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김일성의 만주 항일연군 활동의 허와 실.hwp우리의 근현대사를 통틀어 김일성이라는 인물만큼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고 한국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또 있을까? 북한의 조선로동당은 김일성을 ‘인류의 태양’, ‘절세의 위인’, ‘혁명의 위대한 전략가’,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창조와 건설의 영재’ 등으로 선전하여왔다. 반면 우리의 정부는 오랫동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사실을 부인하면서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을 싫어하면서도 공포감 때문에 복종하는 척하고 있다고 했다.)과거 김일성은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고 반드시 응징해야할 존재로서 존재해 왔다. 그는 한국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인물로 여겨져 왔다. 현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으며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맞는 부분이 많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그동안 그가 신의 위치로까지 상승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그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은 과장과 왜곡을 통해서 신화의 경지로까지 격상되었다. 이처럼 김일성에게 남과 북에서 혹은 국제적으로 이런 매우 다양하고 상반되는 평가되는 것은 남과 북 모두의 체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것과 관련된 문제로 볼 수 있다.김일성 연구에서 오랫동안 최대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로 군림한 김일성이 일제시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북한의 김일성이 가짜인가 진짜인가 하는 진위논쟁이었다. 그러나 ‘가짜 김일성론’이 신빙성 없는 자료들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관련 문헌에 대한 불철저한 검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관련된 논쟁은 그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투쟁성과에 대한 평가의 문제로 이행하게 된다.그렇다면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이 보고서는 그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는 찾아나가는데 주안점을 두고 전개해 나간다. 우선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어떠한 사람이며 그의 만주 무장 항일투쟁 활동은 어떠한 것이었는서 반석이라고 지어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렇게 볼 때 김일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기독교와 함께 김일성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준 집안 정서는 민족주의이다. 숭실중학을 졸업한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1917년 서당교사로 있으면서 평양의 민족주의 자하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이 때문에 1918년 검거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외숙부인 강진석도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집안의 민족주의적 정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1926년 천도교도인 민족주의자 최동오가 숙장으로 있던 남만주의 화성의숙 입학으로까지 이어졌다.김일성의 어린 시절 성장기는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다. 김일성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는 부모를 따라 만주, 평양, 다시 만주를 전전하였다. 또한 그의 부친인 김형직은 1926년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강반석도 김형직 사망 후 6년 만에 40세로 사망했다. 김일성은 20세의 어린 나이에 고아의 처지가 되었다.김일성은 1927년에 길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했다. 바로 이 육문중학에서 김일성은 상월 등 진보적인 교사들로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1929년 입제첩보자료에 첫선을 보이게 된다. 육문중학 시절인 1929년 가을 김일성은 반일활동혐의로 중국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생애 처음으로 수개월 동안 감올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김일성은 1930년 봄에 감옥을 나오자 길림성 근방에서 급진청년들이 다수 모여 있던 이종락이 이끄는 국민부 계통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한다. 이즈음 그는 반일운동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변명(變名)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김일성(金日成)이었다. 그러나 1931년 초 조선혁명군이 붕괴되자 곧 동만(東滿, 간도지방)으로 이동하여 공산청년동맹 요원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이때 1국 1당주의 안도현의 공산청년조직에 관계하고 있던 김일성은 그 지역에서 1932년 4월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중국 구국군 우(于)사령 부대 산하에서 별동대를 조직했다. 이 부대를 북한에서는 반일인민유격대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창설일을 4월 25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 별동대는 곧 왕청현에서 결성된 왕청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그는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갖추어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1934년 3월 결성)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주로 빈?고농 출신으로 이루어져 문맹률이 80%가 넘었던 항일유격대 속에서 중학까지 공부한 김일성의 학력은 상대적으로 뛰어났으며 거기에 그의 능력이 더해져 22세의 젊은 나이에 단(團) 정치위원이 될 수 있었다.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은 조?중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그 지도부가 중국공산당이었다. 이러한 지취체계로 인해 당시 조선혁명에 대한 지신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중국혁명에 복무를 요구하는 중국 공산당과 갈등을 빚기고 하고 그로 인해 핍박도 받았다. 그러나 1935년 코민테른 제 7차 대회를 계기로 중공이 조선인 유격대의 주력부대인 동만의 유격부대를 조선혁명의 추진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이 부대는 1936년 3월 산하에 3개 사(師)를 둔 동북항일연군 제 2군에 개편되었다. 이 개편에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 사장(師長)이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24세였고 그가 지휘한 유격대 병력은 약 600명 정도였으며 과반수가 조선인이었다.그의 부대는 조선해방과 연관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조?중 국경지대인 장백혁으로 진출하게 되고 동남만 유격대의 통합편제로 인해 곧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로 개편되었다. 제6사는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 1936년 5월에 결성된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작업을 추진하는 주체가 된다.)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김일성의 항일 운동은 바로 이 동북200명 규모의 1고군 2군 6사 부대원이 혜산진 부근의 지방관서,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하루 동안 점령했다가 다음날 철수하는 과정에서 추격하는 일경 7명을 살해했던 사건이다. 이 때 그 지역의 공산주의자인 소위 갑산파와 협조하에 작전을 하였다.) 보천보 전투는 당시 국내언론들이 이례적으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그 파장은 매우 컸다. 특히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무기정간에서 막 풀려난 동아일보는 6월 5일자로 두 차례에 걸쳐 이 사건에 대한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이러한 언론의 관심은 암흑기로 빠져든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탈피의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국내 민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일본 경찰이 내건 현상금이 제1급에 해당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그것은 해방 후 그의 지도자 부상에 유리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한편 김일성은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격대 편제 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1939년 3월말까지 김일성은 그의 부대를 이끌고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100여 일간의 행군길에 올랐다. 엄혹한 자연과의 투쟁, 극심한 식량난과 피로와의 투쟁, 무서운 병마와의 투쟁, 적과의 투쟁 등으로 고생이 너무나 막심했기 때문에 북한은 그 행군을 가리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하였다.제2방면군 군장 시절 그는 1940년 3월 25일 250명의 유격대원으로 안투현 홍치러에서 150명 규모의 마에다 부대와 전투하여 완승하였다. 일본 경찰관 58명, 부역 노무자 17명을 사살하고, 13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외에도 그의 유격대는 일제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1940년 7월에는 유격대원이 340명까지 증가할 정도로 세력이 확장되었다.)김일성 유격대의 승리가 쌓일 때마다 그의 부대에 대한 일제 토통해 북한으로 귀환하기 위해 만주의 가목사로 나아갔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시 하바로프스크로 나와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귀국했다.)Ⅲ. 김일성에 대한 왜곡1. 남한의 ‘가짜 김일성론’김일성의 생애 중 국내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부분은 그의 항일무장투쟁 시기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남한 사회에 광범위 하게 퍼져 있던 ‘가짜 김일성론’의 문제점이 1980년대 말부터 이종석 박사 등에 의해 명백하게 밝혀지고, 이후 김일성의 업적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쟁점이 바뀌게 되었다. 물론 ‘가짜 김일성론’이 근거 없다고 해서 실제보다 과장되게 선전해온 북한 측 주장이 옳다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가짜 김일성’론이 남한 사회에 광범하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28~29) 결정을 둘러싸고 좌우익이 팽팽하게 대립되었던 1946년 초부터라고 이종석 박사는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 분위기 속에서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 취임하고, 이듬해 2월에는 새로 조직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김일성은 자연스럽게 우익의 표적이 되었다.특히 우익세력은 김일성의 나이가 너무 젊다는데 착안하여 그의 신원을 의심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가짜 김일성론’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짜 김일성론’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허구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겨울이면 영하 40도가 넘는 혹한과 배고픔을 극복하고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일제의 토벌에 맞서야 하는 고난의 항전이었다. 젊고 정신력으로 무장된 사람만이 그런 상황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말대로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김일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 한편 우리가 당시 아시아 공산주의운동의 현황을 살펴본다면 30대 초반의 공산주의 지도자 출현도 보편적인 현상이었음을 본다면 ‘33세의 김일성 장군’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북한의 김일성은 항일유격.
우리의 편견과 실제와의 차이.hwpⅠ. 시작하며..1. 공기업과 사기업이란?기업은 소유주체에 따라 사기업(私企業)과 공기업(公企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1) 공기업의 정의공기업의 실체와 관련해서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 또는 소유?경영하는 기업",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며 경영하는 사업",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하는 사업 중 기업적 성격을 지닌 것" 등 다양한 정의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기업을 생산조직(productive entity)의 한 형태로서 중앙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소유권에 기초한 통제 또는 지배를 받는 가운데 그 생산물을 판매하는 기업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사기업과 더불어 많은 공기업이 존재하고 있다. 우편, 철도, 상하수도, 담배, 전기, 전화, 가스, 은행, 방송, 철강, 고속도로, 지하철 등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기업들이다. 우리나라의 공기업은 과거 경제개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IMF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2) 사기업의 정의사기업은 개인이 출자하여 경영하는 기업으로서 공기업, 국가기업과 대립되는 개념이며 자본주의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기업형태이다. 출자자가 1명일 경우 단독기업, 여러 명일 경우를 집단기업이라고 한다. 단독기업은 개인기업이라고도 하는데, 자연인이 자본의 형성과 경영을 담당하므로 기업의 흥망이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 집단기업은 다시 조합기업과 회사기업으로 나뉘는데, 조합기업의 대표적인 것으로 익명조합을 듯 수 있다. 이것은 경영자와 자본가가 합작하여 경영하는 기업형태이지만 법률적으로는 영업자의 개인기업으로 나타난다. 회사기업은 영리사업을 a목적으로 설립된 사단이며 노동과 자본이 합리적으로 결합된 조직체로서 기업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형태이다. 사기업의 기원은 1760년경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면서 근대적 기업이 생 다른 한 팀은 한국 조폐공사의 인사제도를 중점적으로 조사했다. 한국조폐공사는 2004년 여성평등고용대상을 수상해 여성복지제도에 큰 비중을 두어 자료를 수집하였고, 삼성에버랜드의 경우는 우리나라의 기업들 중에서 직원 동기부여 프로그램과 직원경력개발 프로그램이 가장 잘 되어 있는 기업 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중점을 두어 자료를 수집했다.일단 첫 모임에서는 기본적인 개요의 작성과 큰 주제를 정하고 그 세부적인 기업의 조사 내용은 각 조별로 자료 수집과 Daum 카페(http://cafe.daum.net/insafour)를 통해서 0n - Off Line을 통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각 기업의 인사제도에 대해 어느 정도 특징을 발견했고, 교내에서의 자료수집만으로는 자료의 양의 부족함을 느껴 기업의 방문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방문일정을 잡아 인터뷰 내용을 준비했다. 인터뷰 내용 선정기준은 우선 채용에서 퇴직관리에 이르는 인사과정의 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질문과 그 하부에 좀 더 세밀한 자료를 준비하고 조폐공사는 여성복지제도, 삼성에버랜드는 인적자원개발과 직원 동기부여 프로그램이라는 측면에 포커스를 맞췄다. 교과서의 원론적인 내용과 최근의 신문 기사을 바탕으로 의견을 조율했다.Ⅱ. 삼성에버랜드의 인사제도1. 에버랜드 기업소개 및 조직구조(1) 에버랜드 기업소개1976년, 국내 최초의 가족공원인 자연농원을 시작으로 국내 레저, 서비스 문화의 심지에 불을 댕긴 에버랜드는 그 후 20여 년 넘게 국내 가족놀이의 문화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에버랜드는 지난 1996년, 월드 클래스 리조트로 거듭나기 위하여, 용인자연농원에서 삼성에버랜드로 BI(Brand Identity)를 변경하여 더욱 더 즐겁고 행복한 공간으로 태어났다.에버랜드는 2006년 개장 30주년을 앞두고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삼성의 기업 이념을 바탕으로 인간존중, 복합화, 국제화를 통하여[21세기 체제형 복합 리조트 단지]로 도약할 계획을 갖고 있을 위해 내부로는 전략적 인재 육성의 종합 학습 기관의 역할 수행을 외부로는 세계 서비스 문화 창달을 통해 21세기 World Class 종합 서비스 전문 교육기관을 표방한다.* 서비스 아카데미의 위상 및 공헌① 서비스교육의 메카94년 6월 개원 이래 4만 5천여명의 사내교육과 700여개 단체 총 24만 여명의 외 부 기관의 교육② 고객만족경영 명예의 전당에 헌정 및 IAAPA 대상/특별상 수상96~2000년 고객만족 경영대상 5년 연속수상 및 명예의 전당에 헌정세계테마파크협회(IAAPA) 서비스 교육부분 특별상(97년). 대상(99년) 수상③ 서비스교육기관 부문 아시아 최초 ISO 9001 인증 획득교육 기획/개발 및 실시 분야에서 글로벌 Standard를 구축한 체계적이고 전문적 인 서비스 교육기관④ 국제적인 서비스 전문 교육 및 컨설팅 기관대만 최대의 워터파크 장억 그룹 ‘디스커버리 월드’에 서비스 교육 및 컨설팅 을 실시하는 등 해외로 에버랜드의 서비스 문화를 전파하는 글로벌 서비스 교육 기관⑤ 국내 기관들과 파트너십 협정 체결국내 유수 기관들과 제휴 및 파트너십 협정을 체결하고 다양한 협력을 통해 서비 스 교육의 질을 높여가는 서비스 교육의 선두주자* 서비스 아카데미의 교육과정과정명교육대상교육목표내용Service Basic Course서비스업 종사자일반시민최고의 친절인 양성Basic EtiquetteCourseService Superiority Course서비스 리더서비스업 종사자서비스 추진자 양성업종별 특화 프로그램(호텔/병원/금융/유통/공무원)CS Instructor CourseCS강사CS강사 희망자수준 높은서비스 전도사 육성CS강사 양성 P/GCS교수방법론CRMCS 추진 실무자CS강사서비스 마케터 양성CRM Solution 교육Service Leadership서비스업 임원정부/국영기업 간부서비스 리더 양성Everland Leadership입문교육- 삼성에버랜드 사업부 내의 신입조리사 입문과정교육- 교육훈련기간 : 2주 합숙과정(8시간/1일)양성교 상품으로 3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수여한다.(5) 우수 CAST 발탁제도- 목적 : 능력 및 근무성과가 검증된 우수인력에 대한 계약직 발탁으로 기간인력 화하여 급여인상의 인센티브를 부여함으로써 근무의욕 증진을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센티브 : A-CAST 중에서 평가가 좋은 사람을 1년 계약의 계약직으로 승격하 여 기존의 시간급 기준에서 연봉기준으로 급여체계가 바뀌고 1년간 의 안정적인 고용관계를 유지해주고 아르바이트에서 준사원으로 격 상이 된다. 전직 시에는 정사원과 동일한 차원의 근무능력이 인정된 다.(6) OFF stage & Drop 커튼 제도- OFF stage라는 제도는 고객에게 불만을 제공한 자를 재교육시키는 제도이며, Drop 커튼제도는 징계가 누적된 직원들을 추방하는 제도이다.5. 에버랜드의 복리후생제도(1) 에버랜드의 복리후생제도 체계기숙사관리- 정원관리 - 입퇴실관리- 고충처리 - 안전관리지원업무- 의료비지원 - 건강진단- 사택관리 - 이미용실관리- 주택조합지원 - 선물관리- 사원식당 관리 - 현장 휴게실- 자녀학자금 관리 - 귀향버스운영마을금고- 간식지원 - 여수신- 대출관리 - 수익사업- 복지관운영노사관리- 경조사관리 - 사내행사- 협의회 운영 - 노사전략- 이슈행사(2) 기숙사 관리 - 캐스트 하우스 운영에버랜드라는 브랜드 네임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타 지역에서 일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캐스트 하우스(Cast House)라는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캐스트 하우스는 호텔급의 시설 수준을 자랑으로 1인 1실을 기본으로 하며 1인 3실인 곳까지 우수자 위주로 분배하여 사원에 대한 복지 처우를 철저하게 하고 있고, 이러한 것들이 직원들로 하여금 일에 대한 욕구를 부여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 캐스트 하우스 내에는 A/V실을 운영하여 캐스트하우스 내의 휴무자를 배려하고 있다. 또한 캐스트하우스의 사이버화를 추진하여 인터넷 PC방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열린 공간을 운영하여 간단한 음료와 함께 캐스트들간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조직구조(1) 조폐공사 기업소개한국 조폐공사법 제 1 조에 의거하여 1951년 10월 1일 설립된 한국 조폐공사는 은행권, 주화, 국·공채, 각종 유가증권 및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사용할 특수제품의 제조 및 이와 관련된 사업의 수행을 통해 국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21세기 디지털 시대는 경제, 사회. 문화. 개인의 생활양식이 혁신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화폐 역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어 전자화폐 등 새로운 지불수단의 출현과 사용이 확산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공사는 조폐산업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공기업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완수하기 위하여 [21세기 조폐산업을 선도하는 초일류 지식기업]이라는 비전을 새로이 설정하였다.이것은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여 전통적 화폐제조뿐 아니라 전자화폐 등 첨단사업에 진출하여 세계조폐산업을 선도하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초일류 지식기업을 지향해 나가기 위한 조폐공사의 의지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환경변화에 맞는 다양한 조폐상품의 개발과 하이테크 분야의 사업 등 신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화폐문화를 창조해 나가려 한다. '고객은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받고, 공사는 고객의 아낌없는 사랑과 신뢰를 받는 미래', 이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조폐 지식기업으로 성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조폐공사가 꿈꾸는 내일의 모습이다.(2) 조폐공사의 경영이념한국조폐공사는 ‘21세기 조폐산업을 선도하는 초일류 지식기업’이라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경영목표를 수립하고 있다.사업구조목표- 전자금융 발전에 따른 기존 사업의 감소에 대비하여 사업영역확대를 통한 안정 적 경영기반 구축- 유망사업인 카드류(전자화폐 포함)와 신규 개발사업의 비중 확대기술목표- 조폐기저기술과 핵심/미래기술을 선진조폐기관 수준으로 향상관리혁신목표- 조폐기저기술과 핵심/미래기술을 선진조폐기관 수준으로 향상- 비핵심 분야 아웃소싱(Outsourc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