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광고 속 온정광고Ⅰ. 들어가는 말언제부터인가 TV 광고 중에서 기업광고의 비중이 늘고 있다. 상품 자체에 대한 광고보다도 광고를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업의 이미지광고 속에 가장 많은 소재는 가족, 친구, 사랑, 배려 등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것들이다. 기업광고, 그 중에서도 KTF와 SK텔레콤의 광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온정적 소구들을 찾아 분석하고자 한다.Ⅱ. 기업별 광고분석1. KTF1) 1분이다정류장에 서있는 버스 한 대. 기다리는 승객은 보이지 않는데 앞문을 열어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승객들은 왜 출발하지 않느냐는 표정인데, 그에 비해 버스기사는 여유롭다. 잠시 뒤 한 할머니가 고맙다는 말을 하며 버스에 오르고, 버스기사는 할머니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 한 후에 차를 출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KTF적인 생각은.. 1분이다”라는 카피가 뜬다.많은 버스기사들은 손님이 없으면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거나, 뛰어오는 손님이 있어서 배차시간 때문에 다음 버스를 타도록 둔 채 그냥 출발해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노약자를 끝까지 기다려주고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하는 배려를 보이는 친절한 버스기사를 통해 KTF는 아마도 고객을 배려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한 것 같다. 1분이라는 말, 정말 정확하게 1분이겠는가. 잠깐이지만 타인을 향한 배려심을 갖고 여유를 갖자는 의도일 것이다.KTF에서 이 광고를 찍을 때 왜 노약자를 등장시켰을까? 기다려야할 많은 대상들이 있겠지만 예부터 효를 강조하는 우리나라이기에 할머니가 등장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그렇지’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동방예의지국, 부모공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이기에 더 큰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2) 희망세탁소피곤이 얼굴 가득 묻어나는 한 남자.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의 눈에 막 불이 켜지는 한 간판이 보인다. “구겨진 마음까지 쫙쫙 펴”. 희망세탁소라는 간판 아래에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다림질을 하며 웃는다. 어느새 남자의 와이셔츠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다려지고 있고, 잘 다려진 옷을 받아 든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옷을 입고 세탁소를 나오는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아닌 웃음이 가득하다. “희망은 구겨지지 않는다”는 나레이션과 동시에 화면에는 “KTF적인 생각의 나라”라는 문구가 뜬다. 이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뒤로 방금 전까지 있던 희망세탁소 할아버지와 안성기가 세탁소를 손으로 밀며 세탁소를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희망이라는 말과 남자의 웃는 얼굴은 보는 우리들의 얼굴에도 미소를 띄게 한다. KTF는 희망을 주는 기업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세상 어느 누구도 희망이라는 말과 미소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는 메시지와 함께 그것이 KTF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있는 것 같다.3) 0.3초의 진실"0.3초의 진실“이라는 제목과 함께 시작된 광고는 여느 때와 다르다. 일부러 촬영한 장면이 아닌 매우 사실적인 화면이다. 한 꼬마아이가 지하철 선로로 떨어지자 지하철이 들어오며 울리는경적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한 남자가 선로로 뛰어내려 재빠르게 달려가서는 아이를 안고 처음 자신이 있던 선로로 달려와 아이를 사람들에게 건낸다. 그 직후에 바로 지하철이 승강장에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장면들과 함께 나오는 문구와 나레이션은 ”0.3초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 철로의 아이를 보고 몸이 먼저 뛰어든 용기의 시간“이다. 그 후에 바로 ”생각을 이동하라, KTF적인 생각“이라는 문구가 뜬다.이는 실재 있었던 사건으로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보고 본능적으로 뛰어내려 구했던 고등학생 김대현군의 이야기이다. 광고에 사용된 장면은 승강장에 설치된 CCTV에 찍힌 화면인 것이다. 0.3초는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생각이 뇌를 통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김대현군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위험하다는 생각보다 아이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고 고백했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각박한 세상에서 모두가 바라는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이 광고를 보면서 가슴 뭉클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직 이 세상이 살아갈 만 한 곳이구나.’라고 말이다.KTF에서는 김대현군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일과 함께 광고가 알려지면서 KTF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선한 일을 하는 기업으로, 사회의 일에 공헌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4) 이동국편KTF - 이동국편부상으로 월드컵에서 뛸 수 없게 된 이동국선수가 주인공이다. 화면에는 이동국선수의 부상 전 경기모습과 훈련모습이 나오고 문구와 함께 나레이션이 나온다. “8년을 준비했습니다. 꼭 뛰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라운드는 아니지만 4800만 붉은악마와 함께 더 뜨겁게 뛰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꼭 이겨주십시오”그의 육성으로 나오는 나레이션은 광고를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상황을 더욱 안타깝게 여기게 만든다. 월드컵에 맞추어 시작된 광고방송. 붉은악마 공식 후원사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축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월드컵에는 열광하는데 이 광고를 본다면 어느 누구도 가슴아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상 측은지심이 들 것이다. 이미 이동국편 광고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2. SKT1) 목련작은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밟고 올라서서 힘겹게 목련꽃을 따려고 한다. 다음 장면은 기차 안이다. 남자아이는 작은 선물상자를 소중한 듯이 안고 간다. 도착한 곳은 시골 할머니 댁. 아이가 소중히 안고 간 상자는 할머니께 드릴 선물이였다. 상자를 열었는데 목련이 오는 동안 시들어버리고 말았고,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며 손자를 달래주신다. 할머니께 예쁜 꽃을 드리고 싶어 까치발을 하고서라도 딴 꽃인데, 아이는 몰랐던 것이다. 꽃은 금방 시든다는 것을. 아이의 순수한 마음, 따듯한 마음을 드러낸 후 화면에는 “사람이 행복입니다.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문구가 뜬다. 사람을 향하는 기술, 사람이 먼저가 되는 기업이라는 것을 이 광고를 통해 표현하는 것 같다. 아이의 순수함이 광고를 보는 내내 전해져오는 따듯한 광고이다.
공병호의 초콜릿 (맛있는 성공이야기)。。。 초콜릿 상자 열기。。。‘초콜릿? 성공이야기인데 제목이 초콜릿이라니. 초콜릿 사업에 대한 이야기인가?’책 제목만 보고서 처음 떠올린 생각이다.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이 책을 보고 싶어졌다. 도서관에 가서 빌려오면서 스르륵 몇 장 넘겨보니 글과 그림이 적절히 어우러져 있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었다. 어쩌면 글보다 그림의 비중이 더 높아 보이는 그림책에 이야기가 얹힌 느낌이 들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도 많은 글이 적힌 책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을 더 좋아했기에 망설임 없이 택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잘 차려진 밥상보다 맛있는 밥상을 차리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내겐 더 효과적이다. 그렇기에 내게 안성맞춤인 책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갖고 책장을 넘겨본다.。。。 초콜릿 하나 - 삶은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대답해준다。。。빠름의 미학을 예찬하듯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Waiting"을 말하는 첫 번째 초콜릿 상자. 생각하기보단 무조건 달려가고, 구불구불한 길보다 쭉 뻗은 길을 달려가는 사람들을 향해 멈추어 생각하고, 천천히 여유롭게 살아가라고 말한다.무조건 빨리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말하는 이 첫 번째 상자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 중에서 내가 잊고 있던 것을 꼭 집어 준 것이 바로 “걷기 예찬”이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을 돌아보며 그 해답을 찾고,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는 시간을 가지라는 공병호박사의 글을 보며 내가 참 좋아했던 산책을 떠올렸다. 내게도 1분 1초가 아까워서 동동거려야 하는 시험기간에 오히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산책하는 것을 즐겼던 때가 있었다. 일부러 하늘이 맑은 날이면 도서관을 뛰쳐나와 하늘을 쳐다보며 무작정 학교 안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하늘을 보며 시험에 대한 불안감, 초조함은 어느새 내 머리를 떠나게 되고, 하늘이 주는 푸근함과 따듯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즐기던 때가 있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그 때기에 대해 정의하기를 ‘상대방 앞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내게 용기를 가지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 용기를 갖는 것이다. 예전엔 무모함을 무기삼아 용기라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갔는데,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이후부터는 용기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지 않게 되었고, 진짜 용기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나약한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 내게 용기를 갖는 법은 참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이야기이다. 이 글이 바로 그러하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소리에 집중하는 나를 향해 우리 아버지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은하야, 이 세상 앞에서 너 자신을 잃지 말거라. 이 세상에서 네가 해야 할 몫은 그 어느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라고 말이다.내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란 글이다.“이따금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리거나 무심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다. 특히 너처럼 어린 나이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기가 어렵지.”“다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이다. 살아가면서 무엇이 그리 바쁜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할 기회와 시간을 놓쳐버릴 때가 많구나.”“아들아. 네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말았으면 한다. 삶의 순간순간들이 꽃봉오리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음을 기억한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너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아들아 정말 사랑한다.”아직 아버지에게서 사랑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도 많이 들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들어본 말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아실까?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는 사랑한다는 말 듣기를 참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던 것 같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해주듯 나의 적은 내 안에 존재한다. 바로 나 자신이 최대의 적이다. 이 세 번째 상자 속에는 바로 나의 적인 나 자신을 뛰어넘는 법이 담겨있다.“과거의 화려함이나 현재의 안락함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한다. 삶이란 계속 과거의 성취를 거부하는 일련의 활동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그냥 머물기를 결심하는 순간 사람을 늙어간다고 보면 된다. 늙음은 곧 쇠퇴를 의미한다. 물론 욕심을 줄이고 조금 가난하더라도 그 자리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계속되는 성장과 발전을 원한다면 과거에 머물기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끝없는 변화, 그 길만이 유일한 선택이다.” -과거와의 결별 中과거를 뛰어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과거의 경험에 의지하고, 과거의 경험을 통해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과거의 경험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이득을 더해 주지 않는 것이라도 말이다. 성공의 경험이 아니라 실패의 경험이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아픔이라 하더라도 그 과거를 지울 수가 없기에 늘 내게 붙어 다닌다. 그러나 정말 발전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다면 그 과거를 뛰어넘으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뛰어넘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도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늘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과거가 붙든 발목 때문에 돌아오고 말았지만 또 도전해볼 것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지금까지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 내 과거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있는 힘껏 뛰어볼 것이다. 그 길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공병호박사의 말대로 말이다.“살아있는 모든 것은 변해야 합니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말입니다. 그런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 변화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中변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붙들린 내가 참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반대로 과거에 붙들린 내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변화이기에 가지지 못한 변화를 동경하는 것인지도 뭐.’하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실패의 구덩이에 밀어 넣고, 꺼내주지 않은 것이다. 얼마나 한심한가. 그러나 내 스스로를 더 이상 가두지 않을 것이다. 난 다시 실패할지도 모른다. 아니 앞으로도 무수한 실패의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좌절에서 그쳐버리면 다음 도전을 이제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인내일 것이다. 또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실패의 좌절감이 나를 엄습해 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해줄 것이다. ‘또 시작이니? 이제 그만하자’ 라고 말이다.。。。초콜릿 넷 -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기회다。。。네 번째 초콜릿 상자에는 우리가 성공을 위해 달려가면서 맞게 되는 위기에 대해 담고 있다. 일부러 위기의 순간을 맞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위기가 되었을 때에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학벌, 집안, 건강, 재능 등의 조건은 성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무엇’이 없다면, 성공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 무엇’이란 바로 ‘나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다. - 인생의 그 무엇 中100% 공감하는 이야기이다.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들은 성공을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의 성공의 열쇠는 ‘그 무엇’이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반드시 목표한 바를 이루겠다는 의지이다. 의지 없이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겠는가.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성공이 주어진다면 교만하고 자만하게 될 것이다.“중압감을 느낄 때면 의도적으로 경보 장치를 작동시켜라. 복식호흡을 이용, 호흡의 템포를 늦추어라. 거울 앞에 서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라. 당황하지 말고 중요한 것부터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면 된다.’라고 자신에게 조용히 다짐하라. 그리고 활짝 웃어보라. 결의를 다지면서 시합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말이다.” - 어깨가 무거울 때를 위한 주문 中의도적으로 경보장치를 발동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결정은 현명하게 中선택. 내가 가장 하기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쩜 이리도 이 책은 내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들을 꼭꼭 잘 집어내는 것인지. 분석은 정말 열심히 한다. 각각의 대안들에 대입해보고 발생 가능한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난 후에야 결정을 한다. 하지만 내 스스로 완벽한 결정을 내리고 싶어 하는 잠재적인 의식이 있는 것 같다. 가장 실수가 적은 것, 실패할 확률이 적고,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 머릿속에는 최악의 경우는 없다. 언제나 성공이라는 전제조건 속에서 생각하고 상상하며 결정을 내린다.어찌 보면 나는 가장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길을 선택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비교적 시행착오를 덜 겪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결정의 순간마다 결과적으로 내게 더 낫고 좋은 것을 택할 수 있게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이 날 도우시라는 법은 없다. 내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은 요행이 될 것이기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항상 머릿속에 담아두고 선택하고, 또 그것을 실천한다면 시행착오를 덜 겪게 될 것이고, 그 만큼 나는 실패보다 성공의 경험을 쌓게 될 것이다.상황과 환경이 내게 포기를 요구하는 그때가 바로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그 기회를 반드시 잡기 위해서는 최상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모두 손에 쥐고 긴장해야 한다는 것도.。。。초콜릿 다섯 - 부자에게서 배우는 작은 습관。。。다섯 번째 초콜릿 상자에서 말하는 부자는 돈을 가득히 쌓아두는 재물의 부자라기보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어낸 사람, 즉 성공한 사람들로서 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작은 습관들을 적혀있다. 3~4년 전에는 성공이라는 키워드가 한국을 대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관심을 모았었다. 여기저기서 성공에 관한 세미나가 열리고, 성공에 관한 책이 불티나게 팔렸습관 中
고구려 역사에 관한중국의 주장과 왜곡 사례목 차??Ⅹ?Ⅸ. 들어가는 말Ⅰ. 고구려 역사에 관한 중국의 주장Ⅱ. 고구려 역사 왜곡사례Ⅲ. 맺는 말??Ⅹ?Ⅸ. 들어가는 말동북공정(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은 중국은 한족 중심의 55개 소수민족이 만든 국가이며,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국가사업이다.특히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인데, 북한과 한국의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전제 아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한국의 소중한 유적들을 중국 땅에 있다는 이유로 자국의 이름으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록할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한국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선전하고 교육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역사를 심각할 정도로 왜곡하여 그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구려민족의 근원이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이며, 중국 땅에서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중국에 예속된 지방소수민족정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그 유민들은 대다수가 중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주장한다.중국이 고구려가 자신들의 지방소수민족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그 내용들에 대해 알아보고, 동북공정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역사왜곡의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Ⅰ. 고구려 역사에 관한 중국의 주장0. 고구려민족은 중국고대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다.이는 고구려의 기원에 대한 문제로 학자들은 예맥기원설, 부여기원설, 염제족기원설, 고이족기원설, 상인기원설, 다민족기원설 등 다양하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1998년 12월 장춘에서 열린 회의에서, ‘고구려민족의 기원에 관해 여러 설이 있지만 그들의 뿌리는 모두 중국에 있고, 모두 중국 땅에서 태어나고 중국 땅에서 성장한 고대민족이다. 고구려민족이 이들 중에 어느 하나의 민족에서 기원했던지 간에 고구려민족은 중국고대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다.’ 라는 견해로 정리되었다.그러나 414년 세운 광개토태왕비에는 주몽을 천자라 하고 있다. 중는 중국의 연호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가진 국가였으며, 주변 제휴국은 천제를 지내지 못하게 한 중국의 규정이 있었음에도 동맹이라는 천제를 지냈다. 신하로 예속된 국가라면 중국의 규정에 따라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할 수 없고, 천제를 지낼 수도 없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당하게 영락, 연가, 건흥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천제를 지낼만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국가였다.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일컬어 해동삼국이라 하여 한국사로 인정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주장대로라면 그들은 그들의 역사적 기록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2. 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들어갔다.고구려가 멸망 한 뒤에 고구려 유민들의 일부는 중원으로, 일부는 돌궐로, 일부는 발해로 들어가 모두 중국의 각 종족에 융화되었고,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만이 신라로 들어갔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중국이 고구려의 옛 땅을 완전히 차지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일부 고구려인이 당, 동궐, 일본으로 들어갔지만 대부분은 신라로 들어가거나 그 땅에 남아 발해인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와 발해는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그 뒤 한족이 2차대전까지 고구려의 옛 땅을 완전히 차지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 때 명나라가 만주의 요동반도를 자치했으나 여진족이 더 큰 영역에서 활동하였고 결국 청나라를 세워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였다.3.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국내전쟁이다.오늘날의 중국과 (고)조선의 국경을 기준으로 본다면 침략이라 할 수 있지만, 고구려 이전 1000년간 모두 중국의 한족이 지배하던 곳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반도의 북부를 점령한 것은 침략이지만, 한족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점령하는 것은 잃어버린 땅을 수복한 것이므로, 역사상 수?당이 고구려를 친 것은 대외침략전쟁이 아니라 중국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며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인은 고조선의 후대가 아니므로 수복할 권리가 없고, 고역사라는 것이다. 당나라가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지역을 주었고, 요나라가 압록강 이동, 여진의 영토를 고려에게 주었으며, 명나라가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게 준 것이다. 오늘날 한?중국경은 한민족이 북쪽으로 확장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이러한 주장대로 하자면 현재의 영토에 속하는 과거의 국가는 모두 자국의 역사라는 것인데, 역사가 소급하여 적용된다는 것도 어불성설인데, 과거 중국의 영토 밖에 있던 지역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범주에서 배제하게 되는 오류가 되는 것이다.Ⅱ. 고구려 역사 왜곡사례0.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에 전시된 고구려사 왜곡 사례(0) 머리말(前言)에 나타난 고구려사 왜곡“문헌에 흘승골성이라고 기재된 오녀산성은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동북지구의 고대 소수민족 고구려가 창건한 초기의 수도이다.… 오녀산성은 중국 북방 선주민들이 구축한 산성의 전통을 계승하고, 성터의 선택, 성 지역의 포국, 성벽 쌓는 방법 및 석재 가공 같은 방면에서는 위대한 창조력을 발휘하여 일종의 아주 특수한 산성 건축형식을 형성하였다. 중국 고대 성(城)건축사에서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겼다.”주된 내용은 ‘오녀산산성은 중국 동북지구 고대 소수민족 고구려가 창건한 초기 왕도이다. 오녀산성은 중국 북방 민족의 축성법을 이어받았고, 중국 고대 성곽건축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남겼다.’ 는 것으로, 고구려를 세운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이었고, 오녀산성은 중국의 축성법을 이어받았으며, 결국 중국 건축사를 빛냈다는 내용으로 이 글을 보는 관람객들은 처음부터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1) 연표에 나타난 고구려사 왜곡고구려사 연표는 중원왕조기년/고구려 왕계 및 재위기간/중요 사실로 나누어 만든 표인데, 맨 앞머리에 중국의 왕조에 따라 고구려사를 분류하고, 그 중국사에 따라 고구려의 왕과 재위기간을 쓴 뒤, 중요사실은 중국과 관련된 사실만 뽑아 적었다. 먼저 BC 108년 한나라가 현토를 세웠다는 사실을 쓰고, 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전국시대 후기에서 한나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 이 지대는 차츰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한 무제 원봉 3년(서기전 108년) 현토, 낙랑, 진번, 임둔 4군을 설립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토군 아래 고구려현이 설립되었다. 오녀산 주위 땅은 바로 고구려현에 속했다.선진적인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곳에 사는 사람들이 생산력 수준이 빠르게 높아졌다. 서기전 37년 부여왕자 주몽이 졸본지구(지금의 요령성 환인현)에서 고구려를 세우고 오녀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현토군과 고구려의 건국“현토군은 한나라 무제 3년(서기전 108년) 설치되었다. (현토)군의 치소는 처음 옥저성에 두었다가 한나라 소제 시원 5년(서기전 82년) 고구려현(현재 신빈현 영릉진 영릉남성터)으로 옮겼다. 서한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같은 여러 가지 강렬한 영향 아래 주몽이 현토군 경내에다 고구려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왕은 (중국의)중앙정권이 내린 조복(朝服)을 받고 그 호적을 고구려 현령이 관장하였다. 여기서 고구려 민족정권과 중앙 왕조의 예속관계가 확립되었다.”서기전 108년 한나라 현토군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는데, 서기전 82년 현토군의 치소가 옥저성에서 고구려현 옮겼다. 바로 이 고구려현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바로 ?고구려는 중국 땅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이 논리는 아주 교묘하게 연결해 놓았기 때문에 아무 역사적 지식이 없는 중국인은 물론 역사를 아주 깊이 알지 못하는 한국 관광객들로 그대로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 즉 ‘고구려는 부여 땅에 세웠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러한 논리의 바탕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온 것이다.(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현토에 속하게 하고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을 하사하였다.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을 하사하였고, (고구려는) 항상 현토군에 나아가 (한나라의라부터 당나라 때까지 활략한 동북 소수민족이다.그 민족이 건립해 중앙왕조에 예속하였던 고구려 지방정권은 700년 남짓 존속하며 중국과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민족은 중원문화의 끊임없이 흡수한 바탕 위에 홀로 특색 있는 고구려 민족문화를 창조하였다. 이 민족과 그 민족이 창건한 왕국은 이미 역사적 긴 강으로 사라졌으나 동북 각지의 성터, 무덤 같은 역사 유적에 남은 고구려 문화는 변함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1. 길림성 집안시 ‘집안시박물관’에 전시된 고구려사 왜곡 사례(0) 인사말에 드러난 왜곡박물관 광개토태왕비 탁본 앞에는 1.5m쯤 되는 돌모양의 표지판에다 박물관을 안내하는 첫 인사인 머리말(前言)이 쓰여 있다.“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 발전과 생산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이다.”이는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인사말을 통해서도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에는 고구려가 중원의 각국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았던 14번을 표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고구려 705년 동안 외교적 관례로 그것도 50년 만에 한 번 정도 있던 행사를 가지고 마치 고구려는 항상 고구려의 벼슬을 받아 행세한 중국의 지방정권처럼 왜곡해 놓았다. 고구려 705년 동안 중국에서는 35개 나라가 망했으며 그 가운데 50년도 못 가고 망한 나라가 절반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왜곡인 것이다.‘고구려 유민 천도 정황’이란 표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이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과 통계들은 고구려 땅에 그대로 남아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주민이 된 주민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은 수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고구려 유물을 이야기 할 때는 그 유물이 고구려의 초기라던가 후기, 또는 무슨 왕대의 것이라고 고구려 연대로 표.
로마법의 계수 중 형벌에 관하여Ⅰ. 서론로마법의 계수라 하는 것은 중세 말에서 근세초기까지 로마법이 포괄적으로 게르만법 지역에 보통법으로 수용된 현상을 말한다.독일의 로마법 계수는 로마법이 가장 철저하고 또한 전형적으로 받아들여진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로마법의 계수 중 형법에 관하여 형벌, 특별히 사형제도를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한다.Ⅱ. 로마형법1. 로마의 형법과 형사소송법현실주의자였던 로마인들은 공법의 분야는 순수한 법률논리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법률가들 역시 그에 비례하여 공법의 문제들을 덜 다루었고, 그 결과 공법은 사법에 비하여 덜 발전하였다. 형법의 영역에 있어서 일찍이 결과책임을 극복하여 과실주의 원칙을 확립하였으나, 미수범, 공범의 처벌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기수범, 정범의 경우와 별다른 구별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는 공동체의 범죄자에 대한 자구행위는 공동체 자체에 대한 범죄에 국한하고, 개인에 대한 범죄는 사인의 피의 복수에 맡겼으나, 이미 12표법에서 피의 보복을 제한하고 국가가 개입하게 되었다. 민회와 여러 정무관에 의해 행사되었던 형사사법은 법정절차와 심판절차의 분리가 없었다. 기원전 149년에 설치된 배심재판제도인 상설사문소는 종전의 심리원법원을 대체하여 이후 제정기 200년간 일반형사법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사인(私人)소추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제정기에는 황제의 재판이 발달하면서 상소가 정규화하고, 3세기에는 상설사문소를 비상심리절차가 대체하게 되었다. 죄형법정주의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사상은 아직 완전하게 발전하지 못했다.2. 함무라비법전함무라비 법전 속에 있는 형법은 위하의 관념이 강하고 사형의 규정이 극히 많으며, 형벌에서의 연대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법 규정에서 형벌의 수단이 수장, 화형, 신체절단 등의 가혹한 위하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사형은 주된 형벌로 법전의 여러 곳에서 규정되고 있다.몇 가지 예를 들면 이러하다.1조 사람이 타인에게 죄를 돌려 살인죄로 그를 고발하고 그에게물어야 하며, 도둑이 그렇게 할 능력이 없으면 그를 죽인다.153조 사람의 아내가 딴 남자 때문에 자기의 남편을 죽게 하였으면, 그녀를 말뚝으로 찔러 죽인다.Ⅲ. 독일형법1. 게르만시대초기 게르만법 시대에는 사형의 집행도 죄 중에 따라 달리하였다.(1) 절도범이나 반역자들에 대하여는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에 목을 매는 교수형에 처했는데 나뭇잎이 없는 나무는 북유럽의 주신이었던 바람의 신이 신성하게 여긴 것으로 이렇게 하면 죽음으로서 지은 죄가 용서된다고 믿었다.(2) 그 외 참수형, 익사형, 화형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교열형 등이 있었다.(3) 늪에 빠뜨려 죽이는 방법도 있었다.2. 프랑크시대(1) 신학적, 미학적, 순화적 기능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던 프랑크 시대의 형벌의 목적은 우선 국가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었고, 동시에 전래되어 온 사상인 범죄에 대한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데도 그 목적을 두었다. 이것은 국가와 공형벌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 것을 의미하며, 일반인에 대한 위혁와 복수의 관념이 지배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형벌을 통해 범죄의 재발을 불가능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려고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야간에 교회 건물에 불을 지른 노예에 대해서는 손을 자르거나 눈을 멀게 하여 재범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였다.프랑크 시대의 법적 변화의 중요한 의의는 첫째, 개인에 의한 복수를 어느 정도 제한한 것과 속죄금체계를 완성한데 있으며, 둘째, 직권에 의한 범죄소추의 개시를 인정했다는데 있다. 즉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개인간의 복수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종래의 형벌종류는 완화되었고 행위자는 속죄금에 의해 면제받을 가능성이 있었다.속죄금은 형벌적 의미와 사법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것이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당시의 형벌이 오늘날의 국가형벌과 같은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2) 살인죄고의범죄와 우연범죄로 나누어서 범인 범죄의사를 중요시 여겼다. 이것은 기독교영향으 자유인이 프랑크법의 적용을 받는 프랑크인을 살해했을 때는 200쉴링, 왕족을 살해했을 때는 600실링, 귀족이나 사제를 살해한 경우는 600쉴링, 아이가 없는 부녀를 살해한 경우는 200쉴링, 소녀나 로마인을 살해한 경우는 100쉴링을 지불하도록 하였다.3. 중세시대(1) 독일중세시대는 지방(영방)에 따라 많은 법들이 존재했는데 대표적인 법전인 작센슈피겝(Sachsenspiegel : 1220-1235)에서는 살인을 모살과 고살로 구분하였다. 모살(Mord)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어도 의도적이고 비밀스런 살인을 의미했다. 고살은 결과에 따라 판단하여 살인미수는 상해로, 살인치사는 고살(Totschlag)로 보았다. 타인을 타살하거나 체포, 약탈, 불에 태워 죽이거나 부녀자를 강간하거나 간통을 한 경우는 참수형에 처했다. 사형수가 형의 집행을피해 도망을 가면 그를 대신하는 인형이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고 기타 중죄인들은 형을 집행한 뒤에도 이후 그의 이름도 부르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범죄자를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상실케 하는 것으로 공동체의 일원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뜻하여 그를 죽이는 사람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자살자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죽었다고 보고 다시 마귀가 되어 이승으로 올 위험이 있다고 본아 시체가 자기집 문지방을 못 넘도록 문지방아래에 판 구멍이나 벽에 낸 구멍을 통해 끌어냈다. 시체는 공동묘지에 매장했고 얼굴은 아래로 향하게 했고 그 위에 많은 가시덤불을 덮었는데 이는 그의 환생을 어렵게 하기 위함이었다.) 칼5세에 의해 제정된 카톨릭 형법전(Constitutio Criminalis Carolina. )에서는 살인죄를 130조에서 독살(Giftmord)과 131조에서 영아살해(Kindesmoed)로 규정하고 그외 유사한 살인행위로서 모살의 경우는 강도살인, 독살, 근친살인, 청부살인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137조에서 살인을 모살(homicidium deliberatum)과 고살(homicidiun non de 심리적 동기로 구별하는 경우에는 고통을 못이기는 자를 동정하여 계획적으로 살해해도 모살이 되고, 계획적이 아닌 순간적인 격정에 못이겨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한 경우도 고살이 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되고만다.)독일에서는 1941년 형법개정으로 “모살자란 살해욕, 성욕의 만족, 빈욕 기타 비열한 동기에 의하거나 간악하거나 잔인하거나 공공에 위험한 수단으로 또는 다른 범죄를 실행하거나 은폐할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자를 말한다”라고 규정함으로서 심리적 동기가 아니라 윤리적 동기로 모살과 고살을 구별하는 태도를 취했다.(2) 형벌권이 국가에 전속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점차 형성된 국가권력 강화의 결과이다. 기술한 바와 같이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유래하는 페데제도는 중세에 들어와서 복수가 범죄행위 뿐만 아니라 사적인 청구권의 확보를 위해서도 행해져 공공질서를 끊임없이 위험에 빠뜨렸다. 국내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 나선 것은 처음에는 교회의 주교들이었다. 교회는 독자적으로 이러한 복수범죄를 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군주들과 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동맹을 결성하여 특정한 사람들 - 사제, 상민, 농민들 - 에 대해서는 페데를 금지시키고 일정한 재산 -교회, 주택, 농기구 등 - 에 대해서도 신의 평화동맹의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일시적이나마 페데를 계급적으로 특권화한 결과도 되었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점진적으로 강화되자 페데가 행하여지기 전에 모든 범죄를 처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중세 후기에 들어서 국가권력이 강화되자 프랑크 시대의 유물인 속죄금 대신에 형벌제도가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속죄금은 중세 중기인 13세기에는 불구형(신체형)이 집행될 경미한 범죄에 대해서만 인정되었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극소수에 대해서만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형이나 생명형은 속죄금 지불능력이 있는 자보다는 대부분 속죄금 지불능력이 없는 자에게 부과되었다.중세형법에서는 12세기부터 공적인 형사벌이 등 점점 가혹하고 잔인한 형태로 변모하게 하였다. 형벌은 위혁와 복수의 의미를 띠면서 무서운 범죄를 막기 위해 더 무서운 형벌을 고안해 내는 식이었다.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형사재판의 가장 특징적인 형태는 마녀재판이었다. 교회는 초기에는 마녀들이 빗자루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악마의 환영을 본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는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악마와 결탁한 자들이라고 공격하였다. 마녀 사냥꾼들은 마녀 피의자에게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대도록, 즉 다른 마녀피의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마녀 피의자의 손을 뒤로 묶은 다음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거나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고문, 유황으로 지지거나 뜨거운 기름을 온몸에 바르고 불로 그을리는 고문을 하였으며, 가시 박힌 신이나 바늘이 꽂힌 띠 그리고 뜨겁게 달군 쇠등이 고문도구로 이용되었다. 마녀사냥꾼들은 마녀사냥을 하여 마녀를 없애는 데 노력한 것이 아니라 고문을 통해 마녀공급을 원활히 하였고, 그 결과 마녀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위험스런 존재라는 신앙을 퍼뜨리는 데 노력하였다. 중세에 이런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일어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중세에는 기아와 질병, 끊임없는 전쟁, 교회의 죄악과 사치, 이슬람 제국의 확장 등으로 민중들의 눈에는 세계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나 종말론적 광신자들의 부와 권력을 독점한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움직임이 절정에 달한 시대였다. 마녀사냥은 이를 진압하는 수단으로 지배계층이 조작해내고 지속시킨 체제유지 수단이었다. 미녀사냥은 민중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귀족이나 교황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고 단지 자기들은 마녀들의 희생물이라고 믿게 한 것이다. 곧 중세 후기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교회나 국가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한 "마녀"에게 전가시킨 것이었다.중세의 형벌이 지닌 특징은 범죄행위의 방법에 상응하는 형벌 - 대응형 -을 가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위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