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는 바벨탑인가, 아니면 오순절인가?세계화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화의 배경은 신자유주의의 대두, 초첨단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WTO 체제의 출범, 신흥시장경제국가의 금융위기, 사회주의국가의 경제개혁 및 대외개방이라는 관점에서 분석된다. 이글에서는 종교간의 세계화를 살펴 볼려고 한다. 그 중에서 선교에 대한 방향으로 세계 선교의 세계화가 바벨탑인가, 오순절인가에 대하여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선교에 대한 복음은 실제로 땅끝까지 전파되고 있다. 언어의 통일이 아닌 복음에 의한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수천 가지의 방언을 사용 하는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세계성서공회연합회는 지금도 계속해서 681개 언어의 성경을 번역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오순절 이후 오늘날까지 2,167개 언어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고, 민족을 초월하며, 모든 계급, 모든 이념의 장벽을 허물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로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다.오순절에 일어난 언어 사건과 대조되는 사건은 바로 구약성경의 바벨탑 사건이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사건이다. 언어의 혼란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흩어지게 된 것은, 하늘 꼭대기에 닿는 탑을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하나의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데에 원인이 있었다. 인간이 하나의 언어로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의사를 소통할 수 없게 된 것은, 인간의 욕심을 좇아 거대한 인간의 왕국을 세우려 했던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오늘날의 세계화로 인하여 언어가 통용되고, 문자가 이해되며, 나라와 종교가 화해되는 길목에서 또 다른 바벨탑을 재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바벨탑 사건을 무시하기 보다는 그 이전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인정해주는 그리스도의 기본 정신이 우선시 된다면 바벨탑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교만과 우월성, 민족주의, 종교주의, 돈, 명예에 대한 세계화의 통일이다. 제국주의의 왕국 건설이라는 세계화로 인하여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이 재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에 의한 세계화는 전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2의 오순절 사건으로 나타날 수있다고 볼 수 있다.
선교 신학이란 무엇인가?서 론기독교를 연구한 학문인 신학의 중심에는 “선교”가 있다. 만약 신학이 선교를 위한 목적과 의도와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종교학은 될 수 있으되, 결코 기독교 신학은 될 수 없다. 이 선교를 연구하는 것이 선교신학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선교는 매우 단순한 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선교는 다양한 기독교 교회와 교파들이 교인을 확보하려는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노력을 의미했다. 따라서 여기서 선교는 주로 '전도' 혹은 '복음화'를 의미하게 되고 이것을 신학화 한 것이 바로 선교 신학이다.선교는 타문화권에 대한 전도이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옛날의 정의를 고수하는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의 포괄적인 선교 개념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다. 선교의 고전적 개념은 너무 좁기 때문에 우리가 처한 삶의 정황에서 선교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있다.이 글에서는 선교에 대한 올바를 이해를 돕고자 성경적인 선교신학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다양한 선교론적 이론들이 모두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선교학과 선교신학을 따로 보지 않고 함께 같은 시각에서 다루면서 포괄적 선교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선교신학이 신학으로서만의 의미를 뛰어넘어 기독교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본 론1. 선교에 대한 오해선교를 단순히 복음화 혹은 전도로만 보거나 교회를 단순히 성소로 이해하는 입장에 대하여는 많은 비판이 있어 왔다. 개인 영혼 구원을 선교의 최대 목표로 두며 속된 세상 속에서의 구원의 방주 기능에 중점을 두다 보니까 교회나 개인이 속한 사회의 비리와 구조악의 근본적 개선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차원보다는 교회에로의 피신과 탈피를 통한 구원의 기쁨에 이르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비기독교적 요소를 죄악시하며, 배타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 교회 중심주의는 교회의 물량적 성장을 최고의 목선교)와 missionary(선교사)는 라틴어 mitto에서 유래된 말인다. 그 의미는 '보냄을 받은자'라는 뜻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성경적 의미로 '복음'이란 말은 사도들의 설교인 기쁜 소식을 말한다. 초대 교회의 전도에는 메시야이신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및 승천, 성령 강림, 예수의 재림, 회개와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성령의 은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스데반, 베드로, 바울 등이 전한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 복음은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로마와 그 변경 여러 곳에 전해진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의 메시지이며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오늘도 이 복음을 확신하고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선교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다.인간은 죄로 인해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구약 성경은 구속의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어 이 구속의 예언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인간의 삶에 동참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대속의 역사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그가 영광의 주가 되심을 알려주셨다.예수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높임을 받으셨다. 영광의 위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무장시켜 주셨다. 사도행전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알려주는 선교 역사의 첫 장이라 할 수 있다.하늘나라는 신약성경이 의미하고 있듯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인격과 삶이 변화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몸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이다. 선교신학의 중심은 바로 말씀인 것이다.3. 성경적 의미의 선교신학선교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여 아직도 그를 주와 구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족속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려고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 가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이는 활동을 말한다. 교회의 선교적 과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위임받은 구원과 심판의 완성을 위하여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위임받은 구원과 심판의 완성을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나심이다.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로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때 교회는 그의 선교적인 목표가 최종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알게 될것이다.선교의 성경적 근거를 원만하게 이해할 때 선교의 정의들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위에 설정된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인 본문에 의존하여 내린 정의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적인 선교관은 성경의 일관된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와 선교적인 기독론과 교회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자인 휘체돔은 "성경 전체의 견해를 따라서 볼 때 하나님은 단 한 가지 의도, 즉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도만 가지고 있다. 선교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선교를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선포하는 일에 관련된 활동으로 볼 때에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구원을 개인적으로 적용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회-정치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선교의 목표가 복음화냐 인간화냐의 양극화 현상은 양 진영의 선교관을 보다 성숙한 단계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쌍방이 건설적인 비평을 받아들여 선교의 수직적(하나님과의 관계) 및 수평적(인간과의 관계)차원을 균형 있게 유지하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선교에 있어서 우선 사항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과 결부되기 때문에 우선 사항들에 대한 추상적인 논의는 가능하지 않다.로잔 선언문은 "복음 전도와 사회-정치적 활동은 둘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의 일부이다."라는 진술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선교에서 복음 전도가 일차적인 것이다"라는 진술을 덧붙이고 있다(6항).1982년 그랜드 래피즈에서 열린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대한 협의회'는 전도의 우선성을 확인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라는 바로 그 사실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전제로 하며, 그들이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은 복음 전도와 훈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둘째로, 복음 전도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인류에게 최고로 또한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원하고 영적인 구원이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복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마닐라 대회(1989)의 선언문도 유사한 진술을 담고 있다. '복음 전도가 우선적이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복음, 곧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복음 전도의 우선성만 재 강조했을 뿐이지,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는 규명하지 않고 있다.그랜드 래피즈 협의회(1982)는 이 관계에 대해 세가지 사항을 분명히 했다. 첫째로, '사회 활동은 복음 전도의 결과이다.' 둘째로, '사회적 활동은 복음 전도에 이르는 교량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로, '사회 활동은 복음 전도의 결과와 목표로서 그 뒤를 따르며 또한 그것의 교량으로서 복음 전도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의 동반자로서 그것에 수반된다. 그것들은 가위의 양 날 혹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이러한 동반자 관계는 실상 결혼 관계와도 같다.' 그리스도인의 세상 에서의 섬김은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 둘다를 포함한다는데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대로 간직할 것을 촉구한다.선교는 증거와 섬김을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선교를 모델로 해야 한다. 선교사들의 사역이 전도 외에 다른 것들에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선교를 전도로만 한정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 사역에 균형을 깨뜨리게 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선교 사역이 전도, 제자훈련, 교회 개척, 의료 봉사, 교육 사업, 지역 개발, 성경 번역, 사외 사업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면서도 그 모든 활동이 항상 복음화를 그 목표로 삼아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복음화를 통해서만 효과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진정한 근거가 이루어 질 수 있다.선교에 전도와 사회적 활동 둘을 다 포함 한다 할지라도, 강조점이 복음 전도에 있지 않으면 교회의 선교 사명 수행에 심대한 손상을 끼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것이 선교의 목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선교가 다양한 사역들을 포함하면서도 전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총체적 선교' 또는 '전도와 사회적 활동 간의 동반자 관계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전통적 선교가 지향한 모든 족속으로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일에 손해를 깨쳐서는 안될 것이다.5. 통전적 선교관통합적 선교관은 어떤가? 흔히 사람들이 통합측 신학의 입장이 모호하다고 말한다. 선교 신학적 입장에 관한한 모호한 것이 하나도 없다, 문자 그래도 통합적이다. 성경적 선교신학은 통합적이다. 선교신학뿐 아니라 신학 일반이 그렇다.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것은 쉽다.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주장하면,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독창적이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보수주의 옛날 것만 지키면 정통 보수주의가 되는 것이다. 쉬운 것이다. 통합적 이것은 문자 그대로, 모든 신학을 종합적으로 비판하고 비판적으로 종합하고 취사 선택해 나가는 입장인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바울도 통합적인 방법을 썼다. 어떤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으라 너는 받지 마라라고 하는 분명한 신학적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 한다.
복음주의에서 영혼구원에 대하여 말하라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영혼 구원은 무엇인가. 이 글은 먼저 복음주의에 대하여 간단하게 알아 본 후 복음주에서 말하는 영혼구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복음주의란 말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는 18세기 부흥운동을 계승한 신앙전통을 말한다면, 좁은 의미는 그 하부 그룹인 신 복음주의를 말한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역사적 복음과 그것에 대한 개인적 신앙의 두 축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본다.복음 주의에 대한 역사적으로 알아보면 4단계로 나뉠 수 있다.첫째, 현대 복음주의의 첫번째 역사적 원천은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복음의 본질을 재천명한 복음주의 운동이다.둘째, 현대 복음주의의 두번째 역사적 원천은 17세기 청교도 운동이다.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신약 성경적 교회의 회복을 모토로 삼았다.셋째, 복음주의의 세번째 원천은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 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다.넷째, 현대 복음주의의 또 다른 원천은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이다. 부흥운동은 독일의 경건주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운동 및 각성 운동 등에 의해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신앙운동이다.그렇다면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영혼 구원이란 무엇인가? 먼저 구원을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주의가 복음주의요 믿음 외에 다른 것이 포함된다는 것이 복음주의가 아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속죄의 율법의 제사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곧 복음은 제사를 대신하는 것이니 구원은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믿음 외에 다른 것이 포함되면 복음주의가 아니며 영혼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래사회와 미래 목회 (이성희 저)미래 사회와 미래 목회는 어떠할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많은 고민을 하였다. 미래사회의 변화에 맞는 목회는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씀과 제자양육, 선교에 대한 마인드는 미래 사회가 변해도 바뀌지 않을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 글은 미래사회와 미래목회에 대한 요약본으로 간단하게 요약을 한 후에 필자의 생각을 뒷부분에 적으며 미래 목회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 하겠다.제1장 서론지구는 이제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정도로 작아지고 있고 그에 영향을 입어 문화나 생활방식에도 또한 많은 혼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미래의 목회는 평신도의 사역이 극대화되며 한편 영성의 삶을 강조하는 목회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미래목회를 위해서는 목회 패러다임의 변혁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관심은 미래사회에 적응력을 줄 것이며 사회에 교회가 책임지게 될 수 있게 할 것이다.제2장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1, 한국교회의 성장요인한국교회의 성장요인으로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수고를 든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목회를 위해 지불하고 있고 한국교회의 성장이라는 결과는 이들이 탈진된 상태에서 계속 뛰었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구역조직과 심방이라는 목회 구조이다. 구역조직은 세계교회에서 연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알려져 있었고 구역조직이라는 것은 교회조직을 지역화하여 신입교우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초기 한국 교회에 파송되었던 사람들은 좋은 교회에서 좋은 선교사들을 파송한다고 보내졌던 사람들이었다. 각각의 교회에서 보내어진 선교사들은 선교지역을 구분하여 효과적인 선교정책을 수립하였고 의료전도나 교육전도 등을 통한 선교정책을 한국사회의 계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한국개신교의 공식전래 연대를 교회사가들은 알렌이 입국한 1884년으로 정하였다. 1832년에 독일인 키츨라프의 배령도 입항이 개신교 선교사의 입국이며 그는 잠시 머무르면서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었다. 1866년의 토마스목사의 대동강변에서의 참수형은 첫 개신교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 밖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였다. 또한 말씀 중심의 교회생활이 우리 몸에 익숙해져 있고 이런 교회생활이 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한국인의 고대 신앙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천신강림의 신앙 ,곡신신앙, 그리고 천지융합의 신앙.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인 농경문화로 인하여 이러한 신앙이 형성 되었고 농경문화는 또한 근면을 특징으로 한다. 이같은 전통문화가 그리스도교와 접목해 가면서 새벽기도라는 중요한 특징을 형성하게 하였다.우리의 전통신앙인 무당종교는 무속신앙을 그 기초로 한다. 무당종교는 한국교회의 대형화 정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교이다. 이른 아침에 정성을 강조하던 무속은 경건한 예배형태나 산기도에 열중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독특한 성품이며 독특한 신앙의 방식인 것이다. 산기도와 기도원 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준 요인이었다.단시일 내에 경제적으로 부유할 수 있는 원인이었으며 단시일 내에 괄목할 만큼 성장을 이룬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강인한 성품 때문에 복음에 대해 품고 있는 강인한 열정이 신속한 교회 성장을 이룩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2. 한국교회의 병리 현상한국의 교인들이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이유는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익명성 때문이다. 교인에 대한 관심도 바라지 않고 교인이 가져야 할 책임도 회피하려는 도피심정이 익명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익명성은 개인으로서의 교인을 관리하는 허점을 노출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책임성을 결여하게 만든다.한국인의 사고는 주로 집합성을 강조함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정적사고가 교회인으로서는 충분하나 사회인으로서는 부족하게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결과를 중요시여기는 이런 사고는 급행로가 관행이 되고 무질서를 낳게 되었다. 목표를 성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무시하면서 까지 목표를 성취해야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한국사회는 종교 다원화 시대이다. 다양한 종교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통계상황이 되었고 이러한 종교 현상을 한국인의 과제 증 하나로 종교 다원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일반적으로 무당종교의 특징은 현실성, 기복성, 의존성으로 본다. 이런 무당종교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현실성을 가지게 하며 기복적이며 의존적으로 되게 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개인 신앙을, 그리고‘만인제사장설’을 말하지만 한국교회의 교회의 교인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들을 목회자에게 의존한다. ‘기복’이란 복을 얻기 위하여 신령을 제사하는 종교행위이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복을 선언하고 가르친다. 은혜인 것이다.제3장. 세계화 지방화 시대의 한국교회세계화의 명령은 하나님의 선포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세계화 선포는 아브라함 개인의 세계화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세계화 선포이며 나아가서는 현세적 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내세적 세계화를 포함한 선포이다.그리스도는 인간적 배경인 유대인으로서의 동질성을 벗어나 세계인으로서의 인정 받으시게 된다. 성경에서 예수는 두사람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로보니게 여인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어졌던 것이 아니라 세계적 복음으로서의 무제한성과 가능성을 보이신 것이다.세계화를 가속화하는 세가지 요인을 3T라고 한다. 즉 교통수단(TRANSPORTATION),장거리통신(TELECOMMUNICATION),여행(TOURISM)을 의미한다. 이 세가지 중 가장 세계화를 촉진 하는것이 장거리 통신이다. 세계화의 요인은 또한 동시에 지방화의 요소가 된다.세계화와 신토불이가 이야기하고 있는 갈등 구조를 실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면들을 찾아보고 나아가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세계화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견지하고 정체감을 인식하고 자신의 것을 세계화 하는 것이다. 즉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화되는 방식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변화는 선교정책, 에큐메니즘, 다양한 사회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야만 한다.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는 교회 연합 운동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제 4 장 미래사회는 어떤 사회인가?신세대는 탈근대주의와 탈구조주의 속에서 산다. 신세대들은 PANTS 신드롬이라 불리기도 한다. 개인적인 성향들을 많이 띄고 있다. 그리고 주로 흥미위주로 사는 특징들이 있다. 또한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며 성별 구분이 모호한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패션 뿐만 아니라 직업,호칭등이 다양하게 변함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기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미래 사회의 뚜렷한 현상은 속도감의 변화이다. 속도가 갈수록 초고속으로 변할 것이고 적응하지 못한다면 개인에게 상당한 혼란을 줄만한 일이 될 것이다. 과거의 10시간이 지금의 1시간만큼의 시간만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이렇게 따지면 우리는 고대의 무드셀라 보다도 더 오래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미래의 신산업 혁명을 주도할 요소인 컴퓨터 기술은 더 발전하여 이젠 인간의 두뇌 기능을 가진 컴퓨터가 출연하게 될것이고 컴맹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될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는 로봇 기술이 발달한 나라가 세계를 점령할 거라고 예측 하기도 한다. 정보사회는 지식사회라고도 한다. 각 나라마다 정보 고속도로 건설을 시도하고 있고 만약 정보 고속도로가 구축되어진다면 지금 부분적으로만 주고 있는 그 영향은 앞으로 엄청날 것이다.미래는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사회 현상들이 출현 할 것이다. 변화는 인간의 사고가 영속적인 사고에서 일회용적인 정신으로, 그리고 인간 생활과, 깊이 있어야할 영적 생활도 점차 일회적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미래는 인구의 폭발과 더불어 인간이 자연에 조화와 공능력을 추구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오히려 보존 해야하는 대상임을 깨달은 것이다. 인구 폭발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다.제5장 미래교회 메가트렌드개교회주의는 한국 교회에서 교회성장의 한 요건이었었고 그래서 대형 교회를 양산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와서 교회가 사회봉사에 책임 의식을 느끼며 사회봉사를 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해 나가고 있는데 이것이 올바른 모습인 것이다. 조만간 한국 사회도 제 3의 물결이 일회성과 일치하여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게 하고 그래서 한국교회가 점점 편의성 위주의 교회로 발달 할 것이다.출석교인 감소요인은 출생률의 감소, 미래의 이동성과 임시성이 교회를 떠나게 할 요인이 될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한다해도 교인들은 헌금을 냄으로써 결석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으려 할 것이다. 이제껏 헌금이 신앙생활에서 강조되어져왔고 그것이 또한 한국교회가 자립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었다.평신도가 잘 훈련되어진다면 교회에 안정감을 가져다 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래서 메타 교회는 목회자의 역할보다 평신도의 역할이 중요시 되는 것이고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선민이다. 평신도는 하나님의 시민이다. 특별히 로마카톨릭 교회에서와 개신교에서 평신도의 개념은 목회자와 특별히 구분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기복신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기복신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 신앙을 인정해 주어야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복을 바라는 마음과 그 복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한다는 사상은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필수의 의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이 기독교 안에 들어왔다는 주장을 하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구약시대의 신앙도 기복신앙과 매우 유사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기복신앙은 무교에서 출발한다. 무교는 우상숭배, 잡신숭배, 자연숭배하는 미신이며, 기복주의, 물량주의, 배금주의, 성공주의, 개인주의, 현실주의, 권위주의, 의존주의, 운명주의, 보수주의, 혼합주의, 광신주의, 요행주의, 비합리성, 비윤리성, 비역사성, 주술성, 오락성을 비롯 왜곡된 치유, 왜곡된 예언 등으로 교회를 물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것을 교회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것이다.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원, 과정, 목표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정치와 권력과 함께 기독교라는 종교를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힘이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다지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는 신이기보다는 작은 소수 민족이 믿고 있는 신에 불과하였다.구약의 선지자, 제사장들은 야웨로부터 신 내림을 받아 말씀을 전했으며, 어떤 국가적 상황에 놓였을 때 신의 뜻을 묻기도 하였고, 병고침이나 이적을 베풀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당시 주변의 나라에서 바라볼 때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으나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신을 믿는 민족들이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무교 역시 기복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자신들의 신을 섬기고 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의 삶이 수 백년, 수 천년을 지나면서 한국 민족들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신앙과 기독교의 신앙의 마음은 신에 대한 인정과 복을 비는 비슷한 양상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