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 운동사※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에 대한 보고서민족주의(民族主義)와 사회주의(社會主義), 민족주의와 민주주의(民主主義)와의 결합.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민주주의가 결합된 이유.당시의 국내 사정은 일제-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대한 제국이 식민지 국가화 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탈식민지(脫植民地)를 위한 운동, 또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국가 안 밖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탈식민지를 추구하는 방어적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 되었다. 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는 추상적인 이념이 아닌 정서적인 측면을 자극하여 ‘우리(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움으로써 탈식민지를 이룩하기 위하여 민족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대상은 다름 아닌 대중(민중)이므로, 기존의 기득권 중심의 봉건적 민족운동)으로는 탈식민지 운동을 전개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대중을 기반으로 한 정치이념인 사회주의나 민주주의와의 결합)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 기존의 민족주의 운동에 사회주의, 혹은 민주주의가 더해지면서 대중의 지지와 함께 힘을 실을 수 있었다.)⑵ 민족주의와 각각의 정치이념 결합의 특징.사회주의민주주의대부분의 독립(민족)운동 주도임시정부 활동, 독립군 활동 등→ 정치적, 군사적인 운동 주도.① 민주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민주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 운동은 외교적 방법이나 테러, 전쟁과 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독립을 이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따라서 임시정부 활동을 통한 타 국가)와의 외교적인 교섭을 통한 협력에 의하거나, 독립군 ? 광복군과 같은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② 사회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사회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 운동은 대부분의 독립투사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빈부의 격차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 평등 사회의 건설은 대중(민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혁명이 일어나서 사회 체제 가 바뀜으로써 이룩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주의 계열이 주도한 임시정부 활동이나 독립군 활동처럼 정치적, 군사적인 운동을 주도하기보다는 대중(민중) 자체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탈식 민지가 이룩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에 치중하였다. 반일(反日)을 목표로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주의 세 력과 함께 신간회(1927)에서 ‘6?10 만세운동, 광주 학생 운동’등을 주도하다가 후에 이념의 대립)으 로 분열된다.③ 포괄적 특징.사회주의 혹은 민주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는 기존의 민족주의와 다름없이 기득권을 소유한 소수 무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초기에는 서로의 이념을 초월하여 반일(反日),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양 자간의 협력 하에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지만, 결국에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의 차이 로 인하여 대립하다가 양분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민족주의 운동은 두개의 노선으로 진행된다.결과적으로 사회주의나 민주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는 다시 한 번 사회 지배층의 기득권 유지를 위 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⑶ 사회주의 ? 민주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의 한계.사회주의 ? 민주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의 한계에는 민족주의의 일반적인 한계와 이들만의 특징적인 한계가 있다.여기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의 일반적인 한계에는 타 집단(민족)에 대한 맹목적인 배타감 형성으로 인한 이성적 검토의 방해와 그것에 대한 파괴를 합리화 시키고 집단적 복수를 야기 시켰다는 점, 그리고 기득권을 누리는 소수 사회 지배층의 세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기득권의 세력 유지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하였고, 타 집단(민족)에 대한 성향에 대해 서술하면, 사회주의 ? 민주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는 그것의 기득권 세력 유지와 이념의 대립과 같은 내부의 성격, 혹은 본질에 대한 이성적인 성찰과 토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맹목적으로 일제(日帝)에 대한 대응에만 전념했다. 이로 인하여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무력) 항쟁이 단행되었다. 이것은 제국주의가 식민지국가에 침탈할 때에 적용되는 논리인 ‘타 집단(민족)에 대한 파괴’를 합리화, 정당화 시켰고,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파괴, 집단적 복수 행위)으로 이어졌다.사회주의 ? 민주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의 특징적인 한계는 엘리트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민족주의 운동은 영웅 중심이 아닌 대중 중심의 운동이었지만, 3?1운동과 같은 대중적인 운동에서도 주도하는 세력이 따로 있는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서 전형적인 대중적 형태의 운동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 대중 운동 속의 엘리트주의는 1980년대까지도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의 종교정책1. 밀라노 칙령.밀라노 칙령은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의 황제이고 리키니우스가 동로마의 황제일 때 서로의 협의 하에 만든 칙령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박해를 받아온 카톨릭 교회의 평화를 회복시키고 자신의 심정에 대한 엄숙하고도 신빙성 있는 선언을 하였다. 밀라노 칙령은 막시미누스 다야가 죽은 후에 로마 세계의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갈레리우스의 칙령이 완전하게 유효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밀라노 칙령에 나타난 콘스탄티누스의 관용 정책.①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합의로 신성의 예배에 대한 규정이 만들어져 기독교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각기 원하는 종교를 가질 수 있도록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였다.② 법적인 조치를 마련함으로써 자유로운 예배를 보장하였다.③ 이전의 조칙에 있던 기독교에 대한 제한과 조건을 제거함으로써 기독교를 원하는 이들이 기독교를 제지와 방해 없이 가질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④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도 평화를 위하여 자유스러운 예배행위를 허락하였고, 자유로운 제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기하여 양자를 보증하였다.⑤ 박해시 기독교인의 집회소와 부지들에 대한 취득 물품들에 대하여 기독교에 돌려주도록 하였다.2. 법적 규정.콘스탄티누스는 공의희(종교회의)에서 로마의 주교들과 함께 종교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규범화 하였다. 아를르 공의회(314), 알렉산드리아 공의회(324), 니카이아 공의회(325),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레아 공의회(334)의 4차례에 걸친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박해시에 신앙을 부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로 승진된 자들은 적발될 경우 파직에 처하거나, 부활절 절기를 경건하게 지켜서 신앙심을 지키는데 있어서 어떤 분열이나 불화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준수하는 것 등에 대해서 법적 규정을 만들었다. 여기서 결정된 법적 규정에는 성직자에 관한 것, 일반 신자에 관한 것, 관습, 제도, 신학, 윤리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대하여 명시되어 있다.3. 조건과 제한 철폐.콘스탄티누스는 이전까지 존재해오던 종교에 대한 조건이나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박해를 받아왔던 기독교에 대하여 자유를 허락하였다. 이것은 밀라노 칙령에서부터 리키니우스의 정책과, 또 리키니우스가 축출된 이후에 마련된 종교 정책에 의해서 명시되었다.※ 철폐된 조건과 제한.① 기독교의 성직자를 국가에 공여금을 내는 대상에서 제외시켰다.이는 다른 전통 종교 또는 로마 종교의 사제들에게 원래부터 주어졌던 것으로, 기독교 성직자들에 대한 제한의 철폐를 말한다.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직자 계급에 대한 쇄도로 이어지게 하였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국가에 가장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던 원로원 신분의 사람들이 성직자가 되는 것을 금지시키고, 공제를 주더라도 국가의 이익에 거의 손실이 없을만한 사람들에게만 성직을 주는 것으로 제한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답사기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은 중앙청이 철거된 이후, 새로운 박물관으로 가기 전에 임시로 지어 놓은 상태이다. 임시라고는 해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이기 때문에 허술하게는 지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견학을 하면서 부끄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명색이 국립중앙박물관인데, 그 모습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하기엔 건물이 너무나 작았다. 지하철로 연결된 길을 걸어 나왔을 때, 생각보다 작다는 소문에 설마 하던 것이 사실이라는데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국립중앙박물관은 2층에서부터 시작해서 지하로 관람하면서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건물의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 시설이 좋다는 데에 안심하였다.국립중앙박물관의 입구 격인 2층은 선사시대 유물부터 전시되어 있었다.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영상물이었다. 우리나라의 모형에 작은 전등으로 유물이 발견된 곳을 표시하고 있었고, 주위에 있는 TV에서는 유물들에 대한 해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영상물은 유물에 대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스템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다.처음에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뗀석기는 둔탁하고, 얼핏 보면 단순한 돌처럼 보였다. 그 이후로 신석기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간석기는 뗀석기보다는 작고 세밀했다. 신석기 유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빗살무늬 토기인데, 그 이유는 바로 고교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교과서에서 보던 그대로였고, 그것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유물이 많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간돌검이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간돌검은 부러져 있었지만, 이곳의 그것은 원 상태 그대로인 것이 마치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였다.이곳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코너가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한 눈에 이해 할 수 있었다.빗살무늬 토기 외에, 또 하나 교과서에서 보았던 선사시대유물은 바로 농경문 청동기였다. 농경문 청동기에는 밭을 가는 사람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시대의 유물 치고는 매우 정교하다고 생각하였다.선사시대 이후에는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이곳에서는 유물들을 출토된 지역별로 구분해 전시하고 있어서 각 지역별 특색을 알기 쉬웠다. 또 민무늬 토기가 두드림무늬 토기로 전환되는 과정을 한눈에 알기 쉽도록 전시해 놓았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금제 띠고리인 금제대구(金製帶鉤)이다. 국보 제 89호로 낙랑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금제 띠고리는, 작은 크기지만 그곳에 용을 조각해 넣음으로써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느끼게 했다. 섬세한 장식 문양과 정교한 제작 기술이 그 시대 사람들의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다.그 다음으로는 삼국시대의 고구려 유물을 전시해 놓은 전시실이 있었다.전시실 입구에는 금동으로 만든 신발인 금동식리(金銅飾履)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모양이 참 특이했다. 신발 밑에 금동으로 된 못이 여러 개의 달려있는 모양이었는데, 그것은 무사가 말을 탈 때 신는 신발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다. 그 외에도 고구려벽화단편이 있었는데, 무사가 말을 탄 모습을 그린 벽화였다. 이것은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에 위치한 고구려 쌍영총(雙楹塚) 벽화의 단편으로, 당시 고구려의 복식과 말갖춤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 또한 교과서에서 보았던 유물로, 직접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는 고구려 유물의 수가 적었던 것이었는데, 그것은 고구려가 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쪽에는 고구려 유물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외에도 아쉬웠던 점은 장천 1호분을 복원시킨 것이 매우 구석진 곳에 있어서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안내표지판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무심코 지나간다면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상황인 것이 아쉬웠다.가야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에서는 교과서에서 보았던 수레바퀴 토기가 있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각종 철기구들이 있었는데, 철의 왕국으로서의 가야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백제의 유물을 전시한 곳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금제관식(金製冠飾)이었다. 백제 문화의 특징인 화려함을 잘 나타내는 유물이었다. 이 금제관식에는 연꽃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백제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백제 다음에는 신라의 유물이 전시된 전시실이었다.신라의 유물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금 세공품이었다. 대표적인 유물인 금관(金冠)을 비롯해서 금팔찌, 금 귀걸이 등의 많은 종류의 금 세공품이 있었다. 이것을 통해 신라인들의 금세공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인상 깊었던 것은 여러 모양의 토우였다. 여러 동물을 만든 토우도 있었고 사람의 모습을 한 토우도 있었다. 동물 토우는 풍요의 의미로 만들어졌고, 사람 토우는 다산의 의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남성은 성기를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놓았고, 여성은 가슴과 엉덩이만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 매우 우스꽝스러워 보였다.2층의 관람이 끝난 뒤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한 계단 옆에는 1층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경복궁의 모습과 훼손된 후의 경복궁 모습을 비교하는 모형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니 일제가 얼마나 우리의 문화유산을 파괴했는지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가옥들과 경복궁 건물은 거의 다 사라지고 중앙청과 서양식 건물이 드문드문 들어선 모습은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새삼 일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 실감하였다.1층에서는 시대별로 나누어 도자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었다.처음에 들어서면 보게 되는 것이 고려청자였다. 그 곳에는 청자주자(靑磁注子), 청자향로(靑磁香爐), 청자탁잔(靑磁托盞)등 여러 종류의 청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청자투각칠보문향로(靑磁透刻七寶文香爐)였다. 국보 제 95호인 이 청자투각칠보문향로는 국화잎 모양의 꽃받침에 얹힌 중판앙화형(重瓣仰花形) 화로와, 칠보 매듭 무늬를 투각한 구형 장식이 얹힌 6능화형 뚜껑으로 이루어졌다. 이 유물은 상감 기법 발상기의 유물로 추정되고, 12세기 전반 고려시대의 세련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그 다음에는 조선분청사기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분성사기는 고려청자에 비하여 화려함은 덜 했지만, 나름대로의 멋을 가진 도자기들이었다. 분청사기 발생의 뿌리는 고려말기의 청자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청사기만의 미감을 갖게 된다. 상감청자가 특수 계층에 의해 애호되었던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는 사용계층에 따른 질의 차이는 있지만, 왕실에서 일반에 이르기까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그리하여 관청용의 고급그릇은 물론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막그릇으로도 대량 생산되었다.조선분청사기 다음에는 조선 백자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백자 청화채 각병이라든지, 백자 동채 주합, 백자 철채병은 이전에 보지 못한 이국적인 백자들이어서 흥미로웠다.1층을 지나 지하 1층에는 불교조각실, 금속공예실, 회화실, 역사자료실 등 여러 가지 전시물들이 있었다.그중에서 첫 번째인 불교 조각실에는 여러 시대, 여러 종류의 불교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불교 조각품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이었다. 이 조각품은 여러 교과서에서 나온 유명한 유물이기 때문이었다. 국보 제 78호인 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크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미소와 몸짓이 매우 인상 깊었다. 그리고 국보 제 82호인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石造阿彌陀如來立像)과 국보 제 81호인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은 일단 그 큰 크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통일신라 719년에 만들어진 이 유물들은 아미타불은 강인한 남성의 모습으로. 미륵불은 여성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보물 제 332호인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坐像)은 통일신라 8세기에 만들어진 유물로, 그 시대에 그렇게 큰 철제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시작하기에 앞서서.채만식의 「논 이야기」는 해방 직후의 농촌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당대의 사회 모습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과사전에는 이 작품에 대해「농민의 생활 문제를 날카로운 역사의식에 입각하여 정면으로 다룬 것이 바로 『논 이야기』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당대의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풍자소설, 그리고 사실주의 -리얼리즘- 소설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 「논 이야기」는 그의 이전 작품과 비교하여 볼 때, 당대의 사회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한 편인 데다가, 그 풍자의 대상도 확실하지 않아 완성도가 모자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리얼리즘과 풍자 소설에 능통했다던 채만식에 대한 평가에 흠이 될만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고 하겠다.「논 이야기」를 읽다보면, 특이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소설의 시점이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3인칭 전지적 시점’을 쓰고 있는데, 여타 다른 3인칭 전지적 시점 소설과는 다르게, 그 시점이 주인공인 ‘한생원’에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여기에서는 소설 「논 이야기」의 허점과 소설의 시점에 대한 논의를 해 보도록 하겠다.-「논 이야기」에서의 사실주의(리얼리즘).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채만식의 소설은 당대의 사회상을 잘 반영한 사실주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소설 「논 이야기」는 그의 그런 평가에 흠이 될 만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주인공인 한생원은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관리의 수탈로 인해 나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어, 해방이 되었을 때에도 만세를 부르지 않고, 일제든 조국이든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땅을 도로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자, ‘나는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독립 됐다구 했을제 만세 안 부르기 잘했지.’라고 말한다. 물론, 그 시절, 그리고 지금도 조국에 대한 반감을 조금이라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채만식은 풍자 소설 작가의 한 축으로, 당대, 즉 해방 직후의 사회,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해방 직후의 농민들의 궁핍하고 어려운 생활사를 그리려고 하였겠지만, 과연 농민들의 생활이 한생원과 같았을까 하는 의심을 감출 수 없다. 당대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또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이 사실주의, 리얼리즘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주의 소설이라 하면, 독자가 그 소설을 읽고, 또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한생원이라는 인물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얘기 했듯이, 작가가 풍자를 효과적으로 하기위해 설정한 인물로만 보인다. 그리고 작품에서 풍자 대상인 해방 이후의 조국도 한생원에게만 원망의 대상이지, 당 시대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런 모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작품 중에서 우매한 인물로 나오는 한생원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의 조국은 자기의 땅을 가로채간 대상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 「논 이야기」는 사실주의 소설로서는 한계점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주의 소설이라면, 의당 그 시대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 소설은 한생원이라는 우매한 한 인물을 앞세워 그 인물의 입장에서 보이는 시각만으로 사회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사실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설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한생원이라는 인물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라, 해방 직후라는 상황에서 조국을 원망할 수 있는, 그런 특징적인 인물일 뿐이다.여기에서 ‘꼭 한생원이 아니더라도 일제가 빼앗아간 토지를 나라가 거두어들여서 농민들에게 돈을 받고 되판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것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한생원과 그런 사람들은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다. 한생원은 일인(日人) 길천이가 시세일제에 토지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일인에게 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이다. 만약에, 소설 속에서 나라를 원망하는 농민이 일제에 토지를 강제로 빼앗긴 인물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여기서는 자기 의사로, 돈을 받고 논을 팔은 한생원이라는 인물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한생원이라는 인물은 사실주의, 리얼리즘 소설을 표방하는 채만식의 소설에 있어서 한계, 또는 허점의 한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논 이야기」의 풍자성. 〈이중 풍자의 허점〉채만식의 소설은 풍자 소설로도 유명하다.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시대와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것이 바로 채만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 「논 이야기」는 채만식의 풍자의 바탕인 사실주의가 무너지면서, 그 풍자도 허점을 드러냈다.그의 소설 「태평천하」를 보면 ‘윤직원’이라는 인물을 내세워서, 그 인물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당시의 사회와 일제에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소설 「논 이야기」에서도 이런 방식이 사용되었다. 한생원이라는 인물을 앞세워서 해방 직후의 사회를 비판하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채만식의 풍자에 오류가 생겨난다. 「태평천하」에서는 윤직원이라는 인물이 당시의 사회 -일제치하- 에 순응하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것이 바로 그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논 이야기」에서의 한생원은 당시의 사회에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즉 사회에 반감을 가진 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작가가 한생원이라는 인물을 비판하는 것이 그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다보니 한생원이라는 인물과 당대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각각 다른 의미로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중 풍자」로 바뀌고 말았다.여기서 이 ‘이중 풍자’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한생원이라는 인물과 당대의 사회를 따로, 그러면서 동시에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비판의 대상이 모호해진 것이다. 소설 내에서 한생원과 당대의 사회는 대립적이다. 따라서소설에서는 그 양쪽을 모두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쪽을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결과가 발생하였다.소설 내에서, 한생원은 매우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나온다. 젊은 시절, 관리에게 수탈당하고 남은 논 -그것도 한생원의 아버지, 한덕문이 피땀 흘려 마련한 땅- 을 노름빚과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일인인 길천이에게 팔아넘긴다. 그리고는 해방 후, 자신이 길천이에게 팔아넘긴 논이 일인들이 쫓겨났으니까 으레 그 논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땅을 돌려주지 않는 조국을 원망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한생원의 생애나 논리에는 그의 어리석음이 묻어있다. 또한, 소설내의 조국은 농민들의 어려운 삶을 외면하고, 기득권의 이익에만 신경 쓰는 나라로 나온다. 여기에서 한생원을 풍자하면 농민들의 삶을 외면하는 나라를 옹호하는 꼴이 되고, 그 나라를 풍자하면 우매하고 어리석은 한생원을 옹호하는 경우가 된다. 하지만 채만식은 이 둘 모두를 비판하는 방식을 택했고, 따라서 풍자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소설의 결과가 애매모호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 ‘이중 풍자’는 일제 치하의 시대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해방이 되어 사회가 급변하였기 때문에, 채만식 문학의 형태가 미처 바뀌지 못해 발생한, 그의 풍자의 한계이다. 그리고 이런 풍자의 한계 때문에 그의 사실주의에도 오류가 생겼다. 아직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문학의 형태로 우격다짐으로 풍자를 하려하다보니 소설 내의 사실주의에 오류가 생겼고, 또 그 사실주의의 오류는 ‘이중 풍자’라는 풍자의 오류를 낳아버렸다.따라서, 소설 「논 이야기」에 나타난 채만식 문학의 오류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주의적 오류, 풍자의 오류 그 하나하나가 결부된 것으로, 그 원인이 미처 시대 적응을 못한 채만식 문학의 형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논 이야기」에서의 시점의 특징.소설 「논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3인칭 전지적 시점’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3인칭 전지적 시점을 취하고 있는 소인공인 한생원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한생원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부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부분이 한생원의 시각, 생각을 중심으로 서술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은 어디에선가 1인칭 시점이라는 느낌이 든다.그 일례로, 일인(日人) 길천이에 대한 소설에서의 시각을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 의 사람들은 일인들에 대해서 반감을 갖기 마련이고, 또 소설에서도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악랄하게, 교활하게 그려진다고 하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논 이야기」에서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길천이에 대한 시각이 너그럽다. 비록, 소설 중간에 ‘길천이가 왜채(倭債)를 갚지 않는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군다.’ 라는 부분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한생원의 ‘번연히 알면서 왜채를 쓰는 사람이 잘못이지 누구를 원망하나’ 라는 대사로 은연중에 길천이의 행동이 덮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 소설이 한생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서 서술되기 때문이다. 한생원에게 있어서는 조국이 있든, 일제가 통치하든 가난한 농민을 등쳐먹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일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원망이나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게다가 길천이는 자신의 땅을 시세보다 비싸게 팔 수 있는 상대이므로 오히려 역으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다가 소설이 전반적으로 한생원에게 집중되어 진행되다 보니, 소설 내에서 길천이는 그다지 악랄하거나 교활한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이런 면에서 볼 때, 「논 이야기」의 시점은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관하겠다. 보통 3인칭 전지적 시점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고, 인물에서 벗어난 전개도 있는 법인데,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한생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의 심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상황 설명 부분을 제외하면 모든 사건이 한생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이런 전개는 마치 1인칭 시점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