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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외교] 한·미관계에서의 한국의 자주성 증대 방안
    {한·미관계에서의 한국의 자주성 증대 방안Ⅰ. 서 론2003년은 한국과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로 동맹이 된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전쟁의 혈맹으로서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호적이었지만, 오늘날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좋지 않다. 미국에 대한 반미 감정이 한국인들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의 김동성 선수가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내어주는 사건 이후로부터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두 효순, 미순이라는 두 여중생이 미군장갑차에 억울하게 숨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국적 규모의 촛불시위와 한미주두군 지위협정(SOFA)의 전면개정 시위가 전국을 뒤덮으면서 반미감정은 증폭되었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전세계적인 반전 분위기와 함께 한국군의 파병문제와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 공개 등으로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한국인들 사이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그러나 최근 한미동맹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한 일간지의 여론조사에서 한미관계가 국익에 중요하다 는 의견이 93.1%로 중요치 않다는 의견 (6.8%)을 압도했다. 그리고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 가 82.8%였고 주둔할 필요 없다 는 17.2%에 그쳤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생각은 호의적 50.1%, 비판적 49.5%로 긍정과 부정 의견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이는 한국 국민들이 안보에 대해선 미국의 전통적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서면에서는 미국과 멀어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오늘날의 한미관계는 냉전체제하에 이루어진 군사적 동맹의 연장선을 계속 달리고 있다. 하지만 안보보다는 경제가 우선시되는 탈냉전적 국제사회에서는 한미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며 급변하는 국제 환경에 따른 외교 정책과 방향이 설정되어야만 한다. 더 이상 강대국의 논리에 이끌려 국익을 놓치는 외교는 국민들의 지지를 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발전적인 한미관계와 대미 외교에서 한국의 자주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보기로 하겠다.Ⅱ.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동맹정책과 한반도정책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겪은 후 미국의 동맹질서가 대변혁을 겪고 있다. 전통적인 동맹관계가 하루아침에 무시되기도 하고, 과거의 적이 새로운 외교 파트너로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부시 미대통령은 육군 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미국은 더 이상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집단동맹에 의존하지 않겠다. 고 밝혔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 년간 유지해 온 유럽과의 동맹관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미국은 이라크전에 비협조적이었던 프랑스와 독일 등을 대신하여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등의 동유럽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01년 11월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미국의 목표에 따라 동맹이 결정되지, 동맹에 따라 미국의 목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고 밝힌바 있다. 기존의 동맹관계에 구속되지 않고, 상황과 필요에 따라 파트너를 바꿀 수 있는 순환동맹(rotating coalition) 개념을 천명한 것으로서 미국으로부터 경제·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신 미국의 단기적 군사목표를 지지하는 나라들을 중심으로 그때그때 동맹지도를 바꿔 그리겠다는 뜻이다.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 또한 강경하고 적극적으로 변했다. 1999년의 아미티지 보고서(Armitage Report : A Comprehensive Approach to North Korea)에 의하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협상방식은 외교 수단과 강력한 군사적 응징을 병용하는 이중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당근과 채찍 의 이중전략에서 상대적으로 채찍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단순한 봉쇄를 넘어 선제적 공격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방향으로 전략적 수정까지 이루어져 한반도와 한미 동맹관계에 상당한 긴장이 조성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부시 행정부의 새운 동맹지도에 따라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한미동맹은 대북 전쟁억제를 보장하는 억제 장치이자 한반도 평화정착 및 통일과정에서 한국의 대북정책을 뒷받침하는 지원세력이며,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발전에 있어서도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 왔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한미동맹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 제고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 내 강대국들 간의 세력균형관계에서 한국의 전략적 비중과 위상을 강화하는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해 왔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에 만연된 감상적, 민족주의적 반미감정과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서의 외교 공조 실패는 한미 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한국 자체의 존립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Ⅲ. 한·미 관계에서의 한국의 자주성 확대 방안주한미군 주둔 지위협정 전면개정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한국인들은 한미간의 동등한 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결코 정치적으로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a Lone Super Power)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패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한국은 지정학적 위치상 그리고 국제사회의 영향력 행사 능력에 있어서 약소국(a Minor Power)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한국과 미국은 힘과 영향력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한국 외교정책의 우선순위는 맹주(major ally)의 의사와 의지에 따라 조정되어야 했다. 미국이 공산주의, 긴장완화, 독재체제 혹은 인권에 대한 평가가 바뀔 때마다 한국은 미국의 이러한 변화에 적응해야 했고, 예측할 수 없는 미국 정책의 가변성 때문에 자주 분노를 느끼게 되면서 한국은 국내외정책에서 보다 더 독립적인 입장을 가지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한국은 안전보장, 경제발전 등을 미국에 크게 의지하여 왔기 때문에 정책의 독립성과 독자성을 갖는 데 제한이 많았다.한 국가가 외교정책 목표나 외교정책을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증대시키고 국가 이익을 보호하는 능력이 외교역량이다. 그리고 적극적 외교역량이 한 국가자국의 외교정책이나 그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인 반면 한 국가가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이나 영향력 행사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이러한 것이 가해질 때 이에 굴복하지 않는 능력을 소극적 외교 역량이라고 한다. 한미관계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에 대해 강한 적극적 외교역량을 갖고 있지만, 한국은 소극적 외교역량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한국이 미국에 대해 영토적 안전보장이나 수출입 무역시장에 있어서 크게 의존하는 불평등한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에 대해 현재의 불평등한 의존적 관계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에 대해 한국의 입장과 자주성을 보장할 수 있는 소극적 외교역량을 강화할 수는 있다. 다음의 방안들은 한미관계에서 한국이 자주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방안들이다.우선 한미 동맹의 강화이다. 탈냉전 이후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라 한반도에서도 동맹관계의 재편이 필요하다는 연구가 활발하다. 크게 세 가지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 첫째는 위협소멸 이후 새로운 비전 아래 기존 동맹관계를 재정의 하는 길이고, 둘째는 새로운 동맹을 모색하는 길이며, 셋째는 독자적인 군사력 증강을 통해 자주국방을 이룩하는 길이다. 이 가운데 두 번째의 길은 일본에 대한 거부감, 중국에 대한 신뢰부족 때문에 선택가능성이 없으며, 세 번째의 길도 주변 강대국과의 군비경쟁이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경우 국제적 고립의 위험보다는 기존의 한·미동맹의 유지와 강화의 길이 가장 이성적·합리적인 방안일 것이다. 그러나 한미 동맹의 강화는 일방향적 군사동맹 중심보다 상호보완적이고 포괄적인 동맹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미국에게 있어 한미동맹은 미국의 동북아 및 아·태전략 그리고 세계전략 측면에서 유용한 전략적 자산이고, 한국에게 미국은 한반도 평화정착 및 통일과정에서의 지원 세력이기 때문에 한미간의 전략적 이익은 합치된다. 그러므로 강화되는 한미동맹은 양국간의 전략적 이익을 조화시키는 방향이어야 한다.다음은 주한미군 주둔과 련된 문제의 해결이다. 주한미군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한 전쟁억제의 보장 장치이며, 정보자산 및 첨단무기체계 분야에 있어서 한국군 전력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전시탄약 비축 등 한국군의 전쟁지속능력을 보완해준다. 그리고 주한미군은 한국의 안보부담 및 국방비용의 절감으로 경제발전에 기여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미감정의 확산과 함께 매향리 사격장 이전 문제, 용산기지 기름유출 사건 그리고 여중생 둘이 사망한 장갑차 사건 등으로 인한 한미주둔군 지위협정(SOFA)의 전면개정 요구와 미국 주둔에 대한 한국인의 지지 감소는 주한미군의 입지를 좁혀가며 주한미군 철수라는 극단적 여론이 생겨나는 상황까지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현재 한국의 안보상황상 필수부가결한 존재이므로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극단적 해법보다는 한미간의 주한미군 주둔과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방안이 현명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미군기지와 훈련장의 축소 및 이전을 통해 한국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해야 할 것이며, 한미주둔군 지위협정의 조정을 통해 주한미군의 불법 행동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이익을 해소시켜야 한다. 위와 같은 미국과 관계에 있어 국내적 요인들에 대한 갈등 해소가 이루어질 때 보다 발전적인 한미동맹이 가능하게 되는 초석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Ⅳ. 결 론외교통상부는 외교정책과제 가운데 한·미간의 외교관계 강화 발전을 당면 현안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외교통상부는 대등한 한 미 관계에 대한 우리 국민의 요구 및 미국내 일각의 반한 분위기, 주한미군 조정문제 재론, 한 미 관계의 장래에 대한 우려는 외국인 투자 유치에 영향의 세 가지를 한·미 관계의 새로운 변화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 미간 동맹관계 강화 의지 및 대북정책에 대한 공동인식 도출에 노력하고, 한 미동맹 조정이 연합방위력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협의하며 한 미 동맹관계에 대한 대내외 인식 제고와 함께 우리 경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 차단을 추진방안으로 내놓고있다.
    사회과학| 2004.02.21| 6페이지| 1,000원| 조회(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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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외교] 한국의 정치개혁 성리학적 정치담론에서 배워라.
    Ⅰ. 서 론대통령의 국정운영 미숙과 그에 따르는 혼란, 서로의 잘못을 헐뜯는 비생산적인 정당간의 정쟁, 치솟는 땅값과 미봉책일 뿐인 부동산 대책, 국민의 정부의 정치에 불신의 팽배와 같은 현상들은 바로 21세기 서두의 한국과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혼란기에 개혁이라는 급진적이면서도 필수불가결한 단어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안정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 그리고 사회적 불신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개혁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개혁 가운데 가장 선행되어야 할 부문은 정치개혁의 부문이다. 정치개혁은 개혁의 주체를 정비하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왜곡되어 왔던 정치구조와 제도를 새로운 환경변화에 맞게 근본적으로 조정하여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중대한 정치제도의 개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시기는 전반적인 사회개혁의 시기와 일치한다.이러한 시점에서 『창업과 수성의 정치사상』에 나타나는 성리학적 정치담론과 체제개혁에 대한 논의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비전을 제시한다. 여말선초의 시기 또한 혼란기였다. 400여 년간 지속되었던 구체제의 몰락, 불교세력의 난립에 따른 정치와 경제의 파탄 그리고 이에 대항한 신흥정치세력의 등장은 여말선초가 혼란의 시기이자 전환기의 시대였음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의 한국도 혼란의 시기이자 전환기의 시기로 볼 수 있다. 국정운영의 혼란, 끊임없는 정당간의 비생산적 정치형태, 경기의 침체와 민심의 동요 등은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여말선초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의 타개를 위해서는 체제개혁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여말선초의 성리학적 정치담론의 형성과 분화 그리고 이색, 권근, 정도전의 정치인식과 구상한 정치체제는 오늘날 한국정치 추구해야할 체제개혁에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제공한다. 여반한다. 즉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정통담론의 정립을 위해 필요한 1차적인 절차였다면, 이단의 배척은 본격적으로 정통담론이 확립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성리학적 정치담론의 정통과 이단의 구별이란 유지되어야 할 권력과 배척되어야 할 권력의 구분을 의미하는 정치적인 의미의 권력이동의 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성인가학론은 주염계에 의해 제시된 이론으로써 그는 한유 단계의 제한적인 성인론의 틀을 벗어나서 평범한 인간도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기만 한다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주염계는 성인의 범주를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주체로 확대함으로써 유교적 정통론에 입각하여 이단을 배척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신흥 정치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성인가학의 논리는 욕망의 절제라는 도덕적 실천만 가능하다면, 누구라도 새로운 정치질서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성인가학론의 이면에는 새로운 시대의 주체로 등장한 사대부 자신의 정치적 위상 제고라는 분명한 정치적 목표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신진사대부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서서히 공고화하고 정치세력으로서의 영향력을 키웠던 것이다.(2) 성리학적 정치담론의 분화유형벽이단론과 성인가학론를 배경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들이 모두 통일된 하나의 사상과 목소리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신진사대부들의 구성원들은 각기 상이한 사상체계와 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적 정치담론 내에서의 분화는 필연적이었다. 성리학적 정치담론내의 분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성리학의 실천 윤리적 성격에 따른 분화로서 성리학을 이단에 대한 대안적 정치담론으로 인식하기는 했지만, 성리학의 정합적 이론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성리학을 새로운 체제의 구상을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 인식하는 경우로 정치를 도덕의 연장이 아닌 구체적 실천의 영역으로 독자화 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세이다. 사전의 혁파를 통한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강조한다든가, 왕권을 공공성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정당성을 잃은 왕권에 대한 신권의 도전을 정당화하려는 논리 등은 혁신파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성리학적 정치담론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에 대한 의식의 차이와 역사적·정치적 현안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여말선초 성리학적 정치담론의 분화유형은 이색을 중심으로 한 도덕적 보수주의,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 혁신주의 그리고 권근을 중심으로 한 안정 지향적 수성주의의 세 가지 유파로 대변될 수 있다.Ⅲ. 이색, 권근 그리고 정도전의 성리학적 정치인식과 체제개혁 방안(1) 이색의 성리학적 정치인식과 체제개혁유학의 정치인식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수양과 정치적 실천이 연속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전통적인 유학에서는 도덕과 정치를 독립된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지도자의 도덕성이 정치현실로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색이 구상한 이상적인 정치의 실현방법은 대학 의 원리에 따라 개인의 도덕적 성찰을 정치적 영역에 동심원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기로부터 치인으로 이어지는 정치인식의 동심원적 확산구조를 사대부의 정치적 책임의식으로까지 연결시켰다. 또한 이색은 성리학의 이론적 정합성을 중시하기보다는 성리학의 실천 윤리적 측면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성리학적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을 소홀히 했다. 그는 성리학을 정치현실의 개혁을 위한 정치적 실천의 이념으로 이해했다기보다는 내면적 수양을 통한 도덕적 실천을 강조했고,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정치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이색의 도덕 중심적 정치인식은 이색으로 하여금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적극적 방법보다는 도덕성의 회복이라는 소극적 방법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게 하였다.이색의 순응주의적 세계관은 자연이 인간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확신했지만, 반면에 인간이 자연의 개조에 능동적으로 개입서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부분적인 개혁을 선호했다. 그래서 이색의 체제개혁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은 기존 체제의 유지에 부합되는 한도 내에서의 부분적인 개선, 즉 체제유지적 한계조정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도덕 중심적 정치인식과 순응주의적 세계관은 이색으로 하여금 왕권 중심적 정치체제의 실현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이색의 정치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자연의 질서와 정치의 질서가 직접 연계된 천인무간의 정치이자 천인감응의 정치였다. 또한 이색이 추구한 군신관계의 정형은 군주와 신하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원칙에 입각한 결합으로 이색의 군신관은 섬길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않으며 부릴만한 백성이 아니라면 부리지 않는다 는 백이의 군신관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의리와 원칙을 강조하는 군신관에서는 충성을 바칠 대상의 전이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명분적 질서의 확립과 이를 통한 정치적 안정을 강조하는 경향은 급격한 제도의 변화를 부정하고 전통적 질서를 강조하는 상고주의적 입장으로 이어졌다. 이색의 군신관계에 대한 이해는 보편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고려왕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개창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2) 정도전의 성리학적 정치인식과 체제개혁정도전의 정치인식은 기본적으로는 수기와 치인의 연속이라는 성리학적 정치인식의 대전제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정도전 역시 여타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있어서 내면적 성찰과 도덕적 실천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정도전에게 있어서도 도덕적 수양은 정치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매우 중요한 가치전제였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는 정당한 정치의 실현이 보장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수기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도덕적 이상에 부합되는 정치의 현실이다. 따라서 정도전에게 있어서 정당한 정치적 실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 도덕적 수양이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원리적으로는 수기와 치인의 통합, 즉 도덕과 정치의 통합을 지향했지만, 수기의 문제보다는 치인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을 요구하는 보다 적극적인 제도의 변혁을 지향한다. 그러나 정도전이 추구한 체제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체제가 아니라 과거의 것이었다. 정도전이 구상한 이상적인 제도개혁의 모델은 삼대의 제도, 그 중에서도 특히 주 나라의 제도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고대의 제도를 원형대로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고제의 회복 자체가 적극적인 개혁의 실천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정도전은 고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급격한 제도개혁을 단행함 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물적 토대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도전에게 있어 고제의 회복이라는 논리는 이미 무너진 과거의 전통을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에 담겨진 모순을 척결하여 새로운 이상적 체제를 수립하자는 면분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오히려 정도전이 지향했던 체제개혁의 기본적인 방향은 구체제의 혁명적 청산과 새로운 정치질서의 신속한 건설이었던 것이다.정도전에게 있어서 새로운 정치질서의 건설은 바로 신권 중심적 정치체제였다. 그는 왕권의 사적인 전횡을 제한할 수 있는 새로운 군신관계를 모색했다. 즉, 군주에게는 상징적 구심점으로서의 지위만을 부여하는 대신에 정치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은 재상에게 맡기자는 것으로 군주에게 정치적 구심점으로서의 상징적인 지위만을 부여하는 대신에 합리적인 관료제도의 운영을 통해서 군주의 한계를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군주는 정치공동체의 상징적 구심일 뿐 상징화된 권력의 실질적인 권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도전이 구상했던 재상 중심적 정치체제는 실천지향적인 정치인식을 바탕으로 한 개혁적인 것이었고, 군주 한 사람에 의한 사적인 전횡을 배격하는 공공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3) 권근의 성리학적 정치인식과 체제개혁권근은 대부분의 고려수절신들이 국운의 쇠락에 직면하여 선택했던 탈정치적 정치행태를 거부하고, 도덕과 의리에 기초한 보수적 정치담론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에게 이미 무너진 고려에 대해 절의를 바치는 것만이 능사는 다.
    사회과학| 2004.02.21| 6페이지| 1,000원| 조회(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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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문학] Madama Butterfly 에서 발견되는 오리엔탈리즘적 요소와 비평 평가B괜찮아요
    {Madama Butterfly에서 발견되는오리엔탈리즘적 요소와 비평영어영문학과 3학년Ⅰ. 서 론 : 탈식민주의의 개념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던 제3세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 의 많은 식민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식민 제국이 해체되고 식민지 체제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신생 독립국들 앞에는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회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놓여 있었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 자신들을 지배해 왔던 식민지 본국의 문화적 논리를 극복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탈식민주의는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이론이다. 그리고 탈식민주의는 식민지시대 뿐만 아니라 독립을 한 후에도 계속 남아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식민지의 잔재를 탐색해서, 그것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것들에 대항하자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탈식민주의는 식민지 시대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 이후의 정신적 식민주의 시대의 불가시적 억압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처럼 탈식민주의 이론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피식민지인들에게 가한 억압을 분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를 밝혀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탈식민주의적 비평은 다음의 세 가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첫째, 식민주의 역사를 지닌 나라 출신의 작가들이 쓴 텍스트, 과거든 현재든 주로 식민주의의 작동과 유산에 관한 텍스트 읽기. 둘째, 식민주의 역사를 지닌 나라들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쓴 텍스트 혹은 이산의 경험과 그것이 초래한 많은 결과를 주로 다룬 이주 가족 후손이 쓴 텍스트 읽기. 셋째, 식민주의 담론의 이론에 비추어 식민주의 시대 동안 생산된 텍스트 다시 읽기, 제국의 경험을 직접 전달하는 텍스트와 그렇지 못한 텍스트 둘 다 읽기이다. 여기서 본인은 식민주의 이론의 발달과정과 탈식민주의의 대표적 이론인 오한 노력은 대부분 퇴영적인 과거를 찬양하거나 현재의 상태를 무조건 부정하는 폭력적 상황으로 귀결되고 만다. Fanon은 이처럼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지 피지배자들의 존재 방식을 고민했던 것이다.Fanon의 입장을 이어받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이라는 용어로써 탈식민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Edward Said이다. Said는 Orientalism, Culture and Imperialism 등의 책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동양인에 대한 인식과 시각을 비판하였다. Said는 오리엔탈리즘을 다음의 다섯 가지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오리엔탈리즘은 이분법을 구축한다고 보았다.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주장되는 기본적 세계관은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이다. 이들은 각각은 서로에게 대립된 상태의 존재로서 동양은 서양이 아닌 모든 것, 서양의 타아(Alter-ego)로 인지된다. 그러나 이것은 동등한 파트너들의 대립이 아니다. 동양은 서양의 우월성과 힘에 대한 인식을 떠받쳐주는데 도움을 주는 일련의 부정적 용어들로 종종 묘사된다. 서양이 지식과 학문의 터로 추정된다면 동양은 무지와 단순함의 장소가 된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과 서양은 불평등한 이분법의 구축을 통해 위치가 정해진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환상이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견해는 동방의 땅 위에 존재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종종 이 근본적으로 다른, 대조적인 장소가 담고 있는 것에 관한 서양의 꿈, 환상과 가정에서 비롯된다. 오리엔탈리즘은 무엇보다도 조작된 구성물이고,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의 실체 로 구실 하도록 존재하는 일련의 이미지들이다. 이 짜내어진 실체 는 결코 동양 자체에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지를 반영하지 못하고 동양에 대해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재현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감각한 자연적 사실 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며, 지배한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빚어지적 개성, 국가 종교적 특성에 대한 경제적, 사회학적 이론의 예로서 적합한 대상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런 어지러운 총망라한 목록은 오리엔탈리즘이 인류학에서 동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펼쳐져 잇는지, 또 서구인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세계에서의 그들의 우월한 위치를 형상화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강조한다.넷째, 오리엔탈리즘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방대한 제도적 네트워크를 뒤덮을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하게 수많은 문학적·비문학적 저술들에 영향을 끼친다. Said는 언어학(언어의 역사에 관한 연구), 사전편집학(사전만들기), 역사, 생물학, 정치학, 경제적 이론, 소설 쓰기와 서정시가 오리엔탈리즘에 기여하는 것으로 지적한다. 오리엔탈리즘은 또한 가령 빅토리아시대에 유행했던 영웅적 소년들의 모험 이야기와 같은, 해외에서의 서구인의 경험을 신주 모시듯 하고 종종 찬양했던 새로운 형태의 글을 가능하게 했다.마지막으로, 오리엔탈리즘은 지배를 정당화한다. 위에 열거한 모든 점들은 오리엔탈리즘이 정치적 지배의 구조에 속한 광범위한 재현체계라는 중요한 세부사항을 강조한다. 오리엔탈리즘적 재현은 동양의 영토에 대한 서양의 식민지배의 적법성을 정당화하며 제국의 무기고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 오리엔탈리즘적 재현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고 물리적 강제를 통해 식민지배를 유지하는 정치적, 사법적 구조를 순조롭게 한다.Ⅲ. 오페라 Madama Butterfly의 오리엔탈리즘적 접근Madama Butterfly은 John Luther Long의 소설을 소재로 David Belasco가 회곡화하고 이것을 후에 Puccini가 오페라화하여 1904년 2월 17일 밀라노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소설 Madama Butterfly의 저자 Long은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과 희곡을 여러 편 발표했으나, 그가 직접 일본에 가본 일은 없었다. 1886년에 선교사 Arvil Correll의 아내로서 일본에 건너가 나가사것이다. 또한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당시 유행하던 이국취미 유행에의 편승이라는 점에서 서양인들의 취향에는 실제의 동양보다는 이미지로서의 동양이 더욱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환상으로서의 동양의 이미지가 실체로서의 동양보다 이해하기 쉽고 수용하기도 쉬웠던 것이다.우선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세기말 일본의 나가사키는 개항지였다. 당시 나가사키 항은 서양의 많은 배들이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입항하는 장소였고, 이는 곧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가사키항은 일본이 서구와 무역하기 위해 유일하게 개방한 장소로서 이곳은 서양으로 하여금 일본을 체험하고 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그 공간은 서양인에게 너무나 이국적이고 서양과는 다른 장소였다. 흔히 동양의 공간적 배경은 서양의 시각에서 무시간적이고 낯설게 그려진다. 만약 서양이 역사적 진보와 과학적 발전의 장소로 간주된다면, 동양은 역사적 변화의 영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동양은 계몽화된 서구의 근대적 발전으로부터 멀리 뒤쳐져 과거에 갇힌 채로 있다고 간주되었다. 이런 식으로 고려할 때 동양은 종종 원시적이거나 후진적이라고 생각되었다. 동양으로 여행하는 서구인은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단지 공간상으로 이동한다기보다는 시간상으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여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이란 무시간의 장소로서, 변화 없고 정적인, 서구 역사의 진보로부터 단절된 존재이다. 또한 동양은 단순하게 다른 것이 아니고 괴상하게 다르다. 즉, 이상하고 신비롭고 괴기하다. 서양인들은 그곳에서 모든 종류의 광경을 만날 수 있고, 믿음을 무력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서구적 시각을 의심하게 만드는 경이와도 만날 수 있다. 동양의 괴상함은 종종 서구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즐거움과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원천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본질적 기이함은 동양의 열등함을 충분히 입증해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서양이 이성적이고 분없는 중국인 등이 있다. 동양인의 인종 은 어쨌든 개인적 자질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떤 종류의 인물이 될지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따라서 아랍인 과 인도인 같은 범주는 오리엔탈리즘의 특징을 이루는 전반적인 부정적 재현 틀 속에서 정의되고 일련의 일반화된 유형들, 즉 모든 아랍인은 과격하고 모든 인도인은 게으르다와 같은 것을 오리엔탈리즘에 제공한다. Madama Butterfly에서도 동아시아인과 동아시아 여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투영되어 있다. 중매쟁이인 Goro는 약삭빠르고 간사한 전형적인 일본인 캐릭터이다. 그리고 Cho-Cho상은 바로 정절과 순종을 상징한다. 흔히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의 여성을 난잡하고 에로틱한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식민시대에 수백 년간에 걸친 서양의 예술작품 속에서 종종 나체로 혹은 부분적으로만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이국화된 동양여성은 수없이 많은 신비로운 에로틱한 쾌락으로 인도하는 열쇠를 가진, 성적 쾌락을 즐기는 음란하고도 적극적인 피조물로 제시되었다. 동북아시아의 여성의 경우에는 성적으로 난잡하고 방종함 보다는 지조와 절개를 지킨 면모가 더욱 강조된다. Madama Butterfly 작품도 동양여인의 정절과 절개를 주제의식으로 갖고 있다. Cho-Cho상은 요염한 교태로 남성들을 접대하는 게이샤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 남자를 끝까지 기다리는 절개를 지녔다. 창녀와 성녀의 양면성을 지닌 동양 여인의 모습은 남성들의 성적 호기심과 신비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요염함과 정절이라는 이질적 특성을 동시에 지닌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여성은 서양 남성들이 서양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여성상이며 유혹적인 대상인 것이다.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동양으로 대변되는 Cho-Cho상과 서양으로 대변되는 Pinkerton의 캐릭터이다.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은 전체적으로 여성화 되고 수동적이고 복종적이고 이국적이고 호사스럽고 성적으로 신비롭고 유혹적으로 간주된다. 반면 서양은 남성적 이 된다.
    인문/어학| 2004.02.21| 5페이지| 1,000원| 조회(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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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사회] 중국시민사회 논의
    Ⅲ. 중국 시민사회 논의1. 중국 시민사회의 논의 과정(1) 중국 시민사회 논의의 문제점1989년 천안문 항쟁 이후 중국에서는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요소인 시장을 도입하면서, 과거에 비해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 천안문 항쟁은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중국의 시민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다. 즉,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의 도입과 1989년 천안문 항쟁은 시민사회론을 중국연구의 중심주제로 등장시켰다. 시민사회론으로 중국을 분석하는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개혁개방의 결과로 발생하게 된 국가와 사회간의 간극을 시민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론으로 중국정치를 설명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이 가지는 문제점은 서구학자들이 시민사회를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대서구 문명의 총체로서 시민사회를 이해하기보다 그 가운데 일부분의 특성을 통해 시민사회를 이해하고 따라서 개별 논자들이 상정하는 시민사회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되었다. 중국에 있어 시민사회를 긍정하는 경우에는 국가권력에 대해 저항했다는 사실로 시민사회를 적용하려고 한다. 경제영역의 자율적 측면의 확대 기미가 있으면, 이를 바로 정치적 자율성의 확대로 연계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통해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는 판단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 시민사회를 하버마스의 공공영역이란 차원에서 이해하여 중국에 있어 어떤 결사체들의 형성에 주목하여 이를 통해서 중국에 시민사회가 존재했는가의 여부를 판정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형성된 결사체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는 결사체인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결여하고 있다. 또, 전통시대와 혁명 이후의 중국에서의 결사체들이 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것을 공공영역과 억지로 연계시키려 한다. 이들의 경우 결사체의 형성과 그것이 대중운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구별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고 시민사회 개념 자체가 점이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정치평형을 모색하고 정부의 인가와 보호를 얻어내길 원했고 일부의 도시사회에서 지도적 기관의 역할을 하는 사회집단들은 반관방(半官方)기구의 색깔을 띠고 있고 그 구성원의 대다수도 준 관료적 사회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당시의 시민사회 중간조직이라 할 수 있는 상회(商會)와 같은 사회집단들은 생겨나면서부터 민간과 관이라는 이중요소를 잉태하고 있었고 국가와 사회간의 연대와 중개의 역할을 해 서방의 시민사회와 같은 순순히 민간적이고 국가에 대항적인 시민사회와는 다르다는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역사전통과 경험에 의거한 시민사회 논의는 중국에서의 시민사회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모색의 시도로 기능하고 있다.중국에서의 시민사회 가능성은 중국의 정치체제와 관련되어서도 논의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사회주의 시민사회라는 중국식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 논의는 시민사회가 민주 의 대명사이고 사회주의 정권과 서로 대립된다는데 반대하면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민사회의 형성은 국가의 권력 하향으로 인해 가능함을 강조한다. 시민사회문제의 관건은 스스로 권한을 이양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하향으로 인해 형성되는 교차적 주변영역을 누가 통제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시민사회 논의에서는 사회주의 국가 또한 각종 소유제 형식과 다양한 분배형식을 통해 다원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주의 시민사회는 국가와 사회가 공공기구의 통제를 받는 시장기제를 건립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각종 사회단체와 비정부 조직이 공공영역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정에 참여하고 국가에 대해 여론감독을 실행해야 함을 인정한다. 동시에 이러한 체제외 영역의 발전이 사회주의 민주를 달성할 수 있고 정치민주의 과정은 시민사회가 부단히 증가하고 국가의 사회에 대한 간섭영역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으로서 평형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표명한다.사회주의 시민사회 모델에서 국가의 역할은 국가가 사회에 간섭해 그 기능을 발휘하지는 않으나 간접리 이전에 국민당정부의 부패에 대해 기율을 확보한 공산당이 도의적인 차원에서 승리한 것이며, 문화혁명 역시 영구혁명론이 가지는 도덕적인 성격이 기존 국가와 사회제도를 압도한 것으로 절차적 합리성이 확고한 서구 시민사회에서 이와 같은 정치 과정이 발생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천안문 항쟁 역시 당시 참여세력의 공통된 주장이 반부패투쟁이었음을 상기할 때, 그 역시 공(公)의 영역에서의 도의적 문제제기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사회의 반대가 있다고 이것을 바로 시민사회와 연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천안문 항쟁은 국가와 대립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사회의 저항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사회의 청원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2.「북경의 봄」민주화 운동, 천안문 항쟁과 시민사회 논의(1)「북경의 봄」민주화 운동1)「북경의 봄」발생원인1976년 모택동 사망에 이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세력인 4인방 체포를 계기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문혁피해파와 화국봉을 중심으로 한 문혁수혜파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어 화국봉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등소평파의 공격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등소평파가 승리하여 당11기 3중전회의에서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당의 지도방침으로 채택하고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처럼 실용주의가 당 노선으로 채택되게 되는 정책변화는 민주화 운동이 발생 할 수 있는 배경을 형성 할 수 있었고, 대외관계에서도 4개 현대화 실현을 위해 선진기술과 자본이 들어왔으며, 사회면에서는 문혁기간 탄압 받은 중, 장년 지식인과 모택동 사상으로 무장된 젊은이 사이에서도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강한 회의를 느끼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처럼, 「북경의 봄」민주화 운동이 발생하게 된 것은 국민이 권력층의 권력투쟁에 염증을 끼고 있는 가운데 사회통제가 일부 완화되고 청년 지식인의 가치관에 변화가 생겨 공산당 정권에 불신을 갖게 되고 이것이 등소평파의 권력투쟁수단의 하나로 이용됨으로써 더욱 촉진되었던 것이다.2)「북경의 봄」 전개과정과 그 평가1978년 11월부터장을 하였고 1978~1988년 사이 GNP는 150% 상승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조세수입은 1985년 이래로 지지부진하였고, 적자와 외국차관은 1984~1988년 사이 두 배가 되었다. 중앙정부가 탈중앙화로 인하여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1980년대 초부터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1988년에 최고에 달했다. 게다가 1988년 여름에 새로운 가격개혁은 엄청난 사재기를 불러일으켰다. 경제개혁 동안 가난이 심각한 사회문제화가 되었다. 1988년 농촌의 1/3이 생존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였고, 인플레로 인해 도시가구의 1/3이 실질소득의 감소로 고통을 받았다. 한편 사치와 부패가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이중가격제와 산업에서 경영계약제 도립, 그리고 외구인 투자와 무역이 부패의 근원이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8년 가을 당은 긴축정책의 하나로 가격개혁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이 신용, 고용, 소득을 감소시킨 반면, 물가상승과 부패는 더욱 만연하게 되었다.이러한 막다른 골목에는 근본적인 정치적 골칫거리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지도부에서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경제개혁에 대한 합의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미 지방과 기업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진 상태에서 정부가 경제적 영역을 이끌 권력과 권위가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로 학생들은 운동에 무관심하였으나, 몇몇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1985~1986년 운동을 통하여 학생운동의 연속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교육과 다른 계획을 통해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대부분은 호요방 사망이전까지는 조용하였지만, 그러나 1980년대 말의 환경-경제위기, 도덕적 부패, 정치적 냉담-은 충분히 위기상황을 조성하였다. 게다가 개혁이 진행될수록 보수파의 반동은 더해졌다. 특히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도덕적 위기감이 조성되고, 관료의 부패와 범죄의 증가는 보수파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1988~1989년 경제적으로 긴축정책이 실행점이 존재한다. 천안문 항쟁 기간 동안 각 참여세력들의 주장들은 일관되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았다. 시기마다 주장들은 변화하고 있으며 당-국가의 대응에 따라 사회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변화시키고 있다.{. 시위참여세력의 주장 변화{ 우경아. 1997. 중국 시민사회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화여자대학교구분1시기2시기3시기4시기학생· 호요방에 대한 정당한 평가· 반정신오염, 반부르주아 자유화 캠페인에대한 재평가· 당-국가 관료의 재산 공개· 사적출판허용, 언론통제철회· 시위금지 10개 항 폐지· 교육재정증가, 지식인 임금상승· 현 시위와 관련한 공정한 보도· 공산당, 사회주의 지지· 사항원칙지지· 민주애국학생운동명칭 재평가· 계엄령철폐· 군철수· 시위참여자 안전보장지식인· 호요방에 대한 정당한 평가· 관료부패문제· 정부기구합리화· 언론, 출판자유· 학생조직 합법성 인정· 정치개혁실시· 언론, 출판자유노동자· 인플레이션문제· 관료부패문제위 주장들을 살펴보면, 참여세력의 공통된 주장은 관료부패문제와 경제정책의 실정을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된 주장인 관료부패나 개혁의 심화는 당-국가가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므로 천안문 항쟁 당시의 국가와 사회가 대립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내리기는 힘들다. 사회세력은 당-국가에 저항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청원자에 가깝게 보인다. 여전히 사회는 당-국가가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개혁을 수행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강조하고 있다.또한, 천안문 항쟁을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은 당시 학생들이 주장한 민주 라는 구호에 주목하고 있지만, 중국 내에서 민주 는 인민들이 같은 관점을 공유해야하고 동일한 이상을 가지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천안문 항쟁 당시 학생들이 주장했던 민주를 서구의 민주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기에는 천안문 항쟁 당시 학생들의 공개적인 주장과 개인적인 요구 간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학생들은 보다 나은 음식과 옷, 보다 넓은 주거 공간, 읽을 수 있는시켰다.
    사회과학| 2004.02.21| 11페이지| 1,000원| 조회(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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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외교] 국제적 냉전체제의 등장배경과 전개 평가A좋아요
    Ⅰ. 서 론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유럽 열강들의 국제정치체제였던 세력균형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전쟁의 결과 유럽은 약 3천2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생존자들은 잿더미와 폐허 속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이미 몰락한지 오래였고, 패전의 결과 독일은 분열되고 무장해제 되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국력은 약화되었다. 반면 승전국이자 연합국의 주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은 전시경제에 힘입어 부유한 나라로 성장하였고, 소련 또한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그 세력을 확장시키며 영향력을 넓혀갔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은 국력을 신장시키고 보다 더 큰 힘을 축적할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신흥 초강대국은 그 힘을 바탕으로 유럽 강대국들의 몰락으로 생긴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형성을 가져오게 되었다.냉전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평론가 W.{리프먼이 저술한 (1947)이라는 논문에서 비롯되었고, 미국의 재정전문가이며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버나드 {바루크가 1947년 의회토론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냉전은 말 그대로 찬 전쟁 을 뜻하며, 실제적으로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행위를 벌이지 않는 전쟁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냉전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진영 간의 정치·외교·이념상의 갈등상태나 군사적 위협의 잠재적인 권력투쟁으로 정의된다.여기서 우리는 냉전체제가 등장하게 된 전후의 국제정치 환경을 이해하여 냉전의 등장배경을 설명하고, 냉전체제의 특징을 이념·체제적 측면, 군사적 측면 그리고 사회·문화적 측면의 고찰을 통해 국제적 냉전체제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1. 냉전체제의 등장배경미국과 소련의 국제관계는 미국이 1933년 공산주의에 바탕을 둔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수립된 소련을 승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만들었다. 또한 미국이 막강한 힘을 사용하도록 만든 또 다른 주된 요인은 미국적 이념이었다. 미국적 이념이란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교의를 통합한 평화와 번영 을 말하는 것으로 세계의 평화와 질서는 다름 아닌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민주주의에 의존하는 것이다. 빈곤과 경제공항은 전체주의, 혁명, 공산주의, 배타적 무역, 그리고 전쟁을 초래하고, 반면에 경제적 번영은 사회적 안정, 정치적 자유, 자유무역, 그리고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준다는 믿음이었다.{ 최영보 외 8명 공저, 미국현대외교사(서울 : 비봉출판사, 1998), pp. 118 - 119.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모든 국가가 채택할 만한 가장 훌륭한 제도와 이념을 가지고 있는 성공한 국민이라고 확신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제도와 이념을 전 세계에 확산시키고자 했다.루즈벨트 사망 후 취임한 트루먼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는 초기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미국 행정부 내에서 소련에 대한 대외정책의 방향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주장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국제 문제에 있어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독일 분할점령문제, 폴란드 문제에 대한 얄타협정의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 이란에서의 소련 군 철수 문제 등 두 강대국 간의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린 사항들에 있어서 잦은 마찰을 빗게 되었고 양국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미국 외교관들로 하여금 소련의 침략적 팽창정책을 우려하고 경계하는 보고를 하게 만들었다. 1946년 여름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특별보좌관 클리포드에게 미·소 관계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할 것을 명령하고, 클리포드는 10만자에 달하는 극비 문서인 「미·소 관계(American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를 작성하여 1946년 9월 24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를 궁극적으로 파괴시켜 모든 국가를 공산화시키려 할 것이므로 미국은 소안 된다고 역설했다.{ 최영보 외 8명 공저, 미국현대외교사(서울 : 비봉출판사, 1998), pp. 133 - 134.트루먼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원조는 성공적이었다. 그리스에는 미국의 원조와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이 반격에 나서 1949년 10월 공산 반란세력의 항복을 끝났고, 터키도 미국의 원조에 의해 소련의 다다넬즈 해협의 공동관리 요구를 거부했다. 트루먼 독트린의 핵심은 그리스와 터키 사태 그 자체보다도 이것을 계기로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의 방향이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대결의 신호탄이자 미국 측의 첫 승리였으며, 승리의 자신감은 소련 봉쇄를 위한 종합적인 대서방 원조계획인 마샬 플랜으로 이어졌다.(2) 마샬 플랜(유럽부흥계획)전후 유럽의 경제는 회복불능상태였다. 미국은 1947년까지 유엔구호부흥기구(UNRRA),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0 등을 통한 원조, 그리고 영국에 대한 차관과 독일 점령지대를 통한 지출의 방법으로 유럽에만 9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최영보 외 8명 공저, 미국현대외교사(서울 : 비봉출판사, 1998), p. 140.그러나 유럽의 경제는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47년 겨울한파와 식량, 연료 부족사태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공산주의 정권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낳게 하였다. 또한 유럽에서의 심각한 달러 부족은 유럽의 경제 재건뿐만 아니라 미국 경제에도 실질적인 위험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유럽의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미국이 유럽에 대한 종합적인 경제원조 계획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마침내 1947년 6월 5일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하버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유럽의 매우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혼란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유럽에 자유로운 제도들이 존재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상황의 조성을 위한 경제의 부흥 을 촉진하여 한다고 제의했다.{ 정상모, 신냉전구도와 평화(서울 : 도서출판 월간말,에 대해서 CIA를 통해 지원했다. 넷째, 미국은 독일 문제와 같은 주요한 유럽 문제에 대해 소련과의 타협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로 일변하였고, 이는 미국과 소련의 외교적 관계에서의 긴장을 강화시키면서 힘의 대결 구도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미국의 봉쇄정책이 위협으로 다가옴에 따라 소련은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반공산주의 운동의 진압에 나섰고, 헝가리에서는 1947년 5월 비공산주의 지도자 나지를 축출함으로써 반소 움직임을 차단했다. 동유럽 국가들을 위성국가로 만드는 작업이 착수되었다. 미국의 경제적인 위협에 대해서는 1947년 10월 코민포름을 구성했다. 1948년 2월 체코에서 공산화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6월에는 소련과 서방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였다. 미국의 대소련 봉쇄정책과 소련의 이에 대한 반격은 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본격적인 냉전의 대결 시대의 도래와 나아가 그 대결이 심화되는 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 냉전체제의 특징(1) 이념·체제적 특징{연 도미 국소 련서 독프랑스영 국이탈리아일 본중 국194810.913.10.93.40.4194913.51.41.23.10.52.0195014.515.51.42.30.52.5195133.320.12.13.20.73.0195247.821.93.04.30.82.9195349.625.53.44.50.70.32.5195442.728.03.64.40.80.42.5195540.529.51.72.94.30.80.42.5195641.726.71.73.64.50.90.45.5195744.527.62.13.64.30.90.46.2195845.530.21.23.64.41.00.45.8195946.334.42.63.64.41.00.46.6196045.336.92.93.84.61.10.46.7196147.343.63.14.14.71.20.47.9196252.349.94.34.55.01.30.59.3196352.254.74.94.65.21.60.410.6. 실제로 1950~1953년 중 미국의 지상군 규모는 3배로 커졌고, 나토는 공군력에도 엄청난 군사비를 지출하여 1953년에는 약 5,2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또한 스탈린 사망 후 주코프가 대대적인 군대개편에 착수하여 단위부대들을 보다 기동성 있고 치밀하고 강력한 부대로 개편하고 대포를 미사일로 대체하는 등 소련군의 공격작전 능력을 증강시켰으며, 방위예산의 대부분을 방어적·공격적 공군력 증가에 투입했다.{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서울 : 한국경제신문사, 1990), pp. 452 - 453.동·서간의 군비경쟁은 특히 해상에서 그 경쟁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2차 대전에서 각광받는 전투세력으로 인정받았던 해군은 1945년 이후 군사비 삭감과 국방부 통합으로 인해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육·해·공 합동 상륙작전과 항공모함을 기지로 한 공습작전의 재등장으로 서방의 해군력의 민첩한 활용에 대한 재평가 이루어지면서, 해군력의 증강이 이루어졌다. 미국 해군은 거대한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핵무기를 적재한 공습폭격기를 보유하게 되고,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능력을 갖춘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를 추진하였다. 영국 또한 기동성이 뛰어난 특공 항공모함을 보유했고, 프랑스는 잠수함을 기반으로 해상 억지력을 발휘했다. 이 같은 서방 해군력의 지속적인 증강의 가장 큰 자극을 준 것은 소련 해군의 증강이었다. 전통적으로 해군력에서 열세를 보이던 소련은 1960년 제독 코르슈코프에 의한 강력한 해군 육성책에 의해 모든 등급의 군함 - 순양함·구축함·각종 잠수함·혼성 항공모함 등 - 을 대대적으로 증강했으며 또한 해외배치도 확대함으로써 예컨대 지중해나 인동양 등에서 서방의 제해권에 도전하였던 것이다.미·소간 군비경쟁은 1945년 이후 혁명적인 국면을 맞게 된다. 즉, 핵무기와 이를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 분야에서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을 때 소련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소련인들에게 원폭의 사용은 미국의 제국주의가었다.
    사회과학| 2004.02.21| 8페이지| 1,000원| 조회(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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