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가?목 차1. 신교육사회학(1)기존 교육관: 기능론적(2)신교육사회학의 등장(3)신교육사회학의 특징(4)지식 사회학2. 신교육사회학의 주요이론가와 연구내용▶영(M.F.D. Young)의 연구▶애플(M.Apple) 「교육과 이데올로기」학교는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3.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1)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2)한국 사회의 대표적 지배 이데올로기(3)지배 집단의 이데올로기 주입수단4. 교육을 통한 이데올로기 재생산(1)이데올로기 재생산과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적 장치(2)정치이념의 변화와 교육과정▶우리나라 정치이념과 교육과정의 변화 (제1∼5공화국)▶경제적 측면(3)성차별과 교과과정 (성이데올로기 주입)(4)도시지향성과 교육내용(5)국제관계와 신식민주의1. 신교육사회학(1)기존 교육관: 기능론적▷전통적 지식관의 특징교육 내용은, 1이미 주어진 것 2합리적인 것 3객관적, 가치 중립적인 것 4보편타당하며 합의된 것(2)신교육사회학의 등장- 기존의 전통적 지식관에 대해 비판하며 등장- 교육내용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해 이의 제기- 교육내용이 기득권 세력의 권력 유지를 위해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비판(3)신교육사회학의 특징1지식사회학적 관점을 강조(지식 = 역사적 사회적 생산물 )2교육에 대한 지배-억압 구조를 연구(교육과 사회불평등에 대한 관점을 넓힘)3질적 연구와 미시적 연구의 중요성을 부각시킴4역사 구조적 분석5학업성취와 교육과정에 대한 사회 정치적 분석6상호작용적이고 문화적인 면 강조 (비판적 견해 중시)(4)지식 사회학; 신교육 사회학의 이론적 배경지식의 존재구속성, 상대성, 가변성에 초점을 맞춤2. 신교육사회학의 주요이론가와 연구내용마르크스는 교육과정(curriculum)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그는 교과목의 가치중립성에 관한 주장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근거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시킨다고 비판한다. 즉,- 학교는 경제구조를 재생산한다 는 것.대상에 따라 두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단순노동자로 일하게 될 사람들에게는 윗사람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고 시간을 잘 지키고 기계적 작업방식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반면, 회사의 관리자나 경영자로 일할 사람들에게는 독립적인 사고력 및 작업능력, 외적 규율보다느 ssoaus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기 등을 가르친다.결국-교육을 통해 한 집단은 순종적이고 능률적인 노동자로 만들고, 다른 집단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지도자로 기른다는 것이다.이러한 불평등의 존속을 능력주의라고 하는 것을 비판...학교 = 기존 질서의 정당화의 장치▶영(M.F.D. Young)의 연구 : 「지식과 통제」 신교육사회학의 토대⇒학교 지식의 사회성70년대 영국의 교육과정 비판 (학문 중심 교육← 노동자계급에게 불리. 상류계급 유리)◎학문중심의 교육과정1높이 평가되는 지식 : 공식적으로 평가되는 지식 (시험에 나오는 지식)2가장 우수한 아이들에게 가르쳐지는 지식3문자로 표현되는 지식 선호4추상적인 지식(직접적 체험과 상관도 낮음)5학문지향적 내용▶애플(M.Apple) 「교육과 이데올로기」기존의 학교에 대한 보편적 시각(기능론적 시각)에 비판점 제기학교는 필수적 지식과 인성을 중립적인 위치에서 함양하는 곳이 아닌, 특정한 헤게모니에 의한 사회유지 및 통제의 기능을 담당한다.학교의 교육과정을 문제시하고 내재한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밝히고자 함.문제제기▷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지식은 누구의 지식인가?▷누가 그것을 선정하는가?▷왜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가르쳐지는가?▷그리고 그것은 왜 특정한 집단에게만 가르쳐 지는가?학교는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학교는 이미 특정한 문화자본을 당연한 것이며 우수한 것으로 취급 (특정 문화자본에 대한 편파성)암암리에 특정한 지식을 차별적으로 분배함으로써 사회의 불평등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학교의 명시적 잠재적 교육과정은 사회전체의 경제 사회 제도에서 분리될 수 없다명명과정을 자본주의의 이념교육은 특정 계급의 부와 권력 유지를 위해 현 질서구조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전락교육의 주된 기능(명시적 기능) : 학습, 사회화교육의 주된 기능은 학습과 사회화이다. (사회화란 곧 사회의 주도적인 가치와 규범을 개인에게 내재화하여 한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 어울리는 인간으로 프로그램화되는 것을 의미한다.)-학습의 내용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과과정이 모두 대학입시로 모아지고 있다.실용적이지 않은 회의적인 내용을 단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암기식으로 무작정 주입해 넣는다.획일화된 인간의 심성과 행동은 산업사회에 어느 정도는 적합했다.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산업사회란 바로 대량생산, 대중소비 로 특징징울 수 있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아주 소수의 천재적 mind와 이들이 만들어낸 idea를 무조건 실행할 수 있는 획일적 다수가 필요할자.이런 사회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교육체계가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4다-사회화의 핵심은 사회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관을 가르치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에 관한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가치관과 규범은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계급적 기반과는 전혀 무관한 중립적인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예를 들면 인간을 존중하라 ,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라 등과 같은 가치관과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학습을 통해 개인들에게 가르치게 된다.이러한 기능은 교육에 있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인,실제로는 이 명시적 기능에 더하여 교육에는 숨겨진 이데올로기 교육의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 이를 일컬어 교육의 숨겨진 교과과정(hidden curriculum)이라고 하낟.우리는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중립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한 때 (가령, 유신체제나 5공 시대) 특정한 정치체제에 대해 드러내놓고 찬반을 강요당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그렇지만였다.우리의 교육에서 이렇게 이데올로기로 주입된 대표적인 것이 자본주의의 이념이다.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왜 교육을 통해 주입하는가?분명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따라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에서 보듯이 황금만능주의로 다수의 약자들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모순을 실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내면화되어 저항의 표출의지마저 갖지 못하도록 탄탄하게 뿌리박았다.이는 교육내용이 누구로부터 결정되는가에 대해 고찰해 봄으로서 알 수 있다.자본주의를 통해 부를 점유하고 정치적 권력을 갖게 된 소수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부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질서를 유지하고 안정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현체제를 옹호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은 기득권 세력, 즉 특정 계급의 부와 권력 유지를 위한 현재의 질서구조를 정당화시키는 지배체제 도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헤게모니- 단순히 물리적 힘이나 폭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피지배계급으로부터 농동적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사회전체에 대한 지도력을 확보하는 지배방식.(2)한국 사회의 대표적 지배 이데올로기1반공 이데올로기2발전 이데올로기60년대 이래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양적인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발전 이데올로기를 반공 이데올로기의 하위 결합시킴으로써 피지배 민중을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자 동시에 적극적인 동원화의 대상으로 파악해 왔다.3안정 이데올로기4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4. 교육을 통한 이데올로기 재생산(1)이데올로기 재생산과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적 장치(교육제도와 교과과정)1의무교육, 공교육-학교 외에 교육에 대한 평하-자신의 세계관이 성립되기도 전인 초등학교때부터 이념적 종속을 강요함으로써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사회가 필요한 기능인력으로써의 성장을 유도2입시제도와 성적평가-평가라는 사회적 기제는 개인의 의식을 사회구조에 부합하게 함으로써 비 국가주의의 이념에서 교육을 보면, 교육은 국가의 목표와 전통을 향하여 국민들의 단결을 꾀하고, 경제적 독립과 부를 증진시키며, 외부의 침입에 대항하도록 국민을 준비시키는데 기여해야한다. 국가주의는 국가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육을 국가가 관리하고 지원하는 공교육(公敎育)제도를 성립시켰다.학교 본위 공교육 이전에도 당연히 교육은 존재하였다.공교육제도의 등장1근대국가 이전: 종교가 교육을 지배교육권 신수설 의 지배시대가정의 사교육과 교회의 교육활동2절대주의의 등장으로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 시작3프랑스 혁명 이후-가르치는 자유에 관심이 집중-국민교육에 대한 국가개입우리나라 국민 교육제도의 형성: 미군정 후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은 학교 중심의 국민교육제도를 확립하였다 법적 규정폐쇄적인 학제의 운영은 학교를 철저한 국가의 공기(公器)로 만들었다.비정규학교조직은 학력을 인정받지 못함 -> 학력인정 검정고시를 쳐야 함.국가주의 교육체제에서는 국가가 교육분야에서도 모든 것을 다 알아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국가가 교육정책을 결정하고 국가가 세운 학교는 그것을 집행하고, 피교육자인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가 하는 일에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식이 되었다. 말하자면 국가가 결정하는 정책은 다 옳으니 국민은 무조건 따르라는 식이다.국가주의적 통제의 단적인 예로 국정교과서 제도의 운영을 들 수 있다. 국가가 교과서를 철저하게 통제하여 정치성이 강한 과목에 대해서는 국정교과서를 쓰게 하고 그것이 약한 과목에 대해서는 검정 또는 인정의 교과서를 쓰게 하고 있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육과정도 국가가 철저히 통제한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할 것인가를 결정할 자유가 학교에 허용되어 있지 않는다. 모두가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가지고 가르치고 평가에서도 획일적으로 제한된 문제들의 주어진 정답만을 가르쳐 왔다.교과 내용의 통제(강제성)는 교과서를 통해 이루어진다.중고등학교 수업.
목 차들어가기 전에Ⅰ. 서론Ⅱ. 자살의 현상적 측면1. 자살은 무엇인가2. 죽음의 기술(1)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2) 자살의 형태Ⅲ. 자살의 동기적 측면1. 왜 자살하는가?(1) 애정(2) 수치심과 명예(3) 희생적 자살(4) 빈곤과 파산2. 자살 발생이론(1) 생물학적 이론(2) 사회학적 이론(3) 심리학적 이론Ⅳ. 자살의 역사적 측면 (시대를 통해 본 자살에 대한 인식의 변화)1. 고대 사회2. 중세 사회3. 초기 근대 사회4. 낭만주의 시대5. 20세기Ⅴ. 결론 - 자살 바라보기참고 문헌들어가기 전에화창한 일요일이었다. 방 안에 울려퍼지는 Yuhki Kuramoto님의 피아노 선율은 기분좋을 만큼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진작에 읽었어야 하지만 읽어보지 못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고 있던 차이다. 결국 안나 카레니나는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문학 작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는 자살 이다. 오래된 고전인 「로미오&줄리엣」, 호손의 「주홍글씨」, 헨리 제임스의 「황금의 잔」등등. 물론 자살 그 자체가 소설의 주제로 다루어진다기 보다는 그 소설의 피날레를 장식하거나 인물의 비극에 동감을 더해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야 주인공의 자살은 단지 작품 속의 일이라 그런지 의연하게 받아들여다. 그런데 왜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자살이라는 것이 다루어지는 것일까?그 때 룸 메이트가 들어왔다. 음∼ Yuhki Kuramoto 음악이네. 근데 그거 알어? 헤비메탈이나 락음악을 들었을 때보다 이런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이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더 불러일으키는 거? 후훗 거기다 비오는 날보다 맑고 화창한 날 자살율이 높다는 것 역시 최근에 들어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 쯤 되고 보니 자살이라는 것은 책 속에서 뛰쳐 나와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Ⅰ. 서론얼마 전 사범대생이라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전교조의 비난에 대응하여 자신의 무죄를 틈조차 주지 않으며 계속되고 있었다. IMF 위기 이후 정부는 카드 회사가 회원 수를 늘이는데만 급급하여 신용불량자들을 급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정부의 방관과 정부 정책의 문제에 힘입은 카드회사는 협박, 폭행등을 사용한 채권 추심 강화가 금지되고 있음에도 서민들의 생계와 직접 관련이 있는 전세보증금을 가압류 조치하거나 가족들에게 거짓 법률까지 들먹이며 협박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로 인해 최씨뿐만 아니라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이 여러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고 있다. 춘천 MBC에서 4월 16일 보도된 전씨 아주머니 역시 카드 빚을 지고 카드 회사의 빚 독촉에 못이겨 극약을 먹고 숨졌다.앞의 사례 셋은 최근 화제가 되었던 자살에 대한 실제 사건들이다. 세 사건의 공통점은 그들은 자살 하였다는 것 뿐이다.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간 이유는 셋 각각 다르다. 교장의 자살은 사회적 명예와 위신을 잃었기 때문이었고, 장국영의 죽음은 확실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성적 취향이 남과 달랐으며 우울증에 시달린 많은 스타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자살의 형태는 경제적 파탄이나 압력 등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와 가치관, 그리고 그들의 등을 떠미는 사회성이 반영된 결과이다.우리 나라의 자살 사건을 본다면 강간, 겁탈을 당해 수치심에 의한 여성들의 자살이 지배적이었던 시기가 있었고 급격히 발달한 경제적인 부분에 비해 윤리, 문화적인 부분이 따라잡지 못한 데 인한 가치관의 혼란으로 인한 부분, 비행 청소년이 급증하고 가치관의 혼란과 입시제도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이 급증했던 시기가 있었으며, IMF때 중소기업이 도산위기를 맞게 되고 실업이 만연하면서 IMF자살이 많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노년층이 현대식 고려장이나 자식들의 냉대에 비관하고 직접 죽음을 택해 버리는 사건들도 있었다.한 해에 45만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살의 형태이지만 미국은 예외적으로 총포류에 의한 자살이 많다. 이는 미국은 일반인들의 총포류 구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2나이나 지위와 직업, 성별 등도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남성은 총기 사용처럼 절대적으로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여성은 약이나 독을 더 선호하며 여성 자살자의 3/4가량이 이 방법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민족의 전통이나 국가의 사정 역시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국가나 가문, 본인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 자살을 행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4계절의 영향이나 날씨의 갑작스러운 변화등도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 예전에는 단지 추측일 뿐이었지만, 최근 유럽이나 일본의 학자들은 맑은 날 자살률이 더 높아지는 이유에 대해 여러 설명을 하곤한다.5자살과 자살 기도, 자살 미수자살율이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더 높게 나타나지만 자살 기도는 여성에게서 훨씬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6비현실 속으로의 도피로서의 약물이나 마약, 특히 알코올 복용은 충동적 행동을 더욱 부추긴다. 약물과 알코올은 자기성찰과 비판능력, 통찰력, 결정에 대한 심사숙고 같은 자아의 통제 기능을 떨어뜨린다.이런 약물에의 중독증에서 나타나는 자살성향은 우울성향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2) 자살의 형태세계보건기구의 연구에 따르면 자살에 이르는 동기는 989가지, 자살 방법은 83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자살의 방법 83가지를 모두 언급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므로 많이 행해지는 자살 형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교사(絞死): 이미 언급했다시피 옛날부터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방법은 목을 매달아 죽는 것이다. 현대에도 자살자의 반 가량이 이 방법을 사용한다. 예외적으로 미국에서는 총포류에 의한 자살이 많다.2익사: 세계 어느 곳이든지 크고 작든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특히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흐르는 물줄기는 우울한 기분을 가증시키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투신과 자살이 병행되기도 하는 데 프랑스에서 유명한나 국가의 정의를 요구하며 일어난다는 점이다. 임노동자의 환경과 처우개선을 주장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경우가 예가 될 수 있다.9달리는 교통수단에 몸을 던짐: 지하철이나 열차에 몸을 던지어 자살 하는 것이다.⑩기타:이 밖에도 살인 기구를 직접 발명해 내(이를 테면 단두대나 화염방사기, 전기 충격기 같은) 자살하기도 하고 팔레스타인의 이슬람교도가 적대 국가에 엄청난 살육을 일으킬 목적으로 행해지는 폭약 자살도 있다.Ⅲ. 자살의 동기적 측면1. 왜 자살하는가?(1) 애정자살의 이유로 손꼽히는 것 중 하나는 사랑이다. 고대의 가장 유명한 커플 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처럼 사랑하는 사람 없이 혼자 남을 수 없기에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남편이나 부인이 병이나 처형을 당해 죽게 될 때 따라 죽는 배우자들도 있다. 드물지만 애증으로 인해 동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고, 일방향적 짝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절망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2) 수치심과 명예현대에는 많이 감소했다고는 하지만 옛부터 순결의 어머니로 간주되는 정절을 지키지 못했을 때 많은 여성들이 택하는 방법은 자살이다. 우리 나라의 은장도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인들의 자살을 강요하는 도구였다. 여자에게 있어서 정절은 남자의 용기와 같은 것이다. 여자는 주위의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정절을 지킴으로써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순결한 여자로 인정받는다. 는 말도 있듯이 여자에게 정절을 강요하고 당연시 여김으로써 강간, 겁탈과 같은 본인들이 원치 않는 성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대부분의 여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순결을 증명하라고 강요받는다. 이는 분명 자살이기는 하나 사회, 윤리적 관습이 죄없는 피해자들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하고 낙인찍어 이 사회에서 살아나갈 수 없도록 수치심을 느끼게 주입시킨 결과이다.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한 여자는 수도 없이 많으며 이에 반해 남자들의 경우에는 드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그런가 하면 전쟁에서 패했을 때에 군쟁이나 내전과 혁명, 독재자에 대한 봉기등 정치적 위기로 인한 자살등 자살을 하는 동기는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복잡하다.2. 자살 발생이론(1) 생물학적 이론프랑스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에스퀴롤은 자살을 독자적 질병이나 일종의 정신장애(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로 인한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미쳤을 때만 자살한다. 그러므로 자살자는 미친자이다 라고 할 정도로 자살하려는 욕구를 정신병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는 또 자살은 유전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그러하기에 자살을 기도하거나 자살한 사람의 가족이나 그 위 조상들은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한다.(2) 사회학적 이론자살률은 해를 거듭하며 일정한 유형을 보여 주고 있고, 그래서 이러한 유형들은 사회학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에밀 뒤르켐의 자살 이론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그의 저서 《자살론(Le Suicide), 1897에서 개인이 자살을 하는데 사회의 영향이 크다고 저술하여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전체의 문제로서 자살을 해석하고자 하였다.뒤르켐은 19세기 유럽 각국의 사망원인 통계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나라별로 상이한 분포가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자살적 태도를 설명하는 사회학 이론을 발전시켰다.자살은 순전히 개인적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즉, 자살은 전적으로 극단적인 개인적 불행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뒤르켐은 사회적 요인들이 자살 행동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 아노미는 이 영향들의 하나라는 점을 보여준다. 에밀 뒤르켐에 의해서 최초로 도입된 개념으로서의 아노미(anomie)는 특정 사회 조건에 의하여 야기된 목표나 혹은 목적 부재의 느낌으로 뒤르켐은 근대 세계의 변동 과정이 너무나 급속하고 격렬하므로 아노미와 연관되는 주요 사회적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뒤르켐은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인 규범과 기준들이 새로운 규범과 전통에 의해서 대체됨이 없이 사라졌다는 명제를 지칭하기 위해 아노미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아노미는 주어진 사회 생활 영역에서았다.
1 키에르케고어Ⅰ. 머리말20세기 실존사상의 선구인 덴마크의 그리스도교 저작가 키에르케고어는 전문적인 교육학자는 아니었지만, 윤리적·종교적인 것의 전달 방법에서 교육철학의 고유한 문제와 현대의 근본적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시사점을 준다.키에르케고어는 객관적인 대상의 인식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의의를 구하고자 했다. 지식만으로는 자신의 내면성에 대해 고찰할 수 없으며, 이는 현대문명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기자신에 대한 실존(實存)으로부터의 이해를 과제로 삼고 정직과 내면적 성실의 정도를 진리성의 기준으로 보았다. 그는 당대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던 헤겔의 철학사상과 덴마크 국교회의 가르침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하고 온몸으로 항거하여,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에게서 진리를 찾음으로써 참 자기를 터득하였다.22세 북 셸란을 여행하던 때 그는 길레라이에(Gilleleje)란 마을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자각, 진심으로 원하는 이념(Idee)을 찾아내는 것이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일기를 쓴다.키에르케고어의 이 일기는 실존사상의 탄생의 시발을 의미한다. 이 일기는 이후 그의 실존적 사고의 바탕이 되는데 방대한 량의 그의 일기들은 키에르케고어가 진정한 참자아를 터득해 가는 삶속에서 그가 뱉어낸 시와 진실 이었던 것이다.그는 자기자신을 분명히 깨닫기 위해서뿐 아니라 자신이 찾은 진리를 동시대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명심에 기인해 저작활동을 하였다.그는 진리가 받아들여질 때의 방법이 진리만큼,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혼신의 노력 끝에 간접전달 이라는 진리 전달 방식을 잉태하게 된다. 이제 키에르케고어라는 사상가의 문제의식과 사상형성과 관련이 있는 생애와 저작 전반에 대해 살펴보자.Ⅱ. 생애와 저작1. 아버지와 아들쇠얀 오뷔에 키에르케고어(S. A. Kierkegaard)는 1813년 5월 5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구 시내의 중심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시기 덴마크는 역사상 유래없는 큰 동란6∼1838)의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가난한 농노인데다 아홉 명의 형제자매가 있던 그의 부친 미가엘은 막일을 하며 자라다 코펜하겐에서 모직상으로 성공한다. 그는 첫 처와 결혼 2년만에 사별하고 하녀이던 아네 쇠얀스대더 룬과 재혼하는데 이 사람이 키에르케고어의 모친이 된다.자식 교육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은 그녀와는 달리 미가엘은 엄격하고 진지한 종교교육을 중심으로 자식 교육에 전념한다. 쇠얀은 종교적 죄책감에 둘러쌓인 부친이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한 제물로써 선택되어 그 부친의 엄격한 종교교육의 대상이 된다. 부친 미가엘로부터 쇠얀은 독서를 통해 지식을 구하고 깊이 사고하여 뛰어난 변증술을 구사하여 토론하는 재주를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터득된 풍부한 상상력과 치밀한 변증술은 후년 그의 지적 성장과 저작활동에 크게 이바지 한다.하지만 그에게 강하게 작용된 다른 음울한 면도 있었다. 그의 부친이 느끼던 삶의 음울함과 종교적인 죄책감은 어린 쇠얀에게도 그대로 전입되었으며 그늘을 만들었다.부친으로부터 강하게 각인된 그리스도 교육은 쇠얀의 이후 인생과 사상을 주도해 나갔다. 이는 합리주의 신학과 그룬트비주의와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그를 파멸의 길 로 몰아간다. 그리고 동시에 강한 죄의식을 수반하여 참회의 제물이라고 하는 방향에서의 예외자로서 자기자신과 삶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코펜하게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기초적 학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만 순탄하게 신학에 집중할 수 있었던 맏형 페더(Peter Christian Kierkegaard, 1857∼1875)와는 달리 가족들의 연이은 사망과 모친의 죽음이라는 가정의 불행 으로 인해 그의 관심을 신학을 떠나 문학·음악·연극으로 향하게 된다. 그는 관능의 화신인 돈·쥬앙(Don Juan)과 회의 정신을 대표하는 파우스트(Faust), 그리고 유대인 아하스베루스(Ahasverus)에게 빠져든다. 대학에서는 클라우슨의 합리주의적 교의학을 공부, 슐라이어마허를 알게 되기도 하지만 비판그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길레라이에의 일기 를 쓰게 되었다. 그는 진리란 이념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는 말과 함께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을 각오한다. 그가 점점 더 깊은 파멸의 길로 빠져 들때에 그의 곁에서 각성을 도와준 것은 그의 스승 묄러교수와 독일 철학자 하만이엇다.쇠얀이 스물다섯째 생일을 맞을 즈음해서 부친은 쇠얀이 파멸의 길을 헤매는 것을 지켜볼 수 만은 없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한다. 아마도 부친은 자신의 과거의 죄와 저주받은 가족의 비미르 그리고 엄격한 종교교육의 의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의 가족 일원으로서 쇠얀 역시 서른 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것을 밝혔을 것이다. 이는 쇠얀에게 생존의 바탕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되고 쇠얀이 종교적 참회자의 예외적 운명의 길을 걸을 것을 결심하게 한다.부친의 시름은 이제 쇠얀의 시름과 더해져 그를 점점 더 시름의 사람이 되게 했다. 가책과 죄의식 , 종교적 참회자 , 희생과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 이 서로 호응하면서 내면 깊이 그를 얽아매어 이 후 그의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인간 실존의 분석과 삶의 해명이 그의 저작활동의 내용을 이루게 안다.그는 이제 부친이 그토록 엄격하게 실시한 종교교육의 의미와 동시에 부친의 사랑을 깨닫고 파멸의 길로부터 돌아서 그리스도교로 돌아오고 부친과 화해하나 얼마 안 있어 부친은 타계하였다.2. 연인 레기네 올센부친의 큰 영향은 부친의 죽음으로 그 정도를 더하게 된다. 그는 부친의 바램이었던 신학국가시험을 보기 위해 정신적, 실체적 준비에 주력하여 결국 1840년 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부친을 추모하면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레기네 올센(Regine Olsen, 1823∼1904)과 약혼하고 그녀와의 행복한 시간을 통해 기쁨과 위로를 느끼고 시름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잇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약혼은 키에르케고어에 의해 파기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종교적인 충돌 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그녀의 직접적 미와 역설적 죄책감까지 더해져 그는 더 깊은 시름의 늪으로 빠지게 외었다.레기네와의 헤어짐의 고통을 그는 저작활동을 통해서 고백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간접전달 의 저작활동을 통하여 그녀와의 종교적 충돌을 설명하고 밝힐 수 있었다. 1841년 베를린에서 셸링의 강의에 실망하고 귀국한 그는 저작활동의 시작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그 후 10년간 그는 덴마크의 저작가로서, 아니 어쩌면 세계문학사에서도 유례없을 만큼 집중적으로 생산적인 저작활동에 몰두한다.처음 6년간 그는 잇따른 명작을 집필, 그의 오직 한 사람의 독자, 레기네에게 바쳤다.3. 덴마크의 소크라테스그의 책 [나의 저작활동에 대하여]를 통해 그가 말하는 저작의 두가지 기본성격으로는 첫째, 저작 전체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교,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문제이다. 두 번째는 저자가 미적 저작가인가 아니면 종교적 저작가인가 하는 전 저작활동의 양의성 또는 이중성의 문제이다. 그는 이와 같은 이중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있다 고 한다. 그의 저작의 이중구조의 하나의 직접 이유는 레기네 사건에 있다.그는 [이것이냐·저것이냐]에서 사람이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되는 선택 앞에 독자를 내세운다. 이 책에서 그는 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두 가지 상이한 삶의 가능성을 그려보이고 잇다. 먼저 미적인 실존에 대한 1부는 그의 젊은 날의 내면세계의 투영을 통해 사람은 순간적인 향락과 감성적 삶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며 시름과 허무, 불안과 절망을 드리운다고 하였다. 2부에서는 영원한 것을 찾아 실현하려는 윤리적 실존의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영원한 자기를 터득하려는 윤리적인 노력은 거기서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참회하게 됨으로써 좌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새로운 삶의 단계인 종교적인 실존의 국면 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곧 윤리적 실존이 죄 에 좌절함으로서 종교적 삶에로 다가가는 극단적인 상황이 예리하게 분석되고 있다.그는 [두려움과 떨림], [반복]에서 미적·윤리적 실존으로부터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종교성B가 충분히 문제되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그 후 저작활동은 이 문제를 명확히 하는 데에 주력한다. 불안의 개념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와 사람과의 관계, 관계의 방향을 소크라테스적 인간적 진리와 그리스도교적인 진리와의 대비를 통해 밝혔고, 헤겔에 대해 주체성=진리 개념을 내세우며 인간 실존과 그리스도교적 실존 성립에 대해 설하였다.[철학적 단편에 대한 비학문적 종결적 후서]*(1846)는 지금까지의 저작활동을 마무리하는 방대한 저작으로 지금가지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총괄적으로 다루면서 한층 더 논리적, 조직적으로 구명하고 있다.키에르케고어의 저작활동은 소크라테스적 방법 으로 정의될 수 잇다. 그것은 이로니에 의한 소크라테스적 조산술로서 일상적 관심사로부터 문제점을 발견하고 자아를 깨어나게 하여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독자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기 보다 내면화의 동요 를 가져와 스스로 삶을 재건하고 이끌어나가야 함을 각성시키고 촉구하는 것이다.단지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참 그리스도 인은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하기 보다 자신데 대한 죄의식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는 것이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을 깨뜨리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적 조산술을 사용하였다. 그는 덴마크의 소크라테스였으며,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겼다.4. 『코르사르』와의 충돌키에르케고어는 저작활동을 끝내고 조용하게 참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였지만, 악덕 풍자지인 [코르사르]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당시의 시대적인 요구에 맞춰 사회지도층의 인사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그들을 비판, 풍자함으로써 정치적 자유주의 신장에 이바지한다고 표명하는 [코르사르](Corsaren)와 키에르케고어의 10개월에 걸친 싸움은 키에르케고어의 승리로 끝나고 [코르사르]가 폐간되는 것으로 종결되었지만, 그를 무지하고 천박한 대중의 비웃음거리로 만든 이 신문에 의한 그의 내면의 상처를 아물지 않았고 오히려 곪아갔다. 그는 다.
프뢰벨머리말프뢰벨은 인간교육과 유아교육사상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겨 현대 교육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프뢰벨의 교육이론은 삼중적으로 기초 되어 있다. 첫째는 낭만주의적 세계관에 근거한 소극적인 교육, 둘째는 삼라만상의 근원과 형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기독교 신앙, 셋째는 놀이를 중심으로한 유아교육 강조이다.모리슨은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개별화 교수법, 열린 교육(open education)에 관한 기본 전제들이 프뢰벨이 꿈꾸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유치원(Kindergarten)의 창시자로서뿐만 아니라 인간 교육 의 학자이며 중요한 여러 교육사상이 프뢰벨에게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생애와 교육프뢰벨의 청년시절인 18세기는 칸트, 피히테, 쉐링등 위대한 철학가들이 등장한 였다. 인간의 품성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인문가치를 비판하며 철학적 분위기에 휩싸인 이와 같은 정신은 인간교육에서도 나타났다. 루소, 페스탈로찌, 프뢰벨과 같은 교육사상가들에 의하여 이러한 는 로 되었다고 할 정도로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튜링겐에서의 유년 소년시대프뢰벨은 1782년 4월 21일 독일 튜링겐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친이 병사하게 되어 부친은 재혼하였으나 계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낳고 프뢰벨에게 무관심해졌다. 프뢰벨은 외삼촌 호프만이 가정 분위기가 양육에 적합치 않다는 판단하에 프뢰벨의 양육과 교육을 맡게 되는데 외삼촌 집에서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과는 다른 평화스럽고 애정 넘치는 가정 생활을 맛보았다.부친의 뜻에 따라 산림관 비쯔의 문하에 입문해서 임업, 사정, 기하학, 측량술등을 배웠다. 그는 이 곳에서 자연과학 연구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사상편력의 청년시대산림관 견습기간을 마치고 우연히 예나로 간 그는 예나대학에서 청강 하다 자연과학에 대한 향학심으로 모친의 유산을 학자금으로 마련하여 정식으로 입학하여 자연과학 공부를 시작하였다.프뢰벨은 어린 나이에도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찾고자 하는 열낸다. 아버지는 상속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그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프뢰벨의 부친이 타계하자 프뢰벨은 생계를 위하여 농지세무, 산림청서기, 측량기사 등의 일에 종사하였다.교육자에로의 길아버지처럼 따르던 외삼촌 호프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것에 영향을 받아 프뢰벨은 그동안 서서히 굳어져 가던 새로운 행로로의 도약을 꾀한다. 프뢰벨은 외삼촌의 유산을 가지고 건축가가 되려하지만, 모범학교 교장이며, 페스탈로치 학도이었던 그루너를 알게 되어 교사가 된다. 프뢰벨은 페스탈로치와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프뢰벨을 페스탈로치를 정신적인 아버지와 같이 느꼈고, 그의 정신에 따라 교육자로서의 생애를 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그는 홀쯔하우젠가의가정교사로 지내면서 자연을 벗삼는 생활교육 속에서 인간교육 기초를 세우려고 하였다.그는 페스탈로치의 교육 방법에 의한 교육을 보급을 위해 힘썼다.나폴레옹전쟁에 참전페스탈로치 학원에서 귀국한 뒤 프레벨은 홀쯔하우젠가의 가정교사를 그만두고 괴팅겐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후 결정체학 연구에 착수하였다.그는 독일인으로서, 조국을 지켜내고 인간으로서의 고통의 고난과 싸워 위기를 제거하려는 결심에 군대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 밋덴도르프와 랑게탈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이후 종종 인간 교육에 대해 토론하고 변하지 않는 우정의 라인을 지켜갔다.프뢰벨에 있어서 행군이나 군사교련의 체험은 정신과 육체의 상호관련을 배우는 기회이기도 하였고, 그의 국민 교육사상의 배경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여Te.카일하우에서의 교육활동-가. 카일하우 학원의 창설프뢰벨은 형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전사하고 형수가 세 자녀의 교육문제를 상의해오자 조카를 돌보아야 할 의무감을 느끼고 대학교수의 지위를 포기한 채 형의 세 자녀가 있는 그리스하임으로 가서 일반 독일 학원 을 창설하여 교육자의 길로 매진하게 된다.1818년 가을 프뢰벨은 베를린 대학에서 만난 교양 높은 빌헤미네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프뢰벨의 교육활동의 협력자로 학원을 가정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나.는 듯 한 느낌을 갖게 했으며 깨끗한 자연 속에서 학생들은 단 한명도 병에 걸리지 않으며,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키며 생활할 수 있었다.-다. 교육에 관한 논문 발표1820년부터 1824년까지 발표한 가일하우에서의 논문들 속에서 프뢰벨은 보편적인 인간교육을 기술하였다. 이는 예나 대학 시절 철학 교수였던 피히테가 주장한 국민교육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들 논문에는 그의 국민교육 사상의 특징인 독일민족주의가 농도짙게 나타나 있다. 이는 1813년의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에 기인한다.-라. 대표적인 저서 [인간 교육] 발간당시 정부에서는 이 학원을 탐탁치 않게 보고 정치적인 탄압을 하였는데 이는 프뢰벨이 [인간 교육](1826)을 간행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한다. 카일하우가 급속도로 번창했으나 이러한 탄압은 카일하우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카일하우 학원의 실제 교육에서는 교육을 정치활동 반대에 이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정부와 시정부는 학원의 해체를 요구해 왔다.후에 종무 장관 크리스챤 셰가 두 차례에 걸쳐서 카일하우 학원을 집중적으로 관찰 한 수에 카일하우 학원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정부는 학원에 아무런 정치적 간섭은 행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학원에 대한 악선전이나 정부의 감시활동은 부모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학생들의 수가 감소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학원 문을 닫게 만들었다.이러한 정치적 격동기에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프뢰벨은 더욱 더 인간교육의 이상에 불을 태웠고 시련의 시대를 거쳐 한층 승화된 프뢰벨의 인간탐구 사상은 [인간 교육]에서 결실을 맺었다.새로운 곳에서의 교육활동가. 헬바의 국민학교 계획재정문제로 인해 학원이 경영난에 시달리자 친구는 마이닌겐 후작에게 프뢰벨을 소개했다. 후작은 프뢰벨의 교육사상에 공감하고, 그에게 교육시설의 계획안을 제출하도록 요구, 1829년 프뢰벨이 오래전부터 동교들과 구상하고 있던 교육의 이상을 헬바에 있어서 국민학교에 관한 공고 라는 계획안으로 작성, 제출하였다. 후작은 이에 원조하기로 하였으나 후교 계획안은 카일하우에서 이루지 못했던 프뢰벨의 교육이상을 표현하고 잇다. 7세부터 14세까지의 학생을 교육대상으로 기초, 훈련, 실천등의 반으로 나누어 철저하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인간 형성을 목표로 한다.나. 스위스에서의 교육활동1831년 프뢰벨은 교육에 깊은 관심이 있는 저명한 작곡가 슈니더의 학원 개설 권유로 조카와 함께 바르텐제 학원 의 수업을 개시하였다. 이 학원은 남자 학교로써 유능한 능력과 확고한 종교심, 높은 지식의 교육을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이 바르텐제 학원도 수난의 괴로움을 겪게 되는데 룻세룬주의 봉건적인 습관이나 종파를 달리하던 성직자들의 권위로 인하여 프뢰벨의 교육이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학생은 소수밖에 모이지 않았다. 우연히 빌리자로에서 온 상인 한 명이 도움을 주어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후 빌리자우로 학원을 이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구교인 카푸친교단의 승려가 프뢰벨의 활동을 방해하여 학원의 존속은 곤란한 지경에 이렀다.그는 교육방침을 일반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논문을 발표하고 신교인 베룬 주정부는 빈민교육에 대하여 프뢰벨에게 의견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후에 프뢰벨은 부르크도르프의 고아원 원장이 되었다.7. 유아교육에로의 길{ 인간교육의 원리 }1. 형이상학적인 주요개념가. 통일의 법칙나. 만유재신론다. 노작의 본질2. 교육목적프뢰벨의 교육관은 깊은 신앙에 근거하고 있으며 인간을 만물 가운데 최고의 존재라하여 인간은 이성적으로 만물을 인식하므로 독특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내적성장을 위해 신성을 성장시켜야 하며 신적원리에 자발적으로 순응해야 한다. 교육은 이런 신적인 것을 의식하게 하도록 인간을 자극, 지도 하는 것이며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스스로 인식하도록 인간을 이끌어주고, 신적인 통일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그러므로 교육의 목적은 신성한 삶을 충실히 표현하는데 있다. 즉 자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개발하고 원만하게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3. 프뢰벨의 발달 순응적 교육방법이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교육의 기본 원리이지만 프뢰벨이 이것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발달 순응적이어야 하지만 단지 주의와 보호를 첨가할 필요가 있다는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명령적 교육 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프뢰벨은 발달 순응적 교육과 명령적 교육방법이 공존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4. 인간발달론가. 개 성 - 인간은 개성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과제는 인간의 자기표현, 즉 자신의 가장 내부에 있는 개체적 본질을 표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나. 유기체적 발달 - 프뢰벨의 개성에 대한 사상이 인간의 발달을 공간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다면 유기체적 발달에 대한 사상은 같은 내용을 시간적인 연속의 차원에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는 영아기, 유아기, 소년기로 구분하여 부모의 교육, 내면세계 표현을 위해 유치원에 다니는 것, 놀이를 통한 내적 본성의 확대의 시기이다.5. 교육의 내용프뢰벨은 교육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교수내용으로서 종교, 자연, 수학, 언어, 예술 등을 들고 있다. 이 다섯가지의 교수내용들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다음 3가지 즉, 자기 내면적인 생명을 지향하는 욕구(안식), 외계 및 외계의 본질을 자기 속에 넣으려고 하는 욕구(인식), 내면적인 것을 직접 나타내는 욕구 (표현)을 통해 도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 영역은 교수의 삼위일체론에 의해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다.종교는 인간 본질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교육을 통해 단지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프뢰벨의 종교 교육론은 학교 교육에서 어린이에게 함양하는 모든 인식이나 기능이 참된 생명적인 것이 되기 위한 진리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또 프뢰벨은 종교적 관계로서 가족 생활을 들고 있다.자연은 단순한 환경이 아니며, 우리들에 의해 대경화되어가는 소년기적인 특징이 있으므로, 자연의 기능이 인간 심정이나 인식에 미치는 제 관계는 소년의 내성적 요구에것이다.
[한국사 시민강좌] - 20세기 한국을 움직인 10대 사상「한국의 nationalism, 민족주의의 이름으로...」과 목 명: 한국의 역사와 문화.담당교수: .소 속: 사회교육과 .학 번: .성 명: .제출일자: .목 차Ⅰ. 들어가기 전에Ⅱ. 민족주의란 무엇인가개념과 특성Ⅲ. 한국의 민족주의1. 한국의 민족주의가 걸어온 길1) 한말 (1876 ∼ 1910)(1) 척사위정운동(2) 민중운동 (민중사상)(3) 개화운동 (개화사상)갑신정변2) 일제 시대 (1910 ∼ 1945)(1) 민족주의운동1독립운동2문화운동(2) 식민사관a타율성론b정체성론c그 외 이론3) 해방 후의 시기4) 민족주의의 시련과 부활Ⅳ. 맺음말- 민족주의의 지향점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단상Ⅰ. 들어가기 전에...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 온고지신, 법고창신하는 정신이 필요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사람이 제 과거를 바로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뿌리가 없는 조화나 조목에 불과한 것임에, 또한 곧 그 존재의 깊이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나타내기에 우리는 우리의 과거, 즉 역사에 대해 알고자 하고, 알아야만 한다.우리의 역사를 통괄해 볼 때 역사의 그 외면에서 보여지는 현상들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그 저변에 깔려있는 사상, 즉 이데올로기 역시 바로 알아야만 우리 조상들의 시대 상황에 따른 행동 방편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물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는 지배집단에 의해 그 사회에 지배적으로 세뇌된 사상만을 일컫는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Ⅱ. 민족주의란 무엇인가민족주의의 개념과 특성민족주의는 다른 문화, 정치,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합해져서 각양각색하게 변형이 가능하고 따라서 다양한 시각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민족주의에 대해 이 저서에서는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민족주의가 내부적으로는 구성원들의 결합과 단결을 통해서 국가의 통합과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나 그것이 대외적으로 타국의 국민과 국민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표출되는리지 못하였다. 그 충(蟲)은 조금씩 의식을 갉아먹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이 텅 비어 작은 충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바로 무너져 버리는 병폐를 낳게 만들게 되는 것임에 이 전근대적 , 고전적 민족주의는 추구해야 할 것이 못 된다.이에 반하여 근대적 민족주의는 대외적으로 주체성을 갖을뿐더러 내부의 공동체 정신을 함께 지니고 있다. 즉, 봉건적 요소를 더 이상은 고집스럽게 유지하지 않고 신분 평등 등 다양한 근대적 공동체 정신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Ⅲ. 한국의 민족주의우리 나라가 암울했던 시기에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은 바로 민족주의{) 민족주의[ 民族主義 , nationalism ]란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 것을 창건(創建)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을 말한 다.였다.한국의 민족주의 사상은 한말 방봉건, 반외세 운동을 통해, 일제감정기에는 국권회복운동과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평등 이념의 내면화, 해방직후에는 자주독립건설과 좌우이념의 조와와 협력 및 민족통일 운동의 핵심적인 사상이었다. 특히, 유신 군부 정권하에서는 인권·민주화 운동과 민중운동·통일운동을 표출시키는 근본적 에너지로서 작용하였다.1. 민족주의가 걸어온 길-시기별 민족주의 양상(동태적 측면에서 살펴 본 민족주의운동)1) 한말(1876 ∼ 1910)사회사상으로 민족주의의 이해보다 선행된 것이 바로 민족주의적 운동이다. 신채호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민족주의가 발휘되어야한다고 지적하였는데 실로 조선인들은 척사위정{) 위정척사(衛正斥邪)라고도 하는데 이는 호란 이후의 숭명반청(崇明反淸)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의리와 도덕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유교문화를 정(正)으로 수호하고,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서 양과 일본문화를 사(邪)로 규정하여 배척하는 사상이다.운동 , 민중운동 , 및 개화운동 을 통해 민족주의적 반응을 표하고 있었다.(1) 척사위정운동조선은 대원군의 실각 이후 계속되는 개화의 압력 속에서 함포외교를 통한 병자수호조으로 맺어졌다.같은 현상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이다. 정부의 대외통상정책에 단순한 불만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야만적으로 접근한 외세의 양상과 불평등적으로 맺어진 조약과, 그로 인한 국내의 피해 등을 이유로 일부 도처에서 위정척사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척사위정 운동은 정서적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한 애국심의 표출이었고, 당시 서양과 일본의 근대문명이 지닌 침략성과 비도덕성을 경계하는 유교적 사상을 표출이었다.하지만 척사위정론은 유교적 윤리에 입각 기존의 봉건사회 제도 유지에 집착하고 서양의 근대적 윤리에 대해 폐쇄적이고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민족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둔다.(2) 민중운동 (민중사상)19세기초부터는 농민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각지에서 농민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렇게 축적된 세력을 계속 확장시킬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한 것이 바로 최제우의 동학이다. 민족주의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운동이 전개하였는데 동학의 인내천{) 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1860년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기본 사상사상은 인간의 평등성을 함의하고 있으며 이는 내부적 통합과 평등의 실현이라는 근대적 요소가 가미된 민족주의 운동이라 하겠다. 대외 저항적 성격과 신분적 평등을 주장하는 근대적 성격을 띤 동학농민운동은 학계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나 반외세, 반봉건의 민족주의의 성격을 띤 사회적 실천운동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띠고 있다.(3) 개화운동 (개화사상)한말 서구화나 근대화를 통하여 우수한 외국의 문물들을 받아들여서 내실을 견고히 하고 그 바탕으로 발전을 도모하는 이유 뿐 아니라 외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발 맞추어가면 도태되거나 외부 세력의 압력을 이길 수 없는 여러 가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개화, 또는 근대화 하자는 주장이 도처에서 제기되었다. 국가가 처한 위기사항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각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흥성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정책처럼 폐쇄적이고 보수적일 수도 있으며 조선 광해군의 정책처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라는 기구를 설치 하고 그 밑에 12개의 사(司)를 두어 부국강병을 위한 실무를 나누어 관장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유명무실해진 규장각의 기능을 부활시켜 개화정치를 뒷받침하는 학술기관으로 활 용하며 개화의지를 보였다.개화 사상, 개화운동의 표출 역시 크게 두가지 양상을 띤다. 이는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인데,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 온건개화파는 1894년의 갑오개혁과 뒤이은 일련의 개혁들{) 을미개혁과 광무개혁 등.을 통해 근대사회를 이룩하려는 의지를 표출시켰다.갑신정변에서 나타난 급진개화파의 주장은 자주적 근대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면서도 반침략보다는 반봉건에, 민권보다는 국권에, 국민보다는 정부에 중심이 되는 사상체계 로서 식민화에 무력한 근대주의적 이념으로 전환 되었다.갑신정변급진개화파{) 변법개화파라고도 한다. 당시 일본당 이라고 불렀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이창규등 이 중심인물이다.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여 일본의 재정·군사적 협력을 받아 서구형 근대국가를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쿠데타 방식으로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청이 프랑스와의 전쟁 등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일본의 군사 지원을 받아 명성황후세력을 타도하고 新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지만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다.갑신정변에서 내세운 14개조의 개혁안은 서구의 근대시민국가를 모델로 한 것으로 표명되었으나 자주적이지 못하고 외세에 의지한 개혁 방법을 사용한 것과 , 아래로부터 즉, 민중으로부터의 호응과 지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이기 때문에 (혁명이 아닌 쿠데타이었다.) 사회통합과 발전을 기하는 데 실패한 한계점을 갖고 있다.정부적 차원의 개화운동이 난간에 봉착하고 있을 때 즈음, 민간에 의한 독립협회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됨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의 개화운동이 근대적 성격을 띠고 민족주의적 목표 달성에 주력했으나 민권론이 국권론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점을 노주 독립 운동과 대내적으로 근대국가를 향한 사회개혁운동, 그리고 민족문화를 수호하고자하는 문화운동으로 각각 전개된다.(1) 민족주의 운동1독립운동일제 치하의 민족주의는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표출이 된다. 한국 민주주의가 재편성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3·1운동은 처음 계획단계에서는 온건노선이 모색되었었지만, 점점 폭력적이고 항쟁적, 민중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 3·1운동은 한국민족주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3·1운동은 주권재민의 근대국가 이념을 정립하고 공화주의를 확립하여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 건립을 기치로 정하였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국민주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이 시기에 비로소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독립운동의 노선에는 외교독립론과 무장독립론의 두 흐름이 조명될 수 있는데 좌우익의 분열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1927년 신간회가 해외의 영향을 받아 좌우합작의 형태로 시작되었다.이 후 민주공화정을 명시, 국민주권주의의 이념을 채택했던 임시정부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여 민족주의의 근대적 지향점을 향했다.2문화운동일제는 강점 초기부터 서서히 문화적 박해를 가하여 오다 조선인의 혼을 죽이려는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이에 우리의 문화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벌어졌고,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같은 항일민족운동은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 같은 민족주의를 어문민족주의, 역사민족주의, 종교민족주의로 부르기도 한다.어문의 연구는 국학 운동의 주류를 형성했고 한말 이래 전개되어 온 국사학의 연구도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식민주의 사학에 맞섰다.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한말부터 그들의 조선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여러 이론들을 내세웠는데 이런 이론에 세뇌당한 많은 기성세대는 식민주의적 한국사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 식민 사관식민주의적인 한국사 인식은 일본이 조선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한국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