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에 관하여- 목차들어가는 말한의학의 개요한의학의 역사한의학의 원리한방의료의 분야치료법서양 의학과의 비교토론 거리마치는 말들어가는 말현대의 사회에서 웰빙과 합께 자신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아 졌다. 이에 따라 어떤 방법의 질병에 대한 예방과 치료가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예전부터 우리 민족이 이용해 왔던 한의학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벼운 한의학의 개요를 적었다. 2. 한의학의 역사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라고 서양 의학과의 기본적으로 틀린 점을 밝혀 놓았다. 세세한 예는 너무나 광범위 해서 일단은 비중을 크게 두질 않았고 기본적인 틀을 바탕으로 조사를 해 보았다. 이 글을 통해 한의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이애하고 나아가 긍정적인 면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자신의 가치관 정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우리 민족의 슬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길 희망하는 바이다.1. 한의학의 개요한국에서 발달한 고대 의학이 중국 의학을 섭취하여 독자적으로 연구·개발된 의학.2. 한의학의 역사기원한국에는 고조선 때부터 독자적인 의약·의술이 발달되어 있었다. 단군신화에는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 등을 맡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병을 다스린다>는 것은 한국 고유의 고대 의학이 있었음을 뜻한다. 한편 고대 중국 의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의 <폄석침술이 동방(東方)에서 전래하다>라는 구절로 미루어 고조선시대부터 돌침술과 뼈침술 등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중국 의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한국에서 나는 약물들의 효능과 그 약물들을 이용한 치료처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방의학의 기초는 고대 중국 의서인 《황제내경》 《신농본초경》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의서들은 고조선 이후 한사군시대에 중국과의 교류가 밀접하였던 낙랑군을 통해 고구려·백제·신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고대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은 한(漢)나라의 통치자로 전해지는 황제가 그의 천사(天師)인 창사태수[長沙太守]였던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하였으며, 뒷날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나뉘어진 약물요법을 위한 실용적 임상치료서이다. 또한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이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을 저술하여 새로이 침구치료법이 개발되었다.삼한시대·고려시대한국 고대의학은 주로 민간 경험을 통한 약방의학이 발달되었고, 여기에 중국 의서들을 받아들여 새롭게 체계화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노사방(高句麗老師方)》 《백제신집방(白濟新集方)》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등의 처방서가 있었다. 이 의약처방들이 일본의 《의심방(醫心方)》이라는 의서에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한국 의약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등의 약방서가 있어, 중국에서 들어온 한의서에 의거하여 한국인에게 알맞은 처방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조선시대종래와는 달리 독자적인 의약학 수립을 위한 노력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 등이 삼국시대·고려시대를 통해 전해오던 모든 의약방서·민간경험방 등을 수집하여 3년에 걸쳐 85권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궁중·민간 등에서 널리 쓰이던 처방 1만 706방과 침·뜸법 1476법이 수록되었으며 현존하는 의서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세종은 《향약집성방》에 이어 당시의 모든 의학지식을 한데 모아 한국 의학 발달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유성원(柳誠源)·전순의(全循義) 등 16명의 학자·의원에게 명하여, 국내 의약서는 물론 중국 의서 153종과 인도 의서까지 섭렵하여 3년에 걸쳐 한국의 독자적인 체계로 엮은 《의방유취(醫方類聚)》 266권을 완성하였다. 이 의서는 분류종목 80부문, 세부종목 총 1만여 항목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 당시 의학술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뒤 한국 의학을 본격적인 민족의학으로 승화시키려는 선조의 명에 의하여 1596년 양예수)은 번침법(燔灸法;불침)을 개발하였다. 또 사암도인(舍巖道人)은 오행침법(五行灸法)이라는 경락(經絡)침술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일본에서 널리 응용되고 있다. 1893년(고종 30)에는 한방의학에서 독자적 이론인 사상체질(四象體質)의학을 발명한 이제마(李濟馬)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3권을 2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 뒤 7년에 걸쳐 이제마는 이 체질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1만여 명을 직접 진단하여 그 실증을 얻었다고 한다. 사상의학은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太陽人)·소양인(小陽人)·태음인(太陰人)·소음인(少陰人)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체질학설이다. 이러한 학설은 서양의학의 혈액형분류법 또는 체형분류법보다 먼저 발견된 것으로 한국 의학의 자랑이다.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일제강점기에는 독일의학을 주체로 하는 서양의학이 도입되어 진료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는 서양의학이 우세해졌고, 또한 일제의 정책적 배제로 한의학은 그 명맥만 유지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소생의 기운을 찾아 52년 한의사제도가 생기고, 한의과대학 설립 등으로 학술 연구가 시작되었다. 60년대에는 한의과대학 교과서 편찬에 착수하여 결실을 보았고, 70년대에는 중국 한의학이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에 소개되어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한의학 세계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앞으로 동·서의학의 비교연구와 자연적인 접합이 이루어질 전망이다.3.한의학의 원리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음양오행론은 고대 동양철학 사상으로서 자연계의 모든 사물을 음류와 양류로 나누고 우주의 모든 사물이 목. 화. 토. 금. 수 다섯가지의 물질운동의 변화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보는 설로써 의학에 응용되어 인체의 생리와 병리뿐만 아니라 외계 환경과의 상호관계 등을 설명하며, 한의학의 진단과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변증론치론(辨證論治論)변증론치는 증(證)을 살펴서 이에따른 치료를 결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증은 질병의 원인, 부위, 성질과 환자의 신체적 여건 등이 상호연계된 특징을 지니면서 관찰하려 하지 않고, 전체와의 연계를 이해함으로서 인체의 생리와 병리를 설명하고 질병을 파악하며 치료원칙을 세우는 사고방식을 말한다.인체의 내부장기와 체표조직 및 기관은 별개가 아니라, 반드시 서로 깊은 연계를 이루고 있다. 침놓는 자리를 경혈이라 하는데, 경혈과 내부장기는 현저히 떨어져 있지만 그 경혈에 내부장기의 반응이 나타나고, 그 경혈에 침을 놓아서 해당 장기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한의학의 특징이다.체질의학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같은 오장육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기능의 허하고 실한 상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독특한 생리기능을 발휘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체질이라 하며, 이러한 체질의 특이성에 의해 사람들은 성격이나 음식의 기호, 체격, 자주 걸리는 질환까지도 차이가 나게 된다.이처럼 개개인의 체질적 특성을 고려하여 예장의학적 측면의 섭생법과 치료방법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체질의학 또는 사상의학이라 하며, 이는 이제마선생에 의해여 정립되었다. 사상의학에서는 인간의 성정(性情) 즉, 타고난 바에 의해 각각 오장육부에 허실이 생김으로써 체질병로 독특한 질환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실제치료에 있어서는 호흡기, 간장, 신장 및 소화기 등을 참고하여 태음인, 소음인, 태양인, 소양인의 4개 유형으로 대별하여 치료한다.4. 한방의료의 분야치료수단-한약, 침, 뜸, 부항한약이란-자연에서 얻어지는 천연산물인 식물, 동물성 및 광물성 중에서 원형대로 간단히 가공하여 질병치료에 사용하는 모든 약재를 한약재라 하는데- 한의사의 처방에 따라 한약재를 방제하여 투약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도록 한 것을 한약이라 한다.침이란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쓰이는 바늘처럼 생긴 가늘고 긴 기구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침은 그 크기와 모양, 용도에 따라 9가지로 대별되어 9침이라고 부른다. 대개는 인체내 기혈의 통로인 경락에 자극을 주기 위하여 피부, 근육 등을 깊게 혹은 얕게 찌르기 위한 것이다.뜸은 약물을 체표위의 특정부위에서 정하기 위한 진찰은 망진(望診)·문진(問診)·문진(聞診)·절진(切診)의 4가지로 나뉜다. 그 중 절진은 맥을 손가락으로 짚어보고 판단하는 맥진(脈診), 복부를 촉진(觸診)해 증상을 파악하는 복진(腹診)으로 나뉜다. 한의학의 원리를 체계화한 것이 음양오행설로 인간의 질병이란 체내 음과 양의 부조화와 오행의 괴리상태를 뜻하는 것이고, 또 진찰이란 바로 질병의 증후들을 관찰하여 음양 또는 오행의 부조화상태 정도를 파악해 신체의 조화와 정상을 찾도록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방약은 현대의료 중에서 특히 고치기 어려운 심신증(心身症)·간염·네프로제증후군·만성위장염·수술후유증 예방 등에서 그 특효가 입증되었고, 류머티즘·기관지천식·신염·고혈압 등에도 상대적 적응증으로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 침구술의 뚜렷한 효과는 세계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다. 앞으로 한의학은 현대의학과의 절충을 통하여 더욱 발전될 것으로 전망된다.6. 서양의학과의 비교서양의학에는 ‘표준화’라는 개념이 있다. 즉, 육체적인 기능으로서 표준적인 인간을 정해 놓고 있다. 주어진 틀 안에서 미리 정해진 표준이란 것을 설정해 놓고, 환자를 표준적인 기준으로 다루는 것이다. 만약 그 환자가 표준에 맞는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치료를 받게 되는 셈이다.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신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중시하여 각각의 신체적인 개성에 알맞은 치료와 처방을 선택하도록 되어있다.7. 토론거리장점이 이렇게 많은 한의학 과연 단점은 없을까?현대 사회에서 단순히 한의학만을 믿는다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앟는다. 어떻한 자세로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바라볼 것인가?등등마치는 말한의학은 민족의 태동과 함께 숨결을 같이하면서 겨레의 슬기로 가꾸어온 한민족의 생활 과학이다. 일찍이 대륙의학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독창적으로 발전시켜온 한의학을 생활풍습과 체질에 맞게 민족의학으로 승화시켜 전통의학 체계를 확립했다.오늘날 서양의학이 고도로 발달했음에등
조선의 무기체계1.들어가는말2.냉병기3.화약병기4.마치면서1. 들어가는 말무기는 처음 생활도구로 출발하여 전쟁도구로 발전하여 왔다. 무기의 소제도 석제에서 청동, 철기로 변화하였고 기능에 따라 공격용 무기, 방어용 무기가 개발되었으며 전쟁기술도 점차 고도로 발전하였다. 그밖에도 전투를 돕는데 쓰이는 여러 가지 기재들로써 통신 수송 군기 군악기 등의 장비와 군복이 있다.순수무기라면 공격용 무기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무기로 전투방법과 군대조직 편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대비하여 방어용 무기는 공격용무기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무기로서 적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살아 남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중요도가 높다하겠다.공격용 무기에는 근거리무기와 원거리무기로 나눌 수 있고 냉병기와 화약무기로 나눌 수 있다. 냉병기는 근력무기이기도하다우리는 특히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조선군의 무기체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게 될 것이다.2. 냉병기1) 근거리무기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무기 중에 창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막연하게나마 창이 일반 병사들의 주력 무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세종실록 오례서례와 국조오례서례의 군례(軍禮)에는 모, 극, 창(矛, 戟, 槍) 등 3가지 창이 등장한다. 그러나, 막상 그림을 보면모(矛)는 구겸(낫 모양의 창)에 가깝고, 극(戟)은 삼지창 혹은 당파에 가깝다. 허술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유일한조선시대 창 그림이다. 국조오례서례에서는 아래 창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이 곧 자루길이 10자(약 3m)의 '삭'이라고 설명해 놓았는데, '삭'은 기병용 장창을 의미한다. 경국대전을 보면 말 위에서 사용하는 기창(騎槍)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길이는 15자(약 4.5m)였다고 한다.이 그림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창을 추정하는 것은 역부족이고, 어쩔 수 없이 조선 후기의 창 실물 유물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수군들은 거대한 낫처럼 생긴 특수한 창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장병겸(長柄鎌무기이다.우리나라에서 칼은 주력무기로써의 역할을 한적이 없다. 조선 전기의 칼에는 환도, 별운검, 운검, 인검, 보검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실전용 칼은 오로지 환도(環刀) 뿐이다. 조선 전기의 환도는 후기의 환도에 비해서 비교적 짧았던 것 같다. 아래의 칼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이다.2) 원거리무기(1) 궁시원거리무기의 근력무기는 활과 화살로써 활은 세계사적으로 구석기 말기에 출현하여 중석기에는 세석기(細石器)라는 화살촉용도의 석기가 활의 사용을 시사한다 우리민족의 대표적 무기라면 당연히 활로 꼽을 수 있겠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과 만궁으로 나눌 수 있고 크기에 따라 단궁과 장궁으로, 재료가지에 따라 단일궁과 복합궁으로, 재료에 따라 목궁 각궁 철궁 철태궁으로 나눌 수 있다우리민족의 대표적 활은 각궁이다. 각궁은 만궁이면서 복합궁이요 단궁이다. 7가지 재료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활로서 그 보관과 제작이 어려운 반면 성능이 휼륭한 활이다. 작으면서 탄력이 세어 화살을 멀리까지 보낼 수 있는 활이다. 중국에서 우리민족을 동이족(東夷族)으로 불렀고 고구려의 고주몽은 활을 잘 만들고 다룰 줄 아는 무사의 이름이며 고구려의 맥궁은 중국에서도 소문난 특산품으로 알려졌고 출토품에는 소의 갈비뼈로 된 활채가 나왔으며 무용총의 수렵도에서는 기사에서 작은 활을 가지고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쏘고있는 모습이 단궁이면서 만궁의 사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현재도 사용되어지는 각궁은 7가지이상의 재료로 만들어지는데 뽕나무 대나무 물소뿔 어교 쇠심줄 화피 실로 이루어지는데 물소뿔은 수입품이고 어교는 바다생선인 민어의 부레로 끓여만든 접착제이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다. 황소의 등심에서 나는 심줄은 어교를 뭍혀서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빗질하고 원형의 뽕나무 대나무 줄기에 바같쪽에는 가공한 물소뿔을 안쪽에는 소심줄을 어교로 바르고 화피로 단장한다. 이런 활을 360도 돌려서 시윗줄로 장궁하면 3자형의 만궁이 되고 이런 각궁은 크기에 그 세기를 비례하는 직궁보다 크기가 작아도 원래의살을 멀리 날릴 수 있는 활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마전인 경우 거추장스러운 장궁 보다는 단궁이 유용하였다. 그러나 각궁은 재료가 수입에 의존하여야 했고 그 보관상의 문제도 까다로와 30도 정도 되는 방에 이궁(弛弓)으로 보관을 해야하고 너무 오랫동안 장궁(張弓)으로 두면 탄력성이 떨어진다.고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화살은 더욱 다양해지는데 전투용으로는 통아와 편전의 사용은 우리군의 비밀스러운 무기였다. 작은 편전이 긴 장전보다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 편전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통아라는 대롱의 발사대가 있어야하는데 적의 화살을 주워서 재 사용할 수 없어 아군에게 유리한 무기로 특히 북방야인들에게는 금비책이었다.그 외에도 무과시와 습사, 놀이에 사용한 육량전 유엽전 박두 무촉전 세전 주살과 의식용 화살인 신전 영전 기패가 있어 명령 하달 시 행사의 의식시에 사용하였다. 왕이 사용하는 어장전, 붉은 칠을 한 동시와 검은 칠을 한 노시도 날카로운 촉을 가졌지만 의시(儀矢) 일종이었다.3. 화약무기1) 화약화약은 10세기경 중국에서 제조되었는데 신선술의 불사약의 실험에서 발명되었다송대 원대에 화약을 이미 사용하고있었으나 그 제조법은 금비책을 쓰고있었다. 14세기말 고려 우왕때 최무선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하여는 화포의 위력이 절대적임을 믿고 화약 제조법을 알아내려고 힘쓰던 중 원나라 상인 이원으로부터 화약의 3대 요소인 염초 유황 목탄 중 관건인 염초의 자취술(焰硝煮取術)을 습득하게되었다.그 비율은 대충 염초70 : 유황10 : 목탄20 으로써, 유황은 광물질로서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많이 나고 목탄은 연소제로서 버드나무를 태워서 만들고 염초는 흙에서 얻는데 길위나 담밑에 있는 빛이 검고 맛이 매운 흙에 쑥재와 곡식대재를 섞어 물을 넣고 끓여 결정체를 추출하였다.2) 화약무기의 종류와 특징(1) 연소성의 화전냉병기에서 화약무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생겨난 무기가 화전과 신기전이다. 화살에 화약을 장착하고 활로서 발사하는 것은 화전으로 깃간 뒤에 마포로 감싸고 황밀과 송진을 녹여서 입히는데 그것은 우기에도 화약에 습기 차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도화선을 빼서 불을 붙인 뒤 곧 발사하면 목표물에 적중할 즈음 화약이 폭파하여 불을 붙여주는 방화를 목적으로 사용한다.(2) 신기전과 화차화전에 비해 신기전은 오늬가 없고 화차에 장착하여 화약의 폭파가 방화의 목적이 아니라 로켓의 추진력으로 더 멀리 날려보내는 투사성의 화기이다. 대신기전과 중신기전 소신기전 세 종류가 있고 화살에 달려있는 지화통의 화약이 분사되어 추진제의 역할을 하므로 순차대로, 또는 동시에 발사하는 무기로 진법에 의한 지엽적 대형에 화차의 위력은 컸다. 화차는 길이 230센치 폭 74센치 정도의 수레로서 차체 앞부분에 직경 82센치의 바퀴 2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보통 수레와는 달리 바퀴축이 차체보다 밑에 설치하므로 차체 앞 부분을 땅에 놓았을 때 차체 상면의 경사각이 보다 크지게 하여 사거리를 증가시킬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화차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기전기 총통기 조총기 화차로 발전하였다.(3) 소형총통총통은 유통식 화약병기를 지침하는 가장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명칭이다. 총통 외에도 화통, 화포라는 말로 혼용되고 있으나 대개는 소화기를 총통으로 공용 화포를 화포로 사용하였으므로 편의상 나누었다소화기에는 이총통 삼총통 세총통 사전총통 팔전총통 신제총통 등이 있는데 처음에는 모두 시전을 발사하였다. 그러다 소화기 중 가장 크기가 큰 승자총통에 와서는 탄환을 사용하게되었다.세종대 이후에는 각종 다양한 총통의 정리를 위해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는데 천자문의 천지현황 다음 인 우자총통 주자총통 홍자총통 황자(荒字)총통, 그 뒤 일 월 영 측자총통까지 개발되었다.승자총통은 그 자호가 천자문에 없는 글자인데 중국에도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화기 중 가장 큰 화기로 선조때 김지장군이 니탕게의 난을 진압할 때 고안 사용하여 크게 전과를 올리고 병조판서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승자계열의 발전된 총으로는 애를 썻던 것을 알 수 있다. 승자계 총통은 관에서 만든 소화기중 손으로 불씨를 당겨서 불을 붙이는 지화식(指火式)총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여진다.임진왜란때 일본은 포르투갈 난파인으로부터 새를 잡는 조총 즉 화승식총을 가져와 개인용 화기로 사용하면서부터 육지에서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고 이에 조선은 서둘러 외국귀화인들로부터 화기에 대한 외국의 기술을 비로소 본뜨게 되었다.(4) 대형화포일찍이 최무선 시대에 발명한 포는 민간인이나 특히 왜구에게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궁중에서 대개 만들고 그 책임자를 왕자에게 맡겼다. 조선시대 가장 무기를 잘 만든 왕자는 세종의 세자, 후일 문종이었다.주조와 운용이 어려웠던 대형화포는 북쪽야인의 기마전에는 도리어 거추장스러운 무기였다. 그리하여 성벽 위 고정배치용으로 사용하거나 함재포로서 운용을 하였는데 대개 궁중에서 주조하고 약실 후미에는 화포의 이름. 주조 연월일. 무게나 화약용량. 장인의 이름 등이 명문화되어있다. 처음에는 일총통 이총통 등의 이름이 명명되었으나 세종대에 와서는 천자문의 자호를 따서 가장 큰 화기로부터 가장 작은 세총통까지 월자총통으로 명명되어지고 그후에 만들어지는 영자총통부터 측자총통까지 기록에 보인다피사체로는 장군전 대장군전.피령전이 대형화포에 사용되었다가 탄환으로 바뀌어갔다 완구에는 화강암 제질의 석환을 사용하여 공성무기로 사용하였고 임진왜란때 화포장 이장손에 의해 발명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완구에 발사될 때 포탄속의 화선에 불을 붙여 날아가 치고 또 한번의 화약분출물을 쏟는 포의 역할을 하였다이것은 전혀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발화장치에 목곡이라는 나선형장치가 있어 빨리 폭파시키려면 10곡을 감고 늦게 폭파시키려면 15곡의 도화선을 감아 죽통에 넣어 발사하여 시간차를 둘 수 있었던 점이 당시로서는 독창적이었다.대형화기를 발사 이동하는데는 동차(童車)라는 나무수레에 장착하였다.4) 총통.화포 성능의 개발세종27년 3월 화포의 개량이 단행되었는데 목적은 화포에 쓰이는 화약은 감소하고 한번에 여러 다있었다.
한국의 도자기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도자기를 사용한다.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가벼운 휴식을 위한 차를 담는 용기로도 사용한다.이렇게 평소에 사용되는 도자기는 사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인류가 화식을 하면서 도자기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이런 도자기 기술에 있어서 자부할 만한 기술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이번 조사에서 도자기의 역사와 그에 대한 한국 도자기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도자기 역사의 개요인류가 처음 토기(土器)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좀더 견고하고 편리하며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려는 의지는 끊임없이 도자기의 발달을 이끌어왔다. 처음 만들었던 토기는 물이 새어 나오고 쉽게 깨어지는 것이었지만 점차 개선된 원료와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기술로 발전하여 토기보다 견고하고 쓰기 편리한 도기(陶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기도 약간의 물이 스며들고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약(釉藥)의 개발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유약의 사용으로 도기의 표면에 얇은 유리질 막을 씌움으로써 물이 스며들지 않는, 표면이 매끄러운 그릇의 제작이 가능해졌다.그런데 유약의 발명에서부터 세계의 도자기문화는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즉 저화도 유약을 채택한 서아시아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저화도 도자기 제작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 반면 처음부터 고화도 유약을 채택했던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찍이 고화도자기인 청자와 백자를 제작하여 유리나 금속보다 도자 문화가 크게 성행할 수 있었다.저화도 유약을 채택한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사람이 직접 사용하지 않는 관상용의 장식품이나 건축 자재들을 주로 만들었지만, 고화도 유약을 쓰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음식용 그릇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도자기가 생활문화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따라서 오리엔트 지역의 저화도 도기가 장식적이며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는 감아 지역의 고화도 자기는 그의 실용적 특성에 의해 인간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고 삶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삶을 구현해 주는 실용적인 미술로 등장하게 되었다.동아시아지역에 위치한 우리 나라도 일찍부터 세계 도자에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토기가 발생한 때는 이집트, 서아시아, 인도, 중국과 비슷한 기원전 6000-5000년경 당시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토기는 서아시아와 중국의 채문토기(여러 장식에 색을 입힌 토기) 문화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빗살문토기문화로 한반도 전역에 넓게 분포하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한반도에 중국 도자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그 이후부터 우리 나라의 도자는 중국의 도자와 함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계 도자 문화에 선구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기원전 300년경부터 고화도 경질도기의 제작법이 습득되고 도기의 질도 다양화되고 용도도 다양화되어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원료의 것보다 높아졌다. 기원 후부터 6세기 후반에 이르는 동안 경질도기의 제작법이 일반화되고 나무의 재를 원료로 하는 고화도회유가 제작되기 시작하며 중국에서 전해진 저화도 연유의 기술도 받아 들여 한층 질적 향상을 이룩하였다.고려시기에 생산하게 된 청자를 출발점으로 우리나라의 자기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조선시대의 백자와 분청사기, 민간에서 제작되어 생활 속에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옹기 등을 통해 우리나라 도자는 예술미와 실용미를 이어오고 있다.☒도자기를 만드는 과정도자기 제작과정은 도토수비(陶土水飛)-성형(成形)-잿물(釉藥)-소성(燒成)의 네가지 과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1. 도토수비채취해온 사토를 먼저 잘게 빻아 물에 넣고 잘 저어서 그 윗물을 받아 침전된 아주 섬세한 흙을 받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그 윗물을 '톳물', 침전된 흙을 '질흙'이라고 하여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톳물받기'라 하는데 도자용어로는 '수비(水飛)'라고 한다.이때 사토를 물에 넣어 나무 가래로 저으면서 톳물을 일으키는 장치를 체로받쳐서 침전시키는 장치를 '땅구멍'이라 한다.2. 성형질흙이 준비되면 그릇을 만든다. 빚기 하루 전에 수비 작업을 통하여 마련되어 있는 질흙을 이긴다. 질흙을 이기는 장소를 '질귀'라고 한다. 곱게 만든 질흙 덩어리를 곰베로 빻아서 맑은물(석간수)을 부어 질귀에서 이긴다. 흙을 이기는 작업은 자기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질흙을 질귀의 중심에 놓고 맨발로 밟아서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반복해서 밟는다. 이기는 작업이 끝나면 하룻밤을 지난 뒤에 알맞도록 질흙을 떼어 뭉쳐 널빤지 위에 놓고 두 손으로 돌리면서 반죽한다. 이 질흙뭉치를 '꼬박'이라고 한다. 나무물레 위에 잘 손질된 꼬박을 중앙에 맞추어 놓는다. 물레 밑바탕을 밖으로 차면서 돌리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물 묻힌 양손엄지로 꼬박의 중앙부를 누르고 나머지 여덟 손가락으로 외부를 쓰다듬으면서 그릇의 형을 만들어간다. 다 만들어진 그릇을 그늘에서 일주일쯤 말린 다음 그릇의 굽 언저리를 깎아내어 다듬는다.물레 성형을 비롯한 몇 가지 성형방법은 다음과 같다.* 물레성형 : 흙을 회전시키며 성형하는 것으로 손 물레, 발 물레, 전기물레 등이 있다.* 주입성형 : 점토나 소지 원료에 물을 부어 손으로 이겨서 반죽을 하면 '연토' 가 되고, 다시 물을 가하여 물 속에 현탁되어 있는 상태가 되면 이것을 이장(泥漿)이라 한다. 이 이장을 석고 틀에 부어 성형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다른 방법으로 성형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정밀한 물체를 성형하는데 쓰이며 똑같은 모양을 여러 개 계속해서 만들 수 있다.* 압출성형 : 압출장치를 이용하여 연속적으로 석고 틀에 주입하여 성형하는 방법으로 대량생산에 적합하다.* 압착성형(프레스성형) : 배토를 압착기와 틀을 써서 가압하여 성형하는 방법으로 가소성이 적은 배토를 이용하여 성형할 때 쓰며, 마찰프레스나 유압프레스를 많이 사용하며 벽돌타일, 전기재료 등의 제조에 많이 이용된다.3. 잿물지은 그릇을 초벌구이 하여 유약을 칠한 다음 다시 재벌구이를 하는 것이 전통 도자기의 초벌구이는 재벌구이를 할 때 가마의 뒷칸에서 유실되는 열을 이용하여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유약의 제조 및 처리방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유약을 '잿물', '묵모레' 또는 '미음물' 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옛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그것은 종래 천민 신분이었던 사기장들 사이에서만 쓰여온 말이기 때문이다. 초목을 태운 잿물을 사토 미음물과 혼합하여 유약을 만든다. 초벌구이한 것에 유약처리 하는 방법은 다음 세가지로 나눈다.* 당금법 : 그릇을 젖은 스폰지 같은 것으로 닦아 습기를 유지한 후 유약이 담긴 통에 완전히 덤벙 담그었다가 즉시 꺼내어 내부에 담긴 유약을 쏟아내고 굽 밑은 물기있는 스폰지로 닦아내어 소성할 때 판에 붙지 않도록 한다.* 살포법 : 그릇을 회전대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돌리면서 분무 살포하는 방법으로 유약을 조금 묽게 하여야 하고 분무기가 있어야 한다.* 도포법 : 그릇위에 유약을 붓거나 붓으로 바르는 방법으로 초보자가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다.4. 굽기그릇을 구워내는 가마를 이곳에서는 '사깃굴' 또는 '사깃가마'라고 한다. 이 지역의 사깃굴은 오늘날 경기도 광주요, 이천요, 경남 합천요, 경북 경산의 청백요와 비슷하게 비탈진 산기슭에 쌓아올린 '등요(登窯)'란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재료는 판이하다. 순전히 내화토(耐火土)로 만들었으며 그 배면이 낙타 등처럼 구불구불하여 옛날의 운치를 그대로 보여준 형태이다. 그릇을 사깃굴 안에 쌓아 놓고 서서히 가열하여 700~800도 까지 굽는 것을 '초벌구이'(이 지방에서는 '끌목'이라 함)라 하고, 이에 유약처리한 다음 1300도 내외로 가열하여 구어내는 일을 '재벌구이'라 한다. 가마 소성에는 '산화염', '환원염', '중성염'이 있으며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산화염 : 소성시 가마 내부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면서 소성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은 주로 현대자기(반자기), 예술자기, 분청 등의 소성시 이용된다. 특히, 산화염 소성시에는 안료의 색상이 월등히 뛰어나므로 색채용한다.* 환원염 : 가마 내부에 산소의 공급을 차단하는 소성방법으로서 청자나 백자와 같은 전통자기 제작에 사용한다. 특히 환원염 소성시에는 소지와 유약의 용해작용으로 인하여 발색이 투명하며 색상이 미려하고 강도가 뛰어나다.* 중성염 : 가마 내부에 약간의 산소만 공급하여 내부의 불의 흐름이 고정된 상태로 소성하는 방법을 말한다.가마소성은 오랜 경험에 의해서만 축적되는 일종의 고난이도 기술이다. 무엇보다도 도자기는 데이타에 의존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마 속의 불이 어떤 수식에 의해 움직이기에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래서 어떤 인위적인 데이타를 구축할 수가 없다. 때문에 작가는 불가해한 도자기의 요변(窯變)을 감수하면서 독자적인 기법을 성립시켜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한국의 도자기 흐름한국 토기 문화의 기원은 BC6000년경부터 시작된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는 부산직할시 동삼동 패총(東三洞貝塚)에서 출토된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紋土器〕와 둥근덧띠무늬토기〔圓底隆起紋土器〕가 있으며, 뒤이어 패각(貝殼)으로 무늬를 그린 빗살무늬토기 〔櫛紋土器〕가 나타났다.이어 청동기 시대에는 무늬 없는 토기가 발달하였으며 철기 시대에 들어와 평양 부근에 한(漢)나라의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어, 한대의 도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회도·회유도·녹유 등이 제조되었다. 한편 경주시 조양동고분(朝洋洞古墳)에서는 연질토기(軟質土器)가 출토되었고, 김해시 회현동(會賢洞)에 위치한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김해토기는 기면(器面)에 승석문(繩蓆紋)을 그려 넣어 고온에서 구워 만든 경질토기(硬質土器)이며, 그 중에는 자연유가 입혀진 것도 있다. 이 김해 토기는 삼국 시대 신라토기의 모체가 되었으며,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이키섬〔壹岐島〕·기타큐슈〔北九州〕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유적에서도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일본의 경질도기인 수에기〔須惠器〕의 번조(燔造)에도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선사시대에 토기를 빚는 3가지 방법)소형 토기는 손빚음법으로 제작했고 대부분의 선사시대 작했다.
들어가는 말해인사는 무형의 정신과 유형의 사물이 신령스럽게 교감하는 우리 민족의 성역이라 감히 말한다. 그것은 바로 팔만대장경판이 해인사 장경각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문화유산 또는 문화재라고만 이름할 수 없는 생명력이 늘 숨쉬고 있는 것이다.팔만대장경은 한 민족의 문화적 역량과 의지가 다양하게 결합하고 숭고하게 숭화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유산이나 문화재가 영원함과 숭고함 등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반드시 그 유산 혹은 문화재에 동참한 인간의 정신사에 비례하기 때문일 것이다.본론팔만대장경에 대하여대장경이란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것을 일컫는 말이다.대장경이 우리나라 역사상 고려시대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고 조성된 경판수가 팔만장 이상 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하며 또 모아서 “고려팔만대장경”이라 하며 그리고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기에 “해인사 팔만대장경” 혹은 “해인사 고려대장경”이라하기도 한다.해인사 고려대장경은 고려 고종23년(1236년)에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년) 16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그 규모를 보면 평균적으로 각 장의 길이가 24Cm, 너비 70Cm에, 두께 2.8Cm, 무게가 3250g이다. 판면은 길이 22Cm, 너비 54Cm에, 상하의 계선을 그리고 한 면에 23행, 한 행에 14자, 전후 양면에 644자 등을 새겼다. 판의 후면 끝에는 경의 이름과 장 수, 천자문 차례의 함호를 새기고 좌우끝의 각목에도 동일한 표시를 남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인사판은 8만 1258판 1511부 6802권으로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서 숨쉬고 있다.경판의 목재는 자작나무다.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자작나무를 벌채해서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낸다. 그 조각을 다시 소금물에 삶은 뒤, 그늘에서 말려 대패질을 하고 나서 경문을 한 자 한 자 새겨 판각을 마친 뒤에는 경판 양쪽 끝에 경판보다는 약간 높고 약간 두꺼운 각목으로 마구리를 만들어 그 네 귀퉁이에 구리판의 장식을3년(1022)에는 한조(韓祚)가 역시 송나라에서 칙판대장경을 보완한 500여권의 불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현종이 즉위한 후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 북방오랑캐들의 거듭된 침략에 의하여 고려는 수 없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음은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기록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에 현종은 북방오랑캐의 침략을 퇴치하기 위하여 군비를 확충함과 아울러 우선 현화사(玄化寺)라는 절을 창건하여 부처님의 은덕을 얻고 이어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장경판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려고 한 것 같다. 현종은 수입한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일종의 대장경을 간행하는 관서라고 할 수 있는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하고 대반야경, 화엄경을 비롯한 불경을 새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 시작한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종대(1010~1031)에 시작하여 꾸준히 계속되었고 현종20년(1029)까지 거의 완성을 보았고 그 후에도 보완작업은 선종4년(1087)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경판을 우리는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이라 부른다.3) 거란대장경거란은 송나라의 북송칙판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거란의 흥종(1031~1054)때에 대장경의 조판을 시작하여 도종(1055~1100)때에 완성하였다. 479함으로 구성된 거란대장경은 개원석교목록과는 함호(函號)배열이 다르고 일부 없어져 버린 불경이 수록되어 있는 등 북송칙판대장경이나 우리의 초조고려대장경 및 의천의 속대장경과는 또 다른 문화사적인 의미가 있는 귀중한 대장경이다.거란대장경이 언제 시작되어 완성되었는 지는 확실하기 않으나 거란의 도종이 고려 문종 17년(1063)에 거란대장경 전질을 고려에 보내온 것으로 보아 이 보다 앞서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4) 의천의 고려속장경초조대장경을 현종.선종대에 걸쳐 완성한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고려조정에서는 문종때 대각국사인 의천(義天, 1055-1101)에 명하여 새로운 형식의 대장경 간행을 시도하였다.초조대장경이 북송칙판대장경을 모태로 경?율?론 삼장에 만족하지 않고 이의 주석서나 연이야기에 의하면 경판을 만들 나무를 베어 바닷물에 3년을 담궈 두었다가 소금물로 삶아서 건조한 후 경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번거롭고 귀찮은 이런 과정을 왜 밟았으며 소금물에 삶을 필요까지 있었는가? 사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옛 문헌에서 찾아보자. 서유거(1764~1845)의『임원경제지』이운지(怡雲志)에 경판을 만드는 방법과 인쇄후의 보관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즉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든 다음 소금물에 삶아내어 말리면 판이 뒤틀리지 않고 또 조각하기도 쉽다}라고 하여 경판재를 제작하는 과정에 먼저 소금물에 삶은 후 자연 건조하면 건조 중에 생기는 여러 가지 결함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였다.나무의 건조는 속에 있는 수분이 표면으로 이동하여 수증기가 되어 대기 중으로 날아가면서 차츰 수분이 줄어드는 것인데 나무의 세포 구조가 복잡하므로 중요한 것은 판자가 휘거나 갈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장경판 목재처럼 두껍고 넓은 판재는 아무 처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건조하면 속의 수분이 표면으로 제대로 이동하기도 전에 표면이 너무 빨리 건조되어 버림으로써 갈라지고 비틀어지기 쉽다. 이럴 경우에 소금물에 판자를 담궈 두었다가 건조하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소금기가 표면에 발라진 상태가 되어 약간씩 흡습하면서 건조되므로 비록 건조는 천천히 되나 결함이 없는 경판재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소금물이 쇠를 녹슬게 하는 철부식성(鐵腐蝕性)을 가지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으나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바둑판이나 다듬이판 등 두꺼운 나무를 오줌통이나 시궁창에 몇 년씩 담궈 두었다가 음지에서 건조하는 것도 모두 소금물처리의 한 방법이다.따라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 통나무를 바닷물에 3년을 담구어 두었다는 것은 과학적인 아무런 근거도 없고 또 그렇게 반드시 해야할 필요도 없다. 다만 판자를 경판을 건조하기 전에 소금물에 삶았다는 이운지의 기록은 타당성이 있고 또 이 과정을 밟아야만 건조가 잘 되므로 필수과정이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위지 동이전이나 삼국사기에만나는 것은 오직 믿는 마음으로 뭉쳐있는 고려인의 인간적인 면을 엿보는 것 같아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였다.잘못 판각한 글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수리하였다. 첫째는 틀린 글자를 口자로 오려내고 다른 나무에 바른 글자를 새겨서 맞추어 넣은 방식이다. 오려낸 깊이가 깊지 않으면 뒷면에 아교를 발라 붙였는데 부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다른 방법은 틀린 글자의 행이 있는 나머지 부분을 U자형으로 길게 모두 오려내고 새로 새긴 행을 너비방향에서 밀어 넣은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경판을 왠만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아서는 찾아 낼 수 없을 정도로 짜맞춤이 너무나 치밀하다.⑨ 옻칠옻은 옻나무, 개옻나무, 검양옻나무 등 옻나무과 옻나무속이라는 무리에 들어가는 나무에서 채취하는 우루시올(Urushiol)이라는 페놀성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도료(塗料)인데 질 좋은 많은 양의 옻을 채취하는데는 역시 옻나무라야 한다. 옻은 역사 이전부터 사용되었다 하며 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낙랑고분의 관재(棺材), 공주의 무령왕릉 관재 및 우리 나라 여기저기서 출토되는 칠기 등 광범위하게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옻칠은 여러 가지 안료(顔料)를 섞어 표면을 아름답게 함은 물론 방습성(防濕性)과 아울러 썩지 않고 벌레가 침입하지 못하는 우수한 도장(塗裝)재료이다.팔만대장경판에는 일부 경판이 옻칠이 되어 있다. 일부라고 한 것은 경판의 글자를 새기지 않은 외곽부에 육안으로 명확하게 옻칠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경판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판은 인쇄할 때 사용한 먹이 두꺼운 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옻칠의 유무를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옻칠은 주로 글자새김이 있는 바깥 외곽부에 되어 있다. 마구리는 옻칠을 하지 않았으며 할 필요도 없다. 글자가 새겨진 부분은 확인에 어려움이 있으나 대부분 옻칠이 안된 것으로 보인다. 경판 중에는 글자의 표면이 유난히 매끄러운 경판이 있어서 어떤 분들은 글자 부분에도 옻칠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글자 부분에 옻칠을 하면 나무세포의 미세한 틈새기까지도 막 분포지역은 추운 지방에 분포중심이 있으나 거의 전국에 걸쳐 자란다.3) 자작나무류 - Betula sp.이 나무는 식물학적으로는 자작나무과라는 적지 않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데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가 아주 판박이처럼 찍어 놓은 것 같이 닮은 친형제나무이며 박달나무나 물박달나무는 모양이나 성질이 아주 딴판이라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으나 틀림없는 형제나무이다.지금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재는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으므로 필자의 상상에는 고려인들은 참 멋쟁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몽고의 말발꿉에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처절함 속에서도 비록 다음에 먹물을 발라 인쇄하느라 시커먼 먹물을 뒤집어쓰겠지만 부처님 말씀을 한 자한 새겨 넣을 때는 깨끗하고 고상한 나무만을 베어다 쓴 마음의 여유를 갖다니!물관이 나이테안에 고루 흩어져 있는 산공재이며 관공은 고립관공과 2~6개의 방사복합관공으로 구성된다. 고립관공의 접선방향직경은 80~100㎛ 정도이고 그 바같모양은 약간 각이 져있다. 물관상호간벽공은 크기가 매우 작은 유연벽공이 서로 합쳐져서 비스듬하게 골이 쳐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 독특하므로 비슷한 다른 나무와는 구별된다. 물관방사조직간벽공 역시 물관상호간벽공과 유사한 형태의 유연벽공이 방사조직 전체에 걸쳐 관찰된다. 계단상천공을 가지며 bar의 수는 10~15개이고 방사조직은 주로 동성형이고 1~3세포나비 정도이다.4) 층층나무류 - Cornus sp.대장경판에 쓰인 것은 층층나무로 생각되며 거의 다른 재료로는 잘 쓰이지 않은 층층나무가 대장경판에 쓰인 것은 우량경판재가 부족할 때 일시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공재이며 물관은 한 개씩 분포하거나 2~3개씩 방사방향복합한다. 물관의 바같 모양은 약간 각형이고 접선방향직경은 80~90㎛이다. 물관상호간벽공은 대상벽공이 명확하며 물관방사조직간벽공은 물관상호간벽공과 비슷하고 벽공이 방사조직의 전체에 걸쳐 분포한다. 축방향유조직은 산재상 또는 짧은 접선상이다. 계단상천공을 가지며 bar의 수가 매우 많아 약 30~40개
화약 무기의 역사글을 쓰며....전공과 관련되어 전통문화의 한 분야를 조사 작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전공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전통문화에 쉽게 접목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작업으로써 기계공학 분야의 학생으로써 전통문화 기계분야에 대해 다각적인 생각을 요하였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과거나 지금이나 그다지 과학기술 분야에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고 사람들을 천시하는 경향으로 현재까지 기피현상이 만연하고 있으면서 발전속도가 빠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계와 관련되어 생각하여 볼 때, 소재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정약용의 거중기, 이순신의 거북선, 그리고 화약무기의 세 가지를 심사숙고 끝에 화약무기에 대해 조사 작성하기로 하였다. 다소 화공과와도 관련되어 있겠지만, 기계공학과와도 무시할 수 없는 연관이 있는 분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화약무기의 대해서 작성함에 있어 최무선이라는 인물을 결코 지나칠 수 없어 최무선에 대해 알아본 후 우리나라의 화약무기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화약무기의 발명가 최무선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하여 본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미 화약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배우기로 하여 중국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후한 대접 등 그의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감동시켜 흙으로부터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火箭) 등을 만들어 실험하여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같은 동작 원리를 갖추고 있다. 주화는 1448년(세종 30) 이전에 불린 이름이고, 그 이후에는 ?신기전(神機箭)?으로 불렸다.이러한 주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쓰인 것은 조선 세종대로 당시의 북방개척계획에 의해 김종서, 최윤덕 등의 장군들이 4군 6진의 개척을 할 때 이용된 것으로 세종실록의 관련 자료를 보면 세종 29년(1447년)11월 22일과 12월 2일 단 이틀동안의 보급품 목록에 소주화 24,600개와 중주화 8,840개 그리고 대주화 90개라는 엄청난 양의 화약 로켓 무기가 사용될 정도로 그 활용도가 높았다. 이는 그 당시 여진인들의 문명 수준과 그들의 주된 전법을 고려한 것으로서, 조선군의 주력은 보병 중심이고 여진족의 주력은 기병 중심이니 강은 건너 백병전을 벌이면 아군의 피해도 상당할 터이니 넓은 강을 단숨에 넘어 적진을 불태우고 또한 심리적인 효과까지도 기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세계 최초의 다연장로켓 무기 ― 신기전(神機箭)《병기도설》에는 신기전을 대?산화?중?소 신기전의 4종류로 나누어 그 크기와 구조를 자세히 설명하였다.신기전의 종류대신기전 ― 대신기전의 약통(추진제통)은 종이로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2척(尺) 2촌(寸) 2분(分) 5리(釐)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69.5cm이다. 겉둘레는 9촌 6분(9.55cm)이다. 약통의 양끝은 종이로 붙이고 그 위를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통의 아래 바닥의 중앙에는 지름 1촌 2분(3.75cm) 크기의 구멍, 즉 분사구멍(노즐)이 뚫려 있다. 약통은 길이 17척(531.08cm), 윗지름 1cm, 아래지름 2.95cm의 쇠촉이 부착되지 않은 대나무의 위 끝부분에 묶어 놓았고, 아래 끝부분에는 깃(안정날개)을 달았다. 발화통까지 포함된 대신기전의 전체길이는 약 5.6m가 되는 대형 로켓이다. 대신기전은 주로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서 압록강 건너에 있는 이민족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사정거리는 1.5~2km로 추측된다.중신기전 ― 중신기전은 대나무를 이용한 길이 4촌 5분(14.0 데에 반해 신기전은 장착된 화약의 폭발력으로 엄청난 살상효과와 심리적인 타격효과를 통한 확실한 적 제압능력을 보여 준다.다목적 병기대포와 달리 발사음이 적었으므로 전쟁시 신호용이동식 로켓 발사대 ― 화차(火車)본격적으로 연구 개발된 것은 문종대로서 이동식 로켓 발사대인 화차의 크기는 길이가 2.3m, 폭이 2.1m, 차체의 높이가 1m이며, 차체 위에 조립되는 신기전 발사틀은 높이 73m, 폭이 1.2m, 두께가 28cm이며, 지름 4.7cm 구멍 100개가 뚫려 있어 이 곳에 중?신기전 100발을 꽂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다. 또한 신기전 뿐아니라 총통을 끼운 총통기화차도 있어 총통에서 화살과 철환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화차는 모두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발사각도는 0~43°까지 조정하여 신기전의 사정거리를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일반 수레와는 달리 바퀴측 위에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수레판과 가자를 장치하기 때문에 일반 수레에서의 발사각보다 사정거리를 약 1.5배 연장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화차는 평상시에는 가자(架子)를 내려놓고 일반 수레처럼 사용할 수 도 있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병기로 많이 보급되어 경중에 50량, 변경에 80량, 도합 130량을 만들어 비치하게 되었고 문종 1년(1451년)까지는 전국에 수십량이 비치되었다.화차가 쓰인 대표적 전투임진왜란당시 행주대첩때 40여대이상의 화차가 쓰임. 전투결과 일본군의 사망은 1만에 이르렀고 사령관은 화차로 인해 중상을 입음. 조선군 총사령돤 권율은‘행주산성의 승리는 우리가 화차를 가지고 있었음이다’했을 정도.휴대용 소형화기세총통(細銃筒)조선 세종 때 서북변경의 야인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개발된 15cm 규모의 휴대용 소형 화기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국 유일의 최소형 휴대용 화기.소화포(小火砲)?세화전(細火箭)이라고도 한다. 세종이 국방정책의 일환으로 화약의 개량과 화기의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을 연구하게 한 결과 창제된 것이다. 휴대와 발사에 편리할 뿐 아니라, 유사시 대적(對敵)하여 고 손으로 약선(藥線)을 점화하여 발사하는 유통식(有筒式) 화기이다. 1570년대 후반에 제작된 승자총통을 개량한 것으로서, 오늘날 소총에 이용되는 강선(腔擧)의 원리를 적용하여 통신(筒身)을 휘도록 만들었다.차승자총통 (次勝字銃筒)길이 56.8 cm. 총통길이 35.5 cm. 약실길이 12.3 cm. 손잡이길이 9 cm. 지름 1.6 cm.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통신(筒身)에는 죽절(竹節)이 6조 시조(施條)되고, 약실은 약간 도톰하게 처리되다가 손잡이에서부터는 가늘게, 끝 부분에서는 대선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특히, 통신은 약실쪽 죽절 제3조로부터 4 ?5조를 완만하게 휘게 하였는데, 이는 이제까지의 제조법인 곧은 통신보다는 발사과정에서 화약의 힘이 가중하여 탄환이 장거리에 미치게 한 것으로, 오늘날 후장식 소총의 강선(腔線)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소총통 (小銃筒)1591년(선조 24) 주조되었다. 청동제(靑銅製)이며, 크기는 전체길이 75.5cm, 총신길이 50.5cm, 약실길이 15.4cm. 손잡이길이 9.6cm, 구경 1.6cm이다. 조선 선조 때 김지(金訃)가 창제한 승자총통(勝字銃筒)?차승자총통(次勝字銃筒)에 이어 발전한 것으로, 총신(銃身)이 승자총통보다 길고 약간 휘게 만들어 탄환이 장거리에 미치게 함으로써, 그 후 등장한 후장식 소총의 강선원리(腔線原理)를 창출하게 하였다. 총신에는 입구 가장자리 띠를 제외한 죽절(竹節) 7조를 시조(施條)하고, 약실은 약간 도톰하게 하다가 손잡이에 이르러서는 가늘게, 끝 부위는 띠선(帶線)을 둘러 마무리하였다.조선시대의 화포대장군포 (大將軍砲)포의 위력이 대장군의 지략과 위엄에 비길 만하다 하여 대장군포라 일컬어졌다. 총 8개의 죽절이 있으며, 그 간격이 다른 포와는 다르게 넓고 원통형으로 모가 나고 깊은 것이 특징이다. 약실은 8번째 마디에서 점차 굵어지다가 다시 항아리 밑둥처럼 줄어들고 끝은 막혀 있으며, 약실 중앙 위쪽에는 화약에 불을 붙이는 선혈(線穴)이 뚫려 있다. 2번째 죽절과 마지막 죽절에는 좌우오면서 전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선조 25년(1592)에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졌으나 명종 때 이미 사용되었다.불랑기자포는 발사 틀 구실을 하는 모포(母砲)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발사하는 자포(子砲)로 나누어진다. 전체적으로 몸통이 길고 포구(砲口)쪽이 가는 형태이며, 몸통 윗부분에는 가늠쇠가 있고 포구 위쪽에 가늠자가 달려있다. 원래 바퀴는 없었으나 고종 5년(1868) 신헌(申櫶)에 의해 4바퀴가 달린 마차를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임진왜란때 평양성 탈환에 널리 활용되었으며 신미양요(1871)때는 미국의 군함에 맞서기 위해 초지진과 광성보에 배치되기도 하였다.총통 (銃筒)화포는 그 포신의 크기와 화약 사용량, 탄환 수, 사정거리를 구별하기 위해서 천(天), 지(地), 현(玄), 황(黃) 등으로 불리웠다종 류태 종 조세 종 조임 진 왜 란 당 시길 이구 경발 사 체사정거리사정거리개 량 점철 탄전천자총통400보(510m)1,300보(1,659m)화약소모감소4,000m1,800보(2,300m)130cm12.8cm대장군전, 철환지자총통500보(638m)900보(1,147m)같은양의화약2,500m추정1,000보 추정91cm10cm장군전, 철탄200개, 조란환현자총통500보(638m)800보(1,020m)같은양의화약3,000m추정900보(1,147m)76cm6.7cm차대전, 철환, 철탄100개황자총통600보(1,020m)800보(1,020m)같은양의화약3,000m추정900보추정53cm4.3cm철탄, 피령전천자총통 (天字銃筒)태종 때 처음으로 발명되어 사용된 이래 더욱 연구 ?개발되어, 포의 크기에 따라 가장 큰 것부터 차례로 함께 개발된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 총통 중에서도 가장 크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李舜臣)이 거북선 등 전선(戰船)에 배치하여 왜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사장치는 포구에 장전한 포탄에 화승(火繩)으로 인화하여 발화 폭발시키며, 포탄은 화전(火箭)처럼 날아가는 대장군전(大將軍箭)으로, 그 무게가 30 였다.