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설문의 필요성 및 목적10대 청소년들의 가장 주된 문화이자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 중의하나는 팬덤문화이다.팬덤이란 팬(fan)과 세력범위 등을 의미하는 접미어-dom이 결합된 말이다 좁게는팬 의식(consciousness) 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포괄적으로는 팬이라는 현상과 팬으로서의 의식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팬덤이란, 팬이 팬인 자신을 포함한팬 집단 내무에 대해 팬덤의 대상인 스타 및 스타를 둘러싼 외부 환경에 대해 가지고있는 의식이자, 이러한 것들과 관계 맺고 행동하는 방식이 현상적으로 가시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지(2003).한국의 팬덤문화는 가수 조용필의 등장과 그의 팬들의 모임인 ‘오빠부대’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뒤이어 팬덤문화의 본격적인 활동을 일으킨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팬덤문화는청소년들의 하위문화로써 자리를 잡아 갔으며, 2000년대 아이돌 가수들이 등장하자많은 팬클럽들이 생기면서 팬덤문화는 청소년들의 주문화가 되었다.팬덤문화 초기에는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나 연예인에게 환호하고 좋아하는 것에만 이르렀다면 현재의 팬덤문화는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기도 한다.이에 대표적인 예가 팬들의 사회기부이다.예를 들어 2010년 발생한 아이티 지진 때 가수 김현중의 국내외 팬들이 연합하여참사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티를 위해 UN에 성금을 전달했다.팬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2230만원을 `한국의 젊은 스타, 김현중의 한국과 해외 팬`이라는 이름으로 유엔(UN)의 중앙긴급대응기금(CERF)에 기부했다.그간 유엔으로 여러 국가와 기업 그리고 NGO들의 성금이 전달됐으나 이번처럼 팬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기부된 것은 처음으로 알려졌다.[이데일리 SPN 박미애 기자]이렇듯 연예인을 향한 사랑이 사회적으로 도움의 손길로 변화하면서 성숙한 팬문화를만들어 가고 있다.하지만 팬덤문화에 긍정적인 변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팬덤문화를 이루고 있는 팬클럽은 팬들의 의무를 룰로 정하고 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조금이라도더 많은 자리 확보를 위해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서로 응원하는 스타를 두고 음해성소문을 만들어 사이버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10여년전 최정상에 서있던 남자그룹 멤버와 여자그룹 멤버와의 열애설 때 일어난 사이버 테러는 여자 연예인들이 한동안 연예계활동을 중단해야 했을 만큼 심각했다. 또한 몇몇 열성 팬클럽 회원들은 가출까지 감행하면서 팬클럽 활동에 매달려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문제까지 야기되었다.최근에 팬덤문화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있다.2003년 한국일보에 실린 청소년 살인 사건이 있었다.2003년 11월 인기댄스그룹 팬클럽에서 만난 또래 여학생을 구타해 숨지게 한 뒤 사체를 집에 사흘간 방치해 파문을 일으켰던 ‘팬클럽 살인사건’의10대 피의자 두 명이 법원의 선처로 징역형을 면하고 소년원에 가게 됐다.이렇듯 팬덤문화는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우리는 팬덤문화가 청소년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특히, 청소년기의 가장 큰 발달과제인 자아정체감과 연관지어 팬덤문화가 청소년의자아정체성에 혼란을 주는지 알아보고자 연구를 하고자 한다.◎ 설문 대상 및 연구방법설문대상설문은 인천시와 파주시 소재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다.아동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에 있고, 자아정체감이 중학생에 비해비교적 더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요인들이 미치는 정체감에 대하여정확히 판단하리라 생각되어 본 연구의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팬덤 문화팬덤 문화란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의 팬(fan)과 '영지(領地)·나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이다.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거나몰입하여 그 속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뜻한다.(네이버 백과사전)팬덤 문화에 빠진 청소년이라 함은 팬클럽 등의 가입하거나 특정연예인을 보기위하여공개음악방송에 다니고 연예인의 집앞에서 연예인을 위해 기다리는 일명 사생팬들을의미한다. 사생팬(私生-fan, 연예인의 사생활지만 그에 비하여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을알게되었다.하지만 청소년에게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다는것을 설문을 보면 알수가 있다.많은 시간을 팬을 위해 투자하며 작은 용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선물과 공연을 보기 위해서차비로 이용하고 그들을 위해 선물도 구매하며 더욱더 심각한것은 많은 시간을 학업에 열중해야 할 시기에 그걸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투자 한다는것을 알수가있다.개인적으로 청소년들이 가수를 좋아하고 그것을 위해 투자는 할 수가 있다고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청소년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서 까지 가수를 위해 활동을 한다면그들의 중요한 시기에 많은 악영향을 끼칠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건전하게 가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문화는 그들의 하나의 스트레스 해소와 많은 문화를 접할수 있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단점이 더 많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서 가수를 사랑하는 팬덤 문화를 이루어 나가면 좋을거같다.Ⅰ. 귀하에 인적 사항에 관련된 질문입니다.1. 귀하의 성별은? ① 남성 ② 여성2. 귀하의 나이는? ④ 17세3. 귀하가 살고 계시는 지역은? ⑪ 전라도4. 귀하의 월 용돈은 어느 정도 입니까? ① 5만원미만5. 귀하의 학교성적은 어느 정도 입니까? ① 상6. 귀하의 친구관계는 어떠한 편입니까? ② 좋음번호문 항매우그렇지않다그렇지않다보통이다그렇다매우그렇다1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다른 사람에게자랑하고 추천하고 싶다.⑤2나는 다른 어떠한 가수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⑤3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에게 감성적인 애착을 느낀다.⑤4나는 좋아하는 가수에게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④5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⑤6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서 쓰는 비용(돈)이 많을 지라도 지속적으로 좋아할 것이다.④7나는 좋아하는 가수를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가능성이 크다.⑤8나는 현재 좋아하는 가수를 계속해서 좋아할것이다.⑤9나는 다른 가수의 팬으수의 음반을 1집부터 지금까지 앨범을 총 몇 개 나 가지고 계십니까?③4-6번16일주일에 좋아하는 가수를 보기 위해다니는 행사(공개방송, 각종행사 포함) 횟수는 얼마나 됩니까?②1회17좋아하는 가수가 음악방송에서 이번 앨범을 활동할 때 순위를 높이기 위해 문자 투표, ARS, 인터넷투표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까?⑤10번이상18선물을 보낸 횟수는 얼마나 되십니까?①0번Ⅱ. 가수에 대한 충성도에 관련된 질문입니다.2. 좋아하는 가수(그룹)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소녀시대 )3. 팬 활동의 좋은 점을 적어주세요(1가지 이상)( 나를 웃게 만들어준다 )4. 팬 활동의 나쁜 점을 적어주세요(1가지 이상)( 돈이 많이든다 )Ⅲ. 자아정체감에 관한 질문입니다.문항내?????????????? 용매우 그렇지않다그렇지 않다보통이다그렇다매우그렇다1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④2나는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⑤3나는 대체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③4나는 다른 사람들만큼 일을 잘 할 수가 있다.④5나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④6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③7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대체로 만족한다.③8나는 나 자신을 좀 더 존중할 수 있으면좋겠다.②9나는 가끔 나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느낌이 든다.④10나는 때때로 내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생각한다.②Ⅰ. 귀하에 인적 사항에 관련된 질문입니다.1. 귀하의 성별은? ① 남성2. 귀하의 나이는? ? 19세3. 귀하가 살고 계시는 지역은? ? 대구4. 귀하의 월 용돈은 어느 정도 입니까? ① 5만원미만5. 귀하의 학교성적은 어느 정도 입니까? ① 상6. 귀하의 친구관계는 어떠한 편입니까? ② 좋음Ⅱ. 가수에 대한 충성도에 관련된 질문입니다.번호문 항매우그렇지않다그렇지않다보통이다그렇다매우그렇다1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다른 사람에게자랑하고 추천하고 싶다.⑤2나는 다른 어떠한 가수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⑤3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에게 감성적인 애착을다.⑤11몇 개의 팬카페에 가입 하셨습니까?(팬카페란, 다음이나 네이버에 있는 카페)③2개12몇 개의 팬클럽에 가입 하셨습니까?(소녀시대의 경우, ‘소원’같은 팬클럽)①0개13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좋아한 기간은 얼마나 되셨습니까?③1년 이상~2년미만14좋아하는 가수의 현재 활동하는 앨범을 몇 장 가지고 계십니까?⑤4장 이상15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1집부터 지금까지 앨범을 총 몇 개 나 가지고 계십니까?②1-3번16일주일에 좋아하는 가수를 보기 위해다니는 행사(공개방송, 각종행사 포함) 횟수는 얼마나 됩니까?①0회17좋아하는 가수가 음악방송에서 이번 앨범을 활동할 때 순위를 높이기 위해 문자 투표, ARS, 인터넷투표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까?⑤10번이상18선물을 보낸 횟수는 얼마나 되십니까?①0번2. 좋아하는 가수(그룹)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소녀시대 )3. 팬 활동의 좋은 점을 적어주세요(1가지 이상)( 아이돌 가수들이 성장해가는 모습과,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자아실현에 대한 동기감 부여 받음)(응원하는 가수가 1위에 올랐을 때, 이에 일조한 팬으로서 성취욕과 승리감을 함께 느낄 수 있음)4. 팬 활동의 나쁜 점을 적어주세요(1가지 이상)( 경제적 문제가 다소 발생 )Ⅲ. 자아정체감에 관한 질문입니다.문항내?????????????? 용매우 그렇지않다그렇지 않다보통이다그렇다매우그렇다1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④2나는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④3나는 대체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②4나는 다른 사람들만큼 일을 잘 할 수가 있다.④5나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②6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④7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대체로 만족한다.③8나는 나 자신을 좀 더 존중할 수 있으면좋겠다.④9나는 가끔 나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느낌이 든다.③10나는 때때로 내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생각한다.②Ⅰ. 귀하에 인적 사항에 관련된 질문입니다.1. 귀하의 성별은? ① 남성2. 귀하의 나이는? ? 19세3.
화창한 봄날 주말여행이라는 기대감에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과 선배들이랑 화순 운주사를 가자고 약속을 하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전라도 살면서 말로는 많이 들어봤지만 막상 갈려니 운주사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이 없는거 같아 운주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보물 3개에 수많은 탑들과 석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천불천탑 운주사 이름만으로도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일어난 아침이라 몸도 산뜻하고 흥분이 되었다. 약속 시간이 다되어 형들이 차를 가지고 되리로 왔다. 차를 타고l 신나게 달려 경부 고속도로와 호남 고속도를 가로 지르면 고향인 전라도 땅으로 향하였다. 조금씩 집과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날씨는 나에 고민을 아는 것처럼 화창하게 맞이하여 주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을꺼 같은 우리에 답사는 광주에서 틀어졌다. 형들에게 다소 생소한 난폭한 운전에 다향하게 되었다. 이러다 일어난 접촉사고 다행히 다친 사람들은 없었지만 차가 조금 다쳤다. 당황하였지만 침착하게 미안하다고 하였다. 생각했던 대답과 다르게 괜찮다면 그냥 가라고 하시는 아저씨에 인사에 우리는 감사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네비게이션에 도움으로 힘들고 힘들게 운주사를 찾아 갈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다친 차를 확인하고 운주사 일주문으로 향하였다. 입장료를 계산하고 일주문에서부터 사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는 것은 9층석탑 이었다. 많은 절들을 답사를 다니고 보았지만 9층석탑은 흔히 있는 석탑이 아니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석탑들은 정형화 되어있는 3층석탑들이 보통 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이탑은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탑이며 탑에 새겨진 무늬도 마름모꼴이여 신기하였다. 또 특이한 점도 기단석이 보통 다듬어진 돌이면 높은데 반해 기단석이 낮고 기단석을 잘라서 운반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탑이 운주사에 중심탑 이라 하여 돛대탑 이라고도 불려 진다고 한다. 다음으로 둘러본 곳은 7층석탑들 이었다. 첫 번째 7층 석탑에 느낌은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고 옥개석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그리고 백제 시대의 탑인데 신라시대의 탑의 형식과 비슷한 것도 특징이었다. 두 번째 7층석탑은 탑신에 개성적인 교차문양을 갖고있는 날렵한 인상의 석탑이었다. 그리고 네개의 돌판을 이어 올려 육중한 옥개석의 무게 중심을 지탱하고 있는 그 신비로운 건축술을 생각해보면 조상들의 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가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음은 운주사에만 볼 수 있는? 석불군들을 보았다. 크고 작은 석불들이 일자로 배치해져 있었다. 큰 바위 아래 꼭 햇빛을 피하여 숨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건 무엇일까? 다음은 해운소를 찾아갔다. 이름만 들으면 근심을 버리는 곳이라는데 말 그대로 화장실이었다. 겉은 정말 잘 지워진 곳이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자연 친화적 요소가 물신 느껴지는 곳이었다. 밑을 쳐다보면 무엇인가 나올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시원하게 근심을 해결하고 광배를 갖춘 불상을 보았다. 이 불상은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있는 사다리꼴형의 판석에 돋을새김 하여 새겼다. 가늘고 길게 솟은 코, 두툼한 입술 크고 긴 귓바퀴가 선명하였다. 육계는 솟아 있으며 합장한 수인과 법의 자락은 그저 선만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광배를 갖춘 불상은 매우 특이한 유형이다. 다음은 한국 유일한 누워있는 석불 와불에 올아 갔다. 우리는 올라가면서 퇴마록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금 빗나간 이야기지만 퇴마록에서 천불천탑을 다 만들고 와불을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이야기 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와불을 보기 위해 올라가는 길은 운동을 안 하는 나에게 힘든 산길이었다. 드디어 도착 처음 보았을 때는 이게 뭐야 라는 소리가 먼저 나왔다. 자세히 보지 못하면 윤곽이 안보이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누워있는 석불이었다. 이리 저리 살펴보고 사진도 찍고 내려오는 길에 칠성바위에 들렸다. 칠성 바위 가는 길에 채석장이라는 장소가 나왔다. 이 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들려면 그 많은 돌을 어디서 구해올까? 장소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 운반하였을까 하는 고민을 해결한 것이었다. 칠성바위에 도착해보니 일곱 개의 넓은 돌 들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불교 사찰에 칠성바위라 조금은 어울리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런 예로 삼신각을 볼 수 있는데 민간신앙과 불교와에 결합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인 것이다. 칠성바위에서 내려와 우리가 것은 괴이한 형상에 석탑이었다. 원형다층석탑으로 보물 제797호 였다. 나에 석탑에 대한 상식을 깨버린 석탑에 형식은 보면 볼수록 독특하였다. 네모도 아닌 둥근 형태의 석탑은 계속 눈길을 끌었다. 이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고려시대였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 중에 정형화 되지 않은 다시 말해 여러 가지 형태는 고려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내용이었다. 둥근 처마를 잘빗어 내린 옥개석과 둥근 탑신의 절묘한 조화도 경이롭고 자세히 관찰해보면 기단갑석의 연화무늬의 선을 쪼은 정자국이 방금한 듯 남아있어 조형자의 혼과 숨결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수 있었다. 우리는 공사 바위라고 불리는 산위에 있는 바위까지 올라가기로 하고 쭉 걸어갔다. 올라가는 길에 대웅전과 지장전을 보면서 지붕형태와 건물에 모양 등을 이야기 하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는 칠성바위와 맥락이 비슷한 산신각이 있어 다시 한번 눈길을 끌었다. 4층석탑과 명당탑 그리고 마애여래 좌상등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드이어 공사바위에 도착하였다. 힘들게 올라온 만큼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도착을 해보니 말 그대로 바위였다. 약간 실망을 하고 바위에 올라갔다. 올라가서 내려본 운주사에 전경은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한 눈에 다 보이는 운주사에 모습 과연 여기에 앉아서 절 공사를 관리 감독을 할 수 있었을꺼 같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에 한쪽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바위에는 여러 크고 작은 자리 들이 있었는데 이곳은 승려들이 자신에 위치에 맞게 앉아서 수행을 한 것 이라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위에서 내려와 차가 위치해 있는 주차장으로 향하였다. 걸어가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었을까? 넓게 퍼져 있는 많은 석탑들과 석불들 다시 한번 내가 역사학도 라는 자긍심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다. 천불천탑 운주사......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도 가지각색 다양한 많은 문화재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적 유물들을 다 볼 수 없지만 그래도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선조들이 남겨놓은 많은 보물들을 찾아보고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앞으로도 많은 답사를 다니면서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같도록 노력해야겠다.
Ⅰ.『명사』 편찬『명사』는 순치 때부터 건륭 때까지 95년 동안 세 차례 편찬을 거쳐 완성된 정사로, 정사 가운데 제일 오랜 시간이 소유되고 편찬 규모가 가장 컸다. 제 1차는 입관 직후인 순치 2년(1645)에 내삼원대학사 풍전(馮銓), 홍승주(洪承疇) 등에게 명하여『명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는 청이 지식인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성과가 없었다. 두 번째는 강희 18년(1679)에 대학사 서원문(徐元文)?장옥서(張玉書) 등을 청재로 삼아 『명사』로 칙찬(勅贊) 하도록 하였다. 이때 50명이 박학홍사과로 들어왔으며 기대 하였던 황종희는 들어오지 않고 그의 제자 만사동이 들어와 포의로 참여 하였다.그리하여 강희 53년에 왕홍서(王鴻緖)가 「열전」202권을 황제에게 올리고, 옹정 원년(1723)에 다시 「본기」와 「표」,「지」 108권을 상주하여 45년만에 『명사』의 초고가 완성되었다.(이는 바로 왕홍서의 『명사고』로, 실제로는 만사동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잘 되었다고 판단되지 않아 다시 편찬에 들어가게 되었다.세 번째는 옹정 2년에 장정옥(張廷玉) 등에게 재수정 하도록 하여 건륭4년(1794)에 왕홍서의 것을 바탕으로 마침내 설관수사(設館修史)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 즉 95년만에 완성하였다. 그 후 건륭 42년(1777)에 다시 영렴(英廉),정경이(程景伊),화신(和神) 등에게 명하여 원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하여 마지막 수정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보는 『명사』이다.이처럼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참여자들이 일부 명?청 교체기의 역사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서로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청조의 비위를 건드려 화를 당하지 않을까하는 염료도 작용하였다. 강희?옹정?건륭시대에 일어난 문자옥 가운데 명사(明史)문제로 일어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참여자들이 더욱 적극적이지 않았다.『명사』는 홍무 원년(1368)부터 숭정 17년(1644)까지 277년의 역사를 「본기」24권,「지」75권,「표」13권,「열전」220권, 모두 332권차례 재위하여 전후기(前後紀)로 나누고, 태조와 성조의 것이 분량이 많아 3권씩으로 나누었다. 『명사고』에는 남명의「삼왕전(三王傳)」이 한 권으로 독립되어 제왕의 「열전」다음에 넣었으나 『명사』에서는 이를 삭제하여 남명의 역사를 없애버렸다. 「지」는 15목으로 나누어 24사 가운데 가장 완비되었으며 내용도 충실하였다. 「표」의 경우도 명의 제도를 반영하여「칠경연포(七卿年表)」를 새로 만들었다. 「열전」의 경우도 앞 시대에 없었던 「엄당(?當)」,「유적(流賊)」,「토사(土司)」3전을 넣었는데, 특히「환관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엄당전」을 넣은 것은 관료 사대부들이 환관과 결탁하여 그 뜻을 이루려고 환관들과 당파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종합적으로 볼 때 『명사』는 24사 가운데 비교적 잘 만들어진 것이다. 체제나 문장뿐만 아니라 내용도 충실하였는데 이는 편찬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반복하여 검토한 결과로 보여진다. 또한 참여자들이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이어서 질적으로 좋았다. 물론 관에서 편찬한 사서(史書)여서 청대에는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그러나 『명사』에도 결점이 있다. 예를 들면 명과 청의 조상인 여진과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삭제되어 있다. 또 남명의 사적도 몇 마디 들어가 있을 뿐 삭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명사』를 편찬하는 데 이용되었던 원사료로,『명실록』이나『명사고』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여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명사』는 건륭 4년(1739)에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하였으며 이미 간행한 정사와 합하여 중국의 정사는 24사가 되었다.Ⅱ『명사』 편찬의 세 시기이진화(李晉華)의 『명사찬수고』를 보면 그 편찬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순치(順治)2년 (1645) 5월에 『명사』를 편찬하라는 조서가 내린 때로부터 옹정(擁正) 13년(1735) 12월 책이 완성될 때까지 그 동안 근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책이 완성되는 과정과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제 1기합계 34년제 2기, 강희 18년에서 61년 까지, 합계 44년제 3기, 옹정 원년에서 13년까지, 합계 13년하지만『명사』가 간행된 것은 건륭 4년(1739) 7월의 일이므로 전후 무려 94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천 수백 명에 달하며, 그 동안 총재도 여러번 바뀌었다. 초기에 조정과 재야의 학자들 중에서 사서편찬의 조례(條例)를 논한 사람으로는 서건암(徐健庵)?왕횡운(王橫雲)?탕석오(湯石塢)?반차경(潘次耕)?시우산(施愚山)등이 있는데 모두 『명사례안(明史例案)』에 보인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고정림(顧亭林)?황이주(黃梨洲) 이하 전사산(全謝山)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이 넘는다. 그들을 모두 열거 할 수는 없으며, 이들에 대해서는 『명사례안』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매시기의 수찬관(修撰官)과 실제 작업에 참여한 사람 및 편찬의 경과와 찬술의 방법에 한정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제 1기 순치(順治) 초에 사관(史館)을 처음 열었을 때 일을 맡은 사람으로는 풍전(馮銓)?홍승주(洪承疇)?범문정(范文程)?전겸익(錢謙益) 등이 있는데 모두 이신(貳臣)이었다. 그들은 무심코 전 왕조인 명의 사사(史事)를 논술하였으며, 이것은 헛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글 이었다. 심지어 풍전은 『천계실록(天啓實錄)』의 일부분을 훔쳐가 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시일만 지체되고 이루어진 일은 없었으며, 게다가 왕조 교체기를 맞이하여 전반적인 정세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여서 사실상 이러한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또한 망실된 서적을 일시에 수집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몇 가지 원인 때문에 제 1기에는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강희4년 이후 사관을 재정비 했으나 그 성과는 단지 『실록』을 만주 문자로 옮겨썼을 따름이다.제 2기 강희 18년 3월 조서를 내려 박학홍유시(博學鴻儒試)를 실시하고 일등으로 급제한 팽손휼(彭孫?) 등 20명, 이등으로 급제한 이래태(李來泰)등 30명에게 각각 편수(編修)?검토(檢討) 등의 편찬하도록 했다. 먼저 방법을 토론하여 체례를 정했다. 감수관은 서원문(徐元文)이었으며, 당시 많은 명인들이 여기에 참가했다. 이 시기의 작업은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들은 원고를 편찬할 때 추첨하는 방법을 채택했다.강희 21년 이후 총재가 초고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 하였다. 23년에 이르러 서원문이 다시 사국(史局)을 이끌면서 만사동(萬斯同)을 불러들여 산삭하는 일을 맡겼다. 만사동의 자는 계야(季野)이며 절강 은현사람이다. 그는 호부시랑 만태의 여덟 번째 아들로 형인 만사대와 함께 여요의 황종희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즙산 유씨의 학문을 전수 받았다. 24살에 은현에 있는 해회사에서 이십일사(二十一史)를 빌려 읽던중 두 눈에 부종이 생겼다. 강희8년(1669) 나이 27세 때 월성(越城)의 강정암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명대 각 황제의 『실록』 초본을 읽고 그것에 정통하여, 한 사람 한 사건에 대해서 일일이 그 곡절과 시말을 진술할 수 있었다. 전대 사서의 체례를 모조리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득실을 논함에 있어 그 관건의 소재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었다.강희 18년 명사국(明史局)이 다시 열렸을 때 만선생은 상경하여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사국에 참여하였다. 만사동은 비록 사관(史館)에 이름이 올라 있지는 않으나 은연중에 총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사동은 서원문의 집에서 무릇 12년 동안이나 머물렀으며, 서원문?탕빈(湯斌) 두 총재 이하 그를 ‘만선생’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50명의 박학홍유(博學鴻儒)가 지은 사고(史稿)는 모두 만사동이 산삭(刪削)하여 완성하였는데, 지금 전하는 『만씨사고(萬氏史稿)』32년에 왕홍서가 총재에 임명되자 만사동은 다시 왕홍서의 집에 머물었으며 왕홍서는 그에게 열전을 심의 결정하는 일을 맡겼다. 만사동은 강희 41년 4월 북경에서 죽었으므로 그가 왕홍서의 집에서 머문 기간은 8년이다. 지금 『명사고』의 편찬 과정을 살펴보면, 강희 38년 웅사리가 다시 감수를 맡았을 때 대부분의 원고가 편찬과 수정에 있어서 만사동의 공이 가장 크며, 현재 횡운산인이라고 서명되어 있는 『명사고』는 기본적으로 만사동의 원고를 약간 수정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비추어볼 때 제 2기 중에 『명사』는 기본적으로 이미 완성되었다.제 3기 옹정 원년 7월 총재관 장정옥(張廷玉)?송식(宋植) 등에게 명하여 문학지사(文學之士)를 선발하여 『명사』를 계속 편찬도록 하였다. 이에 손가감(孫嘉減) 등 25명이 천거되어 각자 몇 권씩 나누어 다시 편찬 정리 작업에 착수하였다. 다만 오래지 않아 다들 다른 임무를 맡아 나가버리고 사관에 남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옹정 5년 겨울 총재 장정옥과 송식은 양춘과 양유돈에게 명하여 서로 협력하여 책을 완성하도롣 하였으나, 장정옥은 왕유돈에게 일임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왕유돈은 일이 번잡하여 다시 오린과 일을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6년 정월 오린과 왕유돈이 사관에 들어가 일에 착수했다. 양춘은 영락에서 정덕까지 아홉시기 열전의 초안을 맡았다. 호종서는 가장?융경?만력 세 시기 열전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 중 12황제의 본기 및 후비?제왕?홍무?건문?천계?숭정시기의 열전은 왕유돈과 오린이 각자 분담할 부분을 스스로 정하였다. 양춘은아홉시기의 열전을 분담한 후 그해 7월에 이미 원고를 완성하여 사관으로 넘겼다. 하지만 당시 사관에서의 찬수는 매우 간략하여 단지 왕홍서가 완성한 사고의 본기와 열전 뒤에 찬사를 더하거나 내용에 따라 목차를 바꾸거나 혹은 자구를 약간 수정하는 데 그쳤을 따름이다. 옹정 원년에 사관을 다시 열어 13년 12월 까지 비로서 전서가 완성 되었다. 건륭4년에 『명사』무영전본의 판각을 완성하니 본기 24권, 지 75권, 표 13권, 열전220권, 목록 4권, 합계 332권이었다. 건륭 42년 5월에 이르러『명사』를 교정하라는 조서를 내려 영렴 등 다섯 사람을 총재에 임명하였다. 후에 대시 우민중?전여성 두 사람을 더 파견하여 총재로 삼았으며, 송선?유석하 등을 찬수로 삼았다. 『명였다.
1. 팜파스 :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반지름 600km의 반원을 그리며 펼쳐진 대초원 팜파스(면적60만㎢)는 매우 평탄한데, 반원의 중앙부는 기후도 온화하고 강수 량도 많아 습윤팜파스라고 하지만 주변지대로 갈수록 건조도가 심하다. 이 지 역은 비옥한 팜파스 토양이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중심지를 이룬다.가우초 :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팜파스 지역에서 살며 유목생활을 하던 목동이나 마 부를 부르는 말. 쾌할한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 까지 번성했다. 카우보이와 비슷한 민속영웅으로 묘사된다.2. 라플라타 강 유역의 분열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인들은 내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관세수입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가장 먼저 우루과이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영국의 중재로 우루과이공화국을 설립하였다. 내륙지역의 혼혈인들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맞서 싸웠는데, 연방주의자 후안 마누에 데 로사스가 가우초들의 지지를 받아 두 번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역임한 후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민족이익과 토착문화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마소르카라는 비밀경찰을 통해 전횡적 정치를 펼치며 외국자본과 상인들에 반하는 정책을 폈다.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역임한 후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민족이익과 토착문화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마소르카라는 비밀경찰을 통해 전횡적 정치를 펼치며 외국자본과 상인들에 반하는 정책을 폈다.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인들과, 동맹국인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연합세력이 1852년에 로사스와 싸워 승리하고, 1862년에 이르러 바르톨로메 미트레에 의해 아르헨티나로 탄생한다.3. 백인국가의 탄생과 상류사회 민주주의로사스의 민족주의적 토착주의 보호무역을 반대하여 세계주의를 표방하며 외국과의 무역과 자본의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서구화운동의 중심에 선 사람이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이다. 그는 교육을 중시해서 가우초적인 것을 뿌리뽑고자 노력하며 초등교육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냉동기. 대농장주 첩의 막내로 태어난 에비타는 페론의 선거를 지원하여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복지정책에 적극 투신하여 자신을 데스카미사도스(descamisados:노동자나 농민계급)의 상징으로 만든다. 점차 1차 상품의 수출이 정체하고, 소비산업의 급증으로 1949년 최초의 무역적자와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어 결국 1955년에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한다. 페론의 추종자들은 반대운동에 돌입했으며 군부는 페론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강경한 탄압을 펼쳤다. 페론의 추종자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망명을 떠나야했다. 7년 후 페론주의당(Partido Justicialista)이 합법화되고, 62년 재선에서 35%를 획득한다. 위협을 느낀 군부는 다시 탄압을 시작한다. 10년 후 좌익에 대한 견제 분위기를 틈타 망명에서 돌아온 페론이 60%의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된다. 그러나 경제가 침체된 아르헨티나 상황에서 페론의 정책은 더 이상 통용도지 않고 혼란만 가중된다. 다시 군부에 의해 페론은 실각한다.※페로니즘 :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거론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페로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우선 인기영합주의 즉, 포퓰리즘의 부정적인 사례로, 대중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들의 의견을 좇는 성향으로 정의하는 시각과 아르헨티나에서 독특하게 나타난 국가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여기서 논하는 국가사회주의는 열광적인 민족주의, 대중선동, 독재적 지배라는 정의의 차원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국가권력을 통해 조정하려는 것으로 수정사회주의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페로니즘에 대한 평가를 단순하고 짧게 내리기는 쉽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다만 인기영합을 위해 무지한 노동세력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뻬로니즘이 여러 상황에 따라 변질되기도 하였지만 아르헨티나에서 뻬론당이 갖고 있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정당으로서만이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뻬로니즘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생활로 젖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는 1930년 등의 위기관리 계획도 정면 돌파식의 해결이 아닌 임시방편용일 뿐이다. 내년 3월 치러질 보궐 대통령선거에 손상을 입지 않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농후하다. 미국과 IMF의 입장이 철저한 구조조정, 재정적자 해소에 역점이 두어져 국제지원은 미온적일 것이며, 중장기적으로 정치사회적 불안은 가중될 것 같다.파라과이는 장기 독재자들의 지배로 얼룩진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 가장 비극 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국가 이다. 파라과이 역사는 크게 5개의시기로 구분 할 수 있다. 1811년 ~ 1814년 사이 독립정부의 수립기이다. 제 2기는 1814년 ~ 1840년 사이 가스빠르 로드리게스 데 후란시아의 절대 독재기 이다. 이후 수년관 혼란이 있었다. 제 3기는 1844년 ~ 1870년 사이 안또니오 로뻬스와 그의 아들 솔라노 로뻬스의 집권기이다. 4기는 소수의 독재자들에 의해 지배된 혼란의 시기이고, 끝으로 제5기는 1954년 알후레도 스뜨로에스네르의 집권에서 오늘에 이르는 시기이다.독립정부의 수립- 1811년 5월의 혁명으로 아순시온에서 제1차 대표자 회의가 소집- 훌헨시오 예그로스를 의장으로 하는 5인의 정부 평의회 구성 제 1차 정부가 수립- 정부평의회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평의회에 독립의 결정을 통고 국기 및 파라과이군 창설-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부가 스페인 왕실군과의 전투를 위해 파라과이측에 지원 요청- 후란시아는 이에 반대 새로운 의회의 구성 요구- 1813년 9월에 제 2차 대표자 회의 소집 헌법 채택- 신정부 집정관제도를 채택 집정관으로 훌헨시오 예그리스와 로드리게스 데 후란시아 지 명- 후란시아가 작성한 정부 규정을 승인 장군제도 창설 독립군의 지휘관들을 최초의 장군으로 승인- 행정기구 개편 유럽국가들과도 교역관계 수립 군조직 개편 성직자 부패문제 처리- 파라과이 거주 스페인인들의 특권 제한 파라과이 출신 백인 여성과의 결혼도 금지집정제도의 수립- 1814년 10월에 소집된 제 3차 대표자 회의 집정제도 채택- 5년 임기의 정부수반으로 로드리게스 데 후란시아를 지명시아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건설한 국가 구조에 역동성솨 창조성이 부가됨을 의미.후란시아는 식민시대부터 유래한 소수 엘리트 특권 계층의 경제 즉, 토지-생산-수출의 경제구조를 와해 시켜 사회 경제적 평등만을 구현하려고 노력그 결과 해상 교역은 축소되고 수출 시장도 상실 이와 같은 상황을 물려 받은 안또니오 로뻬스는 국가의 내적 구조를 포함한 수많은 어려움을 직면두 집정관은 취임후 정치범을 사면 하르헨티나의 꼬리엔떼스주와 외교, 교역 및 경계선 조약을 체결 교황청과도 관계를 개선 공공 교육의 강화에 주력- 1842년 11월 특별회의 소집 다시 독립 확인- 1844년 3월 새로운 의회 소집 공화국 형태의 신헌법 제정 임기 10년의 대통령으로 선출- 1844년의 헌법으로 파라과이를 법치국가로 건설 수많은 법령 제정 국가의 법률체계 확립- 1850년 브라질과 국경조약 체결- 185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사스 독재에 반대하여 브라질과 우루과이 지원- 1852년 7월 아쁠라따 연합주와 조약을 체결 독립 승인- 1854년 의회 재선 재 집권후 헌법을 수정 30년 이상에게 피선거권 부여- 1857년 의회는 다시 그를 10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 재임 중 경제, 사회 및 문화부문에 많은 업적 이룩- 1862년 9월 안또니오 로뻬스 사망- 1862년 10월 특별의회 개최 10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 그는 약 15년간 부친과 외교관, 국방성, 부통령으로 근무 국내외 문제에 정통-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국경문제의 협상에서 상호간에 유리한 시기를 기다려 협상 지연- 그 당시 남미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괄목할 만한 경제적 부와 강력한 군부를 가 짐- 부친의 정책을 계승 국력 증강에 주력 군부 개편 강화 파라과이제국 건설 시도파라과이 전쟁과 그 영향- 1864년 8월 우루과이 연안에 함대를 출정시켜 우루과이 사태 개입- 브라질 우루과이 사태 개입에 경고 브라질과 외교관계 단절- 빠라나강과 우루과이강의 항해를 금지 브라질 함정에 나포- 1865년 1월 아르헨티나측에 브라질의단지 농업만이 유일한 기반- 1871~1872년 재정 자원 확보를 위해 영국에 300만 파운드 차관- 1880년 깐디도 바에이로의 사망으로 베르나디노 까바예로 장군이 집권- 주민등록 실시 우루과이에 공관 설치- 우루과이측은 파라과이의 전비배상 말소 전리품 반송정치적 혼란기20세기 들어 특히 1902년~1932년 사이 21명의 집권자가 부상한 사실에서도 동기간 파라과이의 정치상황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1902년 군사반란으로 합헌정부인 에밀리오 아세발 정권이 붕괴되어 혼란의 시대 시작 1904년 자유파의 반기로 10년 동안에 10명의 대통령이 부임 했다. 1932년 에는 차꼬 지역의 주요 요새를 점령 결국 회복 작전으로 소위 차꼬 전쟁이 개시 9월 전투 격화 1933년 파라과이는 볼리비아측 에 전쟁 선포 1935년에는 차꼬 지방 대부분 지역을 장악 했다. 파라과이의 정치는 차꼬 전쟁이후 더 혼란스러워져 잠시 동안의 내전 이후 콜로라도 당이 1949년 정권을 잡게 되었다. 1954년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알프레도 스또로에스네르가 대통령이 되었다스뜨로에스네르의 통치기1954년 7월의 선거에서는 양당 세력의 분열로 보수당 후보로 나선 알후레도 스뜨로에스네르 장군이 당선되어 집권했다.스뜨로에스네르 정권은 군사독재, 일당 독재, 및 개인적 독재의 총체적 독재가 특색 그가 집권한 후 군부세력은 직접적인 통치를 중단하고 집권당을 장악하여 정치에 개입 1960년대에 군부의 경쟁자들을 거의 제거 성공브라질의 경제 및 군사적 영향권에 통합 되도록 주력 그 결과 1980년대에 들어 브라질은 파라과이 최대의 채권국이자 최대의 무역 대상국이 되고, 외국인 투자에도 2위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그러나 1980년대에 반대파가 강력히 부상 초기에는 자유당과 급진 자유당이 도전 뒤이어 2월 혁명당과 대중 콜로라도 운동파가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급진 자유당과 기민당은 불법화된 후에도 정권에 도전 했다.1989년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장군이 쿠데타 스뜨로에스네르 축출 5월 선거에서 다수의 지였다.
사회사적으로 본 중세의 시작역사학과 4조시대구분이란 역사가가 어떤 일관된 기준에 의해 역사 발전의 단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각 단계는 일반적으로 고대·중세·근대 등의 개념으로 정의 시대 구분에 있어서는 사회경제적 요소뿐 아니라 지배 세력의 성격을 비롯한 정치·사회 구조, 사상·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 정치적인 변동이야말로 사회경제적 변동을 포함한 사회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려가 중세의 시작이라 정의 하고 사회사적으로 접근하여 고려시대 봉건 제도에 대하여 중점 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봉건제란 종신의 주군에 대한 군사적 봉사제도봉건제란 보수로서 급여된 토지보유에 관한 법적 제도통치방식으로 파악, 지방 분권적인 통치 방식, 봉건제에 배경을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 체제가 몰락 또는 약화될 때에 이에 대한 응전에 양상으로 나타나는 하나에 통치조직봉건제란 장원제를 의미, 장원제는 자연경제가 특성봉건제의 본질을 생산양식으로 규정 자급자족적 자연경재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로 파악하는 견해한 사회의 특성을 종합적 총체적으로 파악 하려는 해석한국사의 시대 구분론에서 그간 직접,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마크크스 주의적 해석과 정치사적 해석이었다.중세의 지방 분권적인 국가의 정치구조를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체제가 몰락 또는 약화 될 때 이에 대한 응전에 양상으로 나타나는 하나에 통치조직지방 분권적인 성향을 세계사적 획일성으로 간주한 유일한 견해. 그러나 사회사적 해석도 중세사의 내용과 기본 성격 파악에 중요고려초기부터 한국에 공동체적 질서에 하나로 연등회 팔관회 향도가 발생 고려시대에는 민족국가 내지는 국가 단위의 집단의식의 경계선이 갖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적고, 그 경계선의 내부와 외부에 여러 층위의 지역 집단 의식들이 공존하며, 이들이 각기 나름의 작용 9세기에서 10세기 전반에 걸친 혼란과 전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전국적으로 지역단위의 공동체들이 발달 여러 가지 성장과정을 가지고 있는 호족들을 중심으로 자의이든 타의이든 몸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게 된 사람들이 모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공동체가 만들어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이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지역사회들은 강한 결속력을 가져, 고려시대 지방제도 성립의 바탕연등회는 불교적 성격을 보다 농경 제의적 성격을 강조 연등회는 정월 보름에 열리는 새해 농사 풍년의 기곡제 팔관회는 10월에 개최되는 추수 감사절이며 농경수확제로써 하반기의 큰 행사 불교의례인 팔관회에 건국 공신들을 추모하는 위령제 기능 등을 보태 공동체적 성격의 행사로 거듭함 추수감사제적 성격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통합되는 공동의 장이었고, 외피를 불교적 행사로 치장했던 고려시기의 팔관회나 연등회도 실상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역축제 각 지역의 토착 지배세력들은 이런 군현단위 축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 연등회와 팔관회를 대신해 시행된 의식들이 모두 중국의 유교적인 농경과 관련 된다는 점이 농경의례적 면을 더욱 설득력 있음기존의 지방 호족들에 통치 기반이 되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 하므로서 왕정에 한계를 극복하고 지금 까지에 지방 호족과 중앙 왕권간에 병렬 체계를 수직 적으로 바꾸려고 한 시도농정권이 다시 지방 호족들에게 양도 되고 지방 호족들은 그 대가로 군사권을 양보함으로써 지금 까지에 중앙 집권과 호족간에 갈들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시행중앙 집권은 광군 세력을 거란 침입에 대비해 자신들에 세력 밑에 두고자 했다. 이에 이지백이 호족들의 수중에 있는 광군 병력을 활용하려면 회유책으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킬 것을 주장함. 전사계급으로서의 지방 호족에 모습은 정치체계 모색 과정에서 크게 감퇴 연등회 팔관회 부활을 통한 농경관리권 회복은 대민 지배권의 지속을 의미 지방관제도 또한 이 관리체제를 감독하는 선이었음불탑조성 사업을 통해 지방 호족 향리들의 주도하여 주민들을 향도조직 또는 그와 유사한 결속을 통해 대부분 동원 향도가 18C기에 이르러 두레를 성립 시키면서 농경 공동체로서의 구체화 시키고 사림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발전을 이룬 사실을 통해 고려 전기 향도에 농경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짐작 할 수 있게 한다. 가면극, 탈춤 김해 입춘경제 자료를 통해 춘경제가 고려전기 향리들이 주시를 통해 정확하고 있었던 시대에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농업 방식에 변화 즉, 휴한농업하의 사회가 창출하게 된 하나의 체제 휴한농법은 생산력이 크게 떨어지므로 대규모의 인력지배의 필요성 강조 이러한 조건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 단위로 유력자들에 의한 집단적 지방민 결속 방식을 온전 시킴시대구분은 기본적으로 각기 구분된 시대의 성격이 총체적으로 인증됨과 동시에 다른 시대와 질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일관된 체제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차원에서 독자적 성격을 가지는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이행하는 논리와 구조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설명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시대구분은 사회성격론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중세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객관화 되고 풍부해 지려면 이와 같은 중세적 특징을 찾아내고 사람들의 의식세계와 경제생활의 모습을 파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