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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 포퍼
    칼 포퍼(Karl Popper)1. 전통적 과학적 방법법칙이라는 단어는 다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규정적이 아니라 기술적이다. 그것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예를 들어,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법칙은 그 자체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는 진술 이상의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으나 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이 100도에서 끓으라는 명령은 내릴 수가 없다. 자연의 법칙이 (신의)명령이라는 과학 이전의 믿음이 바로 법칙이라는 말의 다의성을 낳은 이유이다. 자연의 법칙들은 신들의 명령으로 생각되었다.자연 법칙에 대한 탐색이 적어도 뉴턴 이래의 과학의 중심과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한 자연과학자들의 탐구 방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사람이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의 설명은 대게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다.구체적인 사례들을 관찰하여 모아놓은 다음, 그것에 기초하여 일반적인 진술을 만드는 방법을 귀납법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검열 필증으로 인식되었다. 다시 말해 귀납적 방법의 사용은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구분의 기준으로 인식되어져 왔다.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흄은 사건 A 다음에는 사건 B가 따라 나타나는 것을 어떤 한 경우에 내가 관찰했다 하더라도, 그런 현상이 다른 경우에도 꼭 생기리라고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A 다음에 B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우리가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심리적 추측이지, 논리적 귀결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과학이 토대로 삼고 있는 근거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당혹스런 일이다.2. 검증의 대안으로 제시한 ‘반증’포퍼의 과학철학은 19세기 이래 지배적이던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비판하는데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는 먼저 데이터를 수집하고 거기서 귀납법에 의해 일반법칙을 발견하며 과학연구의 시작은 ‘사실’ 즉 경험적 사실이라는 귀납주의적 전제를 그는 반대한다. 그에 의하면 과학은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한마디로 과학적 탐구란 문제를 풀기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가운데 ‘대담한 추측과 이에 대한 반증’을 시도해보는 탐구과정이다. 그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의미의 검증 가능성의 기준’을 비판했다. 검증 가능한 것은 과학이고 검증 불가능한 것은 과학의 자격이 없다는 논리실증주의의 기준이 도출되는데, 포퍼에 의하면 이 기준은 틀렸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론은 경험적 사실에 의해서 검증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이론은 실험에 의해 완전히 실증하거나 검증할 수는 없어도 반증할 수는 있다.‘반증’이 포퍼에게는 현대의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포퍼의 과학철학을 ‘반증주의’라는 방법론적 논의로 성격을 규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언명에 대해 이 언명이 참임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모든 까마귀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공간적으로나(모든 지역의 까마귀) 시간적으로(아직 태어나지 않은 까마귀) 모든 까마귀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언명이 거짓임을 반증하는 데는 다만 한 가지 사실, 즉 ‘검지 않은 까마귀가 관찰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직 단 한번도 반증되는 예가 나타나지 않은 동안이다. 즉 과학적 지식을 포함하여 모든 이론은 그것에 대한 반증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인정되는 잠정적인 진리이다.3. ‘반증가능성’과 과학과의 관계어떤 언명이나 이론이 과학에 속하려면 경험적 테스트에 의한 반증과 반박과 비판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반증가능성이 없는 형이상학적 언명,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등은 결코 경험에 의해 반증될 길이 없다. 포퍼가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과학이론으로서의 정보내용이 적다는 점을 탓한다. 누군가가 ‘내일은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반증될 수가 없다. 반증가능성이 없는 언명은 과학이 아니다. ‘수요일에는 서울에 비가 오지 않았다.’와 ‘그저께는 비가 오지 않았다’는 두 언명을 놓고 볼 때, 비가 온 장소(서울)가 언급되지 않은 후자는 전자보다 반증가능성이 적다.
    자연과학| 2006.10.30| 3페이지| 1,000원| 조회(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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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도교
    고려의 도교1. 머리말신라와 백제 사회가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와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중심의 시기였다고 한다면 중세에 해당되는 고려조는 신앙의 시대?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 중심의 시기로 이해하여 볼 수 있다. 표방되는 고려의 종교는, 물론 불교라고 하겠지만, 지리도참사상과 도교가 또한 그 비중 못지않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요, 생활신앙이었다고 할 수 있다.2. 도참사상(圖讖思想)이능화(李能和)는 이 땅에 상고(上古)부터 점성(占星)이나 도참(圖讖) 같은 것이 성행하고 중국 진시황제(秦始皇帝)의 방사(方士) 노생(盧生)이 “망진위호야 (亡秦爲胡也)” 라고 적힌 록도서(?圖書)를 바쳐 진의 멸망(滅亡)을 알려준 것도 노생이 해동(海東)에 와서 배워 간 것이라고 했다. 단군시대의 선인으로 전해지는 신지(神誌)의 비사(秘詞) 같은 것도 있다고 하지마는 이씨(李氏)의 그러한 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 있는 근거는 찾아낼 수 없다. 시대는 훨씬 내려오지만 신라 말에 최치원이 “학림황엽(鶴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라는 말을 해서 신라의 쇠망(衰亡)과 고려의 흥기(興起)를 암시한 것은 일견 비기나 도참에 유사한 것 같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인이 시대상을 보고 시국(時局)의 추향(趨向)을 판단한데서 나온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지덕설(地德說) 풍수설(風水說) 등과 관련을 갖는 도참설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이승(異僧) 도선(道詵)의 송도명당(松都明堂)의 설화와 결부되어 성행(盛行)하게 되었다. 전해지기로는 도선은 당나라에 가서 고승(高僧) 일행(一行)을 사사(師事)하여 그 신술(神術)을 터득하고 돌아 온 것으로 되어있다. 홍만종의 의 기사에 의하면 도선이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려 할 때 일행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은 그 땅이 콩알만 하면서 셋으로 갈리는 등 해서 전쟁과 변란이 멎을 날이 없는 것은 산수의 혈맥(血脈)이 고르지 않은 병 때문인 것 같은데, 그곳과 그곳 사람들을 태평하게 만들어 주겠으니 삼한의 산수도(山水圖)를 그려오라고 했다. 그지 지덕과 국조의 관계를 따졌다 던지 하는 것은 훈요십조가 나오기 전에도 도선에 부쳐서 알려진 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도선이 중심인물이 되어 일어난 도참사상은 고려창업의 당연성을 승복(承服)시키고 고려에 귀순(歸順)시키기 위한 심리작전적인 의의나 내지는 그 한계를 벗어나서 도선을 칭탁(稱託)하여 지덕을 따지는 풍수지리설이 날조되어 나돌게 되었고 각종의 비기류(秘記類)도 조작되게 되었다.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 등등 어느 때 누가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는 잡설(雜說)이 나돌게 되었다.이러한 도참설 내지 도참사상은 고려 일대(高麗 一代)에 걸쳐 군주나 권신(權臣)들의 정치적인 모략에도 이용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11대의 문종(文宗)은 송악명당기에 나타난 설에 따라 서강(西江) 병악(餠岳) 남쪽에 장원정(長源亭)을 지었다. 이것은 도참사상을 고취(鼓吹)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고려에는 본래 도선을 칭탁한 이른바 삼경설(三京說)이 있는데 그것이 정략(政略)에 결부되어 여러 가지 사건을 빚어냈다. 그 가장 큰 예로는 인종(仁宗) 때 묘청이 지덕설을 내세우고 서경 즉 평양으로 천도를 주장한 일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지덕설은, 사학자들이 여러모로 고찰(考察)한 바와 같이, 복잡 미묘한 정치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실권(實權) 장악(掌握) 목표(目標)로 한 고식주의파(姑息主義派) 확장주의파(擴張主義派) 등등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각도에서도 풀이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는데, 결국은 묘청은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제(帝)를 칭하고 대위(大爲)라는 국호(國號)를 내걸기까지 했다. 이밖에도 삼별초난(三別抄亂)의 밑바닥에도 도참사상이 깔려있고 고려 말의 천도운동(遷都運動) 같은 것 역시 지덕설을 구실로 내걸고 있다.이러한 도참사상은 민간에까지 깊이 뿌리를 박게 되어 풍수설의 만연(蔓衍)과 그 신봉자(信奉者)의 속출(續出), 비기의 날조와 미신의 증장(세한 내용이 전해지지는 않으나 임춘이 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중약이 도관을 지어 국가의 재초를 지내는 복지로 하라고 상소한 것을 예종이 기꺼이 받아들여 복원궁을 건조하게 된 것이다. 복원궁의 건립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예종 15년에 복원궁에서 제사지낸 기록이 처음 나오므로 그 때에는 이미 준공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는 대관년간大觀年間(1107~1110)으로 에는 정화년간政和年間(1111~1117)으로 각각 건립연대를 잡고 있어 퍽 막연하다. 에 의하면 복원궁 안에 강석이 마련되어 있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도의 요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알려주었는데 그 강론을 들으려고 모여든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에 의하면 복원궁에는 공행功行이 높은 도사 1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낮에는 재궁에 거처하고 밤에는 사실로 돌아가고는 해서 계율을 지키지 않아 속인과 다름없었고 복색도 일반사람들이 입는 옷보다 소매가 약간 넓은 것을 착용했을 뿐이다. 생각건대 도요의 강론은 이들 도사가 담당했을 것이고 초제 같은 도관의 행사 역시 이들이 맡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관원들 같이 도관에서의 일만을 맡아 보았고 종교교단을 형성해서 그 승려로 교세를 보존 확장하는 따위의 구실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땅에는 도교의 교단이 끝내 성립되지 않았는데 최초의 도관인 복원궁의 도사가 이러한 작용을 가지고 임하기 시작한데에도 다소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복원궁에 둔 고려의 도사 10여명은 공행이 높다는 말로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도교의 요리要理)와 의식을 수련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원궁에 강석을 마련해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도의 요체를 강론하였으니 도교에 대한 인식은 당시 고려사회에 상당히 보급 되었으리라고 생각 된다.서극이 고려에서 전이한 것으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이 있다. 예종이 국왕으로 있을 때 늘 그 자신이 도록道?을 받아 도교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국가의 종교로 도교를 불교와이 경신일庚申日이다. 일년에 삼시충三尸蟲이 6차례의 경신일庚申日에 보고를 행한다 해서 그것을 육경신六庚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시충三尸蟲은 경신일庚申日 밤에 숙주宿主가 된 사람이 잠든 틈을 타서 그 사람 몸에 빠져나가 천제한테로 가서 보고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이러한 얄궂은 삼시충三尸蟲을 부적符籍, 도인導引), 주축呪祝, 복기服氣, 복약服藥등 각종의 방법을 써서 구축하거나 행동을 억제하거나 하는 일이 번거롭게 고안되기도 하였으나 그 방법대로 시행하기는 다 힘들고 귀찮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삼시충三尸蟲의 유일한 약점인 경신일 밤에 숙주가 잠이 들어야 비로소 그 체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포착하여 삼시충이 악행을 천제天帝에게 고해바치는 길을 막아버리는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경신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삼시충이 체외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교지가 생겨나기에 이른 것이다.4세기 초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인간의 수명과 관련시킨 삼시三尸에 관한 얘기가 사과신司過神과 구신 조신 ?神에 곁들여 언급되어 있다. 그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역내계易內戒와 적송자경赤松子經과 하도기명부河圖記命符에 다 이르기를, 천지에는 죄과를 맡아보는 신이 있어 사람이 범하는 죄의 경중에 따라 그 수명壽命의 산算을 줄인다. 산算이 줄면 사람은 빈약하고 질병 등 자주 우환을 만나게 되고 산算이 다하면 사람은 죽는다. 산算을 빼앗겨야 할 일이 수백 가지가 있어 이루 다 논 할 수 없다. 또 몸에는 삼시三尸가 있다고 하겠다. 삼시三尸는 비록 형체는 없지마는 사실상 혼령이나 귀신 따위다. 사람을 빨리 죽게 하려면 이 삼시는 꼭 귀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 사명에게 방종유행放從遊行하며 사람들의 제사를 흠향한다. 그래서 경신일庚申日이 될 때마다 하늘에 올라가 사명司命에게 사람이 저지른 죄상을 사뢴다. 큰 것이면 기紀를 빼앗는데 기紀는 300일이다. 작은 것이면 산算을 빼앗는데 산算은 3일이다. 나도 이 일의 유무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멀고 귀신은 밝히기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이르기를, “경신일庚申日 밤에 종친을 접견하는 것은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다.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경망하다고 하는 거냐?” 위남이 이르기를, “신臣 등은 전하를 경망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추운 겨울에 성체聖體를 피로하게 할까 두려워서이고 또 남녀가 뒤섞여 논다는 것이 궁금宮禁의 엄밀嚴密한 체통을 손상시키게 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종조祖宗朝”에도 있었던 일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아라.“이렇듯 고려 이래로 수경신守庚申의 습속習俗은 계속되었는데, 궁중에서 수야守夜하는 일은 영조 때에 가서야 폐지되었다. 도교와 관련된 습속은 비단 이러한 수경신守庚申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 전기의 도교를 다루는 입장에서 그 당시의 습속習俗을 알아 볼만한 정리가 되지 않아 기타의 문제에 언급하지 않았을 따름이다.5. 도교사상道敎思想의 추이推移정중부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인의 잔인한 살육이 되풀이 되었고, 이와 아울러 명지에 무인의 민란이 발발하였으며, 최충헌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져가는 듯하였으나 원의 침략과 왜구倭寇의 침범이 계속되어 닥쳐와 그야말로 내우內憂와 외환外患이 찾아와 국왕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도불道佛에 기원을 드리는 길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명종明宗 이후에도 각종 도장道場의 개설과 재초齋醮의 거행이 잦았다. 재초의 내용은 국왕의 본명초本命醮, 탄일초誕日醮 등도 있었으나 대부분 국가를 위해 양재기복禳災祈福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초齋醮는 꽤 형식을 차려서 행해졌던 것 같다.당시 각종의 금기禁忌와 기양법祈禳法이 유행하여 여러 가지 행사가 거행되었다.다음에 몇 가지 예를 들어 그 일반을 살펴보기로 한다.고종高宗은 46년(1259) 도교의 재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강화의 마니산 남쪽에 이궁離宮)을 창건했다. 이러한 방법은 대체로 당시 유행하던 압승壓勝의 술법에 대한 미신으로 연결된 것으로 도참설圖讖設 내지 지리풍수설地理風水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압승지술壓 같다
    인문/어학| 2006.10.30| 12페이지| 1,000원| 조회(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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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당 윤리사상
    한?당 윤리사상1. 들어가면서중국은 넓고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중 하나이다. 이런 특성을 가진 탓에 중국은 여러 개의 왕조가 설립되고 또 사라져갔다. 이러한 과정을 흘러오면서 중국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전쟁은 최상위만을 위한 권력다툼이며 그 피해자는 언제나 최하위층인 백성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는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를 찾고 그 진리로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이들도 많다. 이 때문에 중국엔 여러 가지 사상이 많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이런 윤리 이론은 중국이란 거대한 나라가 통일된 후에 성립된 나라이기에 이런 진리보다는 나라 질서를 위한 윤리관이 두드러졌다. 이 윤리관에 대해 살펴보자.2. 한나라의 윤리사상2-1. 개설한고조(漢高祖)의 정책: 한고조는 진(秦)의 고립정책을 거울삼아 광대한 토지를 동족 자손들에게 봉(封)하여 주고 또 한편으로 직할지에 대해서는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후국의 왕들이 점차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 특히 가장 세력이 강한 오왕(吳王)이 왕실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경제(景帝)가 제왕들의 횡포를 징벌할 것을 결심하고 법을 위반하는 왕의 영토를 소환하려 하였다. 이에 오, 초(吳楚) 등 칠국(七國)이 모두 불만을 토로하고, 서로 합세하여 한왕실에 반기를 들었다. 이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라 한다.전한(前漢)의 대외적 발달: 전한시대에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한왕조가 밖에서 국위를 떨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공은 무제(武帝)에게 돌려야만 할 것이다. 무제는 흉노(匈奴)를 견제하고, 조선(朝鮮)을 아우르고, 대원(大?)으로 하여금 공납하게 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대외정벌군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대외정벌정책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고, 이를 메꾸기 위해 백성들에게 잡다한 명목을 붙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결국 백성들은 초최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후한(後漢)의 대외교류: 후한의 광무제는 온 힘을 기우려 한왕실을 다시 일으켰다. 그는 전한의 폐정(幣正)을(劉向), 유흠(劉歆), 환관(桓寬) 등이 대체로 전한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동중서, 양웅을 제외한 나머지 학자들에게는 특별히 윤리학설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음양오행설이 이 시기에 성행했다는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음양오행설은 본래 『역』(易)과 『상서』(尙書)의 홍범(洪範)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각종 기괴한 설(說)들이 붙여져 주말?전국시대(周末全國時代) 간에 성행하였다. 그것이 또 한대에 이르러 최고로 융성하게 되었는데, 당시 사상들은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음양설은 역법에 있는 역의 음양문자를 참작한 것으로, 일년을 나누어 4계절, 8방위, 12개월, 24절기 등으로 정한다. 그리하여 매월의 행사를 정하고, 이에 미신적인 사유가 곁들여져 행사를 따르면 번영하게 되고 행사를 따르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고 하였다. 오행설은 홍범에 나오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말하는데, 이를 미신적으로 해석하는 추연(騶衍)의 오행상승설(五行相勝說)과 추석(騶奭)의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이 있다. 오행상승설이란 금(金)은 목(木)을 이기고, 수(水)는 화(火)를 이기고, 토(土)는 수(水)를 이기며, 목(木)은 토(土)를 이기고, 화(火)가 금(金)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대 중국의 통치자들이 이 오행의 덕을 강함과 약함에 따라 정해져 왔다는 것이다. 오행상생설이란 목(木)이 화(火)를 낳고, 화(火)가 토(土)를 낳고, 토(土)가 금(金)을 낳고, 금(金)이 수(水)를 낳고, 수(水)가 목(木)을 낳는 순서로 역대 왕조가 변해왔다고 보는데, 강한 자가 그 앞의 왕조를 멸망시키고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곧 앞의 왕조로 말미암아 뒤의 왕조를 낳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춘추전국시대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민심이 흉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괴설은 매우 설득력있게 먹혀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민중들이 이에 미혹되었고, 또한 유교와 도교도 아주 변태적인 이단을 낳게 만.인생관: 천하는 나를 위하여 존재하며, 나는 천하를 위하여 존재한다. 이는 일종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라 할 수 있는데, 회남자는 다시 육체적 측면에서 그것을 논하고 있다. 즉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동일한 것으로 본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천지(天地)와 유사함 점이 매우 많다.만물교통론(萬物交通論): 만물은 도로부터 생기고 도는 만물을 관통한다. 이로 인하여 만물들 간에는 교통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교통은 만물들 간에 이루어지고, 인간들 간에서도 이루어지며, 하늘과 인간 간에도 이루어진다. 한편, 만물들 간에 교통이 있음을 추측할 수 없는 것을 회남자는 신명(神明)이라고 한다.*윤리설회남자의 윤리설은 그의 본체론 및 인성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체론은 목적론의 기초가 되며 인성론은 수양론의 기저를 말한다.목적론: 회남자의 윤리설은 본체인 도에 합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본체의 이상적 인물에 합일되는 상태는 지인(至人), 진인(眞人), 대인(大人) 혹은 대장부(大丈夫)라고 칭한다. 지인은 무욕 무망하며 무위자연하여 명예를 훼손하는 데 미혹되지 않아 득실을 논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회남자는 누구나 수양하면 지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수양의 목적은 바로 지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 말한다.수양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본체의 도에 합일하여 지인이 될 수 있을까? 회남자는 그의 인성론을 기초로 삼아 수양론을 전개하고 있다. 즉 도는 만물의 본성이며 따라서 인성도 역시 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성은 본래 선한데, 욕심으로 가리워지면 그 본성은 잃게 도고 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회남자는 악의 원인을 욕심이 존재하는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가 절대적으로 욕심을 배척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욕심은 비록 본성에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 밖의 것까지 자극하여 본성을 기르는 데 도움을 주는 면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눈이 색에 대한 것, 귀가 소리에 대한 것, 입이 맛에 대한 것, 코가 냄새에 대 인(仁)은 동정심이 된다. 이기심은 교화에 의해 선으로 고칠 수 있다. 또한 동중서는 성(性)과 선(善)의 관계를 성은 선도 악도 아닌 상태로서, 그것은 선도 악도 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 가능성을 잘 선도하도록 하는 것이 교화이다.*윤리설동중서에 있어서 도의 근원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일체의 도덕법칙도 모두 하늘에서 연역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 하늘은 변하지 않으며, 도 또한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도덕율의 권위를 제고시키고 있는 견해는 실로 칭송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윤리사상적으로 동중서의 공로는 오상(五常)의 도를 주창한 것에 있다. 오상의 도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말한다. 중용에서는 3덕을 들고 있고, 맹자는 4덕을 들고 동중서는 오상을 거명함으로써 유교의 덕론이 비로소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정치설동중서의 정치관은 근본적으로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하늘의 명을 좆는 것이요, 둘째는 교화로써 백성을 다스려 인성을 선량하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법도를 바르게 하여 상하의 질서를 수립하여 탐욕을 방지하는 것이다.또 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정치에 적용하고 있다. 즉 그는 인간은 하늘의 사랑하는 자식이며, 그들 중에 더욱 하늘의 총예를 받는 자가 왕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중서는 하늘이 항상 왕의 정치를 감독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정치를 잘하면 상서로운 상을 내리며 정치를 잘못하면 재화를 내려 경계를 하며 경계하여도 고치지 않으면 벌을 내려 왕위를 빼앗아 버린다는 것이다.*비판동중서는 한대의 유학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유학에 대한 학설이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당대 유학의 발흥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동중서는 유학을 사회에 실천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었다. 즉 학문적으로도 오상(五常)의 도를 주창하여 유교의 덕목을 완성함으로써 역시 중국윤리사상사적으로 불후의 공로를 세웠다고 할고 말하고 모방하고 사색하는 것을 성의 소유가 되게 하여야 한다. 학문을 하면 바르게 되고 그렇지 않으며 사악하게 된다.”고 하였다.3. 당나라의 윤리사상3-1. 시대상황수나라 말엽에 ‘이연’이란 자가 난을 일으켜 장안을 함락하고 즉위하니, 그가 곧 당나라 초대 황제인 고조이다. 고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가 당나라 2대 왕인 태종이다. 태종은 고조가 당(唐)을 창업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을 뿐 만 아니라 즉위해서는 많은 현신들을 등용하고 나라를 돌봄에 힘쓰는 등 정치에 전력을 다하였다. 또한, 관제(官制), 전제(學際)등 각종 제도가 정비되었다. 그 중 학제에 의하면, 서울에 국자학?대학?사문학등이 설치되었고, 지방 각 곳에도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은거하고 있던 학자들이 하나 둘 세상으로 나왔고, 천하에 산실되어 있던 책들이 속속 수집되었다.고종이 죽자 그 황후가 즉위하여 국정을 문란케 하였으니, 그녀가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 중종황후(中宗皇后)인 여씨(韋后)의 또한 정치를 독점하고 폭정을 일삼으니 국위가 점점 기울어지게 되었다. 현종(玄宗)이 위씨를 내쫒고 즉위하여 그 동안의 여러 폐정을 없애고 다시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국가는 더 강력해졌고, 여러 곳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변방을 확고히 하기도하였다. 그러나 절도사의 권력이 날로 강해지고 발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통제가 불가능해졌고 이때에 오랑캐들이 동방에서 일어나 장안을 함락하고 결국 당 왕실은 망하게 되었다.당나라에는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였는데,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도교를 믿고 그것을 자신의 보호자로 삼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도교의 보급이 별 어려움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도교의 세력은 불교의 세력에 미치지 못했다. 불교가 크게 성행한 당나라에서는 불교미술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 영향은 조선과 일본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3-2. 당대의 유교당 태종은 학문을 매우 장려하였다. 태종은 유교가 나라를 다르시는 치도(治道)임을 깨달아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다.
    인문/어학| 2006.10.30| 8페이지| 1,000원| 조회(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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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철학]중국 유학의 전개와 한국유학 평가A+최고예요
    중국 유학의 연원과 전개&한국 유학의 맥과 흐름*고대 유교 문화의 태동과 형성유교문화는 고대 중국의 하 夏.은 慇.주 周 라는 삼대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요순시대’는 안정과 평화가 깃든 태평성대의 상징이 되었고, 후일 공자를 비롯한 모든 학자들은 이 요순을 성인과 군자의 이상적 모델로 삼았다. 특히 요와 순의 왕위계승은 부자세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인재를 선출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러한 형식을 선양제도라고 한다. 고대 유교문화는 요->순->우->탕->문->무로 이어져 온 유교문화를 집대성하여 새롭게 체계화하고 그것을 현실에 직접 적용시키는 명실상부한 유교 인문주의 문화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요임금에서 주공에 이르기까지 성군들이 남긴 도덕규범과 문물 전장을 익혀 어지러운 세상을 구해보려 했던 사람이 바로 공자였다.*도덕실천을 강조한 공맹유학공자는 혼란한 당시의 상황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흐를 수 있는 ‘사랑’에 호소했는데 이것이 곧 ‘인 仁’을 창도하고자 노력했던 이유이다. 모든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사랑의 덕성을 바탕으로 사회규범의 예를 일으켜 사회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에게 부여된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는 분수를 지켜 안정과 화합 그리고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정명 正名’을 강조했다. 공자는 배움 앞에 차별은 없으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움으로써 수기에서 머물지 않고 치인으로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선비가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상적 인간상을 유가에서는 ‘군자유 君子儒’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과목으로는 ‘육예’가 중심이 되었고 우리가 부르는 오경도 공자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유교문화의 침체기 한당유학유교문화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제자백가들이 출현하게 되어 서서히 여러 학파와 사상적 대립을 맞이하게 된다. 이 가운데 공자의 후학이었던 유자들은 인의 仁儀의 도덕적 가치를 제일의 보편원리로 제시하여 인도주의 사상을 강조하였다.선진유학이 공자와 맹자 그리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면, 진 秦나라 이후 한 漢대로부터 위진남북조 시대 그리고 수당 오대에 이르는 천여 년 동안 유교문화는 대체로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진시황의 갱유분서 이후 유학사상은 사회 전면으로 드러날 수 없었다. 이는 자연스레 훈고학 학풍을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한동안 새로이 배출된 인재들로 왕조를 구성하여 유교문화의 부흥을 꿈꾸는 듯했다. 그러나 당 왕조는 육조시대의 겉만 화려하고 천박한 기풍을 이어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시 侍와 문 文으로만 인재를 등용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학자들은 시문의 암송에만 열중하는 사장학 詞章學에만 열중했을 뿐, 민생의 안정과 현실적 타개책을 궁구하려는 유학에는 소홀함으로써 사상적 깊이는 물론이고 균형된 정치질서는 찾아볼 수 가 없었다.이와 같이, 한당 시기는 유학과 외래사상이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면서도 전통문화로서의 유교사상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보이기도 하였다.*유교사상의 부흥과 유교문화의 재건을 꿈꾸는 송명유학송나라 태종의 유학 권장으로부터 일신하게 되는 유학은 북송의 다섯 학자에서 남송의 주희 朱熹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서 유학을 만든다. 이 시기의 학문을 신유학, 성리학, 송학, 정주학, 주자학이라 부르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대동소이 大同小異하다고 할 수 있다. 공맹유학이 인간으로 하여금 착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학문이었다면, 송대 성리학은 맹자 이래 줄곧 논쟁으로 부각되었던 인간의 본성과 천명 사이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왜 인간이 선한 삶을 영위하여만 하는지에 대한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우주와 인생, 보편과 특수를 일관하는 방대하고도 심오한 학문체계를 자랑하며, 그 이론의 핵심으로는 태극론, 이기론, 심성론, 우주론, 성경론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은 격물치지와 독서궁리 그리고 경전학습 등 공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지루하다는 폐단을 낳기 시작하였는데, 주자와 육상산 사이의 논쟁을 ‘아호논쟁’이라고 한다. 아호논쟁의 화두는 공부’과 ‘도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관한 문제였다.송대 이후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주자학 중심체제로 이끌어져 왔는데 명대에 들어와 왕수인이 제창한 학문이 바로 양명학이다. 양명학의 종지는 “내 마음에 우주 만물의 이치가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표준이 이 마음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학설이다.*실용지학을 내세운 청대유학명말까지 양명학이 성행했지만 폐단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 시기에 발흥한 학문사조를 고증학이라고 한다. 고증학은 한대경학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청조한학이라고도 칭한다.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을 대표로 하는 학자들은 송대의 학풍을 배격하면서 경세를 위한 실용지학을 표방하고 사적 실증과 박학을 통한 실천 중시의 경학과 사학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보다 객관적인 실사구시의 학풍만을 학문적으로 용인하여 고증학을 꽃피우게 된다. 이유는 청조의 위정자들은 중화민족이 아닌 만주족이었기 때문에 학자들의 반청사상과 반만주족 감정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고증학을 적극 장려해야만 했다.그리고 청말의 강유의가 서양의 근대사상을 받아들이자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혁명정신을 강조하게 되자 결국 중국은 신해혁명을 단행하게 된다.*유학의 수용과 한국사상의 원형한국은 고대로부터 다양한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우리 문화와 풍토에 맞도록 이를 토착화 하여 왔다. 그 중에서도 유학의 수용은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다.유학의 한국 전래와 수용은 그 시기별로 크게 네 가지 정도의 특성을 보인다. 첫째, 은말주초 殷末周初에 은의 명말과 함께 그 유민들이 동쪽으로 이주하는 민족의 대이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진 유교가 전래된 시기를 들 수 있고, 둘째, 중국의 진한 秦漢시대에 공자의 ‘육경 六經’ 사상이 들어오던 시기, 셋째, 여말선초 閭末鮮初에 들어오는 성리학(주자학)의 전래시기, 넷째,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이 발흥하는 시기로서 청초의 실사구시 학풍과 청을 통해 유입된 서학의 전래로 새로운 서구문명이 우리나라로 유입되는 과정이다.중국은해서는 이른바 ‘동바예의지국’이라 하여 문화적 우수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고대 중국인들에게 투영된 우리 민족의 원형적 특성인 ‘동이족’을 한결같이 ‘호양부쟁’의 어진 ‘군자’로 생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유학의 토착화와 전통사상으로의 보편화중국에서 수용되어 전통사상으로 토착화되는 한국 유학은 크게 다음 다섯 가지 흐름의 변화와 특성을 보였다. 첫째는 한대의 오경사상을 수용하여 위정자들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는 삼국시대이다. 둘째는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에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침체 상활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개혁이론으로 채택된 주자학의 도입시기이다. 셋째는 조선 중기의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 융성기이며, 넷째는 조선 후기 근대적 지행으로서의 실학사상이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다섯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구한말의 유림운동기이다.고구려에서는 4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미 유학을 기반으로 하는 국립대학이 설립되는 성장을 보인다. 태학에서는 자제들에게 와 을 직접 가르쳤다. 고구려인들은 유학의 오경과 등도 읽었다. 이 시기에는 오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사상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신라에서는 선덕여왕 9년(640)에 당태종이 국학을 증축하고 장려하자 중국으로 유학생을 보내어 적극적인 유교 수용 의지를 보였다. 국학의 교과내용은 주로 유교 경전이었다. 특히 와 으 각급 학생의 필수 교양과목이었다. 이론보다는 실천에 치중하는 시대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 진흥왕대에는 특히 화랑제도가 발달하였다. 또 경주 부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융성기 신라인의 시대정신을 보여준다.백제는 고이왕 62년(285)에는 왕인이 와 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황태자를 교육하고 문자와 유교 사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한 바 있다.정치 제도 중 6좌평 제도가 유명한데 이 제도는 의 육관에서 연유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정치 기구 중에서 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남당 南堂도 잘 알려진 제도이다.이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는 유학 중심의 입하여 이를 토착화하고, 정치사상이나 교육사상 등 제반 사회사상에 폭넓게 응용하면서 유학의 보편화를 추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여말선초의 사상적 전환과 ‘유학의 나라’ 건국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역사적 전화기는 한국유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해당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치와 객관적 실제를 동시에 규명하는 것을 학문적 본령으로 삼는다. 신유학은 인간 내면에 대한 주체적 성찰과 보다 구체적인 측면에서 현실사회의 문제를 아울러 중시하는 역사의식을 강하게 내포함으로써 윤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적인 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현실 지향적 특성이 매우 강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의미한다. 성리학은 새로 개창된 조선 왕조의 정교이념이 됨으로써 근세한국의 학술문화와 사상에 획기적이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주자학은 정치, 사회적 변화를 갈구하던 당대의 학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그런데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노불을 비판하며 국가 건설을 위한 전환을 도모하는 입장은 같았지만, 역사 해석과 현실 인식에서는 상당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한 계열은 더 이상 고려왕조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삼봉 三峰 정도전 鄭道傳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세력이었고, 다른 계열은 고려 왕조를 계승하면서 개혁과 중흥을 도모하려는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이었다. 그런데 조선조 유학의 특성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그 사상적 정통은 왕조개창을 주도했던 정도전 계열이 아니라, 오히려 고려왕조에 의리와 충절을 표했던 정몽주 계열의 학맥을 조선조 유학의 이상적 연원으로 삼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퇴계와 율곡의 출현과 한국 성리학의 융성16세기 중반 이후 한국 유학은 큰 전환을 보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도학적 전개에서 인성론적 전개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의 출현으로 한국 성리학은 중국보다도 심화된 인성론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적 성정과 도덕적 가하였다.
    인문/어학| 2006.05.24| 6페이지| 1,500원| 조회(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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