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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녀들의 저녁식사 감상문
    ! 사실 제목만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생각 할 것이다. 사실상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해방에 대한 외침이나 남성에게 빼앗긴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의 과정 같은 강한 메시지 즉, 어떤 이념적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영화라고도 생각되지 않고, 여성들이 주인공이고 여성들의 입장이 강조된다고 해서 페미니즘 영화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임상수 감독의 데뷔작 는 그동안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여성의 성을 다루어 왔던 기존의 영화와는 달리 여성 스스로 말하는 여성의 성을 다루고 있다. 즉, 는 남성들을 통한 지배적인 성 담론이 아닌, 그리고 여성들의 벗은 몸을 통해 보여지는 성도 아닌, 그녀들을 통해 말해지고 언급되는 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남성적 시각의 성 묘사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는 내숭을 떨지 않는 세 여주인공들의 대화에 처음에는 당혹감을 느꼈다.는 세 명의 주인공과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이 세 여자의 끊임없는 수다로 영화는 전개되어 간다. 즉, 서로의 환경과 가치관이 다른 29세의 세 주인공 호정, 연이, 순이가 네 번의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성에 대해 각기 다른 자신의 입장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화자인 각기 개성이 다른 세 명의 여자는 이 시대의 특징적 여성상이라 할 수 있으며 함께 등장하는 한 명의 남자는 남성상을 대변한다기보다는 영화상에서 성의 주도권이 뒤바뀐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성에 관한 대화가 여자들만의 은밀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전형적 캐리어우먼으로 프리섹스를 즐기는 호정은 인테리어 회사 사장으로 성에 대해 쾌락의 도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일상을 지루해 하는 남성 의존적 인물 연이는 호텔의 웨이트리스로 성관계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는 이상주의자 순이는 자신이 처녀라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지만 남자들과의 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고 성관계를 아이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이 영화에서 호정은 성행위에 대한 자유분방한 태도에 비해 오히려 자신과 관계를 갖는 남자들에 대한 진지한 관계나 성찰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호정의 그러한 태도가 우리 사회의 성공한 남성의 왜곡된 성 의식의 한 단면을 재연 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화는 호정의 거침없는 성관계가 간통죄에 의해 제동이 걸리게 함으로써 인간적 교감이 없는 프리 섹스를 비판한다. 그와는 반대로 영화 속의 연이는 성에 대해 그다지 금기시 하지는 않지만 애인이라는 한 남자에 집착하며 성관계와 결혼을 어쩔 수 없이 묶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한편 성을 매개로 해 결혼을 하려는 연이에게는 남자친구가 결혼을 거부하게 함으로써 성을 담보로 한 결혼을 반대한다. 끝으로 결혼이나 연애는 원치 않고 단지 애만 낳아서 기르고 싶다는 이 사회가 요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순이는 연이의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결국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순이가 지리산 등반사고로 도중 유산을 하게 만들면서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영화의 결말에서 호정의 남자친구는 간통죄로 피소된 호정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는데, 그런 행동에서 호정은 프리섹스가 지니는 허무함과 공허함이 아닌 진정한 인간적인 정을 느낀다. 그리고 연이는 이전까지는 남자친구와의 성관계에서 한번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지만,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관계에서 처음으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하지만 이 영화가 한가지 아쉬운 점은 능동적으로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유연애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호정이 간통으로 고소당한 후 당당함을 잃고 일종의 도피인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혼 생활은 원하지 않으나 아이는 낳아 기르고 싶다는 순이의 바램을 단순히 임신과 또한 그것이 아직까지는 우리사회에서는 용납되지 못하므로 유산으로 연결되게 함으로써 그녀가 찾아 헤매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독후감/창작| 2008.11.26| 2페이지| 1,000원| 조회(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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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1. 유물사관의 개념유물사관이란, 역사는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파악하는 사고체계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역사적ㆍ사회적 경과들은 추상적ㆍ사변적으로 사고될 것이 아니라 그 실제적인 토대에 따라서 관찰되어야 한다는 점이 역사인식의 출발점이자 근거로 되고 있다.2. 유물사관의 형성배경(1) 사회사적 배경역사의 형성과 그 진행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고려를 중요시하는 사고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시기의 자연철학에서 제기되었던, “이 세상에서 유일한 현실은 물질이다”라는 주장에서 그러한 사고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토지, 기후, 환경 등의 자연적 조건과 경제적 여건이 역사생활에 끼치는 영향을 항상 고려했었던 역사가들도 가끔 있어왔다. 특히 18세기부터는 이러한 역사관찰이 몽테스키외, 뫼제르, 헤에렌 등에 의해, 19세기 전반에는 버클, 떼느 등에 의해 강조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러한 역사관찰은 극히 소수의 역사가들에게 국한되었고,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작용과 의지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적ㆍ이념사적 관찰태도가 지배적이었다.19세기 중엽이 가까워지면서 사회운동과 사회경제적 구조를 중요시하는 역사연구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이른바 물질주의적 역사관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전반의 전환적인 역사현실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즉 18세기 후반부터 진행되어 온 농업사회로부터 산업사회에로의 변화가 자본주의체제를 확대시켜 나갔고, 그 과정에서 사회의 각 집단들과 영역들의 역할이 증대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경제의 중요성은 특히 부각되었다. 또한 이에 따른 새로운 요구들이 일련의 사회운동들 속에서 왕성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역사진행을 관찰하는 기존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분석하고, 그 논리를 발견하여 대중의 욕구와 사회운동의 힘들을 파악해야만 역사의 진정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들은 바적 사고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헤겔은 사상을 대상으로부터, 즉 현실로부터 전개시켜 나가지 않고, 오히려 대상을 그 자신의 사상으로부터 전개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헤겔에게서는 철학의 전개가 00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당시의 사회가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고, 그러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인간의 정신활동과 관념을 속박하고 있는 현실을 포고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역사를 정신형상으로서 파악하는 헤겔의 철학이 부당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엇었던 것이다.3.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과정마르크스는 당시의 역사현실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ㆍ경제적 견해와 철학적 인식태도로부터 출발하면서 역사생활에서의 물질적 관계를 해명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그의 작업은 특히 당시 자본주의사회의 경제구조와 그 논리에 대한 분석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는 인간사회의 형성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생산적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생산 활동에서의 생산력은 자연과 인간에게 있는 힘으로서 사회의 생산관계, 즉 경제조직 속에서 인간을 통해 형성된다. 이 생산력은 수적으로나, 그 강도와 기술에 있어서 중단 없이 증가한다. 생산력의 이러한 변화는 생산약식과 교환약식에 변화를 가져오고, 따라서 기존하는 생산관계 속의 소유관계에 즉, 경제구조에 모순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여기에서의 경제구조란 여러 가지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 세워진 법률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발생하면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기존의 경제구조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변화된 생산력에 알맞은 새로운 생산양식과 소유관계를 세우고자 하는 측에서는 기존의 경제구조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이때의 전자는 자본가계급이고 후자는 노동자계급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란 바로 이러한 계급들 사이의 투쟁이며, 그 진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대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던 사회발전의 과정을 그는 각 단계에서 형, 종교, 형이상학 및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에 해당되는 여러 가지의 의식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적인 모습을 가질 수 없다. 이런 것들에게는 아무런 역사도 없고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역사진행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있어서는 변화의 원인은 오로지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의 변화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으로 된다.그러므로 마르크에게는 경제적 관계와 그 구조, 그리고 그것이 진행시키고 있는 필연적인 현상들의 논리를 파악하는 일이 바로 역사형성과 그 진행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위에서 모순들에 대한 해결책도 기대되는 것이다. 그가 자기 이전의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했던 이유는 오웬, 포이에르 바하, 프루동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산업사회의 경제구조가 지닌 기계적 논리를 간과하면서 사회문제들은 인간주의적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직 경제구조의 법칙적 논리를 드러내기 이전의,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도 극대화되기 이전의 시기에 살았으므로 그들은 물질적 논리를 철저하게 의식하지도 분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빈곤과 사회모순에 대한 그들의 대책은 18세기의 인도주의 사상에 힘입고 있는 정도였다.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근세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조를 분석하면서 자본과 노동과의 관계, 특히 그 경제구조와 법칙적 논리에 따라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모순들과 소외 문제 등을 집요하게 해명했다. 그러한 근거 위에서 그는 역사는 결국 그러한 모순들을 지양시키면서 진행해 갔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요컨대 그가 공산사회를 전망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들을 분석한 결과 이 사회는 그가 규정하는 바의 물질적ㆍ경제적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극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 사회는 소유권의 확대를 통해 부소유자를 양산하며, 이 사회는 결국 소유자와 무소유자의 두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노동자들은 무소유자로서 비참한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그 증가하는 가운데 빈곤이 극심해지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피할 수 없는 위기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무산계급의 투쟁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투쟁과정에서의 주도적인 계급을 시민사회의 주역인 부르주아지 계급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최하층의 프롤레탈리아로 보았다. 바로 이 점에서 그의 분석은 혁명의 이론으로 나아갔다.부르주아지부르주아지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본시 봉건체제로부터 해방된 후 군주제적 구제도에서 제3신분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근세의 대의제국가에서는 그들은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형성시킨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 사이에 적나라한 이익관계를 세웠고, 인간품위를 교환가치로 떨어뜨렸으며, 가족관계 마저 깨뜨렸다. 그들은 예술과 학문을 보수 받는 작업으로 노동을 상품으로 노동자를 기계의 부품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제 그들은 주기적으로 발행하는 경제위기, 초과생산, 무산계급의 각성 등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프롤레탈리아그런가 하면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증대하는 생산력과 재조정되지 못하고 있는 기존의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속에서 전면에 부산하게 되는 새로운 계급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생산도구로 전략하는 가운데 다른 모든 계급들과 대립하면서 계급의식에 각성하게 된다. 그들로부터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의식이 일어나며, 드디어는 자본가 등에 대한 공산주의 혁명을 수행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 국가에서는 사유재산이 사라지고, 모든 생산수단은 집단적으로 조직되어 국가의 통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여 단결하라”고 선언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마르크스의 이론은 메링과 카우츠키 등에 의해 계속 보완되었으며, 여기에는 특히 플레하노프가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시즘이 경제적 결정론의 한 형식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대핸 반박하면서 그것은 경제발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정치와 대중심리가 영향차적인 것으로 간주해 왔다고 하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의 기본인식은 정신적 요소란 물질적 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후자야말로 결정적인 작용력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진행을 정신의 변증법적 발전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산력과 기존의 생산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순들이 불러일으키는 대립과 투쟁의 전개모습을 통해 분석해 나갔고, 이를 근거로 하여 유물론적 역사관을 세웠다.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신학적ㆍ관념주의적 역사관의 틀을 계승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상의 역사를 신학적 의미 속에서 통일적으로 상상했었고, 헤겔이 세계사를 현실적ㆍ이념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서 파악했었다면, 마르크스는 세계사를 현실적ㆍ물질적으로 역시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역사관은 자기당대의 산업사회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근거로 하여 세워진 것인 만큼, 내용에 있어서는 신학적ㆍ추상적 개념들이 현실적ㆍ물질적인 개념들로 대체되고 있다. 신이란 개념이 헤겔의 세계정신을 거쳐 마르크스 에게서는 물질적 생산력이 되었고, 영원의 제국이 자유를 거쳐 공산사회로 되었다. 이러한 대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사고가 헤겔의 평 신학적ㆍ평 세속적 사고를 거치면서 철저한 세속적 사고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기독교 신학적, 관념주의적, 그리고 물질주의적 등의 세 역사관들에서는 역사진행이 한결같이 진보로 상정되어 있고, 그것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미래의식으로부터 나왔다. 특히 마르크스에게서 보면 그는 도래할 공산사회를 전망하는 강한 미래의식을 갖고서 역사진행을 분석하고 해석했다. 이것이 실로 그의 독특한 면모이다. 미래의식은 다른 역사가들에게서도 때로는 의식적,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역사에 대한 그들의 관조와 이해를 풍부하게 만드는 경우들도 있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그것은 숙명론적ㆍ종말론적으로 작용하여 결정론으로 나아갔다. 그가 역사발전에 종국적인 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사회과학| 2007.10.16| 8페이지| 3,500원| 조회(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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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 이주노동자 인권현황과 한국 이주운동진영의 과제“에 관한 발제문을 듣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 이주노동자 인권현황과한국 이주운동진영의 과제“에 관한 발제문을 듣고제1부『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 그리고 민중의 대응』과 제2부『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아태지역 사회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한 토론에 참가하였지만 수업시간이 겹치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에, 도저히 아쉬운 마음이 가시질 않아 오후 4시부터 시작된 주제별 워크샵에 또다시 참석을 하였다.내가 찾아 간 곳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이주노동자 인권현황과 한국 이주운동진영의 과제”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발제는 이종구 교수(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가 맡았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인 글이었다.1990년을 전후해서 이 땅에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40만 여명이라는 많은 숫자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그에대한 대처는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알다시피, 그들의 노동조건-저임금, 체불, 장시간 노동, 산재, 폭행 등이 국내 노동시장의 저변을 이루는 중소영세기업 노동자가 놓여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더구나 이주노동자의 장기 체류화가 진행되면서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각지의 공단 주변에는 집단 거주지역이 형성되고 있다. 이른바 이들이 한국 사회의 생활인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자녀는 현재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취학이 가능한데, 문제는 이에 대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아 예산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단일 민족 국가로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폐쇄적이고 외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적응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라고 한다. 그들은 아직까지 외국인, 특히 비(非)백인들에게 배타적인 국가에 이주해 와서 불편한 언어 소통, 폭력, 불법 체류자라는 불안감, 그리고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겹쳐 무거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라는 피할 수 없는 물결 속에서 이제 우리는 여태껏 외면해 왔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라도 우리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바로 올바르게 고치고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법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그전에 외국인이주노동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한다.즉,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많은 점에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시선이 많은데 실제로는 이들은 내국인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 종사하여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잘 받아들여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 줄 경우 우리의 국가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과학| 2007.10.16| 1페이지| 1,000원| 조회(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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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본 한·미 관계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본 한?미 관계현실주의적 패러다임에서는 무정부상태로 특징지어지는 국제정치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와 안보를 지켜낼 수 있는 방안으로 힘에 의한 힘의 견제를 제시한다. 이 관점에서 인간사회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므로 불완전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세계의 평화는 영구적이거나 완전할 수 없고, 가변적인 상황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며 불안정한 것이다.현실주의적 시각으로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재조명하기 전에 우선 한국과 미국이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국제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역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일본의 패망이후 같은 연합국에 속해 있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고, 냉전 질서 속에서 한반도는 양극체제가 격돌하는 이념적 경계선이 되었다. 남한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도움,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로써 남한과 미국, 일본의 남방삼각동맹과 북한, 소련, 중국의 북방삼각동맹이 이루어졌고 세력균형을 유지했다.현재, 냉전의 미소균형이 무너지고 탈냉전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단정지울 수만은 없다. 물론 패권국인 미국이 절대적 우위 속에 있지만, 국제정치는 국내정치와 달리 중앙정부가 없기 때문에 모든 국가는 스스로 힘을 키우고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함으로써, 지금의 탈냉전시대가 오히려 더욱 불안한 안보딜레마를 겪을 수도 있다.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봤을 때, 한?미 동맹은 당분간 계속 유지는 하되,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상황에 적절한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조건적인 한?미 동맹 수호를 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고, 경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국가간 협력이 그 어느때보다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은 일본, 중국과의 경제통합 논의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문제, APEC의 활성화 등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하여야 한다. 이와 동시에 미국과는 정치?군사적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미국은 현재 패권국으로써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안보적 특수성으로 고려해봤을 때, 미국을 방어막으로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것이 외부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역부문에서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미국에 강한 대외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제정세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무조건적인 반미감정은 지양해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듯이 자국 외에 다른 나라의 힘과 권력을 정확히 판단하고, 국제적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 2007.10.16| 1페이지| 1,000원| 조회(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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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을 읽고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을 읽고먼나라 이웃나라 라는 책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시간이 날 때 꼭 한번 읽어보자고 다짐했던 책이기도 하였다. 이 책은 역사에 접근하기가 그 어떤 책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그 이유는 아마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함으로서 쉽게 독자에게 전달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그림과 설명을 적절히 혼합함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함을 줄일 수 있었다.민주주의의 본고장인 영국은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잉글랜드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의 나라 이름은 거의 모두가 England 인줄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The United Kingdom Of The Great Britain 이다. 그리고 영국이란 이름은 잉글랜드라고 많이 부르는데 잉글랜드는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은 섬나라에 인구 6천 5백만 명의 나라이며, 또한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에 그다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고, 해군만 있으면 다 막아줄 수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해군들 위주로 군사력을 키워갔고, 점점 강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비행기가 발명된 뒤부터는 해군의 역할이 크게 줄었고 전쟁에서 많이 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외적과의 끊임없는 전쟁, 항복, 화해 등을 거치는 동안 여러 인구들이 뒤섞여 버렸다. 세계 최상의 대영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부터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는데 그 많던 식민지들이 차례차례 독립해 나가고 미국 소련의 초강대국이 등장하여 세계를 주름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늙은 영국을 세계는 아직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The Common Wealth 즉 (영 연방) 이 기구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36개국의 모임으로 옛 영국의 영토였거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독립한 다음에도 서로간의 친목과 이익을 도모하자는 모임으로서 그 지도 국가인 영국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모임은 형식적으로 영국의 왕을 그들의 가장 놓은 어른으로 섬기는 것과 그들의 공용어를 영어로 하고 있다는 큰 공통점으로 서로 맺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영 연방 36개국이 영어와 영국문화라는 정신적 바탕으로 맺어졌으므로 이 나라들은 영국을 중심으로 서로 끼고 돌기 때문에 세계는 아직도 영국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많은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는 영국은 종교의 차이 지방의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 문화의 뿌리와 영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영국이 자리한 위치를 보면 플랑드르 지방, 즉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마주보고 있는 까닭에 끊임없이 두 문명의 영향을 받은 데다 섬나라라는 특수한 자연 조건이 합쳐 오늘의 영국 문화가 탄생되었다. 또 영국이 있기까지 영국이란 섬나라의 자연 조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영국의 자연이 달랐다면 그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영국의 자연은 남쪽은 부드러운 평야 북쪽은 스코틀랜드 지방의 산악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영국은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은 섬이기 때문에 계속 서쪽으로 뻗어 나가려는 유럽 세력의 중요한 출발 기지가 되는 것이 영국이 세계 제국을 이룩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는데, 이것 역시 자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영국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외적의 침입이 계속되어 로마의 정복부터 지금의 북도이칠란트 작센 지방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족의 침입, 스칸디나비아에서 건너온 바이킹의 침략, 덴마크 지방에서 몰려온 데인족의 침략, 북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노르만 족의 침략 등 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영국 문명의 첫 출발은 지금부터 약 2,400여 년 전부터 건너오기 시작한 켈트족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브리튼 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의 지배였다. 그러나 북방계 켈트인의 침입과 함께 게르만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로마인의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에도 색슨 ?앵글 ?주트 등의 게르만인의 침입이 잇따랐으며 이로 인해 로마의 군대가 철수하여 로마의 지배는 완전히 끝났다.존왕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세를 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이 헌장은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 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영국은 대륙과 달리 평화로워서 왕의 세력이 강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왕의 힘이 강하지 못하였을까 그 이유는 국회 때문 이였다. 왕의 세력이 강해지면 국민들이 부담하는 세금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제임스 2세는 국회와 싸우다가 신하(국회) 에 의해 처형되었다.영국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꾸는 동화의 세계인 여왕, 왕실, 궁전, 황금마차, 왕자, 공주 등이 있다. 또 왕자님의 사랑 공주 님의 결혼 황태자의 약혼 등은 우리들에게 흥미 있는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영국에는 여왕이 다스리면 나라가 잘된다 라는 이런 미신 같은 것이 있다. 지금까지 영국은 여러 여왕을 모셔왔는데 그 가운데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라고 불리우는 메리 여왕 때처럼 영국 역사에서 신교도 탄압으로 피바다를 이룬 때도 있었지만 영국을 크게 발전시킨 엘리자베스 1세 때는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찬란한 문화의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 동안이나 왕관을 썼던 빅토리아 여왕 때는 영국이 세계 최상을 자랑하던 때였으며 영국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고 행복한 시대였다. 이때부터 영국 사람들은 여왕은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온다고 생각하고 여왕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더구나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처럼 인자하고 백성들의 일을 자기 일 같이 감싸고 돌보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영국 국민들은 여왕을 국모로 섬기고 여왕과 그 가족의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관심과 사랑을 갖고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왕은 큰 권력을 쥐고 국민을 지배하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 일은 수상이 이끄는 내각과 국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국회에 맡기고 뒷전에 물러앉아 국민들과 함께 웃고 우는 나라의 가장 높으신 어른으로 친근한 벗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독후감/창작| 2007.10.16| 3페이지| 4,000원| 조회(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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