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족영화에 등장하는 갈등 해결과정에 대한 고찰 - 김수영의 [혈맥]1. 들어가며한국영화에서 가족을 직접적으로 소재로 한 영화들은 하나의 전통적인 클리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족 간의 갈등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이들 가족의 갈등이 해결되면서 종국에는 가족의 결합으로 이끌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클리셰의 특징은 가족 간의 갈등을 여러 가지 유형으로 다루면서도 결국에는 가족이라는 하나의 집합에 소속시키면서 그것을 봉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가족이라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맺는 사회적 관계에서 직장이나 학교, 혹은 다른 집단과의 관계는 언제든지 단절시킬 수 있거나 자신의 의지로 맺을 수 있는 관계지만, 가족이라는 관계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태생적인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 간의 관계도 자신의 의지로 맺고 끊을 수 있겠지만, 일상적인 다른 관계와는 매우 다른 특수한 관계라는 점에서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이렇듯 한국영화에서 다루는 가족의 문제는 어느 정도 정형성을 가지고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 아래서 그 차이를 가질 수 있다. 본 소논문에서는 한국의 가족영화 중 1963년에 개봉한 영화 [혈맥]을 대상으로 영화 속에서 다루는 가족의 문제, 그 중에서도 특히 갈등생성 과정과 그 해결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혈맥]을 대상으로 한 이유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있기도 하며,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혈맥]이라는 영화의 특이한 성질 때문이기도 하다.우선 1963년은 4.19 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그치고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전해인 1962년에는 일제 시대 말기의 조선 영화령과 유사한 형태의 강압적인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문화, 예술 특히 영화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시작되기도 하였다.(이영일, 2004) 이러한 강압적인 분위기는 역에 속한다.가족 간의 갈등은 일반적인 사회적 갈등론과는 다른 차별점이 있다. 우선 가족 구성원은 일반적인 사회 구성체와는 달리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해체시킬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개인이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 가족 구성원으로 자연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그 정체성을 포기하기도 그다지 쉽지는 않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학교나 직장, 단체에서 탈퇴하는 것에 비해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매우 끈질기게 개인을 따라다니게 된다.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의 권력 구조도 다른 사회구성체와는 매우 다르다. 경제적 기반이 있는 가족 구성원이 권력이 가질 수도 있고, 단지 나이가 많거나 항렬이 높기 때문에 권력을 가질 수도 있다. 사회 구성체에서의 권력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 비해 가족 구성원들의 권력 구조는 다분히 정체되어 있다. 특히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권력을 가지기 힘들다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들. 예를 들면 질병이나 범죄행위, 결혼 및 이혼, 죽음 등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에서 계속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이 너무나 많을 경우에는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사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리를 하는 선에서 그친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의 문제로 들어가면 저기에 있는 문제 하나만으로도 가족이 붕괴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마지막으로 가족 간 갈등의 요소에는 맑스가 중요시 여겼던 한정된 자원의 희소성이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가족 간의 갈등에서는 공유할 수 있는 자원이 많거나 적어도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다. 오히려 다른 여러 문제와 복합적으로 결합되면서 자원의 문제가 갈등의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단지 자원의 문제만으로 가족 간의 갈등이 발생한다고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이처당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다.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기슭의 판잣집들을 배경으로 실향민 가족들의 가난한 일상과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2) 줄거리이북에서 내려온 월남 동포들이 모여 사는 해방촌 산비탈. 홀아버지 김덕삼(김승호)은 아들 거북(신성일)에게 미군부대에 들어가라고 강권하고, 옆집에 사는 함흥댁(황정순)은 딸 복순(엄앵란)에게 억지로 타령을 가르쳐 기생을 시키려 한다. 또 다른 이웃인 젊은 원팔(신영균)은 어린 딸과 담배꽁초를 모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데,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지만 병원에 한 번 데려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의 동생 원칠(최무룡)은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왔음에도 소설을 쓰겠다며 취직을 하지 않다가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부모의 방식을 자식 세대들에까지 전수하려는 부모들에게 반발하여 집을 뛰쳐나온 거북과 복순은 영등포에 있는 방직공장에 함께 취직한다. 자식들을 보러 온 두 아버지(김승호, 최남현)는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혼인을 허락하고, 네 사람은 행복한 모습으로 함께 걸어간다.3) 등장인물① 김덕삼(김승호): 실향민 출신이며 다혈질의 중년이다. 멋대로 지은 판잣집을 제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 문패를 가져다 놓고 땅주인한테 어깃장을 놓기도 한다. 아들인 거북에게 미군부대에 잡역부로 들어가길 원하고 있다. 성질이 괄괄하여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화부터 내고 성질을 부린다. 팔에 문신을 한 캐릭터로 젊었을 적에는 왈패들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화산댁이 주선한 젊은 벙어리 작부를 데려와 살림을 차렸지만 그녀가 숨겨둔 복대의 돈을 훔쳐가자 화산댁 술집에 가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과 가출한 아들 때문에 함흥댁과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코믹하게 묘사된다.② 거북(신성일): 덕삼의 아들. 옆집 복순과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다. 복순과 함께 미군 부대에서 나온 볼펜 등을 파는 행상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 잡역부로 들어가라고 종용하지만 그런 아버지와 대립한다. 복순과 함께 가출하여 방직공장에남): 원팔과 원칠 형제의 늙은 어머니로 본인의 몸도 성치 않지만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며느리 때문에 아픈 티도 못 내고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아들들 때문에 맘고생이 심하다4. [혈맥]의 갈등분석1) 미시적 갈등① 덕삼과 거북아버지인 덕삼은 거북이 미군 부대에 들어가 잡역부로 일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각종 물건들을 빼돌려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를 원한다. 하지만 거북은 그런 아버지의 강권이 맘에 들지 않는다.영화 속 장면덕삼: 하! 이런 못난 자식봤나. 그러기에 인마! 미군 부대에다 몇 사람씩 다리를 놔서 교제를 해놓지 않았느냐 말야 거기 들어가기만 하면 팔자를 고치게 돼 알지두 못허구…… 고기니 실과니 그 사람네들 먹구 내버리는 턱찌끼만 긁어 와서 내와두 하루에 수 천환 각수벌이가 되는데 미쳤다구 방직공장엘 들어가?거북: 듣기 싫어요 우린 뭐 그 사람네들 턱찌끼만 걷어 먹구 살아야 하나요? 난 억만금이 쏟아져도..덕삼: 야 임마 시끄러 이 자식이 애비가 저 잘되라고 하는 소린지도 모르고거북: 자식을 가르치려면 올바르게 가르치세요.이런 거북의 대사들은 아버지의 강압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일 수도 있지만, 당시 사회상황을 봤을 때 일종의 계몽적인 관점이 들어갔다고도 볼 수 있다. 미군 부대에서 물건을 빼돌려 파는 것보다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보다 그 당시의 집권세력이 원하던 더 건전하고 올바른 청년세대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덕삼과 거북의 갈등은 거북이 복순과 함께 가출하면서 그 절정을 이루다가 후에 벙어리 작부에게 돈을 모두 잃어버리고 조금이나마 철이 든 아버지 덕삼이 거북을 이해해주면서 해소되게 된다. 다소 안일한 해소가 이뤄진 이 갈등은 이 영화의 대다수의 갈등들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② 함흥댁과 복순함흥댁은 복순을 기생집에 보내 돈을 벌게 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어머니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고 당연히 복순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말로 합리화 하면서 함흥댁은 복순을 닦달한다.영화 놓구도 그저 돈이면 고만이가? 아주마이는 지금 살이 다 썩어 들어가고 아무것도 먹질 못해 다 죽어가는데도 의사 한번 데려다 뵈지 못해주는 형이 그게 사람이가?원팔: 그래! 난 돈 밖에 모른다. 사람이 아니다. 이 썅놈의 새끼가.사실 형제간의 갈등에서 가치관의 충돌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미난 점은 영화 초반부에 원팔이 등장했을 때는 동생이 소설을 쓴다고 무위도식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한탄했는데 동생과의 직접적인 충돌에서는 통일운동이라는 정치적인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원칠의 대사 중에 “빨갱이 놈새들한테 몽땅 팔아먹는”이라는 대사는 이 영화에서 매우 이질적인 대사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는 ‘빨갱이’라고 지칭할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원칠이 얘기하는 반공적인 대사는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지지 않는다.현실에 대한 불만을 가지는 지식인은 사실 모든 장르에서 - 소설이든 영화든 -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원칠은 그러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데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빨갱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다소 작위적이다. 아마도 당시 집권세력이 추구하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리하게 접목한 것으로 보여진다.원팔과 원칠 형제의 갈등은 가난과 가치관의 차이에 의해 생긴 갈등이다. 하지만 영화는 갈등의 근본 구조에 대해서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가치관의 차이에 대해 서는 ‘빨갱이’라는 단어로 환유시켜 버리고 당시 지식인들이 가난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보편적인 입장과 반대되는 입장으로 치환시켜 버린다.그리고 갈등의 해소는 더 안일하게 이루어진다. 원팔의 아내이자 원칠의 형수의 죽음으로 두 형제는 서로에 대해 미운 감정을 털어내고 같이 집을 수리하고 원칠의 연인인 옥희가 미자를 학교에 보내주면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면서 갈등이 해소된다.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갈등의 해소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2) 사회적 갈등앞서 살펴본 미시적 갈등들혀진다.
파솔리니: 시적 영화의 가능성1. 서론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 소설가, 시인이자 사상가인 파솔리니는 온갖 음모론에 시달리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매우 논쟁적이자 혼란스러운 인물이다.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원이기도 하면서 카톨릭 신자라고 자신을 정의내리기도 하였던 그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되기도 하였고, 바티칸과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동성애자이면서 동성애 해방운동에 관한 의식은 없었으며, 시인이자 작가이지만 언어를 넘어서는 영화의 형식에 관심이 있었다. 체포와 구금, 고발이 그의 일생을 따라다녔고 그의 최후까지 비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항상 스캔들의 중심에 있던 그는 오히려 그런 스캔들의 중심으로서만 사람들에게 회자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필자 자신도 파솔리니에 대해서 영화감독으로서만 - 특히 논쟁적인 그의 몇몇 영화들 - 알고 있었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스캔들만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관련된 논문들과 책을 읽어보면서 파솔리니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위치 못지않게 탁월한 영화이론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주창하는 기호로서의 영화 더 나아가서 시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를 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짧게나마 파솔리니의 영화기호학을 살펴보고 시적 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덧붙이고자 한다.2. 본론1) 영화기호학크리스티앙 메츠는 영화기호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1964년 [영화:랑그인가 랑가쥬인가?]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영화가 언어 기호로 기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영화기호학은 학문의 형태로 등장한다. 메츠는 당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초인 소쉬르의 여러 개념들을 영화에 차용하면서 영화분석에 있어서 구조주의적인 과학적 엄정성을 도입하려고 애쓴 학자였다. 메츠는 우선 영화는 랑그가 아닌 랑가쥬로서의 기능에 주목했다.메츠에 따르면 영화는 언어와 달리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표는 기의를 나타내기 위한 임의적 통합체적 구조를 이루는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음소와 형태소에 상응하는 요소들이 없다. 따라서 이중분절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메츠는 영화를 랑그가 아닌 랑가쥬로서 파악되고 분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파솔리니는 이러한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한다. 특히 메츠가 “영화에는 이중분절이 없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면서 영화에도 이중분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메츠는 영화의 가장 최소단위를 쇼트라고 파악했지만 파솔리니는 쇼트가 아니라 쇼트를 구성하는 다양한 대상들(object)이 영화의 최소단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쇼트를 구성하는 대상들이 언어의 음소에 해당하는 영상소(Cinemi)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소들이 결합하면서 하나의 의미있는 쇼트, 즉 언어의 형태소에 해당하는 통합체적 구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영화 이미지에서도 음소와 똑같은 작용을 하는 영상소가 있고 이를 통해 선택을 할 수 있는 계열체적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 영상소들이 결합하여 의미를 이루는 조합의 쇼트가 나오면서 이중분절 체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음소는 한정적인 수량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에서의 영상소들은 그 수에 있어서 무한하여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음소와 영상소는 그 양에서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질적인 차이는 없는 거라고 파솔리니는 주장한다. 파솔리니의 이러한 주장은 메츠가 랑그가 아닌 랑가쥬로서만 바라보던 영화의 기호학 체계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셈이다. 즉, 파솔리니에 따르면 영화에서도 랑그라는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파솔리니는 영화는 이미 쓰여진 언어(written language)라고 주장한다. 영상소 개념과 맞닿아서 현실을 이루는 모든 사물, 행위, 사건들과 같은 시각적 존재들은 영화에서 인간의 실제 생활에서 나타내는 모든 것을 언어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이고 영화는 이것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으로서의 ‘언어’이다. 현실은 언어이고 그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도 언어가 된다.파솔리니이지만 문화적인 코드의 내용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환원시킨 오류를 범한 사람이라고 낙인찍었다.파솔리니는 이러한 에코의 비판에 대해 재반론을 가하게 된다. 그 반론을 담은 책이 유명한 [Heretical Empirisim]이다. 여기서 파솔리니는 에코의 주장에 대해 금발의 청년이 에코에게 다가와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을 글로 묘사한 후에 이 금발의 청년이 영화 속의 인물인가 실재의 인물인가라고 묻는다. 파솔리니는 에코에게 실재의 코드와 영화의 코드가 동일하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문화적인 코드와 실재적인 코드는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파솔리니는 영화는 실재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문화적인 코드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한다.파솔리니는 기호학이 실재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 기호학의 범위가 좁아서 실재 속으로 몸을 내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호학은 실재까지 대상으로 삼아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 파솔리니의 주장이다. 그는 자신이 문화적 코드를 자연적 현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연과 모든 삶을 문화적 현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러한 파솔리니의 작업은 당대에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파솔리니 자신은 기호학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기존 기호학자들은 파솔리니의 글에서 모순적인 요소를 쉽사리 발견하고는 그의 이론 전체를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그가 살해되고 나서는 그의 이론을 “영화의 과학적 기호이론의 발전이나 영화이론, 나아가서 영화 비평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쓸모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파솔리니 사후 구조주의 기호학 - 과학적 영화 기호학 - 이 쇠퇴되면서 오히려 파솔리니의 다소 도발적인 영화 기호학 이론이 각광받기 시작한다.2) 자유간접주관적 시점문학에서 말하는 ‘자유간접화법’은 일단 따옴표가 붙지 않는 문장들이며, ‘자유간접화법’은 “작가가 자신의 등장인물의 정신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 인물의 심리뿐 아니라 언어까지 채택하는 것”을 말한다.접주관적 시점”은 “카메라가 등장인물과 그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등장인물의 시점을 사유하고 반영하고 변형해 제시하는 이미지들이 이에 해당한다.자유간접화법은 작가가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이전에 누리던 전지전능한 권한을 포기하고 인물들이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연기하게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인물이 마치 제 삼자에 의해 이미 언급 된 대로 자신의 몸짓이나 대사를 실행에 옮기게”해서 작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간접화법은 작가와 인물의 생각이 혼재되어 양자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영화에서는 인칭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문학에서의 자유간접화법이 간접화법에서 주절만 생략하면서 이뤄지는 것처럼 단순하고 간단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화자와 인물의 시점이 혼재되고 있는 사실 정도는 파악 가능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디서 일치하고 어디서 분리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파악하기 힘들다.이는 파솔리니의 논의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문학에서처럼 정해진 사전이나 규칙과 달리 영화 이미지는 정해진 것이 없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방법은 이미지에 대한 ‘형식적 작업’을 통해 자신과 인물의 시점을 부합시키는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적 작업은 결국 양식(style)의 구축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화는 이러한 이미지 상의 양식화 작업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사회적 조건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파솔리니의 주장이다.파솔리니에게 있어서 자유간접주관적 시점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고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이다. 이 둘의 차이와 대립을 넘어서 영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분절되고 결합될 수 있는 양식상의 가능성인 것이다. 이를 통해 원시적이고 주관적인 꿈의 성질에 가까운 특성들을 영화 이미지에 부여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영화에 일종의 시적 언어의 전통을 세우는 일도 가능해지는 것이다.3) 시적영화파솔리니는 영화를 산문영화와 시적영화로 나눴다. 산문영화는 ‘산문 언어형식’을 차용한 영화이며 시적영화는 ‘시적 언어형식’을 지니고 있다. 파솔로는 다양하고 독창적인 카메라 사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카메라를 느끼게 하지 말라’는 고전영화의 법칙보다 ‘카메라를 느끼게 하라’는 법칙이 더 중요한 강령이 된다. 동일한 대상을 상이한 초첨의 렌즈로 번갈아 촬영하거나, 과도하게 줌을 사용하거나 역광을 통해 고의로 눈부신 화면을 만들어 내거나, 핸드헬드 및 이동촬영을 빈번히 이용하거나, 불연속편집, 점프 컷, 롱테이크 고정촬영 등을 시도하는 것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주지시켜주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양식과 기법은 그 자체로 새로운 영화의 전통이 될 수 있으며 전 세계 모든 영화에 관련되는 언어적이고 운율적인 자산이 될 수 있다.파솔리니에게 있어서 시적영화란 기존의 논리를 전복시키면서 언어보다는 이미지들이 주축이 되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영화의 전복적 힘을 통해 부르주와사회의 허위의식과 억압적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파솔리니는 주장한다.이러한 희망과는 달리 파솔리니는 시적영화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비관적인 전망으로 끝을 맺는다.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가 객관적, 논리적 내러티브를 수동적이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따라가는 산문영화들뿐 아니라 주관적 비논리적 이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시적 영화까지 포용함으로써 결국에는 더욱더 거대한 합리주의적 체제를 꾸려갈 것이라고 바라본 것이다.4) 시적영화의 가능성시네마(Cinema)는 영화의 추상적인 체계를 의미하고 영화(Film)은 구체적인 하나의 작품을 뜻한다. 파솔리니는 이러한 구분을 기호학에서의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에 유비하여 사용하고 있다. 파솔리니는 우리는 영화(Film)는 알고 있지만 시네마(Cinema)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솔리니에게 있어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언어이다. 그래서 파솔리니에게 있어 이상적인 영화는 시네마다. 시네마는 모든 현실을 다 재현할 수 있는 이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영화(Film)는 이러한 현실 세계의 시네마를 .
- 목차 –1. 들어가는 말2. 이론적 배경 및 연구문제(1) 미디어 대체가설(2) 이용과 충족이론3. 연구방법(1) 개요(2) 주요 변인의 구성4. 분석결과(1) 인구통계학적 인터넷 이용과 신문구독 행태(2) 인터넷 이용과 신문 구독 시간의 관계(3) 인터넷 이용시간에 따른 신문 구독 시간의 관계인터넷과 신문의 만족도 및 신뢰도인터넷 이용에 따른 신문구독 시간의 변화인터넷 이용 동기와 신문 구독 동기5. 결론 및 논의- 참고 문헌 -들어가는 말1800년대 후반부터 하루가 다르게 미디어 기술이 발명되고 발전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지난 100년 사이 가장 빠른 속도로 인간의 삶에 깊숙이 자리잡은 매체를 꼽으라면 단연 인터넷일 것이다. 1969년 미국 ARPANET을 시작으로 발명된 후, 1990년대 초 Internet Society의 발족과 WWW/MOSAIC 등의 출현으로 인터넷은 아주 빠르게 전 세계적에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83년 SDN(system Development System) 1994년 6월 한국통신 KORNET이 최초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2002년 10월 인터넷 가입자 수가 1000만을 넘었고, 2500만 명 정도가 인터넷을 이용할 정도로 급격하게 빠른 속도록 발전해왔다.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의 발달은 케이블 방송이나 위성방송의 발전속도와 비교해보면 인터넷의 빠른 성장속도를 실감할 수 있다. 2001년 발행된 방송산업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95년 시작된 케이블방송은 지난 2002년 3월 현재 525만 가구가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반면 인터넷은 케이블 방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었는데, 이는 ‘정보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정부의 지원으로 단기간에 넓은 지역으로 보급된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구도 점점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케이블 방송이 상대적으로 일찍 발달한 미국에서도 1975년에는 전체 가구 중에서 13%만이 케이블방송에 가입하고 있었다. 케이블 가는 매체 연구가들에게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정보의 바다’로 불리는 인터넷의 발전은 신문과 방송, 잡지 등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전통적인 매체 환경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인터넷이 등장하고 활용되면서 상당수의 기존 매체를 대체하고 미디어 환경의 판도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완전히 바뀔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지난 10여년간의 여정은 기존 매체를 대체하기 보다는 상호 보완하거나 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터넷이 가진 상호작용성과 멀티미디어 기능은 기존 미디어와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뉴스를 보면서도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거나 생활정보를 찾고, 인터넷으로 TV와 라디오 같은 지상파 방송을 보거나 주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등 생활행태의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따라서 본 연구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주도하는 인터넷이 기존 매체에 끼친 영향 가운데 특히 신문의 구독행태에 미치는 영향과 변화에 대하여 고찰하였다.이 연구에서는 인터넷의 이용에 따라 기존 신문의 구독 형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신문에 대한 태도에는 어떠한 변화가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이론적 배경 및 연구문제미디어 대체 가설미디어 대체가설에 따르면,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을 때 새로운 매체가 기존 매체를 대체할 수 있는 충족감을 줄 경우에만 수용자들이 기존 매체에서 새 매체로 옮겨가게 된다. 매체발달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이러한 미디어 대체의 대표적인 예는 텔레비전이 대중적인 오락매체로서 라디오를 대체하게 된 경우를 들 수 있다. 텔레비전이 라디오에 비해 시각적인 충족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수용자들에게 보다 다양하고 몰입도가 높은 프로그램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수용자들에게 더 많은 오락성을 제공함으로써 라디오를 대체하게 되었다.그러나 모든 매체에서 이러한 미디어 대체의 메커니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구 매체들이 공존 공생하는 ‘공진화’적인 발달 과정을 보여왔다. 라디오에 이어서 텔레비전, 그 후에 케 것으로 나타났다.하지만 위의 연구들은 인터넷이 막 대중화되기 시작할 당시의 연구들로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고, 특히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 컨텐츠 서비스들이 기존 매체이용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강미은의 연구는 인터넷의 이용과 신문 및 TV 시청 행태에 대한 유의미한 관계를 입증한 것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미은의 연구는 미국의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연구로 우리나라의 경우와 동일하게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재현의 연구는 미디어 대체 가설을 바탕으로 인터넷과 TV의 이용관계를 연구하였으나 여기서 중요한 변인이 되는 것은 여가시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인터넷 이용에 따른 전통적인 미디어 이용 변화에 대한 자료로서는 일반화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또한 몇몇 학자들의 연구는 대부분 인터넷과 TV의 이용관계에 대한 연구에 치중해 있으며, 그 연구결과 또한 인터넷 이용에 따라 TV의 시청시간이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미디어 대체 가설이 동일한 성질의 미디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인터넷이 TV의 대체 미디어로서 작용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으로 보여진다.그렇다면 가장 전통적인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신문은 인터넷의 등장과 보급에 따라 어떠한 변화를 보이게 될 것인가? 물론 신문은 인터넷과는 성격이 다른 매체라는 점은 고려되지만 인터넷의 등장으로 기존 종이신문의 미래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던 만큼 이러한 연구는 충분히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본 연구에서는 미디어 대체가설을 바탕으로 매체간의 대체와 보완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다음과 같은 연구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연구문제 1 : 인터넷 사용정도와 신문의 사용정도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2) 이용과 충족 이론이용과 충족 이론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신문과 방송 등의 매체의 통한 소비행위이고 두 번째는 메시지를 보내는 매체로서의 인터넷 이용, 세 번째는 전통적인 매체에서처럼 메시지를 받는 매체로 인터넷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들이다.이중에서 세 번째 전통적인 매체이용과 중복되는 인터넷 이용동기를 살펴보면 기존의 전통적인 매체이용과 인터넷 이용은 상호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기존 신문을 이용하는 수용자와 인터넷을 이용하는 수용자의 동기 사이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이용과 충족이론을 바탕으로 신문과 인터넷 이용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연구문제 2 : 이용과 충족을 바탕으로 인터넷 사용동기와 신문 구독 동기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연구방법(1) 개요본 연구에서는 인터넷 사용자들의 신문이용정도와 심리적 동기를 살펴보기 위해 한국언론재단에서 2년마다 한 번씩 조사하는 수용자 의식조사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연구를 실시하고자 한다. 이 조사 자료는 2002년 8월 26일부터 9월 14일 까지 만 18세 이상 65세 미만의 성인 남녀 1255명을 대상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걸쳐 실시한 언론 수용자 의식조사이다.표본 추출 방법은 성/연령/지역별 비례 할당 및 다단계 추출법(Multi-Stage Sampling)을 이용하였고, 최대 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77% 이다. 조사 진행은 가구 방문에 의한 일대일 개별면접으로 진행되었으며, 면접원당 20% 이상의 질문지에 대해 전화 검증한 후 문제가 발견된 경우, 그 면접원이 수행한 질문지를 모두 무효화하고 재 면접을 실시하여 조사 결과의 신뢰도를 높였다.본 연구는 상기 조사결과 중 신문에 대한 이용정도와 인터넷을 이용하는 정도에 대한 자료를 본 연구목적에 부합되게 재가공하여 연구를 실시하였다.자료의 분석은 별도의 가공과정을 거쳐 SPSS 10.0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하였다.(2) 주요 변인의 구성이 연구를 위해 조사자료를 다음과 같이 주요 변인으로 구성하여 자료를 분석하였다. 우선은 신문의 구독여부, 인터넷55명 가운데 69%인 866명이 이용을 하고 있었고, 이는 2000년 조사 당시 41.8%와 비교할 때 이용자가 급격히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터넷 이용시간의 변화를 살펴보면, 2000년에는 1시간 이상 이용하는 응답자가 20.7%였던 것에 반해, 2002년에는 31.2%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도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터넷이 등장한 초기 시점인 1998년에는 PC통신 이용시간을 포함해서 하루 평균 30.4분이었던 것과 비교해 큰 변화를 보인 것으로 보인다.인터넷을 이용하는 주된 이유로는 업무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27.7%), ‘흥미, 오락, 휴식 등을 위해’(26.1%), ‘생활정보와 상식을 얻기 위해’(15.2%), ‘습관적으로’(7.5%) 순으로 나타났으며, 그 외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뉴스/시사정보를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쇼핑, 은행거래, 상품구매 등을 위해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장소는 주로 집(59.2%), 직장(33.3%), PC방(6.2%)이었다.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로는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아도 생활에 불편함을 못 느껴서’(29.3%), ‘인터넷에 관심이 없어서’(27%)가 많았으며, 그 밖에 ‘인터넷을 이용하고 싶지만 컴퓨터를 접할 기회가 없거나 배우기 어려울 것 같아서’ 라는 이유도 32.9%를 보였다.이와 비교하여 1주간 신문 접촉 빈도를 살펴보면, ‘매일 보았다’는 41.7%, ‘4-6일 보았다’ 11.6%, ‘2-3일 보았다’ 22.1%, ‘1일 보았다’ 6.7%, ‘종이신문은 보지 않고 신문사이트만 이용했다’ 5.8% 그리고 ‘신문을 한번도 보지 않았다’ 12.1% 순으로 나타났다. 1일 평균 신문 이용 시간은 37.3분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2000년 조사 당시 35.13분에 비하여 2.17분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96년 43.5분, 98년 40.8분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전반적으로 정체 내지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인터넷 이3.0p
장 보드리아르의 [사물의 체계]현대 프랑스 철학과 포스트 모더니즘 학문을 대표하는 장 보드리아르, 그의 첫 번째 저작이 바로 이 [사물의 체계]이다.네오맑시스트로 출발해 후에는 그 반대편의 극단까지 가는 기이한 행보를 보여줬던 그의 첫 번째 이 저작에서는 가장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대부분의 프랑스 철학 번역서와 같이 그 내용의 난해함으로 인해 무척 이해하기가 힘든 책이었다.보드리아르는 현대 사회를 '소비사회'로 지칭하면서 소비가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한 원동력이며, 나아가 소비주의가 일상의 다양한 측면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기호학 이론을 바탕으로 이러한 소비주의의 특질들을 인식하려 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소비 상품의 폭발적인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물의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고 있는 이 책은, 주체가 일상 생활을 구성하는 사물과 기호의 체계에 관계하는 방식, 그러한 체계를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그러한 체계를 지배하거나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방식을 기술하려는 보드리아르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소비사회의 기호학' 또는 '사물의 기호학'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서로 간주될 수 있다.물질 문화의 기호학과 일상 생활의 상품화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는 는 보드리아르가 '새로운 기술 질서,' '새로운 환경,' '일상 생활의 새로운 영역,' '새로운 형태의 하이퍼 문명' 이라고 특징 지웠던 새로운 사회 질서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보드리아르는 우선 우리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사물들에 대해 고찰하고 이러한 사물들이 어떠한 분위기를 형성하는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방식에는 보드리아르가 관심을 가졌던 기호학적인 접근 방법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보드리아르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 조작성과 형태,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간의 구조 속에서 어떠한 기능으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정의 내리고 있다.이러한 사물의 기능들은 더 이상 우리가 예전에 알고 있던 자연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아닌 하나의 기호로서 우리에게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드리아르의 이러한 관점은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소비사회’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사물의 분위기가 곧 소비사회를 만드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이를 위해 보드리아르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장에서 어떻게 사물의 체계가 소비사회를 만들어가는 가에 대해 규명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앞서 언급했듯이 보드리아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이 자연상태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초월한 하나의 기능적 모델로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물의 체계는 과연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기능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보드리아르는 우리 주변의 기호학적인 기능들이 모두 다 사물이라는 개념정의를 내린다. 우리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수집, 질투, 습관, 정열 등 수 많은 욕구에 대해서 사물이 어떠한 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바탕을 둔 기제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욕망들이 우리에게 외적, 내적 동기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 동기라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고 싶고,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되는 의식을 말한다.이러한 의식은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화폐가 교환가치가 있는 하나의 기호로 사용되면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 대한 소비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보드리아르의 주장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보드리아르는 이제 사물이 가지고 있는 배치와 분위기, 그리고 수집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동기유발을 살펴보면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과연 어떻게 작용하는 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쉽게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기술과 인간의 욕망을 본질적인 사물의 측면으로 보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용도와 환상적인 용도, 아니면 그 용도가 내포하고 있는 모호성들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기술 문명은 체계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속성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오늘 날 현대 기술문명이 불안정과 안정을 일시적으로 순환 반복하면서 성장한다는 속성을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즉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불안한 순환 반복의 카테고리 안에서 사물의 속성이 수시로 변화하고 이것이 현 사회의 성장요소 중에서 하나의 기능적인 장애로 작용할 수 도 있다는 강박관념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그렇다면 앞서서 언급했던 사물의 체계와 욕망의 생산과정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은 어떻게 현대 사회를 소비사회로 만들었는가? 그 질문에 대해 소비자가 가지고 있는 신용과 광고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