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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 20세기 우리 역사』 와 박세길 교수님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를 읽고 난 후 비교설명
    과제의 핵심인 우리나라의 1945-1959년은 현대사에 있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많은 변화가 존재했고 그 변화로 인해서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우선 그 시기를 살펴보면 1945년 해방으로 시작되어서 1953년 6.25전쟁이 종결되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저가는 시기인 1959년 까지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제의 핵심은 제시된 책들중에서 두 권을 선턱해서 그 시기에 관한 내용과 서술의 견해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는 것인데 본인은 강만길 교수님의 『20세기 우리 역사』 와 박세길 교수님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란 책을 택해서 읽고 난 후에 논하겠습니다.우리 현대사의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45-59년 시기는 격동의 세월이라는 표현이 올바른 것 같다. 그 동안 일제에 강점되어오던 즉 주권이 없던 나라에서 드디어 독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완전한 단일국가로의 독립이 아닌 더욱 더 힘들고 고난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두 책의 견해와 서술 차이를 얘기하기 전에 우선 이 중요한 시기에 사건과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해방을 오게 한 것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투쟁과 연합국의 승리였다. 그 이전에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는 어느정도 좌우익 통일전선체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민족해방운동전선 사이의 통일전선이 완성되기 전에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문제는 연합국에게 맡겨졌으며, 전쟁 후 그들의한반도 정책은, 한반도를 바로 독립시킬 것인가 말것인가, 바로 독립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일본의 패망시 북위 38도선 이북의 조선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에, 이남의 조선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에 항복한 것이 나중에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차대전이 끝났을 당시 한민족사회는 전승국간의 세력균형의 필요성 때문에 국토가 분단될 위험이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분단방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식민지배에서 막 벗어나 근대민족국가 경영의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사태였던 한민족사회는 국제세력 사이의 분단책동을 스스로 극복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38도선이 설령 미.소 양국에 의해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경계선으로 그어졌다 해도, 곧 민족분단선으로 고착될 위험이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조속히 철폐하는 길을 찾으려는 민족사회 자체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미국과 소련이 합의하여 38도선이 획정되었으나, 처음부터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를 수립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당초 하나의 국가를 세우려 했고 그 구체적방법이 신탁통치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지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6.25 전쟁이 발발하고 그 후 반세기가 넘도록 민족분단 상태가 고착화했다. 연합국들은 한반도에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는 수순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남북 전체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신탁통치를 시행하는 과정을 제시했지만, 민족사회 내부의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우익은 그것을 반대함으로써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우선적으로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탁론과 반탁론이 극렬히 대립하게 된 원인부터 알아야 하겠는데, 신탁통치안 전달과정부터 잘못되었다는데 큰 원인이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국내에 처음 전달한 신문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반대한 것처럼 보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오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이 가진 두 가지 초점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결과가 되었다. 즉 남북 전체를 통치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38도선을 해소한다는 점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5년간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점만이 일반 국민들에게 부각된 것이었다. 이 오보는 소련이 주도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신탁통치하려는 것처럼 국민들이 인식하게 하여, 반소 반공 분위기가 높아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38선을 수립하는 문제보다 즉시독립이 아니고 5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더 크게 부각되고 강조되어, 반탁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공산당과 그 북부조선 분국은 3상회의결정을 지지하고 남북통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강조했다. 그리하여 반탁론과 찬탁론의 극렬한 대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 후 미소공위의 결렬로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 실패하게 되었다.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이 모두 실패하고 결국 남북에 두 분단국가가 성립했다. 두 분단국가는 이후 서로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분단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현재는 특히 '남북합의서'를 교환함으로써 그리고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남과 북 모두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을 부인하고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대등한 위치에서의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미국은 한반도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한 대소련 협력노선에 따라 남북통일 임시정부 수립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협력노선을 포기하고 봉쇄정책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확정되어 갔다. 이후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발표되었고 많은 반대운동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도 미국정부는 선거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이승만 정권이 성립하게 되었다.분단시대적 역사인식에 한정된 눈으로 보면 6.25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 그래서침략과 동족상잔의 죄상을 추궁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민족분단 상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보면 6.25 전쟁은 단순한 침략전쟁이 아닌, 처음에는 북쪽에서 이룰 뻔했고 다음에는 남쪽에서 이룰 뻔했던 통일전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북쪽이이룰 뻔했던 통일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남쪽이 이룰 뻔했던 통일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남과 북이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될 수 없음을 증명해준 것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상충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원인이 되어 분단된 한반도 지역에서, 적어도 1950년대의 상황에서는 분단국가의 어느 한쪽 세력이 주도해 한반도지역 전체를 무력으로 통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바로 6.25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족내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그 통일 문제는 깊이 연관되어 있다.그리고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만이라도 그 영향권 안에 두어야 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대륙에서 소련이 강대국으로 등장한데다가 중국의 사회주의혁명마저 성공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반부가 일본의 안전을 지키는 전초기지 내지 보호벽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긴 데 있다.타민족의 강제지배에서 해방된 민족사회의 첫 정권은 민족해방운동세력이 집권하게 마련이며, 그래야 그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이 서는 것이다. 그러나이승만정권은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익은 물론이고 김구 김규식 등 우익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반공주의를 표방하면서 성립하였다. 그리고 1차 임기로 끝날 수밖에 없는 정권이었음에도 6.25 전쟁과 그 후의 남북대결을 빌미로 장기집권을 꾀했다. 그렇게 되어 직선제와 3선개헌을 통해 자연히 독재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정치적 정통성을 갖지 못한 정권은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어렵게 마련이다. 극동지역에 이른바 반공보루를 구축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미국이 이승만정권에 경제원조를 하고, 일제시대의 경제세력을 중심으로 재벌경제체제를 세웠다. 그러나 정치적 독재체제가 한계점에 다다르자 경제체제도 취약성을 더하게 되었고 결국 4.19라는 저항을 맞고 말았다.
    독후감/창작| 2004.06.01| 4페이지| 1,000원| 조회(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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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사기의 '유협열전'을 읽고 평가C아쉬워요
    ‘유협열전’에서 보여지는 신의와 의리가 오늘날에도 지켜질 수 있는 것인가?199801937 유 한 종사마천의 『사기』중에서 대표적인 열전중에 하나인 ‘유협열전’을 읽어보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고대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유협열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협객들에 대한 얘기이다. 주가, 전중, 왕맹, 곽해등이 등장하는데 이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다루어지는 주가와 곽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둥성 출신의 주가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을 때 ‘먼저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부터’ 받는 것을 자신의 첫 번째 원칙으로 여겼는데 특히 좋은 일을 할 때 남에게 알려지는 걸 두려워했다. 한번은 장군 계포가 금천량의 금액으로 현상수배를 당하고 있을 때 삼족이 멸하는 죄를 무릅쓰고 자신의 집에 숨겨두고 공신 하우영을 통하여 한고조 유방에게 사면해달라고 설득하였다.또, 곽해의 고사를 살펴보면 그는 젊어서는 나쁜짓도 많이하고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의로운 일을 많이 했고 자신의 외조카가 잘못을 저질러 살해당했을때도 범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 범인을 놓아주는 등 의협심 있는 행위를 많이 하였다. 그 이후에도 협객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번중자, 괴리, 임회, 예장경등이 있었지만 모두 결단력이 부족한 군자풍의 협객이었으며, 조타와 우공자, 조조등도 민간에 살고 있는 도적같은 무리일뿐 임협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서술한다. 태사공이라는 사람이 거론하기를 곽해를 본적두 없고, 그는 외관이나 말솜씨가 보통사람들보다 나은 점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천하가 협객을 논할 때 그 곽해라는 이름을 거론 안하는 자가 없었으며 불초한 자나 현명한 사람이나 곽해란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곽해의 인간됨과 그의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영예와 명성으로 제 몸을 빛낸 사람은 영원히 시들어 버리는 일이 없다”라는 속담이라고 얘기한다.고대사회는 신의와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이런 유협들이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신의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이면 거리낌없이 목숨을 바칠수도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그 당시 그들의 신념의 대상은 자신이 섬기는 주군일수도 있고 자신을 믿고 써준 사람일수도 있지만 한결같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대사회에서는 주종의 관계가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어서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목숨까지 요구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에게 부탁한 것이나 재상이었던 엄중자란 사람이 한나라 재상 협루와 원수관계가 되어 그를 죽여줄 사람으로 섭정에게 부탁한 것 등에서 볼 수 있는 점이다. 여기서 보면 신분이 낮거나 일반평민들은 자신의 목숨을 지배층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고위계층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고 그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을 순리 내지는 당연시 했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이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은 중국 무협영화에 항상 나타나는 인(仁)과 의(義)에 따라 행동하는 항상 멋지게 생각해 온 모습이다. 그러나 의문점은 과연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접목될 수 있고 가능한 모습일까? 하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고대사회의 주종관계와 현대사회의 계급관계는 확연히 다르다. 물론 인,의는 현대사회에 있어두 중요한 가치관들이다. 본인이 내리고 싶은 결론은 이러한 고대사회에 나타나는 인(仁)과 의(義) 모습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현대 사회에 맞춰서 따라간다면 정말 멋지고 보기 좋은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후감/창작| 2004.06.01| 2페이지| 1,000원| 조회(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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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문학] 허먼벨빌의 작품 '바틀비'를 읽고 평가A+최고예요
    ‘백경’의 작가인 멜빌의 작품인 ‘Bartleby, the Scrivener’는 예전에 읽어왔던 소설과는 많이 다르게 다가왔다. 우선 주인공인 바틀비에 대해서 집중적인 묘사로 이루워지고 여기서 무언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전부라고 보여진다. 이 소설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묘사되고 있다.배경은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을 거친 19세기의 상황이다. 주인공인 바틀비는 이러한 산업화된 미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한 명의 인간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는 그 과거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부와 권력의 심장부인 뉴욕의 콘크리트 빌딩 숲 속에서 홀로 자신만의 고독 속에 빠진 채 타인의 의견이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행동하는 모습은 무척 생경하면서 주의 인물들에게 연민, 혹은 혐오의 감정을 선사하고 있다. 그것은 흡사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에 이끌리지 못하고 낙오된 자의 표상처럼 보여진다. 그는 사회, 즉 공동체에서 소외당하긴 했지만, 그의 괴이한 모습이나, 행동으로 계속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그는 쉬지 않고 일한다는 점과, 언제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필경 이외의 모든 일을 거부한다는 점, 후반부에 벽만 바라보고, 사람들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모습에서 주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산업화에 순응하고 적응하지 못한 한 인간의 소외와 고독함이라고 본다. 이 소설은 1인청 관찰자 시점에서 서술해 나가기 때문에 바틀비에 대한 성격이나 묘사가 관찰자의 서술로 국한 된다는 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그것이 더욱 주인공에 대해서 자세하고 잘 묘사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이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갈등의 요소는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이다. 여기서 화자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Bartleby는 비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는 한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상반된 의식인 이성과 비이성사이의 갈등으로 일반화 할 수도 있다.사건들이 일어나는 장소는 법률 사무소이다. 법률 사무소는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이고, 이 장소는 화자에게는 어두침침하고 활동성이 없으나 매우 안전한 세계인데 반하여 Bartleby에게는 자신을 구속하는 부자연스러운 공간임에 틀림없다.화자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여러 부분에서 알 수 있다. 그는 Bartleby가 보통 사람과 다른 이유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Bartleby의 괴팍한 행동들이 생강 과자 때문이 아닌가 하고 면밀하게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가 필경마저도 거부했을 때는 시력이 나빠졌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덧붙인 Bartleby가 사문서를 취급하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 역시 화자가 Bartleby를 애써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무엇이든지 그러한 행동을 설명해 줄 만한 가시적이고 타탕한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Bartleby가 상징하는 세계는 완전한 비이성의 세계이다. 그에게는 의무, 실용성, 질서, 통념 등이 통하지 않으며 이성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모든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대조하는 일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거부한다거나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생강 과자로만 연명하는 일, 필경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벽이 보이는 창만 외롭게 보고 서 있는 일, 그리고 그 외 그가 저지르는 모든 사건들은 화자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다.Bartleby의 등장과 함께 화자는 자신의 확고했던 이성의 세계를 침범받게 된다. 대조하는 일을 부탁했을 때 Bartleby의 이상하게도 온화한, 단호한 투의 'I would prefer not to.'는 그에게는 난생 처음 겪는 충격이었으며 기절초풍하여 당황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화자는 Bartleby의 행동에 불안이나 초조, 혹은 불손의 빛이 있었다면 즉 다른 보통 사람과 같은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를 내쫓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Bartleby의 그런 비이성적인 모습에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동요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다. 화자는 Bartleby에게 ‘You are decided, then, not to comply with my request - a request made according to common usage and common sense?’ 라고 물음으로써 일반적인 관습과 상식을 요구하지만 Bartleby는 똑같은 대답을 한다. 화자는 Bartleby의 비이성적인 면을 서서히 인정하면서도 그의 이성은 새로운 반항에 부딪치고 싶어 한다. 즉 Bartleby에게 다시 원본 대조하는 일을 강요하고 그 외 다른 심부름도 시켜서 Bartleby를 자극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Bartleby의 비이성적인 면에 더 적응하게 된다. 그리하여 Bartleby에게 깊은 곳까지 마음을 주게 되었으며 그를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으로까지 인정한다. 그러나 화자의 이성은 Bartleby의 계속되는 비이성적인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사무실 문 앞에서 쫓아내거나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필경사들까지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는 큰 위협과 거부감을 일으킨다. 결국 그는 극도의 이성적인 행동으로 Bartleby를 자신에게서 떼어버린다. 즉 화자의 이성적인 면은 Bartleby의 비이성적인 면에 의해 한동안 동요가 되었으나 결국엔 원래대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화자가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음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화자가 어느 일요일 사무실에 들렀을 때 Bartleby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밖에도 나가지 않고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여기서 난생 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듯 밀려오는 우수를 느꼈으며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슬픔은 감미로움이 깃들인 슬픔이었다고 말한다. 화자는 분명히 Bartleby를 동정하고 그의 외로움과 소외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화사하게 차려입은 군중들을 머리에 떠올림으로써 Bartleby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가 대립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 결과 그는 비참함이 세상에 숨어 있으므로 잘 알지 못했다는 깨달음을 병든 어리석은 머릿속에서의 망상이라고 치부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4.06.01| 3페이지| 1,000원| 조회(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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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포영화의 사회적 기능 평가D별로예요
    1. 공포영화의 정의 및 특징공포영화(Horror Movie)란 귀신과 괴물이 나오는 영화라거나 컬트(소수 관객 의 종교적 숭배현상)영화의 원조가 아니다. 공포는 영화를 본 후 관객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 오히려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 줄거리 전개방식을 지닌 영화로 정의해야 맞다. 국내의 경우 많은 영화 장르 중에서도 유독 대중적인(다 양한 관객층)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 받아왔던 장르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모 으는 장르는 아니지만 그에 비해서 소수의열광적인 팬 특히 10대에서 20대 초 반의 팬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공포영화이다.공포영화의 주된 내용이 사람을 살해하고 살해하는 이유 또한 그렇게 납득이 갈만한 것들이 아니라서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저급영화란 인식으 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수없이 많이 제작된 공포영화들이 싸구려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높은 완성도와 관객들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작품들도 많은 편이다. 공포영화 자체가 관객들에게 공포감과 서스펜 스, 스릴을 전해주기 위해서 제작이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 되는 것이다.2. 현대영화의 사회적 기능영화는 사회에 대해 그 어느 예술 매체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화가 시각적이면서 청각적인 매체일 뿐 아니라 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을 집단적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막강한 전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통치자들이 영화를 그들의 이념이나 당(黨)의 선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레닌은 일찍이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러시아 혁명 직후 영화사업을 즉각 국유화함으로써 영화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을 강요하였다. 히틀러나 B.무솔리니도 영화를 나치즘과 파시즘을 위한 한낱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다. 무솔리니는 국립중앙영화실험센터를 창설하고 로마 교외에 영화도시 치네치타를 건설하였고, 히틀러는 영화를 보다 철저히 지배하고 활용하기 위해 검열제도의 강화와 유대인 및 자유주의적인 영화인의 탄압 ·축출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 군국주의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영화를 철저히 통제하면서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기(兵器)’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처럼 의식적이고도 노골적인 선전수단화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미묘한 형태로 항상 대중에게 작용하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서부극은 인종적 편견과 인명 경시의 풍조에 은연중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이며,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가 전근대적인 봉건의식과 잔학심리(殘虐心理)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과제이다. 물론, 영화의 내용과 그것이 주는 감명은 매우 복잡하므로 어떤 경솔한 판단이 쉽사리 내려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영화가 사회나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의 한 단면을 줄곧 지켜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수많은 상업주의 영화들이 대중에게 주는 효과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수입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성적(性的)인 장면을 보다 많이 다루려 하는 등 저속취미에만 영합하려 한다. 또한, 현실의 사회문제를 다룸으로써 그것을 똑바로 해부하거나 비판하려는 영화는 외면하려고 든다. 그러나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산될 때 이와 같은 상업주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고조되게 마련이다. 영화 예술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며, 그래서 상업적인 시스템의 테두리 밖에서 가능한 한 자유롭고 자주적인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독립 프로덕션의 시도가 여러 나라에서 활발해지고 있다.
    인문/어학| 2003.12.17| 2페이지| 1,000원| 조회(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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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4.3사건에 대해
    우선 제가 보고서의 주제를 ‘제주 4.3 사건’으로 정한 것은 전공이 사학이 라기는 이유보다는 고등학교때부터 교과서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제주 4.3 사건’의 실체와 궁극적 원인과 사건의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었기에 주저 없이 ‘이제는 말 할 수 있다’에서 방영한 것 중 '제주 4.3 사건’을 보고서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그 동안 알다시피 ‘제주 4.3 사건’은 1980년대 후반까지 정확한 사건의 규명은커녕 오히려 알려진 사실조차도 은폐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이 이 사건이 본인의 관심을 예전부터 끌어왔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에 고민없이 이 부제를 선정한 것이기도 하다.4·3의 명칭에서부터 성격 규명, 인명 피해에 이르기까지 아직 통일된 의견이 없는 실정이다. 이는 1948년 4월 3일 발발 이래 1980년대 후반까지 근 40년 간 정부가 진상 파악을 하기는커녕 논의조차도 금기시해 온 데 그 책임이 크다 하겠다.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뒤 혼란의 와중에 1947년 3·1절 기념대회가 있던 날, 제주도민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제주도내 관공서와 학교, 직장 등 제주도민은 총파업에 돌입하였다.그러나 미군정은 이에 대해 강경한 탄압으로 대응하였다. 총파업 이후 1년 동안 2,500명 가량이 구금되었고, 특히 1948년 3월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민심을 자극시켰다.이로 인해 일부 제주도의 청년들은 한라산 기슭으로 피신하여 무력대항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가 실시 되게 되자, 이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보였다.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를 전후해 소위 인민 자위대라는 좌익 무장대는 제주도내 24개 지서 가운데 11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우익단체에 대한 습격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4·3은 시작되었다.그 뒤 공비 토벌을 이유로 미군정과 군·경 토벌대는 이들 7차례의 토벌작전을 벌여 잔여 게릴라들은 거의 소탕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포함으로써 6년 6개월 간의 유혈 사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제주 4·3'은 그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그러나 무장대와 토벌대의 격전 과정에서 무고하게 자행된 양민학살은 국제법상으로 범죄에 해당되는 사례이다.특히 대부분의 양민학살은 군·경 토벌대의 물리력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정규전이 아닌 상황에서 설사 무장대와 내통하였다 하더라도 재판 절차 없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집단 학살한 것은 비인간적인 만행이었다. 4·3 진상 규명의 열쇠는 바로 이러한 양민 대학살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다.우선 MBC에서 방영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제1회(1999.9.12자 방송분)의 내용인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의 주요내용은 대량학살 계획인 제주초토화 토벌작전이 미군의 책임임을 밝히는 증거와 좌익세력의 토벌로 인한 대다수의 희생자가 양민임을 밝히는 것과 새롭게 밝혀진 양민의 학살 매장지의 공개와 제주 4.3사건을 일으킨 좌익세력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 방송을 다시 자세히 이번 기회에 시청하니까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던 1948년 4.3일은 미군정하에 통치되었던 우리나라가 진압과정에서 미군의 강경진압을 지시받구 함구하며 행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들, 그리고 당시 계엄사령군이였던 남상휘장군의 증언과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이였던 로버츠 단장의 비밀편지내용(한국군은 인식하지 못한 채 미군을 대신해 피를 흘리고 있다) 또한 공개된다. 또한 그 동안 발견되었던 대량 양민 학살지외에 또 다른 대량학살지가 공개되기도 한다. 다시 이 방송을 시청하면서 느낀점은 참 힘없는 나라의 설움과 울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구 이런일을 되풀이 하지 않고 거듭나기 위해선 확고한 자주 국방의식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의 고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여기서 이제 제주 4.3 사건의 배경과 전개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제주 4 의해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6명의 사망자가 초등 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장년의 농부 등 대부분 시위를 보던 군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은 격분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의 과잉 반응으로 인한 발포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여기서 잠시 4·3의 역사적인 배경을 고찰하는 입장에서 광복 직전의 제주 상황을 살펴보겠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제주도민들에게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광복'을 뜻했다. 일제는 제2차 대전 말기에 오키나와까지 점령당하자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고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 정예군 7만 명을 이동 배치했다. 소위 결 7호 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미군이 제주에 상륙할 경우 7만 일본군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유격전을 벌이며 옥쇄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당시 20만 명의 제주도민을 산중으로 끌고가 최후 결전의 소모품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당시 일본군 정보팀은 미군의 제주 상륙 시기를 9∼10월, 상륙 병력을 2∼5개 사단으로 예측했다. 제2차 대전이 한 달만 더 연장되었어도 제주도는 강대국의 전쟁터로 그야 말로 불바다가 될 뻔했다. 그런 위기 속에서 광복을 맞았기에 제주도민의 감회는 본토민들의 그것보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3·1절 발포 사건은 제주도민들을 분노케 하였다. 그러나 군정 당국은 이 발포를 정당 방위라 주장하면서 민심 수습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건 열흘 뒤인 3월 10일,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하면서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민관합동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파업에는 도청을 비롯한 도내 156개 관공서, 국영 기업들도 참여하였다. 도내 전체 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동참해 문을 닫았다. 심지어 경찰관들마저도 파업에 동참하였으며 조성되어 있었다. 남로당 제주지부는 미군정에 불만이 많았던 민심에 부응하여,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경 김달삼을 중심으로 조직된 500여 명의 무장대가 11개의 지서와 서청, 대청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면서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깃발을 내걸고 '단선·단정 반대', '응원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주장하며 일어난 것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초기에는 치안 상황으로 간주,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본토 경찰 1,700명의 제주 파병을 승인하고 서북청년회를 증파했다. 그런데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횡포가 심해 도민들은 산으로 피신했고 그 결과 무장대 세력이 더욱 커져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협상 직후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의 조작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과 5월 3일 기습사건등이 잇달아 발생, 평화 협상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5월 5일 군정장관 딘(W.F.Dean) 소장은 제주도에 와서 최고 수뇌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건의하다 경무부장 조병옥과 충돌한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하였다. 이로써 무장대 측과의 평화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5월6일 김익렬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중령이 부임했고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가 제주에 추가로 파견찰국장에 임명하고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본토의 군병력을 대거 제주에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신임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규정, 이 지역에서 보이는 자는 폭도로 인정, 무조건 총살시킨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 포고령에 따를 경우 해안 마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적성 지역에 해당한다. 이어서 10월 18일에는 해군 함정 7척을 동원하여 다른 지방과의 뱃길을 차단하고 제주도 포구의 모든 배에 출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제주도는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주도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병 예정이던 여수 14연대가 4·3 토벌을 거부하며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이른바 '10·19 여순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여수 10·19 여순사건은 좌익 세력 탄압의 빌미가 되어 이미 계획된 제주 초토화 작전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고 결국 참혹한 양민 학살을 재촉했다. 초토화 작전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토벌대는 10월 후반기에 제주 읍내 유지들에 대한 일제 검속을 강행하였다.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천막 수용소에 대부분의 유지들이 소환되면서 제주 읍내는 일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법원장이 연행되었고 현직 검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마저 끌려가 즉결 처분되었다.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현경호), 제주신보 편집국장(김호진)이 총살되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이 서북청년회에 의해 고문치사 당했다. 게다가 서북청년회는 당시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하기까지 했다. 11월 초순에는 9연대 장병들 중 제주도 출신자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다. 11월 17일에는 제주지역에 불법적인 계엄령마저 선포하여 초토화 작전을 집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였다.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사회과학| 2003.12.17| 10페이지| 1,000원| 조회(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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