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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파식적 설화의 역사적 의미와 배경
    - 만파식적 설화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 -1. 만파식적 설화에 대하여2. 만파식적 설화의 문단 별 내용3. 만파식적 설화의 배경 및 역사적 배경4. 마무리1. 만파식적 설화에 대하여만파식적설화는 권 제 2기이 제2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만파식적은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부리는 악기로서 신문왕이 부왕인 동시에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으로 등장하는 김유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일종의 聖物 내지 神物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만파식적 설화도 이야기 자체가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설화이다. 만파식적 설화는 신라의 설화 중에서도 당대의 시대욕구가 짙게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설화가 소설보다 훨씬 가공적이며 환상적 비현실성을 지니는 것은 시대의식의 욕구가 강렬하게 투영되기 때문인데 만파식적의 경우도 상당한 비사실적 상황 속에서 설화적 흥미가 증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신라 전설 설화에 있어 비현실성은 오히려 그 특색이 되며, 사실성이 경시되고 있지만 그 사실성을 검토해 보는 것도 그 작품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그것은 사실과 상치된 작품의 전개 속에서 그 작품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만파식적설화는 대부분 종교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이 설화를 불교 설화로 보고, [통일 완성에 대한 감사와, 통일 후의 태평구가 및 안일에 빠지지 않기 위한 경계와 성대(聖代)를 가져다 준 성왕(文武王)·성신(金庾信)의 무한한 권능과 위덕을 숭봉하고 기리는 찬송의 내용을 담은 글] 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결론에는 이 설화의 구조 및 역사적 배경에 대란 구체적인 이해의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현지에 전승되고 있는 설화를 채집하여 민속학적인 입장에서 주로 다룬 연구는 [기상변동의 소리인 "거랑 끊는 소리"를 만파식적 설화의 원형]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에 채록된 문헌설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결하고 있어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이와 같이 어이 왜병을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이 절을 짓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문무왕이 생각했던 이 절의 원명은 진국사(鎭國寺)였는데, 이는 동해로부터 경주에 이르는 최단거리에 있는 동해구에 절을 세움으로서 욕진왜병(欲鎭倭兵)코자 하였던 그의 목적과 더 부합하는 이름이었다.위의 에는 신문왕 2년에 감은사가 필역(畢役)되었다고만 밝히고 있지만, 감은사 창건의 보다 정확한 시기는 이 해 5월 이전의 일이라고 짐작된다. 이는 이 해 5월 7일에 왕이 감은사에 유숙했던 사실이나, 만파식적의 출현과 감은사 창건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점 등으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옳다면, 신문왕의 즉위로부터 감은사의 필역까지는 약 9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처럼 단기간에 감은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선왕 문무왕이 이미 사업을 어느 정도 진행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문왕이 즉위한 후 가장 중요한 사업은 삼은사의 완공이었을 것이다. 선왕의 욕진왜병코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여, 선왕이 못다 한 사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선왕의 덕을 추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문무왕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운 절 이름을 감은(感恩)이라 하고, 또 금당계하(金堂階下)에 東向한 한 구멍을 내어 용이 들어와 서리게 했던 것 등은 다 선왕에 대한 추모의 念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만파식적의 출현이 감은사의 필역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다음으로 문무왕이 죽어 동해의 용이 되었다고 하는 설화는 만파식적설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문무왕이 죽은 뒤에 호국대룡이 될 것을 평소에 염원하고 있었다. 이는 왕이 평소에 지의법사(智儀法師)에게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소원이오.』라고 했다. 법사가 『용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고 했다. 왕은 『내가 세상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오. 만약 ?報에 의해 축생이 되더라도 짐의 뜻에 적합하오.』라고 했다.는 것으로 알력하기도 한다 . 小山이 파도를 따라 왕래하고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친다는 등은 매우 설화적이기에, 그 小山이 곧 대왕암을 지칭한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黃壽永씨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만파식적설화가 곧 문무왕의 ‘화신인 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기 때문이며, 흐르는 구름 속의 달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듯이, 파도치는 바다 속의 대왕암을 두고, 小山이 계파왕래(階波往來)한다고 표현해도 큰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만파식적 설화의 스토리가 문무왕이 평소에 호국대룡이 되어 국가를 수호 하기를 염원했고, 해중릉인 대왕암 및 이견대, 그리고 감은사가 조성되었으며 만파식적이 등장하게 되는, 다시 말해 문무왕과 관계가 깊은 동해구 유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신문왕과 그 선왕을 중심으로 구성·전개된다고 할 때, ④의 김유신에 관한 설화는 변이과정에서 삽입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김유신이 삼국통일에 끼친 지대한 공과 신문왕의 외가가 곧 가야씨 김씨인 김유신의 집안이라고 하는 사실, 즉 신라중대 무열왕권에서 차지하는 김유신의 비중을 감안한다면, 전연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이 부분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이 함께 성인으로 강조되고 있음은 주목된다. 이는 용에 의해한번 더 강조되는데 대란 합한 후에 소리가 나듯 만파식적의 출현은 二聖同心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군신간의 조화와 합심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김유신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신비적인 설화가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점으로 볼 때는, 김유신 또한 문무왕 못지않게 매우 설화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김유신에 얽힌 영웅적인 설화가 만파식적설화에 연결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⑥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카오스에로의 복귀와 그 뒤에 따라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신화적인 순간』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갱신과 재생과 혹은 새로운 창조를 허용하기 위해서 혼돈이 따른다.」「새로운 형태가 탄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했던 것을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흑옥대의 銷 하나하나가 진룡이라면 이 옥대는 「龍顔」·「龍驚」 ·「龍抱」등의 용어와 같이, 가히 「龍帶」라고 할 수 있고, 이 때의 용은 「천자」·「군주」의 상징이라고 생각된다.그러면 신라삼보 중의 하나인 천사옥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신문왕 때에 이르러 흑옥대가 등장하는가 하는 의문이 따른다. 진평왕은 郊社와 宗廟의 큰 제사 때면 으레 그 천사옥대를 띄었지만, 진평왕 뒤의 후대 왕들이 몸에띈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신라중대 「무열왕권의 실질적인 확립을 꾀했던 신문왕」이 「진평왕은 성골의 왕이므로 國人들은 聖帝帶라고 불렀다」는 천사옥대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신문왕에게는 진평왕천사옥대와는 다른 帶가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문왕의정치적 의도에 의해, 흑옥대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 천사옥대는 帝釋으로 보여지는 上皇이 보내준 것으로 되어 있어 불교적인 성격과 관련되는데 비해, 이 흑옥대는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 또한 무열왕권의 정통올 확립하려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던 신문왕의 입장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⑦의 ㄴ은 이 설화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고 있다. 먼저 素材論的」으로 볼 때 竹은 이 설화의 구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있다. 용과 죽은 서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용과 죽의관련을 알게 해 주는다음과 같은 중국의 전설이 있음을 일찍이 삼풍창영(三品彰英)이 지적한 바 있다.용과 죽이 관련된 이와 같은 설화는 신라 문무왕 때에도 있었다. 동해룡과 雙竹種生의 설화가 그것이다.죽으로 만든 笛은 龍吟과 같은 소리가 난다고 생각해 왔다. 앞에 인용한 《團倚通義》의 글 중에 竹聲이 龍嗚과 비슷했다고 한 것과, 張說의 胴竹詩에서 「竹有龍吟管隔留鳳舞琴」야라한 것, 李白이 宮中行樂調에서 「富奏龍 吟水」라고 했던 것 등으로 笛聲을 龍吟과 비슷하게 생각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리고 竹聲은 방위로는 東에, 계절로는 春에 속한다 용도 또한 동방에 속한다. 이러한 점에서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우선 무열계의 시조로 받들고 있는 員智王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그는 진흥왕의 둘째아들 舍輪인데 진지왕은 진홍왕의 장남이자 형인 鋼輪이 죽자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린 지 4 년이 되어 정치가 어지럽고 성이 문란하여 國人이 폐위’ 시킨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열계로서의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작용한 듯하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바로 이러한 진지왕의 祖孫으로 가락국의 후예로 신라에 편입된 舒玄角干의 아들 김유신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신흥세력으로 성장하여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국인의 추대’ 형식으로 즉위한다. 무열왕은 서기 654 년 즉위와 함께 부친을 문홍대왕으로 , 모친을 문정왕후로 추존하는 한편 율령정치를 추진하면서 대야성 함락에 의해 실추된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백제 정벌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은 진골계로서의 성골계에 대한 콤플렉스와 복합되어 김유신 세력과 결속되며 유신계는 멸망왕국의 후예라는 정치적 콤플렉스에 의해 무열왕계와 상호 보완적 존립을 꾀한다. 이러한 사정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활동은 자신들의 가문명예와 권력 의지가 국가적 차원으로 승화하여 수행되는 것이다.비록 國人이 추대했다고는 하나 무혈 혁명의 성격을 띤 결과무열계는 군사적 성격을 갖게되는데 이 점은 바로신문왕으로 이어지면서 변모해야 할 당위적 과제로 떠오른다. 신문왕이 즉위하여 9 년에 이르는 동안 뚜렷하게 정책을 변화시키고 관제를 정비하는 것은 바로이런 측면의 일환이며, 이는 곧 중대 왕권의 확립을 지향하는 모색이다. 이 가운데 오묘제(五廟制)의 확립은 무열왕권을 강화하고 정권의 성향을 개조하려는 대표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문무왕대에 야기되는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반란도 여전히 무열계를 압박하는 사건이었고 阿? 大吐의 모반도 상당히 큰 정치적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자연현상이긴 하지만 불길한 전조들은 그대로 신문 왕이 부담해야 할 몫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기록된 전조들을 살펴보다.
    인문/어학| 2007.01.08| 15페이지| 2,000원| 조회(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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