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루소가 교육실천의 대상으로 정했던 에밀이 라는 남자아이의 사춘기 시기이며, 교육의 정점을 이루는 단계이다. 종교와 도덕과 사회가 교육의 주된 내용이 되는 때이며, 우선 이성에 대한 정념에 일찍 사로잡히지 않도록, 아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거나 상상력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정, 호의, 연민 등 인간들을 어울려 살 수 있게 하는 정념들을 가꾸어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이성에 대한 정념에 사로잡히는 때가 되면, 교육자는 그를 이젠 성인 남자로 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사랑의 욕구를 억누르게 하지 말고 친구 같은 안내자 역할을 하여 어떤 여인이 이상적인 반려인지를 이야기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기는 종교적, 도덕적 감성의 성숙의 시기이며 감정에 따라 이성을 완성하는 시기이며, 우정과 동정 등의 인간적 감정이 생기며, 성의 의식이 깊어지고 종교에 의하여 영혼의 교육이 완성되는 시기이다. 루소는 이시기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신체적인 변화의 예를 들어 제 2의 탄생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간의 진정한 삶이 시작되며 이 후는 인간의 욕정도 모르는 것이 없고 보통 교육이 끝나는 이 시기야말로 정말 교육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를 하면서, 감정에 따라 이성을 완성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역사적 인물 묘사는 실제적이기 때문에 역사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의 발달과 분포에 대한 일반적인 종교 사실에 대해 교육받아야 하며 대도시의 사회에 입문하여 문학과 연극 등을 통해 좋은 취향을 가꾸어야 하고, 여행을 통해 외국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사회 자체에 대해 심화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또한 이 시기에는 사회나 정치학, 통치의 문제 등에 이전보다 더 강조를 둔다.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 본성은 선하나 인간의 손에 의하여 더렵혀졌으니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간의 진정한 삶이 시작되며 이 후는 인간의 욕정도 모르는 것이 없고 보통 교육이 끝나는 이 시기야말로 정말 교육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를 하였다. 청년이 인간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기 전에는 세상을 보지 않는 것이 좋음을 말하면서 마음의 집중과 인간 자아의 힘을 강요하는 대상을 주의해서 멀리해야할 것을 제시하였다. 제5권은 교육자의 도움으로 에밀이 이상적인 반려인 소피아를 만나 두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하게되는 이야기인데, 기실 권에서 더 큰 비중이 주어져 있는 것은 여성교육의 문제인 듯 하다. 그런데 인간들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는 루소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배적이던 여성열등이념의 영향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여, 지금의 여권 운동자들이 본다면 대단히 놀랄 주장들을 말한 부분이 많은 듯 하다. 이렇게 다섯 단계로 정리하고 생각해 보았을 때 교육 이념은 교육은 아동의 본성, 즉 그의 천부적인 성품에 따라야 하며, 그래서 교육은 성장이며 자연적인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과 교육은 우선 아동을 향해야 하고 우리의 가르침은 아동의 요구에 적응해야 하며 모든 단계 모든 수준에 걸쳐 아동의 정신에 대해 철저한 이해를 하여야 함으로 교육은 아동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 교육은 필요한 학문이나 자유와 구속이 완전히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교육은 아동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것이여야 한다는 것과 네 번째로 아동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함으로써 배우고 즉 직접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함으로 교육은 경험을 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루소의 교육방법은 자연상태의 인간의 무구함을 이지러뜨리지 않으면서 그 인간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을 도약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따른다는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처음 얼마간을 읽으며 가진 첫 느낌은 지금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며 어렸을 때 만화로 보던 삼국지와 학생시절 다이제스트 식으로 된 삼국지만 읽고는 삼국지를 다 아는 척 했던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진작에 제대로 된 것을 읽지 않은데 대한 후회감이었다.20대 초반에 성서를 만나 한달 여에 걸쳐 신구약을 완독 할 때 느꼈던 그 감동에 버금가는 새로운 깨달음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안목을 키워 주기에 넉넉한 책이었다. 더군다나 지난 20년 동안 성서와 기독교 문화가 내게 서양적인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소홀히 여겨져 온, 동양적인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처세술이랄까 하는 면에 대해 이 삼국지는 전혀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동양에 살면서 동양사람들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나름대로의 의식을 무시하고 서양적 합리주의만을 인간관계의 기초로 삼으려 애써왔던 내 모습을 발견하며 많은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동양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으로써의 기독교 신앙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진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얻음이었다.다만, 여전히 동양인들의 일반적 로 의식화되어 버린 듯한 한가지 특징만은 아직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삼국지에 등장한 거의 모든 인물들이 - 관운장은 그 중 덜하다 - 상대를 교묘히 속이는 소위 을 밥먹듯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것에 대해 거의 죄의식이 없으며 당연한 하나의 로서 받아 드려 지고 있다. 물론 삼국지가 쓰여진 시대 상황이 이었고, 전쟁 속에서의 논리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혹은 내가 아직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할지라도 오늘날까지 우리의 사회에서 끝없이 나타나는 권모술수와 중상모략, 그로 말미암는 비능률적 낭비들이 이러한 동양인들의 공통적 의식에서 나오는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참으로 두렵다. 현대에 와서 동양이 서양에 여러모로 뒤지고 있는 현상이 혹 이러한 부분 때문은 아닌지 의심이 일어나며,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심정이다.물론 의 저자가 갖는 시각은 좀 다른 듯하다. 유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그만이 갖고 있는 '지독하게 미련스러울 정도'의 정직성, 즉 무계책의 처세술을 높이 산 시각이라 본다. 중국사람들이 거의 신처럼 떠받들고 있다는 관공, 즉 관운장 역시 그러한 면에서 오히려 유비보다 더 심할 정도이고 보면 조조로 대표되는 다른 모든 영웅들이 갖는 그 영특함보다는 유비와 관운장의 미련스러움과 정직함이 더 가치가 있음을 전혀 부인하진 않는 듯 싶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평역(評譯)을 시도한 작가 (이문열)의 새로운 시각이다. 물론 조심스럽게 그리고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는 흔적은 있으나 여러 차례 반복해서 "유비는 선이고 조조는 악이다"라는 전통적 시각에 대한 도전을 끈질기게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시대의 거센 흐름, 이를테면 갈수록 거세지는 생존경쟁, 복잡 다원화되어 가는 각박한 세태 때문에 우리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선악의 기준조차도 상황에 의해 상대화해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는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여기면서도 여전히 한편으론 저항하고픈 마음이다. 정직하게 살고 싶다. 그 정직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기준을 지닌 교활한 정직이 아닌, 바보처럼, 미련퉁이처럼 보이는 그런 정직으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옛적 이 땅에 살았던 '미련둥이' 유비와 관운장이 그리워진다. (옆의 그림은 유비임) 더불어 삼국지를 통해 배운 또 하나는 끈질김이다. 흔히 은근과 끈기로 표현되기도 하는 우리 민족의 특질과 같은 것이리라. 제갈 공명이 남만을 정복하기 위해 우두머리를 자그마치 7번이나 사로잡았다가 도로 놓아주는 장면에서, 그리고 그 유명한 출사표를 후주(유비의 아들로 촉의 황제)에게 제출한 이래 매번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결국 전쟁터에서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위를 공격하는 모습에서 거의 질릴 정도의 끈질김을 배운다.정직과 끈질김, 이 두 가지는 두고두고 내 가슴에 남겨두고 싶은, 삼국지가 준 선물이다.마지막으로 유비와 조조를 단적으로 비교해 놓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놓고 싶다. 정말 평생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은 부분이다.조조의 독백(얻는 자와 사는 자)나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해 제도를 고치고 세금을 덜었다. 무언가 베풀려고 애쓰고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백성들은 고마워할지언정 나를 좋아하고 따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사려(買)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오랜 경험으로써 결국 그러한 사고 팔기에서 보다 큰 이득을 보는 것은 사려고 애쓰는 쪽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유비는 다르다. 나는 한번도 그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백성들에게 베풀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제도를 고쳐 백성들을 편하게 할 만한 안목도, 세금을 줄여 그들의 짐을 덜어 줄 만한 재력도 없었다. 그가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껏 원래보다 더 나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이다. 오히려 부양을 받고 도움을 입는 것은 언제나 그 쪽이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 그는 민심을 사는 게 아니라 얻고 있다...
백범일지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리. 그 울음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하겠고, 나라를 잃은 식민지 젊은이의 울분 때문이기도 하겠다. 또한 울음은 삶의 여러 군데에서 갖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수많은 괴로움을 만나게 되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어찌 거기에 울음이 없겠는가. 또한 그렇게 헤어졌던 사람과 만나게 되면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흐득흐득 목놓아 울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울음 따위가 점차 드물게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할머니가 옛일을 떠올리면서 마른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을 보면 ‘아, 이 세상에 아직도 눈물이 있구나’하고 새삼 눈여겨보게 된다.눈물은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낡은 것이 아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도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지 않아서인지, 젊은 날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달이 휘영청 밝다는 것만으로도 새벽녘까지 운 적이 있었다.나는 누워서 읽다가 의자로 옮겨서 읽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속의 허무와 교만이 조금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허리를 곧추세워 읽어갔다. 그러다가 한참씩 책에서 눈을 떼었다. 어린 시절의 일이 가끔 서늘한 찬바람처럼 떠올랐다.『백범일지』 하권은 상권을 쓴 지 14년 만에 쓰여졌다.예로부터 아득히 먼 파촉(巴蜀)의 파(巴)가 바로 중경이었다. 그곳의 망명생활과 독립운동 끝 무렵에 쓸 때의 감회를 “이 붓을 드니 53세 때, 상해 법조계 마당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다.”라고 술회하고 있다.그때, 그의 나이 67세.이윽고 김구선생이 한국 광복군을 정식으로 조직하고, 서안에 총사령부를 두어 일제 식민지로 된 조국으로 무장 침투할 작전을 세워놓자마자 일제가 항복하였다. 그러자 민족의 자력으로 한번 싸워보지 못한 채 해방된 조국에 대해서 선생은 그 기쁨과는 다른 원통함을 느꼈다.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3·1운동 이후의 상해 시대의 정파 분열과 좌우갈등 그리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 지휘를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김구선생은 윤봉길 의사와 서로 시계를 바꾸고 헤어졌다. 선생의 마지막 말은“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였다. 그 길로 윤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일제 요인을 폭살하는 의거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김구선생은 60만원 현상 수배인물이 되어 더 이상 상해에서 숨어 있을 수 없어서 중국인으로 위장해서 숨어 다니다가 끝내 머나먼 중경에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새삼 한민족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오늘날을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 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이제까지 민족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가지 않는가. 주자(朱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건너온 어머니와 9년 만에 합류할 때도 그는 다시 어머니의 깊은 심증을 발견한다.“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그는 이 말에 무척 감동했다.또한 어머니가, 아들의 동지들과 청년들이 당신의 생일 축하연을 차리려는 것을 눈치채고, 생일잔치에 쓸 돈을 주면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사먹겠다 해서 그 준비금을 받아내다가, 그 돈으로 권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전쟁에 쓰라고 내놓은 일에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중경 생활 이후의 조국에 돌아와서 보낸 1,2년 간의 일도 덧붙여서 하권을 마무리하고 있다.여기서 『백범일지』 속의 여러 곳에서 만나는 그 감동을 하나하나 다 나열할 순 없지만 이상 몇 가지 일만으로도 나는 김구선생의 인격·인간성·애국심 그리고 그 견실성이야말로 우리가 이어 본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확신한다.
미래의 충격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미래의 충격’으로 인류에 ‘충격’을 준 것은 32년 전인 1968년의 일이다. 토플러는 두 번째 저서인 '제3의 물결’에서 세계 재건축의 원자재를‘정보’라 명명하면서 1970년대 세계 문명의 기초 설계도를 만들어냈다. 이제 21세기의 벽두에 토플러는 ‘제3의 슈퍼문명’이라는 화두를 꺼내들었다.제3의 슈퍼문명의 실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권력 이동’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고전적인 ‘지식’의 개념은 더구나 아니다. 1993년 토플러가 ‘전쟁과 반(反) 전쟁’을 선보일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불과 몇년 뒤 제3의 슈퍼문명이 갖게 될 가공할 만한 스피드와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간파하지 못했다.토플러가 말하는 제3의 슈퍼문명은 제1, 제2의 슈퍼문명이었던 농업문명과 공업문명 모두를 위협한다. 이 새로운 문명에 대해 토플러는 명확한 이름 붙이기를 주저한다. 전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의 급물살이 아직 정형화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제3의 문명의 실체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피부로 느낄 수 있다.우선 이 제3의 문명은 지구상의 수십억 인구에게 소통의 힘을 부여했다. 농업문명과 공업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 소통의 힘이 인류를 한데 묶는다. 물건을 사는 것이든 파는 것이든,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도 제3의 문명권의 인류는 같이 힘을 모아 저항한다. 지난해 말 미 시애틀의 WTO 반대 데모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인종, 종교, 국적, 언어, 문화의 장벽이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위력 앞에 시애틀에서 무릎을 꿇었다.인류 소통의 힘은 새로운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창출해내기도 하며, 테러를 조직화하고, 화생방 무기 제조법을 한 순간에 전세계에 전파시킨다.이 문명의 거주자들은 또한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진다. 거리는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고, 농업문명권이든 공업문명권이든 과거 두 개의 슈퍼문명권과도 거리낌없이 서로 소통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메일이라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소통의 수단이다. 시애틀의 반WTO 시민운동을 가능케 한 것도, 반지뢰 시민운동가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긴 것도 이메일이라는 소통수단이었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예측 가능한 것은 이 새로운 삶의 형태가 지금까지 인류가 겪지 못했던 최대의 속도로 새로운 문명을 전세계에 전파시키리라는 막연한 추측뿐이다. 무역은 이제 양국간의 단순 거래가 아니며, 해외 직접 투자의 추세는 일반화되어 버렸고, 인터넷은 새로운 문명의 실마리이자 핵심이고 또한 미래다.미래학자는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이 아니다. 미래학자는 현재를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어간다.이 거대한 변화는 전세계를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처넣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슈퍼문명의 갈등 요인이 바로 이 폭력의 잠재력이다.문명은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휘감는다. 지금까지 인류는 두 개의 슈퍼문명을 겪었다.첫 번째의 슈퍼문명은 800만년 전 농업기술의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농부들의 노동력이 이 문명의 뼈대였다. 잉여농산물이 마을을 형성시켰고 노동의 구획을 정했으며, 나라를 탄생시켰다. 힘겨운 육체노동, 계절에 따른 반복, 산발적인 기근, 가부장제와 최소한의 교육, 짧은 수명 등이 농업문명권의 특징이었다. 제3의 슈퍼문명에서는 이런 현상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육체노동은 재산 획득을 보장하기보다는 상대적인 빈곤을 부추길 뿐이며, 인터넷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이 수입의 유일한 창구도 아닐 뿐더러 짧은 수명은커녕 고령화가 골칫거리가 되었다.제1 농업문명의 지역적 기반은 지난 2, 3세기 동안에 도시로 이동했다. 이후 개발국이라는 이름은 농업국이 아닌 공업개발국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대중 교육과 매스 미디어가 삶의 터전을 새로 일구어냈다. 이 제2의 공업문명은 크게는 대의 민주주의와 국가 단위의 시장을 형성시켰고, 작게는 조립 라인과 핵가족을 탄생시켰다. 언어와 나라, 문화와 종교 등 기존의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제1의 공업문명과 농업문명의 갈등은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부와 권력을 뽑아내던 전통적인 엘리트와 이들의 이익에 도전하는 공업 문명권 엘리트들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 갈등과 충돌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유럽연합의 경우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의 하나는 유럽연합 전체 예산의 50%를 차지하는 농업보조금 문제다. 제조업, 정보 기술, 과학 연구에 몰두하는 공업 문명권 엘리트들이 호시탐탐 이 돈을 노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뇌내 혁명뇌내혁명이란 책은 한마디로 긍정적인 사고가 모든 것에 우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를 들자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크게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육체처럼 스스로 안정한 상태를 좇아가는 것도 없다. 한 생명체의 생체 메카니즘은 너무나도 완벽해서 좀처럼 허트러지기 쉽지 않다. 신체가 지극히 몸에 해로운 것과 접촉하지 않는 한 우리의 몸은 거의 언제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뇌내혁명"이란 책을 읽고나서 정신에서의 나 나름대로의 건강이라는 개념을 잡게 되었다. 그 책의 주된 골자는 긍정적인 사고는 인체에 좋은 호르몬을 분비함으로써 우리의 신체를 건강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처럼 부정적인 것도 없다. 우리는 항상 비관적인 사고를 먼저 하기 일쑤다. 그래서 항상 근심과 불안 속의 인생이 주를 이룬다. 나는 육체가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정신에 있어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의 소유자의 의지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관의 요지가 바로 그 의지를 지닌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뇌내 혁명이란 책에서 주장한 바를 따른다면, 조물주가 우리 인간이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고 만드신 것이 맞다면 우리는 필히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만 한다고 본다. 이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서도 많은 수긍이 간다. 하루종일 누군가를 증오하는 감정을 가진 하루는 그날 저녁, 몸이 매우 피곤해지고 컨디션이 아주 나빠진다. 그러나 하루종일 진심으로 웃고 즐거웠던 일들이 많으면 그날은 왠지 모르게 상쾌하다. 나는 이제 그런 날이 있으면 "당연히 기분이 좋으니 그런 게 아니겠어" 하고 생각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고들의 물리화학적인 작용에 의한 우리 신체의 건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추상적인 얘기를 하면서 과학의 원리를 끌어와서 답을 찾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사고 그 자체가 복잡한 우리 뇌의 화학반응에 의한 것이듯이 어려운 정신적 성찰의 결론도 역시 과학적인 근거처럼 구체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흔히,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람을 대하면 타협주의자라고 하기 쉽다. 어떤 환경에서도 "좋다" 그러니 당연한 소리다. 하지만 이것은 긍정주의자에 대한 오해다. 낙관론자는 타협주의자이고 비관론자는 개혁자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가령, 예를 든다면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은 낙관론자들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분명 그들은 그 당시 처한 환경에 대해서 강한 적개심을 가졌지만 그들의 독립운동활동을 함에 있어서까지 비관적인 생각만 했다 말할 순 없다. 그들은 좀 더 나은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는 강한 믿음과 확신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것이 긍정적인 사고의 힘이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