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지도의 원리나는 미래에 교수자가 되어 학습자에게 내용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교수자가 될 것이다.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부모님 세대의 학습열이 세계으뜸이다, 그로인해 교육은 사회로부터 변화를 요구 받아 왔고, 요즘은 교육계 전반이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교육이 세습화되고 있는 부작용이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그 무엇인가에 대한 법칙이 존재하며 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에서도 학습의 지도 원리가 있고 그 지도 원리를 내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 학생에게 교수 하느냐에 따라 학습지도의 성패가 결정 된다고 생각 된다. 대표적인 학습지도의 원리는 자발성, 개별화, 목적, 사회화, 통합화, 직접 경험의 원리로 나뉘어 지는데 급변하는 사회에서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 되어진다.?1. 자발성의 원리학습자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학습활동에 의욕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하는 원리로 학습자가 자발적이냐 자발적이지 못하느냐에 따라 학습을 습득하고 자기주도 학습의 성패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되어 진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며, 교수자의 인내심과 학습자의 노력이 요구 되지만, 한번 뿌리를 내리면 학습자의 능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2. 개별화의 원리학습자를 존중하고, 학습자 개개인의 능력, 소질, 성향 등 모든 발달가능성을 신장시키려는 원리는 말한다. 개별화의 원리는 말 그대로 개인이의 모든 능력을 개인적으로 맞춰보는 일종의 눈높이 교육이며, 학습자의 수준에 맞는 눈높이 교육을 통해 학습자의 눈높이에서 점차 학습자의 능력을 이끌어 올릴수 있다는 부분에서 긍정적인 요인이라 생각 되어지며, 요즘 우리 사회의 교육의 화두라고 생각 되어진다.?3. 목적의 원리학습자는 학습목표가 분명하게 인식되었을 때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학습활동을 하게 된다.가장 큰 사회문제라 할수 있다, 요즘 학생들은 꿈이 없는데 어떤 목적으로 공부하는지 모르고 수동적으로 학습자들이 끌려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교수자들 또한 어떤 목적으로 교수하는지를 망각하는 일이 교육 현장에서 발생되고 있으므로 사회가 모두 합심하여 교육의 전인적 인간 양성을 목표로 협의와 협동이 필요하겠다.?4. 사회화의 원리학교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이 사회화되어 유용한 사회인으로 육성시키고자 하는교육이다.왕따, 다문화가정, 한 부모가정, 빈곤 가정등 학생들의 사회화에 부정적인 기본 문제들이 우리 교육전반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문제를 사회화 여러 기관들이 합심하여 해결해 나가려는 자세가 요구 된다.?5. 통합화의 원리학습자를 전체적 인격체로 보고 그에게 내제하여 있는 모든 능력을 조화적으로발달시키기 위한 생활중심의 통합교육을 원칙으로 하는 원리로써 학생의 행동하나하나를 파악하고 단편적 사고와 행동이 아닌 여러 가지 분야를 학습자의 수준에 맞춰 통합 시켜야 하겠다.
문예부흥이 교육에 미친 영향(시사점)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학문의 부활이란 것은 일반 민중의 사상에 대한 변화의 시발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대에 접어든다는 것은 교육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변화로 일반 민중의 의식 향상에 큰 전환점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 따라 이탈리아와 자기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J.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이러한 경향은 1855년 J.미슐레가 그의 《프랑스 사》의 제7권을 ‘르네상스’라고 이름 붙였을 때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미슐레는 르네상스에 대한 근대적 사상을 거의 모두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시대를 중세와 정반대되는 시대로 묘사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르네상스관은 프랑스 중심적인 데에 문제가 있으며, 아마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르네상스로 인한 민중의 변화의 밑거름은 의식의 변화요, 민중 생각의 변화를 위해 교육이 필요했다고 생각되어 진다. 이처럼 문예부흥이 사람들을 자극했고 학문에 대한 관심의 교육을 통해 꽃피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보다 보수적이며 초연한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던 스위스 문명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미슐레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이나 중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중세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근대의 시작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구분된 시대, 즉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그 자신의 어머니를 가진’ 문화시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주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 ·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과 황제 간에 진행되었던 오랜 갈등이 이 무렵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러한 장기간의 투쟁은 양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당시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봉건주의는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간에 이들 국가들의 특징은 ‘개인주의’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의 발현에 중대한 소임을 담당한 것이 인문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다.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 ·자극하였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물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또 어떤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사상에는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탈리아 중심적인 그의 주장과는 달리 유럽의 다른 지역,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북부 제국의 르네상스도 이탈리아의 그것과 평행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사의 등장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고, 르네상스 사가(史家)들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도전해왔다. 도시사회와 자본주의가 고대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중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재해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교육학 개론★인간행위로서의 교육지구에는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 무수히 많은 교수와 학습방법이 성공하며, 또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걸음씩 발전을이루어 나왔다.우리는 교육을 일종의 인간행위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가르치고 기르고 돌보고훈련하고 학교에 보내고 하는 등의 활동들로 보는 것이다. 제도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교육활동은 특별한 형식과 규칙을 따르고 있다. 교육학 연구는 대개 이러한 사회제도로서의 교육을 연구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1) 학습하는 존재로서 인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학습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성장하고 발달한다. 우리는 대개 교육 혹은 교육적 학습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인간의 전인적 균형과 인격적 총합에 비추어 유의미 한 것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과정을 통제하는 행위가 바로 교육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2) 교육의 가치지향성: 교육의 행위는 그 특징에 있어서 의도성을 지닌다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변화되게 하는 과정이라는 의미이다. 즉, 교육행위를 한다는 것 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 혹은 가치체제를 전제로 한다.★ 사회제도로서의 교육교육은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이 이루어 지는 제도적 구조와 환경을 전제로 한다.1) 교육제도의 형식성: 어떤 형태의 교육활동이든지 그것이 참으로 교육답다거나 교육답지 못하다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공적인 기준을 묵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그러한 분별을 위한 논의가 가능하다면 그 교육활동은 제도적 형태를 지닌 것이다. 적어도 학교와 같은 형식적 교육기관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가르치는 내용, 지도하는 방법은 상당한 보편성과 형식성을 지니고 있다.2) 투자적 동기와 복지적 동기: 교육은 그 성격상 어떤 사회적, 개인적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교육이 결과적으로 어떤 목적을 실현하거나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투자적 동기-사회가 인력을 충원하거나 사회적 효용성을 높이기 위하여(도구적 가치)*복지적 동기-구성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봉사하기 위하여(내재적 가치)★ 교육학의 성격1) 규범적 교육학: 교육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가장 능률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이상적 원리는 어떤 것인가를 밝히려는 차원의 연구. 교육학의 가장 전통적인 형태로서 교육적 판단의 기준을 제공한다.*교육목적론-사람들을 어떤 인간이 되도록 길러야 하느냐를 밝힘*교육방법론-목적론에 관한 이론을 제외한 전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의 방법적 원리2) 공학적 교육학: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특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연구와 인간의 노력을 조직화하는 이론을 활용하여 교육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도록 하는 원리의 연구3) 설명적-비판적 교육학: 어떤 교육이 참으로 이상적인 교육인가는 일차적 관심으로 삼지는 않으나 기존하는 교육의 활동이나 제도의 특징을 분석하고 설명, 이해하고 평가, 비판하는 일을 주된 연구 과제로 삼음이처럼 교육학 개론에 대해 나열하며 정리하면서 이런 의문이 하나 생겨 났다. 왜? 인간은 어떤 보편 타당한 하나의 법칙이나 제도를 통하여 교육을 해야 하며, 왜 그것을 통하여 인재를 길러내고 또한 사회는 그런 제도를 통과한 인재를요구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제도와 틀에 얽매여 있다보니 교육학 개론이란 학문은 교육의 최소한의 길잡이역할을 해주는 학문이지만 이 학문안에 우리가 앞으로 교육해야할 뿌리이며근본이 들어있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를 이학문은 소리 없이안내하고만 있다.우리나라의 교육학자들의 주장 내용을 보면 더 우리가 나가야할 길을 뚜렷하게제시 하고 있다.일본의 고대문화는 주로 한국을 통하여 중국문화를 수입하였던 것인데, 근대에와서 한국문화는 주로 일본을 통하여 서양문화를 수입하였다.한국에서 교육학 논의의 역사는 짧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갑오개혁으로 문호가 열리기는 하였으나 잇달아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어 한국의 문화는 일본문화에 강제 동화(同化)의 비운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1906년 유근(柳瑾)에 의해 《교육학원리》라는 제목으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월보에 교육학의 체계가 연재됨으로써 비로소 교육학의 신기운을 맞이하였고, 1908년에는 정영택(鄭永澤)에 의하여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월보에 《교육학》이 다시 연재되었지만 그후에는 일본의 강점(强占)에 의한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한국의 교육학은 더 이상 발달할 수 없었다. 다만 식민통치기간 중에 와신상담으로 교육학을 착실히 연마한 선인들이 있었다. 최현배(崔鉉培)는 일본의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을 거쳐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교육학의 신학문을 연구, 1926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육학을 강의하는 한편 교육적 구국일념으로 《조선민족갱생의 길[朝鮮民族更生之道]》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그가 페스탈로치 교육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그후, 광복되기까지는 일본의 한국민족혼 말살정책으로 한국의 교육학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다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J.듀이의 영향을 받은 오천석(吳天錫)이 1946년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독립한국의 교육적 좌표로서 시의적절한 것인 동시에 당시 그가 문교책임자였던 점에서 한국교육학의 토착화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실지로 교육학의 발전을 교육 실천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실용주의적 경향을 토착화하는 데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1948년에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국의 학제를 따른 단선형학제(單線型學制)가 채택, 실시되기에 이르자 교육학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어 한국의 교육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1947년에는 이만규(李萬珪)에 의하여 《조선교육사(朝鮮敎育史)》 상·하권이 나왔는데, 이것은 이후의 한국교육사 연구에서 고전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1948년에는 이경열에 의해 《교육학》이, 1950년에는 박상만(朴尙萬)의 《한국교육사》가 나오고, 1951년에는 이해남(李海南)의 《국민교육학》과 원흥균(元興均)의 《신교육학》이, 1953년에는 조재호(曺在浩)의 《표준교육학》과 최근식(崔根植)의 《교육학개론》이 나오고, 1955년에 김태우(金泰午)의 《교육학개론》, 1956년에는 한기언(韓基彦)의 《교육학입문》, 1958년에 임한영에 의하여 번역된 《교육학》, 오천석에 의하여 번역된 《경험과 교육》 등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학적 논의나 교육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광복 후부터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체벌이 교육적인 의미를 갖기 위한 적정 조건을 제시해 보시오”체벌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생각되기에 스승님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한 부분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6년만 해도 스승님 이라함은 그림자도 밟지 않을 정도로 존경을 받으시고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스승님께 꾸중을 듣고 혼나서 집에를 가서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은 저에게 늘 하시던 말이 “너 가 잘못을 했으니 혼날 행동을 했으니 선생님께 맞는 건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씀 해주셨고, 또 선생님이 체벌 하신 것 에 아무런 불만도 있지 않았습니다.저의 어렴풋한 기억에는 선생님께 혼나고 시무룩해 있다가도 초등학교 1학년때 칭찬받으면 선생님이 주시는 포도알에 혼났던 슬픔은 없어지고, 의욕이 솟고 진취적으로 변한 것이 생각이 납니다.분명히 그때와 지금은 체벌이 존재 합니다. 그러나 왜이렇게 선생님의 체벌에 대하여 시시비비가 일어나고 교권이 도전을 받는지 생각해본다는 자체가 제 생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사범대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라서도 아니고 선생님의 권위는 있어야 하고 학생을 혼내키고 지도하고 체벌하는 것은 선생님 고유의 권한이라고 생각합니다.지금처럼 공교육을 담임 선생님을 무시하는 풍조는 무엇이 한참 잘못되도 잘못됐다고 생각 합니다.체벌의 적정 조건을 말하기 전에 우선 부모님들의 의식관이 가장 우선시 되는 문제를 제공한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학교에서 선생님께 체벌을 받고 돌아온 학생의 부모님들중에 마음이 상하지 않는 부모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모님의 상한 마음을 표현해 나가면 나갈 수록 학생의 가정 교육은 올바로 되지 않는 길을 선택하여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인 즉, 부모님은 학생을 적어도 학교에 믿고 보냈으면 끝까지 학교를 신뢰하고 선생님과의 믿을을 통해 학생을 간접적으로 지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합니다.그렇지만 요즘 부모님들은 아들이 혹은 딸이 학교에서 스승님에게 체벌이라도 받고 오면 나쁜표현으로 호들갑을 일으키고 세상에 자기 아들을 함부로 했다고 고발을 하느냐 마느냐 멱살을 잡고 욕을하고 야단 법석을 떱니다.그런일을 겪으신 선생님들은 가정의 가장입니다. 스승님이자 한가정의 가장이라는 것은 우리모두는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가장이기에 월급을 타서 다른 부모님들처럼 자식의 뒷바라지를 해야 합니다. 체벌로 인하여 문제가 커지고 그로인해 교단에서 물러날수도 있다는 압박감에 스승님들은 체벌을 멀리 하고 계십니다.저는 체벌의 옹호론자입니다. 대화로 할수있는 것은 대화로 당연히 풀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 혼내고 체벌을 할때는 체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요즘 큰 화제가 되어왔던 행정수도 “관습법”과 똑같다고 생각 합니다. 헌법재판소의 말을 인용해 보면 오래전부터 우리국민들이 인식하고 생각 되어온 것이 수도는 서울이다,입니다.이와 마찬가지로 예전부터 교육은 선생님의 고유권한이며 학생에 대한 체벌권은 선생님께 있다는 것도 고유의 권한이자 관습법 이라고 생각 합니다.교사란 직업은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그중의 일부분에 체벌도 포함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교사의 권의와 교권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체벌이 교사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면 체벌받은 학생의 부모님들은 교권을 박탈한 것입니다.체벌에 대해 항의하고 학교에 찾아와 거세게 항의를 하는 것을 본 학생들의 잠재적인 교육을 학부모님들은 경외시 한것임을 분명히 알으셔야 합니다.교사와 학생 학부모 또 국가는 교육의 참된 방향으로 가기위해 나라는 재정과 올바른 정책으로 교사는 올바른 지식과 학습과 인성의 안내자로 부모님은 가정의 교사이자 영원한 학생의 동반자로 학생은 국가와 사회의 주체자로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다음은 체벌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트에 가보았습니다. 많은 찬성과 논쟁이 있었습니다.이사이트에 서 많은 찬성과 반대의 이야기를 많이 읽어보고 생각했습니다.그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찬성과 반대의 이야기들을 옮겨 보겠습니다. 이글은 모두다 현제 학생들의 경험에서 쓰여진 내용입니다.우선 대학생의 5년전 체험담입니다.(찬성)지금은 시간이 지났다.. 중고생이던 시절이 엇그제 갔은데 2년이나 지났다.. 5년전 중3때 난 교육적인 체벌로 인해 지금에 내가 있게 해주신 선생님께 너무나 감사 드린다. 물론 부당한 체벌도 있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매를드시고 그 매를 사랑의 매라고 우리는 부른다. 물론 매를 맞을 당시에는 난 우리 담임 선생님이 너무나도 미웠다. 난 조금 잘못했느데 매섭게 회초리를 치시는 선생님이 원망 스럽기도 하고 어찌할바를 몰랐다.선생님이 매를 드신 목적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당시 내게는 그렇게 까지 선생님이 할필요는 없엇다고 느껴진다.담배를 피웠다는것이다.. 그당시 난 학교 임원에 성적은 전교 1,2등을 하고 있었고 명문고를 진학할 목표로 있었는데, 중간고사를 망친나로서는 일명(날라리)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담배도 피고, 학생으로써는 도리에 벗어 나는 행동을 했다.. 지하철 역 에서 담배 피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셨던, 선생님께서는 다음날, 친구들은 손을 델수 없어 매도 포기 하셨었지만 당신께서는 나는 포기할수 없으셨던지 체육실에서 말을 하신후 내가 반항 하는것을 아신후에는 내 허벅지를 치셨다. 임원진에 전교 1,2등에 시험못봐 반항하는 나를 선생님께서는 그냥 넘어가실수 없던 모양있었나 보다... 한 5대까지는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그이후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선생님께 빌고 또 빌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가 나한테 잘못한일은 없다 왜 니가 나한테 잘못했다고 하니? "난 너의 그런 행동에 화가난 것이고 그래서 오늘 내가 너한테 처음으로 매를 드는이유다.. 그런말을 하시면서 매를 한 20분정도는 치셨다.. 내 허벅지는 피와 함께 매쳐있었다.. 지나친 체벌을 한것이라고 볼수잇다 모른사람들이 보면 하지만 선생님과 밑었던 제잔간의 불신은 더 욱 무섭게 매질을 하셨다..하지만 그후로 한 3일간 학교 땡땡이 치고 아마도 선생님을 보기가 어려웠던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매로 인해 정신을 차린건지 다시한번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해서 명문고 에 합격하고 지금은 명문대학 에 입학할수 있었다..선생님의 매는 그당시 너무나 싫었지만 지금은 나를 그리도 무섭게 대해주셨던 선생님께 나는 감사한다..교육적인 체벌로 인해 그 학생이 바른길로 갈수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다.. 신체적 고통을 주는것으로 엮효과를 빗을수 있지만 한번의 체벌은 학생의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 문예부흥(르네상스)이 현대 교육에미친 영향을 논하시오.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 ·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르네상스는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다.14세기 초부터 15세기의 말까지의 시기를 르네상스시대라고 부른다.르네상스는 독립적인 도시들이 성장하고 상업과 무역활동이 활발해지고 대학이 발전하게 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르네상스시대 사상가들은 고대문화와 학문의 기준을 검토함으로써 과학 혁명에 기여하였으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더욱 중요시하며 개인주의와 삶의 능동적 측변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면을 강조한 문예부흥(Renaissance)은 Re-birth(재생)의 뜻으로 고대무예로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즉 신 중심(神中心)의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적이고 현실적인 갊을 중시하였던 고대 그리스 로마 문예로 되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또한 지?덕?체의 수양과 고대문화를 부흥하여 인간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인간 해방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개성을 스스로 개발하고 일상적인 삶에 유일한 힘을 소유한 자유인 양성을 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문예부흥이 대두된 배경은 십자군원정으로 인하여 상공업 및 도시의 발달 시민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지적 탐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고전이 보급되었으며 교회의 타락은 현실생활에 관심을 등 어학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을 중시하였다. 체벌이나 위협 등 엄격하고 억압적인 중세의 금욕주의 방법으로부터 벗어나 온화한 방법으로 자기 표현과 자기 활동을 계속적으로 장려하였다.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 ?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있다.르네상스는 다면적인 복잡한 국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통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그리스 ?로마의 고대문화 역시 도시국가에서 발생 ?발전한 것이었다.물론 고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코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코무네가 르네상스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대문화에 대한 동경은 중세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샤를마뉴의 ?로마제국?이나 오토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도 사실은 고대 로마황제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로마의 정통성 계승 의도를 르네상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고대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신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자각적인 태도로서, 고대가 지난 후 암흑시대가 있었고 이제 새로운 재탄생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역사의 3분법(三分法:고대 ?중세 ?근세의 시대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이들 운동의 근거는 고전연구로부터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고전은 수사학 ?역사 ?도덕 ?철학 등의 인문학이며, 이와 같은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문에 휴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피렌체의 L.브루니였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시인 F.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텍스트의 발견과 교정에 전력을 쏟았다. 고대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파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인의 생각과 생활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본(寫本)을 비교하고 정확한 텍스트를 확정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문헌학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이 방법이 단순히 연구의 보조수단이라기보다 참다운 전체적인 인간성을 추구하여 자기를 자각하려는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였다.중세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의 근거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寄進狀)?을 후세(後世)의 위작(僞作)이라고 밝혀낸 L.발라는 이러한 언어문헌학의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술에도 고전주의적 이상주의가 확립된 시기로서 회화의 마사초, F.안젤리코,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S.보티첼리가 있고,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뛰어났으며, 건축분야에서는 F.브루넬레스키 등이 배출되어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시대를 구축하였다.또한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반이 쇠퇴함으로써 르네상스에도 변화가 왔다. 오랫동안 동서간의 무역을 독점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외국상인, 특히 절대주의 국가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과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 에스파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신항로의 발견과 동양과의 직접무역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위를 떨어뜨렸다.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정치적 관여로 이탈리아 내 국가간의 세력균형과 타국가간의 관계가 힘에 의해 지배되어 그들의 독립성조차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샤를마뉴의 꿈을 재현해 보려는 듯 나폴리에 침입하였으나, 그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의 관여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 및 프랑스 발루아 왕가간의 세력 다툼 속에 끼여 정치적으로 쇠퇴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은 1521년부터 44년까지 네 차례 되풀이되면서 이탈리아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사실상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에스파냐와의 연결을 위해서도 이탈리아의 지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