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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이름 : 복학생달력.c */#include // printf()의 이용을 위한 헤더 파일 포함//함수 원형int dayinyear(int yy);int dayinmonth(int mm, int yy);int leapyear(int yy);/*>>>>>>>>>>>>>>>>main() 함수 시작 >>>>>>>>>>>>>>>>>>>>*/int main(void){int yy, mm, total=0 , i, day ; // 변수 선언printf("n===>");scanf("%d %d", &yy, &mm); // 년도와 달 입력total = dayinyear(yy) ; // 전년도까지의 날짜수의 합for (i=1;i>>>>>>>>>>>>>main() 함수 종료 >>>>>>>>>>>>>>>>>>>>*/// 2001년 1월 1일부터 지정받은 해의 전년도까지의 날짜수를 구해주는 함수int dayinyear(int yy){int i,total=0;for (i=2001;i
    프로그램소스| 2004.11.26| 1,000원| 조회(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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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교육관과 교육적 신조 평가B괜찮아요
    나의 교육관선생님은 항상 내게 큰 존재였다. 멋모르고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이나, 클 만큼 큰 지금의 대학시절에 와서도 그 존재가치는 동일하다. 작년 내가 군에서 전역한 이후에 가장먼저 생각했던 일도 교직이란 걸 보면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남들은 내가 전자과 다니는 놈이 무슨 교직이냐고 그냥 취직해서 직장에 다니면 되지 왜 사서 고생이냐고, 또는 취직 못하면 임용고시라도 응시하려고 그러는 거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조금씩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선생님에 대한 동경.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서 이 길을 선택했다.나는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요즘 들어 스승이란 말이 많이 퇴색됐다 하더라도, 나의 어릴 적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선생님을 생각하면 존경이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교사로서의 가장 큰 덕목은 도덕성이다. 교사도 하나의 직업이지만 직업적 이윤추구를 따지기 이전에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 그것만큼 세상에 고결한 것은 없다. 어차피 사람이란 존재가 신처럼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부족함을 아는 만큼 좀 더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되고 싶다. 훌륭한 대학자나 스승은 되지못하더라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만큼은 본받을만한 삶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그리고 한 가지 더, 학생들 눈높이에서 같이 행동하는 교사가 되고 싶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원하는 교육적 활동을 선택하여 활동하고 나는 학생들이 교육적으로 의미 있고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학습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학생들에게 그들 자신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스스로 학습을 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하는 교육관은 학생의 흥미와 생각이 중요시 되며, 학생의 기분 혹은 정서적 상태를 존중하고 학생들과 같이 호흡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학생에게 무조건적인 명령을 하지 않고 열린 마음, 열린 시간, 열린 공간에서 학생의 흥미와 적성에 따라 학습이 선택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생 주도 하에 학습이 진행되도록 하는 교사가 되고 싶다.예비교육자로서 교육적 신조내가 공업교사 되는 만큼 발전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교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러한 신속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변화에 대한 빠른 인식과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사회를 개선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또 학생들로 하여금 지식은 탐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생활의 수단임을 깨닫게 하고, 쓸데없는 지식보다 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가지도록 지도하며,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사고력을 발달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결국 내가 살면서 경험한 산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이다.현대사회는 정보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다. 컴퓨터와 통신기기의 발달과 정보망의 구축으로 이제 국내외의 모든 정보에 점점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 가고 있으므로 이제는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라 정보를 수집하고 목적에 맞게 가공하여 활용하는 정보처리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다양한 정보의 원천을 파악하고, 컴퓨터와 정보망을 활용하는 능력을 갖추며, 정보를 해석하고 가공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길러 학생들을 지도할 것이다.참여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 목소리가 당연히 인정받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행정구조가 지방분권화 되어가고 소수의 특권층 위주의 사회로부터 서민의 사회, 대중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화는 생활 속에서는 다양성과 개성의 존중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학생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학생들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고 키워주며, 민주주의를 생활화하고, 민주주의적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데 교육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갈수록 세계는 글로벌화 되어가고 있다. 이제 집에 앉아서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공간 제약을 받지 않고 바로 접할 수 있다. 교과서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 수업은 탈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좀 거창해보이긴 하지만, 학생들의 의식을 세계화하고, 세계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인으로 길러내기 위해 문화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폭넓게 세상을 바라보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자원을 교육내용으로 활용할 것이다.중등교사로써 반드시 유의해야 할점.학생들은 교사의 행동에 민감하다. 나또한 학창시절 여러 선생님을 접해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나를 실망시키는 분은 남들과 비교하거나 차별하는 선생님이었다. 학생들은 개개인이 인격체로서 존중받아야 하고 저마나 특성이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운동을 잘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학업성적의 잣대를 가지고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남들과 비교한다면 그 아이에게는 고통일 것이다. 또한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집안이 빵빵하다고 해서 특정 학생을 편애하는 것도 지양해야한다. 교육은 평등해야 한다. 사회생활은 각박하고 힘들어도 학교와 교육현장 안에서만은 누구나 사랑받을 수 있는 학생이 돼야한다.내가 생각하는 중등교사는 아이들을 학습대상으로 보지 않아야한다. 물론 학습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학습대상으로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야한다. 아이를 절대 무시하지 않고 성인을 대하는 것보다 더욱 신중해야 되고, 말 한마디, 몸짓하나 까지도 조심해야 된다고 본다. 아이는 교사를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이를 대하는 교사의 중요성이 높다는 것을 항상 가슴깊이 명심하고 아이들을 대할 것이다.
    교육학| 2004.11.26| 3페이지| 1,000원| 조회(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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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대구 국립박물관을 다녀와서
    박물관 견학을 하라고?여러분~ 박물관 꼭 가야죠!한국사 수업을 들으면서 항상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내가 과연 박물관에 갔을까? 가긴 갔다. 박물관 견학은 초,중학교 시절 빠지지 않는 국사선생님의 방학 숙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학여행이라도 갈 때면 꼭 그 지역의 박물관을 들르곤 한다. 그때를 생각해본다. 학생들 전체가 한 줄로 서서 박물관 전시품을 훑으며 지나간다. 지겨울라 치면 몇몇 아이들은 대열에서 이탈해서 전시관 중간 텅빈 공간을 두팔을 벌리며 비행한다. 나는 아마도 유리에 머리를 기댄 채 지쳐버린 패전병마냥 그 끝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입시에 찌들린 고등학교 시절 국사책을 박물관 삼아 사진에 나오는 유물에 그 시대와 국가를 대입했다. 그 시절 유물은 나에게 수학공식처럼 나오는 실마리에 불과했다.나는 결국 유물과 같이 호흡하지 못했다.가자! 국립대구박물관으로...일요일 오후 쌀쌀한 날씨였지만 나는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혼자 가는 내내 생각해봤다. 그동안 나는 24년을 이곳 대구에 살면서도 박물관 한번 가본 적이 없었다.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렇게 목청을 높여가며 하신 말씀을... 내가 대구 사람인가? 한심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오늘 뭐 하나라도 가지고 오겠다고... 가는 내내 놀이공원에 가는 아이마냥 마음이 들떠 있었다. 버스는 박물관 옆에 섰다. 표지판이 보였다. 국립대구박물관. 역시나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화살표를 따라 계단을 올라 섰다. 갈색 커다란 건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입구를 찾아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렸다. 매표소가 보였다. 200원을 꺼내 표를 한 장 샀다. 박물관 앞에서는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팽이치기를 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였다.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지만, 다들 애들이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들어가는 입구엔 커다란 플랜카드가 눈에 확 들어왔다. 상주 특별전과 영화상영. 이거 돈 200원으로 본전 뽑겠는걸?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꼭 데리고 와야지.. 이만한 데이트 코스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박물관은 참 넓어...박물관에 들어가니 천장은 아주 높았고 안이 확 트였다. 박물관이 이런데구나! 세삼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박물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몇 몇 애들은 벌써 박물관 이곳 저곳을 놀이터 삼아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 홀에는 상주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유물이 여럿 있었고 커다란 독 항아리도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가야하나? 계단을 올라서 2층으로 들어서니 전시실이 빙 둘러 있었다. 먼저 고고실에 들어가 보았다. 첨 들어서니 삑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쳐다보니 대구 경북 지역의 유적분포들을 지도에 불빛이 깜빡거렸다. 웃음이 좀 나왔다. 좀 어설프다는 생각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요즘같은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애들이 저런 것에 관심을 가질까? 내가 어릴 때 보던 깜빡이랑 별반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그 삑삑이 소리는 감상하는 내내 내 귓가를 맴돌았다. 유리창 안에 전시물들에 있는 설명을 애써 적으면서 보지는 않았다. 어릴 때처럼 연필을 바쁘게 굴려 가며 필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유물과 같이 숨을 쉬어보았다. 어떻게 썼을까?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그 시절 내가 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면서... 고고실에는 주로 대구 경북지역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나 장식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남부지방이던 우리 지역이 아주 오랜 예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저들도 지금의 나와 같이 생각하며 그 시대를 나름의 방식과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반가웠다. 한편으론 부러웠다. 몸은 편하지만 지금 현대의 복잡하고 지친 삶보다는 그저 의식주에 의지한 채 단순하게 살았을 옛 선인이 되고싶었다. 어느새 출구가 나왔다. 생각보다 짧았다. ‘이것밖에 없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는 미술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전시관 가득 찬란한 금색빛이 돌았다. 각종 금동 불상과 도자기들이 가득했다. 그 옛날 선인들의 조각을 보면서 ‘야, 어떻게 저런 새새한 표정까지 잡아낼까?’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관찰력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그 땐 무얼로 깎아냈을까? 옛날 사람이라고 미개하다고 본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난 과연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만한 작품을 하나 남기고 죽을 수는 있을까? 예술 작품이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시대가 발전하고 변한다해도 기술은 예술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한동안 전시실을 삥 돌고 있으려니 다리가 아팠다. 갑자기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곳 전시품의 진열유리 주위로 기다란 의자를 설치하는 건 어떨까? 그래서 관심있는 작품은 앉아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말이다. 그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린애 하나가 보였다. 엄마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뭐라도 하나 더 보여주려고 일으켜 세우지만 꼼짝도 하지 앉는 모양이다. 저 아이에게 필요한 건 눈으로 보이는 유물보단 직접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듯 하다. 도자기도 참 많았다. 도자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국사시간에 배운 그 빛깔, 굳이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니스를 바른 것도 아닐텐데... 민속실로 발길을 돌렸다. 모형들이 참 많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모습, 서민들의 생활상이 내 몸을 타고 나왔다. 저 곳으로 들어가서 생활하고 싶다. 그 때였을까? 갑자기 검은 정장의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시간 다 됐으니 빨리 보란다. 시계를 보니 5시 5분전이었다. 아쉬웠다. 아직 볼 게 더 많은데... 결국 상주 특별전은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내려오면서 또 와야지 하는 생각이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아쉬움 새로운 발걸음.박물관을 나오니 날씨는 더 추워졌다.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정도사지 5층석탑이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외투를 벗어 덮어주고 싶다. 나와서 박물관 건물 주위를 한바퀴 죽 돌았다. 그리고 냄새를 한번 맡아보았다. 느낄 수가 있었다. 난 이렇게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오지만 그 내음은 오래 갈 것 같았다. 예전처럼 ‘좋다, 괜찮네’ 라는 단순한 수식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다. 내가 지금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리포터를 쓰고 남기는 것 또한 이 시대 우리가 고민하고 행동하는 역사가 될 거라는 것을...유물 5점 조사, 탐구, 감상빗살무늬 토기-남부지방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 유물-그릇의 형태와 무늬의 구성면에서 중서부지방의 그것과는 비슷하지만 빗살 무늬의 선이 더 굵다. 황토색을 띠고 있다.-예전엔 몰랐는데 직접 빗살무늬토기를 가까이서 보니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갑자기 의문점이 생겼다. 왜 빗살무늬를 새겼을까? 이제까지 국사책을 봐왔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한번도 설명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밑이 뾰족한 걸 보니까 그 시대에는 평평한 바닥에 토기를 놓고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면 들고 다녔나? 아하! 들고 다닐려면 미끄러울테니까 마찰을 높이기 위해 빗살무늬를 그렸을거야. 그럼 손잡이라도 쓰지? 아무래도 그 시대 사람들은 손잡이를 쓸 만한 생각은 못했겠지. 나 또한 발달된 지금의 용기에서 해답을 얻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문/어학| 2004.11.26| 8페이지| 1,000원| 조회(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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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국채보상운동
    열면서...1997년 말 우리에게는 잊지 못할 IMF의 시련이 닥쳤다. 경제 침체와 내수 부진으로 인한 불황의 여파는 전 국민 모두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럴 즈음에 외채를 갚기 위한 수단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자기 집 장롱에 묵혀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동참했다. 그 때 우리 부모님도 손수 폐물을 가지고 가서 전국적인 운동에 참여하였다.이 때의 열기와 행동에 전 세계 언론이 놀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를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불렀다. 국채 보상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은 외채를 갚으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민간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러면 과연 국채보상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알아보고자 한다.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상황 (~1907년)1904년의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1905년 일본은 식민지 기초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채 3백만 원을 차입해 들여왔다. 이어 그 해 12월에는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금융공항을 구제한다면서 1백 5십만 원을 또 차입하여 들였다.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교육제도의 개선, 금융기관의 확장정리, 도로 항만시설의 개수확충, 일인관리 고용 등 각종 명목으로 고이율의 차관을 들여오게 하여 국채가 격증되어 갔다.이렇게 일본의 계속된 차관공세로 2년여 사이에 한국정부는 원금만 하여도 1천 6백 5십만 원에 달하는 채무를 지게 되었고, 해마다 늘어나는 이자 또한 상당한 금액이었다.1907년 2월에는 당시 신채로 약 3백 5십만 원의 구채를 정리하여 1천 3백만 원이 남아 있게 되었다.운동의 시작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키 위한 특별회를 연뒤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문제를 제의 하였다. 즉 국채 1천 3백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하므로, 우리 2천만 동 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 를 보상하자면서 자신부터 8백 원을 내겠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만장일치 로 서상돈의 제의에 찬동하였는데, 사장 김광 제는 당장 시작하자자면서 석달 동안의 담배서상돈 김광제 값 60전과 별도로 10원을 내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라 의연금으로 2천여 원을 각출하였다.국채보상 취지문1907년 2월 초순 2월초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서울에서 취지문을 맨 처음 보도한 것은 2월 16일자의 이었다. 의 보도는 즉각 서울시민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채보상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삼가 아룁니다. 무릇 신민이 충으로 행하고 의를 숭상하면 이로써 그 나라는 흥 하고 백성은 편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의가 없으면 이로써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음이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구주(毆州)에서도 부강한 나라와 멸망한 나라들의 역사는 모두가 충의를 소중히 하고 숭상하는지 여하에 기인하는 바라 ......근세 역사를 보건데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진멸한 에집트나 월남, 폴란드 등의 국민은 모두가 단지 자기 한몸과 자기 집 만을 알 뿐, 군주나 국가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 인 즉, 이는 자함자멸(自陷自滅)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열심 하며 충의를 분발할 때가 아니리오 .....지금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이를 갚으면 나라는 존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 추세이라.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 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이 라. 국토란 한번 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어찌 월남 등 멸망한 민족의 꼴 을 면할 수 있으리오 ... ...그러나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고 재산을 축 내지 않고 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다. 2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 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 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 .....아! 2천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가 있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원하노 니, 대한의 신민과 여러 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여 알려서, 모르는 이 한 사람도 없 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명(聖明)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유지하 기를 천만행심이로다.국채보상운동 대구 군민대회대동광문회는 1907년 2월 21일 대구 북문 밖 북후정에서 개최하였는데, 서상돈 등 수 천명의 유지ㆍ신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였다. 군민의 호응은 열광적인 것이어서 만장일치로 박수갈채하고 의연금을 내었다. 그 중에는 젊은이 노인의 모든 신사들, 젊거나 나이든 모든 부녀들, 술파는 노파들, 불구의 거지아이들, 푸줏간 정육상들, 책을 낀 어린이들과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 모두 강개하고 분발하여 의연금을 내었다.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확대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설치되어 운동을 전국적으로 조직화 했으며 이에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 한규설 양기탁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이처럼 국민들의 애국운동이 고조될 즈음에 고종황제가 단연에 참가함으로써 이 운동은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되는 계기를 잡게 되었으며,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원 이상이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 남일동의 7부인회이 결성한 폐물폐지 부인회가 전국 여성운동의 효시가 되었다.국채보상가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 대구 서공 상돈일세. 1천 3백만원 국채 갚자고 보상동맹단연회 설립했다네. 면실하는 마음 발양하니, 대한 국민 분명하도다. 지금 우리 국가 간난(艱難)한데 누가 이런 열성 가질건가............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외인 부채 해마다 이식 불어나니 많은 그 액수 어이 감당하리.적의 공격 없어도 나라 자연 소멸되면, 아아, 우리 백성들 어디 가서 사나.이 나라 강토 없게 되면 가옥, 전토는 뉘 것인고..............여러분, 여러분, 때를 잃지 말고 보상하오국채 다 갚는 날 오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손가. 힘씁시다. 힘씁시다. 우리 단천의 여러분이여.(단천 국채보상소의 발기인 이병덕·김인화 등이 만들어 부른 노래)각지역별 국채보상소 설립 상황(1907)도 별보 상 소 설 립 지 역강 원 도춘천군(3.26) 원주군(5.12) 추풍령(8.2)경 상 도대구 광문사(2.21) 동래부(3.10) 대구 남일동(3.8) 국채보상경남찬성회(3.14) 국채보상경남상회(3.28) 창원, 마산항(3.29, 5.28) 청도군(4.4) 상주(4. 9) 성주군(4.12) 의령군 덕곡서당(4.14) 부산항 좌전리(4.19) 경산군(4.28) 부산항 좌천리단연회(5.1) 현풍군(5.14, 5.26) 용궁군(5.14)경 기 도안성군 서리(3.29) 수원(3.29) 포천(5.28) 강화군 외주동(5.29) 장단충 청 도보은(4.3) 청주군(4.19) 옥천(3.8, 4.4) 단천군 남문(4.14) 한산(3.17) 금산군(3.19)덕산(3.20) 영동군(3.23) 진천군(5.19) 공주군(5.22) 제천, 호서협상회(5.19)전 라 도국채보상의무소(전주·광주, 3.19) 진안 장수 양군(3.26) 군산항 객주상사(4.14) 장성군(5.2) 정읍(5.9) 제주군 신재면 성덕리(5.10) 부안군(6.1) 무장(6.30) 완도(7.5) 광주(7.5) 구례(7.13) 해남(7.30) 무주(7.30) 태인황 해 도수안(3.15) 재령군(3.28) 은진(4.27) 안악군(5.7, 5.11) 은률군(5.28) 옹진(7.9) 장연
    사회과학| 2004.06.29| 5페이지| 1,000원| 조회(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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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달성을 다녀와서
    대구 달성(達城)을 다녀와서...대구시민들이 즐겨 찾는 달성공원은 사적지라기보다 휴식공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곱게 단장된 꽃과 연못, 기념탑, 여러 동물들이 있어 공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대구에 태어나서 살다보니 달성공원에 다녀 올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달성공원에 갈 때면 항상 동물만 보게 되어 '동물원'이란 생각을 했는데, 우연히 친구에게서 이곳 달성이 '사적공원(史蹟公園)'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문화유적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에 대한 소개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눈과 마음으로 달성을 다녀오게 되었다.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나는 간단한 소지품을 챙기고 달성공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이내 버스는 달성공원 근처에 도착했고 나는 공원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달성공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여기저기서 트로트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원 입구 앞에는 힘에 겨워 보이는 노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입장료는 공짜였다. 그래서 노인들이 많은가보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확 트인 공간에 잘 정리된 잔디밭이 햇살만큼이나 날 눈부시게 했다. 그리고 내 시선을 끄는 것은 공원 주위를 빙 둘러싼 달성이었다. 오늘만큼은 대구 달성을 느껴보기로 했다.달성에 올라서니 제일 처음 안내문이내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나는 대구 달 성이 사적 제 62호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달성"은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쌓 은 토성(土城)으로 일반인이 보기엔 그 저 평범한 언덕배기라 여겨질 만큼 낮 다. 이 토성은 우리나라 성곽 중 가장 이른 시기인 3C경에 처음 쌓았던 것으 로 북서쪽이 높고 남동쪽이 낮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달성의 넓이는 동 서로 380m, 남북으로 470m정도며 못 이 두 개 샘이 세 군데가 있다. 청동기 시대 이래 소국을 형성했던 정치집단이 생활 근거지였던 낮은 구릉에 성을 쌓았 던 것으로, 이 정도 성을 쌓기 위해선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성내에는 50호 정도의 사람이 살았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성밖에서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0년대 발굴조사에 의해 패총(조개무지)와 적갈색 무문토기, 회색타인문토기 여럿과 목책(木柵)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상이 내가 조사해본 달성에 관한 내용이다.이렇게 대단할수가!나는 안내문을 다 읽은 후에야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산책로처럼 나있는 토성 위를 걸었다. 날씨가 많이 쌀쌀했지만 산책로에는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토성 위를 걸으면서 옛 시절 대구를 호령했을 영웅 호걸을 상상해 본다. 어 흠~~때마침 고개를 토성 바깥으로 향했을 때 대구 시가지의 모습이 눈에 가득들어왔다. 다 보였다.숨을 크게 들여 마시니 아줏 상쾌했다. 토성을 경계로 토성 안에서는 권력계층이 살았고 밖에서는 그 외의 평범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생각하니 요즘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잘살고 힘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력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서 뭉쳐 살거나 나름의 지위를 누리며 사는 것 같다. 요즘 우리나라엔 강남 8학군이 있었듯이 과거 대구에는 달성이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니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길을 따라 토성 위를 걷다 보니 관풍루가 떡하니 서 있었다. 관풍루는 선조 34년(1601) 대구로 옮겨온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다.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의 정남쪽에 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를 만들어 관풍루라 했다. 관풍루는 주위에 큰 북, 종, 피리, 나팔 등 풍악기구를 준비해 놓고 매일밤 10시에 문 닫고, 새벽 5시에 문 여는 풍악을 올렸다고 한다. 이 풍악소리에 맞춰 동서남북 4개 성문을 열고 닫는 의식절차를 엄숙히 행하였다고 한다. '관풍루'는 감사가 누에서 세속을 살핀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으로 대구읍성이 일제에 의해 헐리자 1906년 이곳으로 옮겨졌고 건물이 낡아 최근에 해체 복원된 것이다. 누 위로는 출입이 금지되어있어 올라 갈 수는 없었지만 옛 시절 풍악소리가 내 귓가를 스치는 듯 했다.한참을 오르고 내리며 걸었을까 눈에 표지판 하나가 들어왔다. 달성이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문화재이므로 후손에게 조상의 슬기를 물려주기 위해 원형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무와 돌을 아껴 길이 아닌 곳은 다니지 말라는 당부의 내용을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걷는 이 길이 문화재였던 것이다. 내가 걷고 많은 사람이 걸어서 그런지 길 곳곳에는 여러 갈래로 뻗은 길도 있었고 깎여 나간 흔적도 보였다.그리고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던 모 습은 커다란 나무가 뿌리까지 드러 나서 쓰러질 듯이 기울여져 있던 모습이다. 나무의 한 쪽을 기다란 쇠 받침대가 처량하게 받치고 있었 다. 이런 뿌리까지 들어난 나무가 길 곳곳에 있었는데 아마도 토성이 점점 깎여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중요한 문화재가 훼손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씁 쓸했다. 어쩌면 대구 달성이 깎이고 깎여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흔적을 읽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선조의 지혜가 뛰어나고 후대에 잘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보 존되지 않았던 유산은 결국 사라지 고 말 것이라는 것을 여러 사례에 서 많이 보았다. 어느 사회든지 발 전과 창조를 위해서는 그 선대의 경험이 축적된 후에가 가능한 법이다. 결국 우리는 후대를 위해 문화 유산을 아끼고 지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이런 다짐을 하고 토성을 조심조심 내려왔다. 토성에서 내려오니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날씨도 많이 풀린 것 같고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가족 단위로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달성공원 입구에는 향토 역사관이 있었다. 아무래도 대구 지역 역사는 요즘 나의 한국사 수업에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터라 나의 발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1층에는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쇠도끼, 금관, 말장식, 신라시대의 중악이었던 팔공산과 달성의 역사, 고려시대의 부인사, 신숭겸순절지, 조선시대의 봉수, 교통, 통신, 무역상황도, 일제강점기의 대구, 광복과 4.19 혁명, 6.25 전쟁 상황 등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대구 역사를 사진 자료와 복제한 유물을 통해 설명 해주고 있었다.
    사회과학| 2004.06.29| 5페이지| 1,000원| 조회(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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