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Ⅰ. 미국 조망(眺望), 감정 개입 없이 가능한가 --- 21. 미국 조망의 전제 --- 22. 국제 정세의 추이(推移) --- 3Ⅱ. 미국 패권(覇權)의 이해 --- 41. 미국 패권의 왕좌(王座)에... --- 41)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 성립2)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 변화2. 남+북〈 미국 --- 51) 남한의 대북, 그 한계2) 사회체제, 그 한계3) 생존 논리Ⅲ. 제 3의 이데올로기, 미군(美軍) --- 7Ⅳ. 팍스 아메리카나와 한반도 통일 --- 91. 일방주의의 확고(確固) --- 92.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가능성 --- 93. 소론(所論) --- 10Ⅰ. 미국 조망(眺望), 감정 개입 없이 가능한가1. 미국 조망의 전제북한은 근자(近者)에 한반도 핵문제의 근원이 미국의 핵위협에 있으며 오히려 미국의 핵군축이 한반도 비핵화의 선결과제이자 본질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계속하여 강조해 오고 있다. 이로써 북한의 핵문제가 끝내는 UN 안전보장이사회로의 회부라는 파행으로 치닫게 되느냐의 여부에 주요 모든 국가의 촉각이 곤두선 상태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북한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테고, 우리의 입장에서 북한의 태도와 동향만큼 조심스럽고 눈치 보아야 할 이들은 바로 전쟁광 부시와 미국 워싱턴에 자리 잡고 있는 네오콘들의 대북 전략의 향방일 것이다.만약 순수 민족주의적 관점이 우리의 지배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또한 보여 지는 북한이?일개(一介)?미국에 의하여 악의 축으로 까지 규정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이의를 통렬히 제기하는 가정(假定)을 꿈꾼다. 분단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건립되고, 헌법상 권능이 미치지 않는 반란 단체 내지는 체제 불복종 단체가 이웃 평양을 중심지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에 대해 당사자인 남한도 악의 근원이라 규정하거나 그와 유사한 어떠한 언급도 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악(萬惡)의 출산지(出産地)이자 산악국(産惡國)인 미국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정책(북한의 6자 회담 회귀 여부)으로 좁혀질 것에 대한 관심 집중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북한이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즉, 핵 확산 금지 조약과 북한은 무관하며 도리어 북의 핵 보유로 인한 세계 핵 억제력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남한이 민족적 동반자로서 옹호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발표를 연일 TV를 통해 접하면서 과연 저러한 논리 전개가 자체 모순 없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남한으로 하여금 대미 정책 외교 수행을 용이하게 해 주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구심에 대한 답(答)은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 하여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북한은 근래와 같은 유사시기에 이르면?민족끼리?라는 기치를 큰 소리로 외친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보란 듯이?우리 민족끼리 통일 애국 운동?을 힘차게 벌리자고 했다. 과거 박정희 정부시기부터 김대중 정부에 이르는 시기에도 소위 ?우리민족끼리?전략은 있어 왔다. 나로서는 다만 그러한 전략이 남북간의 관계 정상화의 목적이 아니라 대미를 포함한(사실 대미가 전례(前例)의 전부나 다름없지만) 대외관계 난관 봉착시의 회피 수단 정도로만 인지될 뿐 그 진정한 저의(底意)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북?미 관계 돌파구의 일환이라는 노골적인 색채가 짙기 때문에 민족 공조를 주장하는 몇 몇의 내용들이 너무나도 여실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핵문제 해결에 있어 북한을 앞세워 벼랑으로 몰아세우기 이전에 미국의 조약 위반 행위는 외면하고 비핵국가들의 권리는 여지 남김없이 제한하는, 미국을 추종하는 일부 체약국들의 꼭두각시 놀음이나 그만두었으면 한다.전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북한은 핵실험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하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중국을 방문해 중국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거기에 중국 후진타오 주석은 당분간 6자 회담이 성사되기는 힘들 것이라 했고, 미국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EU의 점진적 역할 수행을 촉구했다.교수님 대한 선전 예고와 히로시마 원폭이후 핵무기의 보유 그 자체로 족한 공포분위기 조성이라는 억제책을 통해 국제 질서의 흐름을 조정해 왔다. 그에 따른 미국의 영향력 아래 세계 각 국의 대외정책은 일정 수준과 수위를 조정?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미국 중심의 국제 체제 편성과 안보의 정착을 거부하는 국가도 있었으며 이들은 자국의 활로 개척의 여지를 강력히 요구해 왔었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이후 미(美) 부시 행정부는 양대 전쟁 전략과 대량살상무기 반확산 정책, 반테러 전쟁을 중심으로 이른 바 부시 독트린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고수해오던 위협에 대한 전략적 봉쇄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필요하다면 위협적 요소는 일방주의와 선제공격을 해서라도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적극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 전환 이후 전개되었던 것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조치, 즉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 감행과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오신시켜 발발시켰던 이라크 침략이다. 또한 미국은 그 여세를 그대로 몰아 시선을 북한으로 돌린 것이고 현재 북한이 봉착하게 된 미국의 외교적 압박도 결과적으로는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 추이에 따른 것이다.2. 남+북〈 미국1) 남한의 대북, 그 한계햇볕정책을 통한 북한 어우르기로 사실상 많은 성과를 올렸던 김대중 정부 이후 별다른 수정 없이 큰 틀을 유지해오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아직까지 북으로 하여금 거부(rejection)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자주 국방의 강조라는 면에서 근대 이후 기존 정권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북진 통일론을 주장했던 이승만 정권이나 강력한 안보의식 고취화를 기반으로 했던 박정희 정권에나 거론되었던 정부 차원의 자주 국방이 노무현 정부에 도래해 새로운 차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물론 노무현 정부의 입장 표명에는 일정부분 타당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힘으로 우리 국가를 지켜내겠다는 생각에는 한때 주한미군 철수와 민족 통일 추진이 해야 할 것이다. 흑묘백묘론 이후 중국의 발판이 눈에 띠게 넓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반미로 정치교화 하였던 과거는 정리하고서 조심스럽게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3) 생존 논리분단 이후 냉전기 시대를 벗어나 대립과 대결 구도에서 화해와 협력 관계로, 체제 전복의 시도와 음해를 잠정적으로 중단한 듯 보이는, 다소 약세의 세태가 조성된 이래 남과 북은 꾸준한 노력과 공조 체제 구축을 기반으로 많은 부분에 걸쳐 성과를 남겼다. 남한이 북한의 경제력을 급속히 따라 잡고 이후 북의 성장 잠재력이 남한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어도 남한은 근본적으로 남북 협조체제라는 기틀의 변화 없이 민족 공생을 추구하여 왔었다. 그러나 미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믿을 수 없는 세력임을 늘상 강조했었고 인도적인 북한과의 사업에도 회의적임을 표명하면서 우리의 노력과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과오(過誤)를 별다른 제재 없이 자행해 왔었다.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남한의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역시 북한이다. (개인적으로는 북한이나 미국이나 위협적이기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이고, 다만 북한은 교화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과 미국의 대북 포용정책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국민의 우려와 그에 파급될 부정적 효과를 일정 부분 감소시켰지만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 정책적 전환 시도의 일환으로서 시행된 햇볕정책과 클린턴 행정부의 남한 대북 정책지지와, 그들의 대북정책 시행이 북한의 전쟁 또는 대외 도발의 잠정적 억제를 뜻할 뿐 본질적인 북한의 도발 자체의 방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북한과 남한이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간의 차이를 극복하여 남과 북이 공생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는 발판과 비전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남과 북은, 특히 남한은 북을 포용해야 할 큰 그릇으로서 보다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근래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의 중심점으로서 독자적 방위 능력의 유지를 넘어서는 자주성 확보와 아직 배제되기에는 시기상조(時機尙早)군 감축 및 재배치, 미군 주둔기지 토지 관련 계획 시행등과 관련하여 무수한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미 2사단의 한강 이남으로의 이전과 공동 경비 구역(JSA)의 한국 이양 문제가 구체적으로 불거지면서 미군의 배치가 정책 카드식 행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의 여부로 확대되었고 또 한 번 반미 여론이 들끓었었다. 이에 미국은 기존의 미군 배치지역 중에서 영구 배치 지역을 제외하고 한국과 같은 대규모 미군 기지를 축소하여 남유럽 등지에 작전기지를 신설하고자 하는 계획에서 비롯된 논의이지 그 이상, 그 이하의 배경은 없다는 듯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한미군은 이유가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철수되어야 마땅하니 이와 같은 미군 주둔 계획의 변화와 노무현 대통령의 국방력 강화를 통한 자주성 확보는 때가 되면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지금이 그 시기가 된 것 뿐이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되려 마음을 굳게 먹고 두 손을 꽉 쥐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한 미군 감축과 기지 이전의 의도가 시기 부적절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순수한 표면적 흐름으로는 당연한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다만 그렇게 보여 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묵과할 수만 있다면...미군의 전략이 바뀔 때마다 우리의 국론과 전략은 커다란 소용돌이를 맞았다.원통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대책 없이 미군 철수와 미국 반대만 외친다고 능사는 아닌 것이다. 이에 우리는 현실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소용돌이치는 변화의 추세 속에서 살아남고 또한 우리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하여 강해져야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군이 자주국방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주한미군에게 우리의 안보를 의지하지 않겠다는, 또한 중?장기적으로는 미군이 우리에게 이익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남과 북은 오히려 미국이라는 존재에 기하여 자주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북한과의 점진적 통일로의 발길을 더디게 내딛고 있는이었다.
目 次Ⅰ. 운주사에 들어서며 -------------- 21. 운주사의 역사와 명칭 --------2. 운주사의 위치와 의의 --------Ⅱ. 운주사 창건설화와 도선국사 -------------- 41. 도선국사 --------2. 창건설화 --------Ⅲ. 중요 유적 ------------- 51. 9층석탑 --------2. 석불감 쌍배불좌상 --------3. 원형다층석탑 --------4. 대웅전 --------5. 공사바위 -------6. 칠성바위 -------7. 와 불 -------Ⅳ. 운주사를 돌아서며 ------------- 8Ⅰ. 운주사에 들어서며운주사는 화순을 생활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곳이다. 물론 화순에는 그밖에도 쌍봉사, 자연휴양림, 온천, 고인돌 터 등 여기저기 답사 가능한 곳이 여럿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운주사는 중?고등학교 시절 소풍을 가기도 했었던 곳이며,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몇 차례 친구들과 바람을 쐬는 적절한 장소로 애용하기도 하였던 부담 없는 놀이터였다.보편적으로 그러하듯이 소풍가고 머리 식히는 곳에 발걸음을 두면서 운주사 곳곳에 널브 러져 있는 듯한 탑과 불상들에 대해 열심히 공부를 해 간다거나, 운주사의 역사와 배경에 대하여 호기심은 가질지언정 호기심을 해소하는 것에 몰두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 이다.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이번 기회를 빌어서 그러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고백한다.그러나 이번에는 발걸음을 두는 목적이 답사임을 감안하여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였고, 사진을 찍을 배경과 장소를 구상하는 등 시간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영감을 얻어 오 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1. 운주사의 역사와 명칭1) 역사운주사는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만을 간직한 채 창건에 서 폐사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말해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어느 시기 누가 무엇 때문에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는지 아직도 상상만 무성할 뿐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운주사에 관한 기록만 해도 번창 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2. 운주사의 위치와 의의1) 위치운주사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중장터라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멈추게 해야만 한다. 그렇 지 않고 한 정거장만 더 가도 그 거리가 상당하여 되돌아 걸어오기엔 무척 부담스럽 다. 게다가 그 길이 커브를 돌아 난 후에 있기 때문에 나주댐을 보면서 자뭇 감상이라 도 할 치라면 정류장을 놓치기 일쑤다. 몇 번이나 찾아왔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날도 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걷다가 지칠 뻔 했다.이곳은 화순, 나주, 장흥 3군이 교차되는 지점으로 지금에 와선 교통의 오지가 된 산골 이다. 그러나 중장터란 지명이 중들이 장을 보았던 터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는데(이 날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곳에 장터가 있었다는 뜻이고 세 개의 군이 교차되는 지점이니만큼 그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운주사는 행정구역으론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와 용강리가 인접한 곳으로 골짜기를 흐 르는 개울물을 경계로 나뉘어진다. 오른편 능선너머에는 나주댐과 광활한 나주평야가 잇닿아 있고 왼편에는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치솟은 천태산이 보인다. 천태산은 운주사 설화와도 관계가 있는 산으로 개천사라는 절이 있는 곳이며 솟아오른 산의 이미지와 은 밀하게 감추어진 운주사 골짜기가 연결되어 풍수지리적으로 운주사 지형을 여자의 아기 낳는 곳으로 해석하기도 한다.2) 의의운주사는 골짜기에 속한 산과 들을 포함한 계곡이 모두 탑과 불상으로 이루어진 절이 다. 그러나 산을 뒷배게로 삼고 있으며 앞으로 넓직한 일정의 들과 계곡을 품으로 안고 있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다른 절처럼 화려한 단청과 육중한 현판 이 짓누르는 산문의 위엄도 없고 어느 절에나 있을법한, 은근히 무서워 대놓고 쳐다보 기 힘든 사천왕의 모습도 볼 수 없다.하지만 송광사나 화엄사, 여타 유명한 사찰처럼 그 규모를 이루는 절의 구조 및 형태 가 사람의 손길을 받아 조금은 인공적이고, 바닥에 깔려 있는 딱딱한 돌덩이들이 주는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라 마쳤다. 그 는 일찍이 고려 태조의 탄생과 건국을 예언하였으며 산천 비보사상, 풍수지리설, 음양도참 설 등을 토대로 국가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대에 선각국사란 시호를 받았다.도선의 이러한 약력과 그가 살았던 시대적 환경을 통하여 그의 삶을 추적해 보면 도선은 신라말기 당나라에 새로운 선종 학풍을 받아들인 진보적인 승려로 볼 수 있는데 그가 실 제 왕건과 결탁하여 고려건국에 참여하였는지 또 풍수지리의 창시자인지는 아직 미지수이 다. 다만 운주사가 창건되던 때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 다. 이러한 도선과 운주사 창건설화가 결합한 까닭은 아마 설화가 만들어지던 후대에 풍 수지리학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는 도선국사와 결부되어야 사찰의 권위와 신통력이 서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전라도 지방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의 내력에는 도 선국사가 창건했다든지, 수도를 했다든지, 아니면 그 터를 점지하였다든지 하는 식의 이야 기가 산재해 있다고 한다.2. 창건설화운주사에 얽혀 있는 설화들은 민중들의 염원과 기원이 배어 있어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 설화적 상상력과 전개방식도 일주야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식으로 가히 혁명적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또한 운주사 창건설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도선국사와 결합되어 있는데, 그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첫째, 신라말 효공왕때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국사가 당나라에 가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지세를 살펴보니 이곳 운주사 땅이 여자의 음부형국으로 장차 임금이 나 올 군왕지(君王地)여서 그 혈을 끊어 놓기 위해 명당을 누르는 탑을 세우고 도술을 부려 서 근처 30리 안팎의 돌들을 불러모아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둘째, 도선국사가 보기에 우리나라 지형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인데 동서가 편편하지 못하 고 태백산맥이 있어 동쪽으로 기울어져 국토의 정기가 일본으로 새어 나가기 때문에 나라 가 망할 위험이 있다고 보아 국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가야하는 중요 유적들을 차례대로, 내 걸음을 따라 운주사를 한 바퀴 도는 순서대로 조심스레 정리해 보고자 한다.1. 9층 석탑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 자갈길을 걷다보면 좌우로 넓은 잔디밭이 시작되고 작은 불상들 이 그 형상을 채 갖추지 못한 채 서로 기대어 관광객을 맞이하는 듯 수줍게 서있다. 그리 고 운주사에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상당한 크기의 석탑, 바로 9층 석탑이다. 석탑 의 왼편으로는 이와 같은 안내문이 서 있어 석탑의 신비를 벗겨주고 있었다.「넓은 자연석을 놓아 하층 지대석 겸 기단석을 조성하고 그 위에 상층기단 받침을 3단으로 새겨 만든 후 상층기단과 탑신을 올려 놓아 9층의 석탑을 이루었다. 그런데 1층 탑신을 제외한 각 층의 탑신 4면에는 안상형식을 따른 듯 능형의 구획을 양각하고 그 안에 10자형 화문을 조각하여 장식 하였다. 각 층의 옥개석 밑면에는 사선의 문양을 양각하였다. 탑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2. 석조불감(석불감 쌍배 불좌상)9층 석탑을 눈에서 놓기가 무섭게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석조불감이다. 석조불감의 정 확한 명칭은 석불감 쌍배 불좌상인데 정말 보기 드문 가치있는 불상이라는 명성때문인지 이 날도 많은 불자들이 (사실 대부분이 아주머니들이다.) 간절히 손을 모아 염원하고 있었 다. 그런 연유인지 석조불감 정면에는 제법 커다란 공양함이 버젓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내가 고등학교 때 이 공양함에도 웃지 못할 일화가 있게 되었는데,이 공양함은 본래 색이 부드럽고 쓰다듬기 좋은 나무로 된 소박하기 그지없었던 것이었 는데 운주사가 제법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석가탄신일 때 이 공양함에 시주된 금 전이 꽤 된다는 것을 아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피해가 있은 뒤로는 보기에도 튼튼한 대리 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석조불감 옆에도 많은 글귀가 씌여있는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이 곳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석탑과 석불중 이 석불감 쌍배불좌상은 골짜기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고 그 앞에는 각기 탑이 1기씩 놓 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단면석만은 10각도인데 이 10각도 원에 가까우므로 이 석탑의 명칭을?원형다층석탑?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현재 6층까지 남아있고 그 윗층의 부재가 없는데 과연 몇 층이 더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석탑은 탑 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에 있어 이색적인 것으로서 고려시대에 이르러 많이 나타난 특 이형 석탑에 있어서도 그 맨 위에 놓아야 할 것이다. 떡시루를 중첩시켜 놓은 것 같은 모 습을 하여 일반 적인 상식을 초월한 특이한 형태이나 낯설지 않고 조형미를 갖춘 석탑이 다. 1층 지붕돌 아래에 두 줄, 2층 이상에는 한 줄의 선을 새겨놓았고 일명 도넛탑, 호떡 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난 항상 이 석탑을 보면서?만들려면 좀 더 예술적인 미를 살려 다른 탑처럼 뭔가 계산 되고 의미있는 듯하게 만들 것이지, 근처 돌들을 주워 만든 듯하게 만들 건 뭐람?이라고 비웃었었는데 그 의의를 알게 된 후에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4. 대웅전운주사의 보금자리, 대웅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누구나 그렇듯이 절에서 느껴지는 연유 모를 엄숙함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대웅전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아 쉽지만 멀리서 그 모습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날은 많은 인파 덕분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한층 분위기가 부드러웠고, 생기와 활기가 넘쳤으며 스님들도 표정이 무척 밝았다. 그러나 운주사의 대웅전도 예전에 비하면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인해 조금씩 인공적인 이미지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이 날도 대웅전 주변에 조경사업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작업이 분주한 광경을 보면서 운주사 특유의 장점을 시나브로 일반화시키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5. 공사바위대웅전 뒤뜰을 지나 공사바위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힘들지는 않았으나 날이 더운 탓인지 땀이 흘렀다. 그러나 잠시의 산행은 즐거웠고 공사바위로 가는 길은 많 은 인파로 인해 차례대로 줄을 서서 걸어야 했다. 공사바위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