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序 - 두 세계의 만남 ---------------- 3Ⅱ. 본 론 ---------------- 31. 레꽁끼스타 ---------------- 32. 아스떼까의 몰락 ---------------- 4ⅰ) 신과 인간의 만남 - 께살꼬아틀 재림 신화ⅱ) 데알바도르의 망령3. 잉카의 몰락 --------------- 5ⅰ) 엘도라도의 환상ⅱ) 잉카의 몰락ⅲ) 석기와 철기Ⅲ. 결 론 -------------- 7Ⅰ. 序 - 두 세계의 만남라틴 아메리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시대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제의 지배 하에 1910~1945년 동안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라틴 아메리카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의하여 약 300여 년 동안 지배를 당했고) 이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약 10배의 기간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라틴아메리카에 비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의 식민지 기간을 경험했음에도 일제시대의 잔존물들이 오늘날에도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장기간의 식민지시대를 경험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종속적 경제구조,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문화, 혼혈의 사회와 그로 인한 정체성의 문제 등을 경험하고 있다.)반면 식민지 이전에 라틴아메리카는 역사적으로 마야나 잉카 문명처럼 뛰어난 문명이 존재했음에도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의하여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를 조명하기 앞서 아즈텍과 잉카의 정복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의 유명 월간지 ‘라이프’ 는 밀레니엄을 마감하면서 서기 1000년 이래 세계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과 사건을 자의적으로 선정 발표한 적이 있다. 여기서 콜럼버스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로 그리고 그의 신대륙 발견은 1455년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에 이어 역시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 그것은 신대륙 발견이 유럽 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과 또 그들의 세계단순한 상징적 의미이다. 신대륙에서 무한정 채굴된 금과 은은 유럽으로 들어가 가격혁명을 일으키며 당시 막 성장하기 시작하던 유럽 자본주의 발전에 본질적인 생명력을 넣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신대륙 발견(Descubrimiento)이라는 의미가 과연 타당할 것인가? 발견이라는 의미 자체는 서구의 입장에서의 식민지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문화나 인구, 과학과 예술 등 이미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의 발견이라는 용어 대신에 두 세계간의 만남(Encuentro)이란 표현이 바람직 할 것이며 고대 문명의 몰락과정을 살펴보기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표현이라 생각된다.Ⅱ. 본 론1. 레꽁끼스타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이나 그 후의 정복사업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스페인의 레꽁끼스타)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모로족을 몰아내기 위한 국토 재정복 사업이다. 이슬람에 대항하는 기독교의 종교전쟁이면서 동시에 영토확장 전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재정복 사업은 주로 왕실에 의해 주도된 그러나 완전히 통제될 수 없었던, 많은 자율적 권한을 가진 무력 집단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정복에 의해 획득된 토지의 소유가 정복자의 당연한 권리는 아니었고 대신 왕실의 하사라는 형식을 빌려 이루어졌다. 즉 정복사업은 왕실의 공적 이익과 정복대의 사적 이익이 계약에 의해 맺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재정복 사업은 1248년 세비야의 정복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미 대부분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때부터 재정복 사업이 바다를 통한 새로운 영토 확장이 시도되게 된 것이다. 까달란이나 아라곤왕국은 시실리아나 사르데냐 혹은 아프리카 북부나 지중해 동부로, 가스띠야 왕국은 포루투갈처럼 아프리카와 대서양의 섬들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에서 재정복 사업을 완전히 마무리짓지 못한 가스띠야는 포루투갈에 비하여 해외로의 팽창이 미진했으나 가스띠야와 아라곤 왕국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왕실이 콜롬버스를 지그 후 해외 팽창에서 선두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2. 아스떼까의 몰락ⅰ) 신과 인간의 만남 - 께살꼬아틀재림 신화똘때까 전설에 의하면 께살꼬아뜰( 평화의 신을 의미) 이라는 왕의 치세로 인하여 태평세월이 이어졌는데 어느날 다른 신 들이 장난으로 왕에게 거울을 선물한다. 그 때 까지도 자신이 잘생긴 신의 얼굴인줄 알았던 왕은 거울에 비친 평범한 인간의 모습에 놀라 자학하다가 바닷 속으로 떠나며 언젠가 자신의 생일에 다시 돌아와 치세를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은 선민사상으로 인하여 께살꼬아뜰이 바다로부터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었던 운명론적인 아스떼까 인들은 1519년 11월 9일 스페인 군대가 멕시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피부색이 하얗고 수엽이 있으며 은빛으로 번쩍이는 철갑으로 온몸을 감싸고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말 잔등에 올라앉아있는 스페인 군대에 대한 소식은 곧 떼노차띠똘란에 있는 아스떼까의 왕 Moctezuma 에게 전해지고 께살꼬아뜰이 재림했다는 것을 믿게 된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이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처음부터 두려움으로 인해 전의를 상실했다. 목떼수마 황제가 그의 성에서 첫 번째 받은 보고는 다음과 같다. ‘바다에 거대한 언덕이 움직이고 있다.’ 다른 보고들이 속속 들어왔다. ‘데포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나 놀라 공포에 떨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울리든지 사람들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포탄이 떨어질 때는 석구와 같은 것이 그 안으로부터 나와 불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낯선 사람들이 ‘천정만틈 높은 사슴’을 타고 왔다. 그들의 몸은 모두 무언가로 감싸져 있었고 단지 얼굴만이 보였다. 그들의 피부는 석회처럼 흰색이었다. 머리색은 노란색이었지만 몇몇은 검은 머리도 있었다. 그들의 턱수염은 길고...” (Lasvenas abiertas de America Latin, "신은 비밀 병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중에서)) 그 당시 불길한 징조들이 수없이 나타나 몹시 혼란한 상황이었고 께살꼬아틀신의 재림을 믿고 있는 아스떼까인들에게는 신과 인간의 차이로 생각했고 이러한 간격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게 되었다. 또한 원주민들의 면역 체계 또한 약하여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들에게 이하선염, 홍역, 백일해, 마마, 콜레라, 임질, 황열병 등을 옮겼다. 그중 특히 마마오 홍역은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되고 아스떼까인들의 저항에도 힘을 실어주지 못하게 되었다.ⅱ) 데알바라도의 망령초기의 스페인 정복자들에게는 단순한 봉건적 영지 회복을 넘어서는 또 다른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발견은 그 자체가 그들에게 있어 주요한 목적이었다. 먼저 이들이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꼴론이 찾고자 했던 ‘향신료 길’ 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우선 태평양 연안으로 탐사대를 보냈고 또 그곳에서 항해를 위한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 얼마 지나지 않아 ‘향신료의 섬’ 이라고 불리는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섬이 발견되었음이 알려졌기 때문에 꼬르떼스는 그들 발견의 목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은 마젤란이 남쪽을 향해 찾아 나선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해협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꼬르떼스 자신은 멕시코 남쪽 온두라스쯤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1523년과 1524년에 뻬드로 데알바라도와 크리스토발 데 올릿을 각각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지역으로 파견했으나 만족할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계속적으로 ‘남쪽 바다(Mar del Sur)'를 찾고자 했다. 초기 정복자들의 발견에 대한 이러한 끊임없는 열정은 어떻게 해서 그 넓은 아메리카 대륙이 많지 않은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탐사 되어질 수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3. 잉카의 몰락ⅰ) 엘도라도의 환상유럽인들의 발견에 대한 열정 뒤에 엘도라도의 환상이 존재를 들 수 있다. 엘도라도의 신화는 베네수엘라,콜롬비아 지역 어딘가에 금이 풍부하게 나는 지역이 있는데 그 지역의 추장은 호수에 금을 공물로 바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있었다. 그것은 현재의 보고타 북동쪽 57km, 해발 2,680고지에 구아따비따라는 부족이 있었는데 그의 늙은 추장은 자신의 아내의 부정을 벌하기 위해 가까이 있는 호수에 어린 딸과 함께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 살던 용이 어린 딸의 눈을 먹어치우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그때서야 뒤늦게 늙은 추장은 자신이 너무 가혹한 벌을 내렸음을 뉘우치고 이를 속죄하기 위하여 뗏목을 타고 나가 호수에 금붙이기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은 그 후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구아따비따의 추장뿐만 아니라 칩차족의 어떤 부족도 금 광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들에게는 소금 광산이 있었는데 당시에 그것은 금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으며 그로 인해 그 지역은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호수에 바쳐진 공물은 금붙이가 아니라 소금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엘도라도의 신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 고고학자들은 그 호수에서 금붙이를 발견하기도 했으며, 추장이 타던 뗏목이 금으로 다시 재현되어 현재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 있는 황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엘도라도의 신화는 콜롬비아 인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이상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ⅱ) 잉카의 몰락아스떼까가 몰락한 후 4년이 지난 1525년에 파나마를 떠나 탐험을 시작했으며 그 선두는 프란시스코 삐사로였다. 삐사로는 2번의 탐험을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3번째 탐험에서야 정복을 가능케 할 수 있었다. 이 때 삐사로에게 반가운 정보가 입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잉카제국의 분열에 대한 소식이었다. 이전의 원정 때 원주민과 잠깐 접촉했던 것이 잉카제국에 천연두를 만연시켰고 또 그로 인해 그들의 황제 우아이나 까팍이 죽자 왕위계승 전쟁이 벌어져 잉카 제국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형인 우아스까르는 쿠스코의 잉카가 되고 아타우알파는 키토의 잉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잉카 제국의 분열은 삐사로의 정복을 되었다.
- 목 차-Ⅰ.서 론 -------------------------- 2Ⅱ. 저금리 정책의 배경 ---------------- 4Ⅲ. 저금리 정책의 효과 ---------------- 51. 폐쇄경제하에서의 이론적인 저금리 정책의 효과2. 개방경제에서의 이론적인 저금리 정책 효과Ⅳ. 저금리 정책의 문제점 ---------------- 91. 물가 상승의 문제2. 이자율의 문제3. 디커플링(Decoupling)의 문제Ⅴ. 시 사 점 ------------------------- 14Ⅰ. 서 론한 경제는 주기적으로 또는 외부충격에 의하여 경기변동(Business cycle)을 겪기 마련이며 생산이나 소비와 같은 경제활동이 활발한 호경기와 그러한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침체기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경기변동은 주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데 한 경제 내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또는 외부충격 등에 의하여 발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1929년 미국의 대공황(Great Depression)과 1960년대 시작한 오일쇼크(Oil shock) 등을 들 수 있다.한 경제 내에서 경기불황이 발생할 때 시의 적절한 대응책이 필요하게 된다. 적절한 정책이나 대응책이 없을 때 경기는 장기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국민경제의 위기를 가져오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적절한 경기부양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세계 경제 대공황(Great Depression) 의 경우 뉴딜(New Deal)정책을 통하여 실업률 해소 및 물가안정을 해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IMF 시대를 거치면서 이자율을 통한 경기회복을 지향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 경제의 장기 침체화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그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정책들 또한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경우이다. 이처럼 각 국가마다 다양한 거시경제 변수들을 통하여 경기불황을 탈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그렇다면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거시경제 변수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케인즈(Key 이후 중단하고 저금리를 통한 경기 부양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특히 2001년 이후 콜금리 목표가 8차례 인하되어 2003년부터는 정책금리가 3% 대로 낮아졌으며 시장금리도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콜금리는 총 2.25%p 가 인하되었으나 동기간 콜금리 인상은 0.75%p 만 상승함으로써 상시 경기부양체제가 지속되었다. )2003년 이후에는 인상 없이 콜금리를 4차례나 인하했고 콜금리는 2004년 말 사상최저인 3.25%를 기록하게 된다. 2005년 4월에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콜금리를 동결시키고 경기회복을 위한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게 된다.콜금리 변경의 변경 시점 및 변동폭)변경일자콜금리 목표(%)변동폭(%p)1999년5월 6일4.752000년2월10일5.000.25p↑10월 5일5.250.25p↑2001년2월 8일5.000.25p↓7월 5일4.750.25p↓8월 9일4.500.25p↓9월 19일4.000.50p↓2002년5월 7일4.250.25p↑2003년5월 13일4.000.25p↓7월 10일3.750.25p↓2004년8월 12일3.500.25p↓11월 11일3.250.25p↓이러한 저금리 정책을 통한 경기회복이 가능했던 원인을 살펴보면 물가의 안정을 들 수 있겠다. 원/달러 환율의 하락과 중국의 저가품 유입 등으로 물가가 안정됨에 따라 통화당국은 저금리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의 가장 큰 목표로 물가안정을 들 수 있으며 원/달러 환율의 지속적인 하락과 중국의 저임금을 이용하여 생산된 저가품은 전 세계시장에 공급됨에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물가는 안정적이었다.Ⅲ. 저금리 정책의 효과1. 폐쇄경제하에서의 이론적인 저금리 정책의 효과케인즈(Keynse)의 국민소득 결정모형인 Y=C+I+G+NX 를 통하여 저금리 정책의 효과를 살펴보자. 이 방정식은 항등식으로 좌변에 표시된 지출액은 반드시 우변의 네 가지 지출항목 중의 하나에 반영되기 때문에 이 방정식은 항상 성립하게 된다. 분석의 단순화를 위하여 폐쇄경제를 가정하자. 따라서 국 것이다.C, I, GY1 Y2 국민소득현재의 국민 소득이 Y2 수준보다 낮은 Y1의 경우 의도하지 않은 재고 감소가 발생함을 뜻하고 이 의도하지 않은 재고 감소를 만회하고 적정재고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산이 증대된다. 즉, 케인즈(Keynes) 모형에서 증가된 ΔI(투자)로 인하여 기존의 국민소득 Y1에서 Y2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게 됨을 알 수 있다.2. 개방경제에서의 이론적인 저금리 정책 효과다음으로 개방경제하에서 저금리 정책효과를 살펴보자. 개방경제일 경우 대부자금시장의 공급은 국민 저축에서 나오고 수요는 국내투자 및 순해외투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실질이자율이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킨다. 외환시장에서 달러의 공급은 순해외투자에서 나오고 수요는 순수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실질환율이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킨다는 데서 폐쇄경제와의 차이점이 발생한다. 즉 순해외투자는 이 두 시장을 연결해주는 변수이며 대부자금 시장에서 순해외투자는 수요에 영향을 미친다. 해외자산을 매입하려는 사람은 국내 대부자금 시장에서 자금을 차입해야하기 때문이다. 외환시장에서 순해외투자는 공급의 원천이다. 해외자산을 매입하려는 사람은 해외자산의 구입에 필요한 외환을 마련하기 위해 달러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점에서 이자율 및 균형환율이 결정된다. )이자율 실질환율대부자금 달러수량대부자금 시장 외환시장위 그림에서 보듯이 실질이자율이 고정되어있다면 외환시장에서의 공급은 일정하게 되고 수요의 상승은 곧 실질환율을 상승시키게 된다. IMF 이후 통화당국의 저금리 정책의 경우는 실질이자율 하락은 해외시장에서 국내시장으로 자본의 공급이 증가하게 되고 결국 실질환율이 하락하게 되고 순수출이 증가하게 된다. 그 결과 국민소득 결정모형에서 국민소득을 증가시키게 되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멘델-플레밍의 환율효과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물가가 낮아지면 이자율은 낮아지고, 이에 따라 한국의 일부 투자자들은 수익률이 높은 해외투자로 눈을 돌리게 된다. 예컨대 한국 국. 화폐의 중립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화폐수량, 즉 통화량은 산출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중앙은행에서 통화량(M)을 증가시키면 물가(P)의 상승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은 많은 사회적 비용(구두창 비용, 메뉴비용, 상대가격 변화폭의 증가, 의도하지 않은 세금 부담, 혼란과 불편, 부의 재분배 등)을 수반하고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한다면 국가 경제는 위기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비용의 크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사회적 비용의 존재하기 때문에 통화량의 조절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성이 없다. 그러기에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철저히 통제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기 위한 통화량의 증가의 정책은 모순을 가지게 된다.물가국민소득위 그림에서 보면 통화량이 증가하기 전 완전고용 국민소득 수준에서의 통화량과 화폐의 유통속도에서 통화량의 증가(M1에서 M2) 는 완전고용 국민소득 수준에서의 산출량은 변화 없이 오직 가격의 상승(P1에서 P2)만을 야기시킨다. 이는 고전학파의 이분법(Classical dichotomy) 과 화폐의 중립성에 근거한 것이다. 즉, 명목변수는 실질변수에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뜻한다. 저금리 기조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통화당국은 통화량의 증가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물가의 상승만을 초래할 뿐이다. 더구나 완전고용 산출량 이상의 국민소득의 증가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술진보나 경제 제도의 변화를 통하여 가능한데 저금리를 통한 통화량 증가로서는 국민 소득의 증가를 경험하기 힘들다.저금리 정책이 유지됨에 따라 1970년대부터 유지되어 오던 '마샬 k(M2/GDP)' 는 98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사상최고 수준인 0.72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동성 과잉은 주식, 부동산등 버블 등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이와 함께 금리의 인하는 부동산 가격을 유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003년 이후 2번의 금리 인하와 함께 주택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9?5 대책 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우선 이자율의 하락은 대체효과를 발생시켜서 저축의 감소로 나타날 수 있다. 이자율의 하락은 개인의 예산선을 변화시킨다. 현재소비와 미래소비와의 상대가격 비율을 바꾸고 예산선이 바깥으로 이동하게 된다. 미래의 저축을 통하여 얻게 될 이익이 기대치보다 낮기 때문에 현재소비를 늘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반면 이자율의 하락은 소득효과를 발생시켜 저축을 증가시킬 수 있다. 이처럼 소득효과와 대체효과의 절대값을 비교하여 어느 효과가 크냐에 따라서 이자율의 하락으로 인한 변화 양상이 달라지게 되므로 저금리로 인한 국민 경제의 성장은 문제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또한 피구(Pigou)의 자산효과(Wealth effect)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자율의 하락을 통한 경기부양책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피구효과(Pigou effect)란 화폐의 명목가치는 고정되어 있지만 실질가치는 가변적이다. 물가가 하락한다면 이 돈으로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기 때문에 돈의 가치가 상승한다. 따라서 물가가 하락하면 소비자들은 더 부자가 된 것으로 느껴서 소비를 늘리게 되는데 이를 자산효과(Wealth effect)라고 한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2001년~2002년 사이의 저금리를 통한 경기부양책은 자산효과(Wealth effect)의 효과가 크다.) 죽, 상대적으로 비싸진 집값으로 인하여 오히려 소비가 증가한 것이다. 2001년~2002년 사이의 부동산 대출 증가율은 40~55%로 급증한 것이 그 근거이다. 따라서 이자율의 하락으로 인한 경기부양은 소득효과와 대체효과의 상쇄로 인하여 실질적으로 자산효과에 의한 것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시적인 것이며 장기적인 경기 부양정책으로 이자율의 하락은 도움을 줄 수 없다.3. 디커플링(Decoupling)의 문제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저금리 정책을 통한 효과로 디커플링을 들 수 있겠다. 디커플링이란 동조화(coupling)의 반대 개념으로서 한 나라 또는 일정 국가의 경제가 인접한 다른 국가나 보편적인 세계 경제의 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결성을 보여준 소설 『오이디푸스 왕』들어가는 글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고전적인 정의를 내렸는데, “비극은 가치 있거나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다.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고, 각종 장식이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서술의 형식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을 취한다. 또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라고 정의 하였다. 비극은 무자비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의해 추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고귀하고 용감한 인간을 표현한다. 나는 이처럼 비극적인 주제를 가진 소설은 단순히 슬픔이라는 감정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극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오이디푸스 왕」을 접하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본 론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 왕은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그는 부모를 죽이고 어머니의 침실을 더럽히며 나아가 동생이자 아버지인 존재가 된다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오이디푸스 왕이 태어나면서 그는 아버지를 죽인다는 신탁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오이디푸스 왕은 양쪽 발목에 구멍이 뚫려져 부모들에 의해 버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버려져 죽을 운명을 가졌던 오이디푸스 왕은 양치기에 의하여 살아나게 되며 코린토스의 폴류보스 왕의 양자로 키워지게 된다. 나는 이부분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비극의 시작이 전개됨을 알 수 있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양자라는 소문으로 한 때 괴로워했고 이를 알게 된 폴류보스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자신의 아들임을 선언 했다. 이로 인하여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아버지는 폴류보스 왕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나아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리라는 신탁 내용을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 왕은 결국 코린토스에서 살지 않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불행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하여 피하는 것은 궁여지책인 것이다. 그러던 중 포키스라는 고장, 델포이와 다우리아로 갈라지는 길, 에서 한 사람의 전령과 라이오스 왕이 탄 마차행렬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죽이게 된다. 그 이후 오이디푸스 왕은 스핑크스라는 잔인한 가수(歌手)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카드모스 백성들이 바치던 세금을 면제시켜 주게 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훌륭한 예언(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것)을 하게 됨으로써 카드모스의 왕에 오르게 된다. 여기서부터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게 되고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낳게 된다. 즉 그는 아버지를 죽였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함으로써 자신의 동생이자 자식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낳은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후 카드모스에 재앙이 닥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이디푸스 왕은 많을 고민을 하게 되며 예언자라고 알려진 테이레시아스를 궁전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또한 신탁을 통해 지금의 재앙은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사람을 쫓아내야만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이오스왕을 죽인 범인을 알기 위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대화를 하던 오이디푸스 왕은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은 바로 오이디푸스 왕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말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 의하여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출생배경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게끔 한다. 운명적인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 왕은 여기서 탄생된 것이다. 만약 오이디푸스 왕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주장처럼 더 이상 진실을 알지 않고 넘어갔다면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예언자가 장님임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그들의 대화 내용을 통하여 오이디푸스 왕 또한 장님이 되리라는 복선을 받을 수 있었다.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듣고 화가 난 오이디푸스 왕은 부인의 동생인 크레온을 자신의 왕좌를 빼앗을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으로 의심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불안해한다. 그의 불안한 심정은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한 궁금증으로 커져가고 오이디푸스 왕은 결국 하나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폴류보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양아버지인 폴류보스 왕의 죽음은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고 있는 오이디푸스 왕 자신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자 불행이었다. 자신이 자신의 운명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면 이러한 사실은 정말로 행복할 것이다. 폴류보스 왕은 병환으로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게 됨을 알게 됨으로써 기뻤던 것이다. 그런데 폴류보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사자로부터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 왕이 폴류보스 왕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버려진 아이였고 그렇게 버리라고 시킨 사람이 바로 자신을 낳은 부모,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였던 것이다. 결국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출생 배경을 알게 되고 자신이야 말로 사악한 인물임을 느끼게 된다. 한편 그의 어머니이자 부인인 이오카스테는 그 사실을 직감하고 자살을 하였고 그녀의 주검을 본 오이디푸스 왕은 그녀의 옷에 꽂혀 있는 황금브로치를 빼서 자신의 눈을 힘껏 찌르면서 “너희들은 다시는 내가 겪고 또 내가 저질러 놓은 무서운 일들을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너무 오랫동안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보아왔고 내가 알고자 하던 일은 보지 못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어둠 속에 있거라!” 라고 말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기본 공동체가 가족이다. 그러한 가족이 오이디푸스 왕 자신 때문에 파멸의 길로 갔고 가정을 붕괴시킨 오이디푸스 왕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크레온에게 아버지의 부인이자 자신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장례식을 주관하게 하고 다시는 아버지의 나라에 살지 못하도록 요청을 한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의 운명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려고 마음을 먹었고 자신의 동생이자 자식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축복을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오이디푸스는 “너희들이 어른이라면 너희들에게 충고할 말이 많다만, 지금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그쳐야겠구나. 너희들에게 살아갈 기회가 허락되고 너희들의 일생은 아비의 일생보다는 행복한 것이 되게 하소서.” 라고 말한다. 이처럼 비록 오이디푸스 왕 자신은 험악하고 사악한 존재로서 살아왔으며 거기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두 눈을 버렸으나 자신의 후대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원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눈은 삶을 살아가는데 행복을 볼 수 있게 해주고 고뇌와 풍파를 또한 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역할을 하는 눈을 오이디푸스 왕은 더 이상 그냥 두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면서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한 고통을 풀려는 노력에서 그랬던 것이다. 어쩌면 오이디푸스 왕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동양인의 현세 지향적인 삶 추구와 삶의 방식「그림으로 봉인된 귀신이야기-일본오사카」세계 여러 나라마다 귀신이라는 존재는 상이한 모습으로 또는 다양한 특성으로 존재한다. 귀신이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의 드라큘라나 좀비, 강시, 미이라, 뱀파이어, 고스트 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귀신이 봉인된 그림이 출현한다는 제보가 우리의 눈을 띄게 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여러 종류중의 하나의 형상을 지닌 귀신이 아니라 귀신이 봉인이 된 채로 그림 속에 존재한다고 하기 때문이다.우선 일본 나고야에 30 여 년간 폐가로 존재하는 집이 있다. 이 폐가에 귀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폐가를 둘러보기를 꺼려하고 있다고 한다. 그 곳에 처녀 귀신이 살고 있어서 귀신이 출현하기 때문에 모두들 꺼려한다고 한다. 일본 에도시대(1603~1867)에 연인이 살고 있었는데 사랑하는 여인이 자살을 하고난 이후 처녀귀신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얘기는 흔히들 들어왔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 처녀귀신을 불러내어 봉인을 시킬 수 있다는 음양사가 존재한다는데 놀라웠다. 이 음양사는 특이하게 자신이 주문을 외우고 귀신과 심적 접촉을 통하여 그 귀신의 형상에 대한 그림을 그린 후 그려진 그림을 통하여 귀신을 봉인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음양사의 눈데 띌 만한 것이 무엇일까? 다름 아닌 그림으로 봉인된 귀신일 것이다.오사카의 한 사찰에서는 12개의 그림으로 봉인된 귀신 그림이 존재한다. 그림을 살펴보면 기괴한 그림들이 다양하다. 예를 들어, 남편에 대한 원망을 지녔던 부인은 입에서 피가 나오는 그림, 아기 낳다가 죽은 귀신은 아기를 들고 있는 그림 등 그림에 나타나는 귀신의 모양은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그림들은 누가, 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단지 에도시대에서 메이지시대 초반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추측만이 있다. 이 외에도 우물과 관련된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에는 접시를 들고 있는 귀신이 있다. 솔직히 귀신이 접시를 들고 있다고 하면 웃긴 얘기 또는 농담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으나 그 사연을 접하게 된다면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에도시대 200 여 년간 가보로 내려오던 접시가 있었는데 하녀가 실수로 그 접시를 깨게 되었고 그 집 안주인은 결국 하녀를 우물에 빠뜨려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이 공개된 이후로 귀신이 달라붙었다는 사람도 존재한다고 한다. 이처럼 봉인된 귀신 그림을 앞서 언급한 음양사가 오사카의 사찰에서 귀신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그 기운을 자신의 화폭에 그렸고 그 그려진 그림이 사무라이였는데 놀랍게도 사찰 안에 존재하는 12개의 그림중의 하나였다.
목 차Ⅰ. 서 론Ⅱ.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1. 한국의 산업구조2. 한국의 무역 전개과정3. 한국의 대외 의존도4. 한국경제 발전의 핵심적 요소Ⅲ. 결 론Ⅰ. 서 론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으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로스토우(Walt W. Rostow)의 발전단계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발전단계설은 경제발전과정을 단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대표적 사례로서 로스토우는 연속되어 있는 변화과정을 구간별 특징에 따라 구획을 정하여 경제발전의 과정을 규명하려 하였다. 여러 나라의 경제발전과정을 분석한 그는 경제의 발전과정을 전통사회, 도약준비, 도약, 성숙, 대중적 고소비등 다섯 개의 단계로 구분하고 모든 나라들은 획일적으로 이러한 단계를 거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제 그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첫째, 전통사회이다. 전통사회는 1인당 소득이 증가하지 않거나 증가하더라도 극히 한계적인 범위에 국한한다. 주업이 농업일 뿐 아니라 경제적·정치적 지배권은 지주계급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토지경제단계라 할 수 있다.둘째, 도약준비단계이다. 도약준비단계는 곧 도약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시켜주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전통적 가치관은 점차 합리주의적 방향으로 이전하며 근대적 기업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비농업 부분의 투자가 늘어나고 산업구조는 농업에서 비농업 부분으로 이행한다. 또한 근대적 과학과 기술이 생산함수에 도입됨으로써 생산성이 증가하는 한편 인구증가가 감소하여 1인당 소득이 상승한다.셋째, 도약단계이다. 도약준비단계에서 도약을 위한 선행요건들이 충족되면 경제는 어떤 계기에 의하여 도약단계에 진입한다. 로스토우는 한 나라의 경제가 도약단계에 있다고 정의하려면 적어도 세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요건이란 첫째 투자율이 10%이상으로 상승할 것, 둘째 도약을 이끌어갈 선도산업이 제조업에서 하나이상 급속한 성장률로 발전할 것, 셋째 근대적인 정치적 및 사회적인 구조변혁이 일어날 것 등이다. 도약단계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구매제도에 의해 원조물자의 판매대상을 가공능력을 가진 기업가에 한정하였다. 또한, 수의 형태별 관세차별화, 저금리 융자 등 각종의 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 여기서 원조물자를 할당받은 기업은 국내의 가공판매시장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공정환율과 실질환율간 차이에 따라 막대한 차익을 얻게 되었다.이러한 미국의 원조 이외에 1950년대 한국의 공업화를 밑받침한 것은 귀속재산의 민간기업에 대한 불하였다. 한국정부 수립직후부터 대규모 공장설비등 잔여 귀곡재산이 1954년 직후 본격적으로 불하되었다.그러나 수입대체 공업화는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에 따른 대외적 요인, 대기업의 원조물자를 받기 위한 설비확장 등의 대내적인 요인이 맞물려 수요부족에 비해 설비과잉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소득의 증대를 위한 수입의 전면적 통제와 금리억제 등 국내산업 보호를 목적으로 한 수입대체 공업화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1960년 4월 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다.3) 1961년부터 1966년까지 :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년 신군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시멘트, 비료, 정유 등 기간산업을 육성하였다. 특히 초기에는 국제수지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수입대체산업을 중점적으로 개발하였다. 종래의 차별적 관세나 수입승인, 환율 관리를 비롯한 일련의 수입통제조치에 의해 최종수비재의 수입을 제한하였다.그러나 경제개발 계획에 필요한 투자자금의 조달이 어려움에 봉착하고 수입의 급증에 따라 국제수지가 악화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수출위주적 발전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의 육성과 수출확대를 지향하여 수출이 국민총생산에서 비중을 높이게 되었다. 이러한 수출증대에는 1960년대 세계경제가 확대추세를 나타내면서 무역자유화 기조를 유지한 것도 일조하고 있다. 한국의 1960년대 수출 중심상품은 섬유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집6) 1980년대의 경제1980년대 들어서 중화학 공업화의 부작용을 제거하고 경제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중화학 투자를 조정하고 부실산업을 합리화하는 정책이 추진되는 한편 또한 수입자유화 등 개방확대를 통하여 경쟁을 촉진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도 수출주도형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었다는 점에서는 전의 시기와 마찬가지다. 이는 1980년대 들어서 석유가격 상승에 따른 대폭적인 무역적자를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수출증대를 위해 원화의 평가절하 수출금융 확대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수출주도형 중화학공업의 지원정책의 결과 중화학부문중에서도 1970년대의 화학산업에서 기계, 금속산업으로 주력업종이 넘어갔다. 기계 금속산업중에서도 전자 통신기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일반기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특히 전자제품의 수출은 1986년 섬유산업을 제치고 수출 1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산업의 육성과 수출화 정책은 선진국으로부터 과도한 보호육성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또 1980년대의 특징은 경제조정 및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추진하는 주체로서 기업의 역할이 증대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70년대의 경제악화 원인의 일부가 정부의 경제에 대한 과도한 개입이라는 반성에 기인하였다. 따라서 종래 정부주도하에서 추진되었던 공업화를 민간자본의 자주성에 맡겨 자유경쟁과 시장메커니즘의 활성화를 통해 산업구조의 재편을 도모코자 했다.이러한 산업정책의 기조의 변화는 1986년에 처음으로 교역구조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이는 세계경제의 호황과 엔화의 강세에 따른 우리나라 상품의 수출경쟁력 강화로 수출이 크게 증가하면서 국내경기가 회복기에 들어선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것은 1980년대 중반이후 엔고, 달러의 평가절하에 따른 원하의 절하, 낮은 국제금리, 낮은 원유가라는 소위 3저현상의 도움을 받아 수출의 확대와 낮은 인플레이션하에서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하게 되었다.무역수지의 흑자는 1989년말까지 이어졌으며 수출상품의 구성도 경제 발전 과정에서 각국 마다 상이한 무역 구조를 가졌으며 결과 또한 상이하다. 과거의 폐쇄경제하에서 무역의 중요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여러 국가들이 무역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이득 또는 손해가 발생하게 된다. 물론 개별 국가들의 후생적인 측면을 완벽히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무역의 규모나 이윤 등이 중요한 화두가 된다. 왜냐하면 무역을 통하여 이익이 발생되면 이는 이득이 된 국가들에게는 추가적인 재원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 또는 더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세계 전체의 경제적인 발전 측면에서 과연 ‘후진국들은 선진국들의 수준으로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로 나뉘어 지는 것을 보면 무역구조나 기타 여러 제반 사항에 따라 경제발전의 양상이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발전단계에서의 무역구조를 살펴보면서 그 완벽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보다 경제발전을 이룩한 국가의 모델로서 한국의 무역 전개과정과 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할 수 있다.1) 무역정책 개념의 등장시기 : 1945 ~ 1960년우선 한국에서 무역 정책의 등장시기부터 살펴보면 해방직후 한국은 경제적 착취와 남북 분단 등으로 인하여 극심한 혼란과 침체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인은 일본인으로부터 관리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업들은 중간재 및 자본재의 공급원으로 일본의 산업에 크게 의존했었기 때문에 한국 대부분의 생산 활동은 중단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국제수지 적자로 인하여 외환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고 이 기간 중 수출활동 자체가 미미하였으며 또 민간 무역업자들 역시 해외시장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경제 정책목표도 수출에 그다지 큰 역점을 두시 않았다.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하여 1953년부터 외국으로부터 원조가 제공되며 1953년 ~1960년의 한국의한다. 수출은 1981년에 200억$를 상회했고, 1982년에는 210억$를 초과하게 된다. 또한 단일 품목으로 10억$를 넘는 품목 또한 5개로 늘어나게 된다. 반면 세계 시장에서의 경제정책은 선진국들의 보호주의 정책과 더불어 EC, NAFTA, ASEAN, APEC 등 경제 블록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우리나라의 무역 환경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또한 WTO는 자유무역주의를 표방하고 출범하였지만 개발도상국을 위한다기보다는 선진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4) 최근 (IMF외환위기 이후)IMF 외환위기의 발생에 따라 우리나라의 수출입구조상에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우선 수출측면에서 살펴보면 1998년의 수출은 전년도에 비하여 규모면에서 약간의 감소를 보이게 된다. 반면 수입측면에서는 144,616,374,000$(1997년)에서 93,281,754,000$로 감소하게 되고 이는 외환위기 발생에 따른 국내경기의 급격한 위축과 함께 외화부족으로 인한 감소가 그 주된 원인이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의 수출은 143,685,459,000$(1998년에 비해 8.59%증가), 2000년 172,267,510,000$(1998년에 비해 30.19%) 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는 외환위기로 인한 원화가치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이 강화된 것에 따른 영향이 크다. 즉 수출상품의 기술개발이나 혁신이 아닌 단지 환율에 의한 파급효과였다. 수입은 1999년에 119,752,282,000$(1998년에 비해 28.37%)증가, 2000년에 160,481,018,000$(1998년에 비해 72.03%)로 증가하였고 우리나라의 수출이 해외원자재 수입을 전제로 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출의 증가에 따라 수입도 증가하였고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의 하락을 원자재 수입액이 상대적으로 증가현상을 보인 것이다.3. 한국의 대외의존도우선 대외 무역 의존도란 한 국가의 국민경제가 무역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로서 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