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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인과 인디언
    < 백인과 인디언의 관계 >- 서 론 -미국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지금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미국의 역사를 그들 지배계급의 시각이 아닌 밑에서 억압받는 소수민족의 시각에서 제대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미국역사의 시작을 바로 알아야 하며 그것은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과 북아메리카에 본래 살던 인디언의 만남이었다. 미국은 인디언의 땅에 세운 백인의 나라이며 미국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백인과 인디언의 싸움의 역사다. 백인들의 인디언 토지 뺏기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시작되었고, 미국에 이주한 영국인들이 인디언 땅을 뺏는 활동은 대서양 연안에 제임스타운이라는 마을을 형성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백인들은 폭력수단을 동원하여 인디안의 토지를 수탈하고 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었다.- 본 론 -1. 토지수탈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기1) 발견 독트린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백인들이 인디언의 토지를 뺏으면서 제일 먼저 활용한 이데올로기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는 경제적 부를 얻기 위해 아메리카의 토지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갈등했으며,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법적 조치가 필요하여 만든 것이 발견 독트린이다. 이 독트린은 무엇보다 사람이 살지 않는 토지에 관한 원칙이며, 그 때는 발견자가 그 토지를 소유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는 토지를 ‘발견’했을 때는 원주민의 동의에 근거해서 그 토지를 사거나 원주민과 교역할 권리를 발견자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배타적으로 가진다고 규정했다. 이 주장에도 유럽인들의 우월감이 포함되었다. 원주민들이 자기 토지를 팔고 싶어한다고 가정하고서 원주민이 누구에게 토지를 팔건지 또는 누구와 교역을 할것인지에 관해서 유럽인이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배어있다. 정당한 전쟁에 관한 주장은 “힘센 자가 곧 정의다”라는 주장이며, 발견 독트린이라기보다는 정복 독트린이다. 이 주장은 원주민들이 누구와 용되어 그들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2. 토지수탈에 동원된 수단발견 독트린과 영토 내 종속국가 판례로 인디언땅의 수탈을 정당화하면서 백인들이 실제로 인디언의 토지를 차지하는 데 동원한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조약, 공유지 분할, 강제이주, 대량학살 등이 대표적인 수단이었다.1) 간접 폭력우선 미국이 인디언 토지를 차지하여 영토를 넓히는 데 제일 많이 사용한 정책이 인디언 국가와 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인디언들이 토지를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토지를 신성시하는 전통을 파괴하고 토지를 자본주의식으로 개인이 소유할 상품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디언 개인에게 노동능력에 따라 공유지를 분배하는 것이었다.(1) 조약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가 영국 본토와 싸워서 이긴 결과 미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지만 미국이 국제적으로 정통적인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주요 방법은 유럽 국가들과 조약을 맺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주권을 인정받은 인디언 국가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인디언 땅에 대해 영국이 가졌던 특권을 인계받았지만, 영국 왕이 1763년에 선언한 미국과 인디언의 경계인 애팔레치아 산맥의 서쪽에서 인디언땅을 획득할 때는 인디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국제법적인 의무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미국은 인디언 국가들과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백인들은 남부 인디언들과 조약을 맺는 방법으로 이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맺을 때 인디언 땅을 더 이상 침입하지 않겠다는 백인의 약속인 매번 지켜지지 않았고, 또다시 백인들이 몰려들어 인디언들은 새로운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더 많은 땅을 포기하게 되었다. 19세기가 다 가기도 전에 미국은 인디언과 맺은 거의 모든 조약을 어겼는데 이 조약들은 처음부터 어길 계획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인디언의 군사력이 충분히 약해진 것을 확인하고 인디언 국가는 미국 영토 내의 종속국가라고 말한 의 종속성을 강화했다. 인디언 담당관 레프는 “인디언 토지의 분할은 유럽에서 온 백인이 북아메리카의 패권을 잡는데 마지막 장벽이던 ‘단결된 인디언 대중’의 흔적을 없애버린 강한 엔진‘이다.” 라고 주장했다.인디언 공유지 분할정책은 1934년까지 47년간 실시되어 결국 1887년에 인디언이 보유하던 토지의 약 65%가 백인 손으로 넘어가고 남은 토지는 4천 4800만 에이커밖에 없게 되었다.2) 직접 폭력직접 폭력에는 미시시피강 동쪽에 사는 인디언을 강의 서쪽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정책과 직접 총을 들고 공격하여 인디언을 대량으로 학살한 정책이 포함된다.(1) 강제 이주- 1830년대의 강제 이주미국의 백인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미국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다. 반면에 인디언은 미국의 영토확장정책에 따른 희생 때문에 영토와 인구가 줄어들어서 힘이 상당히 약해졌다. 1803년에 미국이 프랑스에게서 루이지애나 땅을 샀을때 다른 유럽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서방의 불모지로 인디언을 강제 이주시키고 동부의 기름진 땅을 백인이 차지할 공간적인 준비를 하게 되었고 1830년에 인디언 강제이주법이 만들어졌다. 이주 대상으로 체로키, 크릭, 치카소, 촉타우, 세미놀등 남동부에서 좀 잘사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이 먼저 선택되었다. 1831년 조지아 주가 체로키 인디언을 강제로 이주시키려하자 인디언들은 “주정부와 외국 사이의 분쟁은 연방 법원이 다룬다”는 헌법규정의 근거하여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대법원장 마셜은 인디언 국가는 외국이 아니고 미국 영토 내 종속국가이기 때문에 조지아 정부에 대해 연방이 간섭할 수가 없다고 판결하였다. 군대가 인디언들을 한데 모아 강제수용소에 가두어두었다가 적당한 숫자가 되면 총과 칼을 든 군대의 감시 아래 긴 여정을 시작했다.인디언 강제이주 정책은 1855년까지 계속되었다. 강제이주정책은 피해자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강제이주정책의 중요한 결과로 미시시피 강 동쪽의 인디언 땅은 거의 다 백인 손으로 넘어갔고 자기 고향땅에 1800년대 이후 인디언의 생존에 드리운 가장 무서운 위협이 되었다”고 선언했다.(2) 대량 학살미국이 수립될 당시(1780)의 인구가 약 280만 명이었는데 1840년에는 6배가 넘는 1700만이 되었다. 늘어난 인구수에 따라 토지에 대한 압력이 늘어나면서 미국은 인디언들에게서 소유권을 빼앗아 토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조약과 강제이주 정책을 사용했지만 서부지역의 토지는 주로 인디언과 전쟁을 치르면서 획득했다.미국과 인디언은 공식적으로 약 40개의 큰 전투를 치렀는데 1850년부터 약 40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특히 캘리포니아, 남부 오리건, 대평원, 대분지의 인디언 토지를 획득할 때는 장기간에 걸친 전투에서 대량학살이란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대량학살의 대표적인 경우는 1854년 네브래스카의 푸른강에서 약150명, 1864년 콜로라도의 모래개천에서 약250명, 1868년 오클라호마의 와시타 강에서 약300명, 1870년 몬태나의 마리아스강에서 175명 이상을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1890년 사우스다코타의 상처받은 무릎에서 300명 이상을 죽이는 것으로 대량학살 행위는 끝났다.전쟁이외에 인디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데 사용한 방법에는 집단수용소, 민간인 활동, 인디언 박멸정책 등이 있다.첫째, 미국군대는 전체 나바호 인디언을 1864년부터 4년 동안 가두어 인구의 약 절반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갔다. 또 라코타 인디언이 군사적 패배로 집단수용소에 갇혀 미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1877년에 식량공급이 완전히 차단되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둘째, 민간인들이 미국 정부에게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으며 인디언을 학살한 경우가 많았다. 1860년 인디언 머리껍질 하나에 200달러의 현상금을 지불하여 인디언 인구 약 10만에서 1만 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 12만명의 백인이 몰려들게 되자 인디언 죽이기는 일상생활의 한부분이 되었다. 그 결과로 1848년에 금이 발견되기 전에는 15만 명의 인디언이 살던 캘리포니아에 것은 이 제도를 이상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특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사실 미국 노예제는 특수하였다. 19세기 중엽, 남부는 서양 세계에서 브라질과 쿠바를 제외하고 노예제가 남아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으며, 남부의 노예제는 심지어,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의 노예제와도 달랐다. 어떤 다른 단일 요소보다도 노예제라는 독특한 제도 때문에 남부가 미국의 다른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 이 때문에 남북전쟁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던 이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노예제는 백인으로부터 흑인을 고립시켰으며 인종간에 첨예하고 뛰어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을 노예제의 관점인 흑인들에 비추어 알아보도록 하겠다.- 본 론 -1. 노예제도의 시작흑인 노예들이 배에 실려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619년이었다. 그 이후 수년 동안은 흑인 노예의 공급이 별로 많지 않았고, 흑인들과 백인 계약노예노동자들은 백인 주인과 나란히 밭에서 일했었다. 그러다 1690년 많은 농장주들은 해안에 연해 있는 습지에 쌀을 재배하는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쌀을 경작한다는 것은 곧 말라리아 전염병이 빈번하게 찾아드는 높은 기온에서의 힘든 작업을 의미했고 따라서 흑인들에게 백인 감독을 두어서 일을 시킬 수 있다면, 연중무휴, 끊임없는 천편일률적인 벼농사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시점으로부터 흑인들은 점점 더 많이 수입되었고 이런 흑인 노예의 증가는 남부의 플랜테이션 제도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플랜테이션과 일반 농장이 다른 점은, 플랜테이션에서는 한가지의 주요작물, 예를 들어 잎담배?쌀?사탕수수 또는 면화를 전부 팔아치울 목적으로 재배했고, 일반농장에서는 여러 가지의 것들, 예를 들어 밀?옥수수?건초?치즈?돼지고기 등이 생산되어 일부는 판매용, 일부는 가족의 소비용으로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플랜테이션에서는 노동 인원이 많았고, 많을수록 좋았다.남부인들은 유일작물 재배와 흑인노예 노동력의 결합이라는 그들의 특수한 조건에 플랜테이션 제도가 가.
    사회과학| 2008.12.02| 8페이지| 1,500원| 조회(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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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미군과 한반도 평화
    -주한미군과 한반도 평화와 통일-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되자마자 미 국방장관은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 황급히 발표했다. 이에 짝 맞추기라도 하듯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할 것이며 이는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회답했다.이러한 숭미사대주의는 부시정부가 들어선 이후 개최된 한미정상회담 이후 극에 달하였다.다른 한편, 남의 나라에 외국군을 주둔시키든 말든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이지 외국의 일개 국방부장관이 왈가왈부할 성격은 아니라는 반응이 통일세력은 물론이거니와 보수진영에서도 거세게 일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이나 주한미군의 부정적인 측면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논의가 사회 곳곳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6.15공동선언 이후 통일성취시대를 맞아 외세인 미군이 우리땅에서 왜 철수해야 하는지를 통일과 평화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군사,정치적 측면, 인권,생활권, 환경권 등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주한미군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겠다.1. 주한미군 접근법주한미군문제는 군사안보, 주권이나 자주권, 인권, 생활권, 환경권 등의 다차원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5.18광주항쟁 이전까지는 주한미군문제를 군사안보 차원에서만 접근했다.그러나 5.18광주항쟁과 6월항쟁을 거치면서 주한미군에 대한 군사안보 일변도의 접근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5.18광주항쟁에서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군부독재정권의 후견자임이 확연히 입증됨에 따라 미국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중요한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80년대의 ‘북한 바로알기 운동’ 과정에서 북한이 걸어온 민족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역사행로는 당시 남한의 청년세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민족자긍심을 고취시켜 줌으로써 주권 중심의 주한 미군 접근이 시작되었다. 이제 이들에게 주한 미군은 주권과 자주권을 침해하는 결정적 요소로 인식되었다.이어 6월민주항쟁 이후 시민사회가 발전하고 이에따라 시민운동이 활성화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체제 차원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제 주한미군문제는 시민운동 차원의 접근에서 자주와 주권 문재, 평화 및 통일의 문제로 인식되어 본격적으로 총체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2. 주한미군과 군사 안보의 실상북한 무력도발 가능성과 주한미군북한의 무력도발 가능성은 거의 없을뿐더러 구체적인 역사적 실재를 바탕으로 해서 과학적으로 한반도 전쟁위기를 분석하면 한반도 무력도발 가능성은 오히려 미국이 압도적으로 높다 . 이에 대한 논거로는 첫째, 탈냉전을 맞은 90년대 이후만 보더라도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북한보다도 주로 미국과 남한에 의해 조성되었다. 둘째, 과거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북한은 끈질기게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해 왔지만 미국은 전쟁을 제도적으로 막는 장치인 평화협정 체결을 계속 거절하고 있다. 셋째, 바로 뒤에서 확인하겠지만 이미 북한 군사력은 남한의 군사력보다 압도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주한 미군이 없더라도 북한의 무력도발은 그들에게는 자살행위이다. 넷째,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정상회담 이전인 99년6월의 서해교전에서도 북한은 병사들에게 경거망동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여 전투가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남한의 74mm함포에 의해 북한배가 침몰하고 30~50명의 북한 병사가 전사했는데도 옹진반도에 배치된 해안포와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았다. 다섯째,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고조되어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은 완화되었다.이러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보면 북한의 무력도발가능성이 오히려 미국보다 훨씬 낮은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은 물론 많은 일반국민들까지도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종교적인 ‘믿음’아니 일종의 맹신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숭미주의자에 맹목적 믿음에서 벗어나 객관적 실재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 지식에 의해 미국을 평가하는 이성적인 존재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미국과 주한 미군의 문제를 우리 중심적이고도 객관적으로 분석 및 대70억 달러였다. 또 99년의 북한예산은 94억 달러에 불과하고 GNP또한 겨우 160억 달러였다 . 예산의 30%를 군사비로 쓴다 하더라도 북한 군사비는 28억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군사비의 격차는 한두 해가 아니라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한군사력 규모를 쉽게 추정할수 있다.또 북한의 군사력 열세는 남한군부도 명백히 인정하고 있다. 첫째, 북한군은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이며 체격도 매우 작다. 둘째, “북한군은 유류, 탄약등 군수물자를 아끼느라 제대로 훈련을 못하지만 국군은 첨단장비와 무기를 이용한 강도 높은 훈련으로 최강의 전투력을 유지하며 월남전과 걸프전에 참전한 간부들이 이끌고 있다.” 셋째.“북한군의 무기와 장비는 양적으로 국군보다 1.6배 많지만 육군무기의 40%해군함정의 70% 공군전투기의 65%가 폐기처분 직전의 노후장비”라는 것이다. 넷째는 국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다섯째로는 한비연합방위체제를 지적하고 있다.이상의 남한육군의 분석을 보더라도, 대북한 전쟁억제력은 주한미군 없이 남한군사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북한은 오히려 남한의 군사력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실제 남한의 흡수통일 기도를 두려워하면서 끊임없이 경계태세를 갖추고 이었다. 우리가 보다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입장만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도 동시에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균형 잡힌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주한미군의 문제점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미국, 그들의 전쟁에 휘말릴 위험과 주한미군실제로 군사안보 차원에서 주한미군은 전쟁을 억제하기보다 오히려 한반도가 미국 자기들의 전쟁에 휘말릴 위험성을 더 높이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특히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여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주한미군의 존재와 한미연합사에 소속된 우리 국군의 군사편제 및 작전권이 미군에 장악되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중국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고 이는 다시 남북간의 전쟁으로 이어질1998~99년 금창리 핵위기, 2002년 악의 축 전쟁위기 등과 같은 전쟁위협 또는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미군의 한국주둔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들 위기는 미국이 필요 이상으로 조장한 측면이 짙다. 더구나 이제 미국은 미사일방어체제(MD)를 추진하여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압박하면서 긴장고조를 획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한, 그들의 필요에 따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계속되고 평화는 끊임없이 위협받게 된다.군사안보를 위한 주한미군의 필요성이라는 허구소련이 붕괴한 이 시점에서도 북한을 핑계로 미국이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또 통일 이후에도 기어이 주한미군을 유지하려는 속셈은, 바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견제와 봉쇄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주한 미군은 철저히 그들의 세계지배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 때문에 우리가 전쟁에 휘말리는 위협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야 하는가? 군사안보 측면에서 주한 미군은 전쟁억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전쟁위협과 군사적 긴장을 강요하는 물적 토대인 셈이다.3.통일과 주한미군6.15공동선언, 매향리사격장, 한강 독극물투하, 노근리 양민학살 등을 계기로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한 여론이 고조되자,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주한 민군은 계속 주둔할 것이며 이는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미국의 동북아 및 세계 전략과 현재의 미국정책을 본다면, 이러한 주장이 전혀 허구임이 명백해진다.먼저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한 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미국은 주한 미군을 발판으로 해서, 소련이라는 사라진 적 대신 북한을 새로운 적으로 삼고 이를 빌미로 동북아와 세계의 경찰역할을 자임하며 중국과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봉쇄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이러한 구실이 사라지기 때문에 미국은 통일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제를 지향한다하더라도 굳이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한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흡수하는 통일이나 미군이 통일한국에 진주하여 중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하는 통일행로에 대해서는 중국이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역시 비록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중국과 비슷한 입장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일을 위한 주변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도 주한미군은 철수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4.동북아 세력균형과 조정자로서의 주한 미군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친미파들은,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통해 동북아평화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통일후에도 주한미군이 계속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억제하는 역할을 미국이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촉진하며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또 중국과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완전 제압 및, 봉쇄하려 하고 있다. 바로 이동북아 패권전략의 튼튼한 물적 토대가 되는 것이 주한미군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에 동ㅂ구아지역의 세력균형이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동북아 세력균형은 외세인 미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남과 북이 주도하여 조정과 균형을 추진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시민운동의 측면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이들 문제의 근원은 너무나도 불평등한 한미 행정협정에 있다. 미국은 이 불평등한 협정에 대한 우리 정부나 시민사회의 요구를 계속 거절하고 있다.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이 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겠다.첫째는, 형사관할권의 문제이다. 한마디로 이 불평등한 협정 때문에 주한미군이나 그 가족 및 군속 등은 이곳 남한땅에서는 명실공히 봉건시대의 특권귀족인 셈이고 피해를 보는 한국사람은 봉건시대의 농노 정도로 취급당하고 있다. 둘째는 민사청구건문제이다. 곧, 미군이 저지른 공무 중 행위에 대한 배상의 경우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국정부가 배상의 25%를 부담한다. 또 책임소재가 불분명할
    사회과학| 2008.12.02| 5페이지| 1,500원| 조회(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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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정치(하워드진 10개 기준)
    1. 하워드 진의 “민주주의 기준 10개”를 적용하여 미국의 정치제도(입법, 행정, 사법)과 미국의 정치과정(선거, 이익집단)에서 비민주적인 요소를 지적하라.서론하워드 진은 ‘민주적’이라는 서술을 위한 일련의 기준들을 제안했다. 그것은 형식적 정치제도를 넘어서서 사회안에서 생활의 질로 나아가고, 다수결의 원칙을 넘어서서 소수에 대해 배려를 하며,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서,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인민’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 민주주의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로 보는 정확한 관점에서의 세계적 관점으로 확대되는 기준들이다. 하워드 진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10개 기준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그것에는 첫 번째,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느 범위까지 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즉 정치과정과 경제구조에 있어서 그러한 결정들에 참여할 수 있는가? 두 번째, 위의 결과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정보에 대하여 동등하게 접할 수 있는가? 세 번째, 문자 그대로 사회의 구성원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동등하게 보호되는가? 네 번째, 정부와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자유와 각 사람들의 인격을 동등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법 시행제도뿐만 아니라 치안, 법정, 재판과정이 평등한가. 즉 법 앞에 평등한가?다섯 번째, 건강, 삶, 오락, 여가증진을 위한 필수적인 경제적 재화들, 즉 유용자원의 분배에 평등한가? 여섯 번째, 사회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가능한 풍족하게 살아가도록 하고, 그들의 장래성의 범위를 넓히도록 하기 위한 지식과 훈련의 교육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 일곱 번째, 모든 사람에게 사회의 다른 성원들과 모든 문제에 있어서 동등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있는가? 여덟 번째, 사생활, 성관계, 가족관계, 비밀의 권리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가 있는가? 아홉 번째, 법규를 최소로 하고 교육과 일반적인 문화가 위 의 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협동과 우호의 정신을 육성하는가? 열 번째, 마지막 안전한 조치로서, 앞에 세 법안이 검토도 되지 않고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하원의장이 개인적으로 해당법안에 찬성하면 적대적인 분과위원호에 회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분과위원회에서 검토되고 수정된 법안은 다시 본회의로 회부된다. 상원의원은 발언권을 얻어서 계속 발언을 하면 적어도 그 시간에는 표결할 수 없으며, 다른 장소에서 표결을 할 수도 없다. 상원의원은 발언시간에는 반드시 발언을 계속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으므로 상원에서는 이러한 의사방해를 할 수 있다. 의사진행방해로 인해 의회가 폐회되면 그 법안은 다음회기에 처음부터 다시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으로 통과된 법안들만이 서명을 받기위해 대통령에게 전해진다. 결국 최고 결정권을 가진 대통령은 처음 하원의장의 개인적인 반대와 상원에서의 의사진행방해로 인해 사라진 법안들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 평등하게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헌법은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으로써 모든 법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링컨 대통령을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결과에 치우친 견해이다. 이는 법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적 요소에 어긋나는 사실이며 반역으로 의심되는 모든 우편물을 중단시킨 것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에 해당되며, 개인의 자유가 박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의 연봉은 매우 높다. 대통령직에 따르는 여러 가지 혜택에 비추어 보면 막강한 권위와 함께 높은 소득을 누린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은 연봉외에도 판공비와 무료로 좋은 저택과 사무실을 겸비한 백악관에서 생활하면서 여행경비와 막대한 운영비와 예비비를 배정받는다.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제1호기가 항상 대기하며 수십대의 헬기가 기다리고 있다. 퇴직후에도 많은 연금과 과도기금이 100만달러이상 지급된다. 이러한 혜택은 필수적인 경제적 재화, 유용자원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적인 요소에 모순을 가져온다.다른 정치기7년 흑인 최초로 대법관에 마샬이 임명되었고, 그 후임으로 흑인인 토마스가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대법관은 현제 카톨릭과 유태인이 각각 2명씩 있다. 이는 종교적 고려없이 임명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이 임명한 대버관이라고 해도 대통령본래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법원은 선출된 집단이 아니다. 이 기구는 의도적으로 선거정치로부터 격리되고 고립된 집단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고 종신직을 가지면서 삼권분립 하에서 대등한 권한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의회의원의 행위를 무효화한다는 것은 모순이며 비민주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미국의 투표율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신문의 정치를 읽는 것이나, 친구와 정치를 토론하는 것,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 정치인들과 접촉하는 회수, 선거운동을 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서방 민주국가들과 비교할 때 매우 높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투표율이 낮은 이유를 살펴본다면, 무엇보다도 복잡한 미국의 등록제도에 있다. 선거율이 높은 주의 경우에는 등록제도가 비교적 쉽게 되어있으나 그렇지 않은 주들을 선거율이 낮게 나타난다. 미국의 선거에서 선거자금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일부에서는 정치활동위원회가 선거결과에 너무 많은 영향을 준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연방정부는 기업체의 정경유착에 대해서 규제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한 가지 효과를 본 것을 꼽으라면 거래추적이 어려운 현금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입후보자들이 어떻게 모금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감시하고 감독해야할 의회가 로비를 규제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의회가 개혁을 할 의도가 있는가에 있다.이익집단에 의한 정치는 미국정치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익집단이 정치과정에 참가하는 것은 어느 민주국가에서나 있는 일이지만, 미국정치는 거의 전면적으로 이익집단에 전략을 쓰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그들과 견해를 같이하고 그들의 이익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행정부 고위직에 당선시키는 것이다. 이익집단들은 그들의 집단내의 정치활동위원회를 설립하면서 합법적으로 선거자금을 입후보자들에게 지원할 수 있다. 미국정치 자금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익집단들이 많은 만큼 그들 스스로 상반되는 이익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익집단 정치는 분쟁과 갈등을 통해서 타협과 적응의 결과로 공공이익이 나타난다든가 적어도 그것에 가까운 정책이 수립되면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과 마찰만 있고 타협과 적응이 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미국은 이익집단 정치로 인해서 법의 실현은 협상으로 대치되어 버렸다. 주관적인 이익의 존재는 사회질서와 조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자유주의는 계획은 많으나 결단력이 없다. 로이 교수의 말대로 19세기의 자유주의는 계획없는 기준만 있었고, 20세기 자유주의는 기준 없는 계획만 있다. 이익집단 자유주의는 결론적으로 공공철학으로서 민주주의를 부패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결론미국의 민주정치를 살펴본 결과 미국의 정치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우선 미국의 사법제도를 살펴보면 미국은 연방법원과 주 법원과 각기 다른 법의 적용을 허용하고 있다. 이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논리에 모순 된다. 미국의 정치을 말하려면 무엇보다도 이익집단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주고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을 행정부의 수반으로 앉히고 있다. 그리하여 미국의 정치 자체를 자신들의 마음대로 조정하고 있다. 미국의 군수업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의회에 대해 엄청난 양의 자본을 투입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정치행위는 세계무대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북한에 대한 제재 조치는 이러한 미국 국내정치의 확대판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부도덕한 원주의론은 오히려 고전적 민주주의론이 인간사회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비현실적 가정 위에 세워진 비합리적 관점임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처럼 대중에 대한 불신, 그리고 대중의 공동의지에 대한 부정에 바탕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론은 곧 정치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내용 대신에 정치의 과정적 ‘절차’를 중시하고, 대중 자신들을 주체로 보기보다는 대중을 대상화하는 가운데 그들의 표를 얻기 위한 엘리트들간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대중의 실질적인 정치참여보다는 엘리트들간의 결쟁이라는 절차적 성격을 중심으로 정의되었다.반면에 권력엘리트론은 미국사회에 존재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불평등을 수반하거나 그것과 불가분한 함수관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미래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지향은 현재 물리적 힘과 문화적 헤게모니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사회 안에서 권력과 인간의 관계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에 대한 보다 반성적인 비판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본론먼저 다원주의적 이해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자.미국정치에 대한 다원주의론적 설명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첫 번째 요소는 ‘다원적 요소간의 경쟁’ 으로서의 ‘시장’의 질서가 미국 사회의 모든 영역-경제와 정치 포함-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다원주의론적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이다두번째 요소는 모든 인간개개인들의 참여가 보장되지는 않더라도 주요 엘리트간의 다원적 경쟁이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민주주의 질서라는 가치평가, 즉 다원주의는 곧 민주주의‘라는 등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다원주의론은 인간 개개인을 민주정치 참여의 주체로 설정한 고전적인 민주주의론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요건을 상당히 후퇴시킨 것을 의미 한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관점은 미국 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일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데 불가결한 것이다.또, 현대 미국의 다원주의적 정치철학은 사회 상층부의 절대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보다는 해외의 사회주의혁명, 그리고 안으로는한다.
    사회과학| 2008.12.02| 7페이지| 1,500원| 조회(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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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대전 후 자본주의의 세계경제
    1.이차대전후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전개된 역사를 설명하라서론1차 세계대전이 순수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면,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위에 다른 성격을 동시에 띠었다. 2차대전이 갖은 전쟁의 성격은 첫째, 서구 열강간의 제국주의 전쟁 두 번째 이념전쟁 세 번째 피압박 민족에 의한 민족해방전쟁 등이었다.이차대전후 유럽경제는 패전국인 독일, 이탈리아등의 패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승전국인 영국이나 프랑스 등도 그 경제적 지위가 크게 약화 되었다. 오로지 미국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세계경제상의 지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오직 미국만이 전쟁의 이익을 독차지 한 셈이 되었다. 이후 미국은 명실공히 팍스 아메리카의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그럼 지금부터 이차 대전후 미국이 중심이 되었던 세계경제의 전개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본론세계경제는 미국을 제외하고 이차대전으로 말미암아 세계시장의 변동을 가져온다. 그 변화중 하나는 유럽 동구지역의 사회주의화로 인한 시장 축소이고 다른 하나는 수 많은 해외 식민지 시장의 감소이다. 물론 이들 지역이 자본주의 진영과의 경제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특히 식민지 지역의 경우 사회주의화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자본주의 진영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이와 같은 자본주의 시장의 축소에서 오직 미국과 캐나다 많은 공업생산이나 수출 면에서 그 비중이 늘어났다. 나머지 유럽지역은 한결같이 그 시장규모가 크게 수축되었다. 그리하여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유럽에서 북미지역으로 옮겨지게 된다. 미국의 세계경제에서 차지했던 비중은 과거 영국이 가졌던 것 이상으로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그러면 전후 미국 유일의 세계중심지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IMF, GATT의 형성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전후 세계경제의 조속한 복구 및 성장을 위한다는 GATT의 목적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그대로 반영하는 원칙이나 다름없다. 당시의 세계정황과 세계경제 실정으로는 어디까지나 미국 한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그후에 성립된 IMF는 시기이다. 이시기의 세계경제의 특징은 유럽지역에서는 전후의 전재의 여파로 달러 부족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미국의 마샬계획을 받아들여 미국 원조자금에 의하여 비로서 전쟁의 악몽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그 이후 유럽에서는 미국의 자본을 바탕으로 유럽경제는 전반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럽의 경제성장은 동시에 미국경제의 위축을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미국의 수출은 21.9%에서16.4%로 감소한 반면 수출은 약간 늘어났다. 이리하여 1958년경에 미국은 대외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경제의 입장에서 전후 1958년은 미국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제 2기는 1958년부터 71/73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1960년대를 중심으로 하는 이 시기에 전후 세계경제는 그야말로 꽃이 피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계경제는 이시기에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된다. 이시기의 다른 특징이라고 한다면 IMF와GATT의 기능의 큰 축소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세계시장 및 세계경제의 발전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유럽경제의 단합이다. EEC가 결성된 1958년을 기준으로 보면, 10년 후인 1968년세계 총수출은 기간 중 2.2배 증가한 데 대하여 선진국 평균은 2.4배, 그리고 EEC는 2.7배의 성장한다. 이는 EEC체제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경제의 황금기라고 할수 있는 1960년대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베트남전쟁을 들수 있다. 이시기에 미국은 베트남전의 격화와 더불어 군사적 목적에 의한 미국의 대외 달러살포가 더욱 증대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계속적인 달러살포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달러화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로 인해 미국은 달러의 안정을 위해 8개항으로 되어 있는 닉슨 조치를 시행한다. 이후 혼란에 빠졌던 미국금융시장은 1971년12월 스미소니언의 체결을 통하여 기존의 IMF의 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간다. 또한적 정체가 뚜렷해지고, 주변지경제의 분열과 대립, 그 속에서 동아시아 NIEs경제의 등장으로 세계경제가 다극화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제 4기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우선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시작으로 동구 여러 나라들의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동시에 사회주의적 세력들역시 매우 약화된다. 이시기를 세계경제 전개의 제4기의 기점으로 보는 이유는 하나의 전후 이념갈등의 상징물과 같았던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또한 그것의 확인과정이라고 할 말타선언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새로운 세계경제체제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는 여러 가지를 내세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경제의 글로벌화가 심화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속에선 무엇보다도 세계경제의 글로벌화를 위해선 자본의 자유화와 금융의 자유화가 무엇보다도 우선시 될 것이다. 제 4기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기라는 점에서 더욱더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결론전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전개과정을 보면 이차대전이 끝난 직후 에는 미국에 의해 전세계 경제가 움직였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경제의 고도성장과 중동의 오일파동,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는 미국에 있어서는 세계시장에서의 장악력을 약화 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한편 이시기는 전 세계적 경제의 불황시기라고 논할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글로벌 시대의 도래를 예상할 수 있게 했으며, 이러한 예측은 현실화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세계경제는 미국, 일본 중국, EU라는 큰 경제주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급속한 성장이다. 무한한 가능성의 국가인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중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는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역시 지속하여 세계시장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는 정책을 펴 나방콕은 미국 디트로이트의 일부를 흉내내서 자동차 중심지로 나가고자 한다. 타이완의 타이베이는 미국 실리콘 벨리를 닮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 세계가 드디어 하나의 시장이 되었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세계화라고 한다. 하지만 결코 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다. 인류가 매스컴 속에서 느끼는 가까움이나 동시성은 결코 실제의 현실 속에서 문화적인 결속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더더군더나 현실의 지구 전역에서 경제적인 평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이 지구상에 사는 358명의 초특급 부자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지구촌 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25억 명의 전재산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지구의 부가 일부에게 치우친 결과이다. 이러한 현상은 좀 더 잘살게 된 지역이 좀 못사는 이웃 지역 사람들을 내팽개치고, 독립하여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전쟁이 나라와 나라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 안에서 지역과 지역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지구촌 인구 증가의 95%는 모두 가난한 나라들에 집중되어 있다. 때문에 새로운 전쟁이 다시 올 것이라는 판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00년대가 오기 전에 지구상에 제2의 10억대 인구를 가지게 된 인도도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봄베이나 뉴델리는 이미 멕세코시티나 상파울루 같은 남미 도시들보다 월씬 더 자주 신문의 머릿기사로 등장할 정도로 문제성이 많은 곳이다. 뉴델리 행정당국은 위성을 통해 나오는 화면 속에서라야 비로소 자기 도시가 얼마나 빨리 팽창하는지를 알게 된다.현재 우리지구는 크게 두 가지의 서로 대립적인 힘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지구화의 압력과 분열호의 압력이다. 상당히 불안감 속에 부트로스 갈리는 덧붙인다.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혁명적 변화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자신들은 그 혁명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실제로 맞는 말이다.세계에서 최고로 잘사능 곡물량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고 항상적이며 또 단기적이 아니라 매우 장기적이기 때문에 진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매년 세계적으로 2억톤의 곡물이 수출되고 있다. 이중 반은 미국이 수출하고 있다. 앞으로 식량 분야에서도 미국은 세계의 권력을 장악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식량이 정치적인 압력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시장에서 밀 가격 등 곡물 가격이 상승하는 동안 지구 곳곳의 토지는 염분이 많아지거나 침식되고 있으며, 대기오염도 심각해지고 여름 날씨는 너무나 더워서 식물이 도저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정도가 되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오늘날에 와서 모두 잘산다고 하는 영국이나 다른 유럽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반면에 유럽사람들보다 못 산다는 중남미 사람들은 미국으로 들어가고 아프리카사람들은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 하고 있다.결론세계화가 쉽게 생각하면 인류 모두가 공존공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적인 생각이다. 세계의 부가 몇몇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있고 그 부는 일부지역에 편중되어 있다. 이렇듯 세계화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수반되어있는 만큼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빨리 인식하여 그 덫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3.위험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라서론19세기나 오늘날이나 많은 사람들이 파괴로 경험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결과들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사회적 과정과 결합되어 있다. 두 시기 모두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활조건에 대한 급격하고 위협적인 개입에 유의한다. 과거에는 물질적 빈곤화, 빈곤, 굶주림, 인구밀집이 두드러졌다면 오늘날에는 삶의 자연적 기초에 대한 위협과 파괴가 그렇다. 또한 위난의 총량이나 위난을 생산하고 육성하는 근대화의 체계화된 자연과 같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측면들도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저항하기 위해 거리로있다.
    사회과학| 2008.12.02| 7페이지| 1,500원| 조회(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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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역사 -미국 역사속의 인디언
    미국의 역사는 침략과 정복의 역사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그것을 발견이라 일컬으며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꿈과 희망의 땅으로 여기며 수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지만 정작 아메리카 땅에서의 역사는 아메리카의 원래의 주인들은 배제한채 이주민들에 의해 쓰여졌다.미국의 역사는 아메리카 땅에 발을 딛으면서 시작되었지만 아메리카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의 역사는 백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라 본다.아메리칸 인디언의 비극사는 1600년대 초부터 1800년대 말, 근 300여 년 동안 인디언들은 그야말로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북 아메리카 땅은 인디언들의 생활터전이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온 이방인들에게 강제로 터전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인디언들. 땅을 위해 수없이 투쟁했으나, 돌려 받은 것은 속절없는 배신과 죽음뿐이었다.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명분 아닌 명분으로 침략을 일삼고 있는 미국에 대하여 보다 깊이 있는 접근을 위해서는 인디언의 입장에서 미국의 역사를 다시 평가고 침략의 역사 그리고 정복과 전쟁으로 물들은 그들의 역사를 다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과 그리고 현재 인디언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1. 인디언과 백인의 전쟁1) 포카혼타스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를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메리카 원주민 처녀 포카혼타스. 그녀는 아버지 포와탄에게 읍소하여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전쟁을 막은 평화주의자이자이며 첫눈에 반한 백인 청년 존 스미스와의 애절한 사랑에 눈물짓는 로맨스의 여주인공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16세기 아메리카의 역사를 서술한 문헌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 영화는 중요한 역사서 구실을 하고 있다.그녀의 생애는 백인과 인디언의 평화 대신에 비극적인 인디언 멸망사를 예고했다. 포카혼타스는 "두 산 사이에 흐르는 빛나는 였고, '매국노'였다. 포카혼타스와 영국인의 결혼은 새로운 지배자와 토착 지배세력의 결합, 새로운 지배자가 토착 지배세력의 도움을 받아 지배체제를 구축해가는 과정, 토착지배세력이 자신의 종족, 부족을 새로운 지배자에게 팔아먹는 과정이었다. 인디언의 멸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미국에서 인디언의 멸망이 시작된 것은 대서양 연안의 동부지역에 백인이 정착할 때부터였다. 백인들은 인디언 마을에 군대를 파견하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총검으로 찌르고 시체를 난도질했으며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런 만행은 200년 이상 계속되었다. 동부 지역을 장악한 백인들은 이번에는 인디언을 미시시피강 서쪽 지역으로 축출하였다. 미시시피강 서쪽 지역을 인디언 주거지역으로 규정한 법령을 마련하여 미시시피강을 '영원한 인디언 경계선'으로 규정하였다. 서경 95도를 따라 요새를 만들고 군병력을 배치하여, 인디언들이 이 경계선을 넘어 동부로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녹슨 농기구와 씨앗 망태기를 들고 초라한 모습으로 미시시피강을 건넜다. 그것은 눈물의 행렬이었다. 그러나 미시시피강 서부지역으로 내몰린 인디언들은 30년도 안 되어서 또다시 쫓기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산맥에서 금이 발견되자, 벼락부자를 꿈꾸는 백인들이 몰려들었고 인디언 지역에 대륙횡단 철도가 놓였으며, 수많은 광산이 개발되었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백인들은 ‘유럽인들과 그 후손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인디언 소유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차지해야 한다.'는 [명백한 운명]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북전쟁 시작과 거의 동시에 본격적으로 인디언 사냥을 시작하였다. 수많은 인디언이 몰살당하였고, 무참한 학살극이 수없이 반복된 후 1890년 12월말 사우스다코다 주의 운디드니에서의 마지막 학살을 끝으로 인디언 사냥은 막을 내렸다.이렇게 해서 1492년 '신대륙의 발견' 이후 인디언의 사회와 문화가 파괴되기 시작한지 400년 만에 인디언의 역사는 끝이 났다. 원래 주인이던 인디언들은 백인들에 맞게 될 필연적인 결과를 앞당긴 것이었을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청회색 군복을 입은 백인 병사들이 죽도록 싸우고 있을 때 서부에는 30여만 명의 아메리칸 인디언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1812년의 미영 전쟁, 명백한 운명,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의 골드러시 그리고 백인들이 만들어낸 온갖 구실들에 떠밀려 동부와 서부 연안으로부터 안쪽으로 계속 밀려간 사람들이었다. 19세기 초의 인디언 제거 기간 동안 앤드루 잭슨이 약속한 ‘인디언 영구 정착지’는 인디언의 슬픈 역사에 있었던 모든 조약이 그러하듯, 깨진지 이미 오래였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정치인, 투기꾼, 농부, 철도업자, 목축업자들은 전쟁 때문에 중단된 것을 마저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1866년부터 1891년까지 25년 동안 연방군은 상당한 병력과 비용을 지불하면서 인디언 부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마지막 공격은 수우족이 보즈먼 트레일을 열지 않으려 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이 트레일은 몬태나 주의 인디언 영토를 통해 캘리포니아의 금광 지대로 이어진 길이었다. 수우족은 레드 클라우드의 지휘 아래 연방군을 공격하여 연방군이 보즈먼 트레일 변에 세우고 있던 요새들을 파괴했다. 1867년의 조약으로 이 싸움은 이 정도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소규모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내몰린 인디언들이 그곳의 감독관청인 인디언국의 부패를 참다못해 차라리 백인 통치를 받으며 살기를 원한 것이다.이번에도 평화에의 꿈을 깬 것은 역시 금이었다. 사우사다코다 주 블랙힐스에 위치한 인디언 보호 구역을 무단으로 침입한 자들은 커스터와 그 일파였다. 그리고 곧 그 지역으로의 골드러시가 이어졌다. 인디언들은 그 땅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떠나지 않고 싸우기로 결심했다. 수우족은 샤이안족과 합세하여 몬태나 남부의 리틀빅혼 강 유역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1876년 여름 커스터는 공격을 삼가라는 특별 명령을 어기고 2천에서 4천 명 정도의 인디언들이 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는 경고도 무시한 채, 25파이우트족 인디언이 ‘유령의 춤’이라는 일종의 종교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의 신도들은 세상에 곧 종말이 닥칠 것이고, 그렇게 망한 세상은 죽은 인디언을 포함한 인디언들이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우보카는 인디언들의 화합을 역설하면서 백인과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술을 배격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유령의 춤이라는 이름은, 미래의 인디언 천국이 펼쳐진다는 광란의 춤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 종교 운동은 재빨리 뿌리를 내리며 대초원 지대, 남서부 지역과 극서부 지역 인디언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러던 중 두 명의 수우족 주술사가 춤꾼들이 입는 ‘유령 옷’으로 백인의 총알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 말을 듣고 인디언들의 전투 열기가 새롭게 솟구쳤던 것이다.유령의 춤꾼들에게 깜짝 놀란 연방군은 인디언 추장들을 체로하려고 했다. 그 중에는 유령의 춤 운동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버펄로 마을의 서부개척 쇼 공연에 참가한 뒤로는 인디언 보호 구역에 살고 있던 대추장 시팅 불도 있었다. 연방 정부에 고용된 인디언 보안대는 시팅 불의 영향력에 겁을 잔뜩 먹은 채로 그를 잡으러 나섰다. 1890년 12월 15일, 시팅 불은 자신을 생포하러 온 인디언 보안대와 난투를 벌이다 살해되었다.빅 푸트라는 이름의 또 다른 추장도 연방군의 추격을 받았다. 폐렴으로 죽어가던 그는 평화를 원했다. 하지만 1890년 크리스마스 사흘 후에 부녀자를 포함한 300여 명의 빅 푸트 부족은 연방 순찰대에 발각되어 사우스다코다 주 파인리지 보호 구역에 있는 운디드니 야영지로 보내졌다. 1890년 12월 29일, 인디언들이 연방군에 무기를 넘기려는 찰라, 블랙 코요테라는 이름의 귀머거리 인디언이 총을 발사했다. 그것이 사고였는지 고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여튼 병사들은 순간 겁에 질려 무장해체당한 인디언들을 향해 대포와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150명의 인디언을 비롯해 모두 합쳐 300여명이 집중포화를 받고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운디드니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인디언 구역들이 부족원들에게 분할되거나 백인에게 팔렸다.1960년대 이후 인디언들의 저항은 본격화된다. 특히 무력 저항 운동이 정점에 이르게 된다. 1969년에는 인디언들이 알카트래즈 감옥을 점거하였고, 1972년에는 워싱턴에 있던 내무성 인디언 행정 정책국을 점거하고 인디언 정책의 재고와 생존권 보장을 주장했다.인디언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주의적 시각이 미국 정부 내에서 힘을 얻으면서 인디언 정책은 전향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언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지원이 많이 늘었으며, 교육, 의료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름만 남아 있던 인디언의 자치권이 공식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현재 미국 내 인디언들은 상당 수준 자치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 집단들과 구별된다. 미국 연방 정부의 인디언 지원 프로그램은 인디언 부족에 의해 대리 운영된다. 즉 교육, 의료, 주거, 복지 문제와 관련된 행정의 처리가 인디언 부족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디언의 조직은 세금을 부과하거나 규칙을 제정할 수도 있다. 인디언 구역 내에서의 사법권도 인정되는데 살인, 절도, 방화 같은 범죄가 인디언 대표 조직이 관할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물론 인디언의 자치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법률이 허용하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분명히 인디언들의 삶의 질을 확보하고 자긍심이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80년 140만 명이었던 인디언 인구가 1990년 현재 19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실제로 인구가 증가했다기보다는 인디언의 자긍심이 높아져 인구 조사 과정에서 인디언임을 밝히는 빈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빈곤하고 실업률이 높은 종족으로 남아있다.현재 미국에는 약 500개의 부족이 278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만이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농사나 목축, 고기잡이를 하면서 생활하고다.
    인문/어학| 2008.12.02| 8페이지| 1,500원| 조회(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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