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6
검색어 입력폼
  • 천년고도의 불국사
    .천년 고도의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경주에 가면 누구나 꼭 보고 오는 것이 있다.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 그것이다. 경주와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은 서로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심동체와도 같은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기 때문에 경주답고,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이기에 불국사, 석굴암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토함산 서쪽 중턱 경사진 곳에 자리 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시대에는 대화엄불국사(大華嚴佛國寺) 로 명명되었는데, 이름 그대로 화엄사상에 입각한 불교세계를 나타낸 사찰이다. 2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려 역사된 불국사는 당시의 고승들의 높은 차원의 사상이 깃들어 있고 천재 예술가들의 혼이 녹아 있는 곳이다. 심오한 불교사상인 화엄사상을 가시적인 조형예술인 사원건축으로 표현하여 독창적이고 독특한 건축 형태와 아름다운 의장으로 이룩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불국사는 원래 2,000간이 넘는 큰절이었으나, 목조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9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는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전각들을 세운 산지형 가람인데, 그 지형상의 특징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웅전 공간 극락전 공간 비로전 공간이 그것인데, 굳이 불교적 해석을 붙인다면 이들 각각은 석가여래의 피안의 세계를,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계단으로써 청운 백운교와 칠보 연화교가 있으며, 그곳을 통과하는 관문으로써 자하문과 안양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불국사는 부처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를 석축을 통해 평면적으로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구분해 놓은 가람배치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복구하기 전의 불국사{{불국사 전경하늘에서 본 불국사 전경토함산 정상에 위치한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예술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석굴암은 중국의 석굴사원 양식을어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만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석굴암 전경 :석굴암이 위치한 토함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하늘 끝과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진봉우리들이 하늘과 만나는 절경을 볼 수 있다.{1910년대의 석굴암 모습 :조선 총독부의 잘못된 해 체와 복원으로 그 내부의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게 되었다.{{본존불 전면 석굴암 천정 연화문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한 대성(大成)모량리(牟梁里; 혹은 정운촌淨雲村이라고도 쓴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城)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했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복안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얻어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이때 개사 점개가 육륜회를 흥륜사에서 베풀고자하여 복안의 집에 가서 보시할 것을 권하니, 복안은 베 50필을 보시하므로 점개는 주문을 읽어 축원했다. "단월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지켜 주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안락하고 수명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뛰어 들어가 그 어미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숙선이 없어 지금 와서 곤궁한 것이니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므로, 이에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성은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 사람들이 매우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을 꼭 쥐고 있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 두 자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또한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착한 보시의 영험을 가히 믿지 않겠는가.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을 향령이라고 했다.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기공이 동도의 여러 절 가운데서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옛 향전에 실려 있는 것은 이상과 같다. 그러나 절 안의 기록에는 이렇다. "경덕왕 때에 대상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왕 때를 거쳐 대력 9년 갑인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시켰다. 처음에 유가교의 고승 항마를 청해다가 이 절에 거주하게 했고 이를 계승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고전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찬(讚)해 말한다.모량(牟梁)에 봄이 지니 삼무(三畝)의 밭을 보시하고,향령(香嶺)에 가을이 오니 만금(萬金)을 거두었다.어머니는 백 년 사이 가난과 부귀(富貴)를 겪었는데,귀정(槐庭)은 한 꿈 사이에 이세(二世)를 오갔구나.효(孝)를 행하여 대업(大業)을 이루다?불국사는 화엄경에서 설하는 연화장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석가모니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이 상주하여 그들의 공덕이 무량함을 보이고, 아울러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도 함께 표출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불국사의 조성에 화엄경의 사상은 물론이고 법화경과 7세기 중엽에 개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인종 등의 밀교적인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며, 금강계와 태장계의 만다라적인 가람배치로 화엄밀교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이와 같은 내용들에서 볼 때에 불국사가 화엄도량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의가 없지만, 그와 함께 가미된 여타의 사상이나 조영 등에 관해서는 서로 간에 일이 있으며, 8세기 초에는 선무외 삼장(637~735)이 중국에 와서(716년) 대일경과 금강정경 등의 성립으로 확립된 순수한 밀교사상을 전파함에 따라 이 때에도 신라의 현초나 의림 등이 곧 이를 전수 받고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밀교사상이 신라사회에서 보편적인 신앙으로 폭 넓게 자리를 잡을 때가 바로 경덕왕의 치세기간이었으므로 불국사의 조성 당시에도 이의 영향을 충분히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그 구체적인 사례로서는 석굴암의 불상은 태장계 만다라의 중대 12원 중에서 제6 석가원인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불이며 고대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 전을 모두 회랑으로 둘러쌓아 원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태장계 만다라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고, 다보탑에는 난순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총지 즉 다라니를 상징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불국사가 밀교사상과 관련된 사찰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60년대에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인데, 이 경은 신라시대에 있어서 조탑시에 널리 사용되었던 소의경전과도 같은 것으로서, 경주 황복사지의 3층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탑지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의 것이 나온 사실 등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 경전은 4종의 근본 다라니가 지니고 있는 밀교적인 수행법과 99기 소탑 공양에 따른 공덕을 나타내고 있는{것이 특징이다.{{다보탑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그러므로 불국사와 석굴암의 현존 유구에서는 화엄신앙을 발견할 수가 없으며, 두 탑은 법화사상에 의하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발견은 밀교의 영향에 의하여 탑 내에 소장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는 것이다.따라서 불국사가 창건될 때에는 여러 가지의 불교사상과 당시의 사회적인 이념들이 복합적으로 이에 작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효행담은 단순히 창건설화를 제공할 뿐이고, 그 이면에는 현실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어떤 이념들이 추구되었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그러한 사실들을 대략 찾아보면, 우선 첫째갈등이 만연되고 있었을 때에 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화엄과 유식사상 내지는 화엄과 밀교뿐만이 아니라 도참신앙 등이 첨예한 대립을 피하고서 서로 융화하여 공존할 수 있었던 방법을 찾던 시기였으므로, 자연 불국사를 창건하면서 이러한 풍조의 교학사상도 가미되었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끝으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무력으로 정복하고서 이를 통치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떠한 강령이나 정책보다도 세 나라의 국민들이 진심으로 신앙해 왔던 불교적인 정서에 호소하여 치세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불국사를 창건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한편으로 국민들의 힘을 한데로 모울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라의 고도 경주에 그 대표적인 불교사찰을 창건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김대성은 과연 누구인가?「삼국유사」에서는 김대성의 전생을 신문왕대라고 하였고 그의 사망은 혜공왕 10년인 대력9년 갑인(774) 12월로 밝혀놓았다. 대성은 경덕왕대에 중시를 역임한 대정과 동일인으로 실재 인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정이 중시를 지낸 시기는 경덕왕 5년부터 9년까지(745-750)이다. 또한 그의 부친이 되는 국재 김문량도 성덕왕 5년부터 10년까지(706-711) 중시를 지낸 문량으로 추정되고 있다.「불국사사적」에는 대성이 전생에 태어난 해는 신문왕 2년 임오(682), 김문량의 집에 환생한 해는 효소왕 9년 경자(700)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사적」에 실린 내용들은 사료로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많지만 생몰년에 대한 이 기록은 사실로 받아들여도 별 무리가 없다. 「삼국유사」의 내용이나 대성을 중시 대정으로 추정한 것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또 김대성이 성덕왕대에 총관이 되었고 경덕왕대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가 되었는데 49세 때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관직의 명칭은 신라의 그것과 맞지 않으나 대성이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한 성덕왕대와 중시가 되어서 국정을 주도하였을 경덕왕대의 시점과 맞게 되어있다.대성이 관직에 있으면서 활동한 가겨진다.
    인문/어학| 2004.07.15| 9페이지| 1,000원| 조회(585)
    미리보기
  •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출판사 : 도서출판 육문사 옮긴이 : 박병덕소크라테스의 변명 . 제목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변명한 상황을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그의 제자 플라톤이 기록해놓은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변명 이다.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 플라톤이 누구인지는 고등학교 윤리시간에서부터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겠다.소크라테스는 아뉘토스(Anytos)의 후원을 받는 멜레토스(Meletos)와 다른 사람들(소피스트라고 한다)에 의해 젊은이들에게 해악을 주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신을 믿지 않는다. 는 죄목으로 아테네 법정에 고소되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그의 죄목은 이러했지만 이보다도 소크라테스가 고소된 더 큰 이유는 정치범이라는데 있다고 보는 이들도 많이 있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철학적 사고와 지혜에, 그리고 문답법을 통해 나타나는 뛰어난 언변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 비록 숙제 때문이었기는 하지만 - 이 책을 읽으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나 자신은 지금까지 수업시간을 비롯해 제 3자를 통해 들어 익힌 것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명 에 대한 환상과 착각에 빠져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 자신 또한 소크라테스의 변명 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푹 빠져있었고, 그의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대단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성찰력이 부족한 발언이라고 나를 비난한다면 나로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이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생각이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그럼 이제부터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신을 롯한 그 부류들이며 두 번째는 그 훨씬 이전부터 소크라테스를 하늘의 일을 사색하고, 땅속의 모든 일을 탐구하며, 약한 이론을 강한 이론으로 만드는 묘한 지혜를 가지 녀석 이라고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두 고소인들에 대해 변명을 시작하면서 멜레토스보다 두 번째 고소인들에 대한 변명을 먼저 하게 된다. 그는 그들이 자신을 고소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에 가서 확인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사람은 없다. 란 신탁에 대해 의문을 품은 소크라테스는 신전 무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다시 말해 신은 무슨 의미에서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자기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그를 신 앞에 데리고 가 이 사람이 나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반박하면서 신탁이 옳지 않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고 평판을 얻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과연 자기보다 현명한지 아닌지 시험해 보았지만 얻은 결론은 그들이 자신보다 지혜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즉 정치인, 시인, 장인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 사람들을 상대로 문답을 해가면서 자세히 관찰해보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었으며 그들은 자기가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일러주기 위해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적이 되어 소크라테스를 고소했다고 변명하고 있다.이 첫 번째 변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이 지혜롭지 않음을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단지 그들이 그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지하다는 것을 아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인가? 소크라테스 자신이 지혜롭지는 않으나 적어도 그들보다 지혜롭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과연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인가? 이것은 오만이고 자만이 아닌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잠시나마 괴로워해야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뛰어난 변론가가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내 생각엔,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소크라테스만큼 뛰어난 언변인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중간 중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변명하는 동안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말을 끊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아니 그의 강경한 말투로 보아서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피고인에 대한 배심원의 취조 권리가 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자신 특유의 문답법으로 대신하고 있으며 배심원들의 발언권을 박탈하고 배심원들이 어떠한 질문을 할 것인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변명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독선이자 오만이 아닐까?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일지는 몰라도 그 지혜를 간직할 자격은 없는 인물이라 생각했다.그리고 우선적으로 잘못된 것은 신탁이 그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데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으로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서 신 앞에 데리고 오면 된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었다고 본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굳이 반박하려 한 것부터가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이 옳지 못함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신탁을 증명하려 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 역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지만 이러한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책을 읽는 내내 나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그 다음 두 번째 고소인인 멜라토스외 인물들에 대한 변명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두 번째 고소인들은 소크라테스는 악을 저지르고 있으므로 죄인이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부패시킨다.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신봉하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신들을 신봉하고 있다. 며 소크라테스를 고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와의 문답법을 통해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멜레토스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받음으로써 소크라테스 자신은 청년을 부패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고소장을 제출한 멜레토스야말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멜레토스와의 이 문답법이 소크라테스의 변명 을 읽으면서 나에게는 그나마 인상 깊게 다가온 부분이었다. 확실히 소크라테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구나.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논리정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답법 속에도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없을 수가 없었다. 바로 멜레토스에게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나이가 들었고, 자네는 그렇게 젊은데도 불구하고, 자네가 나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말인가! 라고 말한 부분이다. 멜레토스의 대답이 자신의 논리와 맞지 않고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저런 식의 인신공격을 할 필요까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젊다고 해서 나이든 자신보다 지혜롭지 말란 법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헤라클레스의 노역에 견줄만큼 힘들게 지혜로운 자들을 찾아다녔다고 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은 아예 그 부류(지혜롭다고 평판을 얻고 있는 자들)에서 제외시키고 나이들고 늙은 사람들만 찾아다녔다는 말인가? 소크라테스의 대화 중 극히 일부분에 속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저러한 발언은 전혀 지혜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위에는 나이를 먹고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특히 국회나 정계에서 근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며, 주위 어른들께서도 그러한 말씀을 종종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 자네는 젊기 때문에 나보다 지혜롭지 못하네 라고 말함으로써 젊은이들을 무시하는 듯 보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고소한 멜레토스를 오히려 고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지혜롭고 죄 없는 나를 고소한 당신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며 무고죄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비록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멜레토스가 자가당착적인 말을 함으로써 소크라테스를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이라 해도 소크라테스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멜레토스에게 저러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짧게나마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그리고 또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는 내가 지금 이렇게 변명하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즉, 나는 여러분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인 나늘 죽임으로써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지금 이러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해 버린다면, 여러분은 나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 라고 말하는 부분은 어떠한가. 정말로 지독한 자만심에 빠져있는 한 인간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자신은 신이 아테네 시민에게 내려준 선물이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면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멜레토스와 다른 고소인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편견에 빠져 있는 것이라면 소크라테스 자신은 깊고 깊은 착각의 늪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국정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정의를 수호하고, 정의 수호를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다면 이미 자신은 죽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며, 국정에 참여하지 않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신이 내린 의무라고 말한다. 이 역시 자신을 죽이는 일은 신에게 죄를 짓는
    인문/어학| 2004.07.15| 5페이지| 1,000원| 조회(1,032)
    미리보기
  • 총선과 대외관계
    4.15 총선 이후 대한민국의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Ⅰ. 서론1. 4.15 총선의 결과사상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탄핵심판론'과 '거여견제론'이 맞붙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어 강력한 '집권여당'으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 재신임'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13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대야소' 정국이 열리게 됐다. 한나라당 역시 개헌저지선(100석)을 훨씬 넘어선 121석을 얻어 '견제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 최초로 원내에 진출하며 10석을 얻고 민주당과 자민련은 각각 9석, 4석으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사실상 실패했다.1)열린우리당 압승열린우리당은 이번 총선의 최대 승부처였던 서울, 수도권에서의 선전으로 목표했던 과반수 의석을 달성했다. 우리당은 48석의 서울지역 의석 중 32석, 62석의 인천, 경기 의석 중 44석을 차지해 승리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열린우리당은 이와 함께 대전, 충청지역에서도 19석, 강원 2석, 영남 4석, 호남 25석, 제주 3석으로 243석의 지역구에서 129석을 얻었다. 또한 비례대표 득표도 38.3%로 23석의 의석을 얻어 원내과반수(152석)를 무난히 달성했다.김근태 원내대표는 총선결과에 대해 '국민의 마음에 촛불을 밝혀 탄핵세력을 탄핵한 것'이라며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탄핵은 안 된다는 총선 민의를 받아들여 탄핵을 철회해 국정을 책임 있게 운영할 수 있도록 대통령을 직위에 복귀시켜야한다'고 말했다.2)한나라당 선방한나라당은 전통적 지지층이었던 대구, 경북에서 26석, 부산, 울산, 경남에서 24석을 얻어 영남 지역 대부분을 휩쓸었고 수도권에서 33석, 대전, 충청 각각 1석, 강원 6석을 얻어 100석의 지역구 의석을 얻었다. 비례대표 득표율도 35.7%를 기록해 21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개헌저지선(100석)을 훨씬 넘어선 121석 정도의 의석을 얻어 나름대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민주노동당 돌풍이번 총선련도 충남지역에서 4석의 의석을 얻었으나 정당득표율이 3%에 모자란 2.8%로 비례대표 1번인 김종필 총재의 당선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에 따라 김 총재의 10선은 이루어지지 않게 됨과 동시에 3김 시대는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되었다.2. 4.15의 의미이번 선거의 의미는 세 가지 정도로 짚을 수 있다. 하나는 탄핵을 주도한 세력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은 참패를 하여 존재를 위협받고 있고, 거기에 가담한 한나라당 역시 의석이 늘어난 17대 국회에서 의석을 더 얻기는커녕 외려 기존의 의석마저 잃어버렸다. 자민련은 정치적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탄핵에 반대했던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커다란 정치적 정리를 거두었다.둘째는 지역주의가 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지역주의 세력은 몰락했다. 호남의 지역주의가 약화되면, 영남의 지역주의 역시 표적을 잃고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영남의 지역주의가 아직도 강고하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은 강렬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부산/경남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몇 석을 건지고, 민주노동당도 두 석을 얻었다. 이렇게 호남에서는 급격히, 영남에서는 서서히 지역주의는 사라지고 있다.셋째는 진보세력이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진출을 했다는 데에 있다. 아마도 이것이 과거와는 다른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약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앞으로 이 나라의 정치구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변모해 갈 것으로 보인다.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이 등장함으로써 그 동안 서민층의 대변자로 행세해 왔던 민주당/열린우리당의 보수성이 시각적으로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이처럼 4.15총선은 숱한 화제를 만발하며 지금까지의 구정치판을 새것으로 바꾸기 위한 장이 되었다. 앞으로 이 보고서에서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정책, 대북정책 그리고 명실상부한 집권여당으로서 국가적 과제 들을 추진할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특히 이해찬 의원이 단장을 맡은 국회개혁추진단은 국회의원 면책특권 제한과 국민소환제 등 입법 사항을 집중 논의해 개혁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열린우리당은 또 이번주 중 신기남 중앙상임위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새정치실천위원회 를 구성할 방침이다. 이 위원회에는 정당법, 당헌 당규, 연구재단 설립, 정치제도개혁, 중장기 당 운영 방안 등을 다룰 6~7개의 분과가 설치돼, 17대 국회에서 처리할 정치개혁 방안 전반을 다루게 된다. 열린우리당은 이와 함께 선거구 획정을 비롯한 선거법 개정을 17대 국회 초반에 마무리 지어, 당리당략에 따라 누더기 법안으로 변질되는 사태를 막기로 했다.한나라당은 국회의원 재산신탁 을 추진하는 등 개혁경쟁에 본격 가담했다. 이날 여의도 천막당사에서 열린 17대 총선 당선자 대회에서 김형오 사무총장은 박근혜 대표가 선거기간 중 이미 의원임기 중 재산을 늘리지 않겠다는 차원에서 재산신탁관리 를 서약하고 이를 제도화할 것을 약속했다 며 당선자 여러분도 이를 검토해 재산신탁 결의에 참여를 부탁한다 고 말했다.한나라당은 이른 시일 내에 신탁기관을 선정해 당선자들의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4년 동안 신탁할 방침이다. 또 이달 중 당 쇄신기구를 만들고, 여의도연구소에 국고보조금의 30~40%를 투입해 정책 기능을 크게 높이기로 했다.민주노동당은 정치자금법, 선거법, 정당법 등 정치관계 3법을 전면적으로 손질할 수 있도록 제2의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 를 구성해 17대 국회 초반에 입법을 추진하자고 제의하는 등 정치개혁에 적극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민노당은 국민소환제, 상향식 공천제도 명문화, 진성당원 비율에 따른 국고보조금 지급,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 제한 등을 개혁 과제로 꼽고 있다. 아울러 변화된 정치 환경에 맞춰 새로운 국회운영의 틀을 정착시키려면 교섭단체 구성 요건 완화 등 국회법 개정도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국회를 운영하는 게임의 룰 에 해당하는 국회법대된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이다.2. 경제정책의 변화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정부는 19일 국회에서 총선 뒤 첫 정례 정책회의를 열어 당분간 경기회복에 초점을 맞춘 성장 중시 정책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재정 조기집행과 저금리 기조 유지 등을 바탕으로 고용창출형 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 등 총선 직전 정부가 내놓았던 경기부양책을 적극 추진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17대 국회에 대거 입성하면서 경제정책이 분배 를 중시하는 쪽으로 즉각 선회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는 일단 덜어낸 셈이다.그러나 이날 회의에서 열린우리당쪽은 경제개혁 원칙 도 존중돼야 한다는 토를 달았다. 경기 회복의 진행 상황을 보아가며 노사관계 기업지배구조 등 핵심 경제이슈에 대해 진보적 개혁요구가 뒤따를 수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1)우선은 경제 살리기 에 합심열린우리당과 정부는 경기가 본격적인 회복기로 접어들 때까지 개혁논의를 뒤로 미루고 경기활성화 정책을 쓰는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모두발언을 통해 당면한 경제 현안 들을 우선 해결해 성장과 고용을 해결한 뒤 중장기적으로 시장경제를 토대로 경제개혁 과제들을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고 말했다. 분배보다도 성장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부총리는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돼 정치적 불확실성이 상당부분 제거됐으나 시장경제 원칙에 반(反)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니냐는 국내외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 이라며 이런 걱정들이 단순 기우라는 것을 열린우리당이 보여줘야 한다 고 주문하기도 했다.이에 대해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경제개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앞당겨야 한다는 것과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목표는 서로 상충되는 점이 있다 며 (개혁)원칙을 지키면서 단기적인 경기 문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자 고 대답했다. 당면 과제가 경기회복 이라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경제 개혁 원칙 역시 포기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2)저금리·재70%)도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3)창업·서비스 관련 법개정 빨라질 듯고용창출형 창업 기업에 대한 한시적인 법인·소득세 감면과 신산업 분야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도 예외적용 등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관련법 개정이 빠르면 내달 30일 개원될 국회에서 처리될 전망이다. 정부가 오는 7월부터 이 같은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이미 발표한데다 열린우리당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또한 고용창출 효과가 큰 고부가 서비스사업을 육성하기 위한 각종 규제개혁과 세제 지원 등 여러 법령에 분산돼 있는 토지관련 행정규제의 일원화 등도 올해 하반기 에 모두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정부는 이와 함께 주5일제 근무제 정착과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대책들을 마련해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에 포함시키기로 했다.3. 대북정책의 변화열린우리당은 우선 삭감된 남북협력기금을 확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기존의 비료지원과 개성공단 기반시설 지원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 임기 안에 나머지 11만 명이 화상 상봉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남북협력기금을 확충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겠다 고 밝혔다. 그렇지만 사실 이정도 내용이라면 지금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기조와 별다를 게 없다.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4.15총선 중앙공약집 에 들어 있는 통일안보 정책도 현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베껴놓은 인상을 주고 있다.앞으로 주목할 대목은 국가보안법의 폐지 여부와 주적개념의 말소여부이다. 열린우리당은 북한에 대한 주적 개념을 반대하고, 국가보안법은 폐지가 아닌 개정을 주장해왔다. 이른바 본격적인 남북 교류협력 시대의 변화상과 어울리지 않는 독소조항만 골라 없애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실 이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 를 예고한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북핵위기가 지속되고 있고, 탄핵과 총선을 거치면서 보-혁 간 긴장이 꼭지점에 와 있는 상황이라 선뜻 손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또한 열린우리당보다도 훨씬 진보적이며 북한에 우호적인 민노당이 원내에 진출하여 북한에 대한 주적다.
    사회과학| 2004.07.15| 7페이지| 1,500원| 조회(246)
    미리보기
  • 러시아 내전의 발발과 혁명의 방어 평가A+최고예요
    내전의 발발과 혁명의 방어{목 차Ⅰ. 개괄Ⅱ. 내전의 배경1.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작2.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Ⅲ. 내전의 발발과 혁명의 방어1. 적군(赤軍)과 백군(白軍)1) 남부 러시아 - 얼음 전쟁2) 동부 러시아 - 사회혁명당의 실패3) 외국의 개입2. 혁명의 방어1) 적군(赤軍)의 창설2) 심각한 위기3) 폴란드 전쟁과 백군의 소멸4) 내전의 종결Ⅳ. 내전의 평가 및 결론1. 내전의 평가2. 결론Ⅴ. 참고문헌Ⅰ. 개괄모든 형태의 내전이 다 그러하겠지만, 러시아 혁명기에 발생한 내전도 상당히 끔찍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고 소수파로 전락했던 제헌의회를 해산하면서 이미 내전은 잉태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을 위한 사회 개혁이 진행되면서 나타난 기존의 지도적 계급의 반발도 역시 내전의 강력한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내전은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낙오한 세력과 특권을 빼앗긴 상류 계급 및 제정 러시아의 부활을 꿈꾸던 민족주의자, 사회 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정책 실패로 인해 불만을 품게된 농민층 및 비(非)러시아계 민족들의 독립 의지가 합쳐지면서 한순간에 폭발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내전의 배경 상황과 전개 과정 및 평가를 좀더 자세하게 고찰해 볼 생각이다.Ⅱ. 내전의 배경1.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작제헌의회의 해체 이후에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라는 슬로건 하에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정부란 프롤레타리아 독재 를 표방하는 정부이며, 또한 노동자·농민의 정부 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초기 볼셰비키 입법들은 실제로 이러한 구상을 현실화하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노동자, 농민 및 사병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운명을 자신들이 관장케하고 나아가 국가운영에까지 그들의 참여를 확대시킬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이를 강화시키려는 일련의 법령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법령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브나르콤에만 직접 책임을 지면서, 그 권력을 무한정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체카의 강화 노력은 소비에트 정부가 추진했던 사회개혁 작업과 맞물려 즉결 처형과 학살 등을 통한 수많은 공포의 신화를 창출해내었고, 이는 러시아 국민 사이에 광범위한 불만과 공포를 자아내게 했다.2.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볼셰비키 정권은 무엇보다도 이전의 임시정부에 치명적이었던 전쟁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레닌이 권력장악을 그토록 재촉했을 때 그가 기대했던 것은 러시아의 선례가 유럽의 여타 국가들, 특히 독일에서의 노동자 혁명을 촉발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고도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되자, 볼셰비키로서는 자신들의 종전 공약을 지키기 위해 당초 예상한 우호적인 사회주의 독일이 아니라 예전과 다름없는 제국주의 독일과 합의를 해야만 했다. 이에 새로이 외무대표 인민위원(외무상)으로 임명된 트로츠키는 새로운 방식의 공개외교 를 시도하여 독일 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독일 국민에게 호소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시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따라서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당은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독일 측은 종전(終戰) 조건으로 발트 해안의 몇몇 지역, 백러시아 및 우크라이나를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가 산업 및 농업 지역의 태반을 잃게 됨을 의미했다. 부하린이 이끄는 공산주의 좌파세력은 이런 조건 수락이 제국주의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의미하는 동시에 10월혁명으로 촉발된 세계 혁명의 호기를 놓치는 것이라고 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엄격한 현실정치의 노선 하에서 주장하기를, 세계혁명에 있어서 가장 값진 자산은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부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라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 존재가 위협을 받아서는 안되며, 따라서 단 하나 가능한 정책은 독일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숨돌릴 겨를을 얻어 세계 혁명은 다소 먼 장래로 미루더라도 현재 얻어진 성과를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된 논거였다.{) 이것은 10월혁명 세예프 장군과 코르닐로프 장군은 코사크족이 도와줄 것으로 기대하고 돈을 점령하여 의용군을 조직하려 시도했으나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코사크족은 전제왕정의 부흥을 원하지 않았으며, 혁명을 이용하여 특권을 지닌 채 더 많은 자치권을 얻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루돌프 시베르스가 이끄는 적군 정예 1만이 1918년 1월 중순에 돈에 침입하여 로스토프를 점령하였고, 이에 의용군이 스텝지역으로 달아나면서 그 유명한 얼음 전쟁 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4월에 예카테리노다르 부근 전투에서 코르닐로프 장군이 전사하면서 데니킨 장군이 지휘권을 이어받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이동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약 80일의 이 기간 중 남부 러시아의 정세는 급격히 변화하였는데, 적군의 지원 하에서 수립된 소비에트 정권이 대량학살을 수반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박해 당하고 엄격한 징집제도가 시행되자, 지금까지 중립을 유지하던 코사크족은 크라스노프 장군이 이끄는 대부대를 구성하여 봉기하게 되었다.2) 동부 러시아 - 사회혁명당의 실패내전의 두 번째 발원지는 동부 러시아였다.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 체코군단은 약 20만에 가까운 병사가 러시아에 투항했는데, 이들은 독일과의 강화조약 및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해로로 프랑스 방면의 전선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중 첼리아빈스크에서 적위대와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우세한 무장의 체코군단은 전신계통을 이용하며 이내 시베리아 철도의 전장(全長)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제일 먼저 포착해 이용한 것은 사회혁명당(SR) 세력이었다. 10월 혁명이래, 볼셰비키의 위협{) 제 2차 소비에트 총회를 중간에 보이콧함으로써 SR은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이 조국과 혁명에 대한 범죄행위이며 내전을 의미하는 것 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제프리 호스킹, 소련사, 김영석, 홍성사(1988)에 대한 대응방안에 있어서 SR은 자신들의 행동이 반혁명으로 몰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불확실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SR 1천, 이탈리아군 2천, 영국군 1천5백, 프랑스군 1천명 등으로 구성된 병력이었다. 이후 일본군은 계속 병력을 증강시켜 7만 5천명까지 파병하였다. 미셸 헬러·알렉산드르 네크리치, 권력의 유토피아Ⅰ, 김영식·남현욱, 청계연구소(서울;1988)그러나 1918년 11월 1차대전이 종결되자 연합국의 목표는 볼셰비즘이 표방하는 급진적인 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러시아 봉쇄와 같은 예방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국의 실질적인 무력 개입은 각자의 이익 경쟁과 대전 후 염전(厭戰)이 병사들 사이에 증폭됨에 따라 곧 철수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국의 백군에 대한 무기, 탄약 및 장비들의 지원은 계속 이어졌는데 이것은 백군의 실질적인 전쟁 수행에 있어 오히려 상당한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볼셰비키들이 백군은 러시아 문제에 외국세력을 끌어들이는 비애국적 집단이라는 선전을 효과적으로 러시아 국민들에게 인식시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의 신생 소비에트 조국에 대한 무력 개입의 방어역을 맡은 볼셰비키 정부는 국가이익의 수호자로 자처할 수 있었고 이는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의 잠재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2. 혁명의 방어1) 적군(赤軍)의 창설적군의 창설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이 고안해냈던 무장 민병대의 참담한 실패를 확인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1917년에 소비에트 정권은 사병위원회 구성과 부대 지휘관의 처결권 상실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소규모의 소위 노동자·농민 적군(赤軍) 을 창출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오래 지탱되지 못했는데, 독일과의 강화조약이 난항을 거듭하던 당시에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진군을 재개하자 이 노농 적군은 나르바와프스코프 부근에서의 성공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그 기초가 과도할 정도로 허약하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여기서 국방담당 인민위원인 트로츠키는 군사개혁을 통해 새출발을 결심하고{) 그는 레닌을 포함한 당내외 지도자들에 앞서 처음으로 인민군 , 즉 군대를 대신하는 민병대라는 꿈이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잔은 모스크바로부터 약 40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당시 새로이 발족한 적군으로서는 이렇다할 대항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운 사정이어서 일시에 수도인 모스크바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국방담당 인민위원이었던 트로츠키는 이후 유명해진 장갑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이르는 길목의 스비아르스크에 도착해 병력을 규합하였고, 이를 통해 스비아르스크 방어와 카잔 탈환을 성공시켰다.이후 두 번째 위기가 다시 적군에게 찾아왔는데, 1919년 가을 데니킨 장군의 지휘하에 있던 백군이 막강한 병력으로 발전하여 적군이 크라스노프 장군이 이끄는 코사크족 반군을 짜리친에서 배격하여 돈 강에서 구축시키는 동안, 남부지방과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점령하고 10월중에는 체르니코프와 오룔까지 진격하여 모스크바로부터 불과 200마일 떨어진 지점까지 치고 올라오게 되었다. 또한 이에 호응한 발트 연안 지역의 유됴니치 장군 휘하의 병력까지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여 10월에는 페트로그라드 교외까지 쇄도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휘한 성공적인 도시방어로 인해 유됴니치의 군대는 끝내 10월말에 무질서하게 퇴각하였고, 데니킨의 병력도 전열을 재정비한 적군의 반격으로 역시 격퇴되어 아조프해와 크림반도로 후퇴했다. 또한 1919년 3월에 볼가 방향으로 넓은 전선에 걸쳐 전면공격을 감행했던 콜차크의 군대도 초반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카메네프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배하면서 우랄 방면으로 격퇴되어 시베리아로 쫓겨갔다.3) 폴란드 전쟁과 백군의 소멸폴란드 전쟁은 내전의 역사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쟁은 내전에 있어서 단지 백군 측에 유리했던 잠시동안의 휴지기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되어지며 적군측에게는 반혁명전쟁 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스탈린 뒤의 연대기는 이 전쟁에 제3차 연합국 전쟁 이라는 제목을 재빨리 붙였다. ibid1919년 겨울부터 1차 대전으로 인해 독립한 폴란드와 적군 사이의 충돌이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에 폴란드는 협상을 통하여 충돌을 bid
    사회과학| 2004.07.15| 7페이지| 1,500원| 조회(588)
    미리보기
  • 비동맹운동의 의의
    목 차Ⅰ.서론Ⅱ. 본론1.비동맹의 개념과 성격2.비동맹주의의 형성3.비동맹운동의 목표와 원칙4.비동맹운동의 발전Ⅲ결론Ⅰ.서론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반식민지 국가가 잇달아 독립을 달성하여 많은 신생국들이 탄생하였다. 이들 신생국들은 전후의 냉전체제 속에서 그들의 정치적 독립에 이은 국가건설과정에서 기존 국제질서의 어느 한쪽 진영에도 종속되기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국가이익 내지 집단이익에 입각한 아이덴티티를 찾으려 하였다.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짓밟혀 온 이들 제 3세계 국가들은 이제까지의 동서 양진영에 의해 지배되어 온 기존 국제질서를 거부하고 역사적 현실에 각성을 바탕으로 하여, 짓밟힌 과거에 대한 보상과 세계질서에의 주체적·적극적 참여를 통한 정당한 자기들의 몫 을 요구하면서 그들 자신의 연대성을 정립하고 있다. 이들 제 3세계 국가들이 연대성의 정립이라는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비동맹주의, 비동맹운동인 것이다.초기의 비동맹운동은 전후 양극화된 국제정치상황의 특징인 냉전과 함수관계를 가지면서 성립되었다. 비동맹운동의 선구자격인 티토, 수카르노, 네루, 낫세르, 엥크루마 등은 기존 국제정치가 대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지탱되어 왔기 때문에 대둑이 아닌 그들 나름대로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독자노선을 모색하지 않는 한 권력정치의 속성상 약소국들은 신식민지주의라는 운명을 면할 길이 없음을 자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각적 반성에서 비동맹운동이 태동된 것이다. 비동맹운동이 반식민·반제국주의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초기의 비동맹은 일반적으로 반(反)서구적 성격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후 60년대로 들어와 탈냉전의 다극화 시대로 됨에 따라 냉전논리가 극복되고 온건 신생국들이 대거 비동맹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60년대에 들어와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다수의 아프리카 신생국의 비동맹운동 및 국제사회에의 참여에 따른 비동맹의 성격변화와 60년대의 국제사회구조의 다극화에 기인하는 것이다. 60년대에 들어오동맹정책이 냉전과 함수관계에 있느냐 아니냐는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세계 정세구조의 양극화 내지 집중화의 산물이며 그 기능임은 부인할 수 없다. 세력구조가 다양화하면 비동맹의 의의도 감소될 것이 분명하다.다시 말하면 중립은 열전에 참가하느냐 않느냐에 의하여 결정되지만, 비동맹은 냉전에 참가하느냐 않느냐에 의하여 결정된다. 「비동맹」국가가 열전에 참가하느냐 않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중립은 전쟁에 관한 외교원칙이며, 비동맹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원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후자는 전자에 비하여 적극적 면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비동맹정책에서 평화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립은 세력균형하의 강대국 내지 중대국간의 현상임이 보통인데 반하여 비동맹은 세력 양극화 상태하의 중소국과 강대국간의 현상임이 보통이다. 세력 균형하의 국제정치에서는 중립국은 보유한 세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국가 이익을 보전하려 하는 데 대하여, 세력 집중하의 국제정치에서는 비동맹국은 세력의 공간(power vacuum)을 창조함으로써 세력의 충돌로부터 피하려 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세력 행사를 유보한다고 한다면 후자는 세력 행사를 포기한다고 하겠다.{) 박상식, 第 三世界의 解剖, 집문당 1982 p159∼1602)비동맹의 성격비동맹의 성격은 몇몇 지도자들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즉 엥크루마의 비동맹은 현재의 핵무기 경쟁과 냉전적 상황과 관련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그것은 결코 Anti-Western이거나 Anti-Eastern 어느 것도 아니다. 에서 냉전적 상황이 이들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네루의 우리들의 과거로부터 상속받은 이념 이나 낫세르의 우리들의 민족적 열망, 정신적 복합체, 외세와의 경험 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반식민주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네루는 우리가 소속되기를 희망하는 유일한 진영은 평화와 선의의 진영이다. 라고 하여 평화주의를 주장하였고, 낫세르는 나는 어느 누구의 광대나 추종자이거나 볼모948년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결성, 동·서독일의 성림, 중국혁명의 승리 등은 미·소 양(兩)대국을 극으로 하는 동서 양 진영의 냉전 을 해가 갈수록 격화시키고 있었다.신생독립국가 인도가 초기에 처해있던 국제환경은 이와 같이 혹독했으며 그 속에서 네루 등 신생인도의 국가지도자들은 이 냉전 의 상황 속에서 인도가 처신을 잘못하면, 그리고 냉전이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면, 오랫동안의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여 간신히 획득한 독립도 곧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러한 국제환경 속에서 신생약소국 인도가 택한 길은 될 수 있는 한 국제분쟁의 권외(圈外)에 머물면서, 전쟁의 와중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자세였다. 예를 들면 우리들은 어떠한 블록에도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외교적인 분규를 피하려고 노력해왔다. {) 1947년 12월 4일, 의회에서의 네루수상의 답변라든가, 타인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정책이다. 국제적 분쟁에 대한 개입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라든가, 나는 어느 한 블록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현재의 세계무대에서 나타나고 있는 각종의 블록에서 독립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1948년 3월 8일, 제헌의회에서의 네루의 답변라는 등의 발언이 이러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편집부, 비동맹운동, 지양사, 1985 p72∼73그러나 1950년의 한국전을 계기로 인도외교는 종전의 소극적 중립주의에서 적극적인 중립주의에로 전환하여, 세계평화의 유지문제, 반식민지주의문제, 그리고 군사블록에의 비동맹 등 비동맹주의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 하경근, 제 3세계 정치론, 한길사, 1980, p35이러한 이념은 주은래와 네루의 회담에서 평화 5원칙 으로 발전하였으며, 미국의 동남아조약기구 결성 등 새로운 냉전정책에 대처하기 위하여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에서 반둥 10원칙 이 채택됨으로써 반식민주의, 민족자결주의, 세계평화주의 등 비동맹 이념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또한 비동맹 청산과 민족해방, 그리고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들 수 있다. 이 목표는 어떤 형태의 지배도 종식시키고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의 간섭을 배제하고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구체화된다.둘째,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평화적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평화운동이 있다. 그들은 군비경쟁을 종식시키고 세계평화와 안보를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국제적 감시 아래 완전군축, 군사동맹의 해체, 외국군대의 철수, 군사기지의 해체 등의 포괄적 목적달성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중앙조약기구(CENTO), 동남아조약기구(SEATO) 등의 군사블록을 해체시켰으며, 군축 특히 핵군축을 위한 유엔군축특별총회를 미국의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1978, 1982, 1988)에 걸쳐 개최하였다.셋째, 기존의 유럽 중심의 세계질서를 비판하고, 강대국과 제 3세계가 국제사회에서 완전 평등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신국제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국제경제질서(NIEO)오 신국제정치질서(NIOP), 신국제정보질서(NIIO)의 수립을 위한 투쟁으로 집약된다.이상과 같은 비동맹운동의 공동목표를 설정하는 데서 우선성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것은 비동맹운동의 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고 공범위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아시아·아프리카에서 식미지·반식민지 정권이 청산되고 난 후에는 정치적 탈식민지운동의 중요성이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식민주의나 인종주의를 청산하는 것이 최고의 우선성을 지녔던 반면, 오늘날에는 이 이슈가 아프리카의 일부와 기타 소수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70년대에는 사회·경제적 후진성의 극복과 경제적 자립의 달성이라는 임무가 최우선 과제로 되었으며, 이것은 1973년 알제정상회의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된 신국제경제질서 강령 속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위기의 심화와 관련한 신냉전체립과 의지통일이 주요한 활동이었으나 조직적·지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70년대에 비동맹운동은 조직성·지속성이 강조되어 정상회의·외상회의의 정기적 개최, 조정국의 설치가 결정되어 활동의 일상적 체계가 확립되어 갔다. 이리하여 비동맹운동은 국제통일전선으로서 유엔 등의 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4. 비동맹운동의 발전1060년대 후반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의 확대와 구 포르투갈령 식민지의 잇따른 독립 등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면서, 비동맹운동은 정체를 벗어나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70년, 6년 만에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서 제 3회 정상회의가 개최되어 비동맹운동이 재개되었다. 그 후 1972년의 조지타운 외상회의, 1973년 제 4회 정상회의(알제)를 거치면서 비동맹운동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70년대 비동맹운동의 고양을 내용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제·반식민주의 입장에 기초하여 민족자결권을 확립하는 투쟁을 강화하였다는 점이다. 1970년에 들어서 비동맹운동은 베트남·인도차이나 민중의 해방투쟁을 지원하고, 자결권 확립에 기여함과 동시에 기타 제 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였다. 1970년 루사카회의에서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를 옵저버(observer)로 참석시키고, 1972년 조지타운 회상회의에서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와 캄푸치아 왕국 민족연합정부의 정식 가맹을 승인함으로써 닉슨독트린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비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1973년 3월 베트남 민중은 베트남 평화협정 을 쟁취하였으며, 라오스 민중도 라오스 평화협정 을 쟁취하였다. 1975년 4월 마침내 캄푸치아와 베트남은 해방을 맞이하였다.비동맹운동은 한반도 문제에 관하여 제 4회 정상회의는 분단 고착화를 의미하는 두 개의 한국 의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고, 리마 외상회의91975.8)에서는 한국의 가맹신청을 미군주둔 과 베트남 참전을 이유로 거부하였다.비동맹운동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운동을 지원하였다. 1였다.
    사회과학| 2004.07.15| 9페이지| 1,500원| 조회(690)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2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8:17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