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근 (1931~1986)미국의 「타임」지에서 한국의 가장 경탄할 만한 훌륭한 건축가 라고 평하기도 했던 건축가 김수근은 건축은 예술 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연 대가이다.김중업과 함께 한국현대 건축의 1세대로 평가되는 김수근은, 경기중 2학년때 영어회화를 가르쳤던 미군병사의 영향으로 건축에 눈을 뜨게 된다. 그 뒤, 일본말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명암을 알기 위해 아버지를 졸라 거금을 주고 산 라이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수학 공부에 몰입했다. 그때부터 건축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소로서의 예술 전반과 인문학에 대한 폭 넓은 이해가 싹텄던 것이다. 그리고, 6.25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4월 그는 공부를 위해 서울대 건축과 2학년을 중퇴하고 돌연 일본으로 밀항, 도쿄(東京)예대 건축과와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했다.60년 일본인 아내 야지마 미치코(矢島道子)와 함께 귀국한 그는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 단번에 주목 받는 건축가로 떠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주식회사 공간연구소의 전신인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창설했다. 그 후, 워커힐 힐탑바(61년), 부여박물관(67년), 오사카(大阪) 엑스포 한국관(70년), 건축사무소「공간」사옥(71년), 잠실 올림픽주경기장(77년) 등 걸작들을 창조해냈다. 또한, 국립부여박물관(1967)에서는 전통문제를 야기, 건축이 사회문제의 한 장르가 되는 부수적 효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그의 건축 활동은 1966년 월간잡지 을 창간하면서 예술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불모지였던 건축언론 창달에도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 작품의 하나인 공간사옥(1977)과 마산성당(1979) 등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을 설계하여 세계적인 건축가로서 부각되었고, 해외언론매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그의 영역은 해외로 확대되어 일본·미국·이란·수단·인도·카타르·말레이시아에 까지 작품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이즈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서울올림픽대회 시설의 중요 시설들도 설계하였다.그는 한국 전통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우러러 보았다.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던 우리 전통의 흐름을 서구 건축문화와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70년대에 이르러 한국건축이 가지는 공간과 조형의 본질적인 멋인 인본주의적, 자연주의적 건축언어를 만들어내었다.한국 현대건축의 효시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수근은 1986년 6월 서울대학 병원에서 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한국 건축계에 큰 별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 이었다..주요 작품-1960년대 : 「 조형의지의 진솔한 표현시대 」라 할 수 있는 이 시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힐탑바(61), 자유센타(63), 타워호텔(64), 부여박물관(67)KIST본관(67), MBC건물(67), HAPPY HALL(69) 등이 있다. 특히 힐탑바, 타워호텔의 대담한 구조적 형태표현과 분명한 조형미는 그 시절, 젊은 건축가가 국내 건축계에 던지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건축가 자신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을 획득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또한 부여박물관으로 인한 전통성 시비 여부는 아직도 우리곁에 남아있는 토론의 한 대상이며 전통계승의 건축적 숙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으로, 그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1970년대 : 「 조형의지의 완숙미와 자기어휘 」에의 고집이 뚜렷했던 시기로 해석된다. 70년대초 공간사옥 (71)을 필두로 서울대 예술관(74), 덕성여자대학 캠퍼스(76), 마산성당(77), 문예회관(77), 샘터사옥(77), 해외개발공사(77)등으로 이어지는 작품행로 위에 건축적 어휘에의 자기정립은 물론, 작품의 성격을 틀 잡은 건축 활동의 가장 중심지대가 되어지고 있다. 특히 공간사옥이 주는 이미지와 그가 확보한 건축적 위치는 바로 건축가 자신의 품위와 공간감, 건축적 자기철학을 세심히 대변하고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곳은 그분의 작품 활동의 생산무대였고, 이 같은 공간의 품속으로 많은 건축에의 열망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며, 끊임없이 밤낮을 밝힌 이 작업공간을 기억하는 많은 후자들이 꾸준히 서로의 교류를 계속하고 있는 일면 또한, 그 분이 남긴 교육적 큰 영향과 연결 지어 생각지 않을 수 없다.-1980년대 : 1980년대 초에서 현재에 이르는 작업 속에서는 70년대의 기본어휘와 그 범위를 확대 수용해 가는 암시적 몇몇 작품이 돋보이고 있다. 공릉사옥(85) 및 국민은행 전산본부(81), 법원청사(85), 뉴 자이안트 호텔(85)등 일연의 대규모 건축계획 속에서 70년대의 두터운 어휘를 깨는 새로운 기법들이 엿보이고 있다..김수근의 건축 특성한국의 건축은 사용자나 거주자를 기준으로, 그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적절한 공간의 크기와 휴먼 스케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비단 평면적인 넓이나 길이만의 문제가 아니고, 건물을 바라보거나 거리를 이동하는 것 과 같은 모든 건축적 체험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의 실존성과 장소성이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한국건축은 의도된 작위성에 의해 그 속에 있는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공간 내에서 다양한 해프닝과 놀이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기능적인 것과는 다른 창조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다.김수근은 이것을 '사이', '멋'이란 바로 이 여유로움, 즉 넉넉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런 멋'이 한국의 전통건축 에서 대청이나 누마루, 그리고 사랑방이 가지는 공간적 특징에서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곳은 각 단위 공간들을 매개하는 여유로운 공간이고 또한 다양한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으로 보고, 자신의 건축에 이런 요소들을 적용한다. 그리고 공간과 형태구성에 있어서 인간적 척도를 매우 중요한 요소를 받아들여, 그의 건축의 중심과제로 삼는다. 건축조형에 있어서 그를 계속해서 지배했던 이미지는 강한 선적인 요소였다.김중업이 한옥의 지붕이주는 양감에 집착한 반면, 김수근은 유년시절 북촌의 한옥이 그에게 준 강한 선으로 분절된 선적 이미지에 집착한다. 이것은 그의 조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구 국립부여박물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위치한 국립 박물관으로 총 면적은 2만1772㎡이다. 1929년 설립된 부여고적보존회를 모체로 하여 부여의 백제 고적 및 유물을 영구히 보존하고 사회에 널리 소개할 목적으로 발족하였다. 당시에는 조선시대 부여현 관아건물이었던 부여객사에 유물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으로 되면서 홍사준이 초대분관장으로 부임하고,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박물관으로서 본격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6·25 사변중에도 박물관의 시설 및 유물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1965년 정부의 문화기관 확충계획에 따라 현대식 진열실과 관리시설을 갖춘 신관 신축공사를 기공, 1971년 9월 1일 개관하였다. 이어 1975년에는 지방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 - 1969){- 1919년 독일에서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여 건축과 디자인에 기능주의 혁명을 불러 온 선구자- 그로피우스는 일찍이 러스킨과 모리스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것을 바우하우스 교육에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과 같이 기계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고 기계에 의해서 성립되는 현대산업을 인정하고 산업과 예술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다양성을 통한 통일: 단순한 박스의 분절을 통한 근대적 디자인의 대원칙 제창- 건축은 광범위한 종합예술: 건축가들의 협동뿐만 아니라 건축에 관련된 모든 분야(회화, 조형물 등)를 개입시킴- 베를린의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A.E.G라는 전기회사에서 대량생산제품의 모델을 설계하고 이에 관련된 포스트나 카다로그 등을 제작함으로써 그는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로 불림- 당시 첨단의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건축에 도입하여 건축의 공업화를 실천하고자 함- 주택건축의 공업화를 강력하게 주장: '알맞은 균형과 실용적 단순성 대신 화려함과 거짓 낭만주의가 이 시대의 풍조가 되었다. 이러한 병적인 현상은, 일반인이 집을 지을 때 건축을 건축청부업자에게 맡기든 건축가에게 맡기든 간에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생긴다. 건축업자들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질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공사를 마구 서두르고 있고 반면에 설계만 하는 건축가는 비용을 늘리는 데에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건축가들이 받는 보수는 총공사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경우든 손해를 보는 것은 고객 쪽이다' ->문제 해결 방안으로 표준규격의 건축 자재를 대량생산하여 예술과 기술을 통합해야 함- 그가 설계한 건물들은 철, 콘크리트, 유리등의 현대적 재료를 잘 이용하여 건설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더욱 훌륭한 것은 건물의 외벽전체를 유리막으로 처리하여 자연광을 최대한 유입하도록 처리한 것- 협동 작업을 주장하여 이를 사무실의 지침으로 하여 소장에서 모든 직원들에게 이르기까지 각자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었으며 또한 그는 건축교육에 지대한 관심과 정력을 모아 현대 건축교육의 바탕이 된 바우하우스를 개설하였다.·작품의 실현을 위하여 수공법에서 다량생산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입하여 실습함·건설업자를 참여시켜 건설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줌.·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 건축, 미술, 공예분야 등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고 거기에 따르는 이론과 실기를 연구하는 건축교육을 구상.경력-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뮌헨공과대학과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였고, 그 후 피터 베렌스의 사무소에 들어가 1907년에서 1910년까지 근무하였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막스웰 프라이와 건축사무소를 경영- 1937년 미국으로 건너와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에 자리를 잡고 하바드 대학에서 건축 교수로 봉직- 1945년에 T.A.C.(The Architects Collaborative, Inc.)를 케임브리지에 개설하여 공동작업의 중요성을 건축하는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보여 줌- 제 1차 대전 중에는 기병대로 종군하였고, 이때 그는 "예술노동 평의회", "11월 그룹", "유리의 사슬"등 수많은 좌익계 미술가들의 조직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표현주의와 관련을 맺음.주요 작품.라이네의 아펠드(Alfeld der Leine)에 있는 파구스(Fagus) 공장{1. 형 태- 벽은 하나의 판으로 계획: 벽체를 구조체의 기능을 갖지 않고 다만 구획하는 기능만을 가지는 얇은 마감으로 취급- 기둥을 안쪽에 배치하고 외벽을 완전히 유리면으로 마감- 벽, 기둥은 외벽면 뒤로 후퇴: 외관상으로 커튼 같은 효과 실현- 바닥슬라브가 있는 곳의 유리는 검게 채색2. 구 조- 사무실 부분은 조적조로 지어짐- 정면에는 기둥을 갖고 있음- 후면은 내력벽으로 되어 있음- 바닥에는 철골보가 사용됨3. 의 의- 기능주의 건축의 최초 예- 형태의 새로운 개념 부여: 모퉁이 부분에 기둥이 없는 것.베를린(Berlin)의 Siemensstadt에 집합주거{- 독일의 중부 지방도시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위치한 바이젠호프 언덕에 새로운 건축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독일 공작 연맹 의 실험주택- 유럽 신도시 건설의 모델 하우스- 20년대 건축가 17명이 빚은 공동 주거단지 시초- 전체 단지 계획은 미스 반 데로(Mies Van der Rohe)가 중심이 되어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잔 네레, 네덜란드의 우트, 그리고 독일의 피터 베렌스와 발터 그로피우스를 포함하여 빅토르 부르주아, 부루노 타우트, 아돌프 라딩, 요제프 프랑크 등- 모두 33개의 거주 단위로 이루어져 단일 주택과 24세대가 입주하는 아파트동으로 구성되어 있음- 발터그로피우스의 두 채의 주택은 지금은 헐리고 남아있지 않으나 당시의 문헌에 의하면 철저한 모듈 계획에 따라 완전한 공장 생산품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경량 철골조와 압축된 코르크제의 벽 패널을 조합시킨 프리패브 주택을 지었다..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 교사- 부지는 주택이 간간이 있는 교외의 숲속에 있어, 자유로운 배치가 가능했다- 이 건물의 역동적 구성, 비대칭적 평면구성, 부드러운 백색 벽의 표면과 수평적인 창문, 평지붕 등은 1920년대의 국제양식을 대표하는 특징으로서 근대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의의: 파구스 공장과 독일 공작연맹시대 대전이후 정신적 이상주의와 유토피아사상 추상과 기계를 혼합한 표현탐구 이 모두의 통합이 이루어 졌으며 바우하우스에서 국제주의 양식이 성숙기에 달하게 된다.1. 형 태{- 공통으로 취급된 기단위에 3개의 블록을 위치: 기단은 전체를 통합시키는 강력한 요소- 각각의 블록은 대칭성, 규칙성을 보여줌- 개개의 블록이 전체적으로 운동성, 비대칭성 보임
1. 조선시대 상류주택- 손동만씨 고택 -경북 양동의 손동만 가옥은 1458년 축조된 것으로 중요 민속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월성 손씨가의 대종가로서 강릉 오죽헌과 함께 몇 안 되는 조선초기의 상류주택으로서 송첨 서백당이라고도 불리운다. 서백당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의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다. 서백당은 1458년, 양동마을의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昭; 1433 1484)가 월성 손씨의 종가로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 1553) 선생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서백당은 조선시대 초기의 한옥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드문 사례이다. 서백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결합된 본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된다. 본채와 그 안마당은 모두 정방형에 가깝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이 건물의 배치는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비교적 높은 기슭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비탈진 언덕은 자연석으로 석축하고 담장을 쌓아서 경사부분을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외부공간이 전체적인 구성은 화계를 중심으로 한 후정이 발달되어 있으며 대문채 앞의 진입공간에는 회화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최근에 은행나무가 식재되었다.{(전경)가옥은 양동마을에서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진입로에서 대분채에 이르는 곳은 고저차가 심하고 담장과 대문채, 대문채와 본채의 공간이 매우 좁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후의 거리가 짧은 탓도 있지만 이것은 뒷마당을 넓혀 후정을 넓히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그리고 후정은 안채와 연결된 화계와 사랑마당에서 사랑으로 진입하는 중간위치에 또 다른 하나의 화계가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유고사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소위 사랑마당을 꾸미기 위한 것으로서 안채 뒤의 후정과는 성격상 차이를 보이고 있다.그리고 후정에 있어서 단이 축조방식은 자연석 허튼 쌓기로 하되, 뒤쪽으로 약간 기울려서 자연석을 쌓았다. 이것은 배수가 잘되게 하기 위함이며 토압에 잘 견디게 하여 붕괴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이다.{(행랑채와 본채)다.{(송광사 배치평면도)송광사는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 사상을 접하였던 보조 국사의 사상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사찰이므로 창건 당시부터의 배치 계획은 크게 두 가지 사상-선종과 화엄론-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도시의 평지에 지어지지 않고 산속에 위치한 산지 사찰로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고저차를 조정하기 위하여 두 단의 석축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석축을 기준으로 전체 사역은 밑으로부터 하단·중단·상단의 세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대웅전 뒷면의 높이 30,40척의 석축 위로 설법전과 수선사를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중요한 건물인 하사당과 국사전이 있는 상단 지역이 있다. 이곳에 선원의 성격을 지닌 설법전과 수선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선종에 바탕을 두고 수선을 중시하였던 보조 국사의 창건 이념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사실이다.한편 건물들의 배치 역시 종고루와 대웅전을 연결하는 중심축선과 이에 직교하는 축에 맞게 놓여져 있으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전체적인 축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배치 계획의 자유로움을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설법전의 중심축과 우화각-천왕문의 중심축이 대웅전-종고루의 중심을 지나는 중심축과 일치하지 않고 조금씩 틀어지게 되어있는 것 역시 그러한 선종 사찰의 특성을 보여 주는 경우이다.송광사의 배치는 법성게의 도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사역 안에서는 비를 맞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법성게라고 하는 것은 의상 대사의 210자 7언시를 도식화한 화엄일승법계도 를 말하는 것이다.종축선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길게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다른 사찰의 일반적인 예와 비교하여 볼 때 송광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에 대부분의 건물이 모여 있으며, 그 배치가 중심 영역을 기준으로 직교축을 형성하며 둘러싸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법계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가정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산지 사찰이면서 평지 가띄워 건축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좌우대칭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서, 전면 반 칸은 툇마루이고, 나머지는 모두 온돌방이다. 동재 앞쪽에는 비각이 있고, 동쪽 담장을 사이에 둑 살림을 맡아 해주는 교직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다음, 구릉지에 건축되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는 영천향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쪽 제일 앞쪽으로 누문인 풍화루(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가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낸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쪽으로 온돌방(1칸 3칸)이 하나씩 있다. 동재와 서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대청(1칸 2칸)과 온돌방(1칸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 뒤쪽 높은 곳에는 내삼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배향의 중심전각인 대성전이 서 있으며, 그 앞 동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자리 잡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는 통간으로 되어 있으며,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밀양 향교에서는 외삼문을 들어서서, 동북쪽으로 진입하면 풍화루가 자리 잡고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있는 삼문을 통하여 명륜당 마당에 이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는 온돌방(1칸 1.5칸)을 하나씩 두었으며 앞에 반간 너비의 툇마루를 두었다. 명륜당 남쪽 동서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남쪽에서부터 마루(1칸) 온돌방(2칸) 대청(2칸) 온돌방(1칸)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향공간은 명륜당 뒤쪽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명륜당 서쪽 터에 있어, 명륜당 앞마당을 돌아들게 되어 병렬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의 정문인 대정문은 정면 9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는 화랑에 삼문을 만들어 강릉 향교의 대성전에서와 유사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정면 높은 터에 남향한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통간이며, 이의 앞쪽 동서로 자리 잡은 동무와 서무는 2가지 요소로 그 장소성이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인적 환경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지리적 환경요소이다. 우선 인적환경에 의한 서원의 입지를 살펴보면 서원의 건립 위치는 존경받을 만한 일정한 연고지로 한정되어 진다. 다음으로 지리적 환경에 의한 서원의 입지를 살펴보면 서원의 자리는 일반적으로 산수가 뛰어나고 적막한, 비교적 읍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향촌에 위치한다.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과 원생, 진사 등이 숙식하는 동제와 서제의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이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 서원의 관리와 식사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는 누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서원건축의 기본적인 배치구도는 모두 전면에 강학구역을 두고 후면에 제향구역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으로 일관되어 항상 묘구역이 뒷편에 위치한다.건축물의 배치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여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 사당 등을 이 축선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을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음 그 앞에 삼문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 부근에 제사를 위한 제기고가 놓이고, 강당의 앞쪽 좌우에 동, 서제를 두었으며 강당 근처에는 서고와 장판각 등을 배치하였다. 고사는 강학구역 밖에 한옆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들 대부분의 건물들은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간소한 양식으로 꾸몄으며, 단청을 사당에만 사용하였다. 담장을 낮게 하거나 일부를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살렸고, 경내에는 꽃과 낙엽수를, 경외에는 소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 산의 정기와 선비의 기상을 나타내도록 조경하였다.. 재원생들이 기숙하는 곳으로 보통 강당 전면에 대칭으로 지리하고 있어 강당과 함께 교육 공간의 핵심을 이룬다. 강당의 좌향과는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강당을 향하여 오른쪽의 재를 동재라하고 왼쪽의 건물을 서재로 부른다. 동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임이 된다.. 동서원은 1604년에 창건되엇으며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이었다. 강당은 정면 다섯칸, 측면 두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도 되었으며, 주심포식 1출목의 공포를 갖고 있어 헛첨자와 쇠서의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중앙의 세칸은 대청을 만들고, 좌우의 한칸은 온돌로 하였으며, 전면 한칸은 퇴간으로 하여 툇마루를 두고 전부 개방하였다. 이 건물은 서원 강당으로서 격식을 갖추어 만든 대표적인 예이다.4. 성곽과 궁궐 건축-수원 화성-총 길이 5.7킬로미터, 면적 1.2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수원화성(1996년에 사적3호 수원성곽 은 공식적으로 사적3호 수원화성 으로 명명되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은 정조의 역작품이다.정조의 통치 기간은 24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치세는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대였다. 우선 17세기 초부터 노골화된 당파싸움은 17세기말 숙종 때 상대방을 철저히 제거하는 대립 방식으로 치닫다가 영조가 즉위하면서 각 정파가 서로 타협하는 탕평책을 써서 여러 정파들을 고루 기용하였다. 정조도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 탕평책을 견지하면서 오만한 서울 양반 대신에 때묻지 않은 지방 선비들을 등용함으로써 조선시대를 피로 물들였던 당파싸움을 완전히 제거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확립했다. 또 경제는 농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상공업의 발달로 새로운 국가의 부가 축적되자 실학(實學)과 기술 혁신을 강조하는 북학(北學)을 포용하여 사상적인 탕평을 추구했다.정조가 활발하게 내외적인 업적을 쌓아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에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불명예스럽게 뒤주 속에서 사망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였다. 1762년 영조(英祖) 38년 윤 5월 21일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한여름 뒤주 속에 갇힌 지 8일만에 죽었다. 당시 정조의 나이는 10세였다. 32년 후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통치 기간 내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과 추모 사업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으로 내세웠다. 즉위 13년에는 부친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들었다.
송광사송광사의 입지송광사가 자리 잡고 있는 조계산은 덕유산, 추월산, 무등산 등과 함께 호남의 명산 가운데 하나로서 소백산맥에서 갈라진 노령산맥이 한반도의 남서쪽을 돌아 다시 동북으로 휘감아 도는 곳에 있다. 송광면, 주암면, 낙안면에 걸쳐 있는 해발 887m의 이곳 조계산의 동쪽 기슭으로 신평천을 앞에 두고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송광사가 위치한다. 최고봉인 연산봉과 기타 제봉들이 송광사 일대를 에워싸며 절경을 이루고 풍수적인 입지 역시 훌륭한 곳이다. 남쪽의 산계곡으로부터 신평천이 흘러와 사역 전체를 감싸며 북쪽으로 빠져 나가 주암호에 이른다.사찰의 영역은 동쪽의 조계산 줄기를 뒤로 두고 서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서향하고 있는 것이나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것이나 모두 한국의 전형적인 사찰 입지에서 흔한 예는 아니다. 그러나 송광사 주위의 자연 입지 조건으로 볼 때 물이 흐르고 산자락이 열려 있는 서쪽을 향함으로써 남북의 산줄기가 좌우에서 사역을 감싸는 것을 고려한 풍수적 입지 결정 의도를 읽어 볼 수 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았을 때 사찰의 종축 방향보다 직교축인 남북 방향으로 공간적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입지조건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송광사가 다른 사찰과 같이 일주문-천왕문 등의 진입 공간이 길지 못하고 중심 영역에 모여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입지 상황에서 우선 이해되어야 한다.배치의 개념송광사는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 사상을 접하였던 보조 국사의 사상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사찰이므로 창건 당시부터의 배치 계획은 크게 두 가지 사상-선종과 화엄론-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도시의 평지에 지어지지 않고 산속에 위치한 산지 사찰로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고저차를 조정하기 위하여 두 단의 석축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석축을 기준으로 전체 사역은 밑으로부터 하단·중단·상단의 세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대웅전 뒷면의 높이 30,40척의 석축 위로 설법전과 수선사를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중요한 건물인 하사당과 국사전이 있는 상단 지역이 있다. 이곳에 선원의 성격을 지닌 설법전과 수선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선종에 바탕을 두고 수선을 중시하였던 보조 국사의 창건 이념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사실이다.한편 건물들의 배치 역시 종고루와 대웅전을 연결하는 중심축선과 이에 직교하는 축에 맞게 놓여져 있으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전체적인 축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배치 계획의 자유로움을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설법전의 중심축과 우화각-천왕문의 중심축이 대웅전-종고루의 중심을 지나는 중심축과 일치하지 않고 조금씩 틀어지게 되어있는 것 역시 그러한 선종 사찰의 특성을 보여 주는 경우이다.송광사의 배치는 법성게의 도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사역 안에서는 비를 맞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법성게라고 하는 것은 의상 대사의 210자 7언시를 도식화한 화엄일승법계도 를 말하는 것이다.종축선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길게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다른 사찰의 일반적인 예와 비교하여 볼 때 송광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에 대부분의 건물이 모여 있으며, 그 배치가 중심 영역을 기준으로 직교축을 형성하며 둘러싸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법계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가정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공간의 구성산지 사찰이면서 평지 가람적인 배치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송광사의 배치 및 공간 구성상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이와 같은 평지 가람의 일반적인 공간 구성과 더불어 사역 전체를 두 단의 석축을 이용하여 3개의 영역으로 나누고, 대웅전 후면의 높은 석축 위에 선원의 성격을 지닌 설법전과 수선사를 배치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공간 구성상 특징이다. 이는 사찰이 입지하고 있는 산세를 이용하여 보조 국사 지눌의 사상을 수용하는 선종 사찰로서 승려들의 수선을 가장 중요시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배치 기법으로 볼 수 있다.삼보사찰에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가 있다.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법보사찰 해인사가 대운전의 뒤쪽에 높은 석축을 두고 팔만대장경의 판본을 보관하는 장경판고를 두고 있는 사실과 불보사찰 통도사가 대웅전의 뒤쪽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금강계단을 두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승보 사찰인 송광사에서 선원부를 상단에 배치한 것은 공간 계획상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송광사에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탑이 없는데, 여기에서는 사찰의 배치 변화에 있어서 점차 탑의 상징적 의미가 퇴색하고 금당 중심의 선종사찰로서 변화되어 가는 변화의 초기 모습을 읽을 수 있다.송광사는 다른 선종 사찰과는 달리 종축선상의 진입 과정이 공간적 축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가운데의 공간적 중심 영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졌다.정리하자면 송광사는 어느 사찰보다도 중심 지향적이며 동심원적 이다. 여러 겹의 동심원적 구성을 진입축이 가로지르며 중심부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구성이다. 중심부에서는 사방 어느 곳으로 가든지 그러한 중층적 에워쌈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경험은 결국 다시 중심을 향하게 한다.청량각{계류 위에 걸쳐 있는 누교.{석조의 홍교를 쌓고 그 위에 만들어진 건물로 전면 1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부 건축문화의 기원】2장 건축문화의 기원-원시시대의 건축◎ 원시사회의 문화○구석기시대의 문화-구석기시대는 획득경제의 단계이고 문화는 매우 단조로웠으며 전반적으로 3기로 나누어진다.-전기: 식물채집경제였으며, 20~30명이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는 군공동체를 이루어 강 언덕이나 산허리에서 생활-중기: 사냥의 획득경제였고, 군공동체의 인구가 많아지고 조직도 강화되었으며 장로청치가 나타남. 동굴을 거주지로 삼게 되었고, 천막과 같은 것을 치고 사는 일도 있었다.-후기: 수렵?어로경제가 발달하여 생활이 안정되며 문화발전의 속도도 빨라졌고 작은 마을까지 생김. 미술이 발생하여 도르도뉴 동굴과 알타미라 동굴 등에 남아 있는 채색벽화와 조각, ‘비너스상’이라 일컫는 나체 부인상 등이 있다.-구석기시대의 동굴예술(Cave Art)?동굴예술은 구석기 말기 천연동굴의 천장과 벽체, 동굴 밖의 그늘진 바위면 등에 그리거나 새긴 다채벽화 또는 음각선화이다.?그림은 자연배경이 없어 대상을 그린 사실적인 내용이지만 관념적인 상징주의 내용을 표현하였다.?벽화는 동물로부터 무사안전과 풍성한 획득을 위한 기원과 주술적 의식의 일부로서 제작. 벽화는 황토와 다른 광물을 가루로 만들어 그렸는데 가루가 굳으면서 고착되고 동굴의 온도와 습도가 크게 변하지 않으면 원래 모습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동굴예술은 흑해 동안의 코카서스 지방과 흑해 남안의 이베리아 지방을 비롯해서 프랑스의 서남부와 스페인의 서남부 및 동부, 포르투갈 전역 등에 주로 분포.))○중석기시대의 문화-홍적세의 빙하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환경에 알맞은 생활양식이 형성된 것.-정기(精器)문화: 작고 뾰족한 세석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소기문화라고도 함. 정기문화인은 고급의 수렵, 어로를 주로 하며, 숲 속이나 산언덕에 구멍을 파고 사방에 기둥을 세우고 풀로 지붕을 이은 수혈식 주거를 짓고 살았음.-조기(粗器)문화: 석기가 크고 거칠기 때문에 대기문화라고도 함. 호숫가의 낮은 땅이나 숲속의 빈터에서 목조나 통나무집을 짓고 살음.-혼으로 의도.―회랑분묘(Gallery Grave)와 통로분묘(Passage Grave)?회랑분묘: 기둥과 같은 돌들이 열을 지어 놓여지고 여러 개의 뚜껑 판석으로 덮여진 석조 회랑식 분묘로서 시신들은 벽을 따라 묻혔음.?통로분묘: 회랑 분묘와 비슷하지만 통로가 원형 묘실에서 끝나는 것이 다름.【2부 고대 건축】1장 서아시아 건축서아시아 건축은 티그리스 강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아라비아, 페르시아, 시리아, 소아시아 등에서 이룩된 건축문화로 일면 메소포타미아 건축이라고도 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초기에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의 비옥한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체계적인 농업과 더불어 행정과 법, 종교가 발전하였고, 여기에 문자와 측량, 직조, 금속 제련, 도기 등의 도구와 기술이 더해짐으로써 기록된 역사와 기념적 건축이 시작되었다. 석재를 구하기 어려워 진흙 벽돌과 구운 벽돌을 주된 건축재료로 사용하였고 회화와 조각 작품이 종교적인 것인 반면, 이집트 예술은 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서 역사적인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오리엔트의 자연과 문화○오리엔트의 자연―이집트는 지형이 폐쇄적이어서 이민족의 침입을 받는 일이 적었음.(→역사가 단조로움.) 단일하고 통인된, 절대군주의 지배 아래에 있는 농경사회의 형태를 취함.―메소포타미아의 기후는 매우 악조건이며 유역이 광활하고 개방되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음.(→각 지방의 대립, 외적의 침입 등으로 역사가 복잡함.) 문명화된 사회들이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을 이룸.○종교와 문화: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자연물 중 특히 천체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어 점성술과 천문학, 역법이 발달. 다신교를 믿었으며 현세적 경향이 강하여 내세에 대한 신앙이 없고 신탁 등으로 현세의 운명을 점치는 일이 많았음. 수메르 시대부터 종교문학이 발달하여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 신화나 그리스 신화 등에 큰 영향을 미침.◎서아시아의 건축○개설: 농경과 건축, 도시가 역사상 가장 일찍 탄생. 양질의 목재가 부족하여 갈대와 진흙지붕으로 함.?안쪽으로 경사진 벽체: 이집트 벽체의 원형은 안쪽으로 경사진 것으로, 벽체가 외부로부터 70° 정도 경사지어 연속된 버팀기둥 역할을 함. 건물에 안정감을 주며 횡력에 대한 안정을 꾀하기 위한 것임.?기둥: 종려나무와 로터스, 파피루스 등 식물형 기둥, 그리스 주범의 원형으로 알려진 4각과 8각, 16각의 기하학형 기둥, 그리고 주신이나 주두에 사람을 새긴 조각형 기둥(하토르 여신상주, 오시리스 신상주 등)등 모양이 다양.?건축술: 석재들을 작은 도구로 장대하고 세밀하게 가공. 지레는 신왕국에 이르러 사용. 천문학과 측량술, 수학이 매우 발달. 피라미드를 건설하려는 곳을 수평으로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고 물을 채워 수위를 이용하는 방법을 씀. 바닥에 석재를 쌓을 때 여기저기에 구멍을 파서 지반으로 조금 파고 들어감으로써 기층을 견고하게 함.―축적(軸的)조직: 이집트의 기념적 건축물들은 일반적으로 지리적 구조에 기인되는 직교 구조의 축을 따라서 축적으로 배치되었으므로 축성이 특징의 하나가 됨(→축성은 거대한 피라미드나 신전들에서 보이듯이 영원한 형세를 표현하는 듯 항상 에워싸여 있음). 변하지 않고 영원히 타당한 환경의 창조를 목표로 한 것임.―신전건축과 분묘건축의 성행: 종교와 사상, 내세관에 따라서 신전건축과 분묘건축이 발달. 인면수신의 스핑크스, 끝이 뾰족한 기둥과 같은 탐 오벨리스크 등 종교를 중심으로 한 건축과 조각, 그림 등이 발달.―건축형태: 균형과 조화로움. 단순하고 입체적인 형태나 매스, 그리고 수직?수평적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가구식의 다주실 두 가지로 나타남. 견고함과 장중함, 단조로움이 특색인 이집트 건축은 거인적이고 창의적이었지만 섬세하거나 기교적인 표현수법은 부족.―장식: 벽면은 점토나 회칠한 벽 위에 선각으로 장식. 장식무늬는 신화와 종교관에서 유래하는 것, 식물무늬, 독수리나 황소, 뱀 등 영적 동물형태, 공상의 인두조나 인두수 등을 모티프로 하여 환상적이고 다채롭게 꾸며짐. 색깔은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 나일 강을 뜻하는이루어지게 됨. 도시는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구죽됨.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라는 두 핵을 중심으로 구성.○그리스 건축의 실례―신전건축?신전건축의 형식형식미와 신의 주거: 질서와 짜임새가 있는 구성을 보녀주며 외부공간 요소로서의 형태미-열주성이나 구성성-를 이룸.평면: 열주로 둘러싸임. 열주의 배치에 따라 단열주식과 복열주식으로 나뉘고 또 전열주식과 양열주식이 더해지고 열주가 사방을 둘러싸는 주주식과 원형 평면을 둥굴게 둘러싸는 원형 주주식이 있음.?신전 건축양식의 특색배치와 평면: 신전은 아크로폴리스 위에 동?서쪽 또는 동동북?서서남쪽으로 주축을 두고 동쪽에 입구를 배치. 동쪽에서부터 제단, 전주랑 현관, 신상실 보고실, 후주랑 현관을 배열.입면: 3단의 기단 위에 오더와 박공으로 구성. 오더는 주초와 주신, 주두로 이루어지며 최상단의 아바쿠스 위에 엔테블레처가 얹어짐. 엔테블레처는 아키트레이브, 프리즈, 코니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됨.구조: 목조 가구식에서 석조 가구식으로 발전.형태의 정교함: 통일성 있는 조각적 형태의 신전 건축은 반복적 요소들로 구성되었으며◆엔타시스(배흘림): 길이에 비해 폭이 좁은 수직 부재의 가운데 부분이 들어가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해 중앙부를 약간 굵게 만들고 위쪽으로 가늘어지게 한 수법.◆모서리 기둥의 안쏠림과 좁은 간격: 오더의 배경이 하늘인 경우 더 가늘게 보이는 착각을 피하기 위해서 모서리 쪽의 기둥간격을 어두운 벽을 바탕으로 한 중앙보다 약간 좁게 함으로써 보다 역동적인 형태를 만들어냄.◆수평 부재의 솟음: 기단와 아키트레이브, 코니스 등에 의한 긴 수평선들이 중력 및 인간의 생리와 심리의 작용으로 인하여 시각적으로 처져 보이므로, 이들 요소들을 위쪽으로 약간 불룩하게 만들어 착시현상을 보정하는 수법.그 요소들의 크기와 비례는 인간 척도에 적합하도록 고려됨.?그리스 건축 양식도리아식 오더: 단순하고도 장중한 느낌을 주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목조를 원형으로 하여 석조로 조형화된 것.이오니아식 오더: 전면 축적 구성.오더와 외관: 그리스의 세 오더에 터스칸 오더, 콤포지트 오더를 더하여 다섯 오더를 사용. 경직되고 불안한 형태를 보임. 전면부는 수직성을 강조하면서 앞 공간을 위압함.)―공공 및 정치시설?포룸: 그리스의 ‘아고라에 대응하는 것으로, 도시의 문화와 정치, 행정, 상업시설이 집적된 광장과 시장의 역할을 하며 도시미의 중심을 이룸.?바실리카(Basilica)건축개요: 법정과 상업교역소의 역할을 하며 포럼에 면하여 위치. 평면 및 단면계획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길이는 너비의 2~2.5 배 정도. 내부공간은 2열의 열주에 의해 중앙의 신랑과 양측의 측랑으로 분리. 포럼에 면한 방향에 주출입구를 설치하고 그 반대편에 법관석으로 사용되는 반원형의 후진을 설치. 신랑의 천장은 높고 측랑의 천장은 낮아, 신랑과 측랑의 고저차를 이용해 고측창을 설치. 고측창을 이용하여 내부공간에 채광.건축실례: 율리아 바실리카, 로마, B.C.42~25년. 트라얀의 바실리카, 로마, B.C.98~A.D.112년. 콘스탄틴바실리카, 로마, 310~313년(막센티우스 바실리카라고도 하며 포럼 로마나에 위치. 신랑상부의 지붕은 교차보트 구조. 교차보트의 횡력을 지키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를 설치).)?궁전 건축(Palaces)팔라티누스 언덕의 도미티아누스 궁전: 로마 제국의 궁전들은 규모와 구조면에서 모험적이고 사치스런 성격을 보여줌. 건물들은 한 축선상에 놓여 투시효과로 웅장한 모습을 나타냈으며, 바닥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벽에는 대리석 벽주가 세워짐.스팔라토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로마의 병영식 배치를 하고 있어 식민지 도시의 배치와 흡사. 남북축과 동서축에 의해 네 구획으로 나누어짐. 궁전은 절대 권력을 가진 우주의 통치자로서 상징화되는 황제의 역할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며 신성한 세계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극장과 경기장?노천극장: 아치와 볼트,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그리스 극장을 원형으로 만들면서 로마 연극에 적합한 로마 극장 건설. 건축기술이 발달되어서 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