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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택동 사상] 중국의 지도자가 된 사람 평가B괜찮아요
    중국의 지도자가 된 사람- S. 슈람 의 毛澤東을 읽고Ⅰ. 서론중국에서 호남 지방의 의미는 혁명적 사상의 요람이며 그것은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의 그들을 탄압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혁명이다. 이들은 고추를 많이 먹는 사람들로 정력적인 퍼스낼리티와 정치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호남 사람들이 한 사림이라도 살아남는 한 중국은 결코 정복 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바로 이러한 특징을 지역에서 소년 모택동이 태어나고 자라고 그 나름의 혁명정신을 키워나간다. (무한, 장사 지역등이 혁명의 최일선 이었다는 점들은 단순한 우연이라기 보다 호남지방 사정과 19세기말 호남의 전통에 대한 연관성. 고추를 많이 먹는다 는 사실에 비교해 분석한 점이 개성있고 재미있어 서두에 넣으면 관찮은 시작이 될 것 같았다)Ⅱ. 정치적 퍼스낼리티 의 형성1 어린시절: 체계적인 교육을 아직 받지 않았던 시기. 서당엘 다니며 글 읽는 정도만 깨쳤을 때. 다른 수업교재보다 삼국지 나 수호전 같은 대중소설을 읽었다. 특히 수호전 같은 경우는 제국주의 자체보다 그 자체의 부패상을 다루는 것으로 어린 모택동의 마음에 제국주의 라는 것의 개념을 형성해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그의 모친과 그의 종교가 불교였다는 사실도 중요한 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불교에서의 변증법적 요소{) 정·반·합에 의한 변화와 생성의 규칙이 변증법이다. 이 규칙은 확실히 정신의 활동에 먼저 적용된다. 우리는 어떤 것(예: 라디오)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닌 것(예: 손전등)을 생각하고 이 둘을 발전시켜 새로운 것(예: 손전등과 라디오의 결합체)를 생각해 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변증법은 자연에도 적용되는데, 하나의 식물(정)이 병충해의 고통(반)을 이기고 더 훌륭한 품 종으로 진화하는 것(합)이 그것의 한 예이다.가 학창시절부터 대립된 것의 통합이란 관점에서 사고하는 그의 경향 설명이 가능해진다.2 장사에서의 학찰시절: 사촌을 통해 읽은 신문을 통해 동맹회 강령을 알게되고 흥분해 그 기사에 대해 나름대로 학교벽보판에 붙이 된 이들이 도로에 널려있는 것을 보고 일련의 혁명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혁명의식을 안고 혁명완수에 도움이 되고자 입대를 한다. 이 군대생활의 경험이 어린 모택동에 있어서 갖는 의미를 중국에 있어서 군이라는 것이 정치권력 잡는 관건이란 결론에 이르렀다고 에미쇼는 주장했다.그러나 S.슈람의 생각은 모택동이 에미쇼의 말대로 그러한 사상을 가지게 된 시기는 긴 기간동안 무정부 상태로 군벌들 간의 분할 자행되던 혼란 시기를 통해서 였을 것이라고 고쳤으나 아마 모택동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는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 누구의 추측도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개인적인 내 생각은 모택동이 군대에서 신문을 사 읽으며 여전히 혁명에 대한 관심과 사회주의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였고 그가 보아오는 것이 군대의 계단식 서열과 제도였으므로 후에 그가 체육교육의 중심목표는 군대식의 영웅적 자질을 기르는 데 있다 라고 기술할 수 있었다고 본다.6개월간 군 생활을 끝내고 여러 학업을 체험하는 기간이 5년이 걸리는데 이시기를 모택동 스스로는 중요했던 시기라 한다. 그러나 뚜렷한 진로에 대한 의식없이 5년이나 여러 학교를 전전하고 뚜렷한 혁명성은 지니고 있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았던 점 등은 방황의 시기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모택동은 이시기에 광고를 통해 국가의 장래에 대해 자신과 의견을 나눌 친구를 찾고 모택동의 의견만 듣고 사라진 이립삼을 만나게 된다. 이에대해 모택동은 우리 둘 간의 우의 관계는 언제나 맺어지지 않았다 라고 일축했다. 후에 이립삼은 모택동과 정치적으로 다른 사상을 지녀 자주 부딪힌다.이시기의 중요한 스승으로는 윤리학 강의한 양창제에게서 동. 서양 사상 근본적으로 결합된 것이라 배운다. 이에 대해 알기위해 중국의 붉은별 175페이지를 참고했는데 그 당시 자신의 마음속에는 자유주의와 민주적인 개혁주의, 공상적인 사회주의 사상이 기묘하게 혼합되어 있었고, 19세기식 민주주의와 공상적 사회 개혁의에 대해 다소 막연한 열정 품었으나 반군국, 반제국 주의적 입장이 뚜렷해졌다. 라고 표현해 놓았다.또한 진보적 태도를 행한 그의 성장을 도와준 것은 제일 사법시절은사인 서특립을 들었다. 그러나 스스로 1918년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정치적 입장을 지닌 학생이긴 하나 단순한 시골 학생이라 기술 했다.3 5.4 학생 운동 때: 이대교를 통해 자신의 생각 급진적으로 변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 높아졌다고 한다. 또한 막스주의로 기우는 급속적 성장 시기라 표현했다. 그러나 이대교와 모택동에 의한 막스주의에 대한 해석은 레닌과 달리 중국의 위엄과 세계에 중국이 기여한 위대함을 단순히 반 제국주의적 선전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가치로서 간주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 는 모택동의 사상 이 자주 변하고 불확실한 상태였다. 1919년여름 동안의 정치적 활동이 그의 사상을 확고히 한다고 전한다. 프랑스 유학{)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학생들을 유학 보내던 제도. 3-4명으로 구성된 학생들이 비행기 값만을 가지고 프랑스 등지로 유학. 한명의 뛰어난 학생만 학업을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를 뒷바라 지. 나중에 반대로 학업을 마친 학생이 나머지 학생들을 책임지는 형태.가는 친구들을 전송 하기 위해 상해에 갔다오는 길에 중국의 옛 고장을 방문하며 많은 것 느낀다. (잠시 재미있는 부분은 프랑스 유학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해 모택동 스스로는 자신이 조국에 대한 것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조국에 남은 것이라고 했으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 설명에 의하면 모택동은 유학에 대해 고민했으나 외국어에 자신이 없고 외국에서 당황할 것을 두려워 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즐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던 모택동의 대범함, 과감함 과는 사뭇다른 그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고, 그말이 거짓이라면 모택동을 무조건 추켜세워 주는 사람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다. 추종자가 많은 만큼 그에게서 흠을 만들어 내려이다.)5.4 운동이후 「상강평론」 이란 호남학생기관지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훗날 모택동은 이러한 활동을 자신의 사상과 활동에서 보여지는 바를 이미 그 학생시절 모든 근본적 생각을 발전 시켰다는 것의 증명을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이에 대한 S.슈람의 분석에 있어서는 막스주의적 범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사실에 동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모택동 그가 모든 근본적 생각의 발생이 군대에서가 아니라 기관지 편집이라는 문화적 운동의 산실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의 강조를 통해 강력한 군대적 혁명보다 이론으로서의 문화운동에도 동참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싶어 한 것 같다. 1920년 막스주의자가 되었다는 그의 인생의 새로운 국면은 전체 중국 상황이 발전되는 새로운 단계와 일치하는 것이라는 사실! 왜냐면 1920-1겨울사이 행해졌던 모택동의 활동이 1921년 6월 중공당 창당위한 준비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Ⅲ. 정치적인 입장들중국의 붉은별 에서는 1921년경의 러시아 사태에 대해 모택동은 많은 것을 알아내고 중국어로 씌여진 공산주의 관계문헌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특히 막스의「공산당 선언」, 카우츠키의「계급투쟁」, 키르컵「사회주의사」를 읽고 막스주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해석 받아들인후 믿음의 흔들림이 사라지고 스스로 막스주의자라 생각했다고 한다. 이시기 중국은 막스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공산당을 조직하게 되는데 여기서 모택동도 이들과 함께 길을 걷는다. 1921년 모택동이 한 일중에 흥미로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인들 후원으로 중국 Y.M.C.A지도자 들에 의해 대규모로 시작된 대중교육운동 에서의 노력이다. 혁명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면에서 의외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의 혁명이 결국 인민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드는 과정중의 하나라는 전제를 둘때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한편, 황애, 방인전(무정부 사상 가진 사람들) 이 처형된데 대해 조항척 반대운동하며 노동조합을 지지하고 파업을 지도한다. 이시기는 모택동이 사상전개되는 주변 상황들 설명이 훨씬많다. 국공합작 이야기도 이때쯤 등장한다. 중국의 붉은별 에서는 여기서 진독수 와의 입장차이가 나타난다고 나와있다. 장개석이 반혁명을 일으키고 상해 공산당을 공격할 때 진독수는 무한의 국민당에 대해 계속 자제하고 양보하는 입장으로 우경화한 기회주의적 소 부르주아 정책에 따른다고 나타난다. 모택동은 농민들이 지주에 대한 계급투쟁에서 더 철저한 조직과 무장을 갖추었더라면 소비에트 조직은 전국적으로 더 빨리 훨씬 강력한 발전을 이룩했을 것이라는 자신의 농민 정책에 대한 의견을 보였다. 농촌의 도시 포위 전략 이라는 그의 주된 사상이 나타나는 대목이기도 하다.모택동에 있어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입장 중 하나가 토지에 대한 생각 일 것이다. 중공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반혁명 주의자들 소유 토지몰수, 정치적 몰수의 원칙 지키면서 책임을 지주에게 돌릴 수 있도록 결의 수정, 모든 토지의 몰수. 라는 세가지 견해가 대두 되었는데 모택동은 가장 마지막 의견에 동조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에 대해 반대하자 무리하게 주장을 하지않은채 달리 찬성, 반대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현실적, 타협적 성격도 있다는 사실 발견. 이 토지제도에 대한 의견 나눈 이후 좌경적 운동에 동참. 이는 8.7긴급회의 이후 모든지주의 토지몰수를 단호히 주장, 국민당은 대중에 호소 하기 위한 효과적 방편 될 수 없다. 라는 그의 확실한 의견 내놓는다. 이는 구추백의 다른종류의 좌경적 모험(토지는 대지주 것만 몰수) 과 대립한다.그러나 모택동은 이주장을 한 뒤 스스로 고립상태를 느끼고 새로운 농지정책을 채택했다. 토지정책 때문에 홍군이 지나는 곳의 주민들은 그들은 반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택동의 자의적이고 비현실적인 농지 분배 때문이었다. 정강산 초기동안 모든 토지를 몰수해 분배했으나 이는 조금의 토지라도 가지고 있는 농민이 그것에 집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 토지가 공동 작업장에 귀속된다면 비록 나중에 돌아오는 득이 기름지더라도 그의 손실을.
    사회과학| 2003.11.28| 5페이지| 1,000원| 조회(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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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경제] 신중국 대장정 8억인의 농촌-부를 향한 엑소더스
    신중국 대장정, 8억인의 농촌-부를향한엑소더스한중 수교10주년 기념으로 KBS에서 제작한 특별 다큐. 그 소제목은 신 중국대장정 8억인의 농촌-부를 향한 엑소더스 .제목만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국경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대충 예상이 가능하다.다큐 첫 장면은 중국의 초등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노래를 부르고 그중 한 학생에게 하는 인터뷰이다. 호미를 들고 호박을 딴다 는 내용의 동요라는 학생의 말을 시작으로 부를 가지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비춰진다.처음 취재진은 난시롱에서 버스를 타는 농민들을 따라간다. 낡은 버스 안에서 재봉기를 파는 두 남자를 발견했고 그들은 개혁. 개방 이전의 공장생활보다 조금이긴 하나 재봉기를 팔며 훨씬 나은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이어 방문한 롱헌진 에서는 몇년전까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으나 지금은 특목 작물인 과일재배와 양계업 등으로 랑칸시에서 잘사는 농촌에 들어간다고 했다. 특히 이 지역의 젊은 농업인 리밍푸(27세)는 농사만으로는 돌파구가 없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작물을 연구해 부농이 되었다. 사상과 정책적으로 모두 보수적이었던 개혁.개방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토지 사용권이 농민의 것이 되어 그 이전과는 다른 경제 활동을 생각하며 돈이 되는일에 아이디어와 노력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다.농촌이라고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경제활동에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후난성 인후현의 한마을에서는 공업특구가 만들어 지기도 한다. 자동차 정비업 이라는 중점사업이 생기고 정부는 거기에 대해 농민들의 창업을 지원했다. 농업만이 아닌 새로운 기술로 창업을 지원하는 형태의 농업 발전 정책은 농사만으로 생계가 어려웠던 농촌인에게 또다른 희망을 안겨다 주는 듯 했다.또한 농촌의 변화는 향,진 기업의 탄생 이었다. 인후현의 한마을에서는 농민들이 오리를 가공해 판다는 아이디어를 내서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오리를 길러 판매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가공한 오리를 팔아 이익을 남긴다는 것, 오리를 가공하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등의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이익들까지.. 이런 향,진 기업이 농민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중국의 농촌에 대한 개혁, 개방은 정책적 변화뿐만 아니라 농촌경제를 살찌우게 하고 열심히 일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돈을 벌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다 주는 긍정정 영향을 가져왔다.하지만 개혁, 개방이 농촌에 꿈과 희망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인후현에서 한시간 정도 구석으로 들어가면 란산현이 나오는데 이곳의 한 초등학교를 취재진이 찾아갔다.전형적인 농촌마을인 이곳엔 개혁, 개방 이후 학비지원이 끊기고 제대로된 칠판, 분필하나 없는 초라한 학교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주민들의 1년소득은 1000위안에 못미치는데 학비는 1년100위안이었으므로 학비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건 당연한 일 같았다.그러나 초등학교 과정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역의 주민들이 있는가 하면 린우현의 제1중학교 에서는 중국의WTO가입 으로 수업방식의 변화를 가진다며 영어학습에 열심히 였고, 성에서 중점 지원한다는 한 고등학교에서는 농민들의 1년 수입과 맞먹는 1000위안의 학비를 내고 우수학생들이 기숙사생활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평등하게 비슷한 수준의 대중교육을 외치던 시대가 가고 학업조차 경제적 능력에 의해 차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그러한 예는 교육뿐만 아니라 여가 생활에서도 나타났다.광시성의 구이린은 세계적 관광지로 계발된 지역인데 여기에 여가를 즐기러온 젊은 이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저 조그마한 사업을 한다고 소개한 그들은 1인당 1200위안(농민들1년 수입을 웃도는!) 하는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경제개방이 젊은 부자를 양성해 내고 반대로 극빈자도 만들어 낸 것이다.
    경영/경제| 2003.11.28| 2페이지| 1,000원| 조회(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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