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2
검색어 입력폼
  • [의학]골다공증
    골다공증정의: skeletal disorder characterized by compromised bone strength.골량이 감소하고 골의 미세구조에 이상이 생긴 전신적인 골격계의 질환으로 뼈가 부 러지기 쉽고 골절이 잘 발생하게 되는 질환 (세계 골다공증학회, 1996)골의 구성 및 형태구성뼈는 골조직과 골수로 구성된다. 정상 축성골(axial bone)의 경우 골조직이 25%, 골수가 75%로 이루어져있고 골조직은 유기질 40%, 무기질 60%로 이루어져있다. 무기질의 40%는 칼슘이며 칼슘은 인산염, 탄산염으로 이루어진 육각형의 수산화인회석의 결정체를 이루어 교원질 섬유사이와 그 주변에 침착된다. 반면 유기질은 골기질을 이루고 있는데 대부분이 교원질이며 비교원질성 단백질이 소량으로 존재하고 있다.골의 형태골은 뼈의 외곽을 감싸는 단단한 피질골과 뼈의 내부에서 스폰지 모양으로 골소주를 형성하는 소주골(망상골 또는 해면골)의 2가지 형태로 이루어져있다. 이들 두 골의 구성비는 각뼈에 있어서 다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피질골은 소주골에 비해 4배정도 양적으로 많기는 하나, 표면적은 오히려 소주골이 4배가 넓기 때문에 골 형성과 흡수는 피질골 보다 4-8배는 바르게 진행된다. 피질골은 주로 기계적 기능이나 보호기능을 담당하는 반면 소주골은 대사기능을 담당하게 된다.골의 세포2종류의 주된 세포 뼈를 흡수하는 파골세포(osteoclast)와 뼈를 생성하는 조골세포(osteoblast)와 이들 세포들의 전구세포, 그리고 변형된 조골세포인 골표면세포(lining cell)와 골세포(osteocyte)가 있으며, 이 세포군이 골 흡수와 형성에 관여한다. 조골세포 계열군은 cytokine과 성장인자 등을 생성 분비하여 파골세포의 생성과 활동성을 조절한다.연령에 따른 골량의 변화연령의 증가에 따른 골량의 변화는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성장(growth), 강화(consolidation), 소실(loss) 이다.수태된 후부터 골단폐쇄까지 피질골과 소주골의 질량은 계속 증가한다. 사춘기 무렵에는 특히 가속되어 증가되며 성장기의 끝 무렵에는 최대 골량의 90%에 달하는 골량을 갖게된다. 성장이 멈춘 후에도 골량은 계속 약간씩 증가하는데 이 시기를 강화기라고 한다. 최대 골량에 도달한 수년 후 골 소실기에 접어들게 된다. 여성에서는 남성보다 더 빨리 연령과 연관된 골소실이 시작된다.여성은 폐경 후 에스트로겐의 결핍으로 인해 골소실이 가속화된다. 폐경 전에는 파골세포에 의한 골흡수와 조골세포에 의한 골생성이 균형을 이루어 골량이 일정하게 유지되나 폐경 후 에스트로겐의 결핍은 골 교체의 활성화 빈도(activation frequency)를 증가시키며, 파골세포에 의한 골 흡수량이 조골세포에 의한 골 생성량보다 증가되는 불균형 상태가 된다. 따라서 골 흡수의 증가로 인해 골 소실은 더욱 촉진된다.골다공증의 분류발생원인과 연령, 임상적 특징에 따라 크게 1차성 골다공증과 2차성 골다공증으로 분류한다.1) 1차성 골다공증성인에서 골다공증을 일으킬 수 있는 질환이 동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골다공증.1 제 1형 골다공증: 폐경 후 골다공증, 특발성 골다공증(폐경기 전 여성이나, 젊은 남성에 서 발생), 연소성 골다공증(소아)2 제 2형 골다공증: 노인성 골다공증* 주된 형태인 퇴행성 골다공증의 특성{제 1 형제 2 형원인에스트로겐 결핍노화연령51-75세70세 이상성비(남:여)1:62:1골소실의 유형주로 해면골해면골 및 피질골골 소실의 속도가속화가속화 안 됨.골절 빈발부위척추 및 요골원위부척추 및 대퇴골부갑상선 기능저하증가칼슘 흡수저하저하2) 2차성 골다공증: 발병연령에 상관없이 골다공증을 유발시키는 분명한 원인이 선행되어 발생한 골다공증을 말한다. 2차성 골다공증은 원인 질환의 치료 없이 골다공증의 치료를 기대할 수 없고, 또 원인 질환 자체가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차성 골다공증의 원인{내분비 질환·부갑상선기능항진증·쿠싱증후군·성선기능저하증·갑상선기능항진증·프로락틴 혈증·당뇨병, 말단비대증결체조직질환·Marfan's syndrome·호모시스틴 뇨증·괴혈병·불완전골 형성증혈액질환·다발성골수종·비만세포증·백혈병, 겸상적혈구병약물 유발성 골다공증·당류코르티코이드·헤파린, 항경련제·cyclosorin A, FK-506, methotrexate·성선자극호르몬분비호르몬길항제신장질환·CRF, 신세뇨관산증영양 및 위장질환·흡수장애, 간담도 질환·위절제·만성 저인산 혈증기타·알코올 중독, 흡연병인골다공증은 골 조직의 미세한 구조의 퇴행으로 골이 허약하게 되어 약간의 손상을 받거나 심지어 손상이 없어도 골절의 위험성이 증가하는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폐경 후 골다골증은 자연적인 또는 수술에 의한 폐경 후 시작되는 골 조직의 소실의 진행이 특징이며, 난소 기능 정지 후 10-20년이 경과하면 골절을 유발한다.에스트로겐 결핍이 폐경 후 골 소실에 주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은 골다공증이 남성보다 여성에서 빈발하며, 폐경 후 골밀도 검사로 골 무기질의 소실의 증가가 측정되어, 혈중 에스트로겐 농도와 골 소실률 간에 관련성이 있으며, 에스트로겐 투여 후 골량소실과 골절 빈도의 감소 등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에스트로겐의 골 보존효과는 골 형성의 자극에 의할 수도 있지만 주된 작용은 골 흡수의 억제에 의한 것이다. 에스트로겐은 파골세포 생성을 저하시키고 성숙 파골세포에 의한 골 흡수를 저하시킴으로써 골 흡수를 억제한다.임상 소견1 요통: 합병증이 동반되지 않은 골다공증 환자는 대부분 아무런 증상이 없으나 골성 통증 특히 등과 허리에 통증을 호소할 수 있다. 척추의 압박 골절은 약간의 충격이나 아무런 충격 없이도 발생이 가능한데 특히 T8 이하의 척추에 흔하게 나타난다.2 척추 압박 골절: 척추 골다공증의 증상인 통증, 신장감소, 체형변형과 이에 따른 폐, 소화기, 방광 기능 장애 등은 남성보다 여성에서 5배 이상 흔하다. 65세 이상 여성의 약 50%가 척추 압박골절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중 2/3은 임상적으로 인지되지 못한다. 압박 골절1 개당 신장은 약 1cm 정도가 줄어든다.3 손목 골절: 50-60세 여성에서 흔하며 넘어지거나 손상에 의해 유발된다.4 대퇴골 상부 골절: 대퇴골 골절의 80%는 골다공증과 연관되어있으며 유병률과 사망률의 빈도가 높다. 대퇴골 골절 환자의 15-20%는 골절 또는 합병증으로 3개월 이내에 사망한다.5 치아손실: 에스트로겐의 골량 보존효과는 치아에서도 나타난다.screening indication (미국 골다공증 재단, NOF 기준)1 65yr women, all3 postmenopausal women with fractures4 women who consider therapy for osteoporosis5 women who have been on HRT for prolonged periods* risk factors for osteoporosis fracture (NOF 기준){non-modifiablemodifiable·Fx. hx.·Female·advanced age·caucasian race·dementia·poor health/frailty·current smoking·low Bwt.( -1
    의/약학| 2005.11.25| 5페이지| 1,000원| 조회(385)
    미리보기
  • [상속법] 상속법 평가B괜찮아요
    Ⅰ. 상속의 의미이어 줌, 또는 이어받음..친족법에서, 호주로서의 권리·의무 또는 재산에 관한 권리· 의무를 물려받는 일이라는 것이 사전적의미로 설명되고 있으며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망으로 개시된다. 사망은 자연적 사망은 물론 그밖에 실종선고제 도 등에 의한 경우와 인정사망제도의 경우도 포함된다. 실종선고란 일정기간 피 상속인의 생사가 불명인 경우 이해관계인 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원이 실종 선고를 하며, 인정사망의 경우는 사변, 즉 대형참사 수해 등으로 사망이 확실하 나 사체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시 군 읍 면장이 사망을 확인하고 호적에 그 사실 이 기재되면 사망으로 추정되어 상속이 개시된다.상속제도의 탄생은 사유재산제와 더불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며. 불로소득을 조장하고 출발의 평등을 방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사 회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질서로 하는 한 상속제도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하겠 다. 인류역사에서 상속제도가 출현하게 된 것은 생산력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한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 혼자 먹고살기도 급급한 저급 한 생산력 아래에서는 남는 것이 없으므로 상속을 생각하기 어렵지만,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한 사람이 일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먹여 살릴 수 있게 됨으로써 다 른 사람을 부려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부를 축적한 사람은 자 신이 축적한 부를 자기의 자식에게 물려주기를 원하게 되어 상속제도가 출현하 게 되었다.상속제도는 불로소득을 인정하고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간의 불평등을 조장 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상속제도는 사유재산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에서는 반드시 인정하여야 하는 법제도 이다. 상속의 종류에는 호주상속(호주승계)와 재 산 상속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것들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 겠다.Ⅱ.호주상속호주가 사망, 기타 사유로 인하여 호주권을 상실한 경우 그 지위를 승계 하는 것을 말한다.1) 호주 승계가 개시되는 사유1 호주가 사망하거나 국적을 상실한 때2 양자인 주승계권 포기를 인정하였다.(민법 991)Ⅲ. 재산상속1) 상속인의 범위재산상속은 사망한 사람의 아들딸과 배우자, 부모 또는 조부모, 형제자매, 4촌 이내의 방계 혈족 순으로 상속 받게된다. 얼마 전 민법의 개정으로 인하여 마지 막 상속인의 범위를 8촌에서 4촌으로 줄였다. 위와 같은 순서에도 불구하고 상 속인이 없을 때에는 사망자와 최후까지 생계를 같이하고 있던 사람(예를 들어 사실혼의 배우자)이나, 그를 요양 또는 간호한 사람, 그밖에 특별한 연고가 있던 사람에게도 재산을 상속할 수 있게 하였다.법적으로 자세히 규정해놓고 있는 상속인의 범위와 순위는 다음과 같다.2) 제 1순위 - 피상속인의 직계비속과 피상속인의 배우자(제1000조 제1항 제1호.제 1003조 제1항).직계비속은 촌수에 차이가 있는 직계비속이 여러 명 있는 경우에는 최근친자가 선순위의 상속인이 되고(제1000조 제2항 전문), 같은 촌수의 상속인이 여러 명 는 경우에는 공동상속인이 된다(제1000조 제2항 후문). 따라서 아들, 딸은 손 자 녀에 우선하여 상속인이 된다. 직계비속은 혼인중의 출생자이든 혼인 외의 출생 자이든, 기혼 혹은 미혼이거나 같은 호적이든, 혼인 분가 입양 등에 의하여 다른 호적에 있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연혈족이든 법정혈족이든 그 상속순위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태아는 상속순위에 관하여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제1000조 제3항) 피상 속인의 배우자는 그의 직계비속과 같은 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된다.3) 제 2순위 - 직계존속과 배우자제2순위의 상속인은 피상속인의 직계비속이 없는 경우, 피상속인의 직계존속 과 배우자이다(제1000조 제1항 제2호. 제10003조 제1항).피상속인의 직계존속이면 되고 어떠한 차별도 인정되지 않는다. 즉, 부계이건 모 계이건, 양가측이건 생가측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즉, 친 생부모와 양부모가 있 을 때에는 함께 같은 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된다. 이혼한 부, 모나, 인지로 인 하여 부(父)의 가(家)에 입적한 자녀의 생모도 이혼자. 경우에만, 상속 인이 된다. 촌수가 같으면 공동상속인이 되고 촌수가 다르면 근친부터 공동상속 인이 된다.6) 국가위와 같이 상속인이 될 수 있는 자는 5가지 경우에 가능하게 되며 재산상속인이 없는 경우에는 특별연고자(예, 사실혼관계의 배우자)는 가정법원에 상속재산의 일 부 또는 전부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고, 특별연고자의 청구도 없는 경우 상속재 산은 국가에 귀속하게 된다.* 대습상속 *대습상속은 추정상속인(推定相續人)이 상속의 개시 이전에 사망 또는 결격으로 인하여 상속권을 상실한 경우에 그 사람의 직계비속(直系卑屬)이 상속하는 일을 말한다. 재산상속에 있어서 제1순위자인 직계비속이나 제3순위자인 형제자매가 상속개시 전에 사망 또는 결격된 경우에 그 직계비속이 있는 때에는 그 직계비 속이 사망 또는 결격된 사람의 순위에 갈음하여 상속인이 된다(민법 1001조). 또 한상속개시 전에 사망 또는 결격된 사람의 배우자는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또는 형제자매가 있는 경우에는 그 상속인과 동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되고, 그 상속인 이 없는 때에는 단독상속인이 된다(1003조 2항). 대습상속인이 수인(數人)인 경우 에는 본위상속(本位相續)에 있어서의 순위에 따르고 대습상속의 상속분은 사망 또는 결격된 사람의 상속분의 한도에서 본위상속에 있어서의 상속분에 의해 전하 여진다(1010조 2항). 대위상속(代位相續) 또는 승조상속(承祖相續)이라고도 한다.Ⅳ. 상속의 종류배우자, 형제·자매, 자녀 등 상속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속방법은 민법에 단순 승인, 한정승인, 상속포기의 3가지 방법이 있다. 이중 단순승인(상속)은 사망자의 재산과 부채를 상속인이 무제한 책임지는 방법이다. 또 상속포기는 사망자의 재 산보다 부채가 많을 때 상속인이 아예 사망자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부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이다. 그런데 사망자의 재산이나 부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에는 단순승인이나 상속포기를 선뜻 선택하기 힘들 어 진다. 이 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한정상속( 한 1~2주 내에 모두 수리심판판정을 내린 다. 한정상속은 사망자의 재산범위 내에서만 부채를 책임지기 때문에 상속자가 가장 유리한 방식이다. 그러나 재산과 부채처리 절차가 너무 번거러운 점이 흠이 다.우선 한정상속인은 법원의 수리 심판 일로부터 5일 내에 한정상속사실을 일간신 문에 1회 이상 공고하여야 한다. 한정상속인은 이 공고를 통해 일정기간(2개월 이 상) 상속채권자(사망자에 대한 채권자)와 유증자에게 채권 또는 유증재산을 신고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물론 한정상속인이 이미 알고 있는 상속채권자(또 는 수증자)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한정사실을 통지해야 하고 이들은 반드시 재 산분배에 참가시켜야 한다. 한정상속인은 상속채권자의 신고기간에는 재산을 분 배하지 않아야 한다. 또 상속재산은 상속채권자의 채권우선순위에 따라 공정하게 배분해 주어야 한다.만약 한정상속인이 공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또는 신고기간에 재산을 분배한 후 나중에 여타 상속채권자가 손해를 보게된 경우에는 한정상속자가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또 선순위채권자를 제쳐두고 후순위 채권자에게 재산을 먼저 분배하여 선순위채권자가 손해를 보게 된 경우에도 한정상속자가 그 손해를 배상 하여야 한다. 한편 채권 신고기간에 신고하지 않은 상속채권자라 하더라도 추후 채권회수를 요청할 경우 남은 재산이 있는 범위에서 변제를 계속하여야 한다.3) 상속포기상속포기를 원하는 사람은 상속 개시 일로부터 3개 월내에 가정법원에 상속포기 신고를 하여야 한다. 다만 상속을 포기하였다고 하더라도 상속재산을 방치하여서 는 안된다. 상속을 포기한 사람도 새로운 재산관리인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 재산 을 계속 관리하여야 한다. 한편, 상속포기와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점은 상속권은 배우자, 자녀, 형제 자매등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배우자, 자녀 등 우선 상속권자 가 상속포기를 해버리면 후 순위인 형제자매가 사망자의 부채를 모두 떠 안을 수 도 있다는 점이다. 이때는 후 순위 상속인도 본인이 상속권자가 된 것을 알게된 날로점이다. 또 한정상속이나 상속포기를 신고했다 하더라도 ㄱ 상속 인이 상속재산을 처분하거나 ㄴ 상속재산을 은닉, 부정 소비하거나 ㄷ 고의로 재 산목록에서 누락한 경우에는 단순상속을 한 것으로 간주되어 모든 재산과 부채에 책임을 져야 한다.Ⅴ. 유언의 방법상속법은 유언을 법에서 정한 방식으로만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유언이라고 생각하는 피상속인이 임종에 임해서 한 진술은 법적인 의미가 없는 유훈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유언의 방식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와 구수(口授)증서의 5종이 있습니다. ( 만 17세가 넘으면 민법은 유언자의 진의롸 유언의 존재여부의 명확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그 방식을 5가지로 제한 )1)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유언자가 유언의 내용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하고 날인하면 됩니다. 자필증 서에 문자의 삽입, 삭제 또는 변경을 함에는 유언자가 이를 자서하고 날인하여야 합니다. 자필증서는 말 그대로 스스로 쓸 것을 요구하므로 타이프를 치거나 워드 파일을 인쇄하는 방법으로는 작성할 수 없습니다.2)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은 유언증인 2인이 참여한 공증인의 면전에서 유언의 취지를 구수하고 공증인이 이를 필 기낭독 하여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후 각자의 서명 또는 기명날인 하는 방법으로 한다.Ⅵ. 상속효과1) 일반적 효과로서 재산상속인은 상속이 개시된 때부터 피상속인의 일신에 전속한 것을 제외하고 그 재산에 관한 포괄적인 권리의무를 승계한다(1005조). 피상속인 의 사망으로 인하여 상속인은 피상속인의 재산에 속한 모든 권리의무를 포괄적 일체로서 당연히 상속한다. 그러므로 상속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상속재산에 관한 재산권적 권리는 물론, 채무까지도 승계하게 된다.2) 공동상속으로서 상속인이 여러 명인 경우 또는 상속인과 포괄적 수증자(受贈者) 가 함께 있는 경우, 그들은 공동상속인이 된다. 따라서 상속재산이 그들에게 분 할되기까지 상속재산은 그들의 공유(共有)에 속하게 된다(1006조). 또한 공동.
    교육학| 2004.12.18| 9페이지| 1,000원| 조회(585)
    미리보기
  • [중부유럽] 헝가리의 문화
    Ⅰ. 들어가기9월 달 개강 한 후 수업시간에 맨 처음 들은 중부 유럽의 이야기가 헝가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솔직히 수업시간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지만 다른 나라에 대한 역사, 종교 등에 관한 이야기는 음식문화나 그들의 생활양식 등에 비하면 그다지 많은 관심이 집중되지는 않는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역사에 관한 것들도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보다는 그 나라사람들이 지금 현재에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생활하는지 지금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런 역사 같은 경우는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보다 관심이 덜 가고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가 수업시간에 교수님의 말씀 중에 헝가리 음식이 우리나라 음식과 매우 흡사한 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에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나로써 헝가리라는 나라와 그 나라의 문화, 그리고 특히 음식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나라를 알기 원한다면, 그 나라의 문화를 먼저 살펴보라는 말이 있다. 그 나라의 문화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그 만큼 문화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레포트 주제를 헝가리의 문화에 대해 조사해 보고 우리와 다른 문화적 특징은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Ⅱ. 헝가리인의 행동 양식일단 헝가리인 들은 회의주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헝가리는 1867년부터 합스부르크-헝가리제국의 일원으로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헝가리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전쟁 중 동맹국의 편에서 싸웠던 헝가리는 정쟁에 패하면서 국토의 66 %, 인구의 60 %를 외국에 빼앗기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한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의 편을 섬으로서 다시 한번 연합국 측-소련을 포함한-에 백기를 들었던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다. 이 후로 헝가리 사람들에게는 있어서 매우 적절하지 못한 용어로 이해될 수 있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상기의 원인들에 의거하여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1956년의 반소민중봉기가 소련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진압 당한 후 헝가리인 들의 회의주의는 극도가 더하여진 것 같다. 정부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이 60년대를 거쳐 80 연대에 이르는 현대 헝가리의사의 한 조류이다. 개혁 과 개방 이제는 어느 정도 식상해져서 그렇게 매력을 주지 못하는 단어이지만 1989년의 헝가리인들 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가장 매력적인 단어이다. 그 해 고르바초프로부터 시작되어 동유럽전체를 강타한 개혁과 개방의 바람은 일종의 신드롬이라 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를 경험해 오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적응되어있던 구습에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는 노력들이 일어났다. 그 후 7년 간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헝가리의 개혁정책은 다시 한번 국민들은 실망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고 과거 공산당의 잔재들인 이름만 바꾼 사회당이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헝가리의 상황들에서 오늘날 헝가리인 들의 특징이랄 수 있는 회의주의를 읽을 수 있다.회의주의적 사고의 한 틀을 무너트리는 돌파구가 가족적 가치의 재발견이다. 개방 후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헝가리인 들이 다시 찾은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가족 이다.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가족적 유대감은 회의주의의 팽배와 더불어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가치가 다시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족간의 유대관계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황은 오히려 젊은층에서 매우 강력하게 보여지고 있다. 얼마 전 헝가리 최대 일간지인 넵서버드착-민족의 자유- 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대에서 30대의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외국에 나가거나 나가고 싶어하며, 현재의 사회보장정책이 제공해 주는 최소의 만족보다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노력한 만큼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그런 근무조건을 선호한다는 설문만, 이제는 가족 중심적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대치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20-30대의 젊은이들의 의식구조를 살펴볼 때, 최소한 향후 20년 뒤의 헝가리는 매우 가족적이며, 자본주의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럽의 한 나라가 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이들이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되는 40대~50대에는 벌써 이러한 서구적 자본주의적 마인드가 헝가리의 특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헝가리는 비전이 있는 나라이다. 성급한 판단이나 결론은 내리기 어렵지만 젊은이들의 가족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모습에서 어떤 가능성과 비전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헝가리지만 이들은 이해하고 바라보는 척도에는 과거 이들이 겪어왔던 고난과 아픔의 역사를 이해 해 주는 따뜻한 시각이 필요할 것이다.Ⅲ. 문화적 정체성헝가리인 들은 자신의 뿌리는 동쪽에 두고 서도 서쪽의 기독교 문화와 의도적으로 연대를 맺었다, 한편으로는 예술과 건축 분야에서 고도로 발달된 서부 유럽을 포용하는 듯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헝가리인 들의 민족적인 보수성을 고집하여 18세기 후부터 더욱 그들은 정신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다. 헝가리에서 추방당한 렌르버이 폴은 국수 적인 헝가리의 무의식 세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아 가득한 옛날부터 헝가리인 들의 영혼은 카르파티아 분지에서 성 이스트반의 왕국을 세운 그들의 열정과 적대국인 루마니아. 슬라브 그리고 독일에 둘러싸여 우방 없이 고립되어 서서히 말살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 사이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말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역사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13세기에 헝가리인 들은 1241-42년에 타타르의 침공에 큰 혼란을 겪었고, 150년 간의 터키 지배는 헝가리의 인구 감소와 외부로부터의 이민 자들이 헝가리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터키의 지배 하에 있지 않던 서부 헝가리 지역들과 터키 군이 물러간 후의 모든 지역들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은 매우 어려운 일로 인식되고 있다. 대부분의 번역 문장들은 매우 졸렬하게 표현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헝가리의 문필가인 페렌츠 듈러는 헝가리 어는 우리에게 가장 부드러운 요람과 같은 동시에 가장 딱딱한 무덤과도 같다. 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은 헝가리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18세기 후반부터 헝가리 문화에서 민족적인 자각이 시작되어. 19세기에 꽃을 피운다. 민족의식의 고양은 여러 방면에서 특히 고양되었다. 특히 에르켈 페렌츠, 페레츠 리스트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부흥과 자부심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Ⅳ. 부다페스트다뉴브의 진주 동유럽의 파리 등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부다페스트는 중-동부 유럽 최대의 규모로서 인구 200만 이상을 자랑하는 다뉴브 연안의 도시이다. 헝가리를 포함하는 중부유럽의 경제 외교 문화 상업 물류의 중심지로서 현재 세계 64개국의 외교단과 4개 국제기구가 부다페스트에 상주하고 있으며 중부유럽자유무역지대(CEFTA) 의 중심국가로서 향후 유럽연합(EU)멤버로 참여 할 예정이며 1998년 3월 29일 OECD 1999년3월에 NATO의 정 회원국이 되었다. 또한 얼마 전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를 공식 방문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소개되기도 하였다.부다페스트(BUDAPEST)는 헝가리의 수도로서 규모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이 지역 국제정치의 핵심에 있는 도시이다. 도시의 외적 규모는 총 면적이 525㎢로서 부다페스트 시내를 관통하는 두나 강을 중심으로 왼쪽 페스트 지역은 325㎢의 평지로 되어있고, 동쪽은 부다라고 불리는 지역으로서 면적이 173㎢이다. 이 두 지역은 역사적으로 발전 과정이 다른데, 뻬쉬뜨 지역은 중세 이래로 상업과 예술의 도시이고, 부다페스트 지역은 13세기 이래로 헝가리의 왕들이 거주했던 곳으로서 부다 왕궁과 더불어 역사적 유물들과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로 모든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고 헝가리인 들의 삶이 잘 묻어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Ⅴ. 음식문화문화란 어떤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행동 양식으로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습득되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식생활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 또한 문화라 할 수 있다. 음식은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단이다. 사람은 음식을 섭취하여, 에너지를 생산하고 그 에너지는 사람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힘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는 이유이고 음식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하지만 음식은 이런 단순히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음식을 통해 그 나라, 그 지역의 문화를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음식 또한 예외 일수 는 없다. 인간 문화적 특성에 따라 식품을 선택하고 요리한다. 어느 때 어떤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에 따라 결정되며, 각 사회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요리법도 다르게 발달하게 된다. 이런 식문화의 형성되는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후, 풍토 조건에 따라 자연적 요인, 종교, 전통이나 국제화에 따른 사회적 요인, 생활 수준이나 소득 수준에 따라 경제적 요인, 식품 산업의 발전 정도, 가공 기술의 발전 정도에 따라 기술적 요인이 있다. 그밖에도 외부 교류, 욕구 충족을 위한 심리적 요인 등 매우 다양한 요인들을 통해 식문화는 형성 된 다. 그렇기 때문에 식문화를 통해 거꾸로 그 사회의 여러 가지 문화적 특색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헝가리인 들에게는 좋은 음식은 황홀한 섹스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 소설 중에 치명적 열정에는 건포도 푸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음에 이르는 헝가리 이민자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헝가리 같은 농경 사회에는 몸에 좋은 영양소가 풍부한 전통 음식이 많다. 요리는 오랜 세월 헝.
    인문/어학| 2004.12.18| 7페이지| 1,000원| 조회(689)
    미리보기
  • [과학사] 파스퇴르 평가B괜찮아요
    Ⅰ.들어가기파스퇴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유제품.. 솔직히 말하면 파스퇴르가 우리 과학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별로 관심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슈퍼마켓을 지나면서 파스퇴르 우유를 보게 되었고 갑자기 생각이 파스퇴르가 사람 이름이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그저 그냥 우유의 한 이름일 뿐이었지 그밖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지금은 난데없이 파스퇴르가 정확하게 어떤 업적을 남겼기에 우유이름에 붙었을까 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과학사의 마지막 레포트 주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던 터라 적당한 시기에 괜찮은 조사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파스퇴르의 업적과 그의 생애에 대해 조사해보기로 하였다.Ⅱ. 본론 - 파스퇴르의 생애와 그로 인한 과학 발전방부학, 방부외과학, 세균학, 전염병학, 공중보건, 면역계획 등의 다양한 현대의학들은 파스퇴르와 함께 시작이 된다. 이런 루이 파스퇴르(1822∼95)는 동부 프랑스 쥐라현의 대대로 가죽 무두질을 해오던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성실한 학생이었다. 파리의 에콜 노르말에서 물리와 화학을 배운 후, 초기에는 분자구조의 배열이 어떻게 화합물의 성질에 영향을 주는지를 다루는 입체화학의 기초 연구를 했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처음에는 결정화학에 대한 연구를 했으나 1954년경부터 미생물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856년에 양조업자들로부터 자신들이 만든 포도주가 왜 쉽게 부패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발효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연구 결과 그는 당시 단순한 화학과정으로만 알려져 있던 발효가 실제로는 살아있는 작은 미생물에 의한 작용이라는 것을 밝힌다. 이 결과를 그는 1857년 라는 논문을 통해 내놓았고, 이 논문은 미생물학을 탄생시킨 첫 계기가 되었다. 파스퇴르는 균류와 같이 산소가 없이도 자라는 혐기성 생물을 발견하여비밀을 밝혀내는 일종의 근세적 마술사로 생각했다. 심지어 청년시절에는 자신을 갈릴레오, 뉴턴, 라부아지에 같은 과거의 위대한 과학자들과 동일시했고 결코 자신이 과학자 사회에 속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과학자사회는 자주 개최되는 대규모 국제회의로 널리 알려지면서 점점 더 범국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런 많은 일들에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스퇴르는 열렬한 애국주의자였다. 과학은 그에게 인간정신의 가장 고등한 창조물 중 하나였지만 또한 프랑스 사회를 재건하는 중요한 힘이기도 했다. 파스퇴르는 결코 선대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고, 과학자가 곧 성직자라는 생각 때문에 움츠러들지도 않았다.다른 방식으로도 역시 파스퇴르는 당시 출현 중이던 과학문학의 형태와 가치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를 창출하도록 도왔다. 그의 삶은 실험실 주위를 맴돌았고, 그곳을 그는 항상 발견의 성지로 보았다. 당시 상황이 말해주듯 그의 실험실은 양조장, 농장 혹은 온실 등에 세워졌다. 그는 특별히 건강이 악화된 이후에는 육체적 노동이 필요한 부분에서 여러 조수와 학생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본질적으로는 혼자서 일했다.파스퇴르의 성공은 그가 연구과제들의 다양성 속에서 동일성을 창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의 탐구는 결정 학에서 면역학까지 자연발생설에서 산업적 생산이라는 실제적인 문제까지 정말로 다양했다. 그러나 절충주의 적이고 되는 대로의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으로 (그는 언젠가 기회도 준비된 마음에만 찾아온다 라고 주장했다.)그의 연구들은 돌아보면 거의 필연적인 통일성과 논리에 바탕 했다. 우리는 미생물을 대할 때마다 매번 파스퇴르의 무한히 작은 것의 무한한 능력 에 대한 열광을 깨닫게된다. 바로 이것이 일찍이 파스퇴르의 관심을 사로잡고 또 그것을 설명하는데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게 만들었던 것이다.과학에 대한 열정적인 몰입에도 불구하고 파스퇴르의 어린 시절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별달리 특별할 만한 것이 없다. 파스퇴르는 가족 간의 유대가 긴밀한을 지키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논쟁에 끼여들지 않았지만 항상 생명의 특별함과 생명체가 만들어낸 물질의 특별함을 구별하였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의 발견들로 실험실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것을 가능하게끔 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파스퇴르의 발효에 대한 연구와 초기에 그가 몰두한 문제들을 연결시켜준 한가지 요소는 어떤 알콜들은 광학적으로 활성을 띤다는 것과 그의 기준으로는 그것들이 생기적 메카니즘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틀림없다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그는 당대의 가장 유능한 화학자 중 두 사람의 권위를 의심하게 되었고, 1850년대 중반 무렵까지의 연구로 그는 일종의 현미경 전문가이자 주석산염 제조에 관련된 미생물의 생활사에 대한 전문가로 변모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러한 연구와 발효에 관한 그의 최초의 중요한 논문 사이에는 놀라운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 젖산 발효를 다룬 논문이었지만 발효과정에서 미생물체의 역할에 대한 이후 그의 성숙된 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설탕 분필 맥주 효모 등으로부터 마음대로 젖산 발효를 일으킬 수 있는 조건들과 젖산 발효 토기에 생성된 약간의 회색 침전물을 분석했다. 이 침전물은 현미경으로 보니 작은 방울들 또는 매우 짧은 분절 섬사들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났고 발효는 이러한 살아있는 미생물체들의 증식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젖산 효모는 보통의 맥주 효모와 관련은 있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그것들의 성장에 유리한 환경적 조건이 서로 약간 다르다는 것으로써 증명되었다.1860년 말에 그는 어떤 효소에 관해 연구하다가 막대 모양의 생물체가 산소의 농도가 가장 약한 주입 액의 중심에서는 여전히 활동적이지만 주변 부에서는 그 운동성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주입 액에 보통의 공기를 흘려 넣으면 미생물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는 파스퇴르에게 발표가 산소 없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충분히 고농도인 산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미생물을 주였다. 이것은 그 후 2,3년 안에 파스퇴르 살균법(저온살균법)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유나 다른 제품들을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1860년대에 파스퇴르는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과학자였지만 광학적 활성 물질의 발생, 부패와 발효, 그리고 포도주의 질병 등에 있어 미생물체의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이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의 실험은 다른 과학자들이 재현할 수 없었고 종종 그의 연구 결과는 대안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파스퇴르는 과학에 대한 선전과 과학적 수사에는 능했지만 과학의 실행에서는 그렇지를 못했다. 그는 논쟁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고 때때로 그의 친구들은 그가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데 소모한 에너지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의 과학적 적수들 중 대부분은 프랑스인 이었지만 그는 특히 발효의 본성에 대해 토론하던 독일인 리비히와의 선의의 싸움을 즐겼는데 이것은 1873년 리비히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 2500년 과학사를 움직인 인물들 page219 ∼227 본문내용 요약정리파스퇴르의 연구 일화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파스퇴르가 박테리아에 대해 연구할 때 닭 콜레라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닭의 병으로 콜레라라고는 해도 인간이 걸리는 콜레라와는 관계가 없다. 프랑스 농민들은 닭 콜레라 유행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것은 극히 심해지면 닭 100마리 당 90여 마리 나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병에 걸린 닭은 곧 죽었다. 파스퇴르는 병에 걸린 수탉의 벼슬에서 혈액 몇 방울을 채취하여 그것을 몇 마리의 닭에게 먹였다. 그 닭은 병에 걸려 공 죽었다. 파스퇴르는 그것으로써 무서운 닭 콜레라균을 인공적으로 배양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언제나 원할 때 닭에게 병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무서운 맹돌 배양균{) 파스퇴르는 많은 병이 세균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믿고 있었는데 어떤 종류의 세균을 배양 하면 일종의 독소가 만들어져 그 독이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고힘이 점점 작아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마침내 닭은 가벼운 병에 걸린 뒤 곧 회복되었다. 파스퇴르는 이전부터 전염병을 깊이 알고 있던 덕에 자신의 관찰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제나{) 1749년에 출생 천연두를 연구하여 종두실험을 성공시킨 사람가 우두에 걸린 사람은 천연두에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만일 닭을 가벼운 콜레라에 걸리게 하면 회복된 뒤 같은 병에 심하게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닭은 이미 그 병을 방어하는 힘 즉 면역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마리의 닭에게 오래된 콜레라 배양균을 주고 가벼운 발병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다음에 닭에게 새로 막 만든 맹독의 균을 주었다. 이번에 닭은 살아 남았다. 공기와 접한 오래된 배양균을 미리 먹인 덕에 닭은 콜레라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목숨을 빼앗는 병을 물리칠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1881년 전까지 파스퇴르의 과학상 업적은 널리 알려져 어떤 유명 신문은 그를 프랑스 과학의 영광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양의 탄저병에 관한 그의 이론은 여기저기에서 논의되었다. 탄저병은 농가에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양을 기르는 사람들을 더욱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 병에 의한 목양업자들의 손해는 연간 수백만 프랑이었다. 탄저병에 걸린 양은 곧 다리가 약해져서 잘 일어서지 못했고 간신히 일어섰다해도 비틀거리고 몸을 떨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이 병에 걸린 양은 갑자기 죽어 양치기가 자신의 양이 하나 둘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 그제야 비로소 양떼가 병에 걸렸음을 알곤 했다. 파스퇴르는 자신의 연구로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들에게서 세균이 생겨나 다른 동물들에게 병을 옮긴다는 결론을 내렸다. 건강한 동물이 균이나 오래된 목초 지의 풀 -예를 들면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이 묻혀있는 토지에 나있는 풀-을 먹으면 곧 전염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런 토지에는 병으로 죽은 동물의 몸을 먹고사는 벌레가 세균을 몸에 붙이고 지면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2004.12.18| 8페이지| 1,000원| 조회(849)
    미리보기
  • [과학사] 돌턴의 생애와 그의 원자설
    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원자, 분자등에 대한 관심이 많다. 자연의 물질을 얼마까지 쪼갤 수 있고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사실상 그밖의 것에 대한 것은 거의 무지하다. 또한 시험공부를 할때 마다 이렇게 어려운 학문을 발전시킨 사람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존경스럽고 신기하게 마저 느껴질 때도 있다. 이번 과학사를 교양 과목으로 선택하고, 또 그 수업을 듣고 레포트 주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화학의 기본 개념이 되는 원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떻게 원자라는 개념이 밝혀졌고 그 개념을 밝힌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이번 레포트 주제를 돌턴으로 정하게 되었다.돌턴 (John Dalton, 1766-1844)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돌턴은 영국의 컴벌랜드(Cumberland)주의 작은 촌락인 이글스필드(Eaglesfield)에서 1766년 9월 6일 탄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난한 직물공이었고 그는 형제는 많아서 어릴 때 부터 어렵게 자랐다. 돌턴가는 영국의 비국교파 중에서도 그 규율이 가장 엄격한 쿠에카(Quakers)교도이었으므로 그도 일생 동안 이 종파에 속해 있었다. 돌턴이 받은 유일한 학교 교육은 마을의 국민학교뿐이었다. 그는 로빈손(Elihu Robinson)이라는 과학적 학식을 가진 쿠에카 교도로부터 수학을 교육받았고, 일생동안 로빈손과 교제를 계속하였다. 이 사람은 기상학에 능통하였고 기계류를 손수 만들었다. 돌턴은 이 사람의 영향으로 기상학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12세 때, 돌턴의 수재가 인정되어, 마을 국민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쿠에카 교도의 집회장을 사용하였는데 1780년 폐쇄되었고, 1781년 15세 때 형 Jonathan과 함께 켄달(Kendal)이라는 곳으로 와서 쿠에카 교도의 학교를 경영하고, 이때 수학,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각가지 과학 연구를 하였고, 나날의 온도, 편의를 제공받았던 만체스터의 New College로 옮겨 간 것은 1793년이었다. 만체스터의 New College라는 학교에서 수학과 과학 철학을 강의하였는데 라부아제의 「화학 요강」과 찹탈(Chaptal)의 「화학」등을 교재로 화학 강의도 하였다. 약 6년 동안 이 학교에 봉사한 다음 그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으로 수학, 과학철학 및 화학 분야의 강사로 활동하였고 런던, 에딘버그, 글라스고, 및 버밍햄 등지에서 초대를 받고 순회강연과 개인교수 등을 맡았다. 1794년에는 1789년에 설립된 Manchester Literary and Philosophical Society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1800년에는 서기, 1808년에는 부회장직을 역임하고, 1817년에는 회장이 되어 1844년 그가 죽을 때까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799년 돌턴은 뉴 칼리지에서의 공식적인 강의 의무를 포기하고 맨체스터의 팽창하는 중산 계급 자녀들의 개인 교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 그는 헌신적인 교사였던 것으로 보이며 진정한 학문적 이력이 시작되기 직전인 1801년 영어 문법의 기초 를 출간했다.돌턴은 기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으나, 공기와 일반적 기체의 연구를 시작하고, 기체의 용해도에서부터 힌트를 얻어 원자설을 제안하고 뒤이어 배수비례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원자 가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돌턴의 위대한 업적이었는데, 1808년 그의 저서인 「화학의 신체계」의 제 1 권에다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의 제 2 권은 1810년에 출판되었다.돌턴의 기상연구는 자기의 가장 큰 연구이었다. 그는 날마다 천기와 기상관계를 매일 기록하였는데, 1777년부터 죽기 전까지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온의 측정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는지 꼭 시계처럼 움직였다고 한다. 그의 연구실 부근의 부인들은 돌턴이 기온을 잴 때 자기들의 시계를 맞추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는 휴일마다 호수지방으로 가서 자기가 만든 기구류를 휴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산 위의 공기와 지상의 공기와줄은 모르고 붉은 것을 녹색으로 잘못 알고 큰 실수를 저지른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색맹인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Dalton이 예순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그에게 월리엄 IV세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하려 하였다. 그러나 Dalton은 궁정의 예복을 입기 싫다는 이유로 그 제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Dalton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옥스퍼드 대학의 예복과 같은 색인 붉은색 예복은 입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퀘이커 교도들은 붉은색 옷을 입지 않았다. Dalton은 색맹이었기 때문에 붉은색이 회색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기 눈에는 회색으로 보이는 붉은색 예복을 입고 궁정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가 1792년이었는데, 「색맹」 (color blindness)에 대해 최초의 논문을 1794년 10월에 발표하였다. 돌턴은 1832년에 옥스퍼드의 「영국학술협회」(The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로 부터 D.C.L (Doctor of Civil Law)의 학위를 받았고, 1834년에는 에딘버그의 협회로부터는L.L.D (Doctor of Laws)의 학위도 받아, 돌턴의 학식은 널리 인식되었다.돌턴이 78세인 1844년 7월 해질 무렵, 예에 따라 그날의 기상 기록을 하려고 하였을 때 이상하게도 손이 떨리는 것을 자각한 돌턴은 곧 침실에 누었으나 다음날 인사불성에 빠지고, 의사의 치료도 아무 효과없이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났다. 때는 7월 27일 아침이었다. 장례는 8월 12일에 公葬으로 많은 시민들의 弔意속에 거행되고 그의 유해는 만체스터의 Ardwick 묘지에 매장되었다. 만체스터 市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John Dalton Street」라는 가로까지 이름지어 오늘날까지 이 고독한 한 사람의 학자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18세기 말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가 원소의 개념을 정립했고 그 때부터 화학은 연금술과 완전히 결별했 못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사랑받는 과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통해 화학에 중요한 진전을 가져다 주었고 근대 물리학의 등장을 예고했다. 또 윌리엄 브록이 썼듯 실험 결과와 가설적인 원자를 이어 주는 가교 노릇을 했다.돌턴은 1803년의 한 강연에서 처음으로 원자론을 얼마간 상세하게 제시했다. 그는 18세기 과학자들을 사로잡아 온 기체의 성질을 연구한 끝에 원자론에 이르렀다. 그는 원소들이 결합하여 여러 기체를 구성하며 그 원소들은 가변적인 열에 둘러싸인 채 부게가 일정하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원자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원자들은 각각서로 다른 무게를 가지며 다른 원소를 나타낸다고 가정했다. 원소들은 일정한 조건에서 결합하여 그가 복합원자 라고 부른 것을 만든다. 그러므로 물은 라부아지에가 발견에 기여했듯이 수소 12와 산소 87 즉 수소와 산소가 1:7의 비율로 결합한 복합 원자였다. 돌턴에 따르면 이 고정 비율은 수소와 산소의 상대 질량에서 비롯되었다. 수소가 기존 기체 가운데 가장 가벼웠으므로 돌턴은 자신의 체계에서 수소를 단위 원자로 삼아 원자량을 1로 정했다.그에 따라 산소의 원자량은 7이다. 돌턴은 계속해서 모든 기존의 원소들의 상대 질량을 정했다. 그럼으로써 화학의 실험 문헌 상당수를 규명하는 데 이바지 했다. 원자론은 1808년에 발간된 에서 짧은 장 하나를 차지할 뿐이었지만 그 책은 곧 발달 가능성이 있는 독창적인 저서로 인정 받았다.존 돌턴의 이론이 지닌 궁극적인 가치를 두고 오랫동안 과학사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그의 영향을 화학 영역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지만 원자의 존재 자체에 관해서는 19세기 내내 회의가 존재했다. 돌턴의 복합 원자가 이후의 분자 개념과 똑같지 않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는 서로 다른 원소의 원자들 끼리만 결합이 형성 된다고 가정했다. 이는 영향력은 컸지만 옳지 않았다. 같은 원소의 원자들이 결합해서 단순한 분자를 만든다. 그리고 단순한 분자들이 결합해서 복잡한 분자를 만들어 낸다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으며 1830년대에는 정신력의 쇠퇴를 보였다.그는 화학 기호를 자기 나름의 상형 문자 체계로 만들었으며 베르셀리우스가 도입한 더 단순하고 유익한 체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돌턴은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 된다. 그리고 돌턴에게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았을 때는 항상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돌턴의 전기 작가 프랭크 그리너웨어가 적었듯이 원자론을 가지고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새로운 에너지원을 활용했으며 질병을 차례차례 정복했고 생물의 조직을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늘날 원자론의 중요성은 새삼 크게 떠들 필요가 없다. 그는 존 돌턴이 인류가 선사받은 이 선물을 만든 사람은 아니었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19세기 과학의 원자로 바뀐 먼 길을 걸어와서 인류에게 그 선물을 전해준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1) 싸이언티스트100 chapter74 존 돌턴과 원자론 부분과 인터넷 백과사전 참조돌턴은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켄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켄달에서 돌턴은 자기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은 콤이라는 사람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두 살 때 병으로 두 눈이 먼 맹인이었다. 그러나 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혼자 열심히 공부를 하여 서른 살에는 이미 여러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수학, 철학 등의 학문에도 아는 것이 많았다.또한 주변 지역의 숲이나 식물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이 지역의 기상연구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런 콤을 보고 자극을 받은 돌턴은 학문 연구를 더욱 열심히 하였으며 특히 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돌턴이 22살이 되던날부터 콤의 격려로 시작한 기상 관측은 그가 죽기 전날까지 57년간 계속 되었다고 한다. 돌턴이 말하길 만일 내가 주위의 사람들보다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사를 미루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
    자연과학| 2004.12.18| 6페이지| 1,000원| 조회(2,108)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7
7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2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2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3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15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