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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고대사] 연개소문 평가A좋아요
    淵蓋蘇文 評傳-목차Ⅰ 서론Ⅱ 본론1. 연개소문의 출생과 성장2. 쿠테타 그리고 정권 장악3. 연개소문의 대당정책 그리고 당과의 전쟁4.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 멸망Ⅲ 결론Ⅳ 참고자료학과: 사학과학번:2001312058 이름: 여은정제출일: 2003.11.28서론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란 가정을 해보게 된다. 방대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우리의 땅이 저 멀리 만주에까지 미쳤을 텐 데란 생각과 함께. 그러나 아쉽게도 668년 고구려는 당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멸망과 관련되어 자주 거론되는 인물은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의 사후 그의 아들들의 내분 때문에 수차례의 당과의 전쟁에도 끄덕 않던 고구려는 너무 쉽게 붕괴해버렸다. 연개소문의 아들들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연개소문집권이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개소문이 집권했을 당시에 고구려는 당의 모든 침략을 막아내었다는 것이다.중국 역사에 貞觀의 治로 불렸던 당 태종도 어쩔 수 없이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게 만들었던 연개소문. 그는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이었는가라는 물음에 기존의 사료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중국의 기록들과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로써, 기존의 몇몇 연구들은 중국의 사료와 삼국사기를 전면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흥미로운 것은 연개소문은 중국의 사료를 포함하여 중국의 지방희극과 경극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경극에서 그려진 연개소문은 하늘을 나르는 飛刀를 들고 이민족을 표시하는 高旗를 등에 매고 좌 청룡 우 백호라는 방위에 따라 고구려를 상징하는 청룡포를 입고 있다. 또한 그는 살기가 가득한 붉은 수염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의 푸른 빛은 위엄이 넘치지만 동시에 잔인함과 사악함을 상징하고 있다. 중국의 경극에서 묘사된 연개소문의 모습에서도 엿보이듯이, 중국의 입장에서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패배에서는 연개소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쿠테타와 려-당전쟁 665년 그의 죽음까지를 다루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언급된 것들을 종합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인물의 평가를 내려보고자 한다.본문1. 연개소문의 출생과 성장삼국사기에 나타난 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이 극히 미미한 것이다.蓋蘇文【或云蓋金】,姓泉氏, 自云生水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개소문은【혹은개금】성은 천씨로, 스스로 물에서 나왔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그의 풍채는 위엄이 있어서 영웅다웠고, 성품은 호탕하며 기백이 있어서 호걸다웠다.삼국사기에 연개소문의 성이 泉씨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는 남생의 묘지석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당고조 李淵의 이름 가운데 연 자가 있어 그 이름자를 피하여 당나라 사람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원래 개소문의 성은 淵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사료로 그의 출생과 성장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중국의 민담소설에 『갓쉰둥이전』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한글로 번안되어 인기가 높았던 규방소설이었다. 『갓쉰둥이전』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재상인 연국혜는 오십이 되어 아들을 낳아 이름도 갓 쉰둥이라 지었다. 그런데 그 아이와 15년간 떨어져 살면 액운을 피할 수 있다는 도사의 말에 따라 연국혜는 갓 쉰둥이를 내다 버리게 되었다. 이를 유씨 성을 가진 부자가 주워다 키우게 되었고 그 집의 가노가 된다. 나무를 하러 갔다가 산에서 만난 도인의 도움으로 갓 쉰둥이는 권법과 검법 천문과 지리의 묘리를 터득해 나갔다. 그러다 유씨 부자의 막내딸 영희와 정분을 통하게 되었고 그녀의 도움으로 달딸국으로 가서 왕의 가노가 되었다. 그의 목적은 달딸국을 치는 것이었다. 갓쉰둥이는 달딸국 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이를 시기한 둘째 왕자가 그를 모함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를 몰래 사모하던 공주가 그를 풀어주었고 달딸국을 탈출한 갓 쉰둥이는 영희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와 아버지의 직을 세습받아 재상에 지위에 올 고구려 침공에 나설 당시 반대하며 참전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신채호는 ‘해상잡록‘에서 발췌하였는데 이정이 연개소문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때문에 그를 칠 수 없어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해상잡록(海上雜錄)과 김해병서(金海兵書)가 연개소문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병법책으로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관리들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려주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사실과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는 병술(兵術)에 능통한 자였음을 알 수 있다.2. 쿠테타 그리고 정권 장악삼국사기에서는 연개소문의 집안은 대대로(大對盧)직을 세습하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자리를 이으려고 하였으나 국인(國人)들이 그를 미워하여 잇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대대로의 임기는 3년이었으나 이것이 어느 순간에서부터 세습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 집안의 권력의 독주를 의미하며 이것은 고구려 후기의 귀족연립체제 아래에서 결코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은 연개소문 집안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그가 잔인하고 거칠다는 것을 핑계로 반대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청하자 그를 가련하게 여겨 그 직위를 계승토록 하였다.직위를 계승한 개소문은 곧 본심을 드러내었고 귀족들과 왕은 그를 죽이기를 몰래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은 누설되어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하여 대신들과 왕을 죽이게 된다. 그런데 개소문의 쿠테타가 오로지 그의 힘으로만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하기 어렵다. 이것은 그의 지지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지지세력은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영류왕(榮留王)의 대당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진 세력이다. 영류왕이 즉위하고 그가 펼친 정책은 당이 수에 대한 전공비인 경관을 헐도록 허락하고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헌상하는 등의 대당유화책이었다. 이것은 당과의 전쟁의 위기를 탈피하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원근으로 호령하며 정사를 전제(專制)하여 그 위엄을 떨쳤다. 삼국사기 ‘개소문전‘에 묘사된 그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而履之, 出行, 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 不避坑谷. -몸에는 칼 다섯 자루를 차고 있어 좌우에서 감히 그를 쳐다 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가 말을 타고 내릴 때에 귀인이나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한 후 이를 밟고 말 위에 오르내렸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군사들을 깔아놓아 발판으로 삼으며 앞에서 인도하는 자는 큰소리로 행렬을 알리게 하니 구덩이나 골짜기로 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이러한 사료에 따라 연개소문은 권위적이고 잔인하며,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아려져 왔다. 그러나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찬 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660년경에 완성된 翰苑이라는 책에는 고구려의 풍습을 설명한 부분이 있다.左佩?面 右佩五子刀 -왼편에는 돌을 차고 우편에는 칼 다섯자루를 찼다.이것을 보면 고구려의 풍습이 칼을 차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단순히 이것은 연개소문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가 말을 내리고 오를 때의 그의 행동은 거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그의 부하들이 그의 권위를 위해 그가 말에 오르내릴 때에 스스로 자신의 등을 밟게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연개소문이 키가 작았다고 가정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말을 타고 내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오르고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그리고 인도하는 자가 큰소리로 외쳐 그의 행렬을 알리게 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대감들의 행차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쿠테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은 자신의 신변의 보호를 위해 이러한 행동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3. 연개소문의 대당정책 그리고 당과의 전쟁한편 당 태종(太宗)은 자신에게 복속하지 않는 이민족들을 무력으로 하나 둘씩 평정해 나해 갈 수 없는 성이었다. 수나라의 대군도 함락시키지 못한 견고한 요동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당나라는 강력한 攻城장비들을 준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요동성은 함락되었고 당군은 식량을 확보 할 수 있었다. 한편 당의 해군은 고구려의 수군기지인 비사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고구려수군의 반격을 받아 압록강 방면으로는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동성을 점령한 당군은 안시성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당군은 3개월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되었으며 속전속결을 내세웠던 당태종의 계획은 연개소문에 의하여 빗나가게 되었다. 음력 9월이 다가오고 요동이 추워지기 시작하고 식량이 떨어져가자 태종은 할 수 없이 퇴각을 명한다.) 이 때 당군의 퇴각로는 늪지대였던 요하 하구였는데 이 까닭은 고구려군이 요하 중상류 지역에서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군은 추격해 오는 고구려군을 피해 도망하느라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았다. 당태종 자신도 장작을 매는 일을 해야 했을 정도로 급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당태종은 이후 병을 얻어 649년 죽고 말았다. 그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때문에 당나라는 이후 한동안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자, 당은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그것은 옛 백제 땅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의 남쪽과 북쪽을 동시에 공략하는 것이었다. 선대의 야욕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고종은 661년 다시 고구려를 쳐들어 가게 된다. 당군은 소정방, 방효태, 계필하력, 임아상 등이 이끄는 백만 대군으로 총공격해 왔는데 661년 겨울에 쳐들어온 방효태는 그의 13명의 아들과 함께 수십만의 대군으로 장안성 부근까지 쳐들어 왔으나 연개소문은 사수에서 그들을 몰살시켰다. 고구려의 사수전투의 승리는 전쟁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고 당은 전군의 퇴각을 명령했다. 이로써 당은 연개소문 집권 시의 전쟁에 모두 패배하게 되었던 것이다.여-당 전쟁과 관련하여 연개소문의 지휘 내용이
    인문/어학| 2003.11.30| 9페이지| 1,500원| 조회(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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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달평전 평가A좋아요
    Ⅰ.들어가며온달은 위인전과 동화책에 수시로 등장하는 우리에겐 친숙한 인물이다. 가난하고 바보였던 온달이 평강공주를 만나 훌륭한 장수가 되어 결국은 왕에게 인정을 받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전사한 이 라는 것은 동화책을 보고 자란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온달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필 하는 이유는 공주와의 로맨스 그리고 가난한 바보온달의 인생 역전 성공기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보라고 놀림받던 평민 출신이 위대한 장군이 된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온달이라는 사람이 설화 속의 가공인물이 아닌 역사 속에 존재했던 실제인물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더해주고 있다. 이러한 바보 온달의 인생 역전 성공기는 현대에서도 ‘온달 컴플렉스’)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본문에서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온달전에 기초하여 온달에 관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어 각색한 온달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위한 배경과 온달전에 담긴 의미도 함께 제시할 것이다.Ⅱ.본문-온달이야기날이 밝자, 온달은 오늘도 먹을 것을 구하러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나가기 전 온달은 늙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말한다. “ 어머니! 곧 먹을 것을 구해 올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눈 먼 늙은 노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다녀오라는 손짓을 한다. 덧붙여 몸 조심하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온달의 발걸음이 멀어진다. 따스한 아침 햇살을 쬐던 노모는 문득 부귀영화를 누렸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벌써 20 여 년 전의 일이다. 노모는 당시 젊은 고위 귀족의 아내였다. 어린 온달을 안고 정원을 거닐던 그녀는 갑자기 노비의 숨가쁜 소식을 들었다. “세군(細群)이 녹군(鹿群)에 패했습니다. 지금 세군의 자식들을 잡아 죽인다고 합니다. 빨리 몸을 피하셔야 겠습니다.” 깜짝 놀란 그녀는 부랴부랴 보따리를 챙겨 여종 하나를 데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언덕을 넘으려는데 뒤에서 웅성대는 군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놀란 그녀는 어린 온달을 안고 뛰기 시작했다 히죽거리며 웃어 넘겨버렸다. 아이들은 그런 그를 더욱 놀리며 ‘바보 온달~ 바보온달~’하였다. 몇몇 저자거리를 다니면서 이렇게 온달은 유명해졌고 그의 명성은 고구려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온달의 노모는 마을 외딴 곳에 허름한 초가 하나를 얻었다. 여기에서 온달이 밥을 빌어다가 노모를 모시고 산지도 벌써 십 여 년이 다 되어가는 것이다.“여기. 아무도 안 계시는지요?”낭랑한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모는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뉘시 온 지? 여기는 그대와 같은 분이 찾아 올 곳이 아닐 터인데..”“ 여기가 온달님의 거처가 맞는지요? ”“그러하오만...”“ 저는 온달님을 사모하고 있는 처녀이옵니다. 저를 며느리로 받아주시어요.”“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에게서 꽃 다운 향기가 나고, 그대의 손이 솜과 같이 부드러운 것을 보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데 어찌 하여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주림을 참지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 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공주는 비록 눈 먼 노모가 남루하고 초라하나 그녀에게서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서는 공손히 되물었다.“그럼 온달님을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겠습니까?”“저기 버드나무가 서있는 산 밑에서 온달이 오는 것이 보일 터이니 그리로 가보십시오.”공주는 부랴부랴 버드나무가 서 있는 산 밑으로 갔다. 저기 망태기를 지고 오는 건장한 사내가 보였으니 공주는 한눈에 그가 온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 온달님이시군요. 저는 온달님을 사모하는 처녀입니다. 온달님을 낭군님으로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갑자기 나타난 아리따운 처녀가 자신에게 시집을 오겠다니 온달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에게 “이것은 어린 여인의 옳은 행실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이 아닌 여우 귀신일 것이다. 내 곁으로 오지 마시오!” 라고 하며 가버렸다. 이에 공주는 홀로 그 뒤를 따라가 싸리 대문 아래서 자고 다음날 아침 다시 들어가 온달 모자에게 자세한 말을 하. 아니면 나중에 그런 것과 바꾸십시오.”온달이 그녀의 말대로 하였고 공주가 부지런히 말을 먹여 말은 날마다 살이 쪄서 건장해졌다. 더불어 공주는 온달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공주는 궁에서 알고 지냈던 고수를 몰래 초빙하여 온달을 가르치게 하였다. 온달은 그녀의 신분이 궁금했지만 그녀가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알고 묻지 않았다.몇 해가 지나고 공주는 온달을 불러 말했다.“ 나라에서 해마다 봄 3월 3일이 되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서 사냥을 하여 잡은 산돼지와 사슴 등으로 하늘과 산천신에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임금님도 사냥을 오시 며 여러 신하와 5부의 장수들이 모두 임금님을 시종하게 됩니다. 여기에 참가하여 임금님 의 눈에 드셔야 합니다.”온달을 꼭 그리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달은 그가 지금까지 기르던 말을 타고 나가 늘 다른 이보다 앞서 달리고 또한 누구보다 많은 사냥감을 잡았다. 왕은 그를 불러 놓고 이름을 물었다. 온달이 그의 이름을 말하자 왕은 크게 놀라며 기특하게 여겼다.‘바보 온달이 이리도 훌륭했단 말인가. 나중에 큰 재목이 되겠군.’ 왕은 온달을 눈여겨 두었다. 이 때에 후주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을 침범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배산의 평원에서 적을 맞았다. 이에 온달이 선봉이 되어 질풍같이 달려나가 싸워 적병 수십 명을 베자, 모든 군사들도 그 승세를 틈타서 분전하여 크게 이겼다. 이 전투의 승리에서 온달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도 가상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 과연 나의 사위 같구나.” 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절을 갖추어 그를 맞아들이고 대형의 벼슬을 내렸다. 그제서야 온달은 공주의 신분을 눈치챘고 왕은 온달부부를 불러 잔치를 열도록 했다. 이 후 왕의 온달에 대한 총애가 두터워졌고 온달의 위엄과 권위가 날로 번성하였다.평원왕에 이어 양강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왕에게 아뢰기를“ 신라는 우리 한 수 북쪽의 땅을 침탈하여 저희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백성들은 원통하고 한스러워하며 아직도 부모의 나라전의 이야기의 해석김부식이 지은「三國史記」권 45 列傳 온달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 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一斗粟猶可?,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其勤, 馬日肥且壯,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 가질 수 있는 계층을 극히 한정함으로써 최고 신분층의 상징, 권위와 위엄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그런데 온달의 설화의 내용을 보면 황금이 더 이상 측정한 신분층의 향유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의 금팔찌를 팔아서 저책과 전답은 물론 노비와 우마까지 마련했다는 이야기는 황금이 당시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금이 교환가치를 갖는 재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의 수요층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황금의 수요층은 낮은 신분층 중에서 부를 축적한 이들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부민층의 지속적인 성장에 따라 황금 향유의 신분적 성격은 서서히 붕괴되어 갔을 것이다. 온달의 설화를 통하여 6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이 부를 축적하며 성장하는 부민층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또한 시장에서 물건이 자유롭게 매매되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 후기에는 돈이 있으면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사회였다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시장의 발달은 더불어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처럼 온달전에는 설화라고 해서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로만 생각하기에는 아까운 고구려 사회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자리잡고 있다.*후반부- 온달의 출세배경당시 고구려 사회에서는 신분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고정적인 신분제도 내에서도 신분상승과 하강의 변화 통로는 어느 사회나 존재했다. 그것은 높은 신분과 결혼하는 것과 국가에 공을 세우는 것으로, 온달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에는 평민인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고 또 공훈을 세워서 대형의 벼슬에까지 오른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온달의 공적이 아무리 두드러졌다 하더라도 대형이라는 관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신분의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견지해 볼 필요가 있다.때문에 온달의 출신은 몰락 귀족가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안에는 백제 유민들이 쓴 「백제본기」가 있는데 6년(544)다.
    인문/어학| 2003.10.21| 7페이지| 1,500원| 조회(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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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대혁명 감상문 평가A좋아요
    『프랑스대혁명』감상문2001312058 사학과 여은정1.역사에서 영화로.역사를 영화화 한다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역사에는 완전한 진리란 없고 단지 ‘가설(假說)’만이 존재한다. 감독은 그 여러 가지 가설 중에 하나를 골라 영화에 투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물을 감상할 때에는 비판적인 안목이 요구된다.프랑스 혁명은 어떤 혁명이었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시민혁명인가? 아니면 부르주아들의 권익을 신장시킨 부르주아 혁명이었나. 전자라는 설이 우세한 가운데.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프랑스 혁명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하다.프랑스 혁명 200주년이었던 1989년에 제작된 'French Revolution'은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자국의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고하고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대사는 영어였고, 배우들도 호주, 캐나다 출신 배우들이었다. 예술영화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영화보다는 할리우드식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시대적 대세에 맞추어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내게 어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영화는 전개에 있어서 사건위주로 진행되었다. 물론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영화에 담을 수는 없겠지만 불분명한 인과관계와 수 많은 등장인물 덕에 혼란을 가져왔던 것 같다.이 영화에 대한 불만해 대해서 말하자면, 먼저 전개에 있어 프랑스 혁명 배경에 대하여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단순히 프랑스 왕실재정의 적자누적, 이를 시민들에게서 만회하려는 국왕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앙시엥레즘의 모순이 누적된 결과 시민들이 어떻게 착취당하고 생활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묘사하고 있지 않았다. 빵을 요구하는 여자들의 시위가 그다지 어필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빵을 요구하는 절실함이 없었다. 그에 대한 루이 16세의 대답 “좋소. 모든 파리시민들에게 빵을 주겠소.” 란 한 마디에 여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 또한 어색하기만 했다. 루이 16세가 빵공장 주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영화 중에서 신하가 시민들이 군대를 조직하여 바스티유 감옥에 쳐들어갔다는 보고를 루이 16세에 전하는 장면이 있다. 루이 16세가 “반란인가?” 라고 묻자 신하가 “아닙니다.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배웠었던 공통사회(상)의 책의 내용과 같지 않은가. 정말 루이 16세와 신화와 이러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영화가 역사를 꼼꼼히 참고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장면 같았다.2. 프랑스 혁명과 인물들영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루이 16세, 그의 부인 마리 앙뜨와네뜨. 당통, 카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마라 등등.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물량공세 덕에 사람하나당 이름하나 외우는 게 이렇게 어려운 적은 처음이었다. 이 사람이 누구라고 자막이라도 한번씩만 넣어줬으면 좋으련만. 영화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 이 영화에도 주인공이 있긴 한걸까.루이 16세부터 말하자면, 그는 영화에서 매우 무기력한 왕이었다. 파리시민들에게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귀족과 평민의 신분차를 거들먹거리는 인물이었다. 그의 부인 마리앙뜨와네트. 영화에서는 그녀의 사치 때문에 왕실재정이 바닥이 났다는 것이 누명 일런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할 정도로 그녀는 사치스러운 모습을 별로 보이지 않았고, 앞서 루이16세와 신하와의 대화에 이어 시민들이 빵을 달라는 요구에 그녀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텐데.” 라고 말했다던 일화가 등장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는 그다지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을 보필하는 왕비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왕실의 위기를 친정인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 결국은 그녀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지만 적어도 남편인 루이 16세보다는 분별있고 지혜로워 보이는 여인이었다. 파리의 시민들도 왕비를‘오스트리아의 첩자’라고 비난하다가도 그녀가 군중 앞에 살포시 머리를 숙이자 시민들은 그녀를 왕비로 인정하는 장면은 그녀의 기품이 시민들을 압도한 것인지 아니면 그때까지만 해도 시민들의 전제왕정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그녀를 왕비로 인정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왕실가족의 탈출미수사건에 대해서는 영화가 너무 많은 사건을 전개해나감에 있어서의 부담감 때문인지 과감하게 삭제해 버린 듯 하다. 왕실일가의 탈출미수사건이 있었다면 영화는 좀더 긴박감이 넘치지 않았을까. 만약 그들이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지금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는 것이지만 만약 그들이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얻어 프랑스로 돌아와 시민들과 전쟁을 치루었다면 프랑스의 혁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앙뜨와네트는 군중의 미움을 더욱 사게 되어 기요틴에서 목숨을 잃는다. 영화에서 보여지다시피, 루이 16세가 자신이 디자인한 칼날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이제 혁명가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줄 차례인 것 같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던(어디까지나 자의적인 해석임) 당통은 금융업계 부르주아 출신으로 실재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의 부의 축적이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비춰졌다. 감독이 그를 특별히 눈여겨 보았음에 틀림없었다. 당통이 영화에서처럼 소신있는 자세, 불의에 저항하는 투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 지녔다고 묘사되고 있지만 당통의 이런 모습은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없잖아 있다. 영화에서 감독이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인물 당통. 당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원인에는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수정주의적 입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공포정치를 펼쳤던 로베스피에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한다. 수정주의적 입장이 등장한 이후에 내가 세계사를 배운 까닭에 나의 기억에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기억은 부정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역사사조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미화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그러면 차가운 피를 지닌 공포의 인물로 지목된 자, 로베스피에르의 영화 속 그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 독재자로 불리웠지만, 혁명에 대한 열의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로베스피에르. 그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동지였던 카밀과 당통을 혁명의 걸림돌로 지목, 처형하는 과정에 있어서 영화에서 그려진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냉혈한’의 모습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와서 그는 혁명에 대한 열의가 도를 지나쳐,권력에의 야욕 때문에 음모로 정적을 제거하는 타락한 정치가로 전락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혁명이라는 보기 좋은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거의 광적이었던 그의 권력에의 집착이 결국 그를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는 설정은 악인은 결국 행복한 결말을 가질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한 당통의 죽음은 숭고한 것이고, 반면에 독재자였으며, 공포정치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고, 인과응보라는 결과로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으로 매도되는 것은 한 순간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훌륭한 사람이 오늘에 와서는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철저히 외면당할 수 있다는 정치라는 구조가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독후감/창작| 2003.10.21| 3페이지| 1,000원| 조회(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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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에 비친 유럽 감상문 평가C아쉬워요
    을 읽고서2001312058 사학과 여은정▶역사를 바라보는 수정주의적 시각과의 신선한 만남지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들은 미국, 유럽 등의 서구사회지역이다. 이들 나라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고, 더불어 역사서술에 있어서도 비 서구 지역에 대한 암묵적 또는 표면적으로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적 서양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가한 책이 ‘거울에 비친 유럽’이었다. 책의 저자는 기존의 서양 유럽의 역사를 일그러진 거울들로 이루어진 유령의 집으로 표현함으로써, 공감을 이끌어 냈다.책은 총 10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으며, 서양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의 전통적 역사관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다.‘야만의 거울’에서는 유럽인-사실 유럽인에 대한 구분이 모호함에도 불구하고-과 비유럽인의 구분에 대한 왜곡을 보여주고 있다. 서양고대문명의 기원이 근동에서 출발하였고, 혼혈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전통적 관점은 유럽의 발전과정 전체를 독특하고 우월한 기원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 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만들어낸 이미지로 ‘아시아의 야만인’과의 차별성을 두려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관점은 18세기말,19세기 초 유럽인들에 의해 문명인과 미개인 혹은 야만인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그리스는 자유로운데 반해 아시아는 전제적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전혀 평등을 지향하지 않았던 제한된 ‘민주주의 프로그램’에 불과했다..또한 로마제국에도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황제의 개인적 결정이 법으로 간주되던 제국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황제의 직접적 지배가 뒤섞여 있는 형태였다. 로마인들은 자기 자신에 갇혀 세계가 제국과 야만인들의 세계로 되어있다고 믿었고, 로마의 제국 경계 너머에는 야만, 추위, 공포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야만인에게 위임하였고 결국 로마는 그들의 멸시대상이었던 야만인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전통적 역사관에서 고전문화의 유산과 함께 ‘유럽적인 것’으로 특징짓고 잇는 두 번재 요소는 기독교이다. 초기 기독교의 성격과 현재 기독교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사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일대의 종교쇄신운동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도시에 반대한 농촌의 운동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헬레니즘 세계로 확장되는 동시에 그리스어로 표현되지 시작한다. 세 번째 단계는 제국의 정치권력과의 결탁의 역사이자 제국은 기독교를 ‘세속 정부와 함께하는 교회정부’로 만들었으며, 제국의 법령이 준수되도록 교회와 협력했다. 이 때쯤 되면 기독교의 다원적이고 공동체적 성격은 사라지고 일원적이고 개서화된 하나의 공동체로 탈바꿈 되었던 것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또 종교를 위시한 개념이 등장했다. 그것은 ‘이교도’로써 그들이 신봉하지 않는 종교를 믿는 자들은 모두 ‘이교도’가 되었고, 또한 기독교 내에서 그들이 공인했던 교리 이외의 것들은 모두 부정했다. ‘서기’ 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 시간과 역사가 창조되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것와 상징적인 것이 뒤섞인 새로운 공간개념도 생겨났다. 모든 일련의 생활규범 또한 기독교적 규범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변화는 도시의 지배계층에 한정되었고, 농촌에서는 교회에서 ‘이교’로 지목받았던 것이 여전히 존속되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기독교로써 위협받고 있는 사회질서를 고수하기 위안 제국생명연장의 일환이었다. ‘기독교의 거울’에는 이러한 배경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전통적 역사서술에 따르면, 중세는 고대와 근대의 사이에 낀, 정체와 퇴보의 시기를 의미한다. 야만인으로 치부되던 이들이 중심이 된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들 야만인(프랑크족)은 로마의 발전된 문화 수용의 일환으로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야만인에서 로마인들로 ‘탈바꿈’ 하게 되었다. 로마인이 되려는 야만인의 노력은 고대의 보전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문자문화’의 영역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 교회는 라틴어를 독점하면서, 토착어를 견제 또는 대항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지배자는 ‘동등한 자들 가운데의 첫째’에서 ‘신에 의해 임명된 군주’라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군주권에 대해 신성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이들에 대한 지배는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사실 중세는 그다지 암흑의 시대가 아니었으며, 천년의 기간동안 유럽대륙의 인구가 두배내지 세배로 늘어났고, 작물들이 알프스 이북으로 확산됨으로써 도시가 번영했다는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시기의 일련의 문화적 혁명들은 농업생산발전을 기반으로 가능했던 것이었다. 중세가 암흑의 시기로 평가 된 것은 교회의 교육독점 때문이며, 한정된 신분을 가진 역사서술가 때문이었다. 금욕, 종교적 신성성을 중시하는 교회에서는 그들이 ‘이단’으로 여겼던 일반 민중들의 금욕적, 종교적이지 못한 생활은 그들의 서술범위가 아니었던 것이다.흔히 종교적 혼란시기라고 불리는 중세에서 커다란 종교적 사건 중 하나는 십자군원정이었다. 십자군의 명목은 성전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것이었지만, 실재로 십자군을 지휘한 것은 교회만이 아니었으며 귀족과 성직자 간의 동맹이 그 속에 내재하고 있었다. ‘정신적 이해와 물질적 이해의 합치’가 이루어졌고 이들은 “이승과 저승 모두의” 막대한 부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적 배타성에 기인한 유럽사회의 폐쇄성은 십자군 전쟁과 같은 외부 뿐 아니라 내부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단들’을 고립시키고 탄압하려는 교회의 행동으로 얻은 영감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기독교는 도시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정되었고, 농촌에서는 아직도 ‘이교’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종교재판소는 이러한 민간, 내지는 토속적 신앙을 성적방종 또는 모종의 악마적 모습으로 꾸며 화형대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재판소에서의 이단의 증거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고 심한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으로 그것을 정당화 시켰다. 유럽의 ‘마녀사냥’이란 것도 ‘이교’를 제거한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학살이었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것만 남기겠다는, 마치 인간을 체에 걸러내는 듯한 이러한 모습은 분명 학살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유럽중세 후기의 페스트의 창궐은 유럽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대사건으로 유럽사회의 변화-봉건제의 쇠퇴-를 유도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각인된 자유에 대한 열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는 농노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지중해 무역으로 도시가 활성화, 경제적 번영을 누린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동시에 진행된 ‘종교개혁’은 기존의 부패한 카톨릭을 비판하는 것으로 산뜻하게 출발하였으나 결국은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종교적인 갈등 내지는 탄압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지중해 무역이 쇠퇴와 16세기의 절대주의 왕정의 등장은 새로운 항로의 개척을 야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견한 신대륙이라는 개념 자체도 어디까지나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의 발견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문명화 작업- 사실은 착취와 억압-을 전재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로 삼아 그들을 착취하였다. 또한 유럽인들이 가져온 외래질병은 그들을 철처하게 파괴시켰다. 그들의 삶과 문화를 미개의 것으로 간주해 버린 유럽인들의 자의적인 해석 때문에 수많은 인디언들은 목숨을 잃어갔었던 것이었다. 유럽에는 곧 문명인과 미개인의 구분은 인종차별주의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적 증명을 통한 정당성이 부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후감/창작| 2003.10.21| 3페이지| 1,000원| 조회(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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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과 극우반공체제
    한국전쟁과 극우반공체제사학과 2001312058 여은정1.머리말48년 5?10일 선거에 따라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보통선거제에 의하여 구성된 제헌 국회에 맞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극우반공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로, 청년반공단체의 정비강화를 위한 각종 청년 단체의 통합으로 대한 청년회 같은 단체가 만들어졌고, 둘째로 언론의 통제를 통해 언론이 비판 기능을 거의 완전히 봉쇄하였다. 그리고 49년 6월 5일에는 대한민국을 절대지지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해서 과거에 좌익단체에 들었거나 좌익운동한 사람을 모두 가입시켜 일정한 심사와 교육을 받게 만든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발족시켰다. 이러한 그의 조치는 1949년 중반기부터 세계적 규모로 구축되어가는 냉전 체제를 보다 철저히 다지기 위한 것이었고 하반기부터는 현실성 없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이러한 극우반공체제 속에 민중들은 생존권의 위협을 받았다. 당시 여러 반공단체에서는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기부금을 걷어 가거나, 여러 명목의 각종 공출과 이에 반항하면 협박, 구타 감금, 가택, 고문이 비일비재하였다.이러한 가운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반공을 외치며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던 이승만의 정책의 실은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군이 북한군에게 승리하는 것처럼 선전하였고, 대통령 자신은 대전에 피난을 가서 “우리 국군이 적을 반격하고 있으니 모든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동요하지 말 것이며, 대통령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킬 것”이라는 요지의 방송을 하였다. 서울시민들은 대통령의 방송을 믿었고, 이러한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평택 이남에서부터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들이 집단학살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형무소 수감자의 상황도 비슷하였다.)50년 8월 달까지 육상에서 우위를 점하던 북한군은 9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세는 역전되고 유엔군은아보고, 학살의 원인과 책임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중의 몇몇의 학살사건을 통해 드러난 이승만의 극우반공체제에 특징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 이후에 이승만 정권아래서의 극우반공체제에 대하여 함께 살펴볼 것이다.2.본문1>학살의 발생학살은 전투원 혹은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총기소지자로부터 비전투원 곧 민간인이 법적절차를 밟지 않고 살해된 것을 말한다. 학살은 크게 인민군, 빨치산, 좌익단체 소속원등 좌익세력이 주체가 되어 일어난 것과 군?경찰?우익청년단체?우익 인사 등 우익세력이 주체가 되어 일어난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우익세력에 의한 학살을 중점으로 다루기로 한다. 48년 4월 3일에 일어난 4?3 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이미 집단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으며,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제주도 지원부대로 떠날 예정이었던 여수주둔 14연대에서 지창수(池昌洙) 상사가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이 일어나, 짧은 기간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였다.그렇지만 본격적인 학살은 한국전쟁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일차적으로 이 조직은 법률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당국에서는 각 지역에 지정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과도하게 억지로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는 일이 많았다. 좌익을 근멸한다는 목표아래 해방공간에서 극우의 시각에서 좌파로 분류되는 단체의 소속원을 모두 가입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한국전쟁 당시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는데), 이런 집단학살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가담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것에 대한 예방수단으로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재로 점령지역에서 보도연맹 간부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민군에 의한 처단의 대상이 되었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 남로당원들은 정(正)당원으로 등록되지 않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예방수단’으로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며, 이러한 학살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2>학살의 원인과 책임①미군정의 정책-친일파 보호?육성과 테러의 방조미군정의 남한통치방식은 현상유지정책으로, 기존에 있던 친일 관료들과 경찰들을 임용하였다. 미군정은 친일경찰을 이용하여 미군정에 비판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여러 단체 또는 정치세력을 억압하였다. 극우세력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4개월 만에 간신히 통과시켰을 때, 딘 소장은 이것을 공포하기를 거부하였다.)이것은 미군정은 군?경이 포함된 친일파를 부분적으로라도 제거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군정이 친일파들을 활용한데에는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조선국사령부 군인들의 견해와 조언도 작용한 것이었고, 그렇게 작용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 간부들의 극우적 반공주의에 있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를 소련이나 북에서 사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미군정의 이러한 태도는 남한의 극우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특히 이승만은 그러한 모습이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이다.또 하나, 미군정은 좌익을 탄압하기 위해 미군정청관리나 검찰, 경찰이 테러에 관련된 많은 청년학생단체를 지원하고, 테러를 방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은 친일파를 친미파로 변모시켰고, 극우를 외치면 모두가 애국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탄생시켰고, 좌익세력은 극우단체에 의해 수많은 테러를 당했다. 또한 한국전쟁 시 노근리 학살사건과 같은 사건은 미국?미군의 한국인 인명경시 풍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미군정의 정책이 집단주민학살이 일어나는데 일차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②이승만?이승만 정부와 주민집단학살-한국전쟁 중의 이승만의 행동과 그의 내면세계이승만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의 주민집단학살, 보도연맹원집단학살, 제 11사단에 의한 주민제점은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배제하고 만든 대통령령이었다는 점이다. 이 법은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참혹할 학살사건이 이어날 소지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국회는 부역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인권유린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먼저 1950년 9월 17일 ‘부역행위특별처리법’과 ‘사형금지법’을 제안, 모두 국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정부는 이 두 법률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에 국회는 1950년 11월 23일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대한 특별조치령 중 개정법률안’을 심의하였다. 이 법률 또한 통과되었으나 역시 이승만은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1951년 1월 18일 다시 통과되어 결국 정부는 1월 30일에 이를 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그의 정권유지를 위한 인권유린은 그에겐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거창양민학살 재판 이전의 이승만의 담화에서 그는 아직까지도 국민을 기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국회와 국민의 여론이 비등해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7월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고 피의자인 오익경대령, 대대장 한동석 소령, 이종대 소위, 김종원은 각각 무기, 징역10년, 무죄, 징역3년형이 선고 되었으나 이승만은 이들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베풀어, 후에 이들은 진급을 거듭하여 출세길을 달렸다.또한 이승만은 미군정의 본보기를 받아 테러를 정치활동의 한 수단으로 인정하였고, 테러단체를 옹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테러의 습성화’를 불러와 군?경찰이 주민집단학살에 대하여 죄의식을 갖지 않게 하는 데에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이승만의 권력은 영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관계에서의 추종자들은 비굴한 노예적 아첨으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에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 바쳐 전과를 높이기 위하여 학살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주민집단학살이 권력 고위층의 태도나 정신상태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상관의 지시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다수 사회세력 및 정치적 반대세력을 궤멸?해체시킴으로써 이승만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직접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억압적인 국가기구인 군, 경찰, 정보기관 등이 이상 비대화하여 체제유지를 위한 충분한 물리적 기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편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이 정치적 책임문제로 당내 반대세력을 몰락시킴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를, 경제적으로는 자급족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형성시킬 수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일면적이고 외면적인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본질적 결과는 남북의 분단을 고착화 시키고 남북간의 이질화와 상방간의 적개심이 극대화 되는 구조를 형성시켰다는 것이다. 전쟁 후에 강화된 분단의식은 지배권력의 이념이 첨가되어 남한은 반공주의, 북한은 반미주의로 나타나게 된다.)1950년대 남한사회의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북진통일 운동이었다. 북진통일운동은 통일염원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미국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제 1조에서 명백히 북진통일을 배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북진통일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반통일론이었다. 멸공북진을 고창하는 분위기를 통해 북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감을 최대한 고조시켜 북과의 어떠한 형태로의 대화나 교류를 불가능하게끔 함으로서 분단고착을 공고히 하였다는 점에서 반공존의 공존논리였다.) 이와 같은 성격의 북진통일론은 흥분된 군중심리의 와중에서 한사람의 영도자 앞에 국가를 맡겨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이승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이승만이 국력을 크게 낭비하면서까지 북진통일을 부르짖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었다.)그리고 전쟁 중의 학살 또한 극우반공이데올로기, 극우반공체제의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게 하였다. 독설적인 현상이지만 학살이 가져다준 시효 없는 공포와 피해, 피해의식은 극우반공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회의식이나 가치관다.
    사회과학| 2003.10.21| 7페이지| 1,500원| 조회(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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