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욘드 사일런스’를 보고......평소 드라마를 시청하다가, 또 영화를 관람하다가 청각장애인 역할의 배우가 나와 수화를 하는 장면들이 머리 깊이 남아있었다. 특히 청각장애인과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상대방이 그를 위해 수화를 배워가는 장면들은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말이 아닌 손과 표정으로 만들어가는 대화. 과연 음성이 아닌 동작만으로 진실한 마음이 전달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수화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영화 ‘비욘드 사일런스’를 보게 되었다.비욘드 사일런스는 높은 작품성을 평가 받는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언어를 통하는 것 보다 수화를 통하여 서로의 감정과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은 훨씬 힘든 과정이지만 그렇게 확인된 감정들은 더욱 값지고 오랜 여운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가슴이 뭉클한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 였다.영화는 교수님이 보여준 다큐멘터리와 같은 상황의 가정이였다. 즉 청각장애인 부부와 그사이의 정상적인 딸 사이의 많은 어려움과 행복에 대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청각장애인 본인이 겪는 어려움이나 갈등들도 제시되어 있지만 포커스는 비장애인인 딸이 겪는 감정이나 갈등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우선 영화에 나오는 장면 곳곳에서 나는 일반인과 다른 청각장애인의 일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전등이 깜빡깜빡 거리게 설계 되었있는 집과 문자로 내용을 주고 받을수 있는 청각장애인용 전화기가 등장 한다. 또한 딸 라라가 집에 돌아왔음을 부모에게 알릴때도 역시 전등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것이였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그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발명품들이 더 만들어 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이제 라라와 부모를 살펴보자. 영화의 첫 부분에 라라는 책을 잘 읽지못해(읽기능력 저하) 아이들의 놀림꺼리가 되며 선생님께 노력하라는 격려를 받게 된다. 라라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문자보다 수화를 먼저 접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문자를 소홀이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교수님이 보여주신 다큐멘터리 속 가족이 불안해졌다. 사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잠시만이라도 저 아이를 고모네 가족이 데리고 있었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piaget의 인지발달이론에 의하면 3-5세 사이에 언어발달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이 시기에 언어발달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후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꼭 자녀에게 언어로 인한 상처를 받게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한 끝까지 자식을 제 손으로 키우겠다고 주장하는 저 부부의 고집은 장애인으로써 단지 세상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정상인으로써의 생각이였음을 문득 깨달았다. 그들은 장애인이기 이전에 자신이 낳은 자녀의 부모였다. 부모로써 남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였으며, 특히 청각장애인인 그들에게 정상인으로 태어나준 딸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겠는가. 나는 그들을 장애인으로만 바라보았지 부모로써 바라보지 못하였던 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영화속에서 라라는 부모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연결자였다. 수업을 받는 도중에 조퇴하고 부모와 은행에 가서 담당자와 부모의 의사소통을 도와야 했고, 엄마가 영화볼 때 수화로 통역해줘야 했으며 심지어 학교선생님의 꾸지람까지 전달해야했다. 여기서 라라는 이런 일들을 슬퍼하거나 짜증낼만한 어린나이였지만 기특하게도 부모를 잘 이해하고 돕는 성숙한 아이로 그려진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수화라는 것은 부부간의 사랑, 부모 자식간의 사랑을 더욱 깊어지게 하는 매게체 인것 같다.그러나 역시 이들 가정속에 청각장애는 갈등을 야기하는 주요 문제가 된다. 딸 라라가 국어, 수학, 과학이 아닌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점을 잘 드러내 준 영화의 핵심적인 소재인 것 같다. 청각장애인인 부부. 음악을 잘해서 아버지에게 사랑받은 여동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살아온 아버지. 이 모든 배경으로 인해 라라의 음악적 소질은 하늘이 준 선물인 동시에 그녀가 넘어야하는 힘든 산이 되어 버렸다. 고모에게 선물 받은 클라리넷을 통해 부모에게서는 배울수 없었던 음악에 대한 매력에 빠지게 되고, 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부모와의 갈등은 심화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난 우선 라라의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음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른사람들이 아무리 설명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직접 들어보지 않은 그에게 음악이 어떤 감동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음악으로 인해 여동생과의 사이는 나빠지고 가족간의 골도 심해져 그렇게 한평생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딸이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당연하다. 음악을 몰라서 보다 자신의 딸이 연주하는 것을 들을 수 없고 칭찬해줄 수 없기 때문에 더 슬픈 것 같다. 다른 사람들 모두 칭찬하며 박수쳐도 아버지는 듣지 못했기에 연주에 대한 어떠한 평도 할 수 없는 것이다.그럼 라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라라는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를 한번도 원망한 적 없는 소녀이다. 오히려 떳떳하게 자신의 부모를 세상과의 대화에 참여시키며 살아온 아이였다. 그렇게 항상 고요속에 살아온 그녀에게 음악은 정말 놀라운 것이였을 것이다. 항상 음악을 듣고 여러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일반인들과 달리 그녀에게 음악은 들을 때 마다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었 던 것 같다. 이렇게 그녀가 음악에 매료되어 그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은 청각장애인부부 밑에서 자란 배경 때문에 어쩌면 더욱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이를 통해 아버지와 딸의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 이 와중에 어머니가 자전거를 타다가 뒤에서 오는 차소리를 듣지 못하고 죽게 되면서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청각장애인은 귀에 이상이 있어 균형감각이 남들보다 조금 이상하다고 한다. 그러나 딸 라라는 보통 엄마처럼 자전거를 같이 타주지 않는 엄마를 아쉬워했고 엄마는 딸을 위해 자전거를 배우다 그렇게 된 것 이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초반부에 청각장애자들의 소박한 행복과 일상을 그리다가 점점 그로인한 갈등과 슬픔을 그려 마음이 아파왔다.영화에서 라라는 가끔씩 아버지에게 사람이 사랑할 때 나는 행복한 소리가 어떤지, 해가 뜰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눈이 내릴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깃발이 펄럭일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주위의 흔한 소리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또한 누군가에게 소리를 설명한 적도 없었다. 즉 소리가 넘치는 세계안에 살아온 나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져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영화 속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세상의 작은 소리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발견 할 수 있음에 감사 드렸다.한편 이 영화를 인터넷에서 알아보면서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전 스텝이 수화를 배웠다는 점이였다. 이들은 모두 수화를 사용하면서 장애에 대한 현실적인 공감을 하며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더욱 청각장애인의 일상이 현실적으로 그려진게 아닐까 한다. 그치만 이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도 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이 사회적 편견을 겪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가 누이동생으로부터 경험했던 소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딸인 라라에게로 연장되어 갈등을 겪을 뿐이다. 즉 장애는 자기 자신의 문제일 뿐 사회적으로 부딪치는 편견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장애가 일반인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소박한 기쁨들을 주기도 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고모가 수화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야 말로 오빠를 위해 수화를 배운 고모의 모습을 통해 무언의 화해의 아름다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디자인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현대에는 다양하고 개성이 넘치는 많은 캐릭터와 디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문구점이나 팬시점, 또 각종 쇼핑몰을 방문할때면 시대에 맞혀 각양각색의 이목을 끄는 많은 디자인을 발견할 수 가 있다. 그러나 내가 커가면서 다른 나라들의 상품들을 접하게되고 어렸을때는 몰랐던 한국 디자인의 문제점에 대해 하나둘씩 알 수 있게되었다. 한국 캐릭터 상품들 중 대다수가 일본의 유명 캐릭터를 모방한 것이 많았으며 옷이나 신발등의 디자인 유행도 다른 나라에서 먼저 유행하고 디자인 되었던 것이 뒤늦게 한국에 도착하여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러한 한국 디자인의 문제점은 어디서부터 시작 된 것일까?교수님께서도 말씀해 주셨듯이 우리나라 대형 캐릭터 전문업체의 사장은 아예 일본을 한 차례 방문할때마다 그쪽 나라에서 개발되어지고 유명해진 상품들을 사와서 표시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도용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통한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해서 무분별적으로 외국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그를 제대로 비판하고 우리적인 적인 것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창조를 위한 모방이 아닌 먹고 살기위해 팔아야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팔리는 물건에 초점을 맞춘 단순한 모방만을 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자신의 디자인 상품보다 다른나라의 디자인 상품이 더욱 판매가 잘 될거라는 틀에 밖인 고정관념과 새로운 디자인 개발 실패에 대한 우려로 도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인 것같다.이러한 여러 이유로 한국의 많은 디자인이 패러디-모방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음이 한탄 스럽다. 한국적인 이미지를 살리면서 우리만의 디자인을 개발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우리나라 자체의 정통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한국의 독특한 의상인 한복에서 생활에 맞혀 변형시킨 개량한복이라는 멋있는 디자인의 의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젊은 세대나 부유층들은 외국의 명품디자인을 선호하고 유행을 따라가는게 현실이니 말이다.물론 유행에 민감한 것은 좋은 면으로 볼 때 매일매일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발맞춰 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만의 주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고유한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디자인이 사람의 방식이나 사고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발맞춰 가는 것은 좋지만 사람들에 의해 디자인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 자체의 흐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따라가는 형식으로 되어야 할 것 이다. 세계의 명차들 중에는 몇 십 년이 지나도 거의 변함없는 자체 회사만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꾸준한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많다. 이는 처음 만들 때부터 많은 투자를 하여 하나를 만들더라도 많은 고려와 함께 쉽게 질리지 않고, 멋진 디자인을 하도록 하며, 회사마다 커다란 전체 컨셉에 벗어나지 않는 틀 속에서 디자인을 함으로써 우리들은 어느 회사라고 하면 ‘아~그런 디자인!’이라는 식으로 머리 속에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하면 해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브랜드만의 고유한 특징을 가진 디자인을 해가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도 고유의 디자인 정체성의 확립이 시급한 것 같다. 몇몇 외국의 경우를 보면 독일은 기술을 바탕으로 기술 선진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는 예술로서, 스칸디나비아는 공예를 모토로 제품을 디자인하며, 일본은 작고 가벼운 것을 모토로서 그들만의 디자인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있다. 이들의 정체성 확립의 강력한 의지는 이들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으며 우리보다 훨씬 위의 디자인 문화를 가지도록 만든 것이다.
‘향수’에 대한 감상문향수는 전반적으로 교양소설을 패러디 한 듯 보인다. 시민계층에서 태어난 평범한 아이가 커가면서 인간의 소명을 깨닫고 자신을 찾아가고 알아가는 소설을 흔히 교양소설이라 하는데 향수에서도 ‘그루누이’의 커가는 삶을 그렸으며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루누이는 ‘있는 그대로’가없는 사람이다. 참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만의 냄새가 있고 그것은 원래부터 있는 것으로 즉 ‘있는 그대로’가 된다. 책 속의 그루누이는 그 자신을 나타내는 냄새가 없는 인물인 것이다.무언가 자신과 다르고 튀는 사람은 용납하지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남들 모두가 소유하고 있는 냄새가 없다는 이유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소외당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외적 요소에 의해 오는 소외의 부당성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우리 조는 토론을 하면서 그 소외적 측면에 비중성을 두며 이야기를 해보았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를때도 그것을 향을 만드는 당연한 과정으로만 여겼다. 이것 또한 그가 소외되어 살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또한 만약 우리가 그의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면 우리의 상식상 큰 돈을 모으고 우리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곳에 사용했을 텐데 그는 소외되어 살았기에 정신이상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집착이라는 부정적 측면으로 사용하게 된 것 같다. 결국 ‘소외’라는 자체가 근본적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그리고 우리 조는 책의 결말 그루누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았다. 그는 25명을 죽이고 결국 궁극적 목표였던 매혹적 향기를 담은 향수를 개발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그는 사형대위에 섰지만 그 향수로 인해 살아남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그는 그 향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물어 뜯겨 죽는 자살을 하게 된다. 사형대위에서 까지 살아남은 그가 또다시 죽음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살아남은 순간 그동안 부정해왔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향으로써 사람들을 그에게 집중시키고 매혹시키게 하려던 그는 사실상 사람들이 매혹된 것은 그가 아닌 향이였으며 결국 자신이 찾으려던 정체성은 못 찾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이다.한편 책안에서 ‘냉소적인 비웃음’이나 ‘인간에 대한 역겨움’으로 표현된 구절을 보며 고작 그런 향기에 미쳐 중죄를 저지른 그를 사형대에서 놓아주고 오히려 찬양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의식이 생긴 것 같다.전체 프로토콜에서는 그의 주변 인물 또한 모두 죽어갔다는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도대체 왜 다들 죽어간 것일까? 교수님이 말씀해주시길 그루누이는 18C초 탄생하는데 그 시기는 절대 왕정기가 끝나가는 때이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시기였고 책안의 핵심 제재인 냄새 또한 결국 사라지는 것 이었다. 이 책의 주제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과 연관이 크므로 주제와 시대가 상응하여 다들 죽는 것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하셨다. 또 다른 조의 의견을 보면 등장인물 중 엄마, 신부, 백작 등이 모두 이해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이기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것 같다는 색다른 의견도 발표하였다.
책을 읽기 전 나는 책의 제목에 있는 생소한 단어 ‘노벨레’의 뜻이 궁금했다. 노벨레는 신기하지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예술적 구성으로 간결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작품을 의미하였다. 책의 내용은 예상대로 꿈을 모티브로 한 현실속에서 발생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주인공 부부는 우리의 일상 속 평범한 부부이자 서로의 욕망을 남몰래 분출하는 부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작가 슈니츨러는 다들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꾸며진 모습 뒤로 감추려고 하는 현실의 세속적인 사람들을 비판하고 결국 이 책을 통해 그러한 모순을 실날같이 지적해 낸 것 같다.현실속에서는 비도덕적이고 관습에 위배되는 일들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결국 우리속에 감추고 그리워하고 있는 욕망이 아니던가?!책 속의 주인공 프리돌린은 현실의 사람들이 꿈꾸기만 하는 그러한 욕망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헛된 욕심과 아내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라는 안 좋은 측면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아내의 측면에서는 그녀의 꿈속에서 프리돌린이 십자가에 박혀 죽게 되고 아내자신은 공주처럼 화사한 옷을 있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남으로써 그녀의 구석에 있는 헛되고 안 좋은 욕망들이 들어나게 된다.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고 나서 서로에 대한 분노와 불신은 증오심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한순간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먼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인간의 욕망이란 결국 이렇게 안타깝고 퇴폐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이 책의 주요욕망은 성적인 욕망으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주인공이 겪는 낯설은 무도회장에서의 경험과 창녀와의 만남 등 작자는 사람의 깊숙한 내면적 욕망을 정확히 짚어 내었다. 솔직히 이 책은 나에게 너무나 큰 정서적인 쇼크를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쇼크만큼 큰 동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은 어느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부관계의 허약성과 문제성이 실날같이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미래를 묻어버리는 주인공 부부의 결말을 보고 큰 변화와 위기 없이 현실을 참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의 내면 또한 잘 묘사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