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는 선진 문화, 선진 문학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영미문학이나 구라파 문학의 예속적 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국수주의로 흐른다면 그것은 더욱 위태롭다. 우리 문화 스스로의 정체성 위에서 서구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인데 그 해답은 바로 라틴 문화, 라틴 문학에 있다. 우리의 체질이나 취향에 맞으면서 엄청나게 서구적인 것이 라틴 현대 문학이기 때문이다.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1960년대 ‘중남미 붐 소설’의 시대를 열면서 서구 문학의 첨봉에 섰다. 소설뿐만 아니라 네루다, 빠스의 시도 명실공히 서구 현대시의 고전이 되었다. 민중 문학, 해방 문학의 모델로서의 네루다는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어의 마술사로서 큰 몫을 했다. 빠스는 동서 시학의 정수를 소화하여 자기 시학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시인이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인류학적으로 유사 몽고적 인디오 문화와 라틴 문학의 접목이 낳은 가장 훌륭한 결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문학, 동양 문학이 오늘의 서양 문학과의 접촉에서 무엇을 얻어내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의 그 모델을 중남미 문학이 제시하는 것이다.그러면 먼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크게 시와 소설로 나누어 살펴보고 시의 대표적 작품과 마술적인 사실주의에 대해 보도록 하겠다.멕시코 현대시의 경향은 오리엔탈리즘과 에로티즘으로 나뉜다. 이것이 멕시코 시를 바라보는 유일한 관점은 아니다. 다만 오리엔탈리즘과 에로티즘이 지금 우리 동양 편에서 바라보는 가장 뚜렷한 지표이며, 이 두 가지 줄기는 현대 멕시코에서 매우 일반화 되어왔다. 오리엔탈리즘의 고전은 아마도 네르보와 환 따블라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시인의 시에는 중국, 일본에 대한 동경과 불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에로티즘은 벨라르데와 빠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특히 벨라르데가 빠스와 다른 점은 귀족적이 아닌 서민적 소재의 사용에 있다기 보다는 에로틱 이미지의 본격적 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70년대 이후 멕시코 현대시에헤스를 낳았고 시인이며 소설가인 홀리오 꼬르따사르, 리까르도 몰리나리, 알포시나 스또르니를 산출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민중 서정시라고 할 수 있는 ‘탱고’나 ‘밀롱가’스타일의 신민요 풍의 시도 기세를 올렸다.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시의 가장 빈번한 테마는 사회정의와 실의에 대한 패러디 스타일의 시풍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시는 그 사회가 겪는 현실의 아픔 때문에 아직 새로운 여명을 바라고 있을 시간이 없다. 시와 사회현실과의 상호 역학관계가 극명하게 와 닿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독재와 폭력을 주무기로 행세하는 중남미 사회에 있어서 압박과 굴욕, 소외의 의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악순환을 거듭하는 제 3세계의 정치사회 현실은 파울로 프레이리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로메로 신부, 그리고 정치적 투쟁에서 체 게바라 같은 해방운동의 선각자들을 낳았다. 시에서도 아르만도 떼하다, 까르데날, 까살달리가 대사제 등 수많은 시인들이 해방시를 썼다. 중남미의 대표적인 해방 시인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의 혁명시는 중남미적인 현실 앞에서의 끝없는 투쟁의 산 증거다. 그러나 그의 시가 혁명적인 것은 그 시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도구로 쓰여져서라기보다는 그 시 자체가 자신의 존재, 즉 ‘나이면서 곧 나의 환경’인 자아의 구현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있는 데서 빚어진다. 중남미의 구체적인 현실이 해방을 향한 부단한 행진이며 투쟁이라면, 진정한 시는 이 투쟁을 보다 강도 있게 부각시키는 임무로서 정치와 역사의 현실 앞에서 자아를 실현한다. 해방시는 이제 다시 정치와 시, 종교와 시를 구분하지 않는다. 시 작업 자체가 역사를 변형시키고 개혁하는 일종의 인간화 작업이기 때문이며, 삶과 투쟁과 시는 다같이 시인이라는 한 인간 실존의 실천양식이기 때문이다.빠블로 네루다의 『총가요집』을 중심으로 라틴 아메리카 민중 서사시를 볼 수 있다. 헤수스 마뉴이라기는 『총가요집』에 대하여 어떤 속박 속에서도 해방을 찾는 전 아메리카의 서사시라고 극찬했을 정도이다. 이 시집의 구성은 총 15편의 노래총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중남미 역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 서사시는 새로운 역사 의식을 제시한다.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아메리카 정복자들에 대한 회상도 나온다. 또한 네루다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인 이슈 또한 중요한 소재가 된다. 그의 서사시의 영웅들은 역사 속의 영웅들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 그 중에 생을 가파르게 영위하다 그 물결에 휩쓸려간 수많은 인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네루다의 민중시는 인간 해방에 대한 구가라 할 수 있다.1945년까지 중남미 소설은 완전히 사실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미겔앙헬 아스뚜리아스, 알레호 까르뺀띠에르 등이 40년대 후기에 나타나면서 종래의 풍속도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마술적인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을 창안해 내었다. 1960년까지 유행한 이러한 환상적인 사실주의, 혹은 마술적인 사실주의는 사실상 1930년대에 보르헤스로부터 효시를 삼아야 될 것이다. 보르헤스는 오늘날 중남미 소설에 최초로 기상천외의 세계, 아니면 극히 환상적인 세계를 설득력 있게 도입한 천재적인 작가다. 그는 이런 상상력의 세계를 발동시켜 굳은 관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머리에 일종의 스포츠를 권고하면서 복잡한 상상력의 운동을 통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문제에까지 이끌어간다. 그의 작품의 환상적인 세계는 그 뒤 훌리오 꼬르따사르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떻게 하나의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새로운 비전과 의미로 육박하는가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영향은 오늘의 중남미의 모든 작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1960년대 이후 중남미 소설의 질적 및 양적 성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바르가스 요사, 에르네스또 사바또, 훌리오 꼬르따사르와 까를로스 푸엔떼스이다. 이들 오늘의 작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앞서 말한 40년대, 50년대 작가들이 개척해 놓은 마술적인 신비주의를 최대한 활용하는 경우와 토속적난날의 지나친 사회참여, 국가주의, 지방색, 토속주의를 초월한 우주적인 비전에서 성찰한 자아의 의식 내부를 파고든다. 잠재의식과 마술, 신화로 얼룩진 오늘 이들의 소설세계는 하나의 현실이 신비스러우리만큼 사물의 스케치에 보다 신경을 행동 자체에 역점을 둔다. 또 이 시기에는 소설 구성에 있어서 종전의 이야기 중심의 전개방법을 버렸다. 그 대신 순간 순간의 삽화라든가 시간상 서로 다른 사건의 동시전개, 심리적인 묘사의 비약 등으로 소설은 하나의 지속되는 이야기 줄거리를 잃고 작자의 의식의 흐름 속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대화보다는 독백이 소설에 많다는 점이다.라틴 아메리카 소설에서는 시적인 요소가 눈에 많이 띈다. 소설 언어의 시적 비약(심한 비사실적 묘사와 이야기 패턴, 대화의 중복)이 나타나는가 하면 단편소설 안에 ‘장’(capitulo)이나 다른 세부 이야기 구분을 파격적으로 하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에서 시적인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꿈과 현실의 동가치적 교차, 마술과 사실의 교감, 인디언 세계의 마르크시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원초적 삶의 비전이 중남미 단편의 대부분을 시적인 긴장감으로 휩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이들 단편들의 높은 상징성은 하나의 단편이 진짜 어디까지가 시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한다.멕시코는 1910년 위헌적인 디아스의 정치체제에 반기를 든 순수한 정치적 반란인 멕시코 혁명이 있었다. 그래서 혁명문학을 살펴보면, 우선 시나 노래에 있어서 1910년의 혁명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시나 노래가 처음으로 예술적인 표현을 갖게 되었고, 토착예술과 그 기술에도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유럽 지향적인 경향이 심각하게 나타나던 멕시코 상류계급의 문학이나 음악과는 대조적으로, 대중의 문학과 음악의 표현은 완전히 멕시코적이다. 이는 혁명의 영향이 완전히 전 국민에게 파급되었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비센떼 끼라르떼의 『곰의 이론』이란 시선집에 있는 시들을 몇 작품 보았다. 우선 곰의 이론.. 시집 이 대표적 작품인 ‘까라르레에서의 조각가 미겔 안젤로 부오나로띠’에서 나오는 이 구절은 항상 할 일이 쌓여있고, 매시간시간 끝내야 할 일이 있는 그렇게 바쁘게 사는 현대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공감될 것이다. 시 전반에서 조각가였던 미겔 안젤로의 정성과 고뇌, 열정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에 열중해서 하루를 보내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각 작품 하나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켜 모든 것을 쏟아 붓지만 한편으로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모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곰의 이론』에서 나오는 작품들에는 말 그대로 곰이 계속 등장한다. 하지만 그 모호한 뜻을 알 수는 없다. 어쩌면 시를 감상하고 비평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라 곰이 뜻 하는게 무엇인지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끝내 곰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시인의, 예술가의 기운이며 그 무엇이다.멕시코 시인 하이메 사비네스의 시는 오묘한 기분이 든다. 지극히 평범한 사랑 이야기이다. 서점에 깔려있는 수많은 시집들이 모두 다 비슷한 사랑이야기이듯이.. 하지만 일상적이고 특이한 사건이랄 것도 없는 내용을 가지고 너무나 진솔하게 풀어 가는 말의 묘미가 느껴지며 그 속에서 사비네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이 오묘하다는 것이다. 다른 시들처럼 처음 읽었을 때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용도 이해가 되고, 표현 또한 어렵지 않으나 자꾸 읽다보면 신비스럽게 자극함을 느낀다. 이 부분은 요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언젠가 한 교수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한사람이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잘 지내냐는 질문에 친구는 사실 암에 걸렸다고 얼마 못산다고 심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전화를 걸은 그 사람은 “별일 없구?”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금 핀트가 어긋난 이야기 일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죽음을 가까이 둔 노인들의 심정이 이해됨과 .
이 작품은 도시 빈민의 궁핍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서, 특히 노동자의 현실 패배가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소외된 도시 근로자의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다. 즉, 생존에 필요한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 열악한 작업 환경, 고용자로부터 강요되는 부당한 노동 행위, 노동 조합에의 탄압, 폭력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극한적 심리 상태, 그리고 가진 자들의 위선과 사치, 그들의 교묘한 억압 방법 등 산업 사회의 부정적 측면들이 제시되어 있다.작품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수, 영호, 영희가 차례대로 서술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영희가 서술자로 되어 있는 3장의 마지막 결말 부분이다.▶1부(서술자는 영수) : 철거 통지서를 받는다. 가족들의 생활이 과거·대과거·현재로 교차되면서 중첩되어 묘사되고 있다.▶2부(서술자는 영호) : 영희의 가출. 입주권을 투기업자에게 팔고 철거반원에 의해 집이 철거된다.▶3부(서술자는 영희) :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긴 영희는 금고 안에서 입주권과 돈을 들고 나와 입주 절차를 마치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사회에 대해 절규한다.도시 빈민의 궁핍한 생활,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찬 구조 속에서 노동자의 현실적 패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제목의 연작 12편 중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서 드러난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엄연한 현실적 문제이자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작자는 난쟁이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의 삶의 모습, 그리고 70년대의 노동 환경을 폭로, 고발하고 있다. 작품 결말부의 영희의 절규는 더 이상 난쟁이로 남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을 환기시키는 데만 호소력을 지닌 게 아니라, 문학만이 가능한 정서적인 면을 강하게 갖고 있다. 이를 통해 현실 제시라는 반영적(反映的) 기능과 암시와 함축이라는 정서적(情緖的) 기능을 모두 만족시킨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이 대목에서 꽃을 던지는 영희의 행동이 영호의 꿈속에서인지 실제의 그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팬지꽃과 폐수', '귀여운 소녀와 꽃을 버리는 행위'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시적 호소력을 보여 주고 있다.작가는 난장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근로자들의 삶의 조건과 모습을 파헤침으로써 70년대 이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우리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중첩(重疊), 환상적인 분위기의 조성,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의 기법적 새로움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대하여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난쟁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들이다. 작가는 비상하게 날카로운 촉수로 이들의 삶의 조건과 양상을 파헤침으로써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된 노동 현실의 심층을 해부한다.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합쳐 열두 개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 의 중심 인물들은 난쟁이 일가다.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의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던 사십대 후반의 난쟁이와 그 부인, 영수, 영호, 영희 세 남매로 구성된 일가에게 철거라는 위기가 닥친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 근거가 전무한 그들이 ‘딱지’라 불리는, 재개발 지역의 아파트 입주권을 헐값에 팔아 넘기고 거리에 나앉는 과정이 연작의 표제작에 담겨 있다. ‘뫼비우스의 띠’의 꼽추와 앉은뱅이 역시 난쟁이 일가와 같은 처지를 당한다. 딱지 장사로 돈을 챙기는 사내에게 접근한 영희가 우여곡절 끝에 딱지를 되찾아오고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 사내를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이 선명한 대립 구도 속에서 그려져 있다.도시 빈민의 자식들은 노동자로 편입된다. 까만 쇠공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간(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은) 난쟁이의 자식들은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제일공장, 은강방직 공장에 취직한다. 작가의 시선도 그 공장들이 있는 서해안 항구 도시 은강으로 옮겨 간다. ‘기계 도시’,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클라인 씨의 병’ 같은 작품들이 은강을 무대로 전개된다.“우리 삼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 공헌도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 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생계비는 팔만삼천사백팔십 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이백삼십일 원이었다.”(‘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에서)죽어라 일을 해도 사정은 나아지질 않는다. 야근 시간에 졸다가는 반장이 들고 다니는 옷핀에 팔을 찔린다.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되어 블랙 리스트에 오르고 어딘가로 끌려가 조사를 받거나 어두운 골목에서 뭇매를 맞는다.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을 그리자면 그들의 적대 계급인 자본가와 그 주변 세력을 등장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은강 그룹의 소유주 일가와 그들의 수족으로 일하는 율사(律士)가 그들이다. 거기에다가 신애와 그 동생으로 대표되는 양심적인 중산층, 윤호의 가정교사였다가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는 지섭과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더해져 소설은 한 사회의 전체상을 그릴 수 있게 된다.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영수가 은강 그룹 총수의 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물론 작가의 메시지가 그처럼 극단적인 마무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 주자는 것이었으리라. 작가의 진짜 대안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기 전 영수의 시점으로 이렇게 표현된다.“아버지는 그런 세상에서는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불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으로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까지 머물게 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