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문화사{- 중국 근대화의 실패요인 - -{목 차서 문- 2 -본 문. 외부적인 요인 - 서구열강의 침략성. 내부적인 요인 - 청정부의 문제점과 양무운동의 모순점. 사상적인 요인 - 유가 이론에 바탕을 둔 인문적 사상성. 메이지 유신과 비교된 중국의 근대화- 3 -- 3 -- 4 -- 6 -결 론- 7 -서 문얼마 전에 북경자전거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중국의 한 시골청년이 북경이라는 큰 도시에 상경하면서 겪게되는 고뇌와 현재 중국인들이 자본주의로 적응되어 가고 있는 모습들을 그려준 영화였다. 그 영화 하나만으로 중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판단하기에는 무리겠지만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낙후된 중국의 현실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거대한 중국은 한국 및 일본에 비해 뒤늦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역사를 거슬러 중국이 개항하게 된 시점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의 양무운동과 자강운동의 시점에서의 성공여부가 중국 근대화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따라서 중국 근대화의 실패 요인을 논하기 위해서는 양무운동이 일어나게 된 시점의 중국 내부의 상황과 외부적인 상황을 고찰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적인 여건과 더불어 중국인만이 가지는 문화적, 사상적 특성에 관해서도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그리고 과연 앞선 특징들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에 대한 비교를 통해 좀더 정확한 실패요인을 추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이러한 다양한 접근을 통해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중국이 뒤늦은 발전을 맞이하게 된 원인을 찾아보도록 하겠다.본 문● 외부적인 요인 - 서양 열강의 침략 의욕 심화서구 열강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산업 혁명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19세기 중엽 이후 제국주의 체제로 이행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원료 산지와 넓은 상품 시장, 자본의 투자 대상을 확보하기 위해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히 단절시킴으로써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중심부-주변주의 구조로 전환시켰다. 청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급속하게 세계체제에 편입되었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과의 대결에서 패함으로써 점차 동아시아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이제껏 동아시아 맹주로서 군림해오던 청정부는 모든 기득권을 타의에 의해 포기하게 됨으로써 국가 존립의 위기를 느끼게 되며 자립갱생의 길을 찾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양무운동 이라고 하는 정부주도의 개방정책을 펴게 되는데, 서양의 앞선 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러한 개방의식은 서구의 침략야욕을 함께 고려해야 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개방과 문물의 수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겠다.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펼 수 없는 서방세계의 침략 분위기 속에서 동아시아의 최대 상품시장이 될 중국은 열강에 의해 영토분할과 자원의 약탈을 허용하며 의화단 운동의 반외세 세력의 등장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화할 수 있었던 적절할 시기를 외세의 침략적 상황으로 인하여 놓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능동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 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청정부의 대처는 적절한 보수적 성격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점차 서구 열강에 의해 모든 영토가 잠식되어 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서구열강의 침략은 중국인들의 반발심으로 얻게되고 근대화의 흐름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의화단 운동이라는 반외세 운동으로 이어져 점차 근대화와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내부적인 요인 - 청정부의 문제점과 양무운동의 모순점청정부가 근대화 하려는 노력은 양무운동에서 시작되지만, 양무운동을 추진한 청정부 내부의 문제점과 양무운동 자체의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어, 그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첫째로, 청정부의 중앙권력의 핵심이 양무운동의 근대화 운동으로서의 발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http://my.dreamwiz.com/chi수 밖에 없었다.또한 양무파 관료가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에서만 개별적으로 시행하고, 전임지방관이 시행한 양무사업을 후임지방관이 중단시키거나 지방관이 전입되면 그가 설립한 기업의 설비자체를 자신의 새임지로 이전하는 등 통일되고 일관된 지속적 사업이 되지 못하고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한 양무운동은 근대화운동으로서 명확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지역성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권력핵심부가 통일되고 지속된 사업으로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일부관료를 제외하고 여전히 보수적 성향을 지닌, 권력투쟁에 익숙한 관료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으며, 지방의 양무운동 추진 주체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http://my.dreamwiz.com/china577/china/china23.htm따라서 양무운동은 중앙 핵심기구의 지원 없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비효율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한계성을 드러나게 되었다.양무운동이 중앙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중앙정부의 보수성과 부패, 타락이었다.{) http://myhome.naver.com/mugam20/renwu/xitaihou2.htm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들은 개혁적인 외부 문물의 도입보다도 자신들의 안위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됨으로써 적극적인 근대화를 유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구 문명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경직된 청정부의 계급구조가 타파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희생을 전제로 한 개혁은 용납하지 않았던 이유 때문에 근대화는 소극성을 띌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태후라는 정치적 실권은 부패, 타락을 통해 국가재정을 파탄 위기로 몰게 되고 민중이 근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게 되었다.이에 불필요한 관제개혁 등으로 인한 중앙과 지방의 권한 정리에 있어서도 지방관들의 반발로 인해 지방의 근대화 또한 보수성을 띄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됨으로써 보수세력의 안위보전에 의한 근대화의 위협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가게 되었다.또 다른 내부적인 원인으로 양무운동 자서구문화의 수용은 배제된 채로 기술과 과학문명 만의 유입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결합에 있어 중국문화의 우위를 바탕으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주체적인 자세는 오히려 서구문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시민혁명을 통해 이룩된 서구문명의 근대성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서구문명의 침략성만이 근대화의 전부인 것처럼 오인되어 흡수됨으로써 진정한 서구문화의 정수를 유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물론 양무운동의 3단계인 변법운동으로 인하여 전격적인 근대화 추진방향이 결정되었지만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세력의 반발로 효과적인 변화를 꾀하지 못함으로써 양무운동은 그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또한 태평천국 운동의 진압으로부터 연유된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이 제시한 청정부의 봉건제적 모순점의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구의 표면적인 기술에만 연연하게 됨으로써 온전한 개혁의 모델을 제시해주진 못하였다.● 사상적인 요인 - 유가 이론에 바탕을 둔 인문적 사상성 -근대화란 지도층의 변화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이므로 모든 국민들의 문화적 변화를 수반하여야 한다. 중국인들이 사상적으로 근대화되지 못한다면 어떠한 제도와 법제만으로도 한계를 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의 타문화에 대한 수용성을 가늠하여야 한다.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비교나 일시적인 역사적 흐름만으로 평가하기 힘들며, 문화 혹은 역사에 관한 뿌리깊은 분석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가지는 사상적 특징과 근대화되어 갈 시기의 중국인들의 자세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중국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이었다. 이러한 자부심 속에는 유가사상이라고 하는 전통깊은 철학사상이 있었으며 그 사상은 동아시아의 정신적인 바탕이며 실생활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유가사상이 바라보는 자연관은 다음과 같다.{) http://www.chinainkorea.co.kr/중국역사/중국전통사상.htm사실 유교사상은 전국시대 공자와 맹자 외의 실용적인 부분에 대한 성찰은 배제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그는 農을 중시하지 않았고, 대중들에게 특정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포괄적 교양인이 될 것을 피력하였으며, 모든 생산 기술직에 대해 '천한 일'이라고 일컬으며 배척의 태도를 보였다. 후대의 유교 사상 역시 공자의 이러한 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유교에 있어서의 자연관은 상당히 빈약하고 미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에 반해 서구문화의 초석을 이루는 서양철학은 그리스 철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http://chonnam.chonnam.ac.kr/~sunim/phil/phil_his_2.htm서양철학의 시작은 BC 6∼5세기를 말하며 자연을 대상으로 그 속에 존재하는 변화하지 않는 원질(原質)을 탐구하였다. 원질을 물로 본 탈레스, 무한정한 것이라고 생각한 아낙시만드로스, 공기로 본 아낙시메네스, 또 불생불멸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파르메니데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레이토스, 다수의 원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다원론자들이 이 시기에 속한다.이러한 그리스 철학은 인간이 처해 있는 세계 전체를 진실한 모습에서, 즉 세계 전체의 객관적 진실을 포착하고 이것을 개념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이론적 인식활동(세계관의 학문)을 말하며, 이것을 지침으로 인간의 개인적·사회적 생활을 보다 잘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갖는 학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역사적 발전과정이 있다. 원시민족 간에 있던 여러가지 신화, 전(前)과학적인 해석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으나 적어도 과학적 사유(思惟)의 탄생을 볼 수 있는 시기를 그 시원(始源)으로 한다.이처럼 양자간의 철학의 차이점은 발생기원부터 상반되어 있다. 유가사상은 인간적인 탐구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서구문명의 철학은 그 시작을 자연의 본질 탐구에 두고 있다. 따라서 한쪽이 상대적이며 경험적인 반면에 다른 한쪽은 절대적이며 논리적인 사고과정을 필요로 한다.이것으로 인하여 중국의 전통사상과 서구문명의 근본적인 사고 방식이 상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고의것이다.
{동서사상의 비교{-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 -{목 차서 문- 2 -본 문.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란. 서양철학(자연철학)의 배경. 서양철학의 발전. 동양철학(유가사상)의 배경. 동양철학의 발전. 동서양 사상의 비교. 서양이 바라본 동양. 동양이 바라본 서양- 3 -- 3 -- 4 -- 4 -- 5 -- 5 -- 6 -- 6 -결 론- 7 -서 문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비교하기 이전에 우리는 주관적인 개인의 판단만으로 쉽게 타자(他者)를 평가하고 있다는 전제를 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문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관계를 결정짓는 객관적인 논리나 이론 보다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주관적 인상이나 판단에 의해 쉽게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예컨데, 서양인이 동양인이 개고기를 즐겨먹는 모습을 보고 동양인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문화라고 평가할 수 없으며, 성인이 되면 으레 자식이 독립하게 되는 서양의 가족문화를 두고 우리가 부모 자식간의 애정이 부족한 정서가 메마른 민족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이처럼 이러한 가치 판단은 적절한 논리적 과정과 준거 없이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거나 장님 코끼리 어루만지기 식의 편협한 가치 결정의 결론을 얻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를 뛰어넘어 문명과 문명의 시각적 차이에서 형성된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단순한 한 시대나 한 사건에 국한하여 비교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이러한 문명간의 가치 판단을 각 문명이 가지는 본질적인 요소를 통해 비교하고자 한다.그렇다면 각 문명(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이 가지는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철학을 들고자 한다. 인간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모든 행동의 기본적인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은 그 시대, 그 국가의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하나의 문명권이 동일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정의로부터 이러한 문화의 동질감은 근본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가치기준이 동양 - 이 명백히 서양 제국주의의 한 형태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이 가진 적실성과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 논의는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일방화하고 단순화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샤오메이 천은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역설적이고 혁신적인 시각으로 오리엔탈리즘 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개념으로 차용하고 있다.옥시덴탈리즘(동양에 의해 구성되고, 오해되고, 날조된 서양)을 통해 동서 관계의 상호 문화적·다문화적 관계의 복잡성을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하게 된다. 예컨대 저자는 마오쩌둥 이후 중국 지식인들이 극단적인 "친서양, 반전통"의 태도를 취한 이유가 중국 내 지배 체제의 억압에 맞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해방을 이루기 위한 전략이었음을 보여준다.그렇다면 서양과 동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정의는 헌팅턴이 현존하는 문명을 서구, 유교, 일본, 이슬람, 힌두, 슬라브정교,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여덟 개로 분류를 통한 정의에서 참조할 수 있다.{) 헌팅턴의 문명의 분류와 문명충돌론에 대한 이론 http://community.freechal.com/ComService/Activity/PDS/CsPDSContent.asp?GrpId=31465&ObjSeq=1&PageNo=1&DocId=217572이러한 여덟 개의 문명 분류 중 서구와 유교(일본을 포함) 문명권을 각각 서양과 동양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따라서 서구를 지배하던 철학 체계 (그리스 자연철학)와 동양의 유교적 철학 방식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서로 다른 문명의 본질적인 차이로 인해 발생한 시각적, 입장적 차이를 유추하고자 한다.● 서양철학(그리스 자연철학)의 배경{) http://wissen.com.ne.kr/frame-d.htm서양철학의 역사는 그리스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물론 그 시대 이전에도 사고를 지배하던 사상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그 시대를 신화시대라고 정의하고, 구체적인 철학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은 탈레스 이후의 자연철학이라 본질에 대한 탐구가 깔려있다.탈레스로부터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자연철학의 연구는 만물의 본질(arche)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인간의 사고를 합리적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유형적 경험을 중시하는 소피스트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상대적인 원리를 중시한 헤라클레이토스가 출현했지만 대다수의 철학의 흐름을 절대적 가치에 대한 본질의 연구로 치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바탕은 전반적인 서양철학의 흐름을 합리적 이성적 사고가 주가 되는 발단을 이루게 된다. 즉, 자연의 원리는 하나이며 이러한 원리를 통해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그리스 사상은 이로써 서양의 문화의 두 가지 줄기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근원을 이루며 정신적인 기저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서양철학의 발전중세시대 종교에 의해 사고를 지배받던 서양의 역사는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신앙과 지식의 분리를 통하여 또다시 이성적인 사고관의 발전을 맞이하게 된다. 합리적인 사상의 발전은 인문주의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놀라운 이성적 능력을 찬미한 인간은 스스로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며 자연에 대한 분석과 과학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인간중심적 사고관의 발전은 이러한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기계문명을 탄생시킨 인간능력(다분히 서양인 스스로에 대한)의 맹신이었으며 문화적 우월감을 이루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합리적 사고관의 바탕으로 탄생된 기계문명은 수백년 동안 이전 수세기에 걸친 역사에 필적할만한 발전을 이루었고, 좀더 많은 생산성과 문명의 발전을 위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팽창하게 되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이러한 바탕 밑에는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중요시하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통해 외부환경을 분석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고가 전제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 서양의 과학문명을 지배하는 것을 합리적 사유형태에 근거한 그리스 자연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르네상스를 맞이한 이후 신앙과 이성의 분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독립된 개념정립을 통해 두회체제를 갈망하는 바탕에서 생겨났으며 공자가 내세운 인간과의 질서를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사상의 중요한 중심으로 두고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 속에서의 수많은 국가들의 분쟁은 자연현상이나 본질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치중하게 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이러한 유가의 입장에서 자연에 대한 해석은 인간에게 활용되고 개발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인간은 그저 그것이 주어진 대로 이용하려는 존재이다. 구체적, 감각적인 요소의 중시와 인간 중심적 사고관은 자연과 합치되어 자연과 순응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공자의 천명 사상은 인간과 하늘(자연)을 하나로 보고 자연에 대한 순응적인 생활자세를 통해 자연에 대한 수동적인 생활자세를 주지시키고 있다. 이는 군주의 사상이 문제가 되면 자연현상이 반영되어 재앙이 온다는 식의 사고를 통해 은연중에 자연에 대한 순응적인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농경문화에 바탕은 둔 동양의 철학적 관념은 능동적인 자연탐구나 이용보다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대한 안착만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고 오히려 안정된 사회 속에서의 계급간의 인간관계에 대한 가치 정립만이 철학의 목적이 될 수 있었다.따라서 모든 철학적 사유는 인간관계, 심리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들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이어진다. 사고의 과정은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윤리론적인 사고에 대한 논리의 전개로 구체적인 실용 학문의 연구를 등한시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양철학의 발전한나라 이후의 중국에서의 주요 정치이념은 유가사상으로 정립된다. 이 말은 곧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양문화권이 철저한 신분 관계를 중시하는 유학적 사고관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농경문화의 발전과 인간질서와 예의에 대한 중요성은 생활속에서의 철저한 사고의 경직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예를 중시하는 경향은 행위에 관한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고, 신분적, 계급적인 질서를 중요시한 개념은 신분적인 차별상의 개념과 상당히 상치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성적인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자연을 연구하게 된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학문과 종교의 분리를 유도하여 철저히 과학적인 접근방식을 고수하게 된 서양철학과 생활윤리로서 종교와 학문의 일치를 이루게 된 동양의 철학은 발전의 방향을 달리하게 된다.이후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근대로 오면서 과학의 발전을 통한 기계문명의 탄생을 이루는데 사상적인 바탕이 되었으며 서양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기초을 이루게 되었다.유학은 중국의 정치이념과 종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상하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학문의 방향을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유가사상이 등장하게 된 이후 서구열강이 침식되어 오기 전까지 중국 및 동양의 정신적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자연을 분석하는 입장에서도 서양은 합리적, 능동적으로 이용 개발하여 인간을 위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동양은 수동적이며 순응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며 안빈낙도하려는 생활자세를 견지한다.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사상 중 어떤 것이 뛰어난 철학이며 동시에 어느 문화 및 문명이 우수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각각의 사상은 그들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장 올바른 가치기준이었다. 서양의 합리적 사고과정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현상과 본질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동양의 인간윤리로서의 사상은 혼란한 시기의 적절한 조치로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들은 주어진 조건에 맞게 점차 정착되어 다듬어진 결과가 현재 문명을 이루는 정신적 바탕이 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서로의 옮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다만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등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명간, 국가간, 개인간의 빈번한 접촉과 충돌로 이전의 국한된 문명의 존재가 아닌 다양한 문명이 혼합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로의 문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방식에 내재된 철학의 흐름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서양이 바라본 동양그리스 자연철학이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서각된다.
. {-삼국시대 무덤형식 - -{고분의 정의고분은 흙을 높이 쌓아올린 고대의 묘(墓), 또는 성토하여 분구를 만든 묘를 의미하기 도 하며 고총(高塚)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고분이라 부를 수 있는 분묘는 세계 각 국의 국가적 통일기 초에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고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고묘 (古墓;오래된 무덤)라고 하여, 연대에 따라 은묘(殷墓)·전국묘(戰國墓)·한묘(漢墓)·당 묘(唐墓) 등으로 부른다.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3∼4세기경 삼국은 각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강력 한 왕권을 바탕으로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높고 큰 고분을 축조하게 되었으며, 불교의 화장묘제가 새로 등장하는 6∼7세기경까지 고분의 조영이 이루어 졌다. 삼국형 성초기인 3∼4세기경부터 화장묘로 변화하는 7∼8세기경까지 조성된 유력자(有力者)들의 무덤을 고분이라 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무덤 형식인간이 죽은 자를 위해 무덤을 만든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구석기시대의 무덤이 발견된 예가 없고 신석기시대부터는 확실한 예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존재하나 이러한 선사시대의 무덤은 고분이라고 부를 수 없다. 고 분이란 사회구성원간의 평등한 관계가 깨어져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분리된 후 지배계급들이 자신들 의 우월한 정치, 경제, 혹은 종교상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일반민들과는 다른 형태로 만든 무덤을 말한 다. 따라서 계급이 발생하고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무덤은 고분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분묘로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분은 국가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하는 데 많은 자 료를 제공한다.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많은 고분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경우 압록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 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 이른 시기의 고분에 해당되며 백제의 경우는 한강 하류에 분포하는 돌무지무덤, 신라와 가야는 영남지방 각지에 분포하는 덧널무덤[木槨墓]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이다. 이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 사이에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 한 것으로, 평양 천도 이후는 이 무덤의 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봉토는 돌무지무덤처럼 방대형을 이루 나 때로는 바닥 주위에 몇 단의 돌기단을 쌓기도 한다. 돌방은 방의 수에 따라 널방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墓]과 앞방[前室]·뒷방[後室]· 옆방[側室] 등 두 방 이상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多室墓] 으로 나뉜다. 돌방의 벽은 이른 시기에는 냇돌 또는 깬돌을 썼지만, 후에는 잘 다듬은 큰 판석을 여러 장 세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납작천장[平天障]·활천장[穹天障]·모줄임천장[抹角藻井式天障] 등이 있는데, 특히 후자는 천장 네 귀에 삼각형으로 받침대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석 한 장을 덮는 형식이다. 이러한 봉토분 중에는 돌방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는데, 이 무덤은 축조 방법과 그림의 주제(主題) 및 변천과정으로 보아 3시기로 구분한다. 전기(350∼450년쯤)부터 100년 단위로 구분하는데, 전기에는 무덤 주인공의 인물풍속도가 주로 보이다가, 중기(450∼550년쯤) 이후에는 사신도(四 神圖)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을 비롯해서 불교적인 장식무늬도 나타난다.고구려의 봉토분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 사이에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 생한 것으로 평양 천도 이후에는 이 무덤 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한편 이들 봉토분 가운데에는 돌방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무덤의 축조 방법과 그림의 주제 및 변화 과정에 의해 3시기로 구분한다.전기(350-450)의 무덤으로는 외방무덤(單室墓) 또는 여러방무덤(多室墓)이 있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있 다. 그림은 벽면에 회칠을 하고 회가 마르기 전에 묵선(墨線)으로 윤곽을 그린 후 안료로 채색하는 방법으 로 그렸으며, 그 주제로는 안악 3호무덤(冬壽墓)과 덕흥리 무덤에서 볼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고구려는 313년에 낙랑군을 멸망시켰지만 평양으로 서울을 옮긴 것은 백여년 뒤인 427년이었다. 이 백년 동안 또는 고구려가 처음으로 평안도·황해도를 넘어서 백제와 육탄전을 벌인 369년까지는 낙랑의 고토는 거기 남아 있던 중국계 세력에 위임되어 일종의 자치령 같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것이다.그래서, 여기 중국계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추방되지 않고 바다를 통해서 동진과 왕래하고, 옛날 고국에서 가지고 있었거나 낙랑군 시대에 쓰던 관직명을 그대로 쓰면서 반 독립적인 위치에 머물고, 고구려도 당면 한 화북침공정책상 그러한 상태를 묵인 또는 방임해 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기 동수 또는 뒤에 나 올 前幽州刺史(덕흥리고분)같은 중요 망명객들이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 살지 않고 평양지방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평양역전의 영화9년(353)명 벽돌, 기타 동진 연호를 새긴 벽돌의 존재 등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다.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동수묘는 낙랑 멸망 후 낙랑 고토의 중국계 주민에 의해 구축된 무덤으로서 종래 의 낙랑고분과는 다른, 산동성 근남석묘같은 새로운 중국본토식 분묘형식을 본받은 것이라 하겠다.{{특히 주목되는 것은 동수묘의 각 석실의 천장이 고구려 봉토분의 한 특징처럼 되어 있는 소위 귀죽임천장(抹角藻井)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벽 위에 천장돌을 한두 단의 내밀기 쌓기를 한 다음 한벽에서 옆 벽에 걸치도록 돌을 비스듬하게 놓아 귀를 죽이면서 천장을 좁혀 올라가는 방법이며, 이것은 고구려 고분에서 많이 쓰여 마치 고구려에서 발명된 특수형식이라고 생각되기 쉬우나, 원래는 근동지방의 나무로 짜서 올린 천장형식이 각지로 퍼진 것이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기 3세기에는 앞서 말한 근남석묘에 출현했고, 5∼6세기의 대동운강석굴에도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동수묘는 우리나라서 가장 오랜 귀죽임천장인 것은 틀림없으며, 이 천장형식의 우리나라에의 유입경로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앞서 말한 근남석묘는 평면은 벽돌무덤은 백제시대를 통틀어 공주에 2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단면이 터널모양이고 기다란 전 돌을 가지고 길이모 또는 작은모쌓기로서 반복하여 만든 것이다. 사비(泗?시대의 무덤은 한성· 웅진시대 에 이어 기본적으로 장방형 돌방이 유행한다. 한편, 전남지방에는 늦게까지 토착적 묘제를 고수하여 특별히 큰 독무덤[甕棺墓]이 유행하였다. 영암(靈岩)·무안(務安)·나주(羅州) 등지에서 발견되는 이 독무덤은 지방 호족(豪族) 또는 마한 잔여세력의 묘제로서 중요시되고 있다.백제 고분의 변천은 대체로 도읍의 위치에 따라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성 시대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무덤이 만들어진다. 무덤 양식에는 돌무덤과 흙무덤이 있다. 흙무덤은 방이동과 석촌동 등에 남아 있다. 돌무덤은 고구려 초기의 무덤 형태와 비슷하다. 잠실 석촌동 고분 공원에 돌무덤이 여러 개 남아 있어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기록의 사실성을 보 여주고 있다.웅진시대가 되면 고구려 계통의 돌무덤이 없어지고, 널길달린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한성시대에 이어서 계속 만들어지며, 중국계 벽돌무덤[塼築墳]이 새로 만들어진다. 특히 장방형 돌방무덤에는 천장에 여러 가 지 변화가 있으나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 벽돌무덤은 백제 시대를 통틀어 공주에 2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데, 단면이 터널 모양이고, 기다란 전돌을 가지고 길이 모 또는 작은 모쌓기를 반복하여 만든 것이다. 송산 리(금성동) 6호분의 벽면에는 회칠을 한 뒤 사신도를 그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말해주고 있으며, 무 령왕릉(송산리 7호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되어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가 나와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보 여주었다. 또한 묘제나 미술 공예 연구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백제사 연구에 큰 영향을 준 중요 한 유적이다.사비시대가 되면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장방형 돌방무덤이 유행하지만 능산리 고분군에서 보 듯이 널길이 더욱 넓어져 널방의 너비와 거의 같아두침, 족침, 위에 각종 장신구로 치장한 왕, 왕비가 누워 있었고, 왕의 머리맡과 발아래 쪽에는 거울을 한 장씩 놓았을 뿐이지만, 왕비의 경우에는 머리쪽에 거울과 탁잔, 발 쪽에 다리미와 어렸을 때 썼다고 믿어지는 목걸이들이 들어 있었다.관 밖의 부장품으로는 관대 앞 한 단 낮아진 부분에 중국청자 술병, 술잔, 그리고 거문고가 있을 뿐이어 서, 많은 부장품을 넣어 현세를 연장하려는 신라와는 달리 죽은 사람을 혼으로서 대하려는 백제묘제의 특 색을 보여 주는 듯하다.한편, 연도에는 중앙부에 일각석수(一角石獸)인 진묘수(鎭墓獸)를 세웠고, 그 앞에 왕과 왕비의 誌石이 나 란히 놓여 있었다. 이 지석은 실은 중국 고분에서 유행한 매지권(買地券: 무덤의 터를 地神으로부터 산 계 약서)이며 왕비 지석의 뒷면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錢一萬文(전일만문)乙巳年八月十二日寧東大將軍(을사년팔월십이일영동대장군)百濟斯麻王以前件錢訟土王(백제사마왕이전건전송토왕)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토백토부모상하중관이천석)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매신지위묘고립권위명)不從律令(불종률령)이렇게 지하의 神, 토왕으로부터 무덤터를 사들인다는 매지권은 진묘수와 함께 중국 육조묘제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고, 지석 위에 놓여 있는 한묶음 동전도 양나라의 五銖錢이었다.{{무령왕릉 출토품 중에는 장신구로서 금제 관식, 금귀고리, 금목걸이, 금·은팔지, 칼, 장도, 거울, 구리그릇, 은그릇 등 공예품이 적지 않았다.금제 관식은 중국기록에 나오는 백제 귀족의 烏羅冠에 꽂는 「金花·銀花」의 실물이며, 맞새김 인동문을 기본으로 하면서 왕 것은 자연스러운 꽃가지 도안인데 대해 왕비 것은 좌우대칭으로 동안화되고 중앙에는 연화대 위의 꽃병을 배치하고 있다. 이 인동문은 고구려 벽화에서 유행한 것이지만, 그것을 관식의 주무늬로 쓴 것은 백제인의 창안인 듯하다.귀고리는 모두 세환식이지만, 끝에 달리는 하트형 장식이 달려 있는 등 신라의 귀고리와 큰 차이가 없다.목걸이는 탄화목 구슬로 만든 것과 단면 6각의 금대의 가늘어진 양쪽 끝을 고리다.
{{목 차사찰의 의미사원의 기원우리나라 가람의 역사. 우리 나라의 가람. 우리 나라 가람의 내부 전각사찰의 구조. 법당구조사찰의 문루와 그 의미. 일주문. 금강문. 불이문(해탈문). 피안교. 천왕문. 범종루(종각)법당의 종류. 대웅전(대웅보전). 대적광전(비로전, 대광명전). 약사전. 천불전(불조전). 응진전(나한전). 삼성각(칠성, 독성, 산신). 강당(講堂). 선방(禪房). 종각(鍾閣). 영산전과 팔상전. 극락보전(아미타전). 용화전(미륵전彌勒殿). 원통전(관음전). 조사전(국사전). 장경각(대장전). 포살당(布薩堂). 승방(僧房)불 상● 佛이란?. 불상(佛像)의 정의. 불상의 기원. 불상의 형식. 불상의 유형. 불상의 각부 명칭{{- 사찰전각과 불상 - -사찰의 의미사찰은 부처님의 존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며, 모든 불자의 수행과 전법의 중심이 되는 곳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규모에 따라 사찰 또는 절, 암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가람이라고도 한다.절은 범어로 비하라(vihara)라고 하고 비하라(毘訶羅)라고 음역하며, 수행을 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주처 (住處), 유행처(遊行處) 등으로 번역한다.인도에 있어서 최초의 절은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한다. 죽림정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서 기거하며 수행과 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했던 장소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절은 그 이전에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성불하신 그리고 설법하시 고, 열반을 보이신 4대 성지가 모두 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또한 불교 교리에서 보면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고 그 진리를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보이셨던 분이고, 스스로 진리를 구현하신 분이기 때문에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한다. 법신불은 온 세상에 불법이 두 루 미침을 의미한다.{사원의 기원인도에서 정사나 가람(상가라마)이라고 불리던 것이 중국에 들어 오면서 사(寺)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漢字)의 사(寺)는 공공기관의 뜻이 있로 이 세계가 극락정토임을 알게하는 법문을 표시한다.. 범종루(종각){{범종루는 다른 말로 종각, 범종각, 종루라고도 하는데,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 4물을 걸어놓는 누각을 말한다. 이러한 사물은 예불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범종은 특별히 지옥중생들의 제도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법고는 축생을 제도한다. 목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물고기와 같이 항상 정진하라는 의미와 함께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운판은 날짐승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법당의 종류. 대웅전(대웅보전)‘대웅’이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漢譯)한 것으로 위대한 영웅, 곧 부처님을 의미하는 말이다. 부처님에게는, 일반인은 가질 수 없는 큰 힘이 있어서 마군(魔軍)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처님이 되 었다는 뜻에서 붙혀진 이름인데, 특히 석가모니부처님을 일컬어 ‘대웅’이라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 가모니 부처님을 모셔놓는 곳으로, 대부분의 경우 사찰의 중심에 위치한 가장 큰 법당을 대웅전으로 조 성하고 있다.석가모니부처님의 손 모양(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 쪽으로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 印)으로 마군을 항복받았던 모습을 나타낸다.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왼쪽에 모셔진 분이 문수보살로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상징하는데 여의 주나 칼, 청련화(靑蓮花)를 들거나 청사자를 탄 모습으로 표현된다. 또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부처님을 모시며 부처님의 행원을 상징한다. 흔히 연꽃을 들고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나타낸다. 대웅전은 법화천 태종의 금당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법화계통의 전통이 남아 있는 사원에서 주불전으로 사용했다. 불국 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쌍계사, 관룡사 대웅전 등 많은 걸작들이 남아 있다.{{{{전남 해남 대둔사 대웅보전경기 안성 청룡사 대웅전(보물 824호)대웅전 현판. 대웅전의 부처님{{석가모니부처님 화갈라보살은 본래 정광불로서 아득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 석가모니부처님이 장래 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부처님이다.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더불어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상징하고 있는 이른바 시간삼세불인 것이다.법주사, 쌍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보경사 등의 팔상전이 알려져 있다.{{{통도산 영산전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팔상도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열반까지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그림으로 그 자세한 내용 은 다음과 같다.{{1 도솔래의상(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 : 석가모니부처님이 호명보살로 도솔천에 머물다가 마침내 사바세계로 출현하게 되자, 카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왕비의 태자로 탄생하여 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있는 마야부인의 모습, 상(相)을 잘 보는 바라문에게서 꿈의 해몽을 듣는 왕과 왕비의 모습 등이 주 내용으로 묘사된다. 이 때 바라문이 이르기를 “반드시 태자를 잉태할 것이며 훗날 출가를 하면 정각을 이루어 삼계중생을 제도할 것”이라 하였다 한다.{2 비람강생상(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장면) : 여기에서는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따뜻한 봄날에 마야부인이 궁중을 떠나 궁녀들과 룸비니 동산에 올라 무우수(無憂樹) 꽃가지를 붙들고 서서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낳는 장면, 하늘에서 제석천왕이 비단을 가지고 내려와 태자를 받으며 모든 천왕들이 온갖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태자가 땅에서 솟아오른 연꽃을 밟고 일곱 걸음을 움직이며 한손은 하늘을 또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는 장면, 아홉마리의 용이 깨끗한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시키는 장면, 태자를 가마에 태워 궁궐로 돌아오는 장면, 아지타 선인을 불러 관상을 보이는 장면 등이 묘사된다{3 사문유관상(四門밖에 나가 관찰하는 장면) : 태자가 사방의 문으로 나가서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살 혹은 묘향보살과 법륜보살을 모신다.. 용화전의 부처님용화전에는 미륵부처님과 그분의 협시보살로서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 혹은 묘향보살과 법륜보살 의 삼존을 모신다. 미륵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면 수범마를 아버지로 하고 범마발제를 어머니로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염부제에 태어날 것으로 예정되어 있 다. 또한 미륵불은 화림원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용화세계를 건설하고 복있는 중생들을 무수 히 제도하기로 되어 있는 미래불이다. 본래는 인도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 를 받은 후 지금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기 전에 계셨던 곳인 도솔천의 내원궁에 머물고 계신다. 미륵불은 그곳에서, 천인들에게 법을 설하면서 하생하여 성불할 날을 기다리신다고 한다.그런데 이와 같은 미륵부처님에 대한 신앙은 예로부터 경전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발전해 왔다. 그 하나는 좼미륵상생경좼에 의한 상생신앙이고 또 하나는 좼미륵하생경좼에 의한 하생신앙을 말한 다. 상생신앙은 현재 미륵부처님이 계신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이고 하생신앙은 미륵부처 님이 하루 속히 이 땅에 도래하시기를 갈구하는 신앙이다. 또한 미륵부처님은 아직은 부처님이 아니 라는 의미에서 미륵보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미륵의 다른 이름인 자씨보살도 이런 입장에서 붙여 진 명칭이다.{{{{. 미륵반가사유상{{{미륵상 가운데 특이한 유형으로 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그 모습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사유에 잠겨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미륵상생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국보 제78호와 제83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세계적으로 찬사받는 걸작이다. 두 불상의 형태나 규모 등은 비슷한데, 국보 제78호 미륵반가사유상은 화관에 높이 보탑을 장식하여 도솔천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보 제83호는 상체가 나신으로 인체미를 보여주는데, 두 불상 모두 원만한 상호와 절제된 미소를 머금은 자비로운 표정이 법열의 극치를 한껏제 도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주세’ 아라한이라고도 일컫어진다.. 산신{{우리 나라의 사찰에서 산신을 모시는 것은 민간의 토속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찰이 산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일종의 외호신중으로 산신령을 모시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민간신앙에서는 산에 사는 영물로 호랑이를 산군으로 모시기 때문에 산신은 언제나 호랑이를 거느리는 것으로 표현 되고 있다. 통도사삼성각일반적인 사찰에서 삼성각이라고 하면 칠성과 독성 및 산신을 모신 전각인데 반해 통도사의 삼성각 에는 고려말의 고승이었던 지공화상과 나옹화상 및 무학대사 세 분의 영정을 모셔놓고 있다. 지공화 상은 인도에서 온 스님으로, 고려말 충렬왕대에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통도사에서 부처 님의 가사를 친견하고 사리계단에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불교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이와 함께 나옹스님은 고려말의 이름 높은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무학스님 역시 태조 의 왕사로써 조선 건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고승으로 유명하다. 장경각(대장전)장경각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사찰에 따 라 대장전 혹은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불리운다. 대표적인 곳으로 합천 해인사의 장경각과 예천 용문사 대장전, 선암사 장경각, 용주사 경각 등 많은 예가 있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각에는 세계의 문화 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특히 용문사 대장전에는 경을 넣어 돌리면서 열람하거나 예배하는 윤 장대라는 것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대장경이란 경, 율, 론의 3장을 집대성해 놓은 것으로 다른 말로 ‘일체경’이라고도 한다.특히 해인사의 대장경판이 유명한 것은 경판의 수가 81,258개에 이르고 있고,서체가 일정하고 미려하며 틀린글자가 없는 등 거기에 쏟아부은 정성이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의 판고는 일년내내 온도와 습도의 변화가 거의 없도록 통풍과 환.
{목 차Ⅰ 서 론page1. 연구배경····················12. 연구목적····················13. 연구범위····················1Ⅱ 본 론1. 개 론(1) 전통지붕의 특징····················2(2) 지붕의 유형····················2(3) 지붕가구의 정의····················3(4) 지붕가구의 형식····················4(5) 지붕가구의 부재별 특징····················52. 연 구(1) 지붕가구의 개략적 힘의 흐름····················10(2) 지붕규모의 확대에 따른 부재별 구조적 역할····················10(3) 기타 구조적 역할로부터 파생된 장식적 요소들····················163. 분 석(1) 수덕사 대웅전 지붕가구의 구조적 안전성 검토····················17Ⅲ 결 론1. 지붕가구의 부재별 구조적 역할····················212. 수덕사 대웅전 지붕가구재 안정성 검토 결과····················21참고문헌박언곤. 「한국건축사 강론」. 서울 : 문운당, 2001김정수 외 5명.「건축일반구조학」. 서울 : 문운당, 2001김왕직.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 2000박종원. 「건축구조역학」. 대전 : 명현문화사, 1999김동현. 「한국 목조 건축의 기법」. 1998주남철. 「한국 건축 의장」. 서울 : 일지사, 1997「건축 용어 사전」, 기문당Ⅰ. 서 론1. 연구배경다양한 입면의 구조체 중에서도 전통건축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한다면 바로 중후 해 보이는 지붕이라고 할 수 있다. 밖을 향해 쭉 뻗어 있는 서까래와 용마루의 곡선미, 화려한 공포 부재 등 지붕을 받치고 있는 가구요소들의 의장적 특징에 많은 사람들이 전 통건축의 의의를 두곤 한다.그런데 전통건축의 화려한 외관은 집을 짓는 장인의 우연한 결과 때문이며 과학적인 근 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림 2.8 팔작지붕 입면3) 지붕 가구의 정의가구란 기둥 위나 공포 위에 얹혀 내부공간을 형성한 여러 부재를 총칭하여 부르는 것으 로 가구재에는 보와 도리, 대공이 기본 부재가 된다. 도리 위에서 지붕 기와를 얹기 전까 지 추녀와 서까래, 평고대 등의 지붕 골격을 형성하는 가구구조를 말한다. 지붕의 모양은 지붕가구에 의해 결정된다.목조 건축물의 기본 골격으로 기둥·보·도리 등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다. 도리의 배치수 에 따라 3량가, 4량가, 5량가, 7량가 등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지붕의 형태와 크기를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가구를 구성하기 위한 최소단위는 3량가이며, 일반적으로 가옥에 서는 5량가가 가장 많이 쓰인다. 또한 고주(중앙부에 높은 기둥)의 유무에 따라 명칭을 구별한다.예를 들어 2고주 7량가 라는 것은 외진에 외목도리(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도리)를 받는 평주(일반기둥) 2개가 서고 안쪽에는 중도리(지붕의 중앙부에 위치한 도리)를 받는 고주 2개가 서며, 고주 사이를 대들보가 연결하고 그 위에 대공을 연결하고 그 위에 대공을 올 려 종중도리와 종도리를 받치는 복잡한 구조이다. 권위를 상징하는 큰 건물 일수록 7량가 이상으로 지었다.{{그림 2.9 지붕의 유형과 형태4) 지붕가구의 형식{{그림 2.10 삼량가{그림 2.11 오량가{그림 2.12 1고주오량가{그림 2.13 칠량가(1) 3량집앞뒤 기둥에 주심도리를 얹고 보를 건너지른 다음에 보 중앙에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올리고 양쪽으로 서까래를 얹은 집이다.(2) 5량집일반 한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형식이다. 주심도리와 종도리 사이에 중도리가 하나 더 걸리는 구조 이다. 대들보 위에 종보가 있고 종보 중간에 대공을 놓고 대공 위에 종도리, 종보 양쪽에 중도리, 대들보 양쪽에 주심도리를 올린 구조로 종도리와 중도리에 단연이 걸리고중도리와 주심도리에 장연이 걸리는 구조이다. 같은 5량집이라도 기둥의 배열에 따라서 3종류 정도로 세 분되며 내부에 기둥 없이 앞뒤 평주에 대들보를 걸어 구성한 5량집을의 위를 들리게 하여 날아갈듯한 유려한 곡선을 이루게 한다.{{그림 2.23 풍판과 박공(7) 박공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의 합각부분에 '가'자 모양으로 걸린 판재이다.(8) 풍판맞배지붕의 측면에서 박공 밑에 대는 비바람막이 판이다.{{그림 2.24 지붕마루의 유형{그림 2.25 마루의 곡선(9) 지붕마루지붕면이 서로 마나는 지점으로 착고·부고·적새 등을 사용하여 마무리한다. 마루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까지 이어져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크게 용마루·내림마루·추녀 마루로 명칭된다. 우리나라 처마는 중간부분부터 추녀까지 휘어진 형태로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여준다.1 용마루 : 건물의 제일 위쪽 가로로 길게 놓였으며, 아래로 약간 휘어진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양 끝에는 치미, 취두, 망와를 올려 장식하며 가운데에 절병통이 올려지기도 한다.2 내림마루 : 용마루 아래로 합각을 타고 내려오는 부분으로 끝에 귀면기와 등이 배치된다.3 추녀마루 : 내림마루 끝에서 처마끝까지 이어진 마루이며 귀마루라고도 한다.4 후림 : 처마끝선에서 부드러운 곡선이 점차 내어밀거나 들어간 상태이다.5 조로 : 처마부분에서 아래에서 위로 부드럽게 곡선이 휘어오른 상태이다.6 처마안허리 :처마 기슭이 휘어 내민 것이다.7 처마허리 : 처마 기슭이 휘어 오른 것이다.{{그림 2.26 보의 유형(10) 보보통건물의 앞뒤 기둥을 연결하는 수평구조부재를 말한다. 서까래와 도리를 타고 내려온 지붕의 하중은 최종적으로 보를 통해 기둥에 전달된다.단면형태에 따라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모서리 부분만 곡선으로 굴리는 것을 구형보라 하며 대부분 둥그렇게 항아리 모양으로 만든 것을 항아리보라고 한다.{{그림 2.27 퇴 보(11) 퇴 보같은 5량집이라도 1고주 5량집인 경우에는 퇴칸에서 고주와 외진 평주를 연결하는 퇴보가 더 필요하다. 퇴보는 대들보에 비해 길이가 반 정도도 안되며 직경도 작은 것이 보통이다.{{그림 2.28 충 량{그림 2.29 우미량{그림 2.30 창 방{(12) 에 가해지는 힘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다.{{그림 2.40 가구의 역학적 흐름과 중요구성 부재H점에 작용되어지는 P라는 힘은 F를 통해 각각, E, G에 1/2만큼을 나누어 갖는다. 그리 고 다시 E, G에서는 각 점에서의 하중 P를 포함한 하중을 다시 B, C를 통해 A, D전달한 다. A, D에서는 또한 그 점에서의 하중 P/2를 포함한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된다.비교적 규모가 크지 않고 기본적으로 가장 간단한 형태의 지붕인 5량식의 하중 전달방식 은 이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역학방식은 규모가 커지게 되면 중보와, 대들보의 길이가 길 어지게 됨으로 절점으로부터 압축력의 힘을 받고 있는 중보와 대들보는 휨력으로 인한 모멘트로 휘어지게 된다. 따라서 5량식 이상의 지붕구조로 가게 되면 보는 압축력을 담당 할 만한 또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2) 지붕규모의 확대에 따른 부재별 구조적 역할(1) 고주와 대들보건물의 규모가 커지면 5량식 이상의 가구방식으로 이동되어지면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고주(건물 내에 위치한 평주에 비해 높은 기둥)이다.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평주 만으로 대들보의 하중을 지지하 기에는 절점간 거리가 멀어 휨응력을 감당할 수 없다.(fb=Mc/I, M∝ℓ) 따라서 보에 하중이 작용하는 점 사이의 거리를 더욱 줄이기 위해 평주의 안쪽으로 고주가 생기게 된다.또한 길이를 줄이기 위하여 대들보는 중앙부의 하중만을 받을 수 있도록 짧아지게 된다(M∝ℓ). 대신 대들보 바깥쪽의 하중전달은 홍여보(대들보를 보충하는 보)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기둥으로 인한 실의 구분이라는 기능적 역할도 가능케 하며, 실내에서 더욱 높아지는 천장 높이로 인해 장중한 느낌이 들도록 하는 디자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고주(高柱)는 지붕 가구재의 부재가 아니라 압축재로 분류된다. 하지만 지붕의 하중을 설 명하기 위해 추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그림 2.42 홍여보{그림 2.41 고주의 분화(2) ㅅ대공{압축력에{{대한 효율적인 저항을 위해 ㅅ대공이 생기게 이 하중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 때문에 실제로 목조건축을 사용하던 중국, 일본에 비해 우리나 라 서까래의 굵기가 1.5배 두껍게 나타난다. 기둥과 대비시켜 볼 때 한국건축의 서까래가 중국과 일본에 비해 굵은 이유는 우선 구조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지붕은 기와널과 서까래 사이에 다량의 흙을 집어넣어 지붕의 곡면을 만드는데 이 흙의 양이 상상외로 많기 때문에 지붕의 하중을 직접 받게되는 서 까래는 충분한 굵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서까래가 지붕을 구성하고 그 하중을 하부에 전달하는 순수 한 구조재라는 점과 육중한 지붕하중에 대한 안전성의 고려에 기인한 것이다.3 서까래의 배열 : 서까래의 배열은 평행방사배열(지붕의 중앙부분은 평행으로 서까래를 배열하고 귀 퉁이 부분에서는 부챗살모양으로 배열하는 것. 팔작지붕 형태에서 자주 드러남)로서 구조적 측면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시공도 비교적 간편한 것인데 비해 일본건축에서 사용되었던 평행배열(모든 서까래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배열되는 것), 방사배열(지붕면 전체에 서까래를 부챗살 모양으로 배열하는 것) 은 구조적 무리, 시공상의 곤란을 무릅쓰고 의장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림 2.58 평행배열과 방사배열4 한국 전통건축은 안정도 높은 굵은 부재의 사용과 구조적 합리성에 따른 부재배열을 하였으며 한편 으로는 부재세부에 미묘한 처리, 즉 서까래 마구리를 사절(경사지게 잘라냄)하고 그 하부를 곡면으로 처 리하여 처마부분에 대해 장식효과를 내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부재가 갖는 구조적 성격에 충실하면서 그것에 세심한 의장적 효과를 가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 고 : 서까래 배열기법의 구조적 효용성(한국건축사 강론)평행배열은 맞배지붕의 경우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지만 우진각 지붕이나 팔작지붕의 경우 네 귀퉁이를 평행배열로 하게 되면 귀퉁이부분은 하중을 받아내지 못하여 결국 처마 끝이 처지게 되는 구조적 약점 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의 처마서까래는 중도리와 처마도리위에 놓이게 되어, 평행배열의 경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