자원을 선용토록 도와주는 카운슬러로서의 역할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교사 혹은 학교만으로서 가능하지 않다. 학부모와 다른 자원봉사자 또는 관련 기관들의 협조적 노력이 필요하며 그들의 참여를 보장하여 의사결정과 책임을 분담해 나갈 체제의 수립과 이를 계속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그러한 조직의 하나가 지역사회 교육협의회 혹은 자문위원화 등이며 학교교육에의 부모참여, 가정참여, 또는 교육에의 주민참여는 모두 이와 관련된 활동들로서 모두 중요한 교육의 과정이 된다. 지역사회가 주체가 되어 이러한 교육의 과정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곧 지역사회교육이며 이러한 과정의 발전은 교육적 사회를 지향해 나가는 데서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앞으로 전망되는 조정?조장적 모형에서의 교육체제는 거시적 구조 또는 범시민적 지원체제에서 지역사회 자체가 하나의 교실이 되어 교육문제에 공식적으로 총체적 노력을 기울이는 체제라 할 수 있다.
교사의 기대, 피그말리온 효과피그말리온은 신화 속의 주인공이다. 그는 키프러스의 왕이자 조각가로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해낸다. 그 여인상을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라고 불렀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린다. 피그말리온은 마침내 상사병이 들어 자리에 드러눕자 그의 사랑에 감동한 아프로디테는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런 신화를 빗대어 후대 사람들은 피그말리온 효과를 자기가 예언하는 대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 실제로 현실에서 충족된다는 말로 쓰고 있다.피그말리온 효과에서 교육적으로 중요한 개념은 바로 ‘기대’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를 갖는다면, 그 기대가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이 피그말리온 효과 이론이다. 과연 이 이론이 교육 현장에서 가능한 것인지를 점검하는 연구가 있었는데 바로 로젠탈과 제이콥슨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시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들의 실험결과는 놀랍게도 학생의 학업성취에 향상을 보이리라는 교사의 기대가 실제로 학업성취의 향상을 가져왔다.이 연구가 교육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교육학적인 함의는 엄청나다. 학생의 학습력을 이끌어내는 직접적 동인은 교사의 기대감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학생의 지적 능력은 교사의 기대감으로 그 가능성이 발화된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만일 학생의 지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지적인 성장에 대한 교사의 기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피그말리온의 효과를 인정한다면 이제부터 교사에 대한 인식,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이해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교사는 학생에게 꼬리표를 다는 명수들이다. 학생에 대한 낙인은 학생의 지능 검사 점수에서 시작된다. 그런 점수가 학생의 학업 능력에 대한 교사의 기대에 영향을 주고, 그 기대는 다시 학생의 학업 능력에 영향을 주며, 끝내 학생은 교사의 부정적인 기대에 부응해 학업에 실패해주는 식으로 교사가 지닌 자기충족의 예언을 현실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은 학교가 싫은 것이고 교사를 혐오하는 것이며, 학습에 대해 염증을 느끼며 공부를 기피하는 것이다.
金庸 소설의 장르 - 武?에 대하여1. 역사적 연원무협소설이 그리는 무협의 세계는 물론 상상의 세계이지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무협’이라는 말 자체도 1904년에야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무협소설의 무협과 유사한 사회 현상은 실제로 존재했었다. 무협의 상상은 바로 그 실제 사회 현상을 연원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선진(先秦), 즉 진나라 이전의 사대부 계급 중 사(士)는 유가적 지식인으로서 문사(文士)인 것으로 보통 이야기된다. 그러나 본래의 사 계층은 문과 무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춘추시대에 들어와 그 사 계층 내부에 분화와 변질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 분화와 변질로부터 보통 이야기되는 사, 즉 문에 종사하는 유사(儒士)가 생겨났다. 유사는 상층 사회로 진입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사와 정반대로 분화가 이루어져 생겨난 것이 민간의 무사인 협사(?士)이다. 협사가 하나의 독립된 사회 계층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국시대의 일인데, 그들을 유협(游?)이라고 불렀던 것은 그들이 천하를 주유하는 삶, 즉 붙박이가 아니라 떠돌이의 삶을 살았으며 당대의 지배 질서와 주류 문화로부터 이탈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사기(史記)』의「자객열전」과 「유협열전」에 잘 그려져 있다.한(漢)나라 때에는 귀족계급의 개입으로 호협(豪?)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다. 호협은 유협과 달리 집단화하여 일정한 지역을 자신의 세력 범위로 삼아 패권을 행사했는데, 중앙 귀족이나 지방 호족과 결탁하는 일이 많았고 많은 경우 그 자신이 토호화하였다. 호협이 강성해져서 황권에 대한 위협 요소로 대두되자 황권은 호협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근 400년에 달하는 한나라의 역사에서 호협의 강성화와 황권의 탄압은 계속 반복되었고 결국 호협 세력은 쇠퇴하게 되었다. 사마천은 이들 호협에 대해 “붕당을 이루는 것이 주대(周代)보다 강하였고, 재물을 위해 가난함을 버렸으며, 부유한 자가 외롭고 약한 자를 능멸하며 욕심대로 행동하여 유협들이 이(內家)’로 구분되어 있었고, 청대 권술에는 남파 ? 북파의 구분이 있었다. 그 중 ‘무당파’의 문호는 전설 속에서 내가권법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장상품(張三豊)을 종사로 모셨는데, 장삼풍의 뒤를 구천근-변징-장송계 순으로 3대에 걸쳐 계승하였다. 또한 각 문파의 무술은 비교적 완전한 이론을 형성하였고 무술 습득 이론과 실제 투로 기술을 융합시킨 무술 서적이 씌어졌다. 이상과 같이 형성 발전한 무림은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림인은 민간 사회와 각종 단체에 파고들어 민간 사회와 완전한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그들은 평민 사회와구성원인 동시에 무림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무림인이 전부 협(?)인 것은 아니다.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며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고 간악함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무덕(武德)이 높다고 인정받아야만 협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이 무림 중의 협, 즉 무림협(武林?)이다.송 대에 크게 발달한 특별한 사회 범주로 녹림(綠林)이 있다. 산과 물에서 활동한 도적의 조직뿐만 아니라 특수한 업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한 여러 형태의 무사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첫째, 표사(?師). 상인이나 여객을 호송하며 그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호하는 무사들이다. 송대 이후로는 표사 중에서 종종 협이 배출되었다. 청나라 말의 대도(大刀) 왕오(王五)가 대표적인 예이다. 왕오는 본명이 왕정의(王正誼)로 북경에서 원순표국(源順?局)을 창립하였는데, 녹림의 도적들을 속박하고 탐관오리들을 견제하였다. 둘째, 자객. 이들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무사형태이다. 『사기(史記)』「자객열전」에 나오는 조말 ? 전제 ? 예양 ? 섭정 ? 형가 등이 바로 그러하다. 송대 이후의 협 중에도 몇몇 자객들이 포함된다. 예컨대, 『송사(宋史)』「장준열전」에 기록된 무명의 자객은 금(金)나라에 대항한 명장 장준을 암살하러 왔다가 오히려 그를 도와주는데 그것은 그 자객의 의(義)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향마(響馬). 도적의 집단이 말을 타고 종을 울렸기 때문에 분열로 인해 통일 정권을 세우지 못하고 결국 몰락했고, 그러한 가운데 주원장만이 착실하게 지반을 닦아서 천하를 평정하는 데 성공, 명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현교와 명교, 그리고 미륵교와 백련교 등은 각각 독자의 종교적 원류를 가지지만 극심한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점차 서로 혼합되었다. 그리하여 송 대가 끝나기 전에 이미, 미륵이 하생함으로써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오게 되고 광명의 세계가 창조된다고 하는 교리에 있어서, 그리고 그 계율에 있어서 완전히 공통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이렇게 혼합된 형태로 회화(淮河)유역, 강절, 강서, 복건 등 각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김용의 무협소설『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명교(明敎)’는 바로 이러한 혼합 현상을 근거로 한 상상의 소산이다.청대(淸代)에 이르러 비밀사회는 북방은 백련교, 남장은 홍문(洪門)이 핵심이 되는 양태 계통으로 형성되었다. 백련교는 명 말에 왕호현과 서홍유가 수령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고, 청대에는 백련교의 일파인 청수교의 왕륜의 난이 일어났으며 가경 원년(1795)부터 9년간에 걸쳐 전개된 백련교 민란은 호북, 사천에서 하남, 성서, 감숙으로 확장되어 최대의 규모에 달했다. 가경의 대란이 진압된 이후로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된 백련교는 여러 가지고 명칭을 바꾸어 존속했는데, 백우회(白羽會), 삼번회(三番會), 팔괘회(八卦會), 순도회(順刀會), 호미편(虎尾鞭), 의화권(義和拳), 진괘교(震卦敎), 감괘교(坎卦敎), 대승교(大乘敎), 금단팔괘교(金丹八卦敎), 이괘교(離卦敎), 여의교(如意敎), 백양교(白楊敎) 등의 회당이 모두 직접 간접으로 백련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백련교가 기본적으로 종교적 비밀결사인 데 비해 홍문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추구한 정치적 비밀결사이다(‘홍문’의 ‘홍’은 명 태조 ‘홍무제’의 ‘홍’에서 따온 것이다). 홍문은 많은 분파가 있었는데(태평천국의 난 당시에 상하이를 점령했던 비수회(匕首會)와 손문의 혁명에 참여했던 가로회(哥老會)도 그 분파들 중의 하나이다), 그 분파협이 귀족문화의 사치스러운 소비 품목으로 되기도 했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은 협(?)의 사상적 특징은 송 대 이후 무림, 녹림, 비밀사회 등의 사회 범주 속에서 세속화된 협에도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20세기의 무협소설이 그리는 무협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의 부합 여부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 상상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역사상의 협을 그 제재상의 연원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은 협의 사상적 특징이 대체로 반영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반영은 협의 사상적 특징을 독자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상 유파 속으로 수렴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점에 주의해 보면, 무협소설은 협 사상 자체보다는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며 그 중에서도 유교를 주된 사상적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묵가가 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제외하면 협은 거의 모든 사상 유파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유가는 공자와 맹자 이래로 사마천을 제외한 각 시대의 모든 역사가들에 이르기까지 협을 강력이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본래적 의미의 임협의식에 충실한 인물을 부분적으로 긍정하기는 하되 유교적 덕목을 갖춘 주인공을 우위에 두는 무협소설의 일반적 관습은 유교적 입장에서 협 사상을 수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청 말 민국초의 진보적 지식인이며 경학의 대가였던 장빙린(章炳麟: 그는 루쉰의 스승이었다)이 자신의 저서 『구서(?書)』에서 유와 협을 비교하며 유를 비판하고 협을 높이 평가한 것과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물론 모든 무협소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유교에 대해 비판적인 작가와 작품도 있고(김용 같은 경우는 한 작품에서는 유교적 지향을 보이고 다른 작품에서는 유교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협 사상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으며, 현대 사상을 주된 배경으로 삼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무공소설이 장르 문학으로서 러온 것을 생각해 보면 내단파의 주장은 흥미로운 바가 있다. 무협소설의 내공은 바로 이 내단과 이론을 근거로 한 상상의 소산이다.)갈홍의 『포박자』는 신선사상의 집대성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도교중의 단정파(丹鼎派) 도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본래 후한(後漢)말에 생겨난 원시도교는 부록파(符?派)도교였던 민간도교였다. 그 대표적 경전이 『태평경(太平經)』인데 이 책은 방사(方士)들의 저작이다. 방사는 무당에서 도사로 변신하는 과정의 중간적 존재이다. 한나라 때에 무속, 신선설, 참위설, 도가사상 등이 뒤섞이며 차츰 도교의 종교적 성립을 향해 수렴되어 가다가 후한 말에 이르러 부록파 도교를 탄생시키고 오두미도, 태평도 등의 교단 조직을 성립시킨 것이다. 부록파 도교는 농민반란과 결합하면서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곤 했다. 단정파 도교는 위진 시대에 도교가 귀족화하면서 생겨났는데 이로부터 관방(官方)도교가 유래하여 당나라 때에는 국교가 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도교의 사회 정치적 성격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재서 교수는 그 양면성을 다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도교를 ‘기층문화로서의 도교’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파악한다. 철학적 의미의 도교(도가사상)나 단정파 도교 모두 “중국 문화 전체의 견지에서 보면 결코 주류나 지배 문화에 속하지 않았”으며 “보편 이념인 유교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는 이단적 ? 주변적 성격을 띤 문화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단일한 정체성 안의 다양한 차이들에 대해서는 섬세한 고찰이 필요하겠으나 그 필요성이 ‘기층문화로서의 도교’라는 파악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도교가 기층문화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인구의 절대 다수인 농민의 종교가 도교라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교 이데올로기가 공식적이고 의식적인 차원에서 중국 문화를 지배한 데 비해 도교는 비공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중국 문화의 근저가 되었기 때문이다. 농민의 종교가 사실상 도교였다고 해도 농주었다.
고대 중국인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의식 형태의 고찰노신은 그의 잡문 「?外文?」에서 라고 꼬집어 쓴 적이 있다. 그러한 실례로써 敬惜字?라고 쓴 벽걸이 쓰레기통이라든가 부적이 사악함을 쫓고 병을 치유한다고 믿는 관습 등을 거론하였다. 즉 인쇄된 종이나 글자를 쓴 종이는 못 쓰는 것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버리는 것이 금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이 위에 글자가 씌어 지면 그것은 보통 종이가 아니고, 신화적인 힘을 생산하는 신화적인 역량을 지닌 종이이다. 이 신화적인 힘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무튼 글자로 인하여 이미 신령한 물건이 되었다고 믿게 된 바에야 신력이 자신을 해하지 않도록 종이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이나 문자를 단순한 물질적 기호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祝詛의 능력을 가진 영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언어를 영물로 숭배하는 믿음은 바로 신화적 언어관에 기초한 것으로서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이것은 고대의 문헌 기록이나 그들의 문자를 통하여 쉽사리 입증된다.『상서』「무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성들은 이에 그들의 마음으로 거스르고 원망하게 되었고, 이에 그들의 입으로 욕하고 저주하게 되었다. -공영달이 라고 주석하였듯이, 고대인들은 말을 통하여 저주를 행하였으며 아울러 이의 효능을 믿었었다. 그래서 말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그들은 오래전부터 가져왔다. 이것 또한 고대 기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이다.『국어』「주어」의 다음 구절이 좋은 예이다.- 여왕이 포악하여 백성들이 왕을 비방하자, 위무를 오라하여 비방하는 자를 감별하여 고하게 하고는 그들을 죽여 버렸다. 백성들이 감히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도로에서 눈짓만 하였다. -위소의 注에 의하면 위무는 비방하는 자를 반드시 알아낼 수 있는 신령한 무당이다. 왕을 비방하는 것은 신 앞에서 왕을 저주하는 것이니, 위무로 하여금 감별하게 하여 그러한 행위를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여왕의 의도였다. 이러한 기록에서 우리는 고대 군주들이 백성들의 저주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언어를 영물로 숭배하는 믿음은 문헌 기록에서뿐만 아니라 중국문자 자체에서도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이 글자를 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회의자로서 나쁜 물건을 좋다고 속여서 파는 행위를 뜻하며 이를 달리 이라고도 쓴다. 이것을 『월절서』에서도 라 하여 라는 의미로 썼지만, 과 에 처음부터 이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길가에서 갖가지 주술을 행하였는데, 述과 術은 모두 길거리에서 실시하는 이러한 행위를 나타내는 문자들이다. 도 말하자면 도로에서 행해지는 주술의 방법으로서, 이것은 사람을 현혹시키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신이 들리게 해서 그로 하여금 대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초사』에 라는 구절이 있다. 『국어』「정어」에 의하면, 周 선왕시에 라는 이상한 동요가 예언처럼 유행했다. 그런데 후에 어떤 부부가 정말 이것들을 팔러 다니고 있으므로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자는 이와 같이 신이 이런 부부에게 내려서 그들로 하여금 저자에서 외치고 다니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는 자형 내의 行과 言에서 알 수 있듯이, 십자로나 큰 길거리에서 행하는 주술 행위를 의미한다. 『초사』에서는 이런 주술로 인하여 이상한 부부가 신이 들려 저자를 다니며 외쳐댄 것을 曳衒이라 표현하였던 것이다. 과 은 모두 형성자인데, 표의부 구성 요소로서 전자가 言을 쓴 것은 呪文을 의미하고 후자가 玄을 쓴 것은 呪物을 의미한다. 즉 玄이란 실밥이 풀린 모양의 자형에서 알 수 있듯이 엮은 실을 주물로 하여 사람을 현혹한다는 뜻이다.언어를 영물로 숭배한 자취가 남아 있는 문자에는 이외에도 자가 있다. 言을 주요 구성 요소로 하고, 그 양쪽에 실 모양의 주술적인 장식을 늘어뜨린 자형으로서 말(言)에다 수식을 가했다는 의미이다. 주술 도구를 의미하는 자에다가 ?자를 더하면 변화를 기구한다는 의미의 자가 된다. 을 『설문』에서는 라고 정의하고 『광아』에는 을 라는 뜻의 자로써 해석하고, 다시 를 라고 하였다. 는 고문자의 자형을 분석해 보면, 주위 환경에 따라서 민감하게 색깔이 변화하는 생태 때문에 옛날부터 영험한 동물로 믿어져온 (易)을 두드리는 모양이다. 여기서 두드린다는 것은 도마뱀의 색깔이 빨리 변화도록 재촉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은 에다가 ?을 더한 글자로서 주술의 효과를 재촉하여 변화를 기구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變이란 말에 대하여 주술적인 수식을 가함으로써 말이 변화의 효험을 잘 나타내도록 한다는 의미가 된다.자에서도 말에 대한 영물 숭배를 엿볼 수 있다. 자형상으로 볼 때 자는 言에다 ?을 얹어 만든 구조로서 『설문』은 (?也)라고 정의하였다. 즉 言의 위에 그물을 얹은 것은 말을 덮어씌움으로써 말의 주술적 기능을 무력화한다는 뜻을 표시한다. 이것은 망한 나라의 社에 지붕을 덮어씌움으로써 햇빛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고대에는 말의 주술적 기능을 무력화하는 것이 곧 저주이고 욕이었으며 이는 바로 남을 해치는 공격적인 행위로 믿어졌다. 후출자인 은 여기에 (刀)을 가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저주를 다시 파괴해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은 앞의 라고 하는 공격적 행위에 대한 방어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자에 반영된 상징적 의미만 보더라도 고대 중국인들의 언어 영물 숭배 사상이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말이 음성으로 外在할 때에는 주술적인 작용이 함께 발동된다는 신화적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사회적 경험에서 얻은 언어의 효용을 그대로 자연 전체에 옮겨서 적용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 삶의 구조대로 사회에 편입되었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경험적인 언어의 사회적 효능은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자연적인 힘으로 믿어지고 나아가 초자연적인 힘도 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말이란 일시적인 것이므로 주술적인 작용을 지속시키려면 이를 정착시키는 방법이 강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말로 하는 기원을 문자로 옮기는 방법이 고안되었던 것이니, 중국에 관한한 언어 영물 숭배 사상이 문자의 발생에 주요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갑골문의 예로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즉 지금까지 해독된 갑골의 문장은 대부분이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서 그 내용 역시 거의가 神意를 묻는 종교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자를 써서 자유로이 글을 짓는다는 것은 아직 생각할 단계가 아니었다. 문자를 쓸 수 있는 사람도 사제와 같은 특정 전문 기술자에 국한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이는 갑골의 각자가 매우 어려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문자의 미관이 극히 아름답고 정교하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된다. 다시 말해서 당시는 아직 문자가 보편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채, 신의 의지를 묻고 응답을 기록하는 신성한 주술적 도구나 또는 특정한 사제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비한 기호체계로서의 의미가 컸기 때문에 당시의 문자는 사실상 주술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