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외 스포츠목 차실내?외 스포츠 조사? 실내스포츠1. 농구(Basket ball)2. 배구(Volley ball)3. 핸드볼(Hand ball)4. 탁구(Table tennis)5. 태권도(Taekwondo)6. 씨름(Ssireum)7. 수영(Swimming)8. 복싱(Boxing)9. 볼링(Bowling)10. 당구(Biliards? 실외스포츠1. 축구(Sccor)2. 럭비(Rugby Football)3. 미식축구(Foot ball)4. 야구(Base ball)5. 테니스(Tennis)6. 소프트볼(Soft ball)7. 배드미턴(Badminton)8. 스키(Ski)9. 골프(Golf)10. 등산(Mountain climbing)참고문헌? 실내 스포츠1. 농구(Basketball)1) 역사농구는 1881년 메사추세츠주 스프링 필드의 YMCA 훈련학교의 체육 부장이었던 루서 큘릭(L. Gulick) 박사가 지시하여 그 학교 체육지도자였던 네이이스미드(J. Naismith, 1861~1939)가 겨울철에 운동하기 위한 실내경기로 창안된 것이다. 그는 처음에 체육관 양쭉에 복숭아 상자를 하나씩 달아 좋고 공을 던져 그 가운데에 공이 머물렀을 때 골인으로 인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1891년 12월 농구(Basketball)이 탄생하였다. 그 후 1894년에 현재와 같은 방법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부터경기종복으로 채택되었다.우리나라에 농구가 소개된 것은 1904년 서울 중앙 YMCA 초대 총무로 취임한 미국인 길렛트(Phre Gillet)의 의해 전해졌고, 그 후 반하트(Barnhart, 1916)에 의해 전개되었다.2) 경기 개요(1) 경기 인원① 1개 팀은 선수 5명② 선수의 교대는 인원제한이 없다(국제경기는 12명으로 신청 선수 내에서).③선수교대를 위하여 먼저 스코어(scorer)에게 신고하고 레퍼리(Refree)의 신호로 코트에 들어갈 수 있다.(2)경기 시간① 12분씩 4쿼터(quarter), 또는 전?후반 각 2037년 3월 일본송구협회의 발족, 1939년 이병학이 일본송구협회 조선지부를 결성, 해방과 더불어 조선송구협회가 창설 되었다.2) 경기 방법7명의 경기자가 한 팀이며 공을 드리블·패스 등을 하여 상대방 골에 일정한 시간 내에 많이 넣는 팀이 승리한다.(1) 경기자한 팀을 11명의 선수로 구성, 출장 선수는 7명으로서 6명의 필드 플레이어와 1명의 골키퍼이다.(2) 경기시간① 정규시간: 일반 남자30분-10분-30분② 연정전의 시간: 일반 남자 5분간 휴식 후 5분X2(3)경기의 진행① 경기시작 ② 드로 인 ③ 코너 드로 ④ 득점4. 탁구(Table tennis)1) 역사탁구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실내에서 하기 위한 경기로 만든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1898년 영국의 제임스 깁스(James Gibbs)가 셀룰로이드 공을 만들어 사용하고, 가죽을 펴서 붙인 라켓을 사용하도록 하여 ‘핑퐁(ping-pong)'이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그 후에는 ’테이블테니스(Table tennis)‘라고 불리어져 유럽에 보급되었으며, 1902년에는 영국에 탁구협회가 처음으로 발족하여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우리나라는 1920년경에 도입, 1945년 탁구협회가 발족되었다.2) 경기 개요(1) 경기방법경기 방법은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구분하여 실시되고 있으며 개인전에는 단식·복식·혼합복식이 있고, 단체전은 4단식·1복식·5전 편성방법과 5단식·2복식·7전편성방법 또는 3인이 3번 겨루는 9단식 편성방법이 있다.3) 시설 및 용구① 코트 ② 네트 ③ 라켓과 러버 ④ 볼 ⑤ 지주5. 태권도(Taekwondo)1) 역사고구려에서는 무덤의 벽에 묻혀 있는 사람의 생전의 행적이나 그 사람을 제사할 때 있던 사실이나 행사 모양을 그렸는데, 무용총 주실과 현실의 천정에는 두 장사가 겨루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태권도가 행하여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1971년 국기로 인정받고, 1977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을 결성하였다.2) 경기 개요태권도는 신체 각 고대 올림픽 경기의 제23회(BC 688년) 때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제41회부터는 소년 복싱도 행하여지게 되었다.현대의 복싱은 영국에서부터 발전되었는데, 1719년 영국의 제임스 피그(James Figg)는 최초의 챔피언이 됨과 동시에 세계 최초로 복싱학교를 창설하여 복싱 보급에 앞장 섰다. 1743년 잭 브로우톤(Jack Brouton, 5대 챔피언)이 최초로 7개조항의 복싱규칙을 만들었다.1904년 제3회 올림픽대회에는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1912년 박승필에 의해서 유각권 구락부가 조직된 것이 처음이며, 1916년 미국인 선교사 길레트(Gillette)가 복싱 용구를 가져 온 뒤 1922년부터 YMCA에서 매년 경기를 거행하였다.2) 기본 공격술① 스트레이트 ② 훅 ③ 어퍼컷 ④ 스윙3) 기본 방어술① 블로킹 ② 패링 ③ 스토핑 ④ 슬리핑 ⑤ 더킹 ⑥ 웨빙 ⑦ 롤링 ⑧ 사이드 스텝⑨ 클린칭 ⑩ 커버링 ⑪ 록 어웨이4) 승패의 판정(1) 판정(decision)판정에는 일곱가지 종류가 있다.① win on poing: 득점승② win by petirement: 기권승③ RSC: 심판의 중지승④ win by disqualification: 실격승⑤ KO: 케이오승⑥ WO: 상대방의 체중 오버로 부전승일 때⑦ no contest: 경기중단5) 반칙규정① 다운된 상대방을 가격하는 행위② 벨크 아래를 가격하는 행위③ 무릎으로 가격하는 행위④ 머리로 받는 행위⑤ 목 뒤를 가격하는 행위⑥ 팔꿈치로 가격하는 행위⑦ 글러브를 벌려서 가격하는 행위⑧ 등을 가격하는 행위⑨ 잡아 당기는 행위⑩ 껴안고 치는 행위⑪ 씨름행위⑫ 서로 넘어뜨리는 행위⑬ 상대방에게 매달리는 행위⑭ 벨트라인 이하를 껴안는 행위⑮ 벨트라인 이하로 수그리는 행위? 팔꿈치로 미는 행위? 로우프를 잡고 치는 행위? 팔을 쭉 뻗치고 클런치하는 행위? 상대의 팔을 껴안는 행위? 지나친 수비태세 행위9. 볼링(Bowling)1) 역사각종 공해와 더불어 누적된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 35분-5분-35분③ 일반고교: 30분-5분-30분④ 중 학: 25분-5분-25분(3)경기자의 임무① 포워드: 공을 빼앗아 공격의 제일보를 만들어 준다.② 하프백: 포워드와 드리쿼터 백의 중간에서 그 연결을 맡고 포워드가 얻은 공을 드리쿼터백에게 패스하는 역할을 한다.③ 드리쿼터백: 공격력의 중심이 되어 패스된 공을 가지고 달리거나 패스해서, 또는 킥해서 인골에 육박해서 트라이를 노린다.④ 풀백: 방어측 최후의 방어선의 주인역할을 한다.⑤ 심판: 주심 1명, 선심2명3) 용구(1)공볼은 타원형으로 생겼으며, 길이 28~28.6cm, 가로 둘레 76~79cm, 세로 들레 61~65cm, 무게 383~425g이다.3. 미식축구(Foot ball)1) 역사아메리칸 풋볼이라고도 하나, 미국에서는 단지 풋볼이라고 한다. 1869년 11월 러트거스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가 캐나다의 뉴브런즈윅주(州)에서 축구(사커) 경기를 한 것이 미국에서 최초로 거행된 축구경기라고 한다. 그 후 1874년에 캐나다로부터 럭비가 소개되어 이 경기의 룰이 채용되고, 1876년 11월에는 컬럼비아·하버드·프린스턴·예일 등의 대학이 전미국축구연맹을 창설하고 럭비축구의 룰을 개정하여 새로운 축구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1880년 축구 발전에 노력한 W.캠프(예일대학 주장선수였고 후에 축구의 종신규칙위원)에 의하여, 인원도 현재와 같이 11명으로 정하고 4회 연속 공격을 채택하는 등 획기적인 룰개정이 이루어져 현재의 미식축구경기의 기초가 다져졌다.그 후 연차적인 규칙 개정, 용구(用具)의 개량과 경기법의 진보에 따라 미국국민성에 맞는 미국 최초의 스포츠가 되었다. 미국에서 미식축구 시즌은 9월~11월 말까지이며, 그 사이에 각지에서 시합이 진행되어 각 지역의 우승팀은 시즌오프(주로 1월 1일)에 거행되는 선수권시합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이 시합은 경기장이 사발(bowl)을 닮았으므로 볼 게임이라고 하며, 그 개최지에 알맞은 명물(특산품 등)의 이름을 따서 붙인다. 예를 들면,좌도 함께 지켰다.그뒤 현재까지 윔블던대회는 전영선수권대회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세계선수권대회이며, 거의 미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의 선수들이 그 우승의 영광을 독점하고 있다. 1968년부터 이 대회는 프로선수의 참가를 인정하여 오픈화하였으므로 종래의 전통은 1967년으로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또한 전미(全美) 선수권대회는 1881년부터, 전불(全佛) 선수권대회는 1891년부터 창시되었는데, 전영 오픈테니스선수권대회와 마찬가지로 1968년부터 모두 오픈화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Athenae) 올림픽경기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1900년 보스턴(Boston)에서 데이비스컵대회가 창설되었고 1913년 ITF(International Tennis Federation:국제테니스연맹)이 창립되었다. 1926년 미국 프로테니스가 시작되었고, 1963년 런던(London)에서 제1회 페더레이션컵대회가 개최되었다.6. 소프트볼(Soft ball)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야구가 모든 미국인의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 시카고의 카니발 때, 체육관에 모인 시민의 한 사람인 G.H.핸콕이 장난으로 권투 글로브를 던지고 다른 한 사람이 막대기로 이를 받아친 데서 시작되었다. 1887년 핸콕은 간단한 룰과 용구를 만들어 인도어 베이스볼(indoor baseball)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하였다. 1895년 미네아폴리스에서 시의 소방관인 L.로버가 근무의 여가에 동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했으므로 파이어맨 베이스볼이라고도 하였다.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군수산업의 불황으로 실업자들 사이에 소일놀이로 보급되면서 아미볼, 네이비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913년 미네소타시의 공원과(公園課)에서 청소년리그를 만들어 옥외용 경기로 장려하였기 때문에 청소년들 사이에도 보급되었고, 플레이그라운드볼, 다이아몬드볼 등으로 부른 일도 있다. 1927년 여성들의 요구에 의해 여자 룰이 생기자 레이디스볼이라고도 하여 여성들의 인기를 모았다.1933년 《시카고 아메리칸》의 기자.
목 차I. 서론II. 남북종론의 구체적 의미와 구분방법III. 남종화풍의 유행과 이색화풍의 대두김정희권돈인조희룡허유전기허련유숙김수철김창수정학교신명연남계우신광현홍세섭장승업조석진안중식IV. 결론남북종론과 조선말기의화단I. 서론조선왕조의 말기(약1850~1910)는 글자 그대로 조선시대의 맨 마지막 시기로서 넓은 의미에서 근대라고도 불리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조선 말기는 현대를 사는 우리와 시대적으로 가장 가깝고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이 시대에는 대내적으로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고 동학운동이 일어났으며, 대외적으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운양호사건을 비롯하여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병합되기까지 열강들의 끊임없는 각축으로 인해 매우 어지럽고 다난한 상황이 계속되었다.정치적 불안은 조선왕조 말기, 특히 19세기 중엽에는 청조(淸朝)의 학술과 문화의 자극을 받아 김정희(1786~1856)를 중심으로 고증학과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또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위시한 여러 가지 백과 사전류의 업적들이 쏟아져 나왔다.조선 말기에는 또 개화사상(開化思想)이 싹트고 그 세력이 점차 성장하였으며, 아울러 종래의 엄격했던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완화되고 평민문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아래 중인계층의 문화적, 학술적 활동이 활기를 띠고, 서화를 즐기는 경향도 두드러지게 되었다.조선 말기의 회화는 이 시대 특유의 성격과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괄목할 사실은 청조(淸朝) 남종화풍(南宗?風) 의 자극을 받아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문기(文記) 또는 서권기(書卷氣)를 숭상하는 남종화풍이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김정희와 그를 추종한 우봉 조희룡, 소치 허유, 고람 전기 등을 위시한 남종화가들은 사의를 존중하고 형사를 경시하는 남종문인화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유행을 본 토속적인 진경산수와 풍속화에 쐐기를 박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시대에는 또한 조선 후기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 후 육조(六朝)·당송대(唐宋代) 북송(北宋)에서 소동파(蘇東披)나 문동(文同)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문인화 집단이 형성되고, 문인화란 외형적 닮음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뜻을 그려내야 한다는 문인화론의 대체적 윤곽이 제시되었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문인화는 이렇다 할 정해진 양식이 없었는데, 원말 4대가에 이르면서 대체로 하나의 양식적 면모를 갖추었다. 부드럽고 온유한 필법을 몇 번이고 중첩하여 그렸으며, 색채도 담묵화(淡墨畵)가 주로 쓰였다.문인화가 이처럼 양식적 개념으로 변모하였을 때 그들이 택한 양식이 바로 남화의 양식과 맥(脈)을 같이 한다. 명나라 때 중반의 심주·문징명 등 오파가 활약하던 15세기에 남화는 문인의 적극 참여로 점점 융성하였다. 17세기에는 많은 남화가(南畵家)가 배출되면서 남화는 전통을 지닌 하나의 양식으로 화단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회화적 상황하에서 동기창의 ‘상남폄북론’이 제시되었다. 그 당시 동기창은 문인화의 계보도 만들었는데, 문인화의 비조 역시 왕유이고 그 뒤 이성(李成)·범관(范寬) 등을 거쳐 이용면(李龍眠)·미가 부자로 이어져 원말 4대가와 심주·문징명으로 계승된다. 문인화 계보는 남화의 계보와 일치되며, 이 때부터 남화와 문인화의 혼동이 시작되었다.그후 남화의 세력이 강화되어 문인 신분이 아닌 전문화가까지 남화를 그렸다. 청대(淸代)에 들어서면서 남화는 더욱 성해지고, 사왕오운(四王吳)이라고 하는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王) ·왕원기(王原祁)·오역(吳歷) 및 운수평(壽平) 등이 남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체로 틀에 박히고 형식화된 기미가 강하였고, 청나라 때의 궁정화가에게까지도 원용되어 남화를 그리게 되었다.회화사상 청조남화(淸朝南畵)에서 주목할 것은 이런 정통파 화가들보다도 오히려 석도(石濤)·팔대산인(八大山人)을 필두로 한 개성파(個性派)들이었으며, 이들은 대개 명나라의 유민으로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감과 내적 감정을 작화(作畵)의 밑바닥에 깐 화가들이었다접(相接)한 경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김정희의 비호 아래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 여러 화가가 배출되고, 묵란(墨蘭)의 대가 이하응(李昰應)과 민영익(閔泳翊), 괴석(怪石)의 작가 정학교(丁鶴喬) 등이 여기에 가담하여 조선 후기의 심원한 문인화풍이 진작되었다.한편, 남종화가 조선 후기의 화단을 지배하게 되고 사회적 수요는 역시 사대부계층에 있었으므로, 이에 부응하여 화원들도 거의 남종산수를 그렸다. 그러나 남종화단의 흉중구학(胸中丘壑), 즉 마음 가운데 자리 잡은 산수를 그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철리(哲理)나 유교적 교양이 정리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화원에게서는 남화라 해도 형식주의의 도말(塗抹)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선 후기 남화가의 수도 많았지만 작품상의 가치면 에서 쇠운(衰運)을 면치 못한 것은 당연하다.4. 북종화2대 유파 가운데 하나로 단순히 북화(北畵)라고도 하며 남종화(南宗畵)에 대응하는 말이다. 북종화와 남종화의 역사적 배경은 멀리 남북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곧 200년간이나 계속된 남북조의 대립은 사상적 이념은 물론 화가들의 화풍까지도 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남북화의 관념이 뚜렷하지 않았으며, 남북화론으로 갈리게 된 것은 명나라 때의 동기창(董其昌)·막시룡(莫是龍) 등 남종화파 화가가 북종화파인 화원(畵院)과 전문화가들을 비판한 데서 비롯되었다.북종화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사훈(李思訓) 일가라 할 수 있다. 그들의 화법(畵法)은 굳세고 가벼우며 세밀한데 이것은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정밀한 세필(細筆)의 유습이 전하여진 것이다. 이사훈의 아들 소도(昭道)는 부친의 화법을 더욱 발전시켰고, 일가인 이사훈의 아우 사해(思海)와 그의 아들 임보(林甫)·주(湊) 등은 모두 단청(丹靑)의 명수들로서 이씨 일가의 화법을 전개시켰다. 이소도의 화법을 살펴보면 석(石)은 부벽법(斧劈法)이고 나무는 협엽법(夾葉法)을 썼으며 비단을 반쯤 삶아 금분(金粉)을 뿌린 다음 청록색으로 바탕을 냈는데, 이것에 제찬(題讚)을 써넣었다. 활짝 핀 난꽃에 있는 화심(花心)은 그림인지 글씨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이러한 난 그림은 실제 난의 묘사라기보다는 난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추사는 제주 한란을 아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글씨는 굵고 가는 획들이 서로 엇갈려 몹시 거칠면서도 힘차다. 난초의 굴곡진 모습이 마치 그의 글씨를 보는 듯하며, 그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도장이 찍혀 있다.권돈인권돈인은 추사보다 세 살 위이나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서첩을 합벽하거나 서로 그림을 주고받는 등 돈독한 우정을 자랑했다. 추사는 그에게을 그려주기도 했고 특히 은 추사가 귀양가면서 권돈인에게 축수로 그려준 그림이다. 이는 그 답례로 권돈인이 추사에게 준 것으로 벗에 대한 따사로운 정이 담겨 있다.이 는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 추사가 ‘세한도’라 제목을 썻고 , 그림에 이어 두 발문이 첨부되어 있다. 두 를 비교해 살펴보면 , 추사는 마른 붓인데 비해 이재는 물기 많은 먹이며, 소재 역시 추사는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비해 권돈인은 소나무 . 대나무 . 매화를 그린 삼청이다. 사방 벽이 없는 모옥은 바위 . 뒤뜰의 대나무 . 두 그루의 소나무 . 매화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조촐하고 담담한 문인화의 저수를 보여주는 선비 그림이다. 추사는 권돈인의 가 형사에서 벗어난 높은 경지이며, 시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뛰어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조희룡(趙熙龍, 1789~1866)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로 제일 연배가 올라가는 것은 우봉 조희룡이다. 조희룡은 평양조씨로서 정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나 78세 때인 고종 3년에 타계하였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시문과 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산수, 매화, 묵죽, 난초, 나비 등을 잘 그렸다. 또한, 김홍도를 비롯한 화가들의 전기를 담은 유명한 호산외사를 편찬하여 몇몇 화가들의 전기를 담은 유명한 호산외사를 편찬하여 몇몇 화가들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조희룡은 산수화뿐만 아니라 묵죽에서도부챗살이 퍼지듯 펼쳐진 구도가 돋보인다.전기김정희의 애제자로 스승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전기는 불과 30세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한 서화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 10점의 편화로 이루어진 화첩에 속한 는 스승 김정희의 보다도 소슬함이 더 감지되는 그림이다. 는과 마찬가지로 그의 나이 25세 때인 1849년 청년 시절에 그렸으니 거칠고 성근 화면구성, 갈필의 구사, 갈라진 붓의 독필 그리고 어수선한 글씨는 마치 짧은 그의 삶을 애견하듯 말년의 쓸쓸함과 한기마저 감도는 그림이다. 이에 비해은 차분하게 정제된 그림이다. 여름에 그렸으니보다는 달포 이상 앞섰다. 매화를 부인 삼고 학을 아들 삼아 서호 부근 고산에 근거한 송의 은사 임포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다.허련소림모정허균 (1569 ~ 1618)의 후손으로 진도에서 태어난 허련은 김정희가 추구한 남종문인화를 계승 . 발전시켜 오늘의 호남화단을 있게 한 문인화가이다 . 자서전에 속하는 『몽연록』에 의하면 어려서 해남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유작과 그곳에 보관된 등을 통해 그림에 눈 뜨게 되었고 , 그후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의 문하에서 그림을 익혔다. 48세에는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세운 뒤 서화에 전념했다. 자인 마힐은 당나라의 왕유에게서 , 소치호는 원의 황공망의 호 대치에 연원을 둔 것이다. 산수를 비롯한 묵모란과 매화등 다양한 소재 및 지두화에도 뛰어났다. 그의 작품 경향은 농묵 위주에 건필이 구사된 거친 필치와 다소 성근화면구성 등이 화풍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이러한 화풍은 호남에 가전 .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다작에서 연유된 것일 수 있겠으나 격조 면에서는 고르지 않으며 그 우열이 심한 편이다.그림의은 그가 즐겨 그린 주제로 여러 점이 전하나 그 가운데 격조에서 두드러진 수작이다.유숙수계도권유숙은 산수 . 인물 . 화훼 등에 모두 뛰어난 인물이다. 전칭작으로 풍속화 계열에 드는 그림이 전래되는데, 다양한 화풍을 두루 구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은 왕희지가 353년다.
1. 교육에 관한 행정과 교육을 위한 행정1)교육에 관한 행정 ⇒ 公法學的 解釋, 公權的 解釋몽테스키의 삼권분립 사상에 근원하여 국가 통치 기구는 입법(법을 제정), 사법(법을 적용), 행정(법의 집행작용). 다시 행정은 외무, 내무, 군무, 법무, 재무로, 내무는 보육행정, 경찰행정으로 분류 되는데 보육행정에 교육에 관한 행정이 속한다.교육에 관한 행정은 權力的, 강제적 요소가 강조되며 교육보다 행정을 더 우선시 하며, 교육의 특수성을 갖는다.지방자치 단체는 국가가 의무를 일시적으로 위임하여 전문성이 소흘.2)교육을 위한 행정(조장 강조) ⇒ 기능주의적 교육행정, 교육을 도와주는 행정Moehlman의 기능주의적 입장에 근거하여, 수업은 학교의 최종적이며, 조직과 행동은 수업목적에 달성하는데 필요한 수단(기능)이고, 행정은 교육의 기본 목표를 보다 능률적으로 달성토록 하기 위한 봉사활동이다.Campbell은 교육 조직을 교수와 학습(teaching and learning)으로, 교육행정을 교수와 학습의 증진을 핵심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교육과 행정을 분리, 교육은 교육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행정은 지원내지 봉사활동으로 작용한다. 또한 교육행정은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을 마련해 주는 조장적 활동(인적, 물적, 재정적)을 하게 한다.2. 교육행정의 특수성교육행정의 독자적 성격은 교육행정이 교육을 위한 행정 이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연유하는 특수성으로, 다른 조직의 행정과 다른 그 나름대로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1)캠벨(Campbell)이 제시한 교육행정의 특수성①조직이 제공 하고자 하는 서비스가 무엇인가? → 중요성?공개성②조직이 서비스를 수행하기 위하여 하는 활동의 특성은 무엇인가? → 복잡 ?친밀성③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 전문성④조직의 활동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 → 평가의 난의성(2)교육행정의 특수성①교육의 장기성에 기인하는 목표달성의 장기성과 이에 따른 비긴급성②교육에 관여하는 제집단의 독자성과 협력성③교육효과성행정이란 고도의 확실성과 구성 화 된, 그리고 기획 화 된 결정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경영관리이며 교육경영이란 이와는 달리 고도로 불확실하며 구성 화 되어 있지 않으며 기획도 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결론을 매듭지어 나가는 경영과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이러한 개념은 행정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정해진 정책만을 그대로 수행하여 나가는 업무를 담당한다는 것이며 현대 행정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Wilson이 주장한 행정의 분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6. 체제이론의 기본 도형환 류상호작용하는 요소들환 경과정(전환)투 입산 출①투입(input): 상호 작용하는 요소들이 체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체제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요소를 말한다.②과정(process): 체제가 목적 달성을 위해 여러 자원과 정보를 활용하여 산출로 만들고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이다.③산출(output): 체제가 환경이나 인접한 체제로 내보내는 자원과 정보로써 체제가 의도적이거나 무의도적으로 생산해 내는 모든 것을 말한다.④환경(environment): 체데와 일정한 접촉을 유지하고 그것에 일정한 영향을 주는 경계 밖의 주변 조건이나 상태를 말한다.7. 카우프만(Kaufman)의 체제접근(Systems Approach) 모형(1)제1단계: 문제확인①문제는 욕구에 근거를 둔다. 욕구는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의 불일치를 규명한 것이다.②문제 확인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요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2)제2단계: 대안결정①현 상태에서 요구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자세한 요건을 결정하는 분석이 요청된다.②측정 가능한 용어로 일반적 목적과 구체적 목적을 기술하는 것도 포함된다.③구체적인 요건이 분석되고 확인되는 한편 가능한 해결 전략과 도구가 확인되어야 한다.(3)제3단계: 해결전략 설정①앞 단계에서 확인된 대안으로부터 선택의 기준이 결정되고 적절한 도구와 전략의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②자주 쓰는 선택의 기준은 비용 및 이익과 관련된다.(4)제4단계: 해결전략 시나 냉담한 반응을 나타낸다. 따라서 조직의 지도자가 구성원에 대하여 어떠한 가정을 가지고 있느냐가 조직의 효과성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2) X Y 이론McGregor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두 가지 기본 가정을 설정 하였다. 하나는 전통적 경영이론에 바탕을 둔 이론 X이며, 다른 하나는 경영에 대한 새로운 이론 혹은 접근에 근거를 둔 이론 Y이다. 이 두 가지 접근은 경영자가 피고용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특별한 전략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이론 X와 이론 Y의 차이점 비교이론 X(미성숙) 이론Y(성숙)1. 보통의 인간은 선천적으로 일하기를 싫 1. 일에 대하여 신체적, 정신적 노력을 경 어하며, 가능한 한 일을 회피할 것이다. 주하는 것은 놀거나 휴식을 갖는 것처2. 일을 싫어하는 이러한 인간 특성 때문 럼 자연스러운 것이다.에 조직목표 달성을 위하여 적절한 노 2. 외적통제와 벌로서 위협하는 것만이 조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직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을 유발하는인간들은 벌을 가지고 강압, 통제, 지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시, 위협되어야만 한다.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기지시와3. 보통의 인간은 지시바디를 좋아하며, 책 자기통제를 행사할 수 있다.임을 회피하려 하고, 야망이 없고, 무엇 3. 목표에 대한 헌신의 정도는 성취에 대보다도 안전을 원한다. 한 보상과의 함수관계에 있다.4. 적절한 조건이 부여되면 보통의 인간은책임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책임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배운다.5. 조직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비교적높은 수준의 상상력, 독창력, 창의성을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광범하게 배분되어 있다.1. 경영은 경제적 목적을 위하여 생산요소 1.경영은 경제적 목적을 위하여 생산요소인 자금, 자재, 장비, 인력을 조직해야 인 자금, 자재, 장비, 인력을 조직해야한다. 한다.2.경영은 조직목적에 부합토록 구성원 행 2. 조직의 요구에 대하여 구성원들이 수동동을 지시하고, 그들에게 동기를욕구에너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일에 대하여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유발시키는 요인들을 탐색하기 위하여 작업환경에 초점을 두었다.만족요인은 작업자체로부터 도출된 내용적, 내적 혹은 심리적인 것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이며, 불만족요인은 작업환경으로부터 도출된 맥락적ㆍ 외적 혹은 물리적인 것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이다. 또한 만족요인은 접근욕구와 관련이 있으며, 불만족요인은 회피욕구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7) 기대 이론기대 이론에는 세 가지의 필수적인 개념이 있는바 그것을 기대 ㆍ가치 ㆍ수단이다. 기대란 어떤 사람의 노력이 성공적인 업무수행을 할 것이라는 신념이다. 즉, 어떤 행위가 높은 긍정적인 목적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주관적인 신념이다.1) 선호 ㆍ 기대이론Vroom이 전개한 선호 ㆍ 기대이론은 두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둔다. 첫째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행동 방향에서 나올 것으로 생각되는 결과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가치를 부여한다.둘째로 동기가 유발되게 하는 행동에 관한 논의에서는, 사람들이 달성하기를 희망하는 결과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호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 있어서 그들 자신의 어떤 행동이 수단적이라고 믿는 정도를 고려해야 한다.2) 업적ㆍ만족이론업적과 거기에 결부된 보상에 부여하는 가치, 그리고 어떤 노력이 보상을 가져다 줄 수 있는데 업무성취는 개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데 업무 성취의 만족감의 획득은 거기에 결부된 내재적 및 외재적 보상에 의하여 강화된다. 여기서 보상이 공평하여야 하는데 만일 불공평하다고 지각되면 개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3) 통로 ㆍ 목적이론Georgopoulos, Mahoney, Jones 등은 한 개인의 생산성은 매우 복잡한 개인적 및 상황적 요인에 의한 교사 및 학생들은 일정한 목적을 공통적으로 가지며, 그와 같은 목적의 성취는 그에 연관된 욕구를 충족시키며, 인간의 행동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타산 내지 목적 지향적인 의사결정의 기능이라고 하여 통로 ㆍ 목적 관념을 구상하였다. 따라서 일정수준의 업무를일을 추진한다.배려성은 지도자가 신뢰, 존경, 온화, 지원, 집단 구성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정도를 말한다.(3) 미시간 대학 연구 : 직무 중심과 종업원 중심지도성을 직무중심 지도성과 종업원중심 지도성의 양 차원으로 구분하였다.Likert는 종업원 중심 감독자로 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구성원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는 감독자를 직무중심 감독자로 볼 때 직무중심 감독자가 있는 부서의 생산성이 저하하는 것을 발견했다.3) 상황 이론1) Fiedler의 상황이론지도성 상황이론에 의하면, 높은 집단 성취를 달성함에 있어서 지도자의 효과성은 지도자의 동기체제와 지도자가 상황을 통제하고 영향을 주는 정도에 달려 있다. 상황에는 지도자와 구성원의 관계, 과업구조, 지도자의 지위권력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상황의 호의성이란 상황이 지도자로 하여금 집단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하는 정도를 의미한다.‘가장 싫어하는 동료 척도’를 개발하였는데, 이 척도는 24개의 의미분석 척도로서 각각 8단계 평정척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LPC점수가 높은 지도자는 과업수행을 위하여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관계지향형이며, LPC점수가 낮은 지도자는 과업 동기형이라고 하였다.과업의 구조성은 ① 목표의 명료성 ② 목표달성의 복잡성 ③ 수행 평가의 용이도 ④ 해결책의 다양성의 네 가지의 따라 구분된다. 지위권력은 지도자가 합법적 ㆍ 보상적ㆍ 강압적 권력을 가지고 부하의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소유 한 정도를 말한다.2) 행로 - 목표이론① 지시적 지도성 (directive leadership) : 지시적인 지도자는 구성원에게 기대하는 바를 알려주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작업수행의 표준을 설정하고, 구성원에게 표준적인 규칙과 규정을 따르도록 요구한다.② 지원적 지도성(supportive leadership) : 구성원들에게 우호적이고 친밀하며, 구성원의 욕구, 지위, 복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구성원들을 차별하지 않는다.③ 참여적
-샤갈의 꿈꾸는 마을-마르크 샤갈 1)(Chagall, Marc, 1887.7.7~1985.3.28)展I샤갈의 그림은 흔히 감미로운 공상에 넘친 목가조(牧歌調)의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서로 포옹한 연인들과 흔들이 시계를 목에 건 물고기 따위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사람과 동물들이 사이좋게 대하고 있는 광경이나 물구나무 선 모습에 놀라게 된다. 또 온갖 물체가 현실의 비율을 무시한 크기로 그려져 있다. 이런 것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것을 황당무계한 공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한참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묘한 형태의 것 옆에 화려한 꽃다발도 있고, 배경에서 도회(都會)의 풍경과 흙냄새 물씬한 시골 풍경이 중첩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만져 보고 싶을 만큼 빠져들게 된다.II한 때는 법원이었던 도심 속의 미술관, 그 미술관 위를 나는 연이들이 먼저 발을 멈추게 한다.순순한 빛에 아름다움, 20세기 초의 위대한 화가2), 샤갈의 붓 끝에서 빛은 이내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하나하나의 빛깔들은 철저히 존중 되고, 투명한 원색들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대고 그 빛들은 서로 어우러지며 또 하나의 순수한 세계를 창조한다.「꽃」- 그 색채의 향연 속에서 그림은 현실을 뛰어넘는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커다란 꽃다발 안에는 다정한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비테브스크 위의 누드」- 대성당이 보이는 회색빛 도시 위, 누드만큼이나 강조된 꽃다발을 앞에 두고 여인은 평화롭게 잠을 잔다. 그것은 기억속의 산실, 샤갈이 간직한 추억의 세계다.「흐린 햇빛마을」 - 흐린 햇빛마을은 핏빛 석양이다. 불은 얼굴의 연인들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것은 상상의 세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초록 물고기, 그림 속에서 사람과 동물, 자연은 서로 평등하다.「추시계와 자화상」- 추시계와 함께 등장하는 당나귀는 화가 자신이다. 동물은 결코 열등하지 않다. 동물들은 인간의 친밀한 동반자 이자 때론 인간 그 자체이다. 그림 속의 세계는 또 다른 현실이다. 다만 눈으로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아닌 감정식의 세계「수탉」 - 화가는 때론 수탉이 된다. 한쪽 발로 팔렛트를 움켜쥐고 한쪽 날개로는 붓을 쥐고 선 수탉, 샤갈 그 자신이다. 그 환상의 세계 속에서 샤갈이 꿈꾸는 건 샤갈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과 잊지 못할 기억들 그것은 샤갈이 만들어낸 그만의 세계이다.‘나의 작품은 내 추억들이다’ ― 마르크 샤갈그림은 샤갈의 일기이자 추억이다. 샤갈은 그림으로 이야기 하고 그렇게 자신을 고백한다. 샤갈은 100년 가까운 삶을 살면서 8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20대의 그림이건 70대의 그림이건 별반 차이가 없다. 어느 그림이건 꿈을 꾸는 듯한 화면으로 사랑하는 연인들 같고, 그리고 동물들이 날아다니곤 한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샤갈이 창조해낸 세계 속에는 그가 살아온 격동의 20세기가 고스라니 녹아있다. 혁명과 전쟁, 이별과 희망, 그 각각의 사건은 샤갈에게는 또 하나의 빛깔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의 색과 빛깔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샤갈은 유대인 이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한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에게 유대민족과 고향은 영원한 그림의 소재였다. 샤갈의 대표작 「도시위에서」의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연인들, 그 아래에 보이는 도시는 샤갈의 고향 비테브스크이다. 성당이 보이는 회색빛 도시 그것은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이방인으로 지내야 했던 샤갈의 유년기를 상징한다. 그 회색 도시를 내려다보며 하늘을 유영(游泳)하는 연인들, 암울한 현실을 떠나고 싶은 샤갈의 꿈이다. 먹고 배설하고 다투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속에 혁명기의 러시아에서 샤갈은 한창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림 속에는 언제나 고향 비테브스크가 등장 하듯이 그 고향 안에 가족이 있었다.「가족」- 그 가족과 고향은 사랑하지만 누릴 수 없었던 슬픈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그 시절 그의 고향은 예외 없이 침울한 회색이다. 러시아 혁명이후 사회주의 속에는 샤갈의 그림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경직 되어 있었다. 1922년 샤갈은 결국 고국 러시아와 비테브스크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 했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그의 그림은 한껏 밝아진다.3)「꿈」- 마치 악몽 속을 빠져나와 전도된 세계, 그 속에는 한 마리의 동물과 누워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비록 뒤죽박죽 엉킨 세계지만 푸른 색조의 그림에선 희망이 엿보인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다가오면서 유대인에게 박해가 시작됐다. 샤갈의 그림도 나치에 의해 공개 소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샤갈에게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을 전후해 샤갈의 그림 속에는 백색의 그리스도가 자주 등장한다.그림은 다시 어두워진다. 그의 대표작 「비테브스크 위의 누드」는 바로 이 시기에 탄생 했다. 회색 도시위에 누운 여인은 아름다운 시절의 대한 추억처럼 화려하다. 회색의 시대, 그는 그렇게 침울한 기억 속에서 꿈을 꾸었다.「땅거미 질 무렵」- 밤으로 이어지는 골목, 황혼녘의 거리는 어딘지 어지럽다. 그림 한구석 길에서는 화재가 발생 했다. 거리엔 아이를 품은 수탉이 보인다. 그 속에 두드러진 건 화가와 그의 아내 벨라이다. 입체파를 보듯 벨라 의 얼굴과 하나가 된 샤갈의 얼굴은 프랑스의 삼색기를 상징한다. 그림을 그린 바로 그해 샤갈은 프랑스인으로 귀화 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오래 머물지 못 했다. 전쟁이 한창 이였던 1942년 미국으로 몸을 피한다. 또다시 유랑이 시작 된 것이다. 그 와중에 그의 그림의 모티브였던 아내 벨라가 세상을 떠난다. 종전 후 딸 아이다와 함께 돌아온 프랑스, 9개월간 아내를 잃었던 슬픔에 잠겨 붓을 놓았던 샤갈은 그림을 시작한다. 1952년 두 번째 아내 바바를 만나 안정을 찾은 샤갈의 그림 속에는 다시 빛이 찾아 든다.「파란 풍경속의 부부」- 푸른 연인들은 더 행복하고 편안해 보인다. 꽃들은 불타오르고 사람들이 하늘 위로 날아다닌다. 붉은 대지와 푸른 평화의 빛으로 샤갈은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 한다.‘「생 폴 위의 부부」에서 샤갈이 즐겨 쓰던 레드와 블루는 샤갈의 색깔이라 할 수 있다. 레드는 땅의 세계라고 부르기도 하고, 형제와 우애를 상징하는 파란색은 자유를 상징하는 샤갈만의 색깔. 샤갈은 이 색을 통해서 험난한 시대를 살면서 관객들이나 대중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 이 순주(미술평론가)붉은색과 푸른색 외에도 기쁨과 행복의 녹색, 원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파란 얼굴의 약혼녀」- 곳곳에 등장하는 초록빛 얼굴의 사람들은 모두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 초록색 얼굴들은 대부분 샤갈의 형제들 유대인을 뜻한다. 고향을 그리는 사람 방랑자의 의식이 굉장히 강했기 때문에 현실의 이야기들 보다는 꿈의 이야기,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고향 ― 무의식속에 그리고 저 어떤 먼 과거속의 고향 ―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내 마른 붓을 향해나는 달린다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이젤에 못 박힌다나는 그대의 달을 삼키고그대는 천진한 꿈을 먹 는다그대의 천사가 되기 위해그대를 전처럼 지켜 보기위해나의 태양이 밤에도빛날 수만 있다면나는 색채에 물들어잠을 자겠네―마르크 샤갈그에게 그림은 밤에도 빛날 수 있는 태양이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도구이자 꿈을 전하는 천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이번 전시회에는 세계에 두 번째로 공개되는 대작 4편이 포함되어있다. 1920년 러시아의 유대인극장 벽면을 장식했던 패널화. 문학과 음악 연극과 무용 등 네 개 분야를 상징하는 그림들. 그 속에는 또 다른 샤갈의 모습이 보인다. 뭔지 모를 염소의 이야기를 받아쓰고 있는 문학가는 결코 거룩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아 보인다. - 「유대인극장 패널화 - 문학」「유대인극장 패널화 - 초록 바이얼리니스트」- 음악을 상징하는 것은 바이올린을 켜는 거리의 악사다. 궁중이나 귀족의 샤롱에서 연주 하는 거창한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그림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하늘을 나는 사람처럼 보통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 어느 찬치 집에 흥겨운 마당에서 춤을 추는 이름 없는 무용수처럼 그저 즐겁게 함께 어우러지는 미술. 그는 그림만큼 이나 음악과 춤 문학을 사랑했고, 예술가에겐 대중에게 즐거움을 안겨줄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마치 서커스의 곡예사처럼 말이다.「서커스」에서 서커스는 연인과 고향만큼이나 즐겨 등장하는 그림의 소재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몸동작. 사람과 동물. 관객이 한데 어우러져 잠시 힘겨운 현실을 잊고 웃을 수 있는 한 때의 시간, 무엇보다도 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서민들의 오락거리였을 것이다.샤갈은 만년에 이르기 까지 자신의 예술철학을 변함없이 지켰다. 그리고 곳곳에 자신의 빛을 남겼다. 프랑스 랑스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샤갈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다. 색과 빛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빛의 예술, 샤갈의 색채예술은 햇빛과 만나 새로운 경지에 이른다.또한, 파리 오페라 극장에는 샤갈이 그린 천정화가 남아있다. 녹색과 파란색. 노란색과 빨강색, 샤갈의 네 가지 색이 선연하게 살아있는 그림은 환상적으로 만났다.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며 꿈을 그렸던 화가 샤갈.「십자가에 내려 선 그리스도」 -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추구했던 꿈은 성서였다. 성경속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던 성서화들은 유대인 샤갈의 자기 확인이었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 암울한 현실에 필요한 은총, 고향을 찾아 헤매는 유대인들은 세상에 모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강변에서 부활」- 샤갈이 사랑하는 연인과 꽃과 동물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꿈의 세계는 어쩌면 신의 은총이 가득해 모든 사람이 행복 해 지는 그런 이상형이 아니었을까? 그의 예술과 신은 이렇게 한곳에서 만났다. 인간의 꿈이 신의 은총 속에서 비로소 실현 되는 것처럼...
청 중기의 ‘양주팔괴(揚州八怪)’에 대한 조사연구I. 서론18세기에 들어선 후 사회생산력의 회복과 발전에 따라 상업도시가 번영하고 시민계층이 확대됨에 따라 화가의 예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으며 한족과 이민족 정부간의 민족모순이 감소하는 반면 봉건계급 내부의 모순을 포함한 각종 사회의 모순이 격화되어 초보적인 민주적 색체를 지닌 사상과 문화가 대두대기 시작하였다. 석도 등 청 초기의 창조정신이 풍부한 화가들과 그 화풍의 영향으로 염상(鹽商)과 부유한 상인이 모여들어 이미 회화의 상품시장이 형성된 양주에서 명화가와 여러 화파가 출현하였다. 그중의 건륭(乾隆, 1736~1795) 연간에 출현한 ‘양주팔괴(揚州八怪)‘ 양주팔괴(揚州八怪). 건륭 연간 양주(楊州)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괴이할 정도로 자유롭고 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던 여덟명의 화가들, 즉 왕사신(汪士愼, 1686~1759), 이선(李, 1686~1762?), 금농(金農, 1687~1763), 황신(黃愼, 1687~1768?), 고상(高翔, 1688~1754), 정섭(鄭燮, 1693~1765), 이방응(李方膺, 1695~1754), 나빙(羅聘, 1733~1798). 이 양주팔괴(揚州八怪)라는 개념은 왕윤(汪)이 『양주화원록(楊州畵苑錄)』〔1883년 자서(自序)〕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여덟명의 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양주팔괴 개념을 정립한 것은 이옥분(李玉芬)의 『구발라실서화과목고(毆鉢羅室書畵過目考)』〔1894년 자서(自序)〕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에 따라서는 고봉한(高鳳翰)이나 화암(華, 1684?~1756), 민정(閔貞, 1730~1788)을 넣기도 하는 등 팔괴(八怪)를산술적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건륭 연간 양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일군(一群)의 개성적인 화가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석도(石濤)의 팔대산인(八大山人) 이후 청대화단에서 홀로 이채를 띤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과감하게 앞 시대 사람들의 규범을 혁파하여 예술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사 봉건적인 예법(禮法)에 반대하고 “마음과 영혼”을 표현할 것을 제창했던 명대 서위(徐渭)의 사상이 발전된 것이고, 또한 청 중기의 개성해방을 요구하는 사상이 결합된 것인데,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II. 양주팔괴(揚州八怪)양주팔괴 화가는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분류된다. 첫째는 관직을 버리고 양주에 온 문인으로 정섭(鄭燮, 1693~1765), 이선(李, 1686~1762?), 이방응(李方應, 1695~1754)이다. 그들은 우수한 학문으로 관리가 되었으나 관직이 미천하였고 정치적 포부를 펼치지 못하여 실의에 빠져 양주에 가서 그림을 그려 생활하였다. 이들은 민간의 고통을 접촉하고 현실의 여러 가지 불평을 체험하는 한편 황제에게 충성하는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슴에 버리지 못하는 분노의 감정을 품고 화업의 재능으로 역대 문인들이 그렸던 사군자를 선택하여 그렸다. 시서화의 융합으로 불만을 발설하고 품격을 표현하여 “세상을 위해 힘쓰는 뜻[用世之志]”을 기탁하였다. 그들의 화풍은 온화하거나 우아하지 않고 강렬한 감정과 개성을 분방하게 표출함으로 강하고 단호한 기질을 지니기도 하였다.두 번째 유형은 일생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은 문인화가로 금농(金農, 1687~1764), 고상(高翔, 1688~1754), 왕사신(汪士愼, 1686~1759) 같은 화가들이다. 이들은 빈한한 문인 출신으로 관리사회의 부패를 간파하고 관직에 나서지 않았으며 혹은 공병을 이루지 못하고 서민이 되어 문장과 그림, 글씨를 팔아 생활하였다. 그들은 개성의 표출과 창조를 숭상하는 문인화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금석서법(金石書法)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움에 주의하여 서투른 듯 하면서도 사실은 교묘한 것에서 배웠고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사상을 작품에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고결한 인품과 시대에 오염되지 않은 정서를 표출하였다.세 번째 유형은 문인수양을 지닌 직업화가로 황신(黃愼), 나빙(羅聘), 화암(華, 1682~1765경) 등이다. 이들은 곤궁한 집안 출신으로 현실에 깊은 재능을 쌓았다. 민간의 취향과 습관을 이해하였고 양주기풍의 영향으로 문인화의 장점을 흡수하여 인품을 염두에 두고 시서화의 삼절을 겸하였다. 분방한 필치로 그린 사의적인 작품은 제재가 광범위하고 화법은 정련되고 능숙하나 속된 면이 있다.이러한 양주팔괴 중에서 정섭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1. 정섭(鄭燮, 1693~1765)정섭의 자는 극유(克柔), 호는 판교(板橋)이며 강소성 흥화(興化)인이다. 그는 강희년간에 수재(秀才), 옹정년간에 거인(擧人), 건륭년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후에는 유현의 현관(縣官)이 되었다. 정사에 힘썼지만 상급관리에게 잘못하여 관직을 그만 두고 양주에서 그림을 팔았다. 그는 시서화 삼절로 알려졌고 묵죽화에 특히 능하여 종이 창, 회벽, 햇빛, 달빛에 비친 대나무를 그리고 “눈앞의 대나무[眼前之竹]”에서 “마음속의 대나무[胸中之竹]”를 거쳐 “손안의 대나무[手中之竹]”에 도달하는 예술적 변화를 이루었고 시적인 정취와 그림의 경지에서 절개와 기개를 칭송하고 민간의 고통에도 관심을 갖는 포부를 표현하였다. 옛 사람의 작품태도[成法]에 대해서는 “반은 배우고 반은 버리며”, “스스로 발전할 곳을 찾을 것[自探靈苗]”을 주장하여 옛사람에게 구속되지 않고 시서화에서 독창적인 유파를 이루었다. 그의 회화작품에는 , 등이 있다.2. 이선(李, 1686~1762)이선의 자는 조양(宗揚)이고, 호는 부당(復堂)오도인 또는 의백산인(衣白山人)이라고도 했으며, 흥화(興化) 사람으로 강희(康熙) 50년에 효렴(孝廉)을 지내기도 했다.이선은 화조화를 잘 그리고 행서와 초서도 잘 썼다. 그는 대자연의 정취를 대담하고 분방하게 묘사했으며, 필법은 예스럽고 기괴했다.한동안 강희황제의 궁정에서 공봉(供奉)으로서 화원화가 노릇도 하였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와 시와 그림으로 세월을 보냈다.그림은 처음에 명의 임량(林良)화법을 배워 화훼와 새짐승을 그렸는데 공봉으로 있을 때 장정석(蔣廷錫)에게서 정식으로 사생법을 익혔다. 이선의 화조화는 필치가 자유분방하여 격식에니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글씨는 안지경(顔眞卿)과 소동파(蘇東坡)를 배웠으며, 낙관과 제시(題詩)도 일취(逸趣)가 있어 그림과 같다는 평을 들었다.는 그의 대담하고 분명한 필치를 볼 수 있는 소품인데, 간밤에 내린 비가 청산의 먼지를 말끔히 씻어내렸다는 제시처럼 아름다운 작품이다.3. 이방응(李方應, 1695~1754)4. 금농(金農, 1687~1764)금농의 자는 수문(壽門), 호는 동심(冬心)이고 별호는 매우 많다. 절강성 인화(仁和)인이나 양주에 오래 거하였다. 박학홍사(博學鴻詞)에 추천되었지만 과거에 낙방하여 귀향하였고 양주에서 글씨와 그림, 골동을 팔아 생활하였다. 그의 사상은 모순에 존재하며 “울타리 속의 기인[寄人籬下]”으로 재주가 있으나 불운하여 “평민으로 세상에 맞섰다[以布衣雄世].” 그러나 그는 수양이 넓고 시문에 능했으며 감상에 정통하고 전각과 칠서(漆書)에도 능하였고 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사군자, 야채와 과일, 산수, 인마(人馬), 불상, 초상 등 능하지 않은 화목이 없었다. 작품의 착상이 신기하고 구도가 독특하며 소박하고 수려한 필묵으로 공교함과 서투르고 둔함이 함께 어우러져 깊은 맛이 있다. 화조와 산수는 의미심장하고 생활정취가 있으며 인물초상화는 형상이 소박하고 치졸하며 거침없는 필치의 사의화로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었다. 작품에는 , , , , 등이 있다.5. 고상(高翔, 1688~1754)6. 왕사신(汪士愼, 1686~1759)왕사신은 자를 근인(近人)소림(巢林), 호를 계동외사(溪東外史)라고 한 양주팔괴 중의 한사람이다.왕사신은 산수화훼팔분서(八分書)전각 등을 잘 했으며, 『소림시집』과 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의 매화 그림은 필치가 아주 청묘하여 속기(俗氣)가 전혀 없다는 평을 들었는데, 그의 역시 구도와 구도와 화법이 특출하다.7. 황신(黃愼, 1687~1779?)황신(黃愼, 1687~1779?)의 원명은 성(盛)이고 호는 영표(瓢)이며 복건성 영화(寧化)인이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그림을 열심히 그옮겨가서 사의인물화를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사회의 하층인물을 제재로 하고 구상에서 생활의 정취가 보이며 형상은 비록 정형을 따랐으나 광초서법(狂草書法)으로 그림을 그려 작품이 거칠고 호방하고 기세가 관통하는 독특한 격을 지닌다. 작품에는 , , , , 등이 있다.8. 나빙(羅聘, 1733~1798)나빙(1733~1798)은 금농의 예술을 전면적으로 발전시켰고 를 그려 현실을 풍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금 이른 시기에 활동한 복건성 상항(上杭)출신 화암의 화조화는 운수평의 화풍에서 벗어나 소폭의 사의화를 개척하였고 공허하고 교묘하며 생동감이 풍부하고 인물산수화 역시 뛰어나다.III. 결론18세기 안정된 상태의 중국은 번영된 양주(楊州)는 말할 것도 없고 양자강으로 이어지는 대운하 연변 도시의 수요에 의하여 많은 미술작품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새로이 얻은 신사(紳士) 계급과 염상(鹽商), 그리고 그 밖의 부유한 무역상들은 서재를 짓고, 미술품을 수집하여 학자, 시인, 화가들을 대접하였으며 그 대신 그들의 작품을 즐기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많은 화가들 중에 그들의 후원을 받았던 양주팔괴(揚州八怪)는 경우에 따라서 전문적인 이유를 핑계로 행동과 기법이 거의 특이하였다. 예를 들면 김농(金農)의 작품임을 보증하는 것은 잘 그린 새나 꽃, 대나무 등 많은 그의 수묵작품 때문이 아니라 漢代 석가비문(石刻碑文)에 기원을 둔 네모진 묵직한 그의 서체(書體)에 있다. 이는 그의 「매화」작품에 보이는 가벼운 붓의 터치와 잘 조화된다. 그의 동료 황신(黃愼)은 이미 옛 작품에 풍자적으로 왜곡한 것이 있었던 진홍수(陣洪綏) 진홍수(陣洪綏, 1599~1652). 중국 명말(明末)·청초(淸初)의 인물화가·시인의 인물화 양식을 풍자적으로 왜곡하여 그렸다. 한편 다작(多作)한 화암(華)은 때로는 경쾌한 송대(宋代) 화조화의 대가 양식을 지녔다고 비평한다. 이 시대의 모든 작품들은 고풍(古風)을 띄고 있지만 이러한 화가들의 태도는 명말(明末)과 청초(청초)의 화가들보다 진실정이 부족한 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