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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과학 100년 - 우리나라 과학의 역사
    광운대학교 정보제어공학과독서 감상문정보제어공학과우리과학 100년과목명 : 과학문명의 역사학 과 : 정보제어공학과학 번 : 2002731036이 름 : 명 성우제출일 : 2007. 5. 29교수명 : 김 인호 교수님※ 우리 과학 100년을 읽고...“100년” 이라는 시간 혹은 1세기라고도 하는 시간은 우리들 개인 에게는 평생에 해당하는 매우 긴 시간이겠지만, 우리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다. 특히, 유구하게 흘러온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방일영 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한국문화예술총서 시리즈는 분야별 통사 작업의 한 일환으로 제작된 총서이다. 특히 이 책은 1901년부터 2000년까지를 ‘한국 문화 100년’으로 구분하여 문학?음악?미술?건축?과학 등등의 16가지 주제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번에 읽게 된 ‘우리 과학 100년’은 1901년~2000년까지의 한국 과학사를 정리한 책이다.이 시리즈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한 근대 20세기의 문화 예술사. 이 책에서는 왜 길고긴 우리 민족의 역사 중에서 최근 100년간의 문화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을까. 혹시 이전의 다른 시대는 별 볼일 없는 시대 이였기 때문일까?지금 우리는 새로운 21세기에 들어서 새 천년의 초입에 막 들어서 있다. 민족적으로 새로운 역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할 시점에 들어선 것이다. 요즘처럼 빨라지고 가까워진 시대, 국경이 점점 의미를 잃고 있고 우리는 그에 따라 범람하는 각종 외국 문화의 홍수에 빠져 우리의 전통 색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이러한 지금의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된 미래를 위해서는 우린 지난 시대를 냉정하고 되돌아보고 평가해야 한다. 과거는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교훈이기 때문이다.특히, 지난 백년간의 역사는 긍정?부정적인 부분을 떠나 모든 측면에서 깊이 새기고 돌이켜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수난기이자 대 갈등기였고 침체기 이면서 도전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20세기 초의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에 대한 큰 시련이면서 본격적인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위에서 열거한 총서의 다른 분야 - 문학?음악?미술… 등등의 많은 분야들이 있지만 특히 과학 분야에 있어서 최근 100년간의 우리 과학 역사는 민족 반만년의 긴 세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오천년 역사상 지금껏 최근의 한 세기만큼이나 빠르게 그리고 높은 수준으로 과학이 발전한 시기는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17세기를 전후하여 서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우리의 과학이 20세기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시작된 것과는 달리 서양의 전통 과학은 17세기를 전후하여 그 이전과 이후에 질적 양적으로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과학 혁명은 과학을 급속도로 변화 시키며 발전시켜 오늘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서양에서 이렇듯 17~18세기 과학 및 산업혁명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달한 과학과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조선말부터 조금씩 서양식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1900년이라는 시점은 조선왕조가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하여 이즈음의 우리나라는 변변히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것이 없었다. 특히나 이웃 나라인 중국, 일본과는 비교할만한 바탕도 거의 존재 하지 않았다.이렇듯 힘겹게 1897년 대한제국을 반포하고 우리 스스로 서구 문물에 관심을 보이며 도입을 추진했지만 중국 청나라나 일본의 간섭 등이 심해 이런 노력들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다.이렇게 드디어 문호를 열고 본격적으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여러 노력을 시작했지만, 결국 우리민족은 대륙 진출을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제치하에 떨어지고 말게 되었다. 비록 그 시대에 태어나 겪어 보진 않았지만, 우리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사실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이제 막 문호를 개방하고 본격적으로 발전 하려는 나라에게 있어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것은 채 날개를 펴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새와 다름없었을 것이다.특히나 일제의 식민 지배는 서양의 그 어느 열강들보다도 가혹했다. 특히 한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아주 중요한 과학 기술 분야에 관련해서 보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는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고급 학문이라고 할 만한 과학 기술의 발전과 교육을 우리 땅에서 우리민족의 손으로 이루는 것을 냉혹하리만치 철저하게 방해했다.일단의 경제학자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 기간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고 각종 산업 인프라가 생겨 지금의 대한민국이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만 만약 일본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일본이 식민지배 기간 동안 행한 것 중 우리 과학기술의 발전에 가장 치명타가 된 것은 아마 민족 문화 말살정책에 따른 고등 교육의 탄압 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철저히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기위한 보급기지로 활용 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싼값에 전쟁을 위한 가혹한 노동력만을 착취당했을 뿐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여 과학이라는 것은 그저 멀기만 할뿐 이었다.기본적으로 몇몇 곳의 전기?광업?공업학교 들이 존재 하였지만, 대부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고 그곳에서 교육받는 조선인의 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이런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학교를 세워 널리 보급 시키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서 시도 되었다. 본격화된 교육 운동은 조선인이 주체가 되어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운동 초기에는 일제의 고등교육 억제정책으로 인해 턱없이 부족하던 인문계 학교의 설립이 주였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과학기술의 필요성과 시급성에 대해 인식이 퍼지고 점점 과학기술 인력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각종 공업학교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이렇듯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여러 노력들을 통해 조금씩 기반이 다져졌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교육을 이수해도 조선인에게는 더 이상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 있어 발전하기가 힘들었다.이러한 문제점과 한계들은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 이었다. 아마 이러한 문제들은 해방이 된 후에도 과학 기술 발전을 저해 시키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미국의 ‘과학기술의 결정체’ 원자폭탄 투하로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처음으로 우리 스스로 과학 기술 반전을 도모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하지만 과학 기술을 우리 힘으로, 짧은 시간 내에 발전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도 처참하고 열악했기 때문이다. 의욕만 가지고는 극복해 내기에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해방 이후에 한국 과학기술계는 자체 기반이 없었기에 주로 일본유학파가 주축을 이루어 운영해 나갔고, 여러 미국 유학파들도 합세하여 속속 여러 분야에 과학 기술자 단체가 설립 되었다. 또한 대학들에서도 움직임이 활발해져 이공계열의 학과들이 설치되고 운영되기 시작했다.이렇듯 본격적으로 과학기술 인력이 양성되면서 과학 기술자 사회가 형성 되었고 60년대에 들어서 과학기술계는 빠른 성장과 큰 변화를 맞았다. 특히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등장하면서 많은 변화를 맞았는데, 박정희 정권이 군사 쿠데타라는 약점을 안고 있는 만큼 그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967년 드디어 과학기술처가 설립되었다. 과학 기술에 대해 정부가 모든 사항을 관장하고 체계적인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현대에 이르면서 우리나라 현대 과학에 기반이 된 KIST와 KAIS가 설립되었고 추후 KAIST가 통합 설립되고 포항공대 등 한국 현대과학의 요람들이 생겨났다.
    독후감/창작| 2008.05.10| 4페이지| 1,000원| 조회(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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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근현대사 산책 - 1980년대편을 읽고...
    광운대학교 정보제어공학과독서 감상문정보제어공학과한국 현대사 산책 - 1980년대편 1권과목명 : 한국 근현대사학 과 : 정보제어공학과학 번 : 2002731036이 름 : 명 성우제출일 : 2007. 11. 21교수명 : 김 인호 교수님※ 한국 근현대사 산책 - 1980년대편을 읽고...한국 근현대사 수업을 수강하면서 그리고 이 책을 한장씩 읽어 나가면서 스스로 크게 느낀 점이 있다. 바로 책을 보면서 하나씩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나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다는 것 이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그 시기에 이런 사건 들이 정말로 있었다는것이 너무도 믿기지 않았다.왜 이런 사실들을 여지껏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았던 걸까‥?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길다면 꽤 길었던 시간동안 어떤 선생님도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았고 나 자신도 그다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던 일들‥ 지금껏 내 머릿속에 한국의 현대사라는 것들은 5?18민주화운동 4?19학생운동같이 시기도 모르고 이름만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과 박정희?전두환이니 제3?4?5공화국이니 하는 단어들이 대강 두루뭉실하게 머릿속에 섞여 다 같은 시기의 그런저런 일들로만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1940년대편 ~ 1990년대편 까지의 총 18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다.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수많은 자료의 인용들이다. 책을 읽다보면서 그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인용에 놀랐다. 저자 강준만 교수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주장들을 가능한 많이 소개하기 위하여 되도록 많은 인용을 사용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는 불과 10~20여 년 전의 역사이기 때문에 국사 책에서 배운 옛날 고리짝 시절의 사람들이 아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활동 하고 있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직도 많아 논란의 여지가 크다.또 다른 특징으로 저자는 한국 현대사 산책 이라는 부담없는(?) 제목답게 어느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으로 작가의 의견을 쓴 것이 아니라 정치?외교?행정?군사방송?영화 등등 그 시대의 상황을 포괄해 전체 그림을 보여주고자 하여 관심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전반적이고 큰 흐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책을 만들었다.강준만 교수의 18권으로 이루어진 현대사 산책 이 많은 책중에서 내가 고른 책은 바로 1980년대편, 그중에서도 광주 학살과 서울 올림픽이다. 종류별로 18권의 책이 가지런히 정렬된 책장 에서 1980년대편 이라는 제목은 바로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태어난 시기 이면서 하지만 내가 가장 잘 모르는 시대이기 때문에다. 그중에서도 요 몇 년 사이 과거사 진상과 맞물려 한창 이슈가 되었던 광주 학살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소제목은 바로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1980년대편의 제1권은 “제1장 :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 했나?” 의 내용으로 한권이 모두 채워져 있다. 저자는 1980년대를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이라고 하는 두 개의 코드로 전체를 꿰뚫어 보고자 했다.책의 첫머리는 일명 ‘K공작’ 으로부터 시작된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는 명을 달리하고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였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잡고 정권장악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전두환은 어떤 인물인가?일개 육군 소장이었던 전두환은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좋기가 거의 경이에 가까웠다. 그것은 1970년대에 조직한 전두환의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결성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는 장군이 되기 이전인 위관 장교 시절부터 이미 ‘정치군인’의 싹을 보여주었고 그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자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여느 닳고 닳은 정치인들 못지않은 권모술수를 길러왔다. 이러한 ‘정치군인’이 빠르게 진급하고 군부 내에서도 자신의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는 건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나 그 시절 한국 군부가 얼마나 ‘정치화’되어 있었는가를 말해준다.그는 그 뛰어난 정치군인의 면모를 자신이 집권하기 위한 여러 공작으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처음 그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무렵 미국정부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으나의 약점을 잡고 국내에서 뜻대로 되지 않자 직접 워싱턴의 미국 정계에 손을 뻗쳐 각종 로비와 정치자금을 대주기까지 했다.이 책에서 전두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전 국민을 기만하고 속이기 위해 제일 먼저 계획하고 실행한 공작이 바로 ‘언론 통제’이다. 이는 요즈음에도 청와대의 기자실 강제 통폐합이나,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등으로 자주 떠들썩한 문제이기도 하다.미국의 토마스 제퍼슨은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이 말은 ‘국민이 통제하지 않으면 어떤 정부도 계속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언론이 자유롭다면 국민 모두가 자유로이 의견을 제시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음에 있어 정부를 견제하기 되니 만사가 안전할 것이다’ 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 하는 말인 것이다. 언론 없는 정부는 견제하는 것이 없어 모든 정책을 정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고 마는 것이고 국민의 눈과 귀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일인 것이다. 특히나 악랄한 독재자의 출현에는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 보지 않아도 금세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전두환은 평소 “언론을 장악해야 천하를 얻는다”는 소신답게 소위 ‘K공작’ 이라는 대대적인 여론조작을 획책하였다. 이는 12?12쿠데타와 5?16쿠데타 세력의 차이점에서 기인한다. 12?12쿠데타는 박정희 정권의 쿠데타로부터 18년이나 지난시점에서 일어났다. 18년 동안에 유신 체제하에서 많은 변화를 겪은 한국인들이 또다시 겨우 육군 소장이 집권하는 것을 반길리 만무했다. 60년대처럼 전 국민이 절대 빈곤에서 허덕이는 시절도 아니었고 그래서 신군부는 과거와 다른 차원의 치밀한 음모와 공작이 필요했다.특히 ‘하나회’라는 육사출신들로 구성된 그의 사조직은 회장인 전두환 앞에서 서약까지 하며 만약 서약을 어길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다는 선서까지 할 정도로 그에게 충성적 이었고, 그가 저지를 수많은 만행이 가능하게 했던 주역들 이었다.바로 이 조직이 중심이 되어 신군부는 보안사 언론대책반을 통해 3이미지를 확립시키고, 언론계 간부들을 분류하여 협조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한다는 두 가지 작전으로 분류되었다. 이에 따라 보안사는 7대 중앙일간지 5대방송사 2대통신사 논설위원 편집국장등 94명과 지식인들(교수)을 회유대상자로 선정하여 적극 활용하였다. 또한 연일 이어지는 학생시위와 노동쟁의들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3김의 대결양상을 ‘추억한 파벌싸움’으로 몰아가도록 언론을 유도하였다.그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신군부의 계엄 상황과 언론 검열 및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차츰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주요 대학의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시위와 데모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그간 장악한 언론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북한의 남침설을 허위로 유포하고 시위의 주동자들을 모두 사회 혼란을 선동하는 북한의 간첩들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여론을 장악한 신군부에게 그쯤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날그날의 검열 지침을 받은 방송과 신문에서는 학생들의 행위를 미화하는 행동이나 그들의 반공구호 등은 모두 삭제한 채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는 폭력 행위만 매일 보도될 뿐이었다. 이것은 바로 곧 있을 5?17 계엄확대를 정당화 하기 위한 함정이었다.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모두 쥐 죽은 듯 조용해졌지만 광주에서만은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병력을 광주로 내려 보냈다. 이들은 이미 전두환의 사전 조치로 한미연합사의 지휘권에서 빠져나와 있었고, 혹독한 훈련으로 이미 ‘인간폭탄’으로 변해버린 야수들 이었다.5월 17일 오후 광주의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서 공수부대 1천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였다. 계엄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자난 뒤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바로 그 유명한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었다. 5?18민주화 운동에 대한 악화되어 발생한 것일뿐, 마리 강경진압을 계획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그해 5월초부터 시국 수습방안을 모의할 당시부터 국민들의 저항을 예상하고 철저히 계획했던 것이다.이들은 특히 지역정서상 큰 반발이 예상되는 김대중을 계엄확대와 동시에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한 사실을 볼 때 처음부터 광주시민의 저항을 예상하고 강경진압을 계획한 것이다. 5월 18일 오전,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전남대 학생 수 백여명과 무장한 공수대원이 대치하였고 대치하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진압을 명하여 살상용 곤봉을 휘둘러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시내 중심부로 이동하여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위 인원이 늘어나자 이들은 공수특전단을 투입하여 가능한 모든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후려치고 대검으로 등을 쑤시는 잔인한 행위에 주위의 시민들이 항의하자 할아버지 할머니 할것 없이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심지어는 일부러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여고생 할것 없이 여성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 이들은 시민들을 인간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대상으로 보고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얼마나 잔인하였으면 경찰조차도 시민들에게 제발 돌아가라고 애원했을까? 정말 기가 막히고 분통터지는 일이다. 순식간에 온 거리는 피의 강과 울음의 바다가 되어버린 것이다.이들은 붙잡은 사람들을 고문하면서 하나같이 김대중의 지령을 받았다고 강요하거나 관련됨을 강요하여 어떻게 해서든 광주항쟁을 김대중의 내란 음모로 만들려고 철저히 획책하였다. 21일 오전 금남로에는 10만이 넘는 광주 시민이 모였고, 이날 정오까지 시 외곽으로 공수부대를 철수 시키겠다는 약속을 기다리던 중 이들은 시민들에게 애국가를 신호로 발포하기 시작하였고 화염방사기와 헬기 탱크까지 동원해 종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분노한 시민들은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기위해 시내외의 무기고를 탈취하여 시민군을 편성하여 싸우게 된다. 결국 이들은 시외로의 모든 통신수단다.
    독후감/창작| 2008.05.10| 5페이지| 1,000원| 조회(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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