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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보고서] 창덕궁 답사를 다녀와서 평가D별로예요
    창덕궁 답사를 마치고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 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한 듯 하다.{ 정면에서 찍은 돈화문의 모습창덕궁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돈화문을 거쳐야 한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2년(1412) 5월에 세워졌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중층양식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2층 문루에 큰 종을 주조하여 돈화문에 걸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의 돈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1608)에 재건되었음이 1976년 돈화문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상량문을 통해서 밝혀지기도 했다. 이 날은 외국인 관갱객, 특히 일본인 관광객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돈화문을 지키기 위해 도포를 입고 서있는 아저씨께서는 관광객들이 옆에 서서 사진을 찍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흔히 TV에서 보는 영국의 근위병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금천교가 나온다. 금천교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 태종 11년(1411)에 조성되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다리는 평면이 아니라 중앙이 들린 구릉형이다.창덕궁에는 궁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는 주출입선에 세 개의 문이 세워져 있다. 세 개의 문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인데, 돈화문은 제일 바깥에 위치한 창덕궁의 정문이고, 다음 금천교를 건너 만나게 되는 진선문은 외행각 주출입문이며, 마지막 인정문은 내행각 주출입문이다.{ 인정문을 통해서 본 인정전인정문을{ 정9품의 위치에서 본 인정전지나면 인정전이 나오는데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사신 접견등 주요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순조 4년에 복구된 것이 그대로 남아있다.{ 선정전의 청색기와겉으로는 2층의 수려한 모습 인정전의 내부는 상하 구별이 없이 탁트여 엄숙함 마저 느껴졌다.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 있고, 천정에 달린 샹들리에 같은 것이 새삼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왠지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들게 했다. 용마루에는 이화무늬장이라고 하는 배꽃문양의 장식이 있었는데, 이는 일제가 조선의 왕조를 격하시키기 위하여 새긴 문양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면서 왜 아직 저것을 제거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인정전에서 북동쪽 방면으로 바라보면 지붕의 색깔이 청색을 띠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이 선정전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베푸는 장소인데 반해 편전인 선정전은 보통때 임금이 신하들과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곳이다. 청색은 권력의 상징으로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곳도 청기와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기와로 된 집들이 참으로 많았다. 내가 살던 집도 할아버지께서 손수 기와를 올려서 지으신 집이었다. 그런데 동네에서 볼 수 있는 기와의 색깔은 제일 흔한 것이 단청의 색깔과 비슷한 붉은빛을 띠는 것과 회색빛을 띠는 것들이었다. 가끔 새로 기와를 올리는 집에서 이처럼 청색을 띠는 기와를 올리고는 하였는데 선정전처럼 이러한 고급스러운 빛깔은 아니었다. 답사를 거의 끝마칠 무렵 멀리서 선정전의 모습을 정면에서 볼 수가 있었는데 청기와로 된 선정전에서 권력의 상징보다는 아름다운 빛깔의 모습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대조전(용마루가 없다)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 옮겨지은 것으로 화려하지 않은, 검소한 모습이다. 고종황제는 가끔 당대의 명창을 불러다 명성황후와 함께 이곳에서 궁정음악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대조전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왕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성종(1494), 인조(1649), 효종(1659), 철종(1863),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926)이 이곳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대조전은 특히 다른 전각들과 달리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바로 왕은 용으로서 비유되는데 그런 신성한 용이 다음 대를 이을 신성한 용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에 감히 지붕 위에서 임금 용을 짓누를 수 없는 까닭에 용마루를 만들지 않았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용마루가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인정전이나 선정전처럼 위엄있고, 근엄하다는 느낌보다는 여인네의 한복의 어깨선처럼 부드럽고, 간결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인문/어학| 2005.02.01| 4페이지| 1,000원| 조회(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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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때 불경을 집대성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이다. 하지만 경판 수가 8만 여장에 달해서, 흔히들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판엔 한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대개 앞뒷면에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 면의 글자 수는 대략 300자 정도이고, 전부 합치면 5천만 자나 된다.판각 수준이 일정하고, 오자나 탈자도 거의 없다. 또한 근래 만든 것처럼 상태도 아주 양호하다. 따라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전해 오는 바로는 대장경판의 목재는 뻘밭에 3년 간 묻었다가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나무를 이용해 경판을 제작하는데는 조각칼의 강도가 굉장히 강한 금속이여야 했다. 그런데 지금도 만들기가 힘든 조각칼을 고려시대에는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만큼 금속제련술이 발달해 있었을 것이다. 경판의 네귀퉁이에는 금속이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고 판을 단단하게 고정시켜, 오래되어도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것을 잘 보존하기 위한 처리는 바로 옻칠이었는데 옻칠은 방부와 방충효과 외에도 방수가 뛰어나고 화학적인 내성도 강하다. 특히 나무와 친화력이 높아서, 경판 보호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렇듯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일에 고려인은 갖은 정성을 기울였고, 당시의 기술과 지혜를 총동원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대장경판은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이 경판의 제작시기는 13세기, 그때만 해도 세계문명권의 대부분은 아직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는 목판을 이용한 인쇄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뛰어난 기술은 바로 이 대장경에 집약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고려의 인쇄문화가 세계의 수준보다도 훨씬 앞서 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팔만대장경은 왕과 군신이 서원하고 도감을 세워 16년이 걸려 완성했는데 16년 간 8만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선, 상당한 물자와 인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 물자와 인력의 규모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1-2m짜리 통나무 한 개당 가능한 목판 수는 대여섯 장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8만여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통나무 만5천 개 이상이 필요하다. 또한 필사가들은 경전을 일일이 베껴 써야 했는데 하루에 한 사람이 천 자 정도 쓸 수 있다고 가정하면, 5천만 자를 전부 쓰는데는 필요한 연 인원만 5만 여명이 된다. 여기에 한지제작과 판각, 경판의 옻칠 그밖에 내용 교정과 구리 장식 만들기 등 제작에 동원된 인원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이 경판이 만들어지던 때는 고려가 몽고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위험한 상황 하에서도 경판을 제작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이유는 무엇일까? 강화도에는 아직도 고려궁지가 남아 있다. 이곳은 1232년부터 36년 간 고려의 도성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몽고가 침입하자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였던 최우는 천도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천도는 백성을 버렸다는 불신을 낳게 되었고, 그러자 최우는 민심을 수습하는 방편으로, 대장경 사업을 벌이게 된 것이다. 최우가 경판 제작에 재산을 내놓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 뿌리깊었던 백성들의 불심을 자극해서,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또 하나의 배경은 불교국인 고려의 위상에 있다. 고려는 현종 때인 11세기 초에 이미 대장경판을 만들었다. 이것을 초조대장경이라고 하는데, 이 경판의 완성은 고려에 불교문화국이라는 자부심을 안겨다 주었다. 그런데 1232년, 몽고는 초조대장경판과 의천이 간행한 목판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따라서 고려는 불교문화국으로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엄청난 국책사업을 벌이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자주성을 보였다. 중국의 연호가 아니라 십이간지에 따라 연도를 표기했고, 고려국을 명시했으며,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봉칙'이란 단어도 당당히 내세웠다. 이처럼 대장경이 만들어지는 배경에는 무신정권의 정치적 의도와 다른 여러 가지 의미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큰일을 완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인 전 계층의 불심과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2.01| 2페이지| 1,000원| 조회(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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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문화] 탈춤에 관하여
    Ⅰ. 들어서며탈춤은 그 기원에서 볼 때 생산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원시농요제의나 부락의 안녕, 번영을 비는 부락굿 등으로 목표하는 바는 제의를 통한 자연과 인간의 소통, 화해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승되는 탈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축제적 전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적인 탈춤의 전승은 약화된 구성원의 결속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라져 가는 축제의 의미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데서 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탈춤은 그 기원을 고대 제천행사에서부터 해 온 집단 놀이로서 조선조 앞에 그 형식을 구체화시켰다. 당시 지배계급의 모순점을 가진 해학과 풍자로 표현함과 동시에 피지배 생산 계급인 농민들과 한데 어울리는 가운데 노동 과정에서의 노고를 풀고 때론 지배계급에 대항하고 마을이나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하나의 연희 형태였다.탈춤은 희극이다. 그리고 그 속에 민중 생활의 진실된 모습을 담고 있다. 서구의 연극이 구경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희하는 반면 탈춤의 구경꾼은 탈춤판 안에 있다. 그렇듯 우리의 민중들과 함께 공감하고, 웃고 어우러지는 것이다이렇듯 민중들의 삶 속에서 계급 갈등 서민의 애환, 각종 특권 세력의 횡포를 고발 해 왔던 의식 속에서 민중들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참여적인 삶으로서의 문화를 영위해 나갔다.또 우리의 역사 속에 투영된 탈은 역사적으로 두더지처럼 땅만 파다가 벌레처럼 죽어간 이 땅의 민중들의 얼굴이며 그 숱한 표정들은 우리 민중의 발자취이자 오늘로 이어지는 숨김없는 얼굴이다. 또한 탈춤의 율동은 이 땅의 황토 속에서 살다간 민중들의 육체요, 그 몸짓이며 신바람을 일으켰다가 뒤에는 한 민족의 영혼과 분노와 해학이 어우러지는 민중들의 슬기가 담긴 것이다. 탈춤은 민중들이 자신을 창조하고 그 자체를 보존하는 행동을 기술하고 정당화하고 찬미하기 위한 사고의 영역에서 민중들이 행하는 노력의 총체였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를 통해서는 각 지역의 탈춤의 종류를 통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특징과 의미를 알아보고, 우훨씬 가깝다는 것이다.3. 탈춤 속에 깔린 의식우리의 탈놀이는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의지에 의해 꾸며진 독창적인 극형식이며, 구경꾼들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양식이기 때문에 만든 이와 즐기는 이를 엄격히 나눌 수가 없다. 아울러 탈놀이에는 고정된 틀이 없으며, 작품의 내용이 허구적인 사실을 꾸며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연장으로서, 현실 속에서 함께 놀이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만큼 여러 가지의 가능성과 창조적인 생명력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탈춤 속에 깔린 의식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1) 벽사의식∼귀신을 물리치는 의식.(2) 파계승에 대한 풍자∼지배이념의 무너짐을 폭로.(3) 지배계급(양반)의 신분적 특권과 무능력을 풍자.(4) 처첩 사이의 갈등 묘사∼남성의 부당한 횡포 고발.(5)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 냄.4. 탈춤의 성격(1) 신명탈춤은 탈판 자체가 액을 떼고 복을 빌기 위한 한바탕 놀이판이기 때문에 신명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 신명은 탈꾼만의 신명도 아닌 구경꾼만의 신명도 아닌 판에 있는 모든 이들의 집단적 신명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신명을 사회화해서 피워 내고, 서민들은 묵은 응어리를 풀고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춤이나 노래가 신명(흥)을 돋구기 위한 것이고, 대사도 운율을 타는 운문적 성격을 갖는다. 또 탈꾼들이 '얼쑤', '좋다', '잘한다' 하는 추임새를 넣어 준다든가 탈꾼과 구경꾼과의 즉흥적인 질문, 대답은 신명을 끄어내는 것이고, 점차 고조되는 신명이 탈판의 마지막에 집단적으로 터져 나옴으로써 집단적 신명을 이루는 것이다.(2) 집단성탈판에서의 집단성은 서로가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지향하기 위한 것이다. 원형의 무대는 탈꾼과 구경꾼뿐만 아니라 구경꾼과 구경꾼까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주며, 공동의 관심사를 판에 끌어들여 함께 해결하고자 하고 구경꾼이 단지 구경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뒤풀이에서 어우러져 대동을 이루는 것은 탈춤이 공동체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3) 다 연희자의 극중행동에 간섭하면서 능동적으로 개입하기도 하고, 신이 나면 탈판 속으로 뛰어들어 군무를 이루기도 한다. 극중인물이 이와 같이 관중과 같은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놀이판 자체가 곧 극중 장소이기도 하다.따라서 탈춤은 관중이 실제로 생활하는 생활공간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사건을 내용으로 한 연희임을 알 수 있다. 연희의 장소는 그들의 삶의 현장이고 연희의 시간은 삶의 바로 현재인 것이다. 요컨대 탈춤은 생활의 일부이며, 생활이 또한 놀이의 일부가 되는 일치성이 있어서 연희를 한다기보다는 그것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말이 된다.이러한 탈춤은 민중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놓고 한데 어울려 논다는 뜻에서 "대동놀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대동놀음으로써의 축제판인 것이다. 이러한 축제는 인습적인 타부를 깨뜨리며 전도된 가치를 행동으로 성취하려는 반란이 그 주지가 되어 있다. 거기에는 공동의 적을 퇴치하고 공동체적 삶을 영위, 그 공감대를 일상 생활선상에서 확충하고자 하는 민중의 의지를 담고 있다.탈춤은 공동체의식의 공유와 그 실현이라는 배경 아래서 진행되어 왔고, 탈춤에서의 공동체 의식은 민중들의 실제 생활상의 유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농사를 위주로 하는 그들의 노동생활은 마땅히 연희를 필요로 하였고, 그러한 연희를 통해 그들은 반복적인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아울러 삶의 고통이나 나아가 사회적인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소비적인 유흥거리 일수가 없었고, 한바탕 놀아댐으로써 노동생산성을 드높이는 재생산의 기틀이자 삶의 지혜였다. 아울러 풍년을 비는 그들의 연희는 풍년을 저해하는 적을 공격함으로써 행사될 수 있는 것이어서 하나의 투쟁의 방식이기도 했다.18세기 이후 도시의 대두와 더불어 근대적인 초기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되면서부터 서민 예술의 전반적인 발전추세와 병행하여 탈춤도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 농촌에서의 탈춤은 연희의 생산자와 수요자가 같은 마을이라는 동일한 생활권 내에 있었다. 생활내용심을 갖게 한 것이었다. 문화의 소비자로서 문화의 객체로서만 존재하던 민중들이 스스로 문화의 생산자이며 문화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이러한 깨달음은 탈춤의 종합적 특성과 더불어 다른 문화 양식에도 새로운 충격을 주었는데 실제 70년 대 말부터 탈춤은 여러 예술 장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기존 서양 무대극이 주류를 이루던 연극 쪽에서는 무대에서의 시간, 공간 개념을 깨뜨리고 관객과의 교감이나 무대장치에 새바람을 일으켜 '마당극' 이라는 새로운 극양식을 탄생시켰다.춤에 대하여는 무용가들이 추는 세련된 감상용의 춤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면서 신명으로 추는 살아 있는 춤을 요구했다. 또 민요가 전통 시대의 지나간 노래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정서를 담을 노래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과 노래란 몇몇 가수나 작곡자에 의해 만들고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만들어 부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그러나 탈춤이 민중예술, 민중 문화의 모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에 대한 주인의식, 주체의식이나 탈춤 구조에 있어서의 종합적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갖는 공동체를 향한 탈춤 정신 때문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농촌 공동체 사회에서 연희되어진 탈춤이 탈꾼과 구경꾼, 구경꾼과 구경꾼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원형의 무대적 조건에서부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건의 진행, 탈판 진행에 있어서의 구경꾼의 적극적 개입, 뒤풀이에서의 집단적 신명, 이런 모든 것들이 공동체 사회에서 공동체적 삶을 지향했던 탈춤 정신의 표현이었다.Ⅵ. 탈춤의 지역적 분포와 종류우리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 온 탈춤은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른 명칭과 내용을 보여 왔다. 북부지역은 탈춤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어 오며, 중부지역은 산대놀이, 남부지역은 들놀음(야류)과 오광대로 불려져 왔다.1. 북부지역북부지역의 탈춤은 주로 황해도 일원에 분포된 탈놀음을 말하며, 분포지역으로는 사리원, 황주, 안악, 재령, 은율, 송화 등지와 기린, 서흥, 평산, 강령, 맞춰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소리와 동작이 따르는 탈놀음의 일종이며, 산대도감 계통극의 중부형의 한 분파이다.송파산대놀이는 놀이 내용의 플롯이나 과장과 춤, 가면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여 다 같이 애오개, 구파발 등지의 본산대의 분파임을 말해 주나, 몇 개의 탈과 배역이 송파산대놀이에서는 고형을 지니고 있어 특징적이다. 즉,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이미 탈락한 초라니, 당녀, 해산이어멈, 신할멈, 무당 탈 등을 따로 갖고 있고, 놀이 과정에서도 이들 탈들이 맡는 역이 따로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근래에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배꼽춤을 왜장녀가 추었으나, 송파산대놀이에서는 해산이어멈이 조산하는 대목에서 소무의 배를 문지르며 배꼽춤과 엉덩이춤을 춘다. 당녀춤은 양주별산대놀이에는 현존하지 않으나 송파산대놀이에는 있다. 초라니탈은 하회별신굿놀이의 초랭이탈과 비교되고,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우리말에 초라니는 산대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산대에 초라니탈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어 이 역시 고형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3. 봉산탈춤(1) 역사적 유래봉산탈춤은 해서 일대에 분포된 탈춤 중의 하나이다. 이 해서탈춤은 분포를 보면 사리원, 봉산을 중심으로 황주와 서쪽 평야 지대인 안악, 재령, 신천, 장연, 송화, 은율 등지의 탈춤과, 동남쪽 평야 지대인 기린, 신원, 서흥, 평산, 신막 등지의 탈춤과, 해안 지대로는 해주, 강령, 옹진, 송림, 추화, 금삼, 연백 등지의 탈춤으로 크게 셋으로 구분되며, 5일장이 서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들을 초빙하여 1년에 한 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포로 보아 해서탈춤은 거의 황해도 전지역에서 놀던 탈춤으로, 그 중에서 특히 봉산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일이며, 특히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된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조선조 말 이래의 일이고, 그 전
    인문/어학| 2005.02.01| 15페이지| 1,000원| 조회(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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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진보주의 교육이 한국교육에 끼친 영향 평가A좋아요
    ▶ 진보주의란진보주의는 유용성이 진리이며 가치라고 하는 입장인 실용주의와 우주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며 변화를 기본사상으로 한 진리의 상대성, 과학주의 등을 배경으로 생활중심교육, 경험중심교육, 아동중심교육을 주장하는 교육사상이다.진보주의 교육의 목표는 한마디로 전인교육이다. 즉, 현실생활에 잘 적응하는 지·덕·체가 골고루 도야된 인간의 양성이 교육목적이다. 따라서 교수의 학습지도는 문제해결학습, 구안학습을 위주로 두어야 하고, 교육과정은 경험된 교육과정을 중시하며, 경험된 교육과정이란 경험의 체계를 존중하는 것, 학교의 지도 하에 학습자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일제의 경험을 의미한다. 교육에 있어서의 평가는 절대평가가 중시되며, 자원봉사적 행정, 민주적 장학, 협동장학 등이 진보주의의 장학이며 또한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시한다.진보주의 교육의 철학은 앞서 말한 실용주의의 적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진보주의는 실용주의적인 철학자들에 의하여 소개된 철학은 아니다. 1870년대에 교육자로서 이름난 파커는 학교교육을 듀이가 제안한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다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진보주의자라고 알려진 많은 교육자들은 종래 수동적인 학습태도와 더불어 형식주의에 치우치고 있었던 이른바 전통적인 교육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제일 처음으로 이들과 대립한 사람은 진보주의적인 교육과 실용주의 철학을 이용한 듀이이다.듀이는 이러한 진보주의적인 사상을 통해 경험주의 교육과정을 하나의 교육과정의 형태로 체계화시켰다. 듀이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본능적인 반응의 경향 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몇가지 능력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다양한 종류가 있어 우리가 사고할 시 복잡하게 얽혀 사용된다. 그래서 교육이란 기성의 능력을 훈련하는 일이 아니라 문제상황 에서 적절한 지력을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경험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학습경험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문제에 있어서도 학생들이 단순히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런 듀이의 주장은 경험주의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경험주의교육사상은 역사적으로 아동·학생의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의 맥을 따라 체계화되어 왔으며, 에라스무스, 18세기의 루소, 19세기의 페스탈로치와 프뢰벨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사상을 듀이의 진보주의 사상을 통해서 체계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진보주의 교육사상의 발전 초기의 단계에서는 그 당시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생활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다소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농후했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미국의 경제공항과 더불어 진보주의 교육사상은 협동과 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초기의 개인주의를 희생해 가면서 사회변화를 위한 운동의 배후에서 모든 힘을 기울였다. 진보주의자들은 모두 변화는 실존의 본질 이라고 하는 실용주의 철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교육은 항상 발전하는 과정 가운데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 교육의 반영진보주의(경험중심) 교육사상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반영된 것은 제2차 교육과정이었다. 비록 1963년에 공포된 것이 공식적이긴 하나 그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는 듀이의 사상이 소개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 있었다. 특히 1952년 UNESCO-UNKRA의 교육사절단의 교육계획사절단 의 교과서에서부터 진보주의 사상이 직접적으로 우리나라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 교과서의 내용은 지역사회활동에 있어서의 아동의 흥미와 활동의 증가, 지역사회의 모든 교육적 활동 및 교양적 교육을 위한 학교 설비 이용 등을 서술하고 있어 경험중심교육과정의 기본성격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63년에 공포된 제2차 교육과정은 제1차 교육과정과는 사뭇 다른 경향을 띠게 된다. 그 첫 번째 변화가 아동에 대한 이해와 자유증진이다. 다시 말해 아동의 흥미나 자유를 무시한 채 교과서 중심의 암기 교육이었던 기존의 교육을 비판하며 등장한 진보주의사상이 교육과정을 생활 경험을 통한 분단토의나 문제 발견적인 자기 활동을 통한 교육으로 바꾸어 놓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아동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또한 전 단계의 교육과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교육방법이었다. 또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등장하게 하는 역할도 하였다. 특별히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정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교적 풍토의 관념적 교육사상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교육사상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도 경험중심 교육사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진보주의 관점에서 본 한국교육의 문제점처음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암기위주의 입시교육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양적 성장 중심의 교육을 가지고는 고도의 창의력과 높은 품격을 지닌 인간을 요구하는 미래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부응하는 인간을 육성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우리의 교육은 암기 위주의 입시교육이 문제이다. 시험이 끝나는 동시에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단편적 지식만을 암기하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교육이 문제다. 한국처럼 교육열이 강한 나라가 없으며, 한국의 학생들처럼 공부에 시달리는 나라가 없건만, 일터에서는 '불량품' 인력으로 취급받는 것이 우리 교육의 실상이다. 요컨대 우리 교육은 현실 속에서 살아 숨쉬는 산 교육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입시지옥 속에 묻혀버린 수험생은 물론이려니와, 학생들은 학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입시지옥 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실제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 각자의 개성을 살리면서 창의적 사고를 배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주변 사물과 인간의 삶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하던 학생들은, 한 가지 정답만을 요구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 강의 위주의 수업 속에서 자발적인 탐구활동과 질문이 억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과 적성을 계발하고 창의성을 신장시기는 교육을 하라고 하는 것은 사치스런 주문일 뿐이다. 이러한 교육체제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창의성과 사고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두 번째로 지적되는 문제점은 입시위주 교육으로 말미암은 도덕교육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다. 입시위주의 교육의 병폐는 대학교육에 대한 과잉 욕구에 근원이 있다. 이처럼 대입욕구 현상을 부채질함으로써 초·중등교육 전체를 비정상화시켜 놓고 있다. 교육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르침의 기쁨과 배움의 즐거움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시험점수로 표현되는 결과를 놓고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에 골몰하고 있다. 인성·도덕교육의 결핍은 바로 이러한 입시위주의 부산물이다. 암기위주 교육 속에서 격조높은 인품을 개발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실천위주의 도덕교육은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실정이다.세 번째로 나타나는 문제점은 학교자체의 비생산적인 요소들이다. 과대한 일부교사의 출장에 따른 수업결손이라던지, 수업시수 규정으로 인해 학교행사나 공휴일 등 자연결손으로 수업시수가 부족할 수 있으나, 수업시수를 일률적으로 규정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하는 일이라던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지나친 영어 열풍으로 인한 초등학교 영어과외 증가 및 영어 교육의 증가로 대학이 전공을 도외시하고 영어에만 매달리게 되어 대학의 전문성이 결여되는 일 등 학교 자체의 비생산 요소에 의한 많은 폐단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네 번째로는 잘못을 알면서도 통용되는 관행이나 악습들을 들 수 있다. 합리적이고 정당한 의견 주장보다는 사소한 이익에 얽매여서 인정, 의리, 지연, 학연에 얽매여 부화뇌동하는 행위를 우리는 주변에서 그것도 배움터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보충수업비 중 많은 예산이 관리비 및 운영비로 지출되는 것 또한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악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악습들로 인해 신성한 배움터에서 교육에 임하는 학생들이 이러한 비도덕적인 악습을 경험함으로써 그것이 교육되어진다면, 그들이 리더쉽이 있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된다 하여도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는 진보주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교육학| 2005.02.01| 4페이지| 1,000원| 조회(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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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 조선왕조실록 평가A좋아요
    조선왕조실록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단 두 질로, 그 가운데 하나가 규장각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17만 2천여 일,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조선시대의 정사다. 조선왕조는 이 실록을 종묘사직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춘추관 외에 전국에 3개의 사고를 더 만들어 실록을 보관했다. 이를 외사고라고 하는데 상주, 청주, 전주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들은 사고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다른 모든 사고들이 소실됐고 마지막 남은 전주 사고가 화를 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 때 위기에 처한 실록을 구한 것은 지방 유생들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전장에 나간 터라 사고는 무방비 상태였다. 지방 유생이던 안의와 손홍록 두 사람은 왜놈들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실록과 태조의 영정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한 질의 실록은 전쟁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후에 비변사에서는 '사고는 인적이 닿지 않는 험준한 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논의 끝에 마니산과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이 새로운 사고지로 선정됐다. 사고가 완성되고 실록이 모셔진 것은 선조 39년이다. 기록에는 이 일이 국가사업중 큰 규모여서, 포상도 따랐다고 한다. 그만큼 사고 건립은 중차대했던 것이다. 그 뒤 묘향산 사고에 있던 실록은 후금의 위협 때문에, 인조때 적상산 사고로 옮겼고, 마니산 사고는 불이 나서 현종때 정족산으로 옮겼다.산속에 있는 사고 가까이에는 반드시 거대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강화 정족산 사고 옆에는 전등사, 적상산 사고에는 안국사, 태백산 사고에는 각화사, 그리고 오대산 사고에는 월정사가 있다. 인근 사찰은 승군을 조직해 사고를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사찰의 주지는 책임자인 수호총섭으로 임명됐다. 임진왜란때 승병의 활약상은 눈부셨는데, 그래서 임란 이후 산중에 사고를 지으면서 승병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대산 사고의 경우에는 월정사와 거리가 있는 까닭에 근처에 암자를 두기도 했다. 그리고 사고에는 또 다른 수비 인원도 있었다. 정규군이었다. 지역이나 시기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다른데, 가장 많았던 곳은 적상산 사고로 고종 때에는 백명이 넘었다. 이처럼 수비와 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4군데 산속 사고는 어느 곳이나 안전했고, 실록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조선시대에는 실록에 사론을 실어, 사관의 기록을 중시하며 보장했다. 또한 왕이나 신료, 그 누구도 사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다. 이처럼 사관의 냉철한 기록(직필)이 있었기에, 실록은 당대의 사건을 나열한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시대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이 실록의 정신이었다. 세초란 실록이 완성된 뒤, 사초를 비롯한 자료를 물에 씻는 걸 말한다. 당시 귀한 종이를 재생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용이 유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이 세초는 직필로 인해 사관이 후환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장치였다. 그것은 곧 실록에 담긴 기록의 공정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실록의 내용은 왕조차도 볼 수 없었다. 성군이었던 세종도 아버지인 태종이 어떻게 기록됐는지 알고 싶어 두차례나 실록을 보고자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진 못했다. 역사는 왕과 관료를 후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했고, 따라서 올바른 정치를 유도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 인식때문에 실록은 중시됐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2.01| 2페이지| 1,000원| 조회(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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