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NDMAID'S TALE을 읽고부제:현실과 비현실..무소의 뿔 같이 가라. 처녀들의 저녁식사 같은 페미니즘적인 영상을, 책을 읽으면서도 나의 현실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건 왜일까..아니, 그런 생각조차 안 했었다는 게 맞다.아버지보다 몇 배다 수입이 많던 능력 있는 엄마는 혹시라도 아버지가 소외당할까 가장대접을 톡톡히 해주었다. 자격지심, 여자보다, 자신의 아내보다 수입이 적다는 자격지심은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경계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 현실화가 되었을 때 남자의 자격지심으로 인해 여자가 불행해 질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있는 남성우월주의에 물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남자들은 여성에게 만큼은 우위에 서고 싶은가보다. 회사에서 쫓겨난 아내를 공존이 아닌 소유하게 된 루크처럼 남성들은 공존보다는 소유를 원한다.소설가, 시인이자 여권운동가, 인권운동가인 Margaret Atwood. 대표작인 ?시녀이야기? 에 대해 그녀는 신기술을 취급하는 일 없이 종교적 권리의 신장, 신용사회, 출산율 저하라는 80년대 미국의 실제적인 경향에 기반을 두었기에 과학소설이 아닌 명상소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성과 인종,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표현한 THE HANDMAID'S TALE의 소설 속 그녀의 표현들은 소름끼치고 충격적이며 독자로 하여금 소름 돋게 하는 전개를 펼쳐내어 간다. 정치적 색채를 짙게 띠고 있는 THE HANDMAID'S TALE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현실로 느껴지게 하는 묘한 느낌을 준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 분노, 속에서 책을 읽어 나갔다. 소설의 무대는 가까운 미래이다. 가까운 미래라는 설정은 현실과 비현실의 가능성을 정확히 가를 수 없는 불안감을 내포한 시점이다. 사람들은 비현실의 현실화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비현실의 현실화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 길리어드(Gilead) 국가에서는 여성들을 역할별로 분리해 그들이 가진 역할 들에게는 빨간색 옷이 당연한 것이었다. 빨간색도 여러 색도가 있겠지만 내 상상 속에서 시녀들의 빨간 옷은 핏빛이다.조금 더 깊이 들어가 살펴본다면 ‘빨간색’은 사령관 부인들의 색인 ‘파랑’보다 강한 자극성이 있고 하녀들의 색인 녹색과는 보색관계이다. 또 빨간색, 파란색, 녹색은 3원색으로서 서로의 존재에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3원색이란 철저히 독립된 세 가지 색을 섞으므로 써 무한한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법칙인데, 그들이 세 부류의 여성들을 통해 무한한 무언가를 얻으려 했음은 아닐까? 세 가지 기능으로 나누어진 아내, 하녀 그리고 시녀는 철저히 분리되어서 서로의 언어가 다른 것처럼 섞이지 못하는데 서로의 인종이 다른 것같이 느껴졌다. 그들이 나눠놓은 기능 속에서 시녀는 종속번식을 위해, 하녀는 집안일과 허드렛일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아내는 무슨 이유로 존재하는 걸까? 아내는 종전의 정상적인 가정을 위장하는 “아내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 이든지 아내자신은 굴욕감을 ,처참함을 느낀다. 생각 만해도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다른 인종 같은 시녀, 하녀, 아내는 색깔과 명칭으로 나누어지는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 당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소유하는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의 인상에 남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다. 현실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남자들의 허세부리는 일을 도와주는 충실한 그들의 윌윈드들..그들은 좋은 차에 대한 집착조차 버리지 않았다. 처참함을 느끼는 그녀들의 삶에 비하면 그들의 사치스러운 파트너는 나로 하여금 분노를 일깨워 준다.여성에겐 오직 기능만이 부여되는 가부장제국가 길리어드(Gilead),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직함이 , 등.. 듣기만해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추론해 낼 수 없는 clue게임 같은 이곳은 사랑이 배재되어 돌아가고 있다. 감성적, 여성적인 부분은 파괴되고 남성적인 부분만 남아 제도만이 서로를 연결시켜주고 그 외에 것으로는 인간관계조차 능동적일 수 없다. ‘맨하탄 대청소’때비 여성으로 분류될 수 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비 여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출산이라는 잣대로는 절대 여성을 분류할 수 없으며 그렇게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여성은 종속번식만을 위해 살아가는 소설 속 시녀가 아니므로 말이다. 여성은 출산의 굴레 속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 생명을 품고 탄생시키는 것은 당연히 행복과 귀함이 함께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하여 선택한 여성에게 있을 때나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이지 정치적, 사회적인 힘으로는 일구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기독교 우월주의를 꼬집고 독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몰락한 미국에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이 세운 국가, 길리어드(Gilead) 안에서는 여성이 출산할 때 마취제를 선택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9개월 동안 아기를 품고 출산하는 고통이 모 자르 단 말인가? 책안에서의 유일한 임산부 제닌이 출산하던 방안의 묘사에서는 나에게까지 땀 냄새, 피 냄새가 날정도로 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는데 빨간 옷의 시녀들이 방안에 가득했으니 징그럽기 까지 하다. 어쨌든 나약한 여자의 표본이 되어 등장하는 제인은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그 옆에 웃긴 포즈로 산모흉내를 내던 에게 아이를 뺏기므로 출산만을 담당하는 시녀는 엄마는 될 수 없음을 각인시켜준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던 씨받이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씨받이가 이를 깨물고 소리도 내지르지도 못하고 산고를 하고 있으면 그 댁 마님은 큰 소리로 아이를 낳는 시늉을 한 후 아이를 씨받이에게서 뺏어 와서는 자기가 방금 나은 양 사람들 앞에서 가슴에 품는 것이다. 사령관의 아내도 마찬가지로 다른 아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아이를 자기가 낳은 양 자랑스레 안아 보인다. 정말 웃지도 또 울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시녀들은 닭과 같은 존재라 생각했다. 매일 아침 알을 낳지만 낳자마자 주인에게 알을 뺏겨버리는 닭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오브프레드의 식사마다 등장하는 는 드라마의 흐름에서도 볼 수 있다. 요즘 인기 있는 mbc주말드라마 에서는 사회적으로 능력 있지만 임신이 잘 되지 않는 주인공이 임신을 한 시누이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 괴로워하는 내용이 펼쳐지는데, 불임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 드라마제목을 차라리 라고 바꾸라는 질시를 받고 있다. 나 또한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없을 것 없이 행복한 가정 안에 임신이란 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적 생각으로 출산은 새로운 탄생을 보는 것이므로 행복한 일이지만 그자체가 목적이 되어 여성을 옥죄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구당 출산율이 떨어지고 환경오염으로 불임이 증가하는 오늘날의 배경은 소설 속과 비슷하다. 출산으로 인해 여성이 가둬지는 순간 현실 속의 여성들은 비현실 속의 시녀들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책은 얼마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지 80년대에는 ‘둘만 나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내세워 출산을 감소시키고자 했지만 지금은 3명이상 출산하면 금전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방송에서 자녀가 많은 집을 미화해서 방영하는 등,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현실에서의 우리정부도 심각하게 감소한 출산율을 올리고자 정책을 바꾸고 홍보함으로서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임신 못하는, 또 안하는 여성들에 대해서 더욱 더 가시 돋친 편견을 쌓아가는 인식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몰고 가는 사회적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책적 출산도 중요하겠지만 출산을 하는 당사자가 여성이니 만큼 이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임무 중 가장 잔인한 기능이 출산기능을 가진 시녀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원치 않아도 생존을 위해서 출산하여야 하고 원했던 출산이더라도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될 수 없는 제도 속에 갇혀서 제 기능을 다 하여야 하는 것이다. 제도에 의해 여성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철저한 제도 속에도 재미있는 모순이 있다. 사령관들의 비밀클럽은 자신이 일궈놓은 제도를 냐고 가 질문하자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라고 레드센터의 그녀들이 입을 모아 제창 한다. 또 가 확인해 묻는다. “그들을 부추긴 게 누구지요?”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책을 읽다말고 나는 잠시 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최근 여기자 성추행사건으로 이슈 되고 있는 최 연희 의원에 관한 기사가 생각났기 때문인데, 최 연희 의원의 사퇴를 적극 추진해야 지당한 여성단체 중 일부여성단체가 최 연희 의원 구명운동에 나서 충격을 주었던 기사였다. 기사의 발단은 김성숙 동해상고 동문회장의 라디오에서 있던 인터뷰발언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최 연희 의원 여기자 성추행 사건’은 여 기자가 그런 일을 당하게끔 만드는 분위기였을 것이며, 그 여기자가 왜 그 시간 까지 거기에 있었던 것이며 또 폭탄주를 만들어 나눠 먹었으므로 따라서 과실이 있다고 말했다. 김성숙 동문회장이 시녀이야기를 읽었다면 “그를 부추긴 게 누구지요?”하고 말했을 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우리는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랬다면 여기자도 재닌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제 잘못이었습니다. 제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부추겼습니다.”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이 된 일이다. 자신의 딸이, 또 손녀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각들이 앞으로 있을 딸들에게 어떤 삶을 안겨 줄지는 뻔하다. 나는 비현실적인 이 현실을 떠나서 다시 비현실 속 소설로 돌아간다. 모든 여성들은 예전의 이름을 버리고 ‘of'라는 이름을 갖는다. 관용어에 따라 Of Fred는 Fred의, Of Glen은 Glen의 여자이다. 하지만 Fred의 집을 떠나면 Of Fred는 이미 Of Fred가 아니다. 그 집에 새로운 Of Fred가 생겨나므로...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남자의 소유로만 존재하는 시녀들은 현실에도 존.
그 밤의 진실영화 속에 담겨있는 그 밤의 진실이란 무엇일까... 나를 궁금하게 했던 비밀은 영화 필름 속에 담겨있었다. ‘나약’과 ‘보난데’의 결정적 평화협정의 날 그 중대한 날을 찍으려는 카메라들은 그곳, 보난데의 집결지인 평화협정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철저히 비밀에 묻기로 한 채. 그 밤에 진실을 묻은 그곳, 영화의 배경지인 아프리카는 이곳에서 대륙과 바다를 두 개씩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가장 먼 땅이다‘아프리카’라는 단어에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야생동물과 사막과 미개발된 지역의 주민들일 뿐, 그곳의 영화를 이제껏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에 초청된 판타 나크로 감독은 아프리카의 조그만 나라 부르키나파소의 여성 영화감독이다. 나와 아프리카 영화와의 첫 만남은 그녀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화제 홍보책자를 통해 판타 나크로 감독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번 여성영화제의 상영작 은 그녀의 첫 번째 장편으로, 열일곱 편의 단편을 거친 끝에 탄생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녀는 그 동안 재기와 유머 넘치는 단편들을 통해 이름을 얻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첫 번째 장편인 은 예전 작품들과 달리 무거운 주제를 건드리고 있는 작품이다.영화의 배경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의 가상 국가이다. 숱한 피를 뿌린 전쟁을 끝내기 위해‘보난데’와‘나약’족의 지도자들이 평화 협정을 맺는 날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전쟁의 원인은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약과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보난데가 그 차별을 분개하여 일으킨 한 민족 간의 분쟁이었는데, 현재의 유고슬라비아, 루완다를 생각하게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이 만들어낸 가상의 아프리카이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의 나라들에서는 팔다리를 자르고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 때, 영화의 잔혹한 장면은 현실로 다가와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완다와 유고슬라비아 같은 국가에서 민족끼리 싸우며 같은 핏줄임이 무색할 정도로 일어나는 같은 형제간의 잔혹한 살인의 즐김과 그 잔혹성을 거울처럼 비추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비단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또한 현재까지 지속되어지는 민족상잔의 비극의 역사를 품고 있지 않은가? 거리상으로는 너무나 먼 나라, 아프리카를 그린영화지만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먼 이야기가 아니다. 감독은 우리나라의 어두운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는데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을 개봉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영상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꿈틀대는 가운데, 나약 족 대통령의 아내는 보난데 족에 의해 살해된 어린 아들을 잊지 못한다. 평화협정의 장소이기에 손님 맞을 채비에 분주한 보난데 족의 사람들도 하나만 남은 자신의 다리를 보며, 살해당한 가족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약 족에 대한 분노를 지우지 못한다. 두 민족의 정상과 군인들이 모여 축배를 드는 밤, 적대감은 찾아들고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때 증오가 고개를 든다. 과거에는 한 아들의 너그러운 어머니였을, 또 한때는 평화를 사랑했을, 나약 족 대통령의 아내의 무서운 광기어린 증오가 평화협정의 순조로운 결말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에 대한 살인을 인정하고 발밑에서 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며 눈물 흘리는 보난데의 장군 테오를 결국 용서하지 못하고 광기어린 살인을 실행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능멸하며 죽인 장군 테오를 짐승처럼 막대에 묶어 매달아 불 위에서 양념 발라 구우며 비로소 행복한 예전으로 돌아간 듯 정신없이 웃어댔다. 정치적문제와 개인적문제가 뒤엉겨 결국 풀리지 않은 것을 극단적 비극으로 표출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정상의 만남의 한 중앙에 서서 나라를 이끌어가지는 않는 여자들이지만 전쟁이 식어가자 실질적인 협정의 열쇠는 그녀들이 쥐고 있었다. 은 어느 한 민족, 한 성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할 때 남성이 부각되어지고 여성의 문제는 대개 축소되거나 잊히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의 영상 속에서는 여성과 아이, 약자들의 소외를 거대담론의 중심으로 밀어 넣어 그들의 마음을 표출하여 주고 있다. 에서 가장 상처받고 가장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다. “모성애는 모든 걸 포용하고 용서 한다”지만 자식의 비통한 죽음을 경험한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팔다리를 하나씩 끊어내고 소년의 고환을 잘라 입에 물리고 산 생명을 통째로 불에 구울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여성이, 상처받은 모든 이들이 그와 같이 잔인해질 수 있음을 영화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상처를 보듬고 총구 앞을 막아서는 이 또한 다른 아이를 가진 어머니다.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분노해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 여성이 있고 그것을 용서하는 것도 여성이다. 여성이지만 폭력 앞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이들이 평화를 이끄는 기수가 될 수 있음을 영화는 천천히 펼쳐 보인다. 마지막 장면, 그토록 목매었던 평화가 찾아온 후 아이들에게 받아쓰기를 가르치기 위해 평화의 시를 읊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가르치며 문화와 교육을 담당한다. 남자들처럼 분노에 휩싸여 잔인해지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극복하고 평화를 가르치는 것이 여성들의 능력이다.” 이 여인이 읊는 시 구절처럼 영화 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여성의 능력을 그려내고 있다. 전쟁은 단지 손에 잡히는 총과 칼, 그리고 주먹만 서로에게서 거두어 간다고 끝이 아닌 것이다. 보이지 않는 여성들의 능력이 필요함을 영화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평화의 능력을 품고 있는 만큼 그들 여성들의 문제를 간과하여서는 그리 쉽게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보난데와 나약처럼,, 그들의 전쟁은 여성들의 상처치유가 전쟁마침표의 열쇠였다. 그 열쇠를 찾지 못하고 죽임당한 테오의 죽음을 영화는 큰 의미로 표현하고자 했다. 평화를 몰고 온 그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찾아온 평화를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듯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희생으로서 얻는 평화를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 또 가난과 부, 인종과 인종의 경계를 없애고자하는 영화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만남시간이 준비되어있어 참석 할 수 있었다. 처음 본 순간 무대에 서있는 검고 큰 흑인여자가 감독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런 잔혹한 영화를 감독했을 거라는 것이 안 믿길 만큼 부드러운 미소의 여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삼촌이 보난데의 ‘테오’사령관과 같은 방법으로 살인 당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그전의 부드러움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나는 민족 간의 살상, 성폭행을 보고 잔혹성을 그렸노라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여성들의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상처 까지도 표현해내길 원했다. 판타 나크로가 말하는 여성들의 세계는 광활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르키나파소의 영화학교와 파리 8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단편 으로 부르키나파소에서 처음으로 극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이 되기까지, 그리고 ‘아프리카의 뉴웨이브’로 손꼽히며 젊은 영화 인력을 배출해내기까지, 그 또한 여성의 길을 앞서 걸어 왔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불임 여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불임은 운명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담고 싶다는 이 영화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모든 여성들이 고통 받는” 보편적 주제를 다시 끌어안는다. “문화적 배경이 다를 수는 있으나 모든 인간의 고통은 보편적”이라는 믿음이 변함없는 한, 판타 나크로의 영화는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세계의 여성들을 향해 있을 것 이라는 그녀의 인터뷰가 인상에 남았다. 그녀에게 영화는 세계의 여성들의 거울이자 치료제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에게도 세계를 향해 발언할 수 있는 통역이 필요 없는 언어인 것 같았다. 영화관의자에서 그녀를 올려보고 있던 나는 그녀에게 에서 나타난 일들의 사실여부를 질문했다. 그녀는 나의 질문에 논픽션과 픽션이 결함되어 만들어진 영화이며 자신의 세계에서는 픽션이지만 세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 이라 며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답변하였다. 감독은 보난데와 나약이라는 두 민족의 대립을 통해 한 대륙의 문제를 세계 보편의 것으로 확대시키고 싶어 하였다 .실존과 비실존의 조화는 그 경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이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마치 상체는 사람 몸은 말인 켄타우로스처럼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영화관 의자에 앉아있는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조금 먼 곳에서는 조금 덜 잔혹하게 또 더욱 잔혹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영화제에 오를 수 있었는가... 영화자체가 여성의 시각으로 표현됨도 이유였겠지만 더 크게는 이런 소수민족들의 문제를 여성들의 포용력 있는 시각으로서 보아 관심을 유발하고 그 해결점을 여성에게서 찾으려 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