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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몽골제국
    四汗國의 특징※ 目 次 ※Ⅰ. 몽골의 분봉제도Ⅱ. 四汗國과 몽골제국의 와해Ⅲ. 四汗國의 특징과 문화1. 오고타이汗國2. 킵챠크汗國3. 차가타이汗國4. 일汗國5. 四汗國의 文化Ⅰ. 몽골의 分封制度몽골의 정복전쟁은 칭기스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몽골제국의 지속적인 정복전쟁의 원인이기도 했던 유목사회에 존재하는 약탈물의 분배라는 전통이 몽골제국에서도 계속되어 정복지의 分封이 바로 약탈물의 분배라는 형식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이러한 몽골제국의 分封制度는 배타적인 소유권을 전제로하기 때문에 分封은 곧 지방 분권화를 촉진시켰고, 이는 중앙집권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은 끊임없는 왕권 분쟁으로 이어지면서 제국의 와해를 가속시키고 나아가 四汗國의 분립을 가져오게 하였다.몽골제국 분열의 조짐은 이미 칭기스칸 시대에 여러 아들을 分封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칭기스칸은 장남 조치, 차남 차가타이, 3남 오고타이등에게는 서북외몽고 및 그 서부를 封地로 주었고 막내아들 톨루이는 자신의 곁에 두었다.)장남인 조치는 1227년 2월경 아버지 칭기스칸보다 6개월 먼저 아랄 해 북쪽 초원에서 죽었다. 조치의 아들들 가운데 바투가 아버지의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그는 상대적으로 연소하였고, 가계의 정통성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조치 가문’은 제국의 일에 눈에 띄지않는 역할만 하게되나, 부모의 주거에서 가장 먼 곳을 칸 아들의 영역으로 남겨주는 몽골법 덕분에 조치 가문은 유럽으로 향하게 되고, 太宗(오고타이)으로부터 명을 받아 유럽대원정을 시작한다(1236). 유럽원정 중에 본국에서 太宗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군이 회군하지만 바투는 볼가강 하류의 사라이에 머물면서 킵챠크汗國을 세운다(1243). 훗날 바투는 칭기스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차남인 차가타이는 위구르 지방에서 서쪽으로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이르는 옛 카라 키타이제국의 초원과 탈라스에 지명하였을 때 항의 하지않고, 1227년 칭기스칸이 서거한 해에 자신의 지역에 차가타이汗國을 건설한다.셋째아들 오고타이는 에밀과 타르바가타이, 카라 이르티쉬와 우룽구 지역을 몫으로 받아 오고타이汗.國을 세우고 후에 오고타이는 칭기스칸의 후계자로 임명되어(1229년) 大汗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마지막으로, 몽골 관습법)에 따라 막내아들 톨루이는 가문 세습재산의 상속자였으나 위대한 사람으로서의 통찰력이 부족하여 칭기스칸의 후계자로는 임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드물게 지적인 여자인 옛 케레이트 왕가의 공주 소르칵타니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훗날 자기의 아들들을 위하여 제국을 확보하게 된다.) 太宗이 사망하자 아들 구육이 즉위하여 3대 定宗이 되었으나 정종은 자신이 즉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바투를 응징하고자 서방으로 가는 와중에 중앙아시아에서 즉위 2년만에 죽게 된다. 그러자 톨루이의 아들 뭉케가 오고타이의 후예를 추대하려는 세력을 물리치고 즉위하여 4대 憲宗이 되었다. 하지만 헌종은 황제에 올라 중앙의 주요부분을 차지하였다고는 하나 이것은 단지 祖父의 영토를 大汗의 위치에서 임시로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 자손에게 나누어줄 새로운 봉지를 찾게 되었으니 동생 훌라구를 페르시아에 파견하여 일汗國(1258~1411)을 세우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세습봉지 개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헌종 자신은 동생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의 정복에 나서게 된 것이다).Ⅱ. 四汗國과 몽골제국의 와해남송 정복전쟁 중에 헌종이 사망하자 동생 쿠빌라이가 군을 통솔하고 있었으나 당시 외몽골에서는 친동생 아릭부케가 오고타이汗國의 후원을 받아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뭉케에게는 세 아우가 있었는데 쿠빌라이, 훌라구, 아릭부케이다. 1256년부터 페르시아의 칸이었던 훌라구는 계승권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고, 막내인 아릭부케는 몽골 본토의 총독이며 수도 카라코룸의 留守(유슈)였다 그는 몽골리아의 지배자로서 쿠릴타이를 그 땅에서 소집하여, 자신의 大汗선출을 세운 중국과 몽골의 경계인 상도에서 그는 자신의 일파, 즉 그의 군대에 의해 大汗으로 선출되었다.)칭기스칸 가문의 법에 따르면 서두른 이 선출은 무효였다. 전통적으로 쿠릴타이는 몽골리아에서 적절하게 미리 소집된 칭기스칸 일족인 네 울루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야했다). 이 일에서 아릭부케도 카라코룸에서 大汗이의 칭호를 취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는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당시 페르시아지방으로 파견된 쿠빌라이의 동생 훌라그는 형을 지지하는 댓가로 서아시아 지역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또한 훌라그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조치家의 베르케는 아릭부케와 연합하였는데, 아릭부케는 북중국과 중앙아시아로부터 물자공급을 차단당한 채 쿠빌라이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1264).쿠빌라이의 승리는 결국 四汗國의 분립이라는 엄청난 댓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훌라그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차가타이 부족에 대해서는 바락크를 汗으로 지명하여 쿠빌라이의 종주권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바락크의 도전으로 실패하였다. 더욱이 톨루이家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오고타이家의 하이두가 탈라스 河畔(하반)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킵챠크 초원의 조치家와 차가타이家의 지지를 받고 汗에 추대되면서 톨루이家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3대부족의 연합을 결성하게 된다).Ⅲ. 四汗國의 특징과 문화1. 오고타이汗國 (1229~1310)몽고족의 전통에따라 칭기스칸이 죽기전에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의 천산산맥에 걸친 나이만부족이 웅거한 지방을 오고타이에게 분봉하였고 이 지역에 그 일족이 머무르게 되었다. 오고타이 汗國은 단명한 유목국가로서 제도나 문화면에서 특별한 점을 남기지 못하고 카이두의 뒤를 이은 아들 차바르, 차가타이한 두아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나머지 일족은 1310년에 元에 귀순한다.2. 차가타이汗國 (1242~1334)차가타이汗國은 지금의 타림분지를 중심으로한 신강성(新彊省) 지방인 동 투루기스탄의 태반과 투란 분지의 우즈베크, 투르크멘, 타지크지방의 동남. 수도는 처음에는 천산산맥동북쪽의 일리 강 상류에있는 동서 쿄콩의 중요한 중계점인 알마릴크에 있었다.차가타이汗國은 1340년대에 동서로 분열했다. 분열의 이유는 동북부에 퍼진 초원에 거점을 두었던 몽고 귀족이 서부로 뻗은 오아시스 지대인 사마르칸트에 궁정이 세워지는 등 나라의 중심이 옮겨지고, 또 이슬람화되는 데에 반발해서 동차가타이汗國을 건국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분열 상태는 1300년대 초 동차가타이汗國과 서차가타이汗國을 지배하게되서 일시적으로 없어졌으나, 서차가타이汗國은 자체에서 티무르(Timur. 1336~1405)가 등장하면서 스스로 멸망하였다.한편, 몽골색이 짙었던 동차가타이汗國도 이 티무르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티무르가 죽자 다시 독립을 되찾았다. 나라의 힘이 부친 16세기 초에는 타림분지의 카슈가르로 옮겨져 카슈가르 汗國을 세웠다. 이 동차가타이汗國은 비교적 오래도록 몽골 유목문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3. 킵챠크汗國 (1243~1502)킵챠크) 汗國은 남 러시아의 초원과 그 동쪽인 키르기스 초원의 유목지대, 그리고 코라즘의 오아시스 농경지대를 지배하면서 서방 4대 汗國중에서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도는 볼가강 하류지역에 건설됐던 사라이(sarai)였다. 사라이는 초원 여행로의 요충지로서 인구가 밀집되고 상공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시내의 특별구에는 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상인이 살고 있었고, 기타 이탈리아 상인도 있었다고 한다. 서방의 상인들은 애써 원나라까지 가지 않아도 사라이까지 오면 비단을 살 수 있었다.사라이의 주인은 킵챠크汗이라고 불렸던 바투와 그 자손이다. 그들은 바투 형제계통인 백장한(白帳汗:크르키스 초원을 지배), 청장한(백장한의 북쪽을 지배)을 통치하고, 또 루시(러시아의 옛 이름)의 공국을 속국으로 거느렸다.킵챠크汗國은 코카서스(카프카즈)방면에서 일汗國과 자주 타투었으며, 일汗國에 대항하기 위해 그 적국이었던 이집트의 터키 계 이슬람 왕조인 맘크루 조와 우호 관계에 있었다.그러나, 킵챠크汗國은 14세기 후반정도의 항쟁이 펼쳐지는 가운데 스스로 칭기스칸의 자손이라 칭하는 티무르제국(1365~1500)의 간섭과 공격이 있었고, 루시 제후세력의 대두가 가세되어 16세기에 무너져 버렸다. 이 나라를 지배했던 몽고족은 일찍부터 그 영토 안에 살았던 수많은 터키 족의 영향을 입고 민족적, 문화적으로 터키 화 돼 있었다.4. 일汗國 (1258~1411)일汗國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나라와는 우호적이었으나 북쪽 이웃의 킵챠크汗國, 동쪽이웃의 차가타이汗國과는 각기 국경문제로 다투었고, 시리아 영유를 에워싸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도 적대 관계였다. 맘루크 조에 대행하려고 필요상 기독교 여러 나라와 로마 교황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일汗國은 1295년에 등극한 제7대 군주인 가잔 칸(1295~1304)이 이슬람 교도가 되기 전 까지는 기독교나 불교를 보호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신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온구트 족인 마르코스라는 사람이 스님 바르소미와 함께 원나라의 대도(大都))에서 멀리 이 나라까지 와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법왕으로 추대되었다.얼마 뒤 제4대 이르 군주인 아르군 칸(1284~1291)의 명령에 따라 경교승 바르소마가 이집트의 맘루크 조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맺기위해 로마 교황, 영국, 프랑스에 파견됐던 일도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일汗國은 제9대 군주인 아부 사이드 칸이 죽고 훌라구의 직계가 끊기자 급속히 분열 상태에 빠졌으며, 1353년, 칭기스칸의 혈통을 잇는 최후의 한 사람인 제11대 무사가 티무르에게 피살됐을때 멸망했다.5. 四汗國의 文化四汗國에서는 소수의 몽골족이 그들보다 문화가 높은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게 되면서 정복지 고유의 문화를 존중하였다. 그리하여 四汗國은 차츰 그 땅의 풍습에 동화되고 또 정복지의 이익을 위하여 타 지역과 서로 싸웠다. 四汗國 가운데서 가장 몽골적인 색채가 강한 나라는 오고타이汗國이었다. 그러나 오고타이汗國의 지배자 하이두가 전몽골의 지배권을 빼앗으려고 중앙의 세조에게 대항하여 .
    인문/어학| 2004.07.11| 5페이지| 1,000원| 조회(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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