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성 작성비(明活山城 作城碑)1. 개관2. 건립연대3. 비문의 판독4. 작성비의 역역동원1. 개관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이하 작성비)는 1988년 8월 27일, 김규식(金奎植)씨에 의해 신고되었다. 김규식은 전날인 26일, 명활산성(明活山城)내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에 가다가 경주시 보문동 田56번지 명활산성 성벽지에서 성벽 일부가 물에 노출되면서 드러난 비를 보고는 이튿날 경주시에 매장문화재 신고를 하였다. 경주시청 문화과에서는 신고받은 즉시 古碑임을 확인하고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높이 68.8cm이고 폭은 윗쪽이 29.6cm, 아래쪽이 31.0cm이며, 가장 두꺼운 곳의 두께는 16.5cm이다. 이 비석은 결손된 곳이 없이 원형에 가까우며 글자의 획도 분명하여 비석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흙에 묻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인 형태와 석질은 남산신성비 제3비와 비슷하며 금석문 체제로는 ‘오작비’와 비슷하다. 9행×21자(가장 긴 경우)로 총 148자가 쓰였다.2. 건립 연대본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1행 첫머리에 나오는 신미년(辛未年) 이라는 간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551년으로 추정된다. 주지하다시피 신라 중고기 비석에 나타나는 인명 표기 방식은 직명(職名), 부명(部名), 인명(人名), 관등명(官等名)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그 중 관등표기는 연대가 내려올수록 간략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 비에 등장하는 7인의 인명도 모두 이러한 중고기 인명 표기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 중 관등 길지(吉之) 와 하간지(下干支) 가 연대 추정의 열쇠를 제공한다.우선 길지(吉之)를 보면, 봉평비(鳳坪碑)(524년)에서는 길지지(吉之智) 로 나타나 智 자가 덧붙어 있다. 중고기에 있어서 관위 끝에 知 , 第 , 帝智 등이 붙으면 시대가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작성비의 연대는 524년보다는 늦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창녕비(561년)와 마운령순수비(568년)에서는 이미 관등이 吉之 로 표기되므로 작徒作受長四步五尺一寸 文叱兮一伐徒作受長四步五尺一寸 □□利波日徒受長四步五尺一寸 合高十步*長十四步三寸匠人 比智休 波日 및 工人 抽兮 下干支의 무리가 길이 4보 5척 1촌을 짓도록 받았고, 文叱兮 一伐의 무리가 길이 4보 5척 1촌을 짓도록 받았으며, □□利 波日의 무리가 4보 5척 1촌을 짓도록 받았다. 합하여 높이 10보이고, 길이 14보 3척 3촌이다.네째 문장: 此記者古他門中西南回行其作石立記이 기록은 古他門에서 서남쪽으로 돌아가서 돌을 만들어 세워 적었다.다섯째 문장: 衆人至 十一月十五日作始 十二月卄日了 積?五日也여러 사람이 와서 11월 15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12월 20일에 끝마치니 (공사기간이) 모두 합하여 35일이다.여섯째 문장: 書寫人源欣利阿尺 - 글을 쓰고 베낀 書寫人은 源欣利 阿尺이다.*上人邏頭: 다른 것에 비해 글자의 크기가 약간 크다. 중고기의 인명표기방식에 따르면 上人邏頭는 伊皮?利의 관직명이 되어 하나의 단어로 생각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상인과 나두가 각기 따로 나온 사례가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나두는 남산신성비에서 ‘阿良邏頭’, ‘…邏頭’로 나타나있다. 阿良은 지명으로 나두는 지명에 연이어져 쓰여있는 것이다. 즉, 나두는 군, 촌 등에 파견된 지방관을 지칭하며 道使와 정치적 비중이 비슷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上人邏頭‘의 上人이 문제가 되는데, 상인을 촌명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상인은 본래 불교용어로 ’지덕을 갖춘 불제자 또는 僧侶‘를 일컫는 말이지만, 보통 ’윗어른‘, ’연장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군중상인: 다른 금석문과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은 처음 등장하는 명칭이다. 우선 군중상인의 ‘상인’은 상인나두의 상인과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郡의 윗어른’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인의 지위는 대체로 외위 7등 하간 이상의 가장 유력한 자로 보고 있으며, 상인나두를 보좌하면서 실직적으로 그 지역을 통솔한 것으로 보았다.(박방룡, 〈명활산성 작성비의 검토〉, 《미술자료》41, 1988, 73~74쪽문을 쓰고 각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1. 개관2. 건립연대와 성격3. 비문의 판독4. 남산신성비의 역역동원5. 맺음말1. 개관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는 1934년에 제1비가 발견된 이래 1956년에 제2비, 그리고 1960년에 제3비가 발견되었고, 그 후로도 4?5?6비의 발견이 이어졌다. 1985년에는 7?8비가 발견되었으며, 1994년에는 제9비, 2002년 5월에는 제10비가 발견되었다.)제1비는 적갈색의 화강암으로, 높이 91cm, 최대폭 44cm, 두께 5~14cm이며, 대체로 장란형(長卵形)을 하고 있다. 표면 중앙에 약간의 손질이 가해졌는데, 전체적으로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체(書體)는 오작비나 임신서기석과 통한다. 비문의 총 글자수는 전문 9행에 약 169자로 보인다.2. 건립 연대와 성격이 비의 건립 연대는 Ⅰ행에 나오는 辛亥年 이라는 간지(干支)와 여타 문헌기록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먼저 남산신성(南山新城)의 축조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삼국사기》 권4 진평왕 13년(591)조의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四步 라는 기사와, 《삼국유사》권2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의 建福八年辛亥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步 의 기사가 있다. 후자에서의 建福 은 진평왕 6년(584)에 제정한 연호이므로, 그 8년은 진평왕 13년(591)에 해당하고, 따라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남산신성의 축조 연대는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건복(建福) 8년과 진평왕 13년, 즉 591년은 간지상으로 볼 때 바로 비문의 辛亥年 에 해당한다. 결국 이 비의 건립연대인 辛亥年 은 591년임을 알 수 있다.남산신성비에는 나두(邏頭), 도사(道使), 촌주(村主), 성사(城使) 등 신라의 지방통치와 관련된 관직들이 다수 나오고, 장척(匠尺), 문척(文尺), 면착상((面捉上), 석착상(石捉上) 등 일종의 기술자에 해당되는 직명이 상당수 보인다. 또 신라의 외위(外位)로서 찬간(撰干), 상간(上干), 간(干), 아간(阿尺), 일벌□只次喙以17□□冬大作18小□大舍19烏□舍20□21文22知23전체 비문은 두 문단으로 나뉘어진다. 1문단은Ⅰ행 첫자(辛)부터 Ⅱ행 제16자(之)까지이고, 2문단은 Ⅱ행 제17자(喙)부터 Ⅵ행 마지막자까지이다. 신해년 2월 26일에 남산신성을 만들때,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崩破하면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하게 하였다. 처음의 喙部主刀里受作卄一步一寸은 喙部 主刀里가 맡은 작업량을 명기한 것이다. 여기서 21보(步)는 1보를 6尺으로계산하여 126척이 되는데, 여타 남산신성비에보이는 작업량과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것이다.그 다음으로 작업 감독자와 실무 담당자들의 인명을 나열하였다. 부감(部監)□□□次 大舍와 仇生次 大舍, 文尺 仇□□ 小舍, 里作上人 只冬 大舍 와 □文知 小舍, 文尺 久匠 吉士, 面石捉上人 …大烏, □石捉人 □下次 大烏, 小石捉上人 □□ 小烏 로 끊어 읽힌다.4)남산신성비 제4비XIXVIIIVIIVIVIVIIIIII□1次次2只古利古?邏聞3小一一上生太頭敎節4石石尺伐干村舍沙令如5捉捉書古匠?一喙誓法6上上尺生尺善弩事以7人人夫城?支8上9… 때, 법에 따라 …… 알려 서약하게 한다. …… 邏頭인 沙喙출신의 弩 …… □ 大舍와 一善支 …… 古生村 출신의 진(?)…… 利 上干과 匠尺…… 古 一伐과 古生城 上……只 一尺과 書尺인 夫…… 次 小舍와 □石捉上人 …… 次 彼日과 小石捉上人 …5)남산신성비 제5비VIIVIVIVIIIIII?□□問道崩辛1□□城村使破亥2一作□□者3利上□□罪4□人上喙敎5□干部事6同□爲7□文聞8□□9… 신해년에 …… 붕파하면 죄로 다스릴 것을 알려 …… 道使 □□喙部 출신의 □문□ …… 問村 출신의 □□ 上干과 同□…… □城作上人인 □ …… □□一利□ …… ?□…6)남산신성비 제6비III尺□1豆尺2□同3□4□5□尺同□□尺豆□7)남산신성비 제7비IVIIIIII□事節[辛]1□爲如亥2□□法年3□□以二4□□作月5□誓後卄6舍事三六7□之年日8□□[崩][南]9□□[破][山]10□□[者][新]11□□[罪][城]12□□[敎][作]13신해년 2월할을 모두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C집단은 지방의 경우에서는 村(제1비-아량촌, 제2비-아도혜촌)에서, 서울의 경우에서는 里(제3비-주도리)에서 동원되었으며 직접적인 공사를 담당한 집단인 것으로 보인다.)이에 반해서 비의 서사부분에 주목, 이러한 서약행위가 공사가 끝난 뒤보다는 공사에 앞서 진행된 것으로 보고 비문의 작성은 서약이 행해지던 당시의 시점에 공사의 현장에 있던 작업책임자만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그러나 1994년 남산신성비 제9비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논의들은 다시 검토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집단순서직 명출 신 지인 명관 등등 급경위외위B1郡 上 人□ 安 知撰干52生? 伐□ 文上干63匠 尺同 村內 丁上干64□ 谷 村□ 利 支一尺95文 尺□ 伐只 次 □一伐8C6城 捉 上 人伊 同 村母 尸 兮上干67工 尺□大次村入 夫? □一伐88文 尺伊 同 村□ 次 兮阿尺119□ 捉 伯干 支 村支 刀一尺910面 捉同 村西 □阿尺1111□ 捉 人伊 同 村□□□12小 石 捉 人□ □ □□ □□□ 남산신성비 제9비제9비의 특징은 A집단으로 이야기되는 지방관이 없다는 점과 C집단의 출신 村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지방관이 기재되지 않은 이유로는 역역동원이 교대로 이루어져 처음 동원된 대상만을 지방관이 포함된 완전한 형식의 비문을 작성하고 그 뒤의 역역 동원에는 서사만을 기록하고 지방관을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축성공사의 작업을 축성과 채석으로 나누고 축성을 담당한 작업분단과 책석을 담당한 작업분단이 결합되었다는 주장하에 이들 각각의 작업분단이 기록된 비를 주비와 종속비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축성의 작업구간 전체를 우선 군(부)단위로 나누고 군(부)이 다시 그 예하의 촌(리)단위로 실제의 수작거리를 배분한다는 전제하에, 최초의 작업구간에 A그룹이 기록된 비를 세우고 이어지는 작업구간에는 A그룹이 없는 從屬碑를 세운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C집단의 출신촌명이 하나하나 기재되어 있는 것은 기존의 남산신성비에서는 찾아이다.
단양신라적성비1. 머리말2. 비문의 판독과 구분3. 비문의 내용과 성격4. 적성전사법5. 비의 건립연대6. 맺음말1. 머리말단양신라적성비(이하 적성비))는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하여 단양군 일대에서 온달(溫達)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단양면(丹陽面) 하방리(下坊里)의 적성(赤城)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의 높이는 93cm, 상폭은 107cm, 하폭은 53cm로서 화강암을 비면으로 이용하였다. 비의 상단부는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측면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므로 비문이 22행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매행의 글자수도 비편의 발견으로 20자였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20?21?22행은 다른 행에 비하여 글자수가 적어 전체 430자 내외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288자이며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수습된 비편 21자를 합하면 309자이다. 비의 글자는 상당히 얕게 새겨져 있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거의 없다.비문은 순수한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 이두문과 한문이 혼용되어 있다. 비에 사용된 서체(書體)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의 해서체(楷書體)이지만 예서(隸書)의 여운(餘韻)이 강하게 남아 있다. 북조(北朝)의 비에서는 대체로 방필(方筆)을 사용하였고 남조(南朝)에서는 원필(圓筆)을 사용하였는데 본비는 서체상 남조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글자의 판독은 완벽하지만 상단부가 파손된 까닭에 전체의 내용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이 글에서는 단양신라적성비의 판독을 중심으로 하여 비문의 성격을 알아보고, 비의 내용에 나오는 전사법, 법 등의 신라 율령과 관련된 내용과 건립연대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 비문의 판독과 구분비문은 내용상 4개 정도의 문단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은 가장 일반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적성비의 내용 구분이다.A- 王敎事 부분- 제1행 王敎事~제6행 及干支B- 節敎事 官賜14 □□□□□弗兮女道豆只女悅利巴小子刀羅兮15 □□□□□合五人之別敎自此後國中如也?次16 □□□□□□懷懃力使人事若其生子女子年少17 □□□□□□□兄弟耶如此白者大人耶小人耶18 □□□□□道使本彼部棄弗耽?失利大舍鄒文19 村幢主使人□□□□勿思伐城幢主使人那利村20 □第次□□□□□人勿支次阿尺書人喙部21 □□□□□□□使人石書立人非今皆里村22 道使□□□□□智大烏之A부분… (년) …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훼부 출신의 이사부지 이간지, 사훼부 출신의 두미지 피진간지, 훼부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 대아간지, 내례부지 대아간지, 고두림성)에 있는 군주들인 훼부 출신의 비차부지 아간지, 사훼부 출신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 추문촌) 당주(幢主))인 사훼부 출신의 도설지 급간지, 물사벌 당주)인 훼부 출신의 조흑부지 급간지에게 교하시었다.B부분이 때에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次))에게 교하시기를 … 중에 옳은 일을 하는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처인 三 … 에게는 … 利를 許하였다. 사년 소녀), 사문… 공형(公兄)인 추문촌 출신의 파진루 하간지 … 는 다시 적성연(赤城烟))으로 가게 하고 후자 공형은 … 이엽(異葉)이건 국법에는 분여하지만 비록 그러하나 伊 … 子, 도지(刀只) 소녀(小女), 오례혜 찬간지 … 법을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으로 만들었다.C부분별도로 관(官)은 … 불혜 여, 도두지우열리파(道豆只又悅利巴)) 소자, 도라혜 … 합하여 5인에게 … 를 내렸다. 별도로 교하기를 이후로부터 나라 가운데에 야이차와 같이 … 옳은 일을 하여 힘을 쓰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나이가 적건 (많건) … 형제이건 이와 같이 아뢰는 자가 대인(大人)인가 소인(小人)인가 …D부분… 部 출신의 나불탐학실리 대사, 추문…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은 나리촌 … 人은 물지차 아척, 書人은 훼부 출신의 … 인석서립인은 비금개리촌 … 지 대오이다.3. 비문의 내용과 성격이라는 부대의 지휘관으로 생각되어 왔었는데, 1974년에 이종욱은 창녕비에 등장하는 군주는 주, 당주는 군, 도사는 현의 장관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부명에 있어서는 喙部와 沙喙部만이 등장하고 있어서 이 두 部의 군사적인 특징이나 단양인근 지역과의 관련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인명의 표기에 있어서는 喙部소속의 인물은 4자이며 沙喙部소속의 인물은 3자이다. 이는 부의 명칭 다음에 ‘部’란 글자가 빠짐없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국가적 조치로 인하여 그 획일성이 유지되던 시기의 인명표기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관등명 또한 끝에 반드시 ‘干支‘를 붙이는 정연함을 보인다. 진흥왕 순수비가 ’干‘만을 표기한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데, 법흥왕대의 금석문들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節敎)부분은 也?次가 무언가 일을 하는 데에 힘쓰다가 죽게 되어서 그의 처와 자녀에게 포상이 주어졌다는 내용이다. 비문의 아랫부분에 也?次의 妻와 子가 아닌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과 也?次는 분명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정구복은 이들이 형제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렇다면 이 節敎의 내용은 형제관계인 듯 보이는 也?次와 刀只, 오례혜(烏禮兮)의 부, □弗兮, 悅利巴는 모두 공훈을 세우다가 죽게 되었고 이들의 처 3인에게는 무엇인가를 (4년간))이용하도록 하였고, 也?次의 小女 師文에게는 제1등급의 포상으로 下干支 이상의 외위가 주어졌을 것이며) 赤城更烟을 면제시켜 주고 부의 재산을 혼자 물려받도록 하였다. □□□의 子인 刀只와 그의 소녀 오례혜에게는 하간지의 외위가 주어지고 이 지방에 慣行되던 전사법을 공인하여 그들을 별관으로 삼아 전사 6家를 그들에게 주었다. □弗兮의 女 道豆只와 또 열리파의 소자 도라혜에게는 하간지 이하의 외위가 주어졌을 것이다. 鄒文村 출신의 공형 파진루는 적성갱연사무를 관장하는 향직의 관리로 보이며 앞의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恩典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야이차의 공적에. 적성전사법적성비의 비문에는 佃舍法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특히 赤城佃舍法이라고 나와있어서 신라의 국법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행해졌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즉, 국법이라는 신라의 고유한 법이 존재하고 있으면서, 적성전사법이라고 하는 고구려 때부터 사용하던 이 당시의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성전사법이라는 것은 과거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문제와 점령 후 인구를 옮겨오는 문제, 인구의 배치와 관계되는 문제 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중국에서의 전사는 소작인, 전호, 전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적성전사법의 전사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 받은 토지를 경작할 사람을 붙여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적성의 점령 후 피지배층 일반인들은 고구려군의 철수와 더불어 이 지역을 비워두고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유력층의 일부가 고구려로 넘어갈 수는 있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활의 기반인 적성지역에 남았을 것이다. 야이차가 적성출신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추츤에 무게를 더해준다. 또한 당시 피지배층 일반이 후퇴하는 고구려를 쫓아다닐 만큼 국민적 일체감이 형성되지도 않았을 것이로 보여진다. 이에 따라 해당지역을 점령한 신라 정부는 그 지역의 역사와 전통, 문화 등의 차이에 따라 일반적인 국가적 율령, 즉 국법의 실시를 유보하고 국법의 정신과 해당지역의 상황을 감안하여 피점령지에 대한 국지적 법을 제정하여 실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당시 신라의 최전방 기지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적성이었다. 적성을 점령하고 이곳의 동요를 없애기 위하여 신라는 이곳에 이주하는 民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이 필요했을 것이다. 추문촌 당주, 물사벌주 당주 등이 이와 관련된 자들로 보이고 있으며, 적성전사법도 이러한 맥락에서 위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성비의 내용은 곧 율령과 관계되는 자료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토지관계와 재래의 원주민과 이래의 신라계민호에 대한 특혜같은 것을 규정한 절목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진흥왕 11년(550)으로 보는 입장이다. 각각 입론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므로 새로운 자료가 추가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이들 세 견해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를 보완해 줄 새로운 자료의 출현이 기대된다.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적성비의 건립연대를 진흥왕대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12년을 기점으로 하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6. 맺음말단양신라적성비는 왕명(王命)을 받은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장군이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후 그들을 도와) 공을 세웠던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次) 및 그와 일정한 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포상(褒賞)하고 난 뒤 이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성 지방민들을 위무(慰撫)할 목적에서 세운 비로 추정된다. 이 비에는 기존의 문헌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어 신라사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기본적으로는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사료의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내용면으로는 사람을 소자, 소녀 하는 식으로의 성별, 연령별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토지에 대해서도 전사법으로 규제하는 등 어떤 법적인 규정 소위 율령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에서 그 의의를 들 수 있다고 한다.참고문헌金錫夏, 1978, 「丹陽眞興王赤城拓境碑 解讀文」『史學志』12, 단국대 사학회金元龍, 1978, 「丹陽赤城의 歷史?地理的 性格」『史學志』12, 단국대 사학회南豊鉉, 1978, 「丹陽赤城碑의 解讀 試攷」『史學志』12, 단국대 사학회邊太燮, 1978, 「學術座談 丹陽新羅赤城碑」『韓國學報』12, 일지사邊太燮, 1978, 「丹陽眞興王拓境碑의 建立年代와 性格」『史學志』12, 단국대 사학회李基白, 1978, 「丹陽赤城碑 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部分의 檢討」『史學志』12,단국대 사학회鄭永鎬, 1978, 「丹陽新羅眞興王赤城碑片의 收拾發掘調査 略報」『史學志』12, 단국대사학회鄭求福, 1978, 「丹陽新羅赤城碑 內容12.)
관료적 안민실학자, 잠곡 김육목차1. 머리말2. 잠곡 김육의 생애3. 잠곡 김육의 경제시책1)대동법의 확대2)화폐유통정책4. 사회, 문화시책5. 잠곡 김육의 사상6. 맺음말1. 머리말潛谷 金堉(1580년~1658년)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 발발했던 조선 최고의 국난기였다. 이러한 전란으로 인하여 국가적으로 물적, 인적 자원에 막대한 손실을 입어, 이후의 정책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로 대두된 것은 재정의 확보에 대한것이었다.조선시대 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대체로 租稅, 貢納, 役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잠곡 김육이 확대 실시를 주장한 대동법은 공납에서의 모순을 개선코자한 것이었다. 각 읍단위로 균배되었던 공물을 전결수에 따라서 책정하고 현물대신에 미, 포, 전으로 부과하게 한 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선조 2년(1569) 李珥의 ‘收米之法’의 건의에서 대동법의 기원을 찾고 있으며,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실시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인조 원년(1623)에 가서 조익의 건의로 三道大同廳이 설치되어 강원도에서 실시되고 있던 상황이었다.)대동법의 실시는 국가재정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실시에 있어 양반과 지방 토호들의 반대로 인하여 1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잠곡 김육은 이러한 대동법의 확대실시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고 호서, 호남대동법을 확대실시시킨 인물이었다.잠곡 김육에 대한 초기연구로는 한영국)과 원유한)의 연구를 들 수 있다. 한영국은 김육을 인물사적인 측면에서 연구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서술하였다. 원유한은 김육의 경제사상 중 화폐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김육을 ‘실천적 실학자요, 진보적 개혁사상가인 동시에 대정치가’로 평가하였다.)그 후 김육의 경제사상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연구들이 진척되었는데, 우선 17세기의 대신과 유현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하여 김육과 김집에 대한 비교연구가 이루어졌다.) 또한 당시의 산림세력과 대비시켜 漢黨으로 칭해지던 김육과 그 추종세력에국행으로 풍부한 견식과 이상 또한 지니게 되었다.인조 16년(1638)에는 농민의 과중한 부담과 양란으로 인한 국가의 재정난을 타개할 의도에서 대동법의 실시를 건의하였고, 인조 22년에는 중국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用車, 用錢論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또 우리나라 역법의 불완전함을 바로잡고자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을 실시하기도 하였다.(효종 4년)효종 조에 이르러 三公의 자리에 올라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화폐유통?수차제조 등의 과감한 정책을 펴나갔다.김육의 가계는 이후 자신은 국가의 노신으로, 또 두명의 아들은 고관대작으로, 손녀는 현종왕비가 되어 숙종을 낳기까지 하는 등 엄청난 영달을 보게 되었다.3. 잠곡 김육의 경제시책1)대동법의 확대김육의 경제시책은 무엇보다도 대동법의 확대실시에 중점을 두어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대동법이란 민호에 부과하는 토산현물을 폐지하는 대신 전결의 결수에 따라 일정한 미, 포, 전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 미, 포, 전으로 공인을 통해 각종 수요물자를 구매사용하는 재정제도이다.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처음 실시하고, 인조 원년에 강원도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지방토호들과 또, 이와 이해를 같이하는 관료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김육은 대동법의 확대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였다.김육은 충청감사재임시인 인조 16년(1630)에 호서에 대동법의 실시를 요구하는 疏를 올렸다. 김육은 대동법의 시행이 救民의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재정확보책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육의 제안은 비변사에서는 찬의가 되었지만, 호조와 廷臣들이 매결 7두의 경비로는 국가재정을 충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 김육의 疏는 기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육은 당시 산림출신인 김집 등과 불화를 낳게 되기도 하였다.효종이 즉위하고 우의정에 제수된 김육은 다시 대동법의 시행을 서두르며 효종에게 疏를 올렸다. 이에 효종은 諸臣의 회의를 열고 상의하도록 하였는데, 廷臣동법의 지속적 실시를 遺疏로 건의하였다.2)화폐유통정책대동법의 실시로 인하여 두가지의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공인의 대량 구매로 각지방의 산물이 서울로 집중된어 상품화가 추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인의 주문에 의하여 수공업생산의 합리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도시에서의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농촌에서도 장시가 늘어나고 상품유통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게 하였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달로 인하여 화폐의 사용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김육은 도합 4차례의 中國使行을 통해 중국에서의 화폐유통을 견문할 수 있었고, 국내에서 비교적 상업이 발달하여 화폐가 원활히 유통되던 개성에 留守를 역임한 바 있어서 화폐의 유용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그러나 김육의 이전에도 화폐제도에 대한 논의는 항상 있어왔다. 인조대에만 하더라도 인조 3년에 鑄錢이 실시되었지만, 匠人數의 부족으로 많은 주전을 할 수 없었고, 동전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이 부족하여 문제가 되었다. 그 후 전화부족분을 해결하기 위해 私鑄의 허가도 고려되었지만,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으로 좌절되고 말았다.인조 22년 김육은 평안도와 황해도(兩西)에서의 用錢시행을 건의하였다. 두 개 도에 用錢을 실시해 전국적으로 실시함으로 발생하는 동전의 부족현상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이 두 개도가 중국과의 경계선에 위치함으로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해 용전의 편의를 모르는 타지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김육은 이렇게 우선 兩西에서 용전을 시행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한 것이다. 인조는 이러한 제안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여러차례의 실패로 인하여 인조 자신이 의욕을 상실한 것이었다.대동법의 실시와 마찬가지로, 김육이 행정가로서의 경륜을 펴 나갈수 있었던 것은 효종때였다. 효종 원년(1650), 김육은 陳慰使로 연경에 들어갔다가 그 행자로 중국은전 15萬文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를 평양, 안주 등지에 분치하여 유통케하여 성공하면 계속하여 다른 곳에서도 鑄錢하자고 건의한 것이다자 申最와 외증손자 김석주(김육의 손자)로 연결되는 것을 보아도 상촌 신흠의 사상은 김육의 사상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하여 앞에서 언급한 漢黨의 이념적 배경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김육은 당시 널리 보급되었던 역법을 보다 정확한 것으로 개정하였고(시헌력), 수레의 사용과 수차의 제조,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양란으로 유실된 서적간행, 활자개량등을 시도하였고, 개인적인 저술 또한 학문만을 연구했던 학자들에 비해 뒤지지 않을 정도의 분량을 남겨놓았다.?역법의 개혁조선 세종 때 이 편찬되어 약3~400여년 동안 쓰이다 보니 역법상의 절기가 실제와 맞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육은 아울러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湯若望(Johann Adam Shall von Bell, 1591~1666)의 시헌력이 극히 정밀함을 알게되고 역법을 개혁하고자 하였다.인조 23년 당시 관상감제조로 있던 김육은 신역법 사용의 啓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의 시헌력을 소개한 서적들)이 너무 난해하여 김상범에게 청의 흠천감)에서 배울수있도록 하였다.이러한 노력으로 효종 4년(1655)에 마침내 시헌력이 채택되어 신역법의 사용이 시작되었다.이로써 1896년 태양력이 사용되기까지 농어촌에 필요한 기후정보 제공과 시간의 척도기준으로 사용되었다.)?수레, 수차의 사용김육은 인조 22년(1644)에 行錢의 문제와 더불어 用車論을 거론하였다. 이는 화폐통용 정책과 마찬가지로 중국견문을 통해서 얻은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김육의 용차론은 조선의 지형이 중국에 비해 험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단점은 수레 사용에 있어서의 편리함을 생각한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인조의 가납으로 수레의 사용은 공식적으로 실시되었지만, 그 성과는 현재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김육이 이후 수레를 타고 燕行길에 오르는 등 몸소 실천하며 결과를 이루려는 모습을 보였다.또한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한 인조 16년(1638) 水車 제조론도 개의 이익을 앞세워야하며, 이때 국가의 이익 또한 뒤로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安民益國之道라고 표현된 이 사상은 대동법의 실시와 화폐정책의 주장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대동법을 통해 민의 부담을 줄이고 이를 통해 국가 재정의 확충을 꾀한 것이나, 用錢을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늘리고, 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김육의 사상은 당시의 보수적인 산림학자들에 비하여 대단히 개명적이며 현실적인 관인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가 비록 실학파 학자들과 기본적인 입장을 달리하고 있지만, 개명적이고 선진적인 김육의 사상은 실학파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2) 김육과 관료적 안민유학자들김육은 제도적 개혁을 통한 왕도의 달성이라는 관료적 안민론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이러한 김육의 주장은 그와 당색을 달리한 인물들과의 교분을 갖게 해 주었다. 일찍이 산림적 안민론에 비판했던 이식은 김육을 정치적으로 후원해주던 인물이었다. 1644년 김육을 형조판서의 제 1 후보로 추천하였기 때문이다.또 남인 계열의 인물들과도 교분을 맺을수 있었다. 관료적 안민에 대한 같은 정서때문이었다. 김육이 자신의 평생의 지기라고 표현한 남인 조경(1586~1669)은 김육과 함께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심을 수습할 것을 청하고 허락을 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또 한양 조씨의 족보에 김육이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는데, 김육의 외증백부가 조광조이므로 김육은 분명 한양 조씨와 연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에서 조경과의 친분을 인해 자신이 서문을 씀을 밝히고 있다.대동법 시행 과정에서 일찍부터 참여하였던 남선(1582~1654)은 김육과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함께 조정에 서고 함께 기로소)에 든 막역한 사이라 하였다.)이상의 인물들은 김육의 사상의 확립과 유지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민을 우선시 하는 김육의 사상이 이들의 사상과 통하여 이들은 당파를 초월하여 서로의 사상의 지지자가 되어주었고, 정계에서조차 힘이 되어주었다. 1988
북한 역사학계의 동향과 역사인식의 특성목차1. 머리말2. 북한역사학계의 시기별 동향(1)기초 축성기: 1945년 해방~한국전쟁(2)체계적 정립기: 한국전쟁~1960년대 후반(3)주체사관의 전면화: 1960년대 후반~1980년대(4)‘조선민족제일주의’ 주창기:1990년대 이후3. 북한의 역사관과 역사인식의 특성(1)역사의 본질규정(2)역사 평가의 기준(3)역사 인식의 특성4. 북한 역사학의 특성5. 북한 역사학의 문제점6. 맺음말1. 머리말분단 이후 남북한의 역사학은 서로 다른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인 변동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우선 남한의 역사학계는 신민족주의 사학을 제창한 손진태와 이인영 등이 납북되었으며, 유물사관을 따르던 백남운 등은 미군정 치하에서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평양으로 가 북한정권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한의 역사학계는 이병도 중심의 문헌고증사학의 학풍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는 자의 또는 타의로 월북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북한 정권은 1950년대의 내부적 권력투쟁을 거쳐 1960년대 중소분쟁 등 외적 위기에 대처하면서 주체사상을 확립해갔고, 1970년대부터는 김일성 유일체제가 강화되는 속에서 주체사관의 완성을 보기에 이른다. 1980년 후반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에 위기를 느끼고는 내부적 통합을 위해 민족적 자긍심으로 심는 ‘조선민족제일주의’가 등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같이 북한 내부의 변화의 모습은 북한의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북한사회에서의 역사를 보는 시각 또한 정치체제와 불가분의 것으로 보고 있어 이러한 역사연구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증가되었다.결국 역사가 현실의 정치를 정당화하도록 국가권력으로부터 강요받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에서의 역사연구는 조선로동당의 사상사업의 주요 도구로, 매우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체제의 안정에 최대한 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처럼 역사가 사상사업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까닭으로 유물론이었지만 이에 대한 이해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력사제문제』에 수록된 북한학자들의 논문들은 대개 변증법적 유물론을 개설적으로 안내하는 수준이었고, 「외국사조」란을 통해 소련학계의 상황과 논문을 주로 소개하였다.당시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최근세 민족해방운동사와 교육용 ‘간이통사’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는 북한이 역사교육을 사상사업의 중요한 부분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민족해방운동사를 정리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49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는 최창익, 이청원 주도 하에 『조선민족해방투쟁사』를 공간하였다.이 시기 연구와 편찬의 기본방향은 식민사학의 극복과 유물사관에 의한 역사서술이었다. 그러나 이에 의한 통사의 서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정권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된 혁명전통에 관한 연구는 시급한 과제였다. 1949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조선민족해방운동사』는 그러한 성과였다.(2)체계적 정립기: 한국전쟁~1960년대 후반이 시기 북한은 한국전쟁과 전후의 복구사업, 사회주의기초건설,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 등으로 인하여 정치적, 사상적으로 격동기였다. 1952년 조선로동당의 ‘조직?사상적 강화사업’과 남로당 계열의 숙청, 1955년 김일성의 ‘교조주의, 형식주의 타파’와 ‘사상에서의 주체확립’, 1956년 조선로동당 3차대회 이후의 이른바 ‘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투쟁’ 등 1950년대의 북한은 한국전쟁의 책임 규명과 전후 사회주의 건설의 방략을 두고 조선로동당 내에서 심각한 사상투쟁과 숙청사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8월 종파사건’은 사회 전부분에 대한 광범위한 ‘반종파투쟁’과 ‘사상?이론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역사학 분야에서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 독립과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 이론논쟁)’, ‘해방 전 조선의 사회경제구성 논쟁)’, ‘근현대사 시기구분논쟁)’ 등 실로 풍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이러한 사상투쟁과 논쟁들은 학계의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하게 했으며 연구자의20년대 맑스레닌주의의 보급과 로동운동의 발전』, 김을천의 『항일무장투재시기 장백산근거지』등이 있다.이 시기는 근대사 시기구분 논쟁과 같이 유물사관에 주체가 적용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주체적 입장의 강조는 1950년대 교조주의, 종파주의를 공격하던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의 연장에 있었다. 역사서술을 정권이 ‘지도’하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북한 정권의 국가적 지원은 역사연구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이 시기 각 시대별로 사회성격과 시기구분에 대한 오랜 논쟁과정에서 연구는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주체사관이 성립되고, 1990년대 조선민족제일주의가 주창되면서 시기구분과 사회성격에 대한 논의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역사연구 성과는 북한 역사학의 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3)주체사관의 전면화: 1960년대 후반~1980년대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이른바 ‘미국의 공세전략’에 맞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행하는 ‘병진노선’을 채택하는 한편, ‘사상, 문화적 공세’에 대응하여 이른바 혁명적 조치로 당내 갑산파를 수정주의자로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전후까지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맑스레닌주의 이해를 위한 방법론적 지침을 넘어, 사상으로서 맑스레닌주의와 나란히 주창되기에 이르렀다.1974년 북한은 김정일의 주도로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조선로동당의 최고강령으로 선포하였으며,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전후하여, 김정일의 주도로 주체사상은 철학적 원리까지 포괄하며 전면적으로 체계화되었다. 북한에서의 주체사상은 이제 맑스레닌주의를 포괄하는 더 상위의 철학적?사회역사적 원리로 체계화되었고 유일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972년 조선사회과학자대회는 역사연구를 포함한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주체사상에 기초를 두고 연구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이에 역사학 분야의 네 가지 과업으로 ①우리 력사에 대한 주체적 립장에서의 연구, ②미제와 일제의 침략적 죄행을 력사적으로 폭로 단죄함으로써 인민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민족’에 대한 상징적 구심점도 필요하게 되었다.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면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절실해 졌는데, 그 결과가 바로 1993년 ‘단군릉 발견’이었다.) 이에 고조선의 기원과 그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북한 중심의 정통론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또한 평양은 고조선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유역이 인류 기원지의 하나이며 한민족의 발상지이고 세계 4대 문명에 뛰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우수한 문명을 꽃피웠기 때문에 세계 4대 문명은 5대 문명으로 개칭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3. 북한의 역사관과 역사인식의 특성일반적으로 역사관을 구성하는 요소는 역사발전의 법칙과 동력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라는 역사의 본질에 대한 파악과 후세의 역사가들이 과거의 역사적 현상과 사물을 평가, 분석하는 기준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북한의 변증법적 유물사관과 주체사관을 위의 두 가지 요소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어느 정도 북한의 역사관과 역사인식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1)역사의 본질규정변증법적 유물사관의 기본교리는 인류역사는 사회적 생산의 발전에 의한 사회제도의 합법칙적 교체과정이고, 인민대중이 역사의 창조자이며, 계급사회 이후 역사발전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계급투쟁이라고 규정하였다. 변증법적 유물사관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본질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힘으로써, 스스로 역사에 대한 기존의 관념론과 주관주의, 신비주의, 영웅주의 사관을 퇴치한 것으로 평가하였다.주체사관 또한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기존의 어떠한 역사관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완성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선행한 노동계급의 역사관으로 일정한 수준에서 인정하며 그 한계를 강조하였다. 주체사관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한 생산관계의 변화?교체라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의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객체의 운동법칙을 규사대주의’라고 맹렬히 비판하고, 당시의 역사적 제한성과 현실성을 기초로 그 의미를 합당하게 평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당시 북한의 문제의식은 우리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주장하면서 민족허무주의를 비판하는데 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아울러 ‘노동계급?당성의 원칙’을 떠나 우리 것이라는 이유로 과거의 것을 일방적으로 찬미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우경적 복고주의’로 비판하였다. 북한 역사학은 그러한 예로 앞서 언급한 인물의 탁월한 활동을 그 제한성마저 무시해버리고 완전히 ‘인민적인 인물’로 묘사하거나, 팔만대장경 같은 문화유산에 대해 ‘당대의 슬기로운 지혜와 진보성을 적절하게 분간하여 계승하지 못하고 낙후성과 반동성까지 찬양하는 것’등을 지적하였다. 또한 복고주의에 빠지게 되면 과거의 애국명장과 현재의 영웅을 동일시하고 ‘양반 영웅주의’와 출세주의를 비롯하여 계급사회가 지녔던 온갖 불건전한 문화와 사상을 재생시킨다고 비판하였다.북한의 주체사관에서도 당성과 역사주의 원칙의 결합, 복고주의와 민족허무주의의 비판 역시 유효하다. 그러나 주체사관에서는 주체의 문제가 당성과 역사주의 원칙의 정당한 결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라 오히려 당성과 역사주의 원칙을 보장하는 좀더 상위의 기준이 된다. 주체사관을 이것을 ‘주체성의 원칙’이라고 표방하였다. 주체성의 원칙이란 “역사 연구에서 자기 나라 혁명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을 요약된다고 한다.이처럼 북한의 주체사관은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일련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주로 민족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3)역사인식의 특성북한의 연구성과 중에서 주체사관에 의해 우리나라 역사를 체계화하고 있는 것으로는 『조선전사』33권이 대표적이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전사』는 주체사관에 의거하여 이른바 계급투쟁, 반침략 투쟁, 자연개조투쟁, 인간개조투쟁 등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 역사를 체계화하였다고 한다.『조선전사』의 시대구분을 통하여 역사인식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성을 지적하면 다음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