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철기Ⅰ. 시대개관초기철기시대)는 예매한 시대개념이다. 철기시대라 함은 철기를 도구의 주재료로 사용한 시대로서 오늘날까지 그에 해당한다고 할 때, 그 초기를 언제까지 볼 것인가에 따라 초기철기시대의 개념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초기 철기 :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전 100년경 연(燕)나라의 영향으로 주조철기가 보 급 되는 단계.원삼국시대 : 기원후 300년경까지 한군현의 영향으로 단조철기가 대량 보급되는 단계.한편으로, 기원전 300년경에서 기원후 300년경을 철기시대라 하고 그 전반을 철기시대전기, 후반을 후기 혹은 삼국시대 전기로 규정하는 견해도 있음.문제는 그 상한의 설정인데, ①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에서 철기가 보다 이른 시기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②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판단되는 일본의 초기 철기가 야요이시대) 초기인 기원전 4~3세기경의 연대라고 생각됨.― 초기철기시대 동안에는 청동기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지역에 따라서는 발전하기도 함.― 역사적으로 후기 고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행하는 단계, 화북 이남지역과의 전쟁과 교역 등의 교류와 자체적인 경제사회의 발전을 통해 국가사회로 발전하는 단계임.― 주변지역에도 부여와 옥저, 삼한 등의 여러 정치적 집단이 형성됨.Ⅱ. 문화유형과 토기의 분포초기철기시대에는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 걸쳐 4가지 문화유형이 제시된다.① 청천강 이북의 중국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 유행한 세죽리-연화보(蓮花堡)유형)② 송화강 유역의 대해맹(大海猛)-포자연(泡子沿)유형③ 연해주지역의 단결(團結)-크로노프카 유형)④ 청천강 이남의 남성리-초포리유형)(※송눈평야의 한서(漢書)유형을 추가하는 의견 - 요서지역의 문화유형과 가까워 제외)이들 유형의 토기는 대체로 모래가 섞인 점토를 손으로 빚어 야외가마에서 산화염소성으로 구원진 무문토기가 특징이다. 같은 시대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고운점토를 태토로 하여 회전판에 성형을 하며, 폐쇄된 실요(室窯)에서 환원염으로 구워 만든 회색도기가 보급되지만 대토기가 출토되어 초기철기시대에서 유지했음을 알 수 있음2) 난방시설- 청천강 이북의 서북한과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두만강지역의 집자리에서 화덕대신에 난방과 조리기능을 강화시킨 부뚜막)과 구들)시설이 유행.-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에서는 원삼국시대에 유행함. 따라서 한강이남지역에 등장한 부뚜막과 구들은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에 기원을 둠2. 무덤- 고인돌은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전 지역에서 거의 축조되지 않음- 송화강유역에서 지하에 토광을 파고 큰 뚜껑돌을 덮은 대석개묘(大石蓋墓)와 남한지역에서 위석식(圍石式) 혹은 2단 토광의 무지석식 지석묘가 초기철기시대 직전까지 축조됨- 돌을 다듬어 쌓아서 무덤의 벽을 조성하여 만든 석곽묘는 청동기를 비롯하여 초기철기시대에서 여전히 축조 -요동의 본계 상보촌, 장수 남양리에서 발견된 세형동검과 철기를 부장한 무덤◎ 철기시대 유행한 묘제1) 목관묘) (위석묘)토광을 파고 목관을 안치할 때 그 주의 공간이나 상부에 끼워 넣거나 쌓은 돌이 남아 있어서 위석묘로 불림 - 요동의 윤가촌 유적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은 토광을 깊게 파고 목관을 안치한 다음 그 주의와 상부에 토기와 청동기, 철기를 부장하고 목관내에는 장신구와 동검정도만 매납 - 적식목관묘(積式木棺墓)는 원삼국시대까지 축조2) 유아용 - 독무덤(옹관묘)청동기시대 남한 일부지역에서 유행한 독무덤은 항아리 1기에 시신을 안치하고 똑바로 혹은 비스듬히 안치한 것이지만, 초기철기시대의 것은 두 개 혹은 세 개의 항아리를 가로로 안친한 특징이 있음 - 두 개의 항아리 사용은 신천 명사리와 광주 신창동, 세 개의 항아리 사용은 윤가촌Ⅳ. 금속기의 제작과 보급1. 청동기)청동은 구리와 주석, 납, 아연 등의 광물로 구성된 합금이다. 한반도에 납, 아연은 비교적 풍부하지만 주석산지는 흔하지 않다.청동기 제작 과정을 살피는데 필요한 공방유적은 아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각지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거푸집을 통해서 제작지와 제작과정의 단면을 살필 수 있다.비파형동 적당.철기의 제작방법 : 채광(원광을 채취) - 제철(원광에서 철 소재를 생산) - 제련(철기를 만드는 과정 - 주조, 단조) 제철과정을 말해주는 초기철기의 자료는 충분치 않음◎ 철기생산 유적? 평안남도 증산군과 대동군 부산면에서 확인된 주조틀 - 기원전2세기에 중국 연나라처럼 선철을 이용한 주조철기가 생산됨을 보여줌? 부산 동래 내성의 집자리 - 단야로(鍛冶爐)와 철 소재 파편? 울산 천곡리 움집 - 철광석이 기원전 2~1세기경의 점토대토기와 함께 발견◎ 철기문화의 유입과 변천과정1단계 : ? 중국 철기가 알려지기 전 시베리아 계통의 철기 유입기이에 해당하는 유물은 두만강 유역에서 확인됨(무산 호곡동 제 5문화층과 회령 오 동 6호 집자리 출토 도끼 - 분석 결과 연철과 선철 제품, 공반된 토기에 근거하여 기원전 7~5세기경으로 주장되지만 그대로 인정되기 어려움. 중국 연나라계통이라 고 보임)2단계 : ? 기원전 3~2세기경 연나라 철기문화 유입기? 철기는 청천강 이북에 집중되며 이남은 발견예가 드뭄.? 평북 영변 세죽리, 위원 용연동과 요령 무순 연화 의 생활유적, 호미 ? 괭이 ? 낫 반달칼 ? 자귀 등의 농기구와 창 ? 화살촉 등의 무기 출토? 청천강 이남 - 연나라계통의 철기가 생활유적에서 나온바 없음? 함남 함흥 이화동, 황해 봉산 송산리와 금강 유역의 충남 부여 합송리, 전부 장 수 남양리 등 몇 곳에서 주조 도끼와 끌, 첨두기가 수점 출토- 청천강 이북에는 본격적으로 철기가 보급되었지만 이남을 널리 보급되지 않음3단계 : ? 기원전 1세기경 한반도 전역에 단조로 만든 강철제 철기 보급? 대동강 유역의 목관묘와 목곽묘에서 다량 출토 - 무기류중심? 남한에서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단조철기 출토 - 철기로는 장검, 청동 유물 다량 공반? 대표 유적 - 경주 구정리, 대구 평리동, 창원 다호리, 경주 조양동, 대구 팔달동, 경산 임당동등의 목관묘결국, 한반도에 철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한 대 이후로서, 중국에서 철기가 전국시대부터 생산되었으나 한 이형 동기와 점토대기, 흑도장경호가 양 지역에서 같이 출토② 차이점 : 동검 ? 동경 ? 이형 동기를 구체적으로 보면 양 지역 간에 형식적 차이, 추정연대도 일정한 차이가 있음③ 요동 문화가 서해안에 직접 유입되었다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혹은 다소 시차를 두고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보임 - 서남한 지역은 이른 단계에 마한을 입증2. Ⅱ기(기원전 3세기 후반 ~ 2세기)? 기원전 3세기 말 진한 교체기에 요동지역을 둘러싸고 급격한 정세가 변화가 있었음, 연나라의 수도를 공략한 진나라는 요동에 피신한 연의 세력을 축출하고 장악?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철기문화는 변화를 겪게 됨? 명도전의 화폐기능 상실(청천강 이북에 많은 명도전 퇴장 유적이 형성)◎ 대동강 유역① 전단계의 청동기문화가 더욱 발전하여 세형동과, 세문경등이 제작 - 거푸집, 청동유물로 짐작② 세문경은 고도의 전문적 기술이 동원 - 세문경 제작된 공방은 당시 최첨단산업의 중심지. 사회 ? 정치 ? 경제적으로 중요 거점.③ 기원전 3세기 중반 이후에 고조선의 대동강 중심설 뒷받침◎ 위만조선① 기원전 2세기 초에 성립되며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서는 위만집단이 들여온 외래문화와 고조선 토착문화의 혼합) - 본계 상보촌 유적(요동지역에서는 전국계 철기와 세형동검, 점토대토기가 공반 : 연나라 땅에 있다가 고조선 영역으로 진출한 위만세력의 고고학적 증거일 가능성)② 따라서 위만조선은 고고학적으로 고조선 계통의 문화유형에 연과 진계통의 문화요소를 융합한 유적유물 갖춤새로 추정③ 대동강 유역의 평양 정백동과 태성리 단조철기를 부장한 목곽묘 - 기원전 2세기대 이전의 것이며, 명도전의 사용주체가 위만조선의 주민이라고 주장.그러나 한의 영향과 시스템을 수용하였을 위만조선이 연의 화폐인 명도전을 사용했다고 보긴 어려움. 따라서 기원전 2세기대 진과 한의 영향을 받은 위만조선의 최고 수장급 무덤일 가능성은 있음◎ 위만 이전의 준왕의 고조선① 이미 철기를 제작할 가능성은 있으며 청동기를 제작하는 기술도 고도로 발달.② 대동강유역을 본격적으로 철기가 사용되는 단계로 잡는다면 한반도 북부지방에서는 이 개념이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으나 남부지방에서는 이 개념을 적용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청동기가 활발하게 사용되는 시기에는 철기의 존재가 극히 적고, 철기의 등장이 B.C. 2세기경 이후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기원전후까지를 한 시대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야요이시대(彌生時代)는 1848년 도쿄군(東京都) 야요이죠(彌生町 : 現 동경대학 후문)에서 발견된 토기를 ‘야요이식토기’라고 명명한 것에 유래한다. 이 시대에는 일본열도에서 농경이 정착 · 확대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되고 계층 혹은 계급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일본열도 각 지역이 정치적으로 통합된다. 또 청동기(靑銅器)와 철기(鐵器)라는 새로운 금속제 도구가 제작 · 사용되고, 대대적이고도 항시적으로 한반도 및 중국대륙과의 교섭이 행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B.C. 3∼2세기경 중국 요하(遼河) 동쪽에서 청천강 이북에 걸쳐 분포했던 문화유형으로 요령성 무순(撫順) 연화보 유적과 평북 영변 세죽리 유적을 표지(標識)로 한다.) 연해주의 초기철기시대문화로, 그 연대는 일부 얀꼽스키의 하한연대와 겹치며 대체로 B.C. 5세기-A.D. 2세기 정도에 해당된다. 크로노프카문화는 비록 철제유물의 양은 적으나 제철의 흔적이 확인된 본격적인 철기시대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특히 주조철부는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주조기술이 발달했음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남성리 - 다량의 세형동검시기(細形銅劍時期) 청동기를 부장한 무덤유적으로, 충남 아산시 남성리의 표고 30-40m의 상당히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초포리- 초기철기시대 세형동검(細形銅劍), 세문경(細文鏡), 청동방울(銅鐸) 등이 다량 출토한 무덤유적으로,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에 위치한다. 유적이 위치한 지역 일대는 표고 20~30㎝가량의 평지 성 구릉지대로 이 구릉은 동쪽으로 영산강의 한 지류인 해보천(海保川)과 조사천(早死川)이 합류하 면서 흐르고 있고, 나주평야가 넓게
제 7차 교육과정 『한국 근대사』 6종 비교분석제 7차 교육과정 『한국 근대사』 6종 비교분석-目 次-Ⅰ. 序論Ⅱ. 本論1. 6종 교과별 단원의 구조 및 내용의 구성1) 단원의 구조 및 구성2) 교과서 서술체계 및 내용 분석2. 史觀 : 내재적 접근론에 따른 북한체제 바라보기Ⅲ. 結論Ⅰ. 序論우리는 중 ? 고등학교 동안 국사(한국사)를 과목을 배워왔다. 우리가 한국사를 배우는 것은, 지난날의 영화로운 때를 감상적으로 즐기고자 함이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며 분개하고자 함에 있지 않다. 즉,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현재를 바로 인식하고, 미래를 올바로 설계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바르게 처리할 역사적 능력을 계발, 신장시키고, 민족의 역량을 확산하는 속에서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그러나 교과서가 과연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담아내고 있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더군다나 현행 7차 교육과정은 역사과가 사회과에 통합됨으로써 역사교육의 정체성은 상실되고, 사회과 교육의 부수적인 존재로 전락하였다.)역사교과서는 단순히 사실(史實)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연구 성과를 요약해놓은 것일 수는 없다. 역사교육은 사실의 전달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학습자를 변화시키는 데 목적을 두므로, 교과서는 지식을 학습에 적합하도록 정리하고 안내하는 도서, 서술된 내용을 통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자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제한된 지면에 많은 사실을 담으려고 한 까닭에 전달하려는 내용을 사실 나열적으로 서술하였고, 그 때문에 어렵고 생경한 개념어가 수도 없이 제시되는 무미건조한 교과서가 되었다. 비록 문체가 유려해지고 문장이 세련되었지만, 7차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쉬우면서도 학습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서술양식의 창조는 교과서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남아 있다.이에 본 글은 현’라는 제목부터가 객관적이지 못하다. 북한의 실상에 대한 서술(금성 9쪽, 기타 5종 평균 4.2쪽)보다 통일에 대한 서술(6종 평균 11.2쪽)이 압도적으로 많아 사실에 대한 파악을 기초로 해야 할 역사교육이 가치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질되고 있다. 북한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평화통일이 앞당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혼란을 조성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근현대사 교과서 6종 모두 목차구성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내용의 구성 또한 준거안에 따라 동일한 편제,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금성을 제외한 5종 교과는 제 1항에서 ‘북한체제의 고착화’를 다루고 제 2항에서 ‘통일정책과 7.4남북공동성명’을 다루며 제 3항에서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통일의 과제’를 다루었다. 금성교과서는 타 교과가 3항으로 나누어진 것에 비해 5항으로 나누어 6종의 교과서 가운데 가장 북한체제의 형성 ? 변화과정을 상세히 기술했다. 상대적으로 북한사 서술에 중점을 둔 것이다.특이점은 금성교과의 단원제목표기인데, 금성교과의 다른 단원에서도 제목의 표현이 타 교과와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보았다. 이는 크게 무리는 아니나 제 단원 3장의 경우 ‘통일 정책과 평화 통일의 과제’가 아닌 ‘북한의 변화와 평화 통일의 과제’라고 한 것에는 주목해 봐야한다. 이는 북한 현대사를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로 취급하겠다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가 같은 책에 서로 섞여 있는 것은 일본 역사책에 중국의 역사를 혼합해 쓰는 것 못지않게 어색하다. 차라리 별도의 북한 근?현대사를 저술하고 간행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2) 제 4장 경제발전과 사회 문화의 변화한국현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부분은 어떠한가? 분석대상 6종 교과서의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경제’ 관련 내용을 훑어보면, 우선 ‘경제’ 문제가 가지는 그것의 중요성에 비추어 그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이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출신성분과 충성심을 기준으로 주민들을 3계층 51부류로 나누어 항일혁명의 유가족 및 당, 군 간부의 자녀들은 별도의 교육체계를 갖추고 있는 등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그나마 90년대 중반의 식량난 및 경제파탄으로 평양을 제외한 대다수 지역에서 학교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학교를 포기한 아이들은 꽃제비가 되어 유랑하고 있다.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 이후 북한당국이 학교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 금성교과서는 이러한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허구의 세계를 북한 학생들의 생활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자료3’을 보면 마치 북한 청년들에게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이 또한 완전 허구다. 사회주의 노동법에서는 ‘모든 근로자들의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출신성분과 당성에 따라 강제적으로 배치되고 있다. 즉 개인의 희망과 적성에 따라 직업 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며 직장을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다. 물론 권력자의 자녀들은 예외다.)북한의 교육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금성교과서는 북한당국의 선전 자료를 액면그대로 믿고 마치 북한의 학생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처럼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북한의 현실에 대한 미화는 이것만이 아니다.북한을 ‘인민의 낙원’인 것처럼 묘사했던 루이제 린저의 북한기행문)을 싣고 있는데,“김일성의 교시는 곳곳에서 인용되며 거기에 인민들은 늘 귀를 기울이고 있다”(금성302쪽)며 수령 전체주의 체제를 미화하고 있다.“대내적으로 주체사상에 토대를 둔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조하였다.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본적인 힘으로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고 있다.”(금성306쪽)이라고 설명한 것 역시 노골적인 북한체제 미화다. 우리식 사회주의의 내용만을 생각하면 주체적인 힘을 기르자는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지만 이것이 정치적인 선동 발언임을 유의하여 폭을 그만큼 제한한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대부분의 정치사 기술마저도 권력투쟁이나 독재정권 강조 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의 현대사 흐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되어있다.② 통일정책과 남북대화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통일정책과 남북대화부문에서 6종 교과 모두 1950년대부터 6.15남북공동성명까지 다루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평가하고 있다.1950년대의 통일정책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다루는데, 중앙, 금성의 경우 “휴전이후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대화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은 채 철저한 반공, 반북 정책만 고수하였다.”(금성308쪽)라고 서술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독재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민족을 버린 사람들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왜 이승만 정부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는지에 대한 원인 없이 자극적인 결과만 서술함으로써 反韓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법문사의 경우는 이승만 정권이 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였는지에 대한 원인을 실고 있다. “……이는 당시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국민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법문사285쪽)4.19혁명당시의 통일 움직임에 대한 서술도 법문사, 중앙, 천재에는 진보당사건을 비롯하여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 반면에 금성, 두산, 대한은 이승만 정권에서 박정희 정권의 ‘선건설, 후통일’정책으로 바로 넘어가고 있다.7.4남북공동성명에 대해서 6 종 교과 모두 큰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7.4남북공동성명의 평화통일 3대 원칙이나 공동성명서 전문, 혹은 일부를 발췌하여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6.23선언)의 평가에 대해 두산과 중앙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두산의 경우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에 중앙은 6.23선언 때문에 남북대화가 중단되었다고 부정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건 대한인데, 대한은 자료1 도움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서 박정희의 독재권력 강화만을 서술하였고 7.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원칙만 있을 뿐 그 원인도 결론도 없다. 학생들의 자로 잡고 있다.1980년대 경제개방화 추세와 관련하여, 금성은 1994년의 UR 타결과 95년의 WTO체제 출범은 선진 자본주의국이 인근 지역과는 보호무역을 강화하면서 반대로 후발 개도국에 대해서는 시장개방 압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로 인식하고 있다.이 경우와는 달리, 1980년대 이후 전두환 정권하의 개방화정책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중앙교육(중앙344쪽)의 경우는 1979,80년의 한국경제 위기국면에서 전두환 정권이 강력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추진하여, 중화학공업 구조조정과 과감한 부실기업 정리 등을 단행하고, 나아가 이전의 국가 주도형 성장전략으로부터 시장경제의 자율성 강화와 특히 자본, 금융의 자유화정책의 추진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한국경제의 과제 부분에서는 1997년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 때까지 잘 나가던 한국경제가 무엇 때문에 비참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는가 하는 데 대한 반성과, 또한 한국경제가 개방화라는 새로운 국제환경에 처하여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절실한 문제에 직면하였다고 보고, 이 문제에 대하여 금성은 무엇보다도 도?농간, 농?공간, 그리고 계층 간 등의 각종 불균형과 격차를 해소하는 길을 강조하고 있다. 그밖에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 개혁, 노동자의 권익 옹호와 정경유착의 단절 등을 중요한 해결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두산, 중앙, 법문사 등은 한국경제의 당면 과제로서 각종 첨단기술의 개발, 특히 미래사회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일찍부터 정보통신기술(IT)을 비롯하여, 생명 관련 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 관련 기술(ET), 문화기술(CT)에 이르기까지 기술에 대한 집중적 개발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그밖에 법문사의 경우는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가능성’이란 제하에 박정희 정부 이후의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까지의 각 정부별로 제기된 문제점을 나열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기술자립도를 높이고 첨단기술 개발을 통한이다.)
-目 次-Ⅰ. 머리말Ⅱ. 大韓帝國 宣布(1) 宣布背景1)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2) 조선의 위기와 정부의 대응(2) 大韓帝國 成立1) 高宗의 皇帝 卽位2) 국호 ‘大韓’의 제정과 반포Ⅲ. 大韓帝國의 近代化政策(1) 大韓國 國制와 改革 - 「光武改革」1) 대한국국제의 내용과 근대적 성격(2) 대한제국의 근대화추진1) 대한제국의 군사개편2) 광무양전과 지계사업3) 대한제국기의 자강 ? 구국교육정책4) 재정 ? 산업기구의 정비5) 근대화사업의 성과와 한계Ⅳ. 맺음말참고문헌Ⅰ.머리말우리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흔히 ‘…고려-조선-일제강점기-대한민국’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은 조선에 연장선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대한제국의 국호를 그대로 쓰고 있고, 대한제국이 꿈꿨던 근대화를 이룩하며 세계화시대에 맞추어 나아가고 있다.한국의 근대화는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가에 관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이 성장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대한제국기에 일어났던 개혁적인 움직임들을 부정하는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대한'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근간을 부정하고 일제시대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 철도, 병원, 학교 등 근대적인 인프라가 구축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가지고 일제시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런 인프라는 이미 대한제국이 자율적으로 착수한 일들이었고 일제 지배가 없었더라도 우리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따라서 그런 힘과 자신감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대한제국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상황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다. 수 천 년 동안 일본에게 문화와 문명을 전해주었다. 어쩌면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일본에 대해서 자연스럽고 무의적으로 우월감으로 불러 일으켰으며 일제 식민기를 더욱 아프고 부끄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일간의 역사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식민지근대화론’을국공법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다른 한쪽으로는 전근대적 책봉체제의 굴레에 묶여 있었던 셈이다.그러나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을 구속하던 책봉체제의 굴레는 벗겨졌다. 강화의 결과 체결된 ‘시노모세키조약’(下關條約, 1895. 4. 17)에서 ‘청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하고, 장래 조선의 청국에 대한 貢獻 ? 典禮를 전적으로 폐지한다.’고 하였다. 이후 청국의 조선에 대한 압제도 현실적으로는 사라졌다.)대한제국의 등장은 이처럼 의식상으로는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던 중국 중심의 시계관이 변하고, 현실적으로는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이 청국의 구속을 벗어난 상황에서 가능했다.2) 조선의 위기와 정부의 대응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이 부인된 것 자체는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외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청국의 구속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조선이 명실상부하게 자주독립국이 되었다면 구태여 그 같은 조치를 취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를 추진한 배경에는 별도의 이유가 이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과 러시아의 압제, 그리고 고종의 거듭된 신변위기로 인해 형성된 조야의 국권과 군권의확립에 대한 절실한 열망이었다.청일전재의 결과는 조선이 청국의 간섭을 벗어나게 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을 위기에 빠뜨리는 심각한 문제가 목전에 다가왔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일본의 목표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고종이나 대원군, 대신들 모두는 서울을 장악한 일본군의 인질로 전략하였다. 혹여 조선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집단과 인물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보복이 가해졌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초토화 사건이었고,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 : 1895. 10. 8)의 만행이다.)얼마 후 조선은 고종의 러시아공사관피신에 위기를 피하였지만 이후로도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일간에 세력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조선의 국권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에 의해온 군권의 회복, 비명에 간 와비를 위무하려는 소박한 열망, 나라의 총력을 모아 내외의 위기에 대응하자는 구상 등이 두루 용해된 것이었다.)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8월 연호가 제정되고, 10월초에 정부백관의상소가 이어지면서 마침내고종도 황제즉위건에 대해 재가를 하였다(10. 3). 황제즉위식 거행일도 그 달 12일(을력 9월17일)로 확정되어 이 문제는 최종결말을 보기에 이르렀다.고종황제즉위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연호의 제정과 ?丘壇)의 설치 그리고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 행사 등이다. 조선에 역대왕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중국의 연호를 썼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래 중국은 동양의 중심적 역할을 상실해가지 시작하였고, 청일전쟁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 결과 조선도 1896년에는 建陽이라는 새 연호를 쓰게 되었다. 그 점에서 조선은 청국으로부터 ‘독립했다’고 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 독립이 청국의 간섭은 벗어났더라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유명무실했다. 건양이라는 연호의 채택도 일본의 간섭하에 진행되었고, 主上殿下를 大君主陛下로, 王妃殿下를 王后陛下로, 王世子低下 를 王太子殿下 등으로 변경한 것도 그러하였다.) 결국 아관파천과 환궁들을 거치면서 조선이 일본의 구속을 잠시 벗어난 사이에 문제의 연호와 존호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후 ?舜澤이 議政에 임명되어 황제즉위식에 관한 의례와 그 때까지 장례를 미루어 두었던 왕비의 장례식 준비에 착수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가 光武와 慶德 두 개의 안을 놓고 建元을 상주하자, 광무가 새 연호로 확정 되었다(1897. 8. 16).)광무라는 새 연호에는 모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힘을 기르고 나라를 빛내자는 의미가 있었다. 연호를 제정한 뒤 9월에 들어서면서 정부 관료들이 고종의 황제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관료 ? 유생들의 상소를 바탕으로 심순택과 趙 世 ? 朴定陽 ? 南延哲 등이 고종을 알현하여 거듭 황제로 즉위할 것을 진언하였고, 李秀丙 등 성균니라.제 2조 大韓國의 政治는 甲前則五百年 傳來하시고 甲後則亘萬世不變하오실 專制政治이니라.제 3조 大韓國大皇帝께옵서는 無限하온 君權을 享有하옵시나니 公法에 한 바 自立政體이니라.제 4조 大韓國臣民 이 大皇帝의 享有하옵시는 君權을 侵損하는 행위가 有 하면 其己行未行을 물론 하고 臣民의 도리를 失한 자로 認할지니라.제 5조 大韓國皇帝께옵소서는 國內 陸海軍을 統率하옵서 編制를 정하옵시고 戒嚴解嚴 을 命 하옵시 나니라.제 6조 大韓國皇帝께옵서는 法律을 制定하옵서 其 頒布와 執行을 명하옵시고 萬國의 公共한 法律을 效倣하사 國內法律을 개정하옵시고 大赦, 特赦, 減刑, 復權을 命하옵시나니 公法에 한 바 自定律例이니라.제 7조 大韓國大皇帝께옵서는 行政 各府部의 관제와 文武官의 俸給을 制定 혹 改定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각한 勅令을 發하옵시나니 公法에 한 바 自行治理이니라.제 8조 大韓國皇帝께옵서는 文武官의 黜陟任免을 行하옵시고 爵位 勳章 及 기타 榮典을 授與 혹 遞奪하옵시나니 公法에 한 바 自選臣工 이니라.제 9조 大韓國大皇帝께옵서는 各有約國 에 使臣을 派送駐紮케 하옵시고 宣戰講和 及 諸般約條를 締 하옵시나니 公法에 한 바 自遣使臣이니라.각 조의 의미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제1조는 자주독립의 황제국이라는 정체를 밝힌 것이다.제2조는 대한제국이 조선왕조 개창 이래 근 500년간 지속되어 온 세습군주 통치의 연결선상에 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전제정치’는 군주의 통치권이 제한을 받는 입헌정치가 아니라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인 정치체제를 표방한 것이다.제3조는 황제의 통치권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무한한 것이며, 또한 대한제국이 공법에 기초하여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치체제를 법류로서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천명한 것이다.제4조는 황제의 의지에 따라서 신민에 총제적 제약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다.제5조는 육해군에 대한 통수의 대권을 규정한 것이다. 이는 과거와는 달리 군권령을 황제에 귀속시켜 그의 칙령 따라서 대한제국정부는 외세와 사회변화를 대처할 수 있는 실무관료의 양성을 지향하는 방향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대한제국정부는 이외에 단기 실무관료의 양성교육기관으로 전무학당과 우무학당을 설립하였다. 이는 국제교류와 통상이 확대됨에 따라 시설된 새로운 통신수단인 전보업무와 우체업무를 담당할 기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경본예참 교육정책을 기조로 식산흥업을 위한 실업교육 강화를 도모하였다.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 국가를 지키는 길은 식산흥업을 통한 자강이 최선의 길이었다. 식산흥업을 이루려면 이용후생의 실업교육을 진작시켜야 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정부는 각종 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1899년 4월에 고종이 상공학교의 설립을 촉구하는 조칙을 내렸고, 이에 따라 같은 해 6월 상업과와 공업과의 두 개 학과를 두고 예과 1년 본과 3년 등 모두 4년을 수업 년 한 으로 하는 ‘상공학교관제’가 반포되었다.)그런데 정부가 이와 같이 새로운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재정난은 심각하였다. 따라서 학교예산을 예산편성에서 정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황성신문》은 논설레서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농상공에 과한 교육을 확대해야 하며, 그를 위해 필요한 학교 설립은 대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지지부진했던 상공학교의 설립은 결국 1904년에 가서야 예산이 책정되면서 이루어졌다. )1900년 9월에는 ‘광무학교관제’에 따라 수업 년 한 3년의 광무학교 설립되어 프랑스인 광산기술자 트레믈레와 쿠빌리에 등을 감독과 교관으로 초빙하였지만, 광무학교 역시 정상적인 운영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정부의 교육시책이 이렇듯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장정과 법제 등에 대하여 밝은 지식인의 인재양성은 시대적 대세였다. 양지아문은 1899년 4월에 견습생을 모집하여 6월부터 충청남도 아산에서 시작된 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