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도졸업논문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계와 문제점대학교 대학전공이름년 월의 졸업논문을 인정함심사위원 인심사위원 인20 년 월대학교 대학 학과차 례Ⅰ. 서론11. 연구목적12. 연구방법1Ⅱ.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발생 배경21.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발생22. 신흥시장경제국가의 외환위기43. 냉천체제의 해체 : 탈냉전 체제6Ⅲ. 신자유주의의 이념71. 하이에크(F. A. Hayek)와 신자유주의71) 하이에크의 경제정책82) 하이에크의 사회철학82.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토대101) 개인주의102) 개인적 자유113) 경쟁을 통한 자생적 질서의 수립12Ⅳ.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계 및 문제131.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계131) 시장의 사회, 정치적 기초132) 시장경쟁의 조건과 결과133) 힘의 논리에 의한 지배144) 자율적 시장과 세계 경제 위기142.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151) 경제적 불평등152) 실업자의 증가와 노동의 위기163) 복지국가의 해체174) 민주주의의 위기185) 외채문제의 악화186) 자연생태계의 파괴18Ⅴ.결론 및 제언19참고문헌21Ⅰ. 서론1. 연구목적세계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당시 세계화란 용어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세계화는 우리나라도 세계 선진국과 같이 더욱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어렴풋한 희망을 가지게 한 용어였다. 그러나 1997년 IMF경제위기가 발생한 이후 대량의 실업난으로 수 많은 가장들이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당하고 경제적 위기로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뉴스를 통해 심심치 않게 들어야 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들이 개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위기에 몰리는 모습을 처음 목격하게 된 것이다.대학을 진학하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 예를 들어 이혼이나 청소년 비행, 자살, 폭력 등과 같은 것들이 개인의 문제보다는 구조적인 문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경제체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또 지구 한편에는 비만과 성인병으로 수 없이 많은 재정을 지출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지구 한편에는 조를 극대화 하고 임금 노동자들의 불안한 생활을 야기할 뿐이다.더 나아가 환경에 대한 일국적 규제가 무너지면서 무절제한 개발로 생태계가 위험에 처했으며 빈곤은 아동과 여성을 값싸고 열악한 노동시장으로 내몰아 인권의 심각한 침해를 가져왔다. 또한 시장의 자유화와 불평등의 심화는 다양한 민족, 국가 간 분쟁의 공통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세계적 불행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가 인류를 자신에게 맹신하도록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역할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자유만능이다. 자본의 자유는 무제한 적이므로 어떤 평등과 공공성이 끼어들 틈이 없다. 두 번째는 경제만등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자유는 경제의 자유이다. 인간생활의 중심은 경제이지 정치나 문화가 아니다. 정치나 문화가 있더라도 경제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경제 논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세 번째는 이윤 만능이다. 자본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자유와 경제, 이윤만능의 생각은 다른 사고들을 마비시킨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한다.신자유주의라는 실제 그 자체도 선도 악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책들이 내포하고 있는 근저의 생각과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서 대단히 중대한 문제점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맞부딪혀 싸워야 하는 것은 허망한 신자유주의의 이론이 아니라 이런 결과들이 발생하게 하는 구체적인 지점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더 핵심적인 지점은 이런 신자유주의의 방상의 근원이 경쟁과 발전이라는 두 카테고리 안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두 지점을 어떻게 파괴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며 자연과 인간을 위한 것을 승화시킬 것이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2. 신흥시장경제국가의 외환위기세계화를 촉진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신흥시장 경제국가 등 일부 국가에서 발생된 외환위기와 대외채무 폭발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나 막대한 외환수요를 조달하기 위해후미국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소련도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의 건설을 전시동원 체제 형태로의 추진을 통해 사회의 통합을 유지하려 하였고, 군수산업을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결국 전후 미국의 헤게모니를 보장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 체제의 존재와 냉전체제였다.이러한 미, 소간의 뒷전의 공모는 사회주의제체 붕괴의 원인을 사회주의 내부에서만 찾을 수 없게 한다. 왈러스타인이 지적하고 있듯이 1968년 혁명은 서구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세력에 대한 반란이었을 뿐만아니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동구 및 소련의 공산주의 등을 포함하는 구좌파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 배경이 된 것은 베트남 전쟁을 통한 반전운동의 확산과 미국 경제의 쇠퇴였다. 점증하는 자본의 세계화와 전 세계의 지구촌화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를 사회주의 내부로 이전되도록 했고 사회주의는 기존의 외연적 성장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경제개혁을 위해 국제 관계의 탈 이데올로기화를 주창하고 당, 국가의 일체화 구조를 폐기하고자 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가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는 브르즈네프르이 독트린의 폐기를 위해 억눌려있던 공구의 인민혁명을 불러왔고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귀결되었다.유일한 사회주의 대국으로 남아있는 중국조차 경제적으로는 개방정책과 자본주의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사회주의 체제는 결국 역사 속에서 수명을 다하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어 나가면서 인류는 세계경제전쟁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모태로 하여 태어나서 그 속에서 그리고 그와 대결하면서 전개되다가 몰락하고 이제 다신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냉전체제의 해체는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로 이어지면서 세계화, 지역화, 지방화의 추세가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Ⅲ. 신자유주의의 이념1. 하이에크(F. A. Hayek)와 신자유주의지금의 신자유주미하는 것이 아니고 관습, 도적과 같은 추상적인 일반법을 가리킨다. 그는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자유사회는 ‘전통과 고리가 이어진 사회’라고 단언했다.하이에크는 여기에서 심각한 자가당착과 모순에 빠진다. ‘법 아래에서’와‘자유’란 두 개념의 기이한 조합은 바로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을 빠져나가지 귀한 억지논리인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자유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전통의 이름으로 항상 질서를 강요하는 사회적 보수주의로 빠진 것이다.경제적의와 관련하여 하이에크가 부르짖는 최대의 급진적인 주장은 사회정의와 분배정의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부정이다. 그는 사회주의는 결코 개인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 사회적 진화과정에서 불평등이란 생겨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진화의 자연스런 과정이므로 그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물질적 형편에서 남들보다 단지 앞선 것뿐이며 사회의 진화 속에서는 어떤 자들은 앞서고 어떤 자들은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은 자연현상이라는 이야기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에크의 정치경제학에서는 계급간의 이해충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하이에크는 심지어 가난한자, 노동자, 후진국들은 부자, 자본가, 선진국에 대해 ‘생명을 빚지고 있다’고 강변한다. 여기에서 부자들의 경제가 발전하면 가난한 자들은 그 넘치는 물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누수이론’이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하이에크의 사회철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회정의에 대한 그의 부정이다. 그의 사회철학에서는 애당초 ‘사회’란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사회는 스스로 행동하는 인격체가 아니라는 것이다.사회는 단지 그 구성권들이 만들어낸 어떤 정돈된 구조에 불과하며 따라서 사회가 마치 인격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으로 의인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회가 사회주의란 이념으로 있지도 않은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사회를 보고 보상해 내라고 하는 것은 억지라는 회의 한 부분이고 시장의 작동에 필요한 조건들은 사회적 관습이나 국가의 법적, 제도적 조치들을 통하여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로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시장기구의 작동이 스스로 조립기반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개발 국가들은 시장의 세계적 확산에 대응해서 사회를 보호할 장치들을 만들어 나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계시장은 기업들 간의 경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국가 유형들 사이의 경쟁이 일어나는 장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시장의 정치적 기초에 관한 문제와 직결되어있다. 세계 시장의 원활한 작동에 필요한 제반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세계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통합은 곧 위기의 빈번한 발생과 부적적한 위기 관리를 초래한다. 시장의 확대는 그에 상응하는 국내적, 국제적 조절체제의 설립을 필요로 한다.1) 시장의 사회, 정치적 기초시장의 자기조정기능은 노동, 토지, 자본과 같은 생산요소들을 완벽히 상품화 하여 수요와 공급의 관계 속으로 편입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어떠한 생산요소도 완벽히 상품화 될 수는 없다.시장의 국가에 대한 의존은 시장의 설립을 위해 필수적인 재산권의 설정이 국가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재산권이란 상품을 배타적으로 소유함으로서 오는 효용을 전유할 수 있는 권리이다. 시장거래란 바로 이러한 재산권의 교환을 의미한다. 그러면 재산권은 어떻게 설정되고 유지될 수 있는가? 재산권의 설정과 유지는 개인이나 자발적인 집단의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시장의 규모가 확대될 수록 이 방법은 현실성이 없다. 재산권을 설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가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특히 재산권이 배타적인 권리이고, 이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날 경우 제 3자에 의한 심판과 궁극적으로는 물리력의 사용을 통한 권리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재산권 설정 및 유지와 관련된 국가 역할의 중요성은 더욱 분명하다. 탈규제와 자유화를 주창하는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설립과 작동이 이 같이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 사실을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Ⅰ. 서론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22일∼11월 2일의 11일간 소련의 핵탄도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여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던 국제적 위기였다. 쿠바 미사일위기는 단순히 쿠바와 미국 간의 대치관계로만 볼 수 없는 사건이었고, 이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라는 양 극단의 냉전체제 속에서 벌어진 세계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결국 기존에 존재하던 세계적 갈등이 쿠바 미사일위기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었다.원래 소련은 쿠바 혁명에 대해 1960년까지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던 국가였으나,) U-2 스파이 비행기 사건으로 동서관계가 다시금 긴장되고 연이어 파리 정상회담이 취소되는 상황 속에서 소련은 쿠바와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경제원조에 덧붙여 쿠바에 대해 군사적으로 뒷받침 할 것을 약속하였다. 쿠바로서는 미국과의 대치 속에서 가장 원했던 소련의 군사적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더 큰 의미에서 이 조약은 쿠바가 미국 중심의 체제에서 이탈하여 사회주의 체제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의 급격한 관계 단절과 그 결과로 인한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쿠바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이 강한 것이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쿠바미사일 위기가 가지고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한 가지 사건 안에는 쿠바와 미국, 미국과 소련, 소련과 쿠바 각 국가의 힘의 역학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미사일 위기라는 사건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미국, 쿠바, 소련 각국 간의 관계를 살피며 세계체제 안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갈등이 이떻게 일어나는지 중심부-주변부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파악해 보고자 한다.Ⅱ. 미국과 쿠바1898년 쿠바는 미서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다. 글나 라틴아메리카 주요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달성했음에도 불구 하고 쿠바는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삶을 획득할 수는 없었다. 스바인들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구실을 들어 쿠바의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입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했다. 따라서 4년간의 군정 이후 쿠바를 떠날 때도 플랫 수정안을 통해 쿱의 주권을 제한했다.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쿠바는 외부의 힘에 의해 독립을 달성했고 또 그로 인해 독립 후에도 약 30년간 외부세력에 의해 주권을 제한 당해야만 했다. 플랫 수정안은 합법적으로 미국이 쿠바의 내정에 개입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다.후에 독재자가 되는 마차도를 비롯한 쿠바의 민주개혁 그룹들은 1933년 쿠바의 보다 큰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선린정책 원칙에 따라 플랫 수정안을 폐지하게 된다. 플랫 수정안은 폐지될 때까지 쿠바의 주권을 합법적으로 제한했다.그 후 쿠바는 일련의 쿠데타를 거친 후 바티스타 장기 독재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바티스타는 민주주의와 민족 주권의 확립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다. 따라서 미국은 여전히 쿠바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고 쿠바는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이런 쿠바의 반식민지 상태의 지속은 다른 어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해 쿠바가 왜 미국에 대해 보다 뿌리 깊은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쿠바 혁명 이후 1961년 1월 미국 대사관의 일부 인사가 쿠바 내에서 혁명에 대한 음모를 꾀한다는 이유로 카스트로 정부가 이들의 출국을 요구한 것을 결정적 계기로 미국은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 하였다. 그리고 그 때부터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4월에 피그만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미 의회는 같은 해 9월에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승인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62년 2월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양국간의 무역 중단을 선언하면서 다른 나라들도 이에 동참할 것을 종용했다.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압박은 결국 쿠바가 소련과 동구 국가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경때부터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 시점까지 미국의 쿠바에 대한 입장에는 국민적 합의가 존재했다.Ⅲ. 미국과 소련1960년 5월 1일 소련의 프레세츠크에 건설 중이던 대륙간 탄도탄 기지를 정찰하기 위하여 비행하던 미국의 U-2기가 스베르드로브스크 상공에서 격추되었다. 당시 조종사인 게리파워즈는 낙하산으로 긴급 탈출하였으나, 격추된 기체와 함께 소련 측에 사로잡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소련은 이를 미국의 국제법 위한 뱅위로서 간주하고 정치선전의 계기로 활동하였다.그 사건 이후 1960년 11월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케네디는 공화당 후보인 닉슨과의 선전에서 11만 5천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제 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미국은 소련에 대해서 격추된 게리 파워즈의 석방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행동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어느 후보가 미소 관계를 타개함에 있어서 보다 많은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선거에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흐루스초프는 닉슨보다는 케네디를 우화적인 인물이며 국제정치 경험이 적은 풋내기로서 간주하였고, 견고한 반공적인 태도를 보인 아이젠하워 정권을 상대로 하여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려 하였던 것이다.2차 세계 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의 초기에 미국의 대소정책은 핵무기의 독점을 통한 군사적 우위와 경제적 우위를 기반으로 한 봉쇄정책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재래식 군사력의 우세와 지리적인 위치가 제공하는 이점을 바탕으로 하여 미국에 대응하였다.그 후 1949년 9월 25일 소련의 핵보유 사실이 타스통신을 통해 발표되어 소련의 핵무장이 기정사실화 되었으나 적절한 운반수단을 개발하지 못함으로써, 1953녀까지는 미국 본토에 핵탄두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1945년 소련의 중?장거리 폭격기 개발로 인해 이러한 상황은 다소 만회되었으나 1961년 당시 미소간 핵 집중률은 미국이 70%로서 여전히 높 경쟁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또한 소련은 운반수단의 열세를 신속히 극복할 수 있는 대량생산능력 ICBM이나 장거리 폭격기 등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열세를 단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이는 소련지도부에 있어서 매우 유혹적이었을 것임이 틀림없다.그로 인해 당시 소련의 국방잔관이었던 말리노프스키와 국방성 대변인 겸 전략로켓부대 사령관이었던 비류조프 장군은 쿠바가 지니는 이러한 군사전략적인 가치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즉 쿠바에 소련의 핵 미사일 배치는 미국과의 핵 군사력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느 유혹적인 대안이었던 것이다.한편 흐루시초프 역시 쿠바 미사일 배치결정이라는 자신의 행위가 이른바 세력균형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역시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또한 소련은 미국에 비해 경제력에서도 뒤지고 있었기에 핵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기 위해 군사비를 더 많이 지출한다면 미국에 대한 경제적 열세는 더욱 심화딜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이상과 같이 당시 소련은 자국의 전략 핵 열세에 따른 위기의식으로 인하여 돌파구를 모색하던 시기였으며 흐루시초프의 케네디에 대한 인식이 유화적이며 국제정치 경험이 미숙한 상대하기 쉬운 인물과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려는 자신의 ‘소망성 사고’가 결부되어 쿠바 미사일 배치라는 매우 손쉽고 유혹적인 방안을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다.Ⅳ. 소련과 쿠바소련은 본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해 지리적인 거리감과 이 지역에서 미국의 우월한 지위로 인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 실례로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 있었던 라틴아메리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소련의 무관심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그 지역에서 출현한 급진적인 정치사회 혁명의 출현은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하는데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하였으며 쿠바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추진하였다. 이후 소련은 쿠바에 대량의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했으며 쿠바의 군사력은 곧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에 다음가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경제적인 측면에서도 1961년 당시 소련이 쿠바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4.8%, 동구권 국가들을 포함하면 전체의 72%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단지 4.1%에 지나지 않았다.즉 쿠바의 공산화는 라틴아메리키에 있어서 공산주의 운동에 새로운 양상을 초래하였다. 특히 소련이 쿠바에 대해 막대한 원조를 제공한 것은 쿠바가 중남미 공산주의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소련과 중남미 공산당과의 유대를 지속시키는 지역으로서 효과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이다.1961년 4월 17이 피그만 사건이 있은 후 카스트로는 소련에 보다 많은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쿠바의 태도는 소련에 있어서 어려운 정책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즉 미국의 침공이 실행되면 소련은 카스트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였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미사일 위기 이전에 “만약 펜타곤이 쿠바를 간섭한다면, 소련의 포병은 미사일로써 쿠바 인민을 지원할 것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쿠바를 보호하고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세력확장을 위한 모험을 감행할 의도를 천명하였다.이처럼 카스트로는 쿠바 국민에게 민족주의를 호소하는 한편, 자신과 쿠바의 생존을 소련에 의존하였다. 또한 피그만 사건 이후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선언함으로써 공산주의자를 지원하겠다는 흐루시초프를 단단히 묶어 두었다.1962년 미사일 위기 이전까지 쿠바와 소련간에는 상호이해의 일치가 많았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혁명을 계속 부각시키기 위하여 파나마, 베네수엘라, 페루 등에 혁명 수출이 필요했고, 소련은 미국의 뒤뜰에서 사회주의를 부르짖으며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카스트로가 필요했다. 당시 카스트로의 대 소련외교의 특징은 대내적으로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소련과의 대외적 연계를 전개하면서 안보유지에 역점을 둔 점이다.쿠바 미사일 배치목적에 대해서 흐루시초프는.
국가와 폭력1.서문FTA 반대 및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가 한창 진행되던 작년, 정부는 전투경찰을 동원해 최루물대포와 곤봉으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더불어 쌍용자동차 파업 때 정부가 보여준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들의 폭행은 책으로만 접했던 군사독재시절의 폭압적 탄압을 그대로 재현해 주는 것만 같았다. 시장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작아야’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의 ‘작은’정부는 시민들 앞에서는 너무나도 크고, 폭력적인 존재였다. 지금의 정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스스로를 ‘작게’하기보다는 군사력과 경찰력을 등에 업고 자신이 원하는 시장을 적극적 만들어가는 ‘거대한’국가, 시쳇말로 깡패 국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국내를 벗어나 국외를 보면 국가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 피의 역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과학 기술의 세기’로 여겨지는 20세기는 사실 끔찍한 ‘대량 학살의 세기’였는데, 이 사실은 20세기에 우리가 겪은 수 많은 전쟁들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세계대전만 하더라고 1차 대전 당시, 1000만명이 사망했고 2000만명이 다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대전에서는 무려 1억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었다. 1천 500만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3400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이다. 전쟁비용 또한 무려 1조 6000억 달러가 들었는데, 지금으로 따지자면 수백 조 달러의 돈이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데 쓰인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히틀러에 의해 600만명의 유태인이 무참히 학살된 홀로코스트, 일본의 군국주의자들로 인해 자행된 아시아 전역의 끔찍한 학살과 징용. 이 모든 것들이 모두가 ‘국가’에 의해 저질러 진 일이라는 사실이다.)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한국사회를 예로 들면 군부독재시절 자행된 고문, 구타, 살인, 강제 수감 등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의 기억은 국민들 안에서 경제적 발전을 위한 수 있다.초등학생 강간, 토막 살인과 같이 개인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서는 쉽게 분노하면서도 수십 만명이 찢겨죽고, 수 백건의 강간이 전략적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거나, 오히려 ‘정의’ 또는 ‘경제적이익’을 구실로 정당화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국가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이 글은 국가와 폭력의 관계에 대한 관심과 우리가 인식하는 국가에 대한 초월적인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수 많은 폭력을 저지른 국가는 ‘폭력’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 한마디로 결코 폭력과 거리를 둘 수 없는 존재라는 가설에서 이글은 출발한다.우선 근대국가와 폭력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자유주의와 맑스주의의 시작을 살핀 후 근대국가의 특성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이다. 근대국가의 특징으로는 폭력수단의 독점적 통제, 영토권, 주권, 입헌선, 공공관료제, 권위의 정당성, 시민권, 징세 등이 있다.) 여기에 언급된 근대국가의 여러 특징들이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자연스레 언급되겠지만, 이글에서는 특별히 관료제와 경찰제 형성과정에 주목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징세나 주권 등과 같은 다른 근대국가의 특징들은 결국 관료제와 경찰제를 전제로 이루어지며, 또 국가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형성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관료제와 경찰제이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는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는 틸리의 말에 따라 어떻게 국가가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역사적 맥락을 살펴 볼 것이다. 이로 인해 국가의 존재는 태생적으로 ‘폭력’을 품고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려 한다.2. 근대국가와 폭력에 대한 자유주의와 맑스주의 시각근대 국가의 본질은 주로 ‘일정한 영토적 공간에서의 폭력의 합법적 독점체’라고 규정된다.) 근대로 이행하면서 근대 국가라는 영토적 경계내에 존재하는 일체의 무장력이 국민국가에 집중됨으로써 폭력의 독점이 나타나게 되고 이것이 법적?합리적 절차에 의해 공 국가의 자기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질서와 평화, 공공의 복리라는 더 큰 가치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사적 소유권 및 사회적 강자의 권리를 배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부당한 권력을 행사해 왔으며 각종 사적 폭력을 조장해왔다. 또 절차의 공정성과 합법성 속에서 국가폭력의 실체는 은폐되기도 했다.한편으로 폭력의 국가 독점과 법에 기초한 형벌, 인신적 처벌의 금지는 근대 국가의 문명화된 측면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법은 특정 국면에서 국가폭력이라는 또 다른 강제력 사용에 압도당하기 십상이다. 그것은 20세기 독점 자본주의?냉전 자본주의와 그 상부구조로서의 파시즘과 군사독재체제가 법의 지배 등 형식적 차원의 민주주의조차 부인하고 공공연한 폭력을 다반사로 행사해온 데서 잘 드러난다.한편 맑스주의 정치학과 사회학에서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언어는 국가의 계급성과 함께 국가의 폭력성이다.) 맑스주의에서는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라고 인정하면서 그 폭력의 목표가 바로 경제적?계급적 지배질서의 재생산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근대국가의 집행부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항을 다루는 위원회일 뿐”이라는 말과 엥겔스가 국가는 공권력의 수립을 기본특징으로 하며 이런 공권력은 “무장기구뿐만 아니라 물질적 부속기관, 감옥 그리고 모든 종류의 강제기구들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국가는 폭력과 권력행사를 계급에 따라 다르게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이러한 맑스주의적 논의를 따를때, 국가는 기본적으로 계급성과 폭력성을 갖는 실체로 규정될 수 있다. 계급성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가 기존의 경제적?계급적 지배질서에 대해 정치적 보증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시기에 국가라는 정치적 존재는 당시의 경제적?계급적 질서에 반하는 행위들을 통제하면서 그 질서의 재생산을 정치적으로 보증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배질서의 보증의 ‘수단’이 바로 폭력이 된다. 국가는 지배적인 경제적?계급적 질서에 저항하립과 운용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세금의 징수와 국가경비 지출의 효율적 관리는 결국 국가의 물리적 능력의 신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다. 이는 효율적인 관료제의 운용에 의해서 가능하다.(국가)통합의 과정을 부추겼던 동인은 단순하다. 팽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건제의 시기에 통치계급의 구성원은 모두 물리력을 통한 경제력의 획득이라는 경쟁의 대열에 가담하였고, 왕가가 지배가문으로 우뚝 서게 되면서 ‘국가’는 전쟁기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행정기구가 갖추어졌다. 권력의 분해를 막기 위해 정 기구에는 귀족이 배제되고 성직자, 외국인, ‘미천한’부르주아들이 충원되었다.)관료제의 성립에 대한 여러 논의에도 불구하고, 근대 국가 발전과 관료제의 상관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관료제는 국가 간의 경쟁의 산물이라는 관점이다. 즉, “체제 전환기인 17~18세기에 국가 간의 전쟁이나 식민지 쟁탈이 대표하는 외적인 압력과 지방에 분산된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내적인 압력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부구조가 관료제적 모습을 띄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관료제의 확대를 근대국가의 중앙권력의 확대로 해석하는 접근이다. “중세의 계속되었던 권력 중추들 간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영토 국가의 군주가 다른 권력을 점차 자신의 지배권력으로 흡수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중세 봉건제하에서 편린적으로 존재하였던 권력이 중앙집권화 과정 속에서 국가권력으로 통합 흡수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일부 연구에서는 관료제가 갖는 성격의 차이가 결국에는 국가의 성격, 보다 자세히는 국가의 자본주의화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자원을 수취하고 동원하는 것은 그 국가의 경제가 얼마나 상업화 되었는가에 달려있음으로 이는 상업화가 진전된 국가일수록 관료제화가 더디게 나타난다는 말이 된다.” 전체적으로 볼때, 관료제 형성에 대한 연구는 근대국가가 효과적인 폭력수단으로서 관료제를 어떻게 확보하게 되었는가인 폭력적 저항에 대하여 대응하고 있다. 셋째, 경찰력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서 이전의 지역사회가 갖는 권위를 훼손시키면서 새로운 볍과 질서라는 임무를 발전시켜 나갔다. 말하자면 윌리암이 상당히 냉소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경찰력의 발전이)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설명과는 달리, 새로운 경찰체제는 범죄율의 증가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찰력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자신의 가치와 질서를 나머지 국민들에게 강요하기 위한 사회적 통제의 도구로 만들어 졌던 것이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찰력은 근대국가의 행정력의 확대와 그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근대국가 형성기에 경찰의 임무와 세리의 역할은 하나의 관할구역에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근대국가에서 지방에 대한 중앙권력의 확대를 통해서 징세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사회적 불안을 극복해가는 과정이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경찰력의 신장은 내적 안정도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경찰조직은 국가로 하여금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 끊임없는 자신의 존재감을 만들어내고 아울러 순찰과 감시를 통해 일상화된 통제를 실행하게끔 하였다. 또한 경찰조직은 국가로 하여금 폭력사태나 다른 비상시에도, 군대의 이용이나 군사적 파견없이도, 지속적으로 권력에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특히 기든스의 경우는 감시 능력의 신장과 경찰력의 확대가 근대 국가의 주요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즉, 근대에 있어서 겨찰력은 감시와 그것을 용이하게 만드는 정보의 통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근대국가가 성장하면 할수록 도시에서 시골까지 전국방방곡곡 전체를 통제, 관리 및 감독할 수있는 경찰력이 확대되어 간다.4. 근대국가와 폭력의 연관성-국외적 측면근대국가 형성자체는 전쟁과 분리하여 접근할 수 없다. 전쟁과 관련되는 국가의 속성에 대하여 무정부주의자인 크로포트킨은 다름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국가란 전쟁과 동의어이다. 전쟁은 유럽을 황폐와 시켰다. 그러나 국가는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전쟁없이 .
베트남 전쟁-제2차 전쟁을 중심으로1.분쟁의 배경1-1 베트남인들의 민족해방투쟁베트남은 1000여 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10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배의 틀 속에서 살아왔다. 중국은 오랜 기간 남쪽 끝에 위치한 베트남을 남쪽의 야만 국가라는 뜻의 남만국이라 불렀다. 중국의 통치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214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지배는 천년을 넘게 지속된다. 프랑스가 자국 자본주의를 위한 식민지 시장 획득을 위해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에 나선 것은 1850년대 였으며 이러한 때에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선교사 및 베트남인 카톨릭교도의 살해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프랑스에 베트남 침략의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프랑스는 1858년 위와 같은 구실아래 다낭항을 포격하여 본격적 침략에 착수한 이래, 메콩강을 낀 비옥한 평야지대로 사이공을 중심으로 하여 코친차이나(남부베트남지방) 공략에 나서 1862년까지 코친 차이나의 중요지역인 동부 3성을 점령하였다.이후 1867년 코친차이나의 서부 3마저도 점령한 프라스는 1973년 말에는 통킹의 하노이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제 만족하지 않은 프랑스는 중국의 운남성에 인접하여 통킹점령에 본격적으로 나서 주요 지역을 점령하고 구엔왕조가 있던 안남지방의 후에로 진격하였다. 결국 1883년 아르망 조약을 통해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게 되고, 1884년 6월에 빠뜨노트르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의 베트남 정복은 완성되었다.프랑스의 대베트남 통치방식은 베트남 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가족제도 및 촌락 공동체 등 전통적인 정치, 사회제도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토착인들의 반발 특히 문신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압박으로 인해 프랑스 식민지배하에 있는 베트남의 이러한 사회, 겨제적 상황은 반식민주의 민족해방운동의 배경이 되었다.그리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통치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아시아의 신흥 제국주의 세력인 일본의 도전을 받게 외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되었다.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임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 독립을 선포하였다. 같은해 9월부터 연합군이 베트남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프랑스는 일본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재 지배하기 위하여 중국 군대의 북부 철수를 중국내의 프랑스 이권을 포기한다는 교환조건으로 장개석 정부를 유화했다. 그래서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 진주했던 중국 군대가 철수하자 프랑스 총독부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우고 북부지역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1-2.미국의 헤게모니 장악트루먼 대통령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인식은 1945년과 1952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945년에 프랑스와 호치민 사이에 적대감이 유발되었을 때 트루먼은 호치민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이 전쟁이 프랑스 자체문제로서 인식했고 프랑스가 그들의 식민지 야망을 채우려는 전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복귀를 반대했고 그 대신 신탁통치형태를 구상했다. 이것은 루스벨트로 이어진 미국 정책에 여전히 반영되었다.그러나 중국본토에서 미국의 예상과는 반대로 장개석 정부가 패망하여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한국전쟁을 치른 미국으로서는 제네바협정이란 자유진영에 있어서 커다란 재액이라고 생각하고 이후 20년 동안에 걸쳐 미국의 ‘동남아세아정책’을 규정하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월남을 공산주의자에게 정복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과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포위정책의 정치, 군사적 기지망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베트남에 개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베트남의 항불 민족 해방 투쟁을 전적으로 강산주의 대 민족주의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난 뒤,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전쟁에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부정하고 바오다이 정권을 인정하는 한편 국제무대에서 동맹국들에게도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초기 개입은 정치적 론 남부에서도 호치민 정부에 압도적 지지가 보내질 것을 우려하여 사이공 정권과 미국은 호치민 정권이 민주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북베트남과의 협의에 의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협의 당사자로서 협정 이행의 책임자였던 프랑스가 군대를 철수 시켜 버림으로써 선거는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1945년 이래 베트남은 완전히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 시점에서부터 제2차 베트남 전쟁, 즉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정책은 바로 자유진영의 보호자, 또는 후견인으로서 역하을 수행하겠다는 패권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2. 전쟁의 과정2-1. 전쟁의 양상?공습미국은 남베트남?북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를 폭격했다. 전폭기가 8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전국 전체가 사용한 폭탄보다 무려 세 배나 많은 양으로, 그 파괴력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 640개와 맞먹는다.미국인 5만 8000명 이상이 베트남에서 사망했다. 남베트남 군인 사망자 수는 무려 25만명이었다. 베트콩과 민간인 사망자 수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는 실정이다. 베트남 측의 추산치가 더 높기는 하지만 대개 150만~2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수십만 명이 이상이 사망했다. 인도차이나에서 이 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공급으로 사망했다.베트남군인은 전투병이 25만~30만 명 정도였다. 절정기에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군의 규모는 50만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겨우 6분의 1만이 전투 부대였고, 나머지는 지원부대였다. 지상에서 베트남군대는 미군 전투 부대보다 세배나 네 배 많았고, 마을 사람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펜타곤과 백악관은 포병과 항공기를 동원해 지상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다. 그들은 남베트남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그리하여 여러 해 동안 북베트남을 폭격했다. 북베트남에서 특히 집중적으로 폭격을 당한 곳은 병원?학교?교회였다. 1967년 북베트남에서는전쟁을 이끌었던 미국의 정치인들은 자기 자식들은 전쟁터로 내보내지 않았다. 교전에 참가한 미군 병사의 약 80%가 블루칼라 출신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징집이 되어 전쟁터에 갔던 것이다.지산전의 논리도 공급과 동일했다. 미군 병사들과 해병대원들은 대부분이 게릴라를 지원하는 국민과 맞서야 했다. 더구나 게릴라가 미군의 수를 압도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모전”이라고 부른 전략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베트남인이 사망하면 그가 민간인이든 게릴라든 상관없이 전부 적군 사망자로 계산했다. 사실상 미국의 전략은 베트남인들이 굴복할 때까지 그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부대는 수색정찰을 통해서만 게릴라와 싸울 수 있었다. 게릴라들이 공격을 개시하면 지상의 미군은 포병 지원이나 폭격기 동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사망한 미군의 15~20%는 ‘아군의 오폭’으로 죽었다.) 자신들이 요청한 포격과 항공 지원 때문에 죽은 것이다. 미군 사망자의 20~25%는 지뢰를 밟고 죽었다.2-2. 게릴라베트남 군인은 터널에서 살았다. 그들은 밤에 터널에서 나와 미군을 한 명씩 살해했다. 그리고 다시 터널로 숨었다. 뚜껑문은 나뭇잎으로 위장했으며, 일부 저격병들을 가시 철조망으로 둘러쌓인 미군 기지 안까지 들어가기도 했다.전쟁이 계속되면서 게릴라들은 미군 수색정찰 부대가 흘리는 음식들(통조림, 초컬릿 등)을 모아 식량으로 삼았다. 더불어 미군의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다. 1966년 꾸 찌에 주둔한 어느 미군 대대는 한달 동안 포탄 18만 발을 사용했는데, 그렇게 사용된 탄약의 상당량이 폭발하지 않았다. 게릴라들은 그것을 가지고 터널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조작해 지뢰로 바꾸었다. 그들은 미군이 버리고 간 콜라 캔으로 수류탄을 만들기도 했다.?여성의 경험베트남은 오랜 성매매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인 들이 들어오고 도시에 새로운 부자들이 생겨나자 성매매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성과 남성, 어린이가 살기위해 그 일을 해야 했다. 성매장려할 때 강간이 일어난다. 이처럼 미군은 마을주민들을 습격하기 이전에 여성들을 욕보인 후 학살을 자행해왔다.3. 미국 내부의 움직임3-1.미국 내 저항운동해병대가 베트남에 도착해 대규모 부대편성을 시작하기 3주전에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의 학생운동도 시작됐다. 1965년 3월 미시간 대학교에서 교수 30명이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화를 지지하고 반전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교수 50명의 지지 성명을 받아 ‘전쟁에 반대하는 대형교실’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대학 당국의 위협으로 인해 성공하진 못했으나 그 대신 베트남 전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관심있는 학생들 3000명이 나왔고, 그들은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전쟁 문제를 토론했다. 그 해 봄 100개 이사의 대학교에서 토론회가 열렸다.민주학생연합은 1965년 4월 17일 워싱턴에서 전국 시위를 벌이자고 호소했고, 거기에 2만 5000명이라는 놀라운 규모가 모였다.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자 흑인이었던 무하마드 알리는 징집을 거부하면서 베트남 전쟁을 거부했다. 그는 감옥에 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으며, 권투를 하는 것도 금지당했으나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마틴 루터 킹 또한 전쟁에 반대하며 여러 지역에서 연설을 하였다.중간 계급보다는 노동계급의 반전 정서가 더 강했다. 노동 계급의 자식들이 베트남에서 돌아오고 나서 한참 뒤에야 텔레비전이 전쟁 반대로 돌아섰다. 대다수 중간 계급은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텔레비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변화는 노동계급에서부터 시작되어져 왔던 것이다.1967년 4월 15일 30만 명이 뉴욕에서 반전 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10월 20일 시위대는 워싱턴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펜타곤까지 행진할 예정이었다. 백인 젊은이들로 느슨하게 구성된 시위대로 인해 펜타곤에서는 군대가 출동했다. 지배계급의 자녀들 중 상당수가 그 시위대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위로 인해 전쟁 반대 행동이 정당화 되었다. 매번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
미국의 중동정책 평가1. 미국의 중동정책 기조21세기의 화약고 중동 국가 간의 갈등 속에서 강대국들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2차 세계대전에 시작된 유대인과 아랍민족의 국가건설에 대한 영국의 이중적인 조약으로 인해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이유 없는 죽임을 당해야 했던가. 더불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제국화를 추구해온 미국의 손길은 중동 곳곳에 닿아있다.냉전시기 미국의 대중동 정책기조는 소련의 남하정책 봉쇄,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 이스라엘의 안정 보장이었다. 미국은 유럽, 중동, 동북아시아로 이어지는 소련 봉쇄선을 설정하고 각 지역에 지역 안보기구를 구성하여 소련의 남하를 저지했다.) 또한 에너지 확보와 통제를 위해서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연안의 석유 생산국들을 친미 국가로 만들어서 석유를 통제할 수 있었다. 즉 이들 국가의 안보와 미국의 석유 통제를 통해 상호 이해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미국 내 유대인 로비단체들의 영향으로 미국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왔다.그러나 탈냉전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의 위협’이 아닌 ‘이슬람으로부터의 위협’, ‘테러집단의 위협’을 강조하시 시작했고, 석유의 지속적인 통제, 이스라엘과 중동국가들 간 또는 중동에서 패권을 확보하려는 국가들 간 세력 균형유지, 그리고 중동지역에서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할 필요성이 증대했다.미국의 중동정책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9.11 사건이었다. 미국은 9.11 사태를 명분으로 2001년 아프간을 공격했고, 2002년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언제든지 위협을 방지하기 위한 ‘예방전쟁’을 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결국 2003년 3월 미국은 알카에다지원 및 대량 살상무기 생산들을 이유로 이라크를 선제공격했다. 클린턴 정부와는 다르게 부시정부는 도덕적 절대주의, 패권적 일방주의, 공세적 현실주의에 기초하여 더욱 더 강력한 군사외교정책을 발표하며 초강경 군사외교 정책을 천명했던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활용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시리아, 이집트 등 주변 중동국가들의 변화를 추진하여 과거 친미국가와 반미국가로 양분된 구조를 뛰어넘어 보다 더 포괄적인 중동질서의 재편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친미 연합전선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입지를 강화시켜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2.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더불어 미국은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중동정책에서도 지나친 이스라엘 편향정책을 취함으로써 아랍에서 미국의 역할에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특히 미국은 이스라엘에 어떤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거부해왔다. 한 예로 2004년 12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인권을 침해하는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결의안이 표결에 붙여질 때 미국은 호주와 함께 이스라엘 편에 서서 반대표를 던진 것)을 통해 미국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지 스스로 증명한 샘이다.미국과 이스라엘의 전략적 관계는 냉전, 아랍세계에 대한 서구의 영향력 쇠퇴, 중동에서 반서구 민족주의 운동의 출현, 그리고 미국 선거구에서 이스라엘의 점진적인 영향력의 증대로 점차 발전했다. 그 결과 미국은 중동에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상당량의 소련제 무기를 미국에게 제공하여 그 전략적 동맹국으로서의 잠재력을 입증했다.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지원이 증가하면서 경제 및 군사적 지원이 병행되어쏙 그것은 기하학적으로 늘어났다.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450%가 증가했다. 이스라엘이 소련을 경제하는 핵심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지원이 상당히 증가했다. 키신저는 “중동 국가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자 닉슨정부는 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고 아랍 급진주의자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아랍 온전주의자들을 격려하고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전략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1973년 전쟁에서 패배할 위기에 처하자 닉슨은 800%를 늘린 유례없는 미국 최대의 공수로 전면적인 군사지원과 총 20억 달러가 넘는 군사지원을 명령했다.최근의 전반적인 대외지원의 감축에도 불구하고 미 의회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지원의 수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의가 없다.3. 미국과 중동 평화문제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간의 갈등이 시작된 이래 미국은 쟁점문제, 즉 난민, 국경선, 예루살렘, 수자원분배 및 이스라엘의 안보 관계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1948년 이후 미국의 모든 대통령 혹은 국무장관은 이 항목들의 협상에 나름대로 평화안을 제시했다. 그 제안에는 아랍 난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케네디 대통령의 계획, 닉슨과 포드 행정부의 국무장관 헨리키신저의 불개입 협정,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평화조약을 성사시킨 카터의 중재, 레바논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레이건의 시도, 부시의 마드리드 중동 평화회담 개시, 그리고 클린턴의 다양한 제안들과 이스라엘, PLO 및 시리아간의 중재들이 그것이다.중동 평화 과정에서 미국의 정책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지역 동맹국으로 인식되기 이전,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아랍 난민들의 귀환권 허용, 분할선을 넘어가는 자치령의 양도와 같은 문제에서 양보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통해 군사력을 얻게 되면서 압력은 줄어들었고 미국의 요구도 훨씬 위협적이지 않게 되었다. 미국의 예루살렘 정책은 그러한 변화로 특징지어진다.미국의 예루살렘 정책은 행정부마다 큰 변화가 있었다. 1947~48년 미국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아랍인과 유대인의 소유권 주장에 대하여 국제도시로 지정하자는 유엔분할안에 찬성했다. 1948년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에 도시를 양분하면서 미국은 기능적 국제화에 찬성하지만 영토상 국제화에 대한 지지를 포기했다. 즉 도시의 행정관할권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에게 남겨주고 성지는 각자의 신앙에 따라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1949년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했지만 미국은 자국 대사관을 텔 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미국의 대 예루살렘정책의 변동은 다른 주요 항목에 대한 정책변화와 유사하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유대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이 점점 줄어들었다. 미국의 중동정책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88년 PLO와의 협상 재개 결정이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라기 보다는 난민문제로 인식되었고, PLO는 테러집단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은 1993년 오슬로 회담부터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이전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일련의 협상에서 주요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 전략적 관계에 기초한 미국의 중동정책은 중동평화문제에서 커다란 장애요소로 나타나고 있다.4. 미국의 중동정책 평가미국은 과연 중동의 평화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이라는 국가는 이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나타나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성향은 미소중심의 냉전체제가 끝난 이후부터 더욱 노골화되어왔다. 9.11 사태 이후,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강행했던 대이라크전쟁을 통해 미국은 결코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