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 사회과학대학 해외체험연수상해의 역사상해는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1842년 남경조약으로 개항된 이 후 국내 외의 새로운 문물을 흡수해 온 국제적인 상업도시이다.영국에 의해 중국 최초로 개방될 당시 서양에 개방된 첫 항구도시요 오랜 기간의 외국 조계지로 화려한 모습 속에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해는 1945년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이후부터 등소평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중국의 여느 도시와 같이 별다른 발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방이후 90년대 중앙정부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시작하면서 동양의 또 다른 홍콩을 꿈꾸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중심 도시가 되었다.중국에 관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도시이다. 상해의 고층빌딩들은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을 장려하는 시정책에 의해 기발한 디자인으로 상해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과거 조계지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는 외탄과 황푸강 바로 건너편 들쑥날쑥 쏟은 현대적 고층빌딩은 상해의 과거와 현재를 강 하나사이로 이어주는 듯 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6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상해의 총면적은 6,184㎢이며, 12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 640만 명은 도시의 외곽 지역에서 살고 있다. 역사 속에서 중국의 어떤 도시보다 서양의 문물을 빨리, 쉽게 받아들인 곳이기에 중국의 다른 도시와는 색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다양한 볼거리, 놀 거리, 먹을거리로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아시아의 경제 대도시 상해의 경제상해로의 해외체험에 선정되면서 이틀이라는 자기개발일정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해보았다. 그래서 우리 조는 무엇보다는 현재의 상해가 가지는 경제적인 모습, 특히 90년대 이후 급격하게 발전을 이루고 있는 상해의 경제적 모습과 그 중에서도 아시아의 대표적인 국제도시로서의 상해의 경제적 역할을 알아보고자 계획을 하고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틀이라는 자기 개발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기에는 너무나도 짧았고, 그 짧은 시간동안에 가고 싶었던 다른 많은 곳들이 있었기에 계획을 세웠던 기관에는 모두 방문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상해 국제 무역 센터나 박람회장을 견학하면서 작게나마 경제 대도시 상해를 만날 수 있었다.1. 상해 국제무역센터88 Loushanguan Road, Shanghai, P.R. China에 위치한 상해 국제 무역센터는 상해의 양대 경제 중심지 중 하나인 홍챠오 경제밀집구역에 속해있다. 멀리서 보일만큼 고층으로 우뚝 서 있는 무역 센터는 전 층이 세계 각국의 유명한 회사의 사무실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DHL이나 SONY 등 주로 외국계 기업의 사무실이 주로 건물을 차지하고 있었고 따로 방문자를 위한 전시관이 없어서 아쉬움이 남았다.2. 상해 국제 전람중심상해 국제 전람중심은 상해 국제 무역센터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시 홍챠오 경제 밀집구역에 함께 존재한다. 상해 국제 전람중심은 흔히 말해서 우리나라의 박람회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가 갔을 시기에는 경비와 관련된 업체들이 자사의 제품과 기술력을 국내의 다른 업체에 그리고 세계에 팔기위해 설명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여겨 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회사인 북경 현대 역시 여기서 경찰용 승용차로 마케팅을 하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3. 상해 세무상성Yan'an Road (West), Shanghai,P.R.China,200336위치한 상해 세무 상성은 상해 국제 전람 중심 가까이에 위치한 곳으로 1층은 세계적인 기업인 월마트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전반적으로 여러 상점과 전시회, 그리고 고층으로는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삼성코엑스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이러한 방문 외에도 상해에서 생활하는 동안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던 상해의 경제발전 정도는 혀를 찰 만큼 대단하였다. 짧은 시간의 기간이라 상해의 경제 제1지구라 하고, 증권거래소, 중앙은행 등이 밀집하여있는 푸동 지역에는 가지 못하였지만 충분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일정이었다.발전하는 도시 상해상해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대단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가이드에게 들었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중국 국가 내에서는 상해가 가장 잘 사는 도시이면서도 타 지역에서는 왕따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또한 대외적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에 자신이 중국 인이기 앞서 상해사람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처럼 상해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상해라는 도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성장해 있었다. 또한 앞으로도 몇 가지만 더 보안이 된다면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1. 수많은 고층건물상해는 관광을 가게 되면 목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고 한다. 그 이유라고 하면 바로 상해 중심지에 수없이 높이 올라간 많은 고층건물들 때문이다. 상해에서의 발전은 이렇게 높은 건물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황푸강 주위의 고층건물들은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조명들로 상해의 멋진 밤을 만들어 주는 대에도 한 몫하고 있다.2. 관광지 개발상해의 관광지를 가보면 수많은 외국인이 들 고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방송수신탑이 상해의 옛 거리 예원 등 관광지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항상 붐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는 국제도시인 상해답게 관광지 개발에도 신경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임시정부청사와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현장인 루신 공원은 정말 의미 있게 구경할 수 있는 관광지였다. 이렇게 상해는 연간 해외의 유동인구가 많은 장점을 살리기 위해 관광지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다.3. 중국인의 아침생활중국인들은 모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좋은 습관을 가진 듯 했다. 아침 일찍 찾아간 중국의공원에서는 태극권을 하는 중국인들과 산책과 마작등과 같이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또한 출근시간이 되면 오히려 서울보다 더 치열한 출근 전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중국인들은 일찍 일어나 생활하는 좋은 습관을 지닌 듯 했다. 또한 놀라운 점 하나는 자기 전 밤에 본 중국의 일반 거리는 온갖 쓰레기가 버려져 있고 상당히 더러웠지만 아침에 나왔을 때 정말 감쪽같이 거리가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놀라기도 했었다.4. 시민들의 질서 의식하지만 수많은 고층건물과 관광객, 그리고 쇼핑거리를 지닌 경제 대도시 상해에서도 시민들의 의식은 아직 많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 같았다. 상해에 가면 가장 놀라는 것이 거리를 지나는 차들이 신호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파란불과 빨간불을 모두 무시하고 운전을 하는 차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무단횡단을 생활처럼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은 어느 장소에서나 줄을 서지를 않았고, 건물 내에서의 흡연, 아무 곳에나 침 뱉기 등 아직까지 의식적 수준에서 경제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또한 국제대도시의 명함에 어울리지 않게 상해의 어느 곳에 가도 언어소통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진 국민들의 교육 정도나 의식수준이 따라오지 못함을 알 수 있었던 거 같다.마지막으로 상해라는 도시가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빈부격차의 정도를 줄여나가야 한다. 상해의 중심지역은 수 십억원을 넘어가는 아파트와 고층 빌딩 그리고 길가에 지나다니는 외제 자동차를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뒷골목에는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의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는 빈민들이 존재하고 깡통을 들고 다니는 수많은 걸인들이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경제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 이러한 빈부격차 역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상해에서 만난 코리아국제적인 도시, 상해에서도 역시 한국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저기 관광지를 찾아 갔을 때 너무나도 많이 들려오는 한국 말들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었지만, 관광지 외의 여러 곳에서도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1. 한국기업푸동 공항에 내려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빠른 자기 부상 열차를 타고 이동하여 버스를 타고 상해 길로 나갔을 때 가장 많이 보였던 것이 한국의 대표 자동차 브랜드인 현대의 차들이었다. 상해의 거리를 가득 메운 택시의 대부분이 현대의 소나타라는 사실은 한국인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또한 상해에는 전 세계적으로 수출하고 있는 신라면 공장과 LG전자 공장이 위치하고 있어서 현대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진출하고 있는 한국기업들도 만날 수 있었다.
천년가람으로의 짧은 여행아무런 생각 없이 듣게 된 조선실록과 민간역사였다. 단지 이유였다면 같이 사는 선배의 추천이었다. 들으면 성적이 아니라 역사를 새로이 보는 방법정도는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그 한마디로 수업을 듣기 시작하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들었던 수업이기에 다른 수업과는 달리 학기 중에 답사를 가야만 한다는 조건이 그저 쉽게만 다가오지 않았다. 수업이외에 학생회의 일과 다른 활동들로 바쁜 나에게 주말의 답사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임했던 내 첫 번째 답사는 신륵사와 남한산성이었다. 솔직히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답사 가기 전 날의 행사로 인해 녹초가 되어 따라 다녀온 답사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높지 않은 남한산성을 올라가는 것이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었고 성가셨다는 기억으로 밖에 남질 않는다. 하지만 왜 같이 사는 선배가 이 과목을 추천하였는지 그리고 나에게 무엇을 배우라는 지를 알려주었던 것이 해인사로의 답사였다. 해인사를 다녀온 후에 난 분명히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 달라졌다. 궁금한 것도 아주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답사기를 쓰는 이 순간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해질 무렵 어두침침한 탑 주변에서 한 학생이 했었던 말이었다.‘역사를 배우고,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한 시간만 잠깐 눈 부치고 씻고 나가려고 생각하고 잠시 몸을 뉘였다. 전날의 하루 종일 힘들었던 행사준비와 행사 뒷풀이까지 마치고 집으로 들어 온 시간이 아침 여섯시, 항상 답사가기 전날은 무슨 일이 이렇게도 있냐며 투덜거리며 집으로 들어왔고 너무 피곤한 마음에 답사를 너무나도 가기 싫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부친 게 사고였다. 눈을 떴을 때는 여덟시 사십분, 아홉시에 출발한다고 했을 때 자취방에서 열심히 달려가면 차는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자만 눌러쓴 채 무작정 학교로 뛰어올라 갔다. 정말 다행이도 버스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고 숨 고로의 답사의 시작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도 그날의 답사지가 해인사인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 같다.한참을 자고 일어났다. 아니 기절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고속도로의 어느 한 휴게소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오늘의 답사지가 해인사인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당장 들었던 생각은 ‘오늘도 피곤하겠구만’ 하는 것 이였다. 처음에 답사일정을 보았을 때 해인사는 하루에 답사를 가기에 너무 먼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답사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그저 어쩔 수 없는 수업의 일부분이기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 참여한 날이 오늘이라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해인사는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한번 다녀온 적이 있는 곳이라 나에겐 더욱 기대감 없이 다가왔다. 어렸을 적 나의 부모님은 불교를 믿으시고 그래서인지 주말에 가족이 함께 집 근처 외곽의 사찰을 여행 다니는 일이 많았다. 고향인 대구 주변의 있는 팔공산의 동화사, 청도 운문사, 양산 통도사, 경주 법주사, 불국사, 영주 부석사 그리고 해인사까지 여러 유명한 사찰 들을 돌아볼 기회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있었다. 그렇게 해인사로 가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평을 해 보았자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 없기에 이제는 체념하고 그냥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생각으로 다시금 차에 몸을 실었다. 다시 차에 타고 한 시간 반 동안의 고속도로와 국도 그리고 고부랑 산길을 지나간 뒤에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차를 타고 출발한 지 5시간이 지난 후였다. 같이 간 학생들은 해인사에 내렸을 때에 천년 사찰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다섯 시간의 여행으로 인한 피로함과 또 다시 다섯 시간을 돌아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많이들 지쳐 보였다. 하지만 차에 내려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가야산 중턱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나둘씩 생기를 찾아가는 듯 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여태껏 들지 않았던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며 약간의 기대감과 설레임이 생겼다.‘이 곳이 진정 천년의 사찰, 해인사로구나. 외세의 침입으로리나라 3대 사찰로써 호국 불교의 상징이라고 하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법보사찰 으로써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대가람으로 유명하다. 해인사의 창건기는 신라 최치원이 지은 ‘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 주원 벽기’와 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같은 이름인 ‘ 가야산 해인사 고적을 통하여 창건 연기를 알 수 있다’ 창건 연기는 순응과 이정의 두 스님의 이야기인데 실제적으로 사실을 기술 하였다고 하기 보다는 일종의 신비한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해인사의 창건기는 창건 이후에 쓰여 진 글로써 해인사의 창건을 신비로운 일이라 여기고 싶어 하는 후세의 바람과 심리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한다.가야산 입구에서도 한참을 고부라진 길을 차를 타고 올라가고 주차장에 내린 후에도 사람의 걸음으로 1킬로 남짓 걸어가서야 해인사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일주문에 도착할 수 있다. 보통의 큰 절들은 일주문을 가지고 있는데 해인사 역시 가운데에 ‘가야산 해인사’라 적힌 일주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주문은 큰 절의 어귀에 자리 잡은 제 일문으로써 절의 위용을 한 눈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보통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천년 사찰의 위용을 나타내는 웅장하고 당당하기 보다는 오히려 주위의 사물들과 경치에 잘 어울려 소박함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일주문을 조심스레 지나면서 본격적인 천년사찰로의 기행을 시작하였다. 일주문을 뒤로하고 5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 또 하나의 문인 봉황문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봉황문보다 더욱 나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일주문에서 봉황문으로 가는 길 가에 줄줄이 세워진 나무들이었다. 해인사가 천년의 사찰인 만큼 절 앞에 있는 나무들까지도 천년의 위엄을 뽐내듯 높고도 웅장하게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역시 역사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한그루 나무가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고사(古死이 없는 일주문과는 달리 봉황문에는 출입문 두 짝이 달려 있었다. 봉황문 건물 안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림들이었다. 그건 바로 가장 최근에 갔었던 영주 부석사의 문에서 본 그림과 비슷한 것 같았다. 이 그림들은 네 명의 사천왕들을 묘사한 그림이었는데 사천왕들이 절 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해인사의 봉황문은 다른 사찰에서 불리는 사천왕문, 금강문과 같은 것이었다. 이 문을 지나면서 악귀를 우리들의 몸에 배인 악귀를 쫒아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봉황문은 악귀를 내쫓는 사천왕을 모심으로써 사찰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청결하게 하고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만들어 신성한 장소로 만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봉황문을 지나자마자 나오는 곳은 해인사의 제 3문인 해탈문 이다. 해탈문은 중문에 속하는 문으로써 다른 사찰의 불이문에 해당한다. 불이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고 한다. 너와 나, 생과 사, 선과 악, 옳고 그름, 색과 공 등 서로 상대적인 것들이 둘이 아닌 상대적인 것들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봉황문을 지나면서 우리 몸의 악귀들이 쫒아나가고 청정도량이 되는 것처럼 해탈문을 지나고 나면서 모든 상대적인 것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주차장에서 1킬로여 걸어올라 왔던 터라 많이 피곤했는데 해인사를 올라가는 길에 유난히도 계단이 많다는 것을 투덜거리며 올라갔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단에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주문에서 해탈문에 들어설 때까지 33계단을 거치는데, 도리천 곧 33천의 궁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전에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하나둘씩 세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진 못했다. 이렇게 33계단을 지나서 해탈문을 지나면 넓은광장이 기다리고 이었다. 광장의 좌측에는 사물이라고 불리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법기가 있는범종각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범종각은 내려올 때 둘러보기로 하고 해인사의 본전이라고 하는 대적광전과 장경판전으로 이동해보부풀어 올랐다. 추운 날씨였지만 잠시나마 고려시대 수많은 외적의 침입과 그것에 맞서 호국 일념으로 겨레를 지켜내려 하고 자주적인 문화국으로써 긍지를 표현하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과정을 엿보면 이는 더 놀라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경판 자체가 벌레가 먹지 않고, 오래도록 부패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공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판각수가 팔만여장이나 되는 판을 나누어 새겼지만 각 판자의 새긴 글자는 마치 한 사람이 나누어 새긴 것과 같이 균일하게 새겨졌다. 그리고 각 판각수가 일장일배(한 글자를 새긴 후 한 번씩 절을 한다)를 하며 새긴 장인정신과 이 장경판의 힘이 나라를 보위할 수 있다는 민족을 호위할 수 있다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장경판 이였기에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또한 더욱 기이한 것은 장경판전의 초과학적인 보관능력이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해인사의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로써 장경각 또는 판당으로 불리 운다. 장경판전은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건물 내의 적당한 환기와 온도, 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간단한 보관용 목조건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가 숨어 있었다. 통풍을 잘하기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였고 각 칸마다 창을 두었다. 또한 안쪽 흙 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는 설계를 하였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러한 선조들이 지혜를 후손들의 의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팔만대장경 일부가 훼손되고 있는데 이는 경판의 독특한 구조와 그에 따른 보존환경을 이해하지 않고 단지 넘쳐나는 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서둘러 신판 가를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의 일부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후손들의 어리석은 실수문이다.
-제 1.2차 중영전쟁-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아편전쟁이라 불리 우는 제 1,2차 중영전쟁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영전쟁의 발발까지의 과정의 그 이후의 중국사에 미친 영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편전쟁의 역사를 알기위해서는 중국과 서양의 관계 그 중에서도 중국과 영국과의 관계를 알아야한다. 청조시대의 중국은 서양과의 무역을 차츰 시작한다. 국방의 이유 때문에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작은 범위에서의 광동무역체제를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서양의 국가들도 이미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들과 무역을 진행하였고 식민지화 되어 있던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큰 시장인 중국은 무역의, 그리고 침략이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차와 생사는 매우 이익이 많은 상품이었기에 교역량은 날로만 늘어갔다. 이러한 교역 중에서도 중국과의 가장 활발한 교역은 행한 서양 국가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많은 량의 교역을 하였고 중국으로 부터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문제는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교역을 담당했던 동인도 회사는 유럽인에게 인기가 많고 수입량 또한 많은 중국의 차와 생사 등을 수입한 반면 모직물과 같은 사치품을 수출하였기에 교역수단이었던 은을 지불할 수 없었고 또한 적자를 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적자를 매꾸기 위해 찾게 되었던 대체상품이 바로 인도의 아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편 전쟁의 시작인 것이다.교역이전부터 아편은 중국에 이미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편의 교역량은 빠르게 증가하였다. 아편이 들어오기 시작한 십년 후에는 이미 중국의 인민들의 심각하게 아편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약재나 상류층의 유흥거리로 쓰이던 아편은 인민들에게 빠르게 보편화되어 버렸고 높은 아편의 가격 탓으로 빈부의 격차도 더욱 심해지고 결국은 늘 흑자로 들어왔던 은이 오히려 역으로 나가게 되는 상황이 오면서 중국은 사회, 경제적으로 많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청 정부는 이러들의 계층은 다양하였는데 대부분이 착취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이렇게 배상제회는 관군 몰래 날로 팽창하게 되는데, 결국 이 모임의 지도자들은 광서의 금전이라는 곳에서 ’태평천국‘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사회는 나라이름에 보이듯이 평등한 지상낙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어 태평천국군은 청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면서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서 적과 내통한 자나 약탈, 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처벌하고 태평천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등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호남성의 중심지인 무창을 함락했을 때 태평천국군은 5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53년 3월, 마침내 양자강 유역의 남경을 정복하여 남경을 천경, 즉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들이 봉기한 지 2년여 만이었다. 이렇게 세력을 확대하고 국가조직을 갖추어나가면서 사회제도 역시 정비되어갔다. 태평천국 내의 백성은 모두 평등한 형제 자매였으며, 전족을 없애고 여자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았다. 또한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천조전무제도가 만들어졌으며, 사유재산은 인정하지 않았다. 즉 "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먹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쓰며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혜택받을 수 있는" 평등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하지만 남경으로 도읍을 잡고 난후 태평천국은 더 이상의 확장보다는 정권 유지에 힘쓰게 되었다. 고인물이 썩기 마련으로 시간이 경과 하면서 태평천국 지도층의 내분현상이 붉어지는 한편 청 정부군의 항전으로 그 기세역시 주춤해 졌고 또한 서양세력의 도움역시 크게 작용하였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양세력의 처지에서는 태평천국이 처음에는 크리스트 교 국가를 선언했기 때문에 서양이 중국에 침략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예측 아래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들이 곧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태평천국을 공격하는 데 가담한 것이다. 이무렵 염군은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863 정도였다. 양무파를 중심으로 초기의 양무운동은양식병기의 구입 또는 열강의 기술도입에 의한 군사공장 설립 등은 양무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중심 내용이다. 1862년부터 시작하여 총, 총알, 대포, 포탄, 부수기계 생산공장을 설치하였다. 특히 1865년 상해에 설립된 강남제조총국은 외국의 기계와 기술을 도입하여 건설된 것으로 양무운동시기에 있어서의 최대의 규모였다. 또 무기제조에 부수되는 사업으로는 조선공장, 광공업, 군사기술에 대한 외국서적 번역출판사업 등이 있었다. 1880년대 들면서 군사사업에만 한정되었던 양무운동을 확대하여 상무진흥의 양무기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적, 광산, 방직, 기선, 전신전보, 제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군사부분은 완전히 국영으로서 관판기업이지만 양무기업 속에서는 민간으로부터 자본투자를 구하는 관독상판기업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홍장이 1872년 상해에 설치한 ‘윤선초상국’과 ‘상해기기직포국’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실권은 어디까지나 이홍장 계열의 관료에 장악되어 개인의 축재수단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보이는 또 하나의 현상은 민간주도의 상공업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양무운동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파산에 이르게 된다. 양무운동의 실패는 운동의 목표가 실제로는 민중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데 있었다는데 이유가 된다. 또한 양무이론이 애매하다는 점에서도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국사회의 가치기준은 중국의 학술과 전통에 두고 다만 실용으로서 서양을 수용하여 중국의 가치를 보강하는데 기여하면 된다는 중체서용의 사고이었다.변법운동과 입헌운동청일전쟁 이후 격화되어 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서구식 제도개혁까지 목표로 한 변법운동이 일어나 광서제(光緖帝)의 재가까지 얻었으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정변으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승리의 비결은 입헌에 있다고 본 신사, 관리들이 입헌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혁명이 일어났다. 양무운동이 한창 궤도에 오른 1880년대 후반부터 서구기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토를 소견하기로 한 하루 전인 8월 4일 광서제가 연금되었다. 서태후의 감시하에 이토를 소견한 다음날이 8월 6일 서태후는 훈정(訓政)을 재개하겠다는 명령과 강유위체포령을 내림으로써 정변이 공식화하였다. 강유위, 양계초 등은 간신히 일본으로 도피하고 6명의 개혁파 인물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개혁기에 없앴던 용관의 복구, 사민상서의 철폐, 사묘의 학당전용중지. 팔고문체 복구 등 개혁기의 조치를 원상대로 회복함으로써 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다.변법이나 입헌운동은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적인 중국영토 분할점령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촉발되어 부강을 목표로 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다. 부강을 실현할 정치적인 목표로는 입헌군주제라는 서구식 정체의 도입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그런데 이들 개혁운동의 주체는 대체로 신사층이었으므로 개혁론의 근거는 전통의 재해석에서 구하였고 또한 개혁추진의 동기로는 동요되고 있는 중화제국의 질서속에서 개혁을 통해 중화제국의 질서 속에서 개혁을 통해 전통적으로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보위 내지는 강화하려는 의도가 상당히 작용하였다.-교안과 의화단 운동1,2차 중영전쟁의 결과 기독교 포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특히 북경조약 이후 교회의 토지 조매권이 인정되자 중국 각지에서는 반기독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의화단에 이르러서는 반기독교로부터 반외세적인 성격으로 발전한다. 교안과 의화단운동은 전개된 시기와 지역이 길고 넓을 뿐 아니라 중국근대의 모든 역사주체를 직접?간접으로 포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더욱이 외국세력의 침략에 대한 ‘민중적’ 응전이란 성격이 부각됨으로써 태평천국운동과 함께 중국 근대민중운동사의 중심적 연구대상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외국 종교에 대한 혐오감에서 시작된 폭력?폭동이 점차 반교운동의 범위를 넘어 근대 중국의 반식민지화, 반봉건화 과정으로 번져갔다. 그 결과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일환이 된 반기독교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1860년대 들어가면서 확산되어 1900년 상해에《청년잡지》를 발간해 청년의 사상과 행동의 개혁을 촉구.-진독수의 사상개혁 시도는 1917년 1월 채원배가 북경대 총장에 취임함으로써 북경을 무대로 옮겨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중심인물 : 진독수, 채원배, 이대조, 호적, 주수인, 전현동, 유반동 등- 진독수, 이대조 등은 정치사회문제에 보다 큰 관심이 있었으나(창간), 호적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나 북경대 교수 대부분은 문학교육개혁에 관심을 집중하고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려 하였다.- 이들의 연합은, 중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강'을 이룩해야 한다는 전제와 자강의 방법은 민주 · 과학의 원리에 근거하여 민주주의 · 자유주의 ·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존중하며 전통의 비판과 재평가를 통해서 수행한다는 원칙에 의견이 합치된 데 기초하여 이루어졌다.진독수와 호적이 중심이 된 《신청년》그룹은 문학혁명사상을 전개하였다.- 구(舊)문학의 입장 : 문학작품 속에는 도가 담겨 있어야 하며, 그 문장엔 문법 · 운율 · 문체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경향 : '문어(文言)는 죽은 언어'라고 선언. 생활언어인 구어(口語)가 살아 있는 문학창조의 유일한 매체라 단언하며, 구문학의 원칙들을 지나친 제약이라 공격하고 나섰다.1 호적 : . 고전적 암시나 진부한 상투어, 대구(對句)의 사용을 반대하고, 속자 · 속어의 사용을 주장하고 백화(白話)가 '살아 있는 문학' 창조에 적합한 매체라 주장2 진독수 :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여 귀족문학 · 고전문학의 타도와 국민문학, 통속적 사회문학의 건립을 제창.3 노신의 : 신문학운동은 백화의 사용이라는 형식만의 문제가 아닌, 반전통 · 반유교의 사상혁명의 표현이란 점에서 내용상의 혁신이기도 하였다. 노신은 구예교(舊禮敎)에 반대하는 투쟁과 백화운동을 긴밀히 결합시킨 대표적 작가.- 여러 군벌등간의 세력다툼의 폐해와 북경정부의 매판성이 노정되는 상황이었고, 특히 5.4사건에 대응하는 북경정부의 태도에 실망하여 '북경정부타도' 또는 '매국정부타도', 나아가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되었다.
미국으로 간 아이들- ‘유미유동’을 읽고‘유미유동留美幼童’이 책은 청나라에서 시작된 사상 초유의 ‘조기유학 프로젝트’에 따라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청나라 정부는 네 차례에 걸쳐 30명씩 9∼12살 어린이 120명을 미국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이 책은 130여 년 전 미국으로 국비유학을 떠난 중국유학생들의 잊혀진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시 재조명한 것이다. 말 그대로 ‘유미유동’이란 미국으로 유학을 어린아이를 뜻한다.서유미유동이란 제목의 책은 처음 나에게 산뜻하게 다가왔다. 마치 양무와 태평천국처럼 중국의 근대사를 배워가는 요즈음에 나이기에 더더욱 호기심을 건드릴만했다. 무심코 넘긴 첫 장에 양면을 가득채운 사진, 그리고 그 사진 속의 눈을 부릅뜬 아이들의 모습에 먼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고 책을 읽는 내내 어떨 때는 유미유동을 준비했던 룽홍이 되어, 어떠할 때에는 내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간 유동이 되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홍장이 되어서까지, 그 시절의 시대상과 중국의 정치적인 상황 등을 느끼며 충분히 흥미 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책을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들었던 약간의 아쉬움 까지 이 책은 교묘하게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다.룽홍우리가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를 기억해보자. 수채화 한편을 그릴 때에는 그림을 그릴 도화지가 있어야 하고 그 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리고 색색의 물감으로 색칠을 하고 이 물감이 잘 말라야만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유미유동을 중국, 청나라 정부가 그린 하나의 그림이라고 할 때, 룽홍은 온갖 준비물을 모두 준비하고 그림그릴 대상까지 찾고 게다가 밑그림까지 완성한 사람이었다. 여기까지는 물론 쩡꿔판과 리홍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는 하였겠지만, 유미유동는 분명 룽홍으로부터 나온 계획이었고 이 계획이 시작되기까지도 룽홍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룽홍은 어린 시절 마을에서 유일하게 알파벳을 외고 있는 아이였다. 이러한 룽홍은 브라운 목사와의 인연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중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라는 타이틀도 갖게 된다. 이런 그이기에 서양에서 보고 배운 지식과 문명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을 것이다. 룽홍은 미국유학을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애국심이 룽홍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이다. 그는 청나라의 자강을 위해서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서양식 교육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였다. 그러기에 어린 아이들을 서양으로 유학을 보내고 서양의 신기술과 문명을 갈고 닦아 귀국 후에 조국을 위해 일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귀국 후 자신의 계획을 실시하고자 했으나 특별한 배경이 없어 세관 등의 곳에서 통역일과 같은 소일거리를 하며 기회를 엿봐왔다. 그러던 중 룽홍은 양강총독 중국번을 알게 되면서 계획을 실질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당시 양무 파였던 중국 번과 직례총독 리홍장의 도움으로 마침내 룽홍의 계획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누군가 ‘낡은 책상 하나를 옮기려고 해도 피땀을 흘려야 한다’고 했었다. 이렇듯 룽홍의 계획은 순탄치 만은 않게 진행되었다.시대상황유미유동은 9세에서 12세 사이의 30명의 아이들을 네 차례에 걸쳐 1872년부터 1875년까지 3년간 보내졌다. 1872년, 이 시기의 중국은 후대에 와서 근대시기라 규정지어진다. 수 천년을 이어온 강대국, 천자의 나라, 중국은 이시기에 산업혁명을 통해 크게 성장한 영국과 제1.2차 중연전쟁을 호되게 거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본격적 서구에 문을 열었고, 태평천국과 같이 아래에서부터의 민중 봉기를 통해, 그리고 양무를 통해 위로부터의 변화를 위한 움직임까지, 꿈틀거리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이러한 변화와 개혁의 움직임은 온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청 정부는 관리들의 자신의 권력과 중국의 전통적 질서의 유지라는 명분으로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유동들의 유학에 있어서도 리홍장과 증국번과 같은 일부 양무파의 움직임으로 빠르게 유동들의 유학에는 성공하였으나 이들은 중국을 떠난 지 불과 십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외신은 이렇게 유학 프로젝트가 중단된 원인은 뚜렷이 알지 못했다. 처음의 유동들을 유학 보낼 때의 목적을 망각한 채 넓게 보지 못하는 안목과 그저 근거 없는 관리들의 부담감으로 인해 유동들은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중국은 청일전쟁을 맞이한다.유미유동, 그들은 누구인가?그들은 청나라 정부의 조기 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에 참가한 수혜자 또는 희생자였다. 매년 30명씩 4년간 120명의 아이들이 파견되었는데, ‘나이는 13.4세에서 20세 미만의 청소년이었고 이미 중국책을 읽은 지 수년이 되었고, 그의 가족이 서양으로 보내 공부시키기를 원하는 자에 한해서, 지방관이 가족의 감결 및 나이, 용모, 호적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상해의 지방 사무국에 지원하도록 한다.’ 이처럼 유동에 지원하는 아이들의 선발기준은 상당히 복잡하고도 까다로웠다. 또한 아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한지 15년이 되면 해마다 30명씩 중국에 돌아와서 관직에 임용하게 되어 있었으며 외국에서 국적을 취득하거나 개인적으로 귀국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당시 중국의 상황에 비해 아주 파격적인 조건이 제시되었다. 미국의 15년 유학기간 내내 의식주 비용을 포함한 학비일체를 국비로 정부에서 부담해주었고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총리아문의 임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에도 아이들의 모집은 쉽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가 중국에 알려진지 얼마 안 되어서 인디언이 많다는 소문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부분의 대상은 대부분 나름 당시에 서구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남부해안 사람들의 자제였고 또한 양무와 관련된 직업의 자제였다. 광동 사람들이 많았고 상인의 자제들이 많았지만 중국의 중앙 관리들의 자제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렇게 선발된 제1차 유동 30명은 자신들의 10년 후 그리고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탄다. 이 날이 바로 1872년 8월 11일이다.미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귀국어린나이에 이국땅에 도착한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서양의 기이한 문화와 학문, 과학기술 등을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미국의 가정에서 생활하며 미국의 문화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면서 서서히 아이들은 자라 어느 덧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대학생이 된 아이들은 중국 정부의 애초의 목표대로 예일대학, 하버드, 컬럼비아 대학 등의 미국의 명문 대학에 속속들이 입학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미유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룽홍의 모교 예일대학에 20여명의 아이들이 입학하였다. 아이들은 미국의 기차에서 겪었던 강도 사건으로 전보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전보 업에 투신하는가 하면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 공과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또한 철도 학을 전공하여 후에 중국 최초의 철도사업가가 되는 이도 있었고, 의학과 법학을 전공하는 등 서양의 문물을 배워 자국에 이익이 될 수 있는 학문들을 배워나갔다. 이러한 학문적인 배움 이외에도 아이들은 자연스레 미국의 생활에 적응하였고 이제는 미국의 문화인 럭비, 조정의 한 선수가 되어 맹활약하고 또는 자기들끼리 직접 야구팀을 만드는 등 이제는 더 이상 미국을 이국땅이라 여기지 않을 만큼 동화되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에는 넘지 말아야 할선을 넘고 만다. 이 시점부터 완벽한 수채화가 완성되기 전에 물감이 번지기 시작한다. 일본의 미국유학생에게 허가가 되었던 군사학교 입학이 중국의 유동에게는 불허되고, 미국의 서해안 부근에서 일어난 중국 배척 현상으로 중국과 미국의 관께는 악화된다. 게다가 유학사무국에 새로이 파견된 관리의 왜곡된 보고에 의해 사무국은 순식간에 철수하게 되고 유동들도 날벼락 같은 중국 소환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는 중국의 관리들이 처음에 유동을 미국으로 파견할 때의 목적을 잊고 커다란 미래를 바라보지 못한 데에 있다. 중국의 관리들은 어린나이에 미국으로 파견된 유동들이 서양문물을 배우며 서양사상과 관념에 젖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도 중국의 봉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국 정부에 충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주장한 자들의 대부분이 양무운동에 반대하고 전통적 질서를 고수하였던 관리들이었다. 이렇게 자국의 부름에 유동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까마득히 알지 못하고 하나둘씩 배에 올라탔다.위기중국으로 돌아온 유동들을 맞이한 것은 열렬한 환호가 아니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질타, 그리고 감옥과 같은 차가운 바닥이었다. 이렇게 이들은 부모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사, 나흘간 갇혀 지내다 리홍장을 만나게 된다. 당시 북양의 해군을 장악하고 있던 리홍장에 의해 이들은 선정학당의 항운반 학생이 되거나 이등항해사, 견습 군관이 된다. 하지만 엄혹한 시기에 정복의 야망에 깃든 프랑스에 의한 청불전쟁으로 이토록 아까운 목숨들이 사라지게 된다. 한편으로는 리홍장의 계획으로 유동들은 중국의 전신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하며 중국은 철도를 갖게 된다.이 무렵에는 중국과 일본은 근대화 경쟁이 심화되었다. 그 주에서도 무엇보다 그 관심은 해군에 집중되었다. 리홍장은 무엇보다도 해군 전력의 강화에 힘썼고 이에 못지않게 일본 역시 고유의 민족성을 발휘하며 해군무장에 힘썼다. 이렇게 양 국가가 전력을 키워 갈 때 쯤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의 한판 격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일 전쟁(1894)이다. 결론적으로 막상막하의 이 싸움에서 패하게 되는데 이는 중국보다 뒤 늦게 시작한 일본의 근대화가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싸움에서도 항해사와 군관으로 있던 안타까운 인재들의 목숨을 잃게 되는데, 두 전쟁으로 인해 유동들은 2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된다.
어린눈으로 바라 본 세상-소설「아홉 살 인생」을 읽고과목 : 국어작문담당교수님 : 김세령 교수님제출일 : 2003/04/10학부 : 사회과학부학번 : 200321906이름 : 최인규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창 책읽기를 권하고 추천도서까지 정해준 적이 있었다. 평소 책읽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던 나에게 이란 책은 그 기회를 통해 쉽게 다가왔고 많은 걸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이 책은 여민이가 아홉 살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쓴 책이다. 여민이가 이사 온 동네의 아이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여주고 있었다. 아이들이 붙인 별명이 사람들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책에 새로운 별명이 나올 때마다 그 사람의 성격을 맞추어 보곤 했다. 그러다가 '골방 철학자'라는 별명이 나왔을 때는 어떤 성격일까 매우 궁금했었다. 골방 철학자는 대학을 나왔다. 그리고 골방 철학자의 머리 속에는 분명히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자신은 동네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고, 골방 철학자는 가난하고 힘든 자신의 현실을 비관하기만 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의 비현실적인 욕망은 숲에서 목을 매달고 죽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른들은 가끔 어린아이들을 보고 '어리니까' 하며 무시해 버린다. 어린이들에게는 이것저것 따지고 재지 않고 사건을 순수하게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확실히 어느 면에 있어서는 어린이가 사건을 쉽게 해결하는 능력이 더 뛰어난 것 같다. 윤희의 고민을 들어준 여민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역시 윤희도 여민이를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려서 안타까웠다.주인공만큼이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 여민이의 친구 기종이. 기종이는 순수한 속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누나와 단둘이 힘들게 살다보니 상상을 많이 하게 되는지 비현실적인 말들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종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기종이는 여민이에게 '노란 네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가식적인 마음과 우월감을 상징하는 '노란 네모'. 누구나 노란 네모 하나쯤은 가지고 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의 마음이 노란 네모를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보다 노란 네모를 많이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기종이는 여민이가 '노란 네모'를 가지게 된 날부터 속상해 하며 여민이가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다고 얘기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들인데도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통하여 절친한 친구가 되는 사람들도 많다. 서로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게 바로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느날 기종이의 누나는 외팔이 하상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기종이는 처음엔 누나를 빼았겼다고 슬퍼했지만 결국에는 씩씩하게 누나와 하상사와 함께 이사를 갔다. 그 세 사람은 서로를 아껴주고 도와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기종이도 이젠 더 이상 비현실적인 말들을 그만 둘 거라는 생각이 든다.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몇 구절 있다. 우선 서양의 어느 작가가 말했다던 지나치게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홉 살은 세상을 느낄 만한 나이이다. 이 말이 이 책을 이끌어 가는 모티브인 것 같다. 또한 나 자신의 아홉 살은 지나치게 행복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또 다른 구절은 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해줄 게 없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 밖에 있어서 슬픈 거야 라는 여민이 아버지의 말은 뭔가 모를 감동을 주었다. 이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볼 수 없어서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슬프다는 것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